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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강 아모스가 본 세번째 묵시(7:7-9)

by 【고동엽】 2022. 4. 16.

제42강 아모스가 본 세번째 묵시(7:7-9)

 

7:7-9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아모스가 본 세번째 묵시는 다림줄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림줄이라는 단어가 네 번 반복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아모스가 본 묵시의 핵심이 바로 다림줄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절씩 읽어가면서 좀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하나님께서 세번째로 아모스에게 묵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꿈, 묵시,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표적을 통해서, 또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뒤에는 하나님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계시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성경에서만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성경의 완전성이라고 합니다. 신구약 66권 안에 우리가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구약 66권 외에는 다른 계시가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들에게 더 이상의 다른 계시가 필요 없음을 못박고 있습니다. 신구약 66권의 제일 마지막 권인 요한계시록 22:18을 한번 찾아보십시다.
(계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우리가 성경의 완전성이라고 할 때 꼭 알고 지나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성경 이외에 어떤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몰몬 교에서는 성경 이외에 몰몬 경이라는 것을 내세웁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성경 이외에 워치타워 협회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주장들을 내세웁니다. 또 한때 우리 나라에서 물의를 많이 일으켰던 다미 선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주장했습니다. 자기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1992이라는 숫자를 자꾸 보여주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도 없는 것을 자꾸 갖다붙이는 것이 이단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꿈의 노예가 되어서 조금만 이상한 꿈을 꾸어도 괜히 걱정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괴로워하는 꿈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마귀의 장난입니다. 절대로 꿈의 노예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조 때 명신이었던 성현이라는 학자가 쓴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를 목전에 둔 세 젊은이가 기분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이 꾼 꿈을 해몽하기 위해서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는 출타하고 그의 아들이 대신해서 손님을 받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꾼 꿈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번째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거울이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두번째 젊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강풍에 꽃이 꺾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세번째 청년도 말했습니다. "나는 허수아비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깨어지고, 떨어지고, 거꾸로 매달리는 꿈을 꾸었으니, 걱정할 수밖에 없지요. 점쟁이 아들은 그 꿈들을 이렇게 해몽해주었습니다. "당신네들은 다 과거에서 낙제할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아예 다른 길로 접어드세요." 세 젊은이는 그 소리에 풀이 죽어서 점쟁이 집을 나왔습니다.
그때 출타했던 진짜 점쟁이가 들어오다가 낙심해서 나가는 세 젊은이를 보고서 어떤 영문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꾼 꿈과, 또 점쟁이 아들이 해몽해준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진짜 점쟁이가 무릎을 탁 치면서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당신들은 지극히 좋은 꿈들을 꾸었습니다. 꿈이란 악몽길조를 대 원칙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좋지 못한 꿈을 꾸고 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들에게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들은 낙심했다가 진짜 점쟁이의 말을 듣고서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들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 때문에 약해지지 마세요. 꿈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의 말씀을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가 묵시 가운데 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림줄을 보았습니다. 다림줄은 무엇을 하는 데 쓰이는 것입니까? 담을 쌓을 때 수직을 맞추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담이 똑바로 되었는가 안 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다림줄입니다.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심판주로 서셨다는 말씀입니다. 담이 바른지, 바르지 않은지를 심판하시고 판단하시는 분으로 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만약에 담이 과도하게 기울어져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그것을 사정없이 허물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모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7: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과연 아모스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묵시를 제대로 보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아모스는 자기가 본 것이 다림줄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물론 쌓은 담도 보았습니다. 주께서 서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묵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무엇입니까? 다림줄입니다.
그렇지만 아모스는 이 다림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의미를 아모스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보세요. 첫번째 묵시와 두번째 묵시에서는 하나님께서 물어보지도 않으셨고, 또 따로 그 묵시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황충이 땅의 풀을 먹는 것은 메뚜기 재앙입니다.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는다는 것은 가뭄이나 더위를 의미합니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다림줄을 들고 서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좀더 깊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그 다음에 설명이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다림줄"(   , "아나크")이란 단어와 "내가"(    , "아노키")라는 대명사가 서로 발음이 비슷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봅니다. "눈에 눈이 들어갔으니 눈물인가, 눈물인가?" 여기에서 앞에 나오는 눈과, 뒤에 나오는 눈은 발음은 같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다르지요. 눈물과 눈물도 발음은 같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또 제가 물어봅니다. 머리를 감을 때 제일 먼저 감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예, 눈을 제일 먼저 감지요. 감는다는 말이 음은 같지만 머리를 감는 것과 눈을 감는 것은 서로 의미가 다릅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는 도중에 신랑이 신부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보, 사실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소. 나는 두 눈 중에 하나가 나의 눈이 아니라오. 나는 애꾸눈인데 한쪽 눈은 개 눈을 박아넣은 것이라오." 그 소리를 듣고 신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것은 결혼하기 전에 내게 고백을 했어야지 지금 와서 그런 고백을 하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서 신랑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신부는 완전히 속았다는 마음이 들어서 신혼 여행 중에도 마음이 편치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내가 당신에게 이미 고백을 했었소. 내가 당신에게 처음 보낸 연애 편지에서 나는 내가 애꾸눈이라는 사실을 이미 다 고백을 했었소."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신부는 자기가 신랑의 그런 고백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신혼여행을 하는 둥 마는 둥 집에 와서 신부는 신랑이 자기에게 보낸 연애 편지들을 다 꺼냈습니다. 그리고 제일 첫 편지를 찾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영순씨. 나는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눈에 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신랑은 자기가 두 눈이 아니고, 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으로 고백을 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우스개 소리지만 이런 것을 우리가 동음이의어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었다"는 말은 "내가 내 백성 사이로 들어가겠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마치 그 옛날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치실 때와 같습니다. 죽음이 있을 것입니다. 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정이 다릅니다.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라." 왜 그렇습니까? 이제는 담이 너무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제불능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번째 묵시와 두번째 묵시에서는 아모스가 중재를 합니다. 그러나 세번째 묵시에서 아모스의 중재가 더 이상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담이라고 하는 말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수준이 이미 회생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기울어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 옛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실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의인 50명에서 시작해서 10명까지 내려갔지만 그 땅에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또 바벨론의 벨사살 왕 당시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하나님의 저울추에 달아서 기준에 미달된 것입니다.
사울이 교만할 때 하나님은 사울에게 주셨던 은총을 빼앗아서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세우셨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자기 사명에 충성하지 못할 때 그것을 빼앗아서 다섯 달란트를 맡은 자에게 주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저버릴 때 하나님은 구원의 복음을 이방 민족에게 주셨습니다. 아모스 당시에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용서치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림줄로 측량해서 도저히 가능성이 없을 때, "메네 메네 데겔"을 하여서 무게가 차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심판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농부가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삼 년이 되었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는 찍혀 불에 던지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교훈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입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앞으로는 너에게서 열매를 먹을 자 없으리라." 얼마 뒤에 제자들이 그 나무를 보았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나무는 완전히 말라버렸습니다.
우리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되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즉 찍혀서 불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죄를 뉘우쳐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만 하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주홍빛처럼 붉다 할지라도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히스기야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듣고 네 눈물을 보았으니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너와 이 성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그 옛날 요나의 경고를 받았던 니느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들은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는 회개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저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시간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주신 참으로 귀한 시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이 맑아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무디어지고 강퍅해져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지 못하는 그 옛날의 바리새인처럼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물질의 우상, 육신의 정욕, 안일, 명예심, 시기, 질투, 교만, 나라 위해 기도하지 못한 죄, 전도하지 못한 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한 죄, 남을 비판한 죄, 주신 사명에 충성하지 못한 죄, 위선, 거짓, 의심, 영적 가난 등 하나도 남김없이 끄집어내서 회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경고하시고, 또 경고하시고, 몇 번 경고를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듣지 아니할 때는 하나님의 무서우신 심판이 우리에게 있을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8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라."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고, 만 백성 가운데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백성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징계를 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은 더욱 크실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배반할 때 받는 고통은 더욱더 큽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는지를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일단 이 말씀을 하시게 되면 그때는 엄청난 결과가 일어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치시면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떠한 것도 감히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봅니다.
(7:9)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삭의 산당들"이나 "이스라엘의 성소"는 종교적인 중심지를 가리킵니다. 또한 "여로보암의 집"은 정치적인 제도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이든지, 정치적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것이 훼파되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끝장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히스기야와 니느웨처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벨사살 임금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결국은 심판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다림줄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생각과 행동이 바른지, 바르지 못한지를 가르쳐주는 다림줄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활의 척도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서 내 생활가운데 기울고 굽은 것이 있으면 시정하고 바로잡아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주님의 다림줄을 무시해 버리고,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주장대로만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다림줄이 되어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 스스로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매일 읽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말씀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도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와 같다고 했는데, 나는 과연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지키려고 마음먹고 있는가?" 때가 가까울 때에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붙드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의 삶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아니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고 예수님께 칭찬받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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