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강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는 친족
룻기 4:5∼6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나오미의 친족으로 성경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무개는 자기에게 이득이 될 것을 생각하고 나오미의 땅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내용이 법률적인 효력을 얻기 위해서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4: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그러니까 증인들 앞에서 "이제 내가 삽니다"라고 선언을 해야 합니다. 법정이라든지 국회를 보면 땅땅하고 의사봉을 때립니다. 의사봉으로 때려야만 효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 법률적인 효력이 발생하려면 "내가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증인입니다"하고 선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선포를 하기 바로 직전에 보아스는 급하게 말합니다. 기업 무를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책임도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4:5,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당신에게는 살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엘리멜렉의 기업을 계속해서 이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듣게 되었을 때 아무개라고 하는 친족은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돈을 주고 땅을 사면 나오미와 룻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을 계속 부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룻에게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자기가 돈을 주고 산 땅이지만 그 땅이 결국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룻에게서 나온 아이에게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엘리멜렉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룻에게서 아이가 많이 나오게 되면 자기의 아이들이 받게 될 기업의 분배가 더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후손들과 다투게 될 일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할 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기업 무르는 자는 적어도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가장 가까운 친족이어야 하고, 둘째는, 잃어버린 기업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족은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자기에게 돌아오게 될 손해에 대한 생각이 앞서 기업 무를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4:6,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결국 첫번째 기업 무를 친족인 아무개는 포기를 합니다. 나는 권리도 책임도 다 포기하겠으니 나의 무를 권리를 당신이 취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책임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살기 좋고 화평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책임은 생각하지도 않고 늘 권리만 주장하기 때문에 살벌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은 미합중국입니다.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나라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 가운데 특별히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두 민족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미국의 상권을 전부 장악했습니다. 부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만 쓰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모두 본국으로 보냅니다. 이스라엘이 중동에 무슨 돈으로 자기 나라를 건설하겠습니까? 미국에 있는 이민자들이 자기가 번 돈을 절대로 자기가 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도로를 건설하고 항만도 짓고 건물도 짓고 키부츠라고 하는 집단 농장도 세우는데 무슨 돈으로 하느냐 하면 미국에 있는 이민자들이 보내온 돈으로 합니다. 그래서 본국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 있는 유대인들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또 특별한 민족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입니다. 일본은 땅이 얼마나 좁습니까? 거기다가 인구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의 시책은 될 수 있으면 외국에 나가서 살라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면 낯설고 물설고 언어와 관습이 다른 곳에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정부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을 다 지원해줍니다. 정착금을 대줍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일본 사람들은 자기가 일본 사람이라는 긍지가 대단히 강합니다. 자부심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정부가 지원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식입니다. 나가서 살든지 죽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초기에 미국 이민을 가서 얼마나 고생들을 많이 했습니까? 다행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부지런하니까 악착같이 일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번 돈을 우리 나라에 보내겠습니까? 아닙니다. 자기들이 고생할 때 우리 나라에서 도와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처음에 미국에 이민갈 때 자기들이 살던 집을 팔아도 그 돈을 다 가지고 나갈 수 없도록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재산도 마음대로 못 가지고 나갔습니다. 마음속에 조국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든지, 가정이든지, 교회든지, 국가든지 간에 항상 권리에 앞서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되어야 복받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가 친족으로서 불쌍한 나오미의 가정을 도와줄 수 있을까?"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친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무개라고 하는 친족은 권리만 생각했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은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자기는 권리도 책임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무개라고 하는 친족을 아주 못된 사람으로 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해여 무르지 못하노니." 무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안 한다는 것과 못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안 하는 것은 할 능력이 있는데도 할 의사가 없는 것이고, 못하는 것은 원하지만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당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친족 아무개는 물론 마음속에 책임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 사람의 약함을 탓하기에 앞서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도 생각을 했습니다만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에 순종을 해서 어머니의 말대로 모압 지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르바를 나쁘다고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오르바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아무개라고 하는 친족도 할 능력만 있으면 했을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약함을 감싸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대머리였던 사람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엘리사가 대머리였습니다.
왕하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리니까 곰이 나와서 아이들을 다 물어죽였습니다. 그런 대머리를 볼 때도 놀리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께 얼마나 기도를 했으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로 "엘리사야, 괜찮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셨겠습니까? 그러니까 머리가 빠질 수밖에 없지요. 또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자꾸 외출합니다. 탓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주님 앞에 눈물을 흘렸으면 "괜찮다 내 아들아"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손길로 자꾸 쓰다듬어주셨겠습니까? 우리가 대머리를 볼 때도,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는 사람을 볼 때도 외모를 흉보지 말고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 들어주시고 복을 주시는 겁니다.
보아스처럼 내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책임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서 다른 사람의 약함을 탓하고 놀리지 말고 언제나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주고 감싸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23 강 성문에 앉은 보아스 (0) | 2022.04.15 |
---|---|
제 24 강 네가 아니면 내가 무르리라 (0) | 2022.04.15 |
제 26 강 기업 무를 권리를 얻은 보아스 (0) | 2022.04.15 |
제 27 강 보아스의 선포 (0) | 2022.04.15 |
제 28 강 백성과 장로들의 축복 (0) | 2022.04.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