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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강 마지막을 사는 지혜(9:25-26)

by 【고동엽】 2022. 4. 14.

제98강 마지막을 사는 지혜(9:25-26)

 

9:25-26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천사 가브리엘은 먼저 다니엘에게 당부했습니다. 주의를 집중해서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잘 듣고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일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 가운데 주로 두 가지를 간구했습니다. 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칠십 년 동안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재건토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니까, 다니엘은 먼저 주의를 집중해서 들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주어집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칠십 이레가 시작되는 시점은 언제입니까?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칠십 이레가 아직까지는 시작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이 말씀을 받았을 때는 주전 500년대였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서 2장에 기록된 대로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중건을 명할 때가 주전 400년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일 백년 뒤에 칠십 이레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여기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이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공생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때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합치면 육십 구 이레입니다. 이것은 몇 년을 뜻하지요? 사백 팔십 삼년을 뜻합니다.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가 주전 446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삼십 세에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후 30년경이었습니다. 이 두 기간을 합치면 대략 육십 구 이레가 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일곱 이레 동안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면서 겪었던 많은 곤란을 볼 수 있습니다. 도비야, 산발랏을 위시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공작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첫 일곱 이레가 지났을 때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드디어 중건이 되었습니다.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여기서 "거리"는 사람이 사는 주거지 사이로 난 길을 가리킵니다. 도시가 다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해자"는 도랑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는 겨울철에만 비가 옵니다. 더운 여름철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건조합니다. 그래서 수로를 만들어서 비가 올 때 한 곳에 모아서 그것으로 비가 오지 않을 때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시의 모습을 이제는 제대로 갖추었다는 말씀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25절에서는 예루살렘 성이 중건되고 난 뒤에 육십 이 이레가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 왕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그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바로 얼마 뒤인 3년 뒤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또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승천을 가리키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늘 나라로 가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자기들의 후손이 그 피 값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대로 죄 값을 받은 것입니다. 주후 칠십 년에 로마의 장군 디도와 그의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훼파시켰습니다. "그의 종말은." 여기서의 "그"는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로마의 장군 디도와 그의 군사들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완전히 황폐해지도록 철저하게 파괴를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오백 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살육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벽에는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마24:1-2에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예고하셨습니다.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헤롯 성전을 가리키면서,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감탄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다시금 황폐해짐에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때부터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이나 나라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에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스라엘은 다시금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지막으로 남은 한 이레가 곧 시작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십 구 이레부터 마지막 한 이레까지 그 중간에 공백기가 있습니다. 그 공백기 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며, 부활하신 뒤에 승천하시며, 또 다시 예루살렘 성전과 성읍이 파괴되는 것 등 이런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공백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27절에서 말씀하는 마지막 한 이레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이레를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벧전4:7-11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한 이레를 우리가 눈앞에 두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베드로는 세 가지 방면으로 우리 자신들을 늘 점검해 볼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7절 말씀에 있는 대로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둘째로 이웃을 향하여 점검해 볼 것이 있습니다. 8절과 9절 말씀에 있는 대로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향해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10절 말씀에 있는 대로 봉사하는 삶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깨어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서는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충성스럽게 봉사해야 합니다. 기도, 사랑, 봉사의 세 가지를 늘 점검하면서 사는 것이 마지막을 대비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11절 끝 부분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이 아침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봉사를 하는 것도 내 이름과 명예가 높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우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열심히 기도하시고, 이웃에게 많은 사랑도 베풀어주시고, 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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