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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강 칠십 이레가 지나면(9:24)

by 【고동엽】 2022. 4. 14.

제97강 칠십 이레가 지나면(9:24)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명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칠십 이레의 예언을 주셨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에 속합니다. 그러나 22절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칠십 이레의 예언을 깨닫게 하시려고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네 백성과." 다니엘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들입니다. 다니엘은 7장과 8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상들을 보았습니다. 7장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네 짐승들을 보았습니다. 사자와 같이 생긴 짐승, 곰 같이 생긴 짐승, 표범 같이 생긴 짐승,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주 무섭게 생긴 짐승을 보았습니다.  이 네 짐승은 세상 나라들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메대와 바사, 헬라, 그리고 로마였습니다. 이들 네 나라들은 모두 이방 나라들입니다. 8장에서는 다니엘이 두 짐승을 보았습니다. 수양과 수염소입니다. 수양은 메대와 바사이고, 수염소는 헬라 제국을 의미했습니다. 역시 이방 나라에 대한 이상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 나타난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 곧 유대인들을 위하여 주어진 말씀입니다.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여기서 "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에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으니까, 이곳을 "거룩한" 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한 것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한 것임을 먼저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이레라고 하는 말은 우리 나라 말로 무슨 뜻입니까? 찬송가 56장에 "지난 이레 동안에 예수 인도했으니"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레는 칠일, 곧 한 주간을 뜻합니다. 그래서 칠십 이레라고 하면 마치 칠십 주를 뜻하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레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래 뜻은 단순히 일곱이라는 수치를 가리킬 뿐입니다. 칠십 번이 일곱이면 모두 몇입니까? 사백 구십입니다. 그러니까 사백 구십 일이 될 수도 있고, 사백 구십 주가 될 수도 있고, 사백 구십 달이 될 수도 있으며, 사백 구십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서 사백 구십 년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생각됩니다.
본문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하게 된 시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밤에 잠이 안 와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까?
9:2의 말씀을 보십시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서 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칠십 년이었습니까? 오십 년이나 백 년으로 하지 않고, 칠십 년으로 정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을 방황했습니다. 사십 년 동안 방황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사십 일 동안 그곳을 정탐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인 열 명은 이스라엘 회중에게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벌로 그들이 정탐했던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 것도 그 수치에 무엇인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겠습니까?
대하36:20-21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칠십 년을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땅은 황무해서 "안식년을 누림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안식년은 토지를 육 년 동안 갈고 일년 동안 쉬는 것을 뜻합니다.
레25:1∼4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넘어가서 레26:34∼35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육 년을 경작하고 일년을 쉬도록 되어 있는 안식년의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대로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레26:43입니다.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들이 살았던 가나안 땅은 안식을 누린 것입니다. 그러면 칠십 년 동안 안식을 한꺼번에 누린 것이 몇 년의 기간에 대한 안식입니까? 사백 구십 년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그 동안 칠십 이레, 즉 사백 구십 년이 흐르기까지 안식의 규례를 지키지 못해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칠십 년 동안 이스라엘 땅이 안식을 누리도록 황무케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금 오늘 본문에서 과거의 그 기간에 해당되는 만큼 칠십 이레로 이스라엘의 앞날에 대한 기한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칠십 년이 있고, 그 앞에 칠십 이레와 그 뒤에 칠십 이레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칠십 이레는 사백 구십 년으로 해석을 해야 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칠십 이레의 기한, 즉 사백 구십 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은 여섯 가지를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세 가지의 부정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그 대신 세 가지의 긍정적인 요소가 오게 됩니다. 우선 이것을 설명하기에 앞서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칠십 이레에 대한 예언을 받은 지도 이미 이천 년이 더 흘렀건만, 어떻게 사백 구십 년으로 모든 역사가 설명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2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칠십 이레는 세 시기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5절에 있는 대로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 이 둘을 합치면 육십 구 이레가 지나갑니다. 육십 구 이레가 지나가고 나면, 27절 말씀에 있는 대로 마지막 한 이레가 나옵니다. 그러나 26절 말씀에 보면 육십 구 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에 계산되지 않은 중간 부분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중간 부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차차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칠십 이레가 지나고 나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세 가지 부정적인 요소가 사라집니다.
첫째는 "허물이 마치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칠십 이레가 지나고 나면 저들은 자신들이 배척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죄가 끝나며"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통해서 다른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히려 이방 나라들에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이방신들을 문란할 정도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결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칠십 이레가 지나가면 이러한 죄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셋째는 "죄악이 영속되며"입니다. 유대인들이 그 동안 하나님 앞에서 행해온 모든 불의한 일들도 사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했으니까 죄악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칠십 이레가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다 영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칠십 이레가 지나면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부정적인 요소들은 사라지고, 그 대신 긍정적인 세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불의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입니다. 이상과 예언에서 말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구름 타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도 그때는 성취될 것입니다. 셋째는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옛날에 기름부음을 받는 직분에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인정치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칠십 이레가 지나고 나면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받들어 섬기면서 그 앞에 저들의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상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가 이루어지는 것은 칠십 이레 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이 마쳤습니다. 죄도 끝났습니다. 죄악도 영속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을 매순간마다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경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구속의 은총을 노래하면서 감사와 감격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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