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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직 헌신 예배 /창조적 소수 /민14:1-10 /마26:6-12

by 【고동엽】 2022.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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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직 헌신 예배
창조적 소수
민14:1-10 마26:6-12
 
 
아주 큰 교회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바 가 있습니다. ‘교인들은 수천 명이 되지만 실제로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몇 사람 안되요’ 개신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아는 천주교의 어떤 평신도 회장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오늘 「창조적인 소수」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교회에 임명된 제직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 하는 창조적인 소수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토인비는 일찍이 “인간의 역사는 많은 사람에 의해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소수의 신념과 용기에 의해 이룩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교훈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70년간 노예 생활을 하게 되는 비전 참절한 참성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가 말한 비통한 일은 죄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요 그의 구원의 노래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남은 백성으로 인해 생겨진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남은6 백성을 ‘구르터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28: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남은 백성들을 통해 고토를 회복하시고 그 민족을 다시 일으켜 주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2. 여호수아와 갈렘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 과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40년 가까운 광야의 시련을 겪은 이스라엘은 꿈에도 소원인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주민과의 격돌에 대비하여 충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을 차출하여 적진을 탐색할 스파이를 조직 파견하였습니다.
이들 열 두명의 수색 대원들이 제출한 보고서는 두 가지였다. 통일된 보고서가 아니고 두 갈래로 갈라진 보고서였던 것입니다. 열 명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당신께서 보내신 땅에 가 보았더니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지방의 과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키가 장대 같았습니다. 그리고 성과 도시들은 정말 굉장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 사람들 보기에도 그랬을 것입니다"(민13:25-공동 번역)
 
이와 같은 비관적 보고에 접한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옛날 노예 시대,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며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이른바 패배주의적 기색에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목도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울분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돌아다니며 정탐하고 온 땅은 기막히게 좋은 땅이오. 우리가 야훼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우리는 그 땅으로 들어가 차지할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야훼를 거역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들은 이미 우리의 밥이오"(민수기 14:7- )
 
모세와 아론은 다수의 의견보다는 소수이지만 하나님 신앙과 용기에 넘친 의견을 따라 가나안에 진입하였습니다. 정말 위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는 수에 의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용기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다.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더 좋고 작은 것보다 큰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크고 작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신앙과 그에 근거한 용기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이 성서의 교훈입니다.
교회에서도 교회를 다스리는데 민주주의적인 수단을 응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수의 의견을 중요시하여 다수 가결로 안건을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수의 의견이 좋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다수의 의결로 결정되는 거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브라잇(J. Bright)은 "하나님 나라"라는 명저를 남겼다. 그는 이 저서에서 모세의 공헌을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하였습니다. 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 ②.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않았다는 것, ③. 하나님은 인간과 그 역사의 섭리자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모두 같은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말과 다르면 세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시는 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3. 예수님과 마리아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있을 때 유대인 지도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대접을 받으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 여인이 참예하였다. 그 여인은 손에 옥합을 들고 있었다. 이 여인은 그 옥합에든 기름을 예수의 머리에 쏟아 부었다. 그 기름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제자들은 어찌하여 이 값진 기름을 허비하느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얼마나 빛날 일이겠는가? 합리적인 항변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머리에 바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값의 기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초대한 시몬은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 마땅치 않게 여기며 그런 부정한 여인을 상대하는 예수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자신은 전혀 다른 견해를 보이셨다.
 
"이 여자는 나에게 기특한 일을 하였는데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26:10- )
 
예수는 공개적으로 인자의 고난의 비밀을 세번씩이나 언급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이 여인 한 사람만이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때를 보아 예수의 장례에 대비하여 향유를 부은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장례 예식에는 塗油式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법정에서 반로마, 반체제 인사로 처형될 예수의 장례가 격식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에 이 여인은 예수의 생전에 도유식을 행한 셈이다.
 
신학자 틸리히(P. Tillich)는 이 여인의 행위를 "거룩한 낭비"라고 정의했다. 이 거룩한 낭비가 역사의 추진력이었다고 규명했다.
역사가 토인비(A. Toynbee)는 인류의 구원은 바로 이 여인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성취된다고 말하였다. 교회의 역사는 이 여인과 같은 전적인 헌신의 사람들에 의해 존속되었고 또 부흥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 여인은 인자의 고난의 비밀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에 대비하여 향유를 쏟아 부음으로써 주님의 장례를 위해 큰 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결과도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지만 이 여인 한 사람만은 예수의 말씀의 뜻을 헤아려 그에 대비하며 살았던 것이다.
 
4. 바울과 바나바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구원론"을 체계화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의 신앙과 사상에 근거하여 신약성서는 집필되고 편찬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전반부는 반 그리스도적인 삶이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에 반기를 들었으며 심지어는 살해 모의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반 그리스도 박해 운동에 주력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에 항거하여 사울이 바울이 되는 다메섹 사건을 입증하며 바울을 보호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나바였다. 바나바는 다메섹 사건의 진실을 믿고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옹립하였다. 바울 이전의 사울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다메섹 사건 이후의 바울을 버리려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바울을 지켜 준 사람이다. 그리고 그와 동역자가 되어 그리스도교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바울의 배후에는 두 사람의 인격이 있었다. 하나는 예수요 다른 하나는 바나바였다. 예수는 바울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불러내시고 바나바는그의 보호자가 되고 그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바나바가 바울을 보호하는 일은 아무도 찬동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험만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하나님의 역사에 충실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을 지켜 주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 만남이 없었던들 오늘의 바울이 있을 리 없는 것처럼 바나바 없는 바울은 상상 조차할 수 없다. 바울은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바나바로 말미암아 성서적인 인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출에는 그만한 조언자 숨어 있게 마련이다. 그 조언자들은 많은 적대자들의 오해와 반대에 부딪치며 그 일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실이 이 땅에 구현되며 위대한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선교에 있어 바울이 없는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로 승화 인류의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 것은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메섹 사건과 바나바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도 기둥이라 해도 잘못되지 않는 견해이다.
 
가나안 진입에 있어서의 여호수아와 갈렙,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그의 몸에 부은 여인, 그리고 바울을 그리스도의 참 증인으로 끝까지 비호해 준 바나바, 이들의 경우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은 다수 편에 서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대로 행동했다는 사실이요, 위험에 직면하여 피해 가지 않고 정면으로 도전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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