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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이 준 교훈! (눅 24:1-10)

by 【고동엽】 202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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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이 준 교훈! (눅 24:1-10)


기독교는 독특한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 불고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서 기독교를 여러 가지 면에서 모방해 가고 있습니다. 찬불가도 만들엉 부르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 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갖고 요즘에는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습니다.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의 것을 모방한다고 해도 한 가지만은 모방할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불교에는 불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탄생하게 된 것은 이 부활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개중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죽은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이 그랬습니다. 방부제를 들고 아침 일찍 무덤을 찾아간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방부제를 뿌리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가 보았더니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시고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그제서야 예수께서 죽은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이 모양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인간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무덤도 있고 석가의 무덤도 있는데 왜 예수의 무덤은 없으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찾지 않고 성현들 가운데서 성자 예수를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를 4대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를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4대 성인의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성인으로 섬기는 종교도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로 피택된 사람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거침없이 대답하기를 "예, 예수님은 4대 성인 가운데 한 분이시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같은 신앙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부자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곧바로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부자가 되고 형통하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아지고 건강해지고 잘 되면 다 축복이고 은혜라고 쉽게 믿어 버립니다. 예수 알기를 부자 예수로, 해결사 예수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대학에 낙방하고 머리가 나쁜 것이 모두 복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현세적이고 현실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나 결과만을 중시하고 모두들 성급하게 성공 위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연일 일어나고 있는데 살펴보면 모두 이런 생활 태도들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둔한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 보셨습니까?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 중에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둔한 사람들은 더 선량한 사람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가 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면 모두 꾀가 많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위기에 대처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머리가 명석하고 좋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병든 사람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 짓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탈선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가는 데 열중할 뿐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를 짓습니까? 모두가 가진 사람, 배부른 사람, 건강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통하지만 그것이 모두 복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찾지 않고 와서 예수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고, 새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난 목사에게 몰려 가고, 병을 잘 고친다는 기도원으로 몰려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의사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목적이 우선하다 보니까 그 신앙이 이렇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부활하신 예수를 찾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에게 새 삶이 주어지고, 새 인생이 시작되고 새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출발이 시작되고 변화된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같이 부활의 예수를 믿고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불안이 없어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안 중에서도 가장 큰 불안은 질병에 대한 불안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무서운 질병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누가 입원했다 하면 먼저 무서운 생각부터 듭니다. 누가 병들었다 하면 암입니다. 암도 무슨 종류가 그렇게도 많습니까? 오늘날은 암의 발병률도 대단히 높습니다. 언제 그 무서운 병이 나에게도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이 질병 때문에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죽음에 대한 불안도 상당히 큽니다. 중병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죽음에 대한 불안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자는 자신의 병이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충격으로 지레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차라리 모르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알았기 때문에 죽음이 더 빨리 온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이 질병에 대해 불안감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도스토에프시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두렵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나중에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애인에게 요한복음 11장을 읽어 달라고 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보니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요한복음 11장을 읽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서 이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일거에 없애 주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신앙만 내 속에 확립되어 있으면 죽음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예수 사후 얼마나 두려워하였고 불안해 했습니까? 다락방에 모여 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제자들은 야음을 틈타서 각기 시골로 피신을 갑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그 순간 새 힘을 얻습니다. 용기와 격려를 받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이 얼마나 강한 사람들이 됩니까? 그 시로 그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명이 모인 사람들 앞에 나서서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를 받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두려워하며 숨어 지내던 제자들이 하루 사이에 그렇게 달라진 모습으로 변합니다. 얼마나 위대한 변화입니까? 부활의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애 주셨습니다.

 

2. 슬픔도 없어집니다.

 

예수님 사후 많은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슬퍼하면서 낙향하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형제도 시름에 젖어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낙심하였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죽으셨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으셨던 그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했습닏. 그 순간 지금까지 그들을 덮고 있던 모든 슬픔과 탄식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슬픈 마음, 어두운 마음, 낙식되었던 마음들이 순식간에 환희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이 세상 방방곡곡 어두운 곳에까지 기쁨과 소망을 준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 그보다 더 큰 슬픔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와 형제가 죽으면 슬퍼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단절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죽은 부모나 형제가 다시 부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소망적인 일입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고 단절이 아니고 영원한 멸망이 아니고 다시 산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죽음은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죽음 앞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잠시 이별을 나누는 시간으로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극히 소망적인 종교입니다.
얼마 전 뉴스 위크지에 실린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기사 속에 한 가지 통계가 나와 있었습니다. 오늘의 미국인들에게 조사를 했더니 94%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 77%가 천국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또 그 가운데 4명 중 3명이 "나는 이 다음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이미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자산입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혹시 죽음일지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우리들에게서 슬픔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3. 실망도 제거해 줍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해방자로 믿었습니다. 지금 억압하고 있는 로마로부터 민족을 구원하여 줄 만한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렇게 열렬히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희망을 걸었던 그 예수가 무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한번 힘을 써 보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무력하게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에서 분노마저 느꼈을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병을 고치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풀던 예수가 결국 이렇게 무력하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예수가 우리가 그 동안 믿고 따르던 그 예수란 말인가! 그렇게 죽어 가는 무력한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세상의 불의의 힘이 정의의 힘보다 엄청나게 더 크다는 사실을 보고 매우 분노하기도 했을 것이고 허탈해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가끔 이 세상을 보면 불의의 힘이 정의의 힘보다 더 강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악한 사람이 더 잘 살고, 더 형통하고, 강도는 석방되고 예수는 죽고, 그래서 어떤 때는 불의가 이기는 것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이 세상은 어느 때는 어두움의 권세가 빛의 권세를 누르고 이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순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끝내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불의의 힘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정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본보기입니다. 아무리 긁어 덮고, 억압하고, 돌을 굴려 문을 틀어 막아도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부활로써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을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 준 사건입니다.

 

4. 의심도 제거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확신을 준 사건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주님으로부터 3년 동안이나 가르침을 받고 훈련도 받았지만 신앙이 분명치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생전에 예수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서야 참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참 베드로가 된 것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도, 다메석을 걷던 사울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변화를 받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의심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주인공 파우스트가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허무에 빠져서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교회에서 합창 소리가 들려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 합창 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그는 마음의 눈이 뜨입니다. 그 순간 그는 내면의 세계로부터 이상한 힘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그때 비로소 인생에게 부여된 깊은 의미와 뜻을 발견하고 겸허히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여러분, 만일 부활의 예수가 없다고 하면 우리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류의 문명은 고사하고 오늘 우리의 처지와 운명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주님의 부활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부활했다는 것은 인류의 소망입니다. 인류의 희망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상의 축복입니다. 오늘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찾아 오셔서 큰 소망과 믿음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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