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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0:11-18
부활의 은혜
오늘은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주일입니다. 이 아름다운 부활주일에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빕니다. 작년 안식월 때 2천년 기독교 영성의 현장을 찾아 이태리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이태리 북부의 중심도시 밀라노를 들렀는 데 그 중에서도 밀라노 대성당이 인상적이었습니다(사진). 밀라노 대성당은 프랑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독일의 쾰른 대성당과 세계 3대 고딕 대성당이라고 합니다. 그 크기와 아름다움에 있어서 세계의 어느 성당보다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저에게 더 기억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쓰인 말이었습니다. 3층 출입구가 가면 아치가 있고 그 아치에는 라틴어로 세 개의 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맨 오른쪽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모든 즐거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왼쪽에 또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문 위에 하나 더 있는 데 그것은 “영원한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입니다. 이 세 구절은 밀라노 성당의 아름다움보다 저에게 더 오래 남았습니다. “모든 즐거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모든 괴로움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원한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은 이 부활주일 아침에 이 세 마디를 동의하시나요? 인생의 모든 즐거움은 순간에 불과하다고 믿습니까? 모든 괴로움도 순간에 불과하다고 믿습니까? 그리고 영원한 것외에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믿습니까?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정말 세상의 즐거움은 순간입니다. 그리고 괴로움도 순간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이요 천국입니다. 부활은 순간에 사는 우리가 영원한 나라로 안내하는 관문입니다. 누구나 이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영원을 삽니다.
문제는 그 영원한 나라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노력으로 됩니까? 돈주고 삽니까? 장수하면 됩니까? 공부로 됩니까? 어떻게 우리는 순간의 세상에서 영원한 부활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부활의 실체는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주인공 막달라 마리아는 축복받은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부활을 목격한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순간의 즐거움과 고난이 있는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활을 목격했고 경험했습니다. 그가 부활을 목격하고 했다면 경험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살았는지 볼까요? 성경은 그가 일곱귀신 들린 여자였다고 말합니다. 눅8:2절입니다. “또 병고침을 받은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하는 부분에 나타납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는 열두 제자와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들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달리 막달라 마리아는 그의 고향과 함께 과거가 소개됩니다. 고향은 막달라, 과거는 일곱귀신들였던 여자였습니다. 막달라는 지금의 갈릴리 바다에 위치한 믹달로 봅니다. 믹달은 “탑”이란 뜻으로 예수님 시대에 군대가 주둔해 있던 군대도시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옷에서 유대인들은 로마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까지 들렸습니다. 왜 일곱 귀신들렸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상처받고 살았으나 어느날 예수님 만나 치유되고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먼저 용서입니다.
그 마리아가 11절에 슬픈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11절을 보실까요?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 왜 막달라 마리아는 슬피 울고 있을까요? 그날 막달라 마리아는 무엇을 보려고 예수님 무덤에 나왔을까요?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을 파서 거기에 시신을 넣는 방식으로 만듭니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몸에 향을 발라 장사하고 죽은 뒤에도 또 향을 발라줍니다. 그래야 냄새가 덜 나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마리아는 예수님 몸에 향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와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굳게 닫아 놓았던 돌무덤은 어디 가고 무덤이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 거렸지만 예수님은 커녕 시신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놀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소식을 들은 제자들도 무덤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11절의 상황은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11절,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마리아는 왜 울었을까요? 너무 슬펐기 때문일 것입니다. 병든 자기 몸을 고쳐주신 예수님, 병뿐 아니라 망가진 자기 인생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 은혜로운 주님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마리아는 한없는 눈물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도움이 더 필요한데, 아직도 주님의 위로가 더 필요한데, 예수님은 죄없이 죽었을 뿐 아니라 시신마저도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16절입니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니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그렇게 슬퍼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마리아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신 일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부활을 너무 크게 생각하여 주님이 부활이후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만민에게 복음 전파하라. 내 양을 먹이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연약한 한 인간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름을 부르신 분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브라함아, 모세야, 기드온아, 사무엘아, 마리아야, 레위야, 삭개오야, 부활하신 예수님도 우리 이름을 부릅니다. 그래서 찬양이 있습니다. “내 이름 아시죠”.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를 때 마리아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없어진 것으로 알았던 예수님이 시신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죽어서 다시 못 만난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을 다시 만날 줄이야 마리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마리아야”, 그 소리를 들을 때 마리아는 얼마나 위로를 받았을까요? 마치 엄마 떨어진 아이가 울고 있는 데 갑자기 엄마가 과자 봉지를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위로와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부활은 먼저 위로입니다. 눈물 흘리고 있는 우리 인생에 대한 위로입니다. 그나마도 그 위로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신 은혜와 내가 가진 본질적인 불행의 원인인 죄를 용서해준 위로입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 아닙니까? 그 죄의 해결없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위로는 죄를 없애줌으로서 오는 위로입니다. 용서가 최고의 위로입니다. 여러분은 이 부활절에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까? 죄를 그냥 두고는 진정한 용서도 위로도 없습니다. 부활은 용서의 위로가 선포된 날입니다. 한 미국 인디언이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다가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그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없이 나뭇잎 더미 위에 벌레 한 마리를 올려놓고 나뭇잎에다 불을 붙였습니다. 불은 점점 커졌고 벌레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이 번져 벌레를 막 태우려는 순간 그가 벌레를 불에서 끄집어 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 벌레라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게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의롭게 된다”고 표현합니다. 롬3:24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의롭게 된다는 말은 법정용어입니다. 죄가 있어서 법정에서 재판받다가 판사가 볼 때 죄없다고 여기면 무죄로 석방합 니다. “디카이오수네”, “의롭다” 판사가 이렇게 외치면 죄수는 그 즉시로 석방됩니다. 만일 죄가 있었다면 감옥에도 가야 하지만 그것은 면제되었습니다. 무죄석방 받았으니 벌금도 물지 않습니다. 무죄석방받았으니 유치장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즉시로 풀려 납니다. 이것이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롬6:7절에도 나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에서 벗어나면 풀려 납니다. 다시 구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구치소에서 바로 나옵니다. 이것이 “의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으면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납니다. 죄로 인해 받아야 할 모든 심판, 모든 저주, 모든 구속,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부활의 첫 번째 메시지는 용서입니다. 여러분도 이 부활절 아침에 용서받았습니까? “디카이오수네”, You are free, 용서받았습니까? 용서받으면 죄의 형벌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은혜가 용서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우리에게 용서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른편 강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강도였고 살인자였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주님이 말했습니다. 눅23:43절입니다. “내게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는 즉시 구원받아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간 것은 물론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날 강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을 많은 축복 중에 겨우 하나를 받은 것입니다. 용서는 죄의 형벌을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형벌을 면제해 주니까 살아서는 감옥에 가지 않고 죽어서는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옥안 가고 사는 것이 잘한 것입니까? 누가 그렇게 많이 감옥에 갑니까? 고귀한 인생의 목적이 어찌 감옥에나 안 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오래 예수믿으면서 겨우 지옥이나 안가면 되겠습니까?
그날 강도는 예수님께 용서받아 낙원에 함께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찍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그보다 훨씬 풍성한 삶을 살뻔 했습니다. 그가 진즉 예수님의 생명에 대하여 알았다면 땅에서 훨씬 많은 유익과 복된 삶을 살고 자기 자신도 더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게 해서 낙원에 갔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찬양을 압니까? 이미 사귀어둔 믿음의 친구가 없으니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평소에 전도, 선교, 착한 일 한 것이 없으니 감사하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낙원은 낙원인데 외로운 낙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언어로 말하면 예수님 믿을 때 우리는 자비와 함께 은혜를 받습니다. 자비와 은혜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자비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지 않는 것이고 은혜는 마땅히 받지 못할 것을 받는 것입니다. 먼저 자비부터 옵니다. 엡2:7,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먼저 자비가 옵니다. 용서는 곧 자비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형벌, 지옥불, 죄의 심판, 이런 것 면제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뒤에 은혜가 따라 옵니다. 은혜에는 수식어가 따라 옵니다. “지극히 풍성한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는 우리가 마땅히 받지 못할 것을 선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가 겨우 지옥형벌이 면제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지극히 풍성한 삶입니다. 죽어서 천국가도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컴맹입니다. 컴퓨터를 하되 겨우 워드나 치는 정도입니다. 다행히 제 곁에 컴퓨터 하는 분들이 있어서 겨우 살아 갑니다. 당연히 컴퓨터의 다양한 기능을 잘 모릅니다. 한번은 컴퓨터 하면서 “이런 것을 하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을 불렀습니다. ”내가 컴퓨터에서 이런 기능을 하고 싶은 데 됩니까?“ 그랬더니 몇 번 만지작 거리니까 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잘하네요“.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목사님, 이것은 본래 되는 것입니다“. 얼마후에 또 불렀습니까? ”이렇게 한번 해 주세요“. 그가 만졌더니 또 됩니다. ”그것도 됩니까?“ 그랬더니 말합니다. ”목사님, 이것도 본래 되는 것입니다“.
어느날 그 말이 제게 영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아, 하나님안에서는 모든 것이 본래 되는 데 우리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 중 지극히 일부만 쓰고 있구나”. 그것이 용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믿으면서 겨우 용서의 기능만 받고 삽니다. “그저 이 땅에서 큰 일이나 없었으면, 죄나 짓지 말고 살았으면, 죽어서 지옥이나 안 갔으면”, 그래서 우리는 오른편 강도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용서말고도 더 위대한 축복이 많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명”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생명”을 받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가장 잘 강조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사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본체를 가장 잘 나타냈습니다. 요한사도가 쓴 책은 모두 다섯 권입니다. 요한복음, 요한1서, 2서,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그런데 이 다섯 권을 내용상으로 구분하면 셋입니다. 요한복음, 요한서신,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모든 요한의 성경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자, 요한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십자가에서 쏟았다는 것입니다. 요3:16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예수님이 생명이 십자가에서 물고 피로 쏟아졌습니다. 요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런데 요한서신으로 가면 예수님안에 있는 이 생명이 우리에게 옵니다. 요한1서 2절입니다. “이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예수님에게 있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할 때 그 안에 있던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옵니다. 요일5:11-13절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에 있던 예수님의 생명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성경 최고의 진리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도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을 함께 가진 하나님과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영원히 함께 삽니다. 계시록 21:3절 중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왜 함께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했습니다. 그래서 계22:1-2절입니다.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 흐르더라“. 그래서 부르는 노래가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시냇가에 살겠네“. 아멘. 부활은 용서에서 생명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있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안에 지금 예수님안에 있던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따라 합시다.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예수님안에 있던 생명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내 안에 왔다“. 아멘.
부활은 능력입니다.
부활은 우리안에 예수님 생명이 임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의 씨처럼 우리안에서 심겨졌습니다. 심겨졌으면 자랍니다. 자라면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을 자라고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로마서를 아십니까? 성경중에서 다이아몬드같은 책, 그러나 대부분이 로마서를 잘 모릅니다. 오늘 제가 알기 쉽게 펼쳐 보이겠습니다. 자, 로마서는 1장에서 8장까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이렇습니다.
롬 1-3장 3-4장 5장 6장 7장 8장
죄 믿음 심판 죄 육신 죽음
죄 생명 생명의 능력
도표가 조금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쉽습니다. 1-3장은 인간의 죄를 다룹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죄는 심판을 가져옵니다. 롬3:23절이 중심귀절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4장은 그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런데 죄로부터 벗어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딱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어 우리를 의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자기 자신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믿으면 의로워집니다. 그때 우리가 얻은 것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에게 능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것이 능력이 됩니까? 네 가지 능력입니다. 롬5장에서 심판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능력입니다. 6장, 죄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입니다. 7장, 육신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8장, 심지어 죽음까지 이기는 능력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로마서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믿으셔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여러분은 모두 죄인입니까? 3-4장,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 여러분을 구원하고 의롭게 하셨습니까? 그가 피를 흘림으로 여러분이 생명이 받았습니까? 지금 그 생명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롬5장부터 시작합니다. 롬5장,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 때문에 다시 심판받지 않을 것을 믿습니까? 롬5: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정죄는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심판이 없습니다. 화평을 누리자. 더 이상 두려움도 염려도 없습니다. 6장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안에 있는 생명으로 매일 죄를 이기고 삽니까? 6:12-13절입니다. 롬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죄가 함부로 못합니다. 물론 우리가 가끔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주 엎드려지지 않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때문입니다. 미국의 영성학자 달라스 윌러드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라고 해서 죄의 욕망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명이 있으면 그것이 계속 자라 우리안에 있는 죄가 무력해지고 우리가 선과 의를 행하는 일이 점차 쉽고,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일이 된다”. 아멘. 7장입니다. 여러분은 평생 육신의 소욕을 갖고 살지만 우리안에 있는 생명으로 그것을 다스리며 살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8장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와도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도무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담대하겠습니까? 롬8: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고 롬8:37절, 로마서의 최종적인 승리의 선언입니다. 롬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이것들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힘으로 안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주신 능력으로 됩니다. 생명이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이깁니다. 사망이나 환란이나 칼이나 위험이나 심지어 죽음도 하나님의 생명이 이깁니다. 최종적으로 이깁니다. 그 생명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요한복음으로 돌아가 막달라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보시겠습니까? 17절-1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리아의 달라진 모습이 보입니까? 처음에 마리아는 슬피 우는 모습으로 무덤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비록 그때 용서를 받고 몸의 병도 고쳤지만 그는 여전히 용서의 단계에 머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고 하늘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가 하늘의 생명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그에게 믿음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자 그 생명은 능력이 되고 그 능력은 그를 눈물에서 슬픔에서 허무주의, 패배주의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크게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만났다. 내가 주를 보았다”. 그는 예전의 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나약한 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담대한 마리아, 용감한 마리아, 그의 삶에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때문입니다.
순교자가 그래서 생깁니다. 초대교회 어떤 노예가 주인을 예수맏는다고 밀고했습니다. 주인이 잡혀 죽으면서 종을 불렀습니다. 자기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순교에 이르게 해줘서 고마워. 이 반지를 선물을 주고 싶네. 내 집을 부탁하네”. 노예는 그 자리에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지난 달, 췌장암말기 선고를 받은 강영우 박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의 제 병을 염려하여 왜 수술받지 않느냐 도와주겠다는 분이 많은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 싶이 저는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거기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할 시간도 허락받았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한분 한분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저로 인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람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그동안 저희 삶은 행복했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영우 박사, 왜 이렇게 갔습니까?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생명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날이 부활절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그 생명이 부활의 능력이 되어 어떤 고난도 위험도 칼도 심지어 죽음도 이기며 살겠습니까? 여러분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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