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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성탄절 설교

성탄의 의미! (눅 2:11-14)

by 【고동엽】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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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의미! (눅 2:11-14)

 


우리는 또다시 한 해를 보내면서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일년 중 12월에서 4월까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계절입니다.
이를테면 12월 성탄절에서 4월의 부활절까지가 기독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해당됩니다. 이때에는 전세계의 교회들이 성스러운 축제로 떠들썩하게 됩니다. 이 기간 안에는 성탄절, 사순절, 고난 주간, 부활절 등이 들어 있는데 이 절기들은 모두 기독교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절기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12월에 맞이하는 성탄절은 이제 기독교인들만의 축제가 아니고 전세계인들의 축제로 가장 화려하게 발전되었습니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캐롤과 함께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희망과 즐거움을 주는 명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크리, 카드, 산타 클로스, 선물, 이런 것들은 모두 성탄절을 상징하는 것들로서, 어른들은 물론이고 세계의 많은 어린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기쁨을 주고, 사랑을 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을 우리들이 크리스마스라고 부르는데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원래 영어로 Christ(크라이스트)와 Mass(매스)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입니다. Christ라는 말은 물론 그리스도라는 말이고 Mass라는 말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미사"라는 말인데 이 말은 원래 "만남"이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래서 Christmas(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예수와의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과 만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성탄절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고, 또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하고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거나 인간과 사귈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이것이 성탄절의 의미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요한복음 3:16절을 풀어서 해석한 말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뜻이고,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성탄절만 되면 밤을 새우고 웃고 놀고 마시고 하면서 보낼 수만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좀더 깊이 있게 성탄절을 되새겨 보고 음미해 보면 그냥 웃고 놀며 보낼 수만은 없는 깊은 뜻이 여기에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하늘과 땅과 인간과 인간의 시간을 서로 연결하고 이어 주는 하나님의 가교적 섭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우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곧 이어서 하늘에서 찬송 소리가 났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지역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 땅과 하늘, 영원한 시간과 유한한 시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입체적이고도 구속사적인 섭리가 들어 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이 지니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성탄절은 "하나님의 사라의 극치를 보여 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알고 보면 내용이 다르고 그 격이 각기 다릅니다. 헬라 사라들은 흔히 사랑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나누고, 쪼개고, 분석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랑도 4갖로 나누어서 분석을 해 놓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는 육신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이 사랑을 "에로스(sros)라고 말했ㅅ브니다. 이 사랑은 뜨겁고, 정열적이고, 감정적인 그런 육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한번 불이 붙으면 끌 장사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때로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청년이 이 사랑에 한번 빠지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너무 빨리 불이 붙고, 또 너무 빨리 식어지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뜨겁던 사랑도 한번 식어지면 갑자기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들이 가장 흔하게 보고 경험하는 육신적인 사랑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정이라는 사랑도 있습니다. 이 사랑은 형제애의 사랑이고, 인류에의 사랑이고, 친구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을 헬라 사람들은 "필로스(philos)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참된 우정은 굉장히 좋은 재산입니다. 이 사랑은 아름다움이 있고, 값이 있고, 깊이가 있고, 의리가 있는 사랑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에도 약점과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우정도 변질이 되면 친구를 이용하고 속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에는 서로 피를 나누어서 형성된 사랑도 있습니다. 이 사랑을 "스톨게"(storge)라고 하는데 이 사랑은 혈정으로 연합된 사랑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여기에 속하는 사랑입니다. 특히 모정은 참으로 질기기도 하고 모질기도 하고 위대하기도 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추운 날 입시장 밖에서 하루 종일 서성대고 서 있는 부모들을 보십시오. 참 기가 막힐 만큼 모진 사랑입니다. 입시 날이 해마다 추운 것은 세상 어머니들의 모성을 시험해 보느라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스톨게라는 사랑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낙도에서 불구인 딸을 매일 엎고 나룻배를 타고 육지에 있는 초등학교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6년 동안을 등교시킨 후 졸업식 날 딸과 함께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스톨게라고 하는 그 위대한 모정의 사랑입니다. 하여간 사랑은 어떤 사랑이든 이렇게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도 하자는 있습니다. 모성이 아무리 지극하고 위대하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자식에게만 위대한 것이지 남의 자식에게는 전혀 마음이 열리지 않는 한계를 지닌 사랑입니다. 그것이 내 아이일 때만 모성이 발휘될 뿐이지 남의 자식일 때는 전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내 자식일 때만 희생을 하고, 헌신을 하고, 지극하고, 위대할 수 있는 것이지 길거리의 아이들에게는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나마 오늘에 와서는 남의 자식뿐이 아니고 자기가 낳은 자식도 버리고 팔아 먹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이 사랑도 많이 세속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랑도 완전할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여기까지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는 다음으로 완전한 사랑의 모델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폐"(agape)라고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완전하고 약점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소위 하나님의 사랑이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발휘하신 바로 그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전적인 사랑이라고 해서 아가폐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이 아가폐의 사랑,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이 없고, 대가가 필요없는 무상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사랑의 극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 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학적으로 좀 관심을 가지고 보면 이 십자가의 사건은 신비 중의 신비에 속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예민한 기계들이나 첨단 장비들을 보고는 그 효능에 감탄을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신비에 비추어 보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각광을 받고 있는 미사일 하나만 놓고 보아도 인간으로서는 대단한 발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이미 자연 미사일을 아담 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박쥐입니다. 박쥐는 캄캄한 굴 속에서도 잘 날아다닙니다. 박쥐의 눈에 반창고를 붙여 놓아도 어두운 굴속에서 한번도 벽에 부딪치는 일 없이 잘 날아다닙니다.
왜냐하면 날갯죽지 가운데에 안테나에 붙어 있어서 그것으로 전파를 쏘아서 돌아오는 파장으로 앞에 장애물이 있다 없다는 것을 계산해서 날아다니기 때문에 한번도 장애물에 부딪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눈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는 순간적으로 부딪쳐 오는 파장을 계산해서 장애물을 비켜 나가는 그 계산 능력은 컴퓨터가 계산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확하고 빠르다고 합니다.
이 땅에 미사일이 생기게 된 동기가 바로 사람들이 아 박쥐를 보고 연구해서 미사일을 발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씩 발명품들을 만들어 낼 때마다 감탄을 하고 그러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어린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자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신비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 같은 과학의 신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신비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방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비밀이 들어 있고, 신비가 들어 있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움이고 사라의 진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탄절은 인간의 값을 나타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갓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탄절만 되면 인간의 값이 얼마나 귀한가를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값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서 희생시키면서까지 구원하려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서 희생을 시키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려 할 때는 거거에 엄청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값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같은 값을 모르면 그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허무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은 모두 이 값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을 스스로 포기합니다.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답답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행해서 가장 실패되는 삶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이고, 또 하나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입니 .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귀하고 값이 있다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허무하다고 하고 또 생을 포기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큰 죄인것입니다. 그것은 곧 인생에게 주어진 그 값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여관집 주인을 보십시오. 자기 집 안마당에 있는 마구간의 아드이요, 이사야가 예수 탄생을 예언한 이래 사람드이 700년 동안이나 그렇게도 학수 고대하며 기다리던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ㅅ브니다. 그곳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자기 집의 안마당인데도 말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태어나신 메시아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그만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모르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결국 모른다고 하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1947년 봄, 이스라엘의 어느 유목민이 들에 나가서 천막을 치다가 동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동굴에 돌을 던져 보니까 동굴 속에 항아리가 10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항아리 속에는 글씨가 쓰여진 가죽으로 된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것을 집에 가지고 와서 기둥에다 걸어 놓고서는 오고, 가면서 여러 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리 쳐다보고 생각을 해보아도 도무지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그래서 이 사람이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을 가위로 잘라서 허리띠를 만들까, 신발끈을 만들까, 아니면 나귀 채찍을 만들까,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집에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고학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중에 매어 있는 그 두루마리를 보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귄위가 있는 성경 사본인 사해 사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성경의 원문이 쓰여 있는 사본입니다.
그런데도 이 유목민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모르니까 그것을 기둥에다 걸어 놓고는 생각하기를 이것을 가위로 잘라서 허리띠를 만들까, 신발끈을 만들까 하고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무지하면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값을 모르면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다음 하나님 앞에 서서 "나는 몰랐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하고 변명을 해도 안 통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는 결국 사람을 망하게 하고 맙니다.

이렇게 성탄절은 우리의 진정한 값을 알게 하신 날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 구원받은 값비싼 존재들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성탄절과 함게 알아야 할 교훈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경배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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