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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두 아들! (눅15:11-32)
눅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눅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눅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는 오늘 본문의 배경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무르익어 감에 따라서, 예수님을 강하게 대적하는 무리가 생겨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혹독하게 질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외식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강하게 도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탄의 일을 하며, 예수님이 행하는 기적도 실상은 사탄의 능력을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의 증거를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를 않고, 세리들이나 기타 죄인들과 같은 사탄의 무리와만 계속해서 어울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악의에 찬 그들의 주장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개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 첫째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의 비유입니다. 그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은 여자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각 비유의 결론만 인용해봅니다.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를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하늘에서는 그들로 인하여는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늘에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전연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영접하셨던 것입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셋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의 순서에 따라서,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둘째 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아버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맏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둘째 아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11절~19절).
눅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눅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25절 말씀처럼, 그에게는 밭이 있었습니다. 또한 22절 말씀처럼, 그에게는 종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7절 말씀과 같이, 그는 많은 품꾼들을 고용해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와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나누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물론 신21:17에 의하면 아버지의 재산은 장남에게 2/3, 그리고 차남에게 1/3이 물려지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물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은 그것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얼마든지 그의 요구를 묵살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때 맏아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동생이 아버지에게 잘못된 요구를 하면, 형이 나서서 동생을 나무라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형은 동생이 그렇게 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아픈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맏아들은 그의 동생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실상은 그의 관심도 아버지의 재산에 가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았기에, 그의 살림을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주었습니다.
눅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눅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그 후 며칠이 안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둘째 아들은 잠시도 지체하고 싶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형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고, 아버지를 사랑하며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시라도 빨리 그 곳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재물을 다 모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분깃으로 건물이나 땅 또는 짐승들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현금화하기 위해서, 그는 시가보다도 훨씬 더 싼 가격에 그것들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갔습니다. 이방 나라로 간 것입니다. 그는 그 곳에서 허랑방탕하며 그의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그 때문에 탕자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사업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부도덕한 삶으로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참으로 못할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탐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업을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는 먼 이방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허랑방탕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다 없앴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둘째 아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잘못이 아니면서도, 그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그 때의 상황이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둘째 아들의 수중에는 돈이 남아있지를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그는 이방 나라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가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눅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은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 곧 이방인에게 붙여 살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붙여 살다”라는 단어는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행인이 지나가면 거지가 달라붙어, 무엇을 주기 전에는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둘째 아들은 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방 나라 사람은 자기에게 달라붙는 거지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들을 치게 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직업을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떨어뜨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돼지들이 그들의 먹이를 둘째 아들에게 빼앗길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계속해서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지인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제 둘째 아들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만큼 낮아졌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 나라에 와서 이방인에게 붙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지가 되어, 부정한 짐승인 돼지들을 쳐야 했습니다. 그는 돼지와 같은, 아니 돼지보다도 더 못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드디어 둘째 아들은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실 그는 그 동안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리고 멀리 떠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야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그는 그 동안 아버지를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궁핍하게 되니까, 그는 비로소 아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품꾼은 종들과는 다릅니다. 종들은 주인과 함께 살면서, 주인의 일을 거듭니다. 그러기에 종들에게는 숙식이 제공됩니다. 그러나 품꾼들은 일용직입니다. 품꾼들은 그 날 벌어서, 그 날을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일을 하지 못하면, 그 날은 굶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에게 있는 품꾼들은 양식이 풍족하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의 아버지가 품꾼들에게 그만큼 후하게, 넉넉하게 삯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관대하심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의 처지는 어떠했습니까?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둘째 아들은 지금 자기가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직시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둘째 아들의 회개가 시작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아는 데서 회개는 시작됩니다.
눅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둘째 아들의 독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동안 자기가 가던 길에서 돌이키기로 했습니다. 그 길은 자기를 죽음으로 인도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바라면서,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그가 아버지에게 지은 죄가 하늘에까지 미칠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해서 변명을 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눅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여기서 둘째 아들의 독백이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종도 아닌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애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자비하심에 그 자신을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둘째 아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리고, 아버지를 멀리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께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에게 오면,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내쫓지 아니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에게 되돌아온 것처럼, 날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에게 되돌아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아버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20절~24절).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제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그의 피골은 상접해있었습니다. 그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몸에는 돼지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받을 멸시를 생각하면, 마음은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자연히 그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그의 둘째 아들이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계속해서 동네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그를 괘씸히 여겨야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위신과 명예를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아들에게 재빨리 달려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뛰지를 않습니다. 뛰다보면 몸에 두르고 있는 긴 옷 사이로 하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체를 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품위 있는 유대인들은 결코 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들이 동네로 들어오기에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동네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을 수도, 돌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서, 사랑하는 아들이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재빨리 달려갔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아들이 당해야 할 수치를 그 자신이 대신 당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당해야 수치를 무릅쓰고서 아들에게 달려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안았습니다. 지금 아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몸에서는 돼지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한 것들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안고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금 아들로 맞이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또한 이것이 자녀를 향한 어버이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얼룩진 우리를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실 멸시를 무릅쓰고서, 우리에게 달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을 안으시고, 우리에게 입을 맞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아들로 영접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이 하신 것은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은혜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눅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이는 둘째 아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실제로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과 그가 이전에 혼자서 독백으로 했던 말과 비교해보면, 여기에 한 부분이 빠져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 빠져있습니까?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이 빠져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아들로 맞아주신 것은 자기가 앞으로 품꾼으로서 해야 할 일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버지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의 행위를 내세우려들지를 않았습니다.
만일 여기서 그가 자기의 행위를 내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품꾼의 하나가 되어 일하겠다는 말을 빼버렸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내세우면서, 스스로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에게 나아갑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달려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수치를 당하셨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눅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종들은 깜짝 놀라서, 그들도 주인의 뒤를 따라서 함께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런 후에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서, 22절에서 종들에게 세 가지를 명했습니다.
첫째,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라. 물론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은 아버지가 입는 옷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옷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입히라고 명했습니다. 이는 아들의 품위를 세워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그 당시의 가락지는 오늘날의 인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서류에든지 가락지로 인을 치면, 그 서류는 그 집안 전체의 뜻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는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발에 신을 신기라. 옛날에는 품꾼이나 종들은 발에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맨 발로 다녔습니다. 단지 부유한 집안의 주인이나 그의 아들들이 발에 신을 신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아들의 신분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아들의 품위와 아들의 권위와 아들의 신분을 그대로 회복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빠져버렸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이 세 가지 명령 앞에 “Quickly, 즉시”라는 단어가 붙어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 세 가지 명령을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즉시 시행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와 같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서 몸을 씻고 오너라.”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주되, 그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받아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서서히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아오면, 예수님은 그 즉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예수님은 그 즉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예수님은 그 즉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십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아버지는 계속해서 종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한 마디로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동네 사람 전체가 함께 먹고 즐길 수 있는 큰 잔치를 베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사람이 그 벗과 이웃을 불러서 함께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은 여자가 그의 벗과 이웃을 불러서 함께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는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큰 잔치를 베푸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때, 사실 그는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때, 사실 아버지는 그를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다시 얻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크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는 7절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함으로 하늘에서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이는 10절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그러나 이것은 헬라어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지는 못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와 같이 됩니다. “그들이 즐거워하기를 시작하더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천국에서 있게 될 기쁨과 즐거움을 예수님은 설명하고 계십니다.
죄인 수천 명이 회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야 천국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곧바로 천국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시작됩니다. 죄인 한 사람이 또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또다시 기쁨과 즐거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은 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 때부터 또다시 천국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은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베풀어진 큰 잔치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동네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사실 둘째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만한 이유가 전연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잔치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베풀어졌습니까? 바로 아버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나도 기쁘고 즐거웠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자신을 위하여 종들에게 명하여 그와 같이 큰 잔치를 베풀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전연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시며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몹시도 비난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의 기쁨을 잘 헤아립시다. 부모님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읍시다. 그리해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늘 기쁘시게 해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부모님을 늘 기쁘게 해드리는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맏아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25절~32절).
눅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잔치를 베풀기 전에, 아버지는 맏아들과 아무런 상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잔치를 베풀고 난 후에도, 아버지는 사람을 보내어 맏아들을 불러오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이 밭에 있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가 그만큼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이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맏아들이 아버지의 슬픔이나 기쁨에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본시 주인은 일하지 않습니다. 그저 감시만 할뿐입니다. 분명 맏아들은 온종일 품꾼들을 감시만 하면서, 쉴새없이 불평만 늘어놓다가 돌아왔을 것입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이 집에 가까이 왔을 때였습니다. 아직은 그가 집에 당도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안에서 들려오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 때 집안에서는 큰 잔치가 베풀어졌던 것입니다.
만일 맏아들에게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즉시 집안으로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냐고 직접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맏아들은 그저 의심의 눈초리만 던질 뿐이었습니다.
눅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여기에 나오는 종은 22절에 나오는 종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22절에서는 “둘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서는 “파이디온,” 곧 어린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잔치가 열리면, 어른들은 안에서 즐깁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밖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려 놉니다.
그러니까 맏아들은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지금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대답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라고 했습니다. 제대로 된 형이라면, 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집으로 뛰어가야 했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가 동생을 애타게 기다려왔다는 것을 맏아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동생이 돌아왔다는 것을 그가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동생을 아들로 다시 맞아들이며, 그 기쁨으로 아버지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른 그가 집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옳았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눅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맏아들은 노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노했습니까? 아버지가 동생을 영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집안에 있는 무리와 어울릴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칭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들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신다고, 예수님을 극히 비난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맏아들은 아버지를 조금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외식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를 벌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잔치는 아버지를 위한 잔치였습니다. 그 잔치의 주인공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맏아들을 위해서, 잔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맏아들을 찾아와서, 여기 있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즐기자고 그에게 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먼저는 둘째 아들을 보고서, 아버지는 모든 수치를 무릅쓰고 그에게 달려갔었습니다. 또한 여기서는 비록 외식하면서 아버지를 공경하지도 않는 맏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으로 그를 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권하시며, 우리를 천국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때 맏아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눅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기서 맏아들은 자기의 행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이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태도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나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태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맏아들은 감히 아버지를 탓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의인인데, 아버지는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준 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동생은 죄인인데, 아버지가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둘째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맏아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버지가 잘못했고, 아버지가 틀렸다고 감히 아버지를 질책했습니다.
지금 맏아들은 이와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외식적이고 가증스러운 태도입니까? 사실 이 때 아버지는 엄하게 맏아들을 꾸짖으면서, 얼마든지 그에게 큰 벌을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이 잘 알아듣도록 그를 타일렀습니다.
눅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지금 여기서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맏아들을 권하고 있습니다. “얘야, 들어가자. 그러면 너도 함께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그것이 마땅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기뻐하면, 아들도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서 끝을 맺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이 없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초청에 맏아들의 반응은 어떠해야 마땅했겠습니까? “이에 맏아들이 돌이키고 아버지와 함께 들어가니 모두가 즐거워하더라.” 이와 같이 오늘의 비유가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겟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며, 형제들끼리 화목합시다. 이것은 부모님이,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며, 형제들끼리 서로 화목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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