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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부활! (요 20:6-10) (부활절)

by 【고동엽】 2022. 4. 6.
 
부활 목차 돌아가기
 

예수의 부활

 

 

                                           요 20:6-10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

 

                               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선물은 우리에게 이 부활을 주신 것입니다. 가끔 오늘 우리에게 부활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 후에 처음 생긴 단어입니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이 부활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이 부활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 주어지면서 이 세상은 얼마나 신선하고 따듯하고 소망적인 세상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형은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참혹한 형벌입니다. 고통 중에서 역사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가장 처절한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다가 마침내 조용히 죽으셨습니다. 그 순간 하늘이 울었고 땅도 울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이 땅이 어두워졌습니다. 바위도 터졌습니다. 지진도 발생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이 땅이 몸부림을 쳤다는 말이고 울었다는 말이고 고뇌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덤들이 열리고 부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하의 영혼들도 몹시 아파하고 고뇌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아래위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고난을 지켜보시며 고뇌하는 마음으로 개입하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물론 전 우주가 함께 고뇌하고 아파하고 슬퍼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때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어난 일련의 우주적인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놀라고 무서워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어느 백부장이 “과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전 우주적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묻히심”

 

 

 

그렇게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은 3일간 무덤을 임시거처로 삼고 묻히게 됩니다. 그 무덤은 순전히 3일 동안만 머물러 있을 임시거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모레면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할 사람에게는 무덤은 임시거처일 뿐 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는 사람들은 무덤을 소중히 여깁니다. 특히 오늘 사람들은 이 무덤을 너무 소중히 여겨서 마치 왕릉처럼 맨션으로 꾸며놓습니다. 그것은 부활사상이 없고 영원히 그 지하에서 머물러 있다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사상이 없는 사람들은 이 무덤을 숭배하고 호화롭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무덤을 호화롭게 만드는 그 이면을 보면 순전히 허영이고 과시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큰 비석을 세워놓습니다. 그 비석의 비문을 보면 한자로 “고 아무개 지묘“라고 뜻도 의미도 없이 세워놓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손들의 과시용으로 세워놓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부활신앙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생각 없이 그런 흉내를 내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묘에 대한 개념을 꾸어야 합니다. 바꿀 때 두 가지에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는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묘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호화 묘는 순전히 불신앙의 표시이고 과시용입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에게 무덤은 잠시 머무를 임시 거처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시간을 스스로 결정했으면서도 자신이 묻힐 무덤준비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3일후에는 분명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할 사람에게 영원히 있어야 할 무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하고 고정적인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묘비문제입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묘비들을 보면 참 의미 없이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묘비를 한자로 “고 아무개 지묘”라고 써서 세워놓았는데 그것은 생각 없는 행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 없이 살면 그런 것을 흉내 내는 꼴이 됩니다. 차라리 “성도 아무개 여기 묻히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비석을 통해서 더 강한 메시지를 주려고 한다면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던 아무개 여기 잠들다”라고 한다면 더욱 강한 메시지를 주는 묘비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묘비가 아니겠습니까. 카네기는 자기 묘에 비석을 세울 때 “여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잘 섬길 줄 아는 사람이 잠들다”라고 세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거기 죽었으나 살아있는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하는 대로 생각 없이 따르지 말고 무엇인가 생각하며 세상에 메시지를 남기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런 일들조차도 없어질 판입니다. 이제는 모두 화장을 하니까 무덤도 없어지고 모두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있을 판입니다. 그렇다고 그 항아리 앞에 비문을 세워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무덤에 집착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주님은 무덤도 없이 죽으시고 남의 무덤에 잠시 묻혔습니다. 왜냐하면 곧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자들 무덤 찾아감”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제자들과 여제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경쟁적으로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제자들이 무덤으로 갈 때 그냥 간 것이 아니고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는 향유를 들고 갔습니다. 우리나라는 매장하면 시신이 빨리 부패하도록 합니다. 그래야 그곳이 명당입니다. 시신이 빨리 부패하는 것은 그 무덤의 지질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곳이 명당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시체를 썩지 않게 방부제를 넣어 미라를 만들어 동굴에 넣는 것으로 무덤을 만듭니다. 그 방부제 역할 하는 것이 몰약이고 향유입니다. 여기 제자들이 그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갔습니다. 그 말은 그 제자들에게는 이 부활사상이 없었다는 행동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생전에 “내가 죽으면 3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누차에 걸쳐서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심각하게 중요한 마디마다 제자들에게 자신은 이제 십자가에서 죽을 것인데 그러면 3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강조했습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슬픈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새벽녘 날이 밝아지자마자 모두들 향유를 들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을 갖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생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앉혀놓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을 했지만 제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무덤에 달려가는데 향유를 들고 갑니다. 그 말은 이 제자들에게 부활사상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의 깨우침과 감동하심이 없으면 이 부활신앙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토록 여러 번 들었는데도 귀담아 듣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 부활사상이 참 희미하고 긴가민가합니다. 오늘 대다수 신앙인들이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니까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이 부활을 그대로 믿는 신앙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덤에 미련을 갖게되고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무덤에 대한 의식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무덤은 임시거처이고 잠시 머물러 있을 곳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무덤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과 깨닫는 지혜의 한계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오늘 화장이 대두되면서 화장하면 부활하는데 지장이 없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한때 화장은 부활하는 신앙인에게는 합당하지 않다고 기독교 내에서 주장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몸을 모두 불태워버리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는 염려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다음에 우리의 부활이 이 몸 그대로 부활한단 말입니까. 여자는 또 여자로 부활하고 불구자는 또 불구자로 부활하고 못생긴 사람은 또 그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때 가서 또 성형수술 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 부활신앙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여러 번 제자들을 데리고 앉아 가르쳐 주었고 강조했지만 막상 그들은 부활이 뭔지를 몰랐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도 알 수 없었고 부활의 약속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모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제 다음 순서는 부활할 차례라고 부활을 믿었더라면 그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신나는 구경거리이고 다음에 일어날 기가 막힐 기적을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 얼마나 가슴 설렜겠습니까.

 

그리고 마음에 신이 나서 사람들 앞에서 몇 시간만 기다려보라, 너희들 조금 후에 혼 좀 나보라 하고 얼마나 신나게 그 일련의 과정을 진행해 나갔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을 그 밤에 그들이 잠을 잘 수 있었겠습니까. 그 밤이 얼마나 설레고 환희의 밤이었을 것인데 그 밤을 뜬눈으로 부활하실 주님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벽 일찍이 환영군중을 이끌고 무덤으로 달려가 곧 일어날 대 환희의 역사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인데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 순간이 절망으로 온통 세상이 암흑으로 돌변했던 것입니다. 모르면 이렇게 절망이 서려옵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갈 때 제자들이 당했던 그 상실감과 패배감과 충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고 무지가 죄인 것입니다. 무지와 불신은 때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마침내 예수 부활하심”

 

 

 

그 무지는 바리새인들도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 땅에 묻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여 땅에 묻어놓고 그날 안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이젠 우리가 승리했다”하고 그 밤에 자축하고 축배를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도 이제는 예수가 죽어 땅에 묻혔으니 소요가 그치리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모두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무덤 문을 돌로 막고 군인들을 세워 지키게 했습니다. 혹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고 예수가 호언장담하던 대로 부활했다고 말하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전에 말씀하던 대로 3일 만에 보란 듯이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습니다. 모든 죽음을 극복하고 이기시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활하셔서 이 땅에 부활의 광명을 주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부활의 은혜를 선물로 주셔서 이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셨고 밝고 신선한 세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순간입니까.

 

이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몇 가지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는 영적부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만나고 체험하게 되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나는 부활을 입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고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마침내 이 눈이 뜨였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지금까지 생각하고 중히 여겨오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린다고 고백했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더 소중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 눈이 뜨여지니까 비로소 천국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도 알게 되었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의 은혜입니까. 이것이 영적 부활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은 모두 이 영적인 부활을 은혜로 받아 이루신 분들입니다. 

 

또 하나는 정신적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영적인 눈만 뜨인 것이 아니고 지성의 눈도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죽음의 두려움에서도 해방되고 죄로부터도 해방되게 됩니다. 이 해방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함을 주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인 부활을 경험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부활이 어떤 것인가를 실제로 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은 이런 것이다 하고 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장차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육신의 부활을 갖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갈 길을 먼저 가시면서 시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아가다가 죽어 이 땅에 묻히게 됩니다. 인간은 여기까지 모두 똑같이 삶을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그 후에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직접 시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이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옆에 가 보면 그곳에 석관으로 된 무덤들 즐비하게 놓여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지점에서 고난 받으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장차 재림도 그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하고 가정법을 써 가며 이 부활을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에게 장차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 될 뿐만 아니라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경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경의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봄이 오면 얼어붙은 땅이 녹으면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봄이 되면 잠자던 곤충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나 하늘을 날듯이 죽어 땅에 묻힌 주님이 살아나셨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주님이 다시 재림하여 이 세상에 오실 때 모두 영광의 모습으로 부활할 줄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활이 주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부활의 영광이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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