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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추수 감사설교

감사의 이유 / 롬 1:21-23

by 【고동엽】 2022. 4. 6.

감사의 이유

 

 

                                     롬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

 

                    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제 우리는 11월을 맞이하였습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추수의 달입니다. 거두는 달입니다. 특별히 금년은 예년에 없는 풍년을 이루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골 들녘을 지나다 보니까 온 들판이 누렇게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보기만 해도 좋고 마음이 넉넉해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이것은 정녕 하늘이 이 땅에 주신 은혜요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사람의 성숙도를 측정할 때 감사하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숙 자는 그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는 성숙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많이 주어져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줄을 모릅니다. 사람이 미성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작게 주어져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양의 적고 많음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삶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인간의 값”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여러 모양으로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20절에서는 “이미 창세 때부터 모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줘 알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을 모른다 핑계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도, 감사하지도 않는다.”고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이유가 뭔가 하면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 감사하는 일은  자식이라고 해서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도 성도라고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짓는 죄가 몇 가지 있습니다.

 

 

 

“원망 죄”

 

 

 

이 원망 죄는 생각이 없어서 짓는 죄입니다. 보면 특별히 원망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하고 탓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것은 생각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좀 깊이 생각해 보면 모두가 감사하고 넉넉하고 원망할 이유 하나 없습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원망을 합니다. 분명 생각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불신인들 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원망을 잘 한다고 합니다. 불신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원망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망을 잘 하지 않고 오히려 체념을 잘하고 운명소관으로 돌려버립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니까 원망을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새벽기도도 했고 11조도 드렸는데 그런데 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느냐, 왜 잘 안 해주느냐 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 설익어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원망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 죄”

 

 

 

교만이 죄입니다. 교만은 자만하고 자기과신 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알고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교만의 죄를 잘 짓습니다. 사람이 자기 과신이 크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부분이 그만큼 작아지게 됩니다. 자신을 과신하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는 부분이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배제되고 작아지고 겸손한 만큼 하나님의 부분이 커지고 의존도도 높아지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과신하면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기반이 작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이 죄”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믿음이 좋은 줄 알고 살아가는 것도 교만입니다. 그래서 남을 정죄하고 탓하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우를 범하고 스스로 의롭고 신앙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은 어설픈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생각이 깊지 못해서 발생하는 마음입니다. 매사가 그렇습니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설픈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운동도 어느 경지에 이르도록 깊이 연마한 사람은 운동하는 표를 내지 않습니다. 누가 표 나게 행동하는가 하면 입문단계에 들어가 초단을 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매일 돌아다니며 주먹 자랑하다가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을 깊이 연구한 사람도 표를 내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그런데 학문의 깊이가 없는 사람들이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다 보니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부자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검소합니다. 그런데 졸부들이 부자행세를 하며 나타내고 돌아다닙니다. 정치인도 보면 초년생들이 막말을 쏟아냅니다. 무안하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말을 막 합니다. 오늘 정치하는 분들 보십시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막말을 막 쏟아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말이 틀림없습니다. 옛말에 적당히 무식한 사람이 가장 용기 있다고 했습니다. 이 교만이 죄입니다.

 

 

 

“위선 죄”

 

 

 

신앙생활 하다보면 이 위선 죄를 짓게 됩니다. 위선자를 영어로 히퍼크릿트(hypocrite)라고 합니다. 가면“ ”배우“란 뜻입니다. 배우는 “가면 쓴 사람“입니다. 배우는 연극할 때 속마음이 쓰려도 웃습니다. 왜냐하면 연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선입니다. 킬케골이 쓴 “가면”이라는 작품을 공연하기에 앞서 선전하기 위해서 배우들이 동네에 들어가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며 광대 짓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들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극장에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불이 났다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연극 참 잘한다고 박수를 더 크게 쳐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진짜라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를 하니까 사람들은 더 잘한다고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이것이 가면입니다. 위선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때로 이렇게 위선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데 좋은 체 하고 아는 체하고 잘 믿는 체하고 선한 체하고 경건한 체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본의 아니게 이렇게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죄”

 

 

 

그런가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죄 가운데 또 감사하지 않는 죄를 짓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오늘은 감사와 은혜를 잊어버린 시대입니다. 그리고 배신과 배은과 망덕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오늘 어디에 감사가 있고 은혜가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을 배은망덕 시대라 부르고 감사와 은혜를 잊어버린 시대라고들 부릅니다. 부모를 버리고 스승을 버리고 자기직장에 불을 지르고 부수고 친구를 버리고 신세진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금년 같은 풍년에도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들이 없습니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농사를 잘 지었고 영농과학이 일군 개가라고 호언장담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어른들이 감사하는 삶이 없으니까 그 영향이 어린 아이들에게 까지 미칩니다. 그래서 오늘 어린 아이들은 감사와 은혜와 보답이라는 정신은 물론이고 말까지도 듣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이들을 보십시오. 부모에, 스승에, 누구에게 감사할 줄 압니까. 오늘 청소년들에게 부모가 뭐라 말을 하면 곧 바로 대듭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교사가, 이웃어른들이 남의 아이들에게 뭐라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부족하고 적은 것에 불만하고 불평할 줄은 알아도 만족해하고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할머니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깊이 팬 주름살을 보고는 보기에 흉했던지 참 못생겼다 하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지요?”, “그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지”, “그럼 할머니도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그럼”, “그럼 나도 지으시고요?”, “물론이지”, 그러자 이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참 하나님도 사람 만드는 솜씨 많이 늘었어.” 오늘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할머니 얼굴에 주름살이 왜 생겼는지, 할머니 얼굴이 왜 저렇게 흉하게 되었는지는 생각조차도 없습니다.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자라는 동안 그런 영향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는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고 은혜주시는 분이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없이 살수 없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 말은 전적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교만하고 위선에 가득 찬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생각이 없어서 짓는 죄입니다.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살면 원망부터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원망, 불평, 불만은 모두 생각이 모자라서 짓는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배우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배우고 성숙해지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감사할 이유”

 

 

 

성경이 이렇게 감사하라고 강조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에 따뜻함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삶에 삶이 따뜻해지고 관계가 좋아지는 복이 주어집니다. 부모님에게 “부모님 감사합니다.”하고 마음을 전하고 은혜에 감사할 때 서로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부모는 자식에게 다 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그래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스승에게 생신날 선물 들고 찾아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할 때 그 관계가 얼마나 따뜻하게 전해지겠습니까. 거기에 믿음이 있고 보람이 있고 소망이 있고 인생의 따뜻함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가 주는 축복입니다.

 

  어느 후배 목사님이 목회하다 어려움에 직면해서 고민하다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아주 쉽게 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편지가 왔습니다. 그 편지 속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쓴 문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선물 한 상자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늘 생각하며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진지한 마음의 전달입니까. 그러니까 제 마음속에서는 내가 어떻게 하면 저 후배를 더 도와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서로 가르쳐주고 감사하고 나누고 함께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이 소망으로, 즐거움으로, 넉넉함으로, 모두가 소중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행복한 삶이 주어지고 즐거움의 삶이 만들어지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은혜를 저버리고 배은하고 망덕 하는 일이 벌어져서 세상인심이 이렇게 삭막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불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돕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큰 호수에서 배 한척이 침몰을 합니다. 그때 노스웨스턴대학 학생이 강물에 뛰어들어 23명의 생명을 구해냅니다. 그것이 한때 화제가 되었던 때가 있습니다. 수십 년 후에 유명한 토레이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이 실화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때 설교를 듣고 있던 청중 한사람이 일어나 “그때 그 청년이 바로 나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강단으로 이끌어서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장 인상 깊은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대답합니다. “그때 뛰어들 때는 목숨을 버리며 모험을 했는데 그 23명 중 한사람도 찾아와 감사하다는 말을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인상 깊습니다”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쓸쓸한 마음을 갖게되고, 하나님도 백성들에게 서운하고 쓸쓸한 마음을 가지실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또 감사함이 있는 곳에 “만족함과 너그러움”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삶에 즐거움과 기쁨과 만족함과 너그러움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마음은 이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느끼고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텍사스 휴스턴대학 알렌교수가 “만족하게 사는 삶 5계명”을 발표했습니다. 첫째는 “있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적은 소득이라도 조금씩 저축하며 살라, 그리하면 꿈과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꿈과 모험을 잃지 말라, 그러면 미래에 대한 희망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넷째는 “많은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고 다섯째는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길이 열릴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의 삶은 이렇게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감사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5병2어 들고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5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께 찾아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사람만 돌아와 감사사례를 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고 축복하셨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병을 고침 받고 찾아와 감사드림으로 영적으로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다니엘은 창문을 열고 고국 하늘을 향해 매일 세 번 기도 기도했습니다. 그를 모함하는 사람들은 약점을 잡아 죽이려 혈안 했고 그는 사자 굴에 던지기로 법령을 만들어 놓은 것을 알았음에도 여전히 하던 기도를 계속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주실 줄로 믿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다니엘은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하고 기도합니다. 마침내 그는 고발당했고 사자 굴에 던져지는 불행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자 굴의 굶주린 사자 입을 막으시고 건져내 나라의 2인자의 자리로 올려놓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용기입니다. 감사함이 있는 곳에는 이런 기적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감사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을 맞게 됩니다. 추수감사는 추수의 감사뿐 아니고 일 년의 감사입니다. 한 해 동안 인도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서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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