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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머니는 이 말씀대로 그 해에 도회지로 나오셔서 살았다고 그 자녀분은 말씀하십니다.
열심히 갈아서 심어놓은 농사를 서리 때문에 하루아침에 다 망쳐버린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편지를 읽고 나서 '어머니의 자녀분들은 과연 오늘 어떤 모습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물론 생각지도 않은 서리 때문에 농사를 망쳐버린 그 어머니의 마음이 백분 이해가 됩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논밭에다가 온갖 씨를 다 뿌려놓고 알곡이 많이 맺히기를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알곡을 맺게 하기는커녕 때 아닌 서리를 내리셔서
몽땅 다 잃어버렸으니 그 낙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됐더라면 저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는 자신이 솔직히 없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 나오미는 정말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차라리 어떤 면에서는 사는 것보다는 스스로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여길 정도로
엄청난 시련의 아픔을 연속적으로 당한 여인입니다.
고향 동네 베들레헴에서는 흉년을 만났습니다.
조금이라도 먹고 살아보려고 남편을 따라서 이사한 모압 땅에서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물론 혼자 되신 여자 분이 살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나오미의 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때의 나오미 같이 혼자 된 여자들은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도저히 여자가 해서 먹고 살만한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앞뒤 좌우 사방으로 다 막힌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들이 일하는 것으로 먹고 살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황당하고 억울한 것은 그 두 아들마저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신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나오미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압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남편과 아들들을 다 데려가신 것을 잘 압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오미의 태도는 어떠해야만 정상입니까?
욥 2:8-9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의 아내가 전 재산과 자기 자식을 다 잃어버린 욥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겁니다.
나오미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차라리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사라지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어머니의 태도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도시로 떠나버리는 겁니다.
보통의 사람이면 다 그렇게 해버립니다.
더더군다나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나오미에게 있어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악에 바쳐서 더 이상 뭘 토해낼 것도 없는 안타깝고 힘든 삶이 그녀에게는 남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가야하겠다는 소망이 없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나오미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악착같이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건 무엇이었을까요?
때마침 고향 베들레헴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권고하사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흉년의 고통을 멈추시고 풍년의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남은 것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가는 길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아들의 아내, 곧 며느리 둘이 문제였습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는 모압 여인들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 사람들인 겁니다.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
때문에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을 고향으로 저들의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작은 며느리 룻이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가려고 합니다.
나오미 혼자 먹고 살기도 버거운데 며느리까지 따라나선다면 얼마나 더 힘들어지겠습니까?
차라리 자기 고향 모압에 남아서 이렇게 저렇게 살면 될 텐데
왜 룻은 굳이 나오미를 따라가려고 합니까?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아서 우리가 진심으로 생각해봐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단순히 부모에게 잘해드리고 효도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뭔가 초라한 해석입니다.
순전히 자녀의 입장에서 더 무거운 짐들만 지워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뿐입니다.
아니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부모에게 효도나 하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윤리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그 요구가 무엇인지를 오늘 나오미와 룻의 경우에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룻이 굳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 세상 윤리 그 이상의 요구입니다.
물론 일방적으로 룻의 입장에서 대변을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봉양하려고 하는 참한 마음씨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해버리면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뭔가 구차하고 초라한 해석입니다.
부모에게 잘해드리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가장 기본 중의 기본 도리입니다.
물론 그것도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다 그 정도 합니다.
그런데 룻의 이야기를 보면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 자식 간의 인륜이나 윤리, 도덕의 차원이 아닙니다.
16 - 17절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룻은 그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이렇게 다짐을 합니다.
그 다짐의 내용을 보면 단순하게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인간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룻은 신앙고백을 하면서 자기 시어머니 나오미의 곁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룻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이 살아온 이방여인입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해서 이런 신앙고백적인 이야기를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렇게 하도록 했습니까?
물론 크게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관계에서 보면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평소 신앙생활을
그대로 행동으로 보고 배운 결과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믿음을 곁에서 보면서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니까 그 어떤 난관이나 인간적인 조건들이
전혀 문제가 되질 않는 수준의 신앙생활이 된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하나님을 바로 그 어머니 나오미가 보여 준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살았더니 룻은 효도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고자 하는 효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효도의 기준이 달라져야만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맹목적으로 효도를 하라고 할 때가 아닙니다.
물론 자녀들은 당연히 부모님께 효도를 다해야만 합니다.
반항하고 대항하고 투정부리고 사는 것은 자녀들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모 역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자세를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그 자녀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의 깊은 맛을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도록 해야만 합니다.
신앙고백적인 효도의 삶을 갖도록 해줘야만 하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십계명 차원의 효도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방 며느리 룻은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신앙생활을 보고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는 이방인 베들레헴을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며느리 룻이 행하는 효도의 해답은 그 시어머니 나오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니까 그 자녀들이 자신들의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공경을
스스로 감당하고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대한 효도를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를 더 강조해야만 옳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생활을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한 번 더 생각해봐야만 하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들 어머니의 하나님은 과연 어떻습니까?
그리고 어머니의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태도는 또 어떻습니까?
애를 쓰고 노력한 것들이 생각지도 않게 다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고 하는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자녀들이라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신앙적인 효도를 할 것입니다.
어려울 때 일수록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바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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