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성탄 (마 2:9-11)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성탄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의외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선 목자들입니다. 눅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탄하신 바로 그 때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저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나님께서 목자들에게 성탄의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동방박사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탄하신 뒤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별의 인도를 받고 지금의 이란인 당시 동방 땅에서 지금의 이스라엘 베들레헴까지 그 먼 거리를 여행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성탄하신 아기 예수 계신 곳에 와서는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한 예물을 드리고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들이 정말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아직 구주 성탄을 보고 기뻐한 사람이 없었지만 동방박사들이 처음으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저들이 정말 의외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메시야 탄생을 먼저 알고 찾아와 경배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대제사장과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사장들입니다. 저들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경배하는 일에도 앞장 서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또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저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약속대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먼저 찾아와 경배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탄 그 현장에 저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전에서 섬기지도 않고 율법에 대해서도 무지했던 목자들이 제일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었던 저 머나먼 동방에 살던 박사들이 경배하러 찾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하신 예수님께 진정한 경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경배를 들여야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가운데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하신 예수님께 진정한 경배를 드리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저들이 정말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 기쁜 소식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했고 기쁨으로 성탄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기쁜 마음으로 성탄하신 아기 예수님을 뵙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바치며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구주 성탄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주 성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구주 성탄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 성탄 절기에 구주 성탄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선물 받는 일 때문에 기뻐합니다. 연인들은 성탄의 들뜬 분위기를 즐기는 일 때문에 기뻐합니다. 상인들은 연말 특수를 누리는 일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기 때문에 구주 성탄 자체가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구주 성탄의 분위기, 구주 성탄의 부산물 때문에 기뻐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구주 성탄 그 자체를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기뻐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찬송을 합니다. “merry christmas!"라고 인사도 해 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그 심령에 기쁨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기쁘다고 하는데 속사람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니 속사람이 기뻐하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영적인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 기쁨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성탄하신 예수님께 경배를 들여야 합니다. 목자들처럼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 성탄이 정말 큰 기쁨의 소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잃어버린 영적 기쁨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동방박사들의 경배 여정에서 그 비결을 찾아보겠습니다. 저들의 아름다운 마음속에서 그 비결을 찾아보겠습니다.
1.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오랫동안 논란거리였습니다. 그 논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과연 동방박사들이 본 별은 어떤 별이고, 그들은 어떻게 그 별의 인도를 따라 정확하게 예수님 탄생하신 지점을 찾을 수 있었을까?”라는 문제입니다.
많은 가설들이 제시되어왔습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들어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그 별은 주기적으로 지구를 찾아오는 헬리혜성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탄생 시기와 비슷한 때 이스라엘 땅 주위에 헬리혜성이 나타났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습니다. 다음은 그 별은 초신성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대낮에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폭발하는 별을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시기에 이런 초신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것이 UFO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계에서 받아들이는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저들이 점성가들 즉 오늘로 말하면 천문학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천문을 연구하여 천궁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 천궁도 상에 별들의 합이 어떤 특정한 조짐을 보일 때 이 땅에 특출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던 중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아주 특별한 천문 현상이 하늘에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저들은 이 놀라운 천문현상을 보고 틀림없이 대단한 인물이 태어났음을 확신하고 그 지점을 찾고자 나섰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저들은 늘 저 하늘을 주시해왔다는 것입니다. 이 땅을 바라보기보다는 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고자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해 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특별한 천문현상을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고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기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출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아주 특별한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는 장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토록 시퍼렇던 바다가 갈라져 길을 만들고 자기들은 그 길 한 복판을 걸어서 바다를 건넜던 것입니다. 그런데 뒤 따르던 애굽의 군대는 갈라졌던 바다 길이 사라지면서 모두가 수장되었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는 저들이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찬양이 출 15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홍해를 빠져나온 뒤에 수르 광야로 들어섰는데 광야여서 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에서 겨우 물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저들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사흘 전에 그들이 맛보았던 기쁨은 다 사라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 한 복판을 살면서 갖가지 문제, 갖가지 사건들에 휩쓸리다 보면 영적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순간순간 밀려드는 염려, 근심, 걱정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으려면 세상 한 복판에서도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 동방박사들이 매일 밤 저 하늘을 바라보았듯이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쁨의 성탄을 맞을 수 있습니다.
2. 주를 향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성탄하신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었습니다. 천문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그 여행이 대략 다섯 달이나 걸리는 멀고도 먼 여행이었다는 것입니다.
194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시인 엘리옷(T. S. Eliot)은 [동방박사의 여행]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의 앞부분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혹독한 추위였습니다,
여행을 하기엔, 그토록 긴 여행을 하기엔
연중 가장 고약한 때였지요.
길은 푹푹 빠지고, 날씨는 매섭고,
바로 한겨울이었지요.
거기다 낙타들은 상처가 나고, 발이 붓고, 고집을 부리며
질척거리는 눈 위에 누워버렸습니다.
......
그리고 낙타꾼들은 욕지거리에 불평을 하며
도망치고, 술과 여자를 요구했습니다.
밤에는 모닥불도 꺼지고, 쉴 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도시는 적대적이며, 마을은 불친절했습니다.
동네는 불결하며, 바가지요금을 강요했습니다.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밤을 새워가며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토막잠을 자면서.
이 모두가 바보짓이라는 목소리가
우리 귀에는 들려왔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행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성탄하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오히려 깊어져만 갔습니다. 고생이 심하면 심할수록 성탄의 그 비밀을 발견한 그 기쁨은 오히려 더욱 불일듯 일어났습니다.
저는 최근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관한 몇 가지 자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손으로 쓴 찬송가입니다. 찬송가를 구할 수 없어서 가사만을 노트에 손으로 적어놓은 것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얼마나 뜨겁고 목이 매이도록 이 찬송을 불렀을까요? 닳아 해어진 종이를 보면 저들이 얼마나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는지를 보여줍니다. 눈물로 얼룩져 번진 글씨는 저들이 얼마나 찬송을 간절하게 불렀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하나는 이불 속에서 소곤거리며 기도하는 한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외치는 그 간절한 절규는 우리의 가슴을 헤집고 하나님의 가슴도 헤집는 것만 갔습니다.
어떻게 저들이 발각되면 처형당하는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신앙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 안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기쁨, 고달픈 인생 길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 영적 기쁨을 잃어버린 이유가 너무 편하게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위한 고생스러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지만 매일 새벽 제단을 쌓는 사람들, 힘이 들지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 힘이 들지만 매일 전도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 저들은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며 고생스럽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기쁨의 성탄을 맞을 수 있습니다.
3. 마음을 담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우선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마음을 다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해 드리는 경배를 통해 저들은 경배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쁨의 성탄을 맞으려면 동방박사들처럼 엎드려 경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동방박사들은 정성스런 예물을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최근 호주의 광고가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리자 아기 예수께서 그 예물을 말구유 밖으로 내 던지면서 “더 나은 선물을 드려라!”고 소리를 지르는 광고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퇴짜를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보다 더 비싸고 더 좋은 것을 드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광고는 아마도 이것들 대신 자기들의 전자제품을 드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당시 가치로만 봐도 무척이나 고가품들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서민들은 좀처럼 구경하기도 힘든 매우 값비싼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예물들은 저마다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놀라운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미리 암시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예물에는 저마다 놀라운 신앙고백이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첫째로 황금입니다. 황금은 왕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황금을 드리면서 아기 예수를 진정한 왕이라고 높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유향입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송진과 같은 것입니다. 이 유향은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전하면서 사용했던 매우 귀한 제사 용품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이 유향을 드리면서 아기 예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라고 높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몰약입니다. 몰약은 시체를 염할 때 사용하던 방부제로 매우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죽었을 때만 사용하던 귀한 장례용품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 몰약을 드리면서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그리스도이시라고 높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저 멀리 동방으로부터 올 때 이렇게 마음을 담은 정성스런 예물을 준비해 왔고, 아기 예수께 그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물을 준비할 때부터 그 마음이 기뻤고, 이제 그 예물을 주님께 드리면서 그 마음이 기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담은 정성어린 예물을 주님께 드릴 때 그 마음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믿음의 고백을 담은 예물을 정성껏 주님께 드릴 때 그 마음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의 성탄절이 정말 여러분에게 기쁨의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동방박사들이 성탄하신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며 기쁨의 성탄을 누린 것처럼 그 어느 성탄절보다 기쁨의 성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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