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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스더 7장 3절)

by 【고동엽】 2022. 3. 31.

[송구영신예배]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스더 7장 3절)

 

1559년 봄에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요한 낙스(John Knox)는 수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그간 개신교를 극심하게 박해하던 영국의 ‘피의 메리’(the Bloody Mary) 여왕이 죽고 이어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극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스코틀랜드에서도 역시 종교개혁자들에 대하여 약간의 관용이 선포되면서 의회가 낙스의 귀국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자 칼빈은 그 동안 스위스 제네바에서 자신의 개혁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낙스에게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반대하시지 않고, 본인에게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 부름에 응하라고 권고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고 있던 요한 낙스의 앞길은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사회에는 여전히 천주교 세력과 미신과 우상숭배가 가득 차 있었으며 백성들은 폭정에 시달리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 중심의 개혁만이 그런 조국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던 낙스는 저 유명한 기도,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귀국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개인이 자기 민족 전체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그저 허풍처럼만 보일 것입니다.
  더구나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거의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리로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기도를 드렸던 신자는 결코 미사여구에 스스로 도취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민족의 현실적인 위기 상황을 앞에 두고 절박한 심정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는 소리가 아니라 오직 그 누구보다도 조국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낙스의 기도였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유명한 에스더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실로 우리교회와 성도들을 ‘장자의 기업’으로 크게 복 주셨던 2005년을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림으로써 마감하고 이제 또 새로 열어주시는 2006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저는 우리 대한민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야말로 조국의 교회와 성도들이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는 구국의 서원과 결단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민족을 받은 기독신자’는 어떠한 자입니까?

 
  1. 우리는 ‘민족의 과거’를 순교 신앙으로 지켜내고 물려준 선조들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에스더 2장 5절부터 7절에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저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사 제국의 수도였던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 모르드개가 조실부모한 “삼촌의 딸” 즉 사촌누이동생 에스더를 자기 딸처럼 대신 양육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포로들을 잡아갈 때 “모르드개도 함께 잡혔더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원문에는 “모르드개도”가 아니라 그냥 “그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연도를 계산해 볼 때 모르드개는 바벨론 포로 시절 중에 태어난 것이 틀림없고, 따라서 여기서 바벨론 왕에게 사로잡혔다는 사람은 그의 증조부 “기스”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모르드개는 유다인이기는 했지만 한 번도 조국을 직접 본 적도 없는 가운데 바벨론 제국 산하에서 출생하여 그것이 바사 제국으로 넘어가는 동안 계속 이방 땅에서만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자기가 유다인인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10절에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아니하니 이는 모르드개가 명하여 고하지 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된 말씀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무의미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에스더로 하여금 그 사실을 남 앞에서 숨기도록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모르드개가 그녀에게 “자기의 민족”뿐 아니라 “종족”까지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가르쳤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당시 근동과 중동 지역의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던 대제국 바사에서, 자신이 “유다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베냐민 자손”이 어쩌고 하는 것은 그 당대 최대의 문화를 뽐내고 있던 수산성 시민들이 들으면 코웃음거리밖에 안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자기가 가보지도 못한 조국인데도 그 유다의 핏줄을 귀중하게 여겼고 에스더에게도 그것을 철저히 주지시켰던 것입니다.
  나중에 결국 그 조국을 구원해 내었던 두 사람은 이처럼 ‘민족의 과거’를 잊지 않고 그 유산을 귀중하게 간직할 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민족 역시 정말 자랑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만년’이라는 역사에 있는 아니고 ‘단일민족’이라는 사실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남겨준 최대의 민족 유산은 바로 ‘순교자 신앙’입니다.

  이것은 결코 아무 민족이나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겨우 100년밖에 안 되는 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이루게 된 것은 초창기 선교사 시대 때부터 시작하여 일제와 공산주의 침략을 통과하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순교자의 피가 그 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국 교회가 너무나 빨리 성장한 까닭에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부작용에만 비판의 눈을 모으고, 그 성장 차체가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과 그런 축복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스스로 고개를 돌리고 땅에 파묻어 버리려 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도 못난 행위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계 안에서도 ‘순교자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교회와 성도를 비아냥거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런 순교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이 그 말에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 위대한 선조들이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임을 당할 때 비겁하게 물러서고 배교했던 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네의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기 위하여 역공으로 비판해 오는 소리 앞에서, 당연히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편에 있는 이 순교자의 후손들이 오히려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순교자의 후손 운운 하는 것은 교만한 말이 된다.”라고, 오히려 그것이 무슨 크게 부끄러운 일이나 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객전도격인 비난을 주인 쪽에서 고스란히 수긍하고 자신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에게 자기도 같이 침을 뱉다니, 이 무슨 못난 짓입니까?

  정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 순교자의 피가 바로 우리의 혈관에 흐르고 있으며,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순교자의 피가 이 땅을 적셔 놓았기 때문에 이 민족이 지금도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100년 전에 5000년에 걸친 암흑시대를 깨뜨리고 처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민족이 실로 위대한 새 출발을 하게 되자, 시기하는 사단의 방해공작과 정면공격이 즉각 안팎으로 사정없이 퍼부어졌지만, 그 모든 환란과 박해를 오직 순교의 피로써 이겨내고 이 조국과 이 신앙을 지켜 우리에게 물려 준 선조들 - 이들이 남겨 준 ‘과거 역사’를 진심으로 귀중히 여기면서, 이 최고의 민족 유산을 계속 간직해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민족의 현재’를 공산주의라는 대적의 악한 계교로부터 반드시 지켜내어야 합니다.


  에스더 7장 3절부터 6절 말씀에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일러 가로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뇨 /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때쯤 이미 하만은 바사 제국 산하의 모든 유다인들을 단숨에 진멸하기 위하여 그 계획한바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미 수산성을 위시한 각 도에는 그 해 마지막 달 곧 “아달월 십 삼일”에 모든 유다인을 죽이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왕의 조서가 이미 배포되어 있었고, 특히 모르드개를 죽여 매달기 위하여 “오십 규빗”이나 되는 높은 장대까지 세워놓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3장 1절에 보면 이 하만이 “아각 사람”으로서 바사 왕의 총애를 받아 최고 관직에 이르기까지 입신출세한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아각 사람’이란 말은 바로 ‘아말렉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들은 멀리 출애굽 시절부터 이스라엘과 절 천지 원수였는데, 사울왕이 이들을 진멸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살려 두었던 것이 500여년이 지난 후에 와서 이런 민족적인 위기를 자초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엄청난 권력을 동원하여 자기 민족을 통째로 삼키려 하는 이런 악한 하만에 대하여, 에스더는 자기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에 4:14)인 줄로 받아들이고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는 결사적인 각오로 기도하면서 대항하여 나섰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모든 여건을 조성시켜 놓은 후에 이제 아하수에로 왕 앞에서 최후의 ‘올인’을 할 때, 에스더는 왕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강력하게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그 첫째는,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한 대로, 에스더 자신의 생명은 유다 민족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유다 민족을 잃으면 왕이 총애하는 자기도 잃게 된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에스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까지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바로 4절에서 그녀가 “내 민족이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유다 민족은 바사 제국에 충성하고 왕을 이롭게 하는 소수민족이므로 이들을 다 노예로 판다고 해도 역시 왕에게는 큰 손해가 될 것인데, 하만은 이들을 그냥 다 죽여 버리려 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왕에게 불충하며 국가에 해를 끼치는 반역적인 짓이겠습니까?’라는 뜻이었습니다.
  실로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살리고자 하는 애족과 동시에 자기가 속한 나라 바사제국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애국정신까지 함께 발휘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는 이미 ‘악한 하만’의 계교가 착착 진행 중에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반대의 사상이요 정치이념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존중하는 민주주의와 일당 일인 독재로 일관하는 공산주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습니까?
  개인의 생존권과 사유재산을 철저히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민주주의가 김정일 한 사람을 신처럼 모시고 모든 재산을 국가가 소유하는 공산주의와 어떻게 함께 통일조국을 세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즉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민주주의와 기독교에 대하여 ‘아말렉’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민주주의자이지만 민족 전체를 위해서 용공, 친공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성립할 수도 없고 새빨간 거짓말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회 곳곳에는 이런 가면을 쓰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이 대한민국을 급속도로 좌경화시키고 있습니다.
  한 여당 국회의원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한미동맹도 파기할 수 있다.”라고, 원자폭탄으로 위협하는 북한 공산정권은 한반도 평화를 지키자는 쪽이고, 그것 해결해 주겠다고 자기 나라 일도 아닌데도 염려해 주고 노력해 주는 미국은 평화통일의 원수나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6.25사변 때 유엔군이 개입하지 말고 이 민족이 공산화 통일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교수는 정부가 헌정 사상 초유의 국권을 발동하여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과연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사랑하지만 민족을 위해 친공하는’ 행위이겠습니까?
  “자고 일어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저 조선일보를 죽일까?’라는 생각”이라고 말하는 청와대 홍보수석이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먹고 있는 나라, ‘정부에 대하여 비판하는 3대 신문사들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라고 술김에선지 제 정신에선지 모르지만 기자 회견 자리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국무총리가 다스리는 나라, 그 신문사들을 ‘죽이기 위한 법안’까지 이미 국회에서 통과시켜 놓은 이 대한민국이 정말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까?

  얼마 전에는 일부 소수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점을 두고 마치 모든 사학이 다 부정부패 단체나 되는 것처럼 도매금으로 매도하면서, ‘사학 재단 개정법’이라는 것을 끝내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모든 사학 재단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공립학교 교장들까지 함께 반대해도 현 정부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러지 않아도 반미 친공 사상으로 우리 자녀들을 세뇌시키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전교조로 하여금 학교의 운영권까지 흔들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절대 다수가 기독교 재단인 사학을 향하여 날아온 이 포탄은 분명히 기독교 탄압의 제1탄이며 누가 뭐래도 분명히 의도적인 일입니다.
  이제 이 ‘하만’ 공산주의자들이 조금만 더 득세하게 되면 이 대한민국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이롭게 하는 기독신자들을 이 나라에서 ‘진멸’시켜야 할 ‘유다인’들처럼 몰아갈 날도 멀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진보주의라는 가명 아래, 군사독재 항쟁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영광의 탈을 쓰고 실제로는 공산화 운동을 하고 있는 멀쩡한 간첩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것이 이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갖다 바치기 위해서 한 것입니까?
  저들은 아직도 우리가 반공을 외치면 군사독재로 돌아가자는 소리 한다고 몰아붙입니다.
  도대체 어느 누가 군사독재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런 말은 국민에게 ‘군사독재 아니면 공산주의’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아직도 분명히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민주주의는 반군사독재인 동시에 반공산주의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군사독재는 십 수년 전에 이미 다 몰아내었으니 우리는 이제 다시 반공산주의 투쟁을 통하여 진짜 민주화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곳곳에 원수의 위협이 아니라, 원수의 교묘한 간계가, 진짜 함정이, 구체적인 작전이 이미 발동되었습니다.
  이미 ‘모르드개를 달려고 하는 망대’가 높이 세워졌으며 이미 ‘유다 민족을 죽이려 하는 조서’가 배포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현실이 저 악한 김정일의 의도대로 너무나 잘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현 정권이 대한민국 내에서 반공을 외치는 자국민들을 오히려 ‘죽여야 할 주적’처럼 대하고, 북한의 김정일을 민족의 동반자로 여기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 있겠습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이 조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빼앗기면 바로 우리 기독신자와 교회가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조국의 공산화는 대한민국 자체에 아무도 보충할 수 없는 최악의 손해, 100년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며, 남한뿐 아니라 북한의 동포들로부터도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을 완전히 앗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공산화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가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여론을 조장하고 대중을 선동하기에 딱 맞는 환경을 민주주의 사회가 보장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공산화가 되면 다시 민주사회로 돌아오기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공산주의는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자유란 자유는 다 빼앗고 시작하는 철저한 독재정치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소련이나 지금의 북한을 보아도 이것을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단지 선전포고만 없다뿐이지 조국을 망하게 하고 민족을 죽이려는 원수들의 계교가 벌써부터 발동되고 확장되고 이미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생결단의 각오로써 우리 민족의 ‘현재 위기’를 반드시 극복하고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민족의 미래’를 선교사명에 바침으로써 구속사의 선진국으로 이끌어가야만 합니다.


  에스더 8장 15절부터 17절에 기록하기를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면류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의 앞에서 나오니 수산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고 했습니다.
  에스더의 결단과 기도, 그리고 자기 생명을 내건 용기와 믿음으로 인하여 유다 민족은 극적인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악한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했던 장대에 자기가 오히려 달려 죽게 되고, 하만의 계교에 의하여 작성되었던 왕의 첫 번째 조서, 즉 12월 13일에 모든 유다인을 죽이도록 되어 있는 그 조서에 대해서도 대응조치가 취해지게 됩니다.
  바사 제국에서는 일단 왕의 조서에 인장이 찍히고 반포되고 나면 그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취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경우에도 그 첫 번째 조서는 그냥 두되, 그 대신에 그 12월 13일이 오면 유다인들이 함께 모여서 자기들을 죽이려 했던 자들을 오히려 죽일 수 있는 일종의 '정당방위권‘을 허락해 주는 두 번째 조서를 만들어서 배포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인데, 그렇게 됨으로써 유다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것으로만 끝나지 아니하고 바사 제국 내에서 평소에 유다인에 대하여 적대적이던 원수들을 아주 합법적으로 깨끗이 제거해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뒤바뀌니까 자연히 바사 제국 내에서의 유다인의 지위는 절로 급상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 16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유다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본토 백성” 즉 바사 사람들이 오히려 “유다인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유다인이 되는 자” 즉 아예 개종을 하고 유다인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까지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잡혀온 포로민의 후손에 불과했던 유다인이 그 바사 제국에서 오히려 일등 민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에스더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없어져 버리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결코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다 백성은 당신께서 택하신 선민이며 장차 보내실 메시아를 위하여 준비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세속적인 세계사에서는 바사 제국이 주인인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에서는 어디까지나 유다 민족이 그 유일한 주역이었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뿐 아니라 역사상 늘 그랬습니다.
  어느 민족이든지, 어느 나라이든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위해 쓰시는 나라에는 항상 영광과 축복이 따라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 시절에 복음 전파를 위해서 로마제국을 그렇게 쓰셨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독일과 스위스를 발전시키셨고, 청교도신앙과 장로교 전수를 위해서 영국의 전성기를 사용하셨으며, 지금은 미국을 들어서 세계를 먹여 살리는 요셉의 창고처럼 쓰시려고 저렇게 축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축복의 바통이 바로 대한민국으로 건너오고 있습니다.
  남미로 내려가지 않고 일본을 건너뛰고, 바로 이 대한민국으로 직접 전달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는 바로 이 바통을 틀림없이 건네받고 이제 세계선교의 마지막 남은 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여기에 온통 다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교만이 이 조국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대한민국이 살아야 세계선교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대한민국은 절대로 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국과 이슬람 지역과 마지막 이스라엘에까지 이르는 이 ‘땅끝까지의 선교’에 앞장 서는 것만이 우리 민족에게 축복과 영광이 쏟아질 수 있는 틀림없는 길입니다.
  메시아의 초림을 위하여 유다 민족을 그렇게 선하게 돌보아 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제일 앞장서서 충성하고자 하는 민족을 구원은 물론이요 어찌 복 주시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5000년의 역사가 그저 위로 중국으로부터 아래로 일본으로부터 늘 당하기만 하던 약소민족이었지만, 이제는 저 13억의 나라와 저 세계 2위의 부자 나라를 오히려 이끌어 갈 수 있는 영적 어드밴티지는 오히려 우리에게 있습니다.
  비록 세계지도 제일 끝, 극동이라고 불리는 곳에 새끼손가락 반만큼 튀어나온 작은 나라이지만, 이 대한민국이 21세기의 세계 역사를 주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번 꼭 한 번만 더 승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제의 박해와 공산주의의 무력 침략을 각각 한 번씩 이미 이겨내었으니, 이제 이 대한민국 내부에 잠입한 이 무신론 적기독 세력의 공격만 패퇴시키면, ‘삼 세 번’이라는 말도 있듯이, 다시는 이 민족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완벽하고도 깨끗한 KO승리가 될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크게 써 주셔서 천하의 열방들과 민족들이 우리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될 그 영광스러운 앞날, 이 조국이 세계 역사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최고의 영적 선진국이 될 날, 우리 민족이 받은 이 멋진 ‘미래 소망’이 꼭 성취될 내일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했던 요한 낙스의 당찬 기도는 결코 헛소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귀국한지 불과 1년 수개월 만에, 낙스를 중심으로 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 세력을 지지하는 프랑스군과 전쟁까지 치르면서도 끝내 완전 승리를 거두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마교황청의 모든 영향력을 배제하고 미사를 위시하여 천주교의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법을 세우게 되며, 요한 낙스가 중심이 된 신조 위원회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철두철미한 성경중심의 개혁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설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족(愛族)은 귀중한 것이지만 민족주의는 항상 사탄의 도구가 되어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일본제국주의가 다 그런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바로 그 민족주의를 앞세워서 지금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김정일 독재를 정당화시키려 하고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세계의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스스로 소외되려 하는 망국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민족을 살리고 복 받게 하는 길은 오직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기도할 줄 아는 신앙적 애족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간절히 드려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명이 걸려 있는 우리민족이 큰 위협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원수들이 조국의 미래와 우리 아들딸들의 생존과 기독신자의 자유를 짓밟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는 말은 결코 어떤 연례적인 구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입니다.
  이것은 가상도 염려도 아니라 이미 우리 피부에 닿아 있는, 아니 이미 우리 몸을 찌르기 시작한 실제상황인 것입니다.

  낙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우리 역시 이 구국의 사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에스더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기독신자가 된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인 줄로 깨닫는다면’ 저와 여러분 역시 이 시대적인 사명에 결단을 하고 용기를 발휘해야만 합니다.

  우리 민족은 이미 그런 역량을 발휘해 왔습니다.
  일제와 6.25사변을 통하여 그 압도적으로 불리하기 짝이 없는 전투를 많은 순교의 전사자들을 내면서 끝내 이기고 말았습니다.
  실로 일당백의 영적 전투력을 발휘했던 선조들이었고 이 짧은 100년의 한국 기독교사에 정말 혁혁한 전과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와 여러분의 혈관에도 그 순교자의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사단을 이길 수 있는 영적 유전인자가 전해지고 있으며, 우리민족에게는 절대로 아무나 얕볼 수 없는 영적 잠재력이 아직도 충만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이 민족을 구했다!’ - 이것은 이미 우리 민족의 과거에 있었던 일이며 오늘 우리가 한 번 더 해야만 할 일입니다.
  ‘이 민족을 우리의 선조들이 구해내었고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 우리 자손들의 입에서도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을 두고 이런 말이 나오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 이 기도와 함께 우리 신앙 선조들이 이룬 자랑스러운 과거를 이어받고, 현재 우리의 소중한 조국을 위협하는 원수들을 물리치고, 미래에 이 조국과 민족이 세계선교의 선진국이 되는 소망을 실현시키는 경향의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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