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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장례식 설교

(장례식 17편설교)

by 【고동엽】 2022.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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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 운명 전 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위로와 소망
찬송: 539, 545
성구: 살후 2:16-17

1. 이별이 주는 선물
사랑하는 애인과 이별을 한 자매가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일도 하기 싫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삶 자체에 대해 별 의욕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매의 아픈 마음을 들어 주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에 다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아픈 마음에 참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말도 해주지를 못했습니다. 세월이 약임을 다시 한 번 말해 주고 인간의 헤어짐은 새로운 소망을 향한 출발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아픔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2. 인도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죽음’의 문제로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슬픔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불확실한 성도가 있었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예배에 참여한 우리들도 다양한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아픔과 슬픔의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상처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을 건지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통해 당신을 구하셨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정도로 존귀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때 당신을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근심에 빠진 자들에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던 예수님을 기억하십니까? 하늘로 오르신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보혜사는 상담자, 위로자, 변호자를 의미합니다. 당신을 위로하시고 상담하실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께 당신의 아픔과 슬픔을 내려놓기 바랍니다. 당신의 생애 속에 아무런 낙이 없고, 소망이 없다고 말할 때 주님은 당신의 가슴에 새로운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둘째로 당신을 굳게 세워 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될 때 당신을 붙잡아 주실 분, 진리를 붙잡고 나아가는 당신이 실망될 때 당신을 든든히 지키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입니다. 당신을 영원한 나라까지 인도하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영원한 위로와 소망
나그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아픔과 슬픔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감추거나 피하려고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은 허전함이 느낍니다. 저는 죽음을 앞둔 사랑하는 000님에게 하늘로부터 말미암는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이 넘쳐나기를 바라고, 굳게 세움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 둔 가족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000님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늘에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소망의 줄을 잡고 믿음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슬픔 가운데 머리 숙인 우리를 능히 굳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가질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만큼 선한 싸움을 위해 질주할 뿐입니다.

오늘 임종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십자가 그늘 아래서 위로 받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운명 전 예배 설교(돌아가실 분이 믿음이 없는 경우)

제목: 인생의 종말
찬송: 534, 539
성구: 창 49:28-30

인생이란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시유종(有始有終)한 한정적인 존재입니다. 태어났다가 때가 이르면 죽고마는 존재가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 지존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생명과 호흡 그리고 만물을 주심으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곧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생이 아닌 죽음이 다가옴으로 인해 인생이 종지부를 찍는 것이 사실입니다.

1. 죽음의 의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도 존재의 사라져버림도 아닌 분리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죽음이란 생명의 본체이신하나님과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범죄하면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겔18:4).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것이 곧 영혼의 죽음입니다. 둘째, 육체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이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육체가 영혼과 분리될 때 육체만 남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은 부패되고 썩어버립니다. 야고보서 2:26절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영원한 죽음이 있는데 이것은 마지막 대심판대 앞에서 주를 밎지 않던 불신자들이 지옥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되어 고통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끝도 없는 세월 동안 단절된 상태와 분리된 상태 속에서 영육이 다같이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2. 사후 상태
죽고 난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세 가지로 그 상태를 성경은 보여줍니다. 첫째, 일반적인 상태인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죽은 후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죽거나 자는 것이 아니라 멸하지 않는 생을 가지며 죽은 후에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둘째, 신자의 상태를 보면 의인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가서 빛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립니다(히 12:23, 고후 5:1,6). 셋째, 불신자의 상태인데 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짐을 받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고통과 어두운 가운데서 대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권능으로서 능욕을 당하기 위해 부활하게 됩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좋은 세계로 갈 수도 있고 나쁜 세계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그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최후를 장식할 것인가? 이는 대단히 중요한 최종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 영원토록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는 날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부름을 받는 날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000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000님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000님과 가족 여러분들이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 천국의 소망이 든든한 가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임종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영원한 세계
찬송: 291, 295
성구: 고후 5:8-9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던 고 000(직분)님께서 0일 0시 0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셨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000(직분)님께서 살아 생젼에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는지. 믿음에 있어서 항상 최선의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눈물과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00년간 병석에 계시면서도, 자신보다는 늘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000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자녀들이 믿음 위에 서서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이제는 000님의 뜻을 받들어 더욱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유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바울 사도의 소원
사람들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에서 나타나 있는 것처럼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몸을 떠나가서 주님을 만나 뵈옵는 그것이었습니다. 먼저 부르심을 입은 000님께서도 바울과 같이 속히 육신을 떠나 주님을 만나 뵈옵기를 소망하셨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몸 안에 거하든지 또는 떠나든지 간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이 세상을 떠나, 몸을 떠나 주님을 만나는 것을 고대하였을까요? 주님이 계신 그곳에는 이 세상에는 없는 참된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 그곳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000님께서도 이제는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서, 슬픔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더 이상 아픔과 고통이 없는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는 줄 믿습니다.

2. 성도들의 소원
누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선택함을 받아 예수님을 믿어 사죄의 은총을 받은 성도들이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 000님은 예수를 믿어 이미 저 영원한 하늘나라 시민권을 받은 천국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전에 그분이 그렇게 소원하시던 것과 같이 주님과 더불어 이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고 000님의 시신 앞에서 자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떠난다 하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 계시는 고 000님을 만날 소망이 있습니까? 이 소망이 여러분들의 변치 않는 영원한 소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 000님은 그 동안 많은 어려움과 역경 중에서 고달픈 생활과 무거운 짐을 지고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쉬라 하시매 이 모든 무거운 것과 짐을 벗어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 안식의 세계에, 행복의 세계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세계, 천군천사들이 찬송을 부르는 세계를 바라보시면서 마음에 위로와 평강을 누리는 유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임종예배 설교(믿지 않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

제목: 영원한 장막
찬송: 187, 188
성구: 고후 5:1-5

우리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누구든지 이 장막집에서 영원토록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그네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인생들입니다. 자녀들이 휴가를 받아서 텐트를 들고 경치 좋은 바닷가에 며칠지냅니다. 그런데 거기서 영원토록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육신의 장막집은 언젠가는 무너질 날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흙에서부터 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지으신 장막집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말하는데, 만약 우리 인생이 그렇다면 우리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고 나서는 반드시 선악을 판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그네 인생을 잘 살아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천국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심판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둘러 앉은 유족들에게 저는 목사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남은 날이 얼마일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비록 이 땅에 살아도 믿음으로 준비하며, 우리도 우리의 장막집을 벗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소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2-3절 말씀에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리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2. 천국 소망이 있는 사람
사람의 몸은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의 생명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날이 한 번 불어 흔적도 없어지는 바람 같고 공중에 쏘아서 금방 보이지 않게 되는 살과도 같습니다. 해가 오르면 말라서 사라지는 아침 이슬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가야합니다. 죽음의 길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같이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귀한 유족들의 영혼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 아버지 집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라건대 사랑하는 유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모든 이웃들에게도 지금 바로 이 위로가 함께하사 과도한 슬픔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주신 대신에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천국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이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명예로 집을 짓고 어떤 이는 돈으로 집을 짓습니다. 어떤 이는 힘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지은 집은 육체가 죽는 그 순간에 함께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7) 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돈을 쌓아 놓고 이제 잘 살아보자고 하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를 얻어 놓고 그 다음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지은 집은 영원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모든 유족들이 더욱 믿음에 굳게 서서 훗날 아버지 집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임종예배 설교

제목: 죽음조차 귀중합니다
성구: 시 116:5-16

사람이건 짐승이건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고차원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부터, 말초신경만으로 살아가는 한낱 미물조차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두렵고 공포스러운 죽음이 아닌 귀하고 복된 죽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의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1. 하나님이 우리를 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두시고 때를 따라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는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속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후대하십니다. 이 세상 살 동안도 그러셨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크게 우리를 후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도의 자격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누구입니까? 말 그대로 거룩한 무리입니다. 누가 거룩합니까? 아무리 노력하도 근본이 죄악된 우리 인간은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사람들만이 거룩한 무리,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천국, 우리의 본향에 돌아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귀한 것입니다.

3. 우리의 결박을 푸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온갖 결박에 묶여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고의 결박, 질병의 결박, 사고의 결박, 물질의 결박 등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결박에 묶여 살아갑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 결박을 푸시고 영원한 자유를 허락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없습니다. 완전한 기쁨과 평화와 안식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죽는 것, 즉 예수 안에 죽는다는 것은 공포스럽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육신의 이별은 슬픈 일임이 분명하지만, 이 죽음이 성도의 죽음이 되었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조차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천국을 소망 중에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 입관예배 설교(일반적인 죽음일 경우)

제목: 사모의 정
찬송: 221, 222
성구: 창 50:22-26

1.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타향살이는 사람에게 그리움과 외로움을 안겨다 줍니다. 고향 사람이 그립고 고향의 정취가 그립고 흙내음이 그립습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수많은 실향민들이 아직까지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거나 통일에 접근하는 움직임들이 있을 때마다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공산치하의 숨 막히는 삶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리운 고향 산천에 한 번이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으로 통일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향에 대한 사모의 정입니다.

2. 약속의 땅을 사모하는 요셉
요셉은 어린 시절 형들의 시기 때문에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고 외국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가 팔려온 곳은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보디발은 애굽에서는 직위와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파란만장한 타향살이 가운데, 애굽에서 출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사모의 정이 항상 그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해 팔레스타인에 기근이 생기게 되었고, 그 기근으로 먹고 살기 힘든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꿈을 통해 먹을 것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이제 야곱이 살 수 있는 것은 애굽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차례의 시도 끝에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애굽에 내려가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요셉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땅이 아무리 행복이 있다고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는 행복한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드디어 요셉의 나이도 110세가 되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요셉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자족들에게 잊어서는 안 될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요셉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때한 비전이 있었고, 그 땅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그 약속의 땅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갈 곳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후손들에게 확답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타향 땅 애굽에 영원히 묻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골을 약속의 땅으로 이장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죽었고, 그의 육신은 향재료를 발라 애굽에서 입관하였습니다.

3.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세월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죽음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속에 간직되어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역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들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의 땅, 그 가나안에 대한 사모의 정은 죽음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 그리운 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면 여러분들의 가슴에 무엇이 가득 차 있겠습니까? 돌아가고 싶은 그 어떤 세계가 있습니까?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안식처, 영원한 본향에 대한 사모의 정이 있습니까?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 무엇입니까? 만약 우리가 이 세상 것으로 많이 채워두고 애착을 가지는 것들을 만들어 두면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적어질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운 분이 계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당신의 마음이 이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거나 영원한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입관예배에 참석한 우리의 입에서 “너희는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입관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지상에서 영원으로
찬송: 294
성구: 빌 3:20-21

1. 새로운 피조물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천국의 시민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시는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미 영원한 하늘의 고향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 소망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이 소망은 복스러운 소망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럽지 않은 소망입니다(딛 2:3). 만약 우리에게 이 영원한 산 소망이 없었다면 이 지산에서의 삶은 무의미하며 살맛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망 때문에 슬픔 가운데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 믿음의 이유
이런 믿음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삶은 이런 육체적인 존재에 비해서는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매 7년마다 우리의 육체적인 몸은 완전한 쇄실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생명이 있는 동안 여러 번의 몸들을 경험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은 지속합니다. 사상들과 기억들과 소망들과 목적들은 모두 이런 육체적인 변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유지되어 왔습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 여러 번의 몸들을 소모한 후에 인격이 천상적인 몸으로 계속하여 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왜 어려운 것입니까? 사실, 생의 가장 참되고 가치 있는 것들은 몸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으며, 고학에 의해서 측정될 수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고귀한 인격과 신실한 우정, 이와 같은 가치들이 우리의 몸 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격의 가장 귀중한 소유인 것입니다.

하늘의 고향에 대한 믿음을 갖는 세 번째 이유는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이 지상의 식민지로 보내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사셨으며, 사랑하셨으며, 죽으셨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는 생을 떠나는 자로서가 아니고 더 큰 생으로 들어가는 자로서 죽음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대해, 그리고 죽음의 사실에 대해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향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또한 그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아버지 집으로 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때로는 연약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다하는 날이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3.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라
먼저 부르심을 받은 고 000(직분)님은 이런 소망 가운데 그의 몸은 비록 이 땅 위에서 병과 싸우는 삶을 살아가셨지만, 이제 이 땅 위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우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도 남은 소망이 있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놀라운 믿음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큰 선물입니다. 모두가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입관예배 설교

제목: 수고의 집을 벗고
성구: 마 11:28

1.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짐을 지고 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짐을 지고 어떤 사람은 작은 짐을 지지만 누구나 짐을 지는 수고로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던 사람도, 태생이 출중하고 천성이 훌륭해도 어쩔 수 없는 수고로움의 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각자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그 무게를 버거워하며 한걸음 한걸음 힘든 발걸음을 옳기는 존재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짐을 지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 이 무거운 짐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느냐가 그 사람의 품격과 지위를 나타냅니다. 이웃집이나 친척들의 초대를 받으면 편한 옷차림에 과일이나 한 바구니 준비해 가면 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초대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맞는 품격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옷차림부터 달라집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나, 맘에 드는 옷이 없다면 당장 백화점으로 달려가 멋진 옷을 사 입게 될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단장하고 초청받은 장소로 들어가세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대통력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초대한 자리에는 멋진 옷도 필요 없습니다. 미용실이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그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믿음의 초대장을 준비하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초대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세상은 그 어느 곳도 쉴만한 것이 없습니다. 휴가가 되고 방학이 되어 산으로 들로 가보지만 세상은 여전히 수고로운 일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잠시 잊을 수는 있겠으나 벗어놓고 쉴만한 곳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16:33을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환란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이라는 곳은 어려움과 수고로움으로 우리에게 참 쉼을 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신 곳에는 참 쉼과 안식이 있습니다. 그것에서 비로소 우리는 수고의 짐을 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고 000성도께서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 더 이상은 수고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초대되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관에 누인 시신과 소의를 걸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영혼은 믿음의 초대장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거기서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벗고 참된 안식을 우리고 계실 것입니다.

이 입관식이 끝나면 더 이상 고 000성도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 기쁨의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고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입관예배의 시간은 육체의 이별이 아쉬운 슬픔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고의 짐을 벗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시는 유족과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발인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성도의 고백
찬송: 231, 293
성구: 딤후 4:7-8

1. 아름다운 고백
이 땅을 떠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땅을 떠날 때 신분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많이 모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많이 누렸을 것입니다. 대단한 지식을 소유하고 살았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떠날 때 남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고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제가 봉독한 디모데후서 4:7-8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입니다. 비록 세상의 많은 것을 누리지는 못했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고백을 할 때에 그는 어떠한 상황에 있었습니까? 그는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죄수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평생을 분투하며 살아온 그 결과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바라볼 때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내가 선하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을 향하여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진실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2.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
그리고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자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 000(직분)님의 발인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인을 더 이상 이 땅에서 볼 수 없다고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고인이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바치고 이 땅을 떠나가시는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을 하나님 앞에 바친 자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이 고인에게 주어질 것을 생각하면서 유족 여러분들은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고인은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고인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그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 너희들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우기를 바란다. 달려갈 길을 다 달리기 바란다. 나에게는 이제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이것은 나만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를 위하여도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담대한 고백을 가능하도록 만듭니까?
그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종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임을 그들은 압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처해서도 담대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3. 고인을 떠나보내고 슬퍼하지 않는 근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하는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울고만 있을 수 없는 근거가 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우리에게 저절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유족 여러분, 지금은 이곳에 시신만이 남아 있는 고인이지만 고인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무엇입니까? 고인을 사랑하는 열심히 좋은 수의와 좋은 관을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드리려고 애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고인을 가장 사랑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잘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에서 고인을 다시 만날 확신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확고히 가지시면서 믿음의 길을 걸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발인예배 설교(불신자의 가정일 경우)

제목: 하나님의 심판과 영생
찬송: 289, 291
성구: 빌 1:20-21

1. 피할 수 없는 죽음
오늘 우리는 고 000(직분)님의 발인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죽음의 현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현실 앞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당연하게 다가오는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과연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당연하게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 넘어진다 해도 우리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죽어야 할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문제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인해 에덴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6:23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생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죄로 말미암아 죽음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된 것입니다.

2. 죽음 뒤에 기다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생
말씀은 우리에게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현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 제가 봉독했던 빌립보서 1:21은 죽음의 문제를 담대하게 증거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 사도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종노릇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바울은 죽음 자체도 초월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까? 바울 사도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있음을 바울 사도는 담대히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됨을 바울 사도는 알고 있기에 담대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빌립보서 1:23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내일이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 안락한 주택 안으로 들어갈 소망이 있는 광야의 백성이라면 이제 다 낡아서 허물어져가는 천막에 연연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천국을 향하는 영적인 진군
유족 여러분, 사랑하는 분의 죽음 앞에서 애통함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앞에 죽음의 모습으로 있는 고인은 바울 사도의 믿음의 고백을 이해하고 살았던 분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고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의 죽음은 의미없는 죽음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영적인 진군인 것입니다. 고인의 무언의 외침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유족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아무리 대단한 무엇을 하면서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저와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입니다.

 
 


** 발인예배

제목: 하늘 가는 밝은 길
성구: 엡 2:4-10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일생을 살아가기도 힘에 겹지만, 고단한 삶을 살고 난 후에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몸들인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도 살고 또 죽은 후에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다는 귀한 사실을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누구를 통해 그리고 어떻게 저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이곳을 떠나는 형제(자매)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떠나셨는데 누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1. 죄인된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길입니다.
바울은 누가 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마련해 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구원의 길, 하늘 가는 밝은 길은 4절에 있는 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위해 이 길을 준비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담이나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금기인 선악과를 따먹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그 피를받은 후손들, 곧 우리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이나 판단함에 있어서 그 행위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었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은 뒤에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새 사람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어주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RP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은혜로써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전혀 소망 없는 길을 가고 있던 우리들에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어 주시려고 그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귀한 보좌를 떠나서 이 땅과 역사 속에 오셨고 우리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던 죽음의 원인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으며 우리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영원히 밝은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은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길이 하늘 가는 밝은 길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는 이 길을 갔으니 우리 모두 이 사실을 믿고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길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하늘 가는 밝은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8절)라고 하며 믿음으로 얻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가고 싶은 저 하나님 나라는 믿음 없이는 못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아들 예수를 우리 모두의 구세주로 믿을 때에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갈 수 있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우리 형제(자매)가 떠난 것입니다.

막막한 길, 외로이 가신 것이 아니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주님 손 붙잡고 믿음으로 가신 것을 생각하며 위로받고 남기신 유업과 유훈, 맡기고 가신 일, 마음으로 부탁하고 가신 모든 일들 잘 이루기로 다짐하며 전송하시기 바랍니다.

 
 


** 하관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죽음으로 이룬 사랑
찬송: 290, 545
성구: 눅 23:50-52

1.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가장 이상한 하관예식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인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된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시신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찢긴 몸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정성껏 예수님의 시신을 닦습니다. 예수님의 온 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리마대 요셉은 그 몸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옴 몸을 세마포로 싸기 시작합니다. 또 향품을 넣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요셉은 세마포로 감싼 예수님의 시신을 아직 한사람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

외관으로만 본다면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는 장례의 예식입니다. 하지만 부자의 묘실에 넣어지는 그 시신은 누구의 시신입니까? 예수님의 시신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시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히브리서 1:1-3에서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 말씀합니다. 그 본제의 형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씀합니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며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차디찬 굴에 세마포에 감겨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를 위함입니까?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를 위함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은혜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2. 믿는 자의 영광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 000(직분)님의 하관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땅에 묻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던 사람의 시신이 땅에 묻히는 것은 참으로 소망이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으로 묘소를 꾸민다 하여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땅에 묻히는 고 000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땅에 묻히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이 땅에 울려퍼지는 날 고인은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은 이미 낙원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울지만 마시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지시고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하관예배 설교(불신자의 가정인 경우)

제목: 성도들이 가는 곳
찬송: 292, 545
성구: 계 21:10-23

1. 성도들이 가는 곳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는 고 000(직분)님의 하관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관이 잘 파놓은 묘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이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고인의 관이 묻힌 이곳을 흙으로 덮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묘지 앞에는 ‘성도 000’라는 이름이 적힌 묘비가 설 것입니다. 온화하고 사랑이 넘치는 000님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슬픔이 몰려오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슬픔의 이야기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 제가 봉독해 드린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유족 여러분 우리는 물건을 사기 위해 가끔 백화점에 갑니다. 대부분의 백화점에는 1층에 많은 잡화상품과 함께 보석을 파는 매장들이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치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 보석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은 가끔은 금은보석을 파는 가게에 가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세상 욕심을 키우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석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 보석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8-20의 말씀을 봅시다.

제가 왜 이 말씀을 읽는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왜 가끔은 성도들이 보석상에 가볼 필요가 있다고 했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사랑하는 고 000님이 가신 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수 있는 자
보석으로 꾸며진 집이 있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입니다. 모든 성곽은 벽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000님이 가신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모든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가게 될 나라입니다. 고인을 더 이상 뵙지 못한다고 하는 안타까움의 눈물이 있는 이 자리는 눈물만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물론 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장례의 고통스론 부르짖음 같아서는 안 됩니다. 소망의 눈물, 기쁨이 담겨 있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그 나라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와 그 어린양이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성에 들어가 이 영광스러운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1:27을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랴” 누구입니까? 누가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수 있는 자들입니까?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는 여러분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인하여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복음을 받아들이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고인이 믿고 구원 받은 백성으로 이 땅을 떠나셨음을 인하여 감사하시가 바랍니다. 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천국으로 가신 고인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하관예배 설교

제목: 안식의 삶
성구: 창 2:1-3

안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일찍이 창조 사건에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6일 동안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지으시던 일을 다함으로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1. 안식의 의미
이 세상의 수고와 무거운 삶을 마감하고 고인은 지금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셨습니다. 고인을 안장하는 이 자리에서 안식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하나님은 그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안식, 하나님이 먼저 본을 보이신 안식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창조기사에서 안식을 중요하게 다루고 계십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자들이 7일째 되는 날에는 안식하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신성국가의 핵심인 십계명의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신 날이요, 하나님이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이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써 지킴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게 됩니다. 창조의 안식을 주신 하나님이 애굽이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거룩히 지키는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2. 안식의 복
만일 안식일이 없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노동과 수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일의 노예가 되거나 일의 중독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안식이 없는 수고의 삶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복입니다.

또 안식일이 없다면 인간은 창조의 세계에 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찾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생명이 없는 죽음의 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오서 생명을 부여 받은 존재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인간에게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 창조의 안식은 안식일의 기원이 되었고 안식일은 7년째의 안식년으로 발달됩니다. 또 안식년이 일곱 번 합해진 49년 다음 해는 50년째의 희년으로서 모든 종들이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땅과 소유물이 원주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원한 안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안식의 세계
인간은 이 땅의 수고로운 삶을 다 마치면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원한 안식은 저주가 아닙니다. 고통이 아닙니다.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이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요, 가야할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이 고인을 떠나 보내는 자리이지만 너무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고인은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제는 수고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습니다. 어두운 밤도 없고 저주도 없는 곳입니다. 죽음도 다시는 없는 곳입니다. 오직 성도의 죽음은 칭찬과 영광과 상급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안식이 있고 천국이 있고 부활과 영광의 상급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난 고인은 지금 주님의 품에 안겨 칭찬과 존귀 가운데 참 안식과 참 평안을 누리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땅에서는 참 안식이 없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참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약속한 안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요,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의 삶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믿음의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화장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마지막 날 부활에는
찬송: 228, 545
성구: 요11:24-27

1. 부활을 보여주신 예수님
오늘 화장예배 앞에 머리 숙인 우리는 다시 한 번 인생의 결과에 대해 예측해 보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한 가정의 슬픔과 영원한 세계를 향한 소망의 빛줄기가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과 특별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부모 없이 3남매가 힘겹게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사로는 병이 들었습니다.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슬픔 가운데 두 자매가 생각해낸 것이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을 지체하셨고, 그동안 나사로는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가정과 동네 사람들은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늦은 시간에 마리아의 가정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썩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얼마나 야속한 눈물입니까? 조금만 빨리 오셔도 충분히 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왜 이렇게도 짜증스러울까요?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썩어진 육신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놀랍게도 나사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미 죽은 시신입니다. 이미 부패된 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늑장을 부리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실체’를 확증시켜 주기를 원했고, 자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2.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는 상관없이 고인의 시신은 몇 줌의 잿더미로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소망 가운데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의 죽음 몸을 다시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주님이 잿더미가 된 고인의 시신을 죽음의 늪에서 나오게 하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저항할 수 없는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연합되어 있는 자들은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물론 불완전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현재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주님에 대한 신앙은 저버린 채 마지막 날의 부활에만 국한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다시 한 번 마지막 날의 부활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고인을 부활체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도서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출판사, 2005
박현모 외 4인, 추모 설교집, 청우, 2005
박종순 외 6인, 장례예식설교, 한국문서선교회, 2005

 
 


장례예식, 정중하고 은혜롭게
[죽음 기획 7]그 진행 절차와 몇 가지 의문점들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장례예배란

장례예식을 잘 치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부활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다. 죽음은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정의 중대한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국가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일들이 뒤따르는 인간사의 중대한 장면이다.

성도의 시신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생명의 부활로 나올 몸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담겨있던 육신을 정중히 다루는 것이 유가족에 대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떠난 육신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겨 우상시할 필요는 없다.

장례의 의의는 무엇보다 유족들을 위로하면서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과 이것을 계기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크게 도모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항상 마음에 두고 봉사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장례예식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신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장례식에는 임종예배,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 위로예배의 다섯 가지 예식이 있다. 이 가운데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은 매우 중요한 예식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장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발인(출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례예배 실제

1) 임종예배
사람의 호흡이 끊어져 인생의 종말을 고하며, 천국에 들어가는 때가 곧 임종이다. 세상에서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구원의 확신이 없이 임종하였다면 그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다시없는 비극이다.

* 어떻게 운명이 임박한 것을 알 수 있는가? 심장이 거의 멎어가는 사람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 안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멎어 있으면 곧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그때에 손발을 살펴보아서 손톱과 발톱이 새까매지면 운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운명하려 할 때 집례자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만 의지하도록 권면하고, 마지막 임종 기도를 드리며, 찬송을 계속 부르는 것이 좋다. 또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임종시에 신앙고백을 듣고 유족들에게 “예수님을 잘 믿어라”는 한 마디의 유언을 남길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 운명한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운명한 다음 중요한 것은 입관식, 발인(출관)식, 하관식이다. 그러므로 임종예배가 끝나면 교회는 즉시 상가와 장례절차를 결정하고 최후의 행사에 대하여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상을 당한 식구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고와 행정상 법적 절차를 밟는 일에 협력하도록 한다. 우선 의사의 사망진단서를 받아야 한다. 사망진단서를 가지고 동사무소에 가면 매장 허가서를 뗄 수 있다. 다 준비되어 있으면 매장허가서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 장례 일정을 논의하는 것이 좋다. 이때 교회법을 따르도록 다짐을 받아야 하고 시신 앞에서 배례나 곡을 하지 않아야 하며, 조객들은 묵도로 예의를 갖추도록 미리 알려두면 좋다.

2) 입관예배
입관예배는 고인의 시신을 씻은 후 옷을 입혀서 관에 모시고 드린다. 관에 뚜껑을 덮고 결관하여 관보를 씌우고 드리기도 하고, 관에 뚜껑을 덮지 않고 옆에 두고 드리기도 한다. 입관은 원칙적으로 임종 후 24시간이 지난 후에 한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다시 소생할까 해서 24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앓던 분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별세 후 24시간이 경과되지 않았더라도 유족들의 요구에 따라 서두를 수도 있고 잠시 연장할 수도 있다.

묵도를 마치면 찬송을 부르고 성경봉독을 하고 설교를 하고 기도로 끝낸다. 입관예배를 마치고 나면 발인예배 시간과 장소를 자세히 알리고 폐회한다. 예배 후에 몇 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다. 유족이 상을 당해 보지 않았거나 전혀 장지에 관한 일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준비물과 과정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 상주는 입관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상복을 입어야 한다.
* 매장허가서를 받아 놓았는지 확인을 한다.
* 영구차는 준비되었는지 확인을 한다.
* 장지까지 따라갈 교인의 인원을 참고로 알려준다.
* 장지에 갈 음식 장만을 확인한다.

3) 발인(출관)예배
불신자들은 발인식을 영결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합당치 않다. 그 말의 의미가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이별이 없음을 생각할 때, 영결식이란 말 대신에 장례식 혹은 발인식, 출관식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발인예배의 집례자는 축도를 마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구차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예배 후 모든 조객들을 좌우로 질서 있게 세우고 집례자가 사진 든 사람의 왼쪽에 서서 팔을 잡고 앞으로 출발한다. 그 뒤에 꽃이 따라고, 상주가 따르고, 유족들이 따르고, 조객들이 따라 나와 영구차에까지 오면 사진은 집례한 목사님이 탈 선두차 앞에 실어 놓는다. 운구한 다음에 집례자는 영구차의 관을 넣는 쪽에 서고 그 옆에 상주와 유족들을 쭉 서게 하고 장지에 함께 갈 조객들은 먼저 차에 타도록 하고 산에 가지 못할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킨다. 집례자는 인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인사가 끝나면 상주들을 지시하여 차에 태운다.

집례자가 상주들이 탄 차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고 내려와서 선두차에 타고 출발하면 그 뒤에 영구차와 조객들의 차가 따르게 된다.

4) 하관예배
영구차가 산에 도착하면 발인식의 행렬과 같은 요령으로 묘지까지 운구한다. 이때 성가대가 있으면 찬송가 543장을 부르는 것이 좋다. 하관예배를 드릴 때에도 집례자는 관머리쪽에 서서 지휘를 하며 관을 내리게 한다. 관이 안장된 다음에 관보, 명정, 횡대를 다 덮고 다시 세 번째 횡대를 열어서 두 번째 횡대 위에 놓고 나서 상주는 집례자의 오른쪽에 서고 조객들은 집례자의 왼쪽에 서게 한다.

찬송은 291장같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을 부르고 설교도 부활에 대한 것이 좋다. 특히 하관예배는 흙으로 된 몸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산 사람끼리 돌아와야 하는 슬픔의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새로운 결심과 부활의 소망을 주는 말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모든 슬픔은 흙속에 묻어 버리고 다시 무덤을 찾아올 때는 기쁜 소식들을 가지고 올 수 있도록 축복기도를 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축도를 하고 하관예배가 마쳐지면 복토(覆土)를 한다. 집례자는 복토 순서를 말해야 한다. “복토 순서는 집례자, 상배자(미망인), 유족, 친척, 교역자, 장로님, 친구의 순서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제일 먼저 집례자가 복토를 한다. 복토를 하는 동안 성도들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복토가 끝나면 집례자는 폐회선언을 한다.

5) 위로예배
산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상주들을 다 모아 놓고 위로예배를 드림으로써 모든 장례절차는 끝나게 된다. 위로예배는 상주들이 가장 허전해 하는 때이므로 더욱 정성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때 교역자는 다른 급한 심방이 있어도 내색하지 말아야 하며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해 끝마쳐야 한다. 이때 상주에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좋다.

 
 


장례 때의 가장 많은 질문들

1. 임종시 곡을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별세했을 때 슬픔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연스런 감정이 북받쳐 우는 것은 괜찮습니다. 다만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계속 곡하는 것과 옛날 유교식 장례에서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곡을 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2. 상을 당했다고 알리는 등을 다는 것과 촛불 켜는 것, 향을 사용해도 됩니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상가임을 알리고 등을 다는 것은 문상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말하듯 귀신을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촛불은 어두음을 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향을 피우는 것은 상가의 상징행위로 혹은 분위기나 냄새 제거의 목적으로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3. 위패를 모시거나 지방을 써서 붙여도 됩니까?
이것은 기독교인으로 거부합니다. 유교식 장례법으로 사당이 없는 가정에서 화선지에 ‘누구누구씨 신위’라고 위패를 써서 예식을 가졌었습니다. 지방을 써서 모시는 것도 돌아가신 혼령이 그 자리에 임재한다는 빙의의 신앙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은 조상의 넋을 종이에 써서 붙여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모셔야 합니다. 추모식 때 중심의 상징이 필요한 경우 위패나 지방 대신 아무개 성도의 제 몇 주기 추모제라고 써서 붙이는 것은 괜찮습니다.

4. 상례시 음식물을 상위에 진설해도 됩니까?
고인의 영정 앞에 음식을 차리는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인이 평소에 잘 드시던 음식을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하여 차려놓는 것을 말릴 필요는 없습니다. 죽은 자는 음식을 차려 놓아도 먹을 수 없습니다. 불필요하게 유가족들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5. 운명한 후 고인의 옷가지를 지붕으로 던지거나 사잣밥을 준비하는 것은?
귀신들이 황천까지 안내한다는 의식의 표현입니다. 믿는 이들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하늘에 올라가지 귀신이나 사자들이 안내하는 것이 아니기에 필요 없습니다.

6. 수의와 유가족들의 복장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는 이들 가운데도 고급 수의를 고집하는 경우를 봅니다. 몇 백만원, 혹은 유명한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몇 천만원까지 한다니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수의를 미리 마련하면 장수한다는 속설도 믿을 필요 없습니다. 간소한 수의를 마련하는 것은 좋습니다. 꼭 삼베로 만든 수의가 아니어도 평소에 잘 입던 양복 등을 입혀도 됩니다. 유가족들의 경우 집안의 풍습대로 하되 삼체로 만든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자는 흰색, 혹은 검은 색 치마 저고리를 입거나 깨끗한 검은 양장을 입어도 될 것이며, 남자는 검정색 양복에 삼베 상장을 팔에 끼는 것도 무방합니다.

7. 임종시 돌아가는 분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이건 조심해야 합니다. 금방 돌아가실 듯 보여도 나중에 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환자 앞에서는 장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강압적으로 고백을 받아내려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예수님 믿으세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평안하세요” 정도로 말씀드려도 다들 알아듣습니다. 운명시간이 가까워 오면 오히려 가족들보다 환자 분이 마음이 차분하답니다.

8. 비기독교인의 상가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은 괜찮습니까?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조언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할 경우를 위해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종교적인 이유로 거리낌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두어 가지 이유에서 상가에서 음식을 잘 먹지 않습니다. 하나는 유가족을 생각해서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분주하고 슬퍼하는 가족들 앞에서 떠들며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고, 봉사하는 이들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음식을 여러 사람들이 먹다보니 위생적으로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멀리 간 경우, 혹은 가족들과 대화가 필요한 경우에 간단하게 떡이나 차를 마시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 문상을 가서 어떤 말을 상주에게 해야 합니까?
정중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로 받으세요. 천국 가셨습니다. 힘내세요. 주안에서 큰 위로 있으시기 바랍니다.” 등으로 말씀드리면 됩니다. 저는 특히 큰 며느님이나 둘째 혹은 셋째나 고인을 모시고 살았던 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노라고 혹은 “고인에게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면 유가족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10. 문상객이 뜸할 때 상주는 휴식을 취해도 됩니까?
본래 예로는 어긋나겠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상주도 쉬어야 합니다. 사람의 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끼리 순번을 정해 쉬고, 혹시 조문하러 갔을 때 내가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조용히 물러 나와야 합니다. 어쩌다 쉬러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와서 불러내면 어찌 쉬겠습니까? 나중에 연락을 드려 그때 갔었는데 뵙지 못했노라고 하면 더욱 감사할 것입니다.

11. 문상 시에 기독교인이 영정 앞에 절을 해도 됩니까?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사드릴 때와 문상 때는 다릅니다. 제사의 죽은 자를 위해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조상을 귀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표하는 방법으로 절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아까 적은 음식문제처럼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절하기보다 고인을 추모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나아보입니다.

12. 상주와는 어떻게 예를 표해야 하나요? 절을 합니까? 일어서서 인사합니까?
입식인 경우, 가정에서 장례를 치를 때 절을 합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도 무방합니다. 저는 절하기보다 허리를 굽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조문객이 적은 가정은 문제가 아니지만 수천 명, 혹은 수백 명이 찾아오는데 절을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 상주들이 힘들어 견딜 수 없습니다. 상주가 엎드리면 나도 엎드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서서 절을 해도 무례가 아닙니다.

13. 입관 때 반함을 하거나 고인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잘라 넣어도 됩니까?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배격합니다.

14. 추모예배는 장자의 집에서만 드리나요?
옛날 농경사회에서 제사를 드릴 때 장자가 무언가 있어야 제삿밥이라도 먹는다 생각해서 장자에게 유산을 물려주어 제사도 장자가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이 바뀌어 딸들도 유산을 상속하게 됩니다. 추모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고인을 추모하고, 가족끼리 화목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나 셋째, 혹은 따님의 가정에서 추모예배를 드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15. 화장을 해도 됩니까?
아직도 몇몇 교회에서는 매장만을 고집하고 가르칩니다만 현재 우리나라 국토는 좁은데 매장만 고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못되어 육신은 먼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먼저 화장의 풍습을 권장해야 합니다. 화장 후 유골을 부수어 강가에 뿌리거나 산기슭에 뿌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자여보호에 맞지 않고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보다는 평소에 잘 가는 기도원이나 교회 앞마당에 뿌리는 것이 의미 있고, 요즘엔 납골당이 잘 되어 있어서 화장을 해도 전혀 서운하지 않습니다.

16. 이장을 할 경우 몇 년째에 합니까?
보통 20년이 지난 후 합니다. 그래야 완전히 육탈되어 백골만 남아 이장하기 좋습니다. 만약 부득한 경우에 이장할 때는 마음이 약한 이나 여성들은 피하고, 대표가 산 일 하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이장하는 것이 좋습니다.

17. 매장 시 지방에 따라 시신만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괜찮을까요?
지방에 따라 매장할 때 관에서 유해를 꺼내 따로 매장하는 탈골 방법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풍습에 따르면 되고, 그 때문에 논란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대신 간소하게 목관을 사서 써야 경제적입니다.

18. 고인이 사용하던 성경을 관에 넣어도 됩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언젠가 이장할 때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시신 손가락 유골이 성경책을 파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성경 등은 후손이 잘 보존하면서 신앙 유산으로 남기면 좋습니다.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며, 천국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 예배하므로 성경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19. 묘 앞에 세우는 비석에는 무슨 말을 적어 넣을까요?
아무개 성도, 아무개 집사, 권사, 장로 등으로 쓰되 비석은 간단하고 검소하게 합니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세우면 됩니다. 크다고 자랑할 일도 부러워할 것도 아니고 적다고 부끄럽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비석에 아들 이름만 새기거나 아들, 딸, 사위, 후손의 이름을 새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인이 살아 생전의 가족들의 이름은 손자들까지 놓으면 나중에 아이들과 고인과의 연결고리가 되므로 좋습니다. 고인의 이름 생년월일, 간단한 성구들을 넣으실 수 있으면 그것도 좋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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