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사랑과 희락과 화평
자료원 : 갈보리교회 박조준목사
구 절 : 갈 5:13-26
*** 사랑과 희락과 화평 ***
본문:갈라디아서 5:13-26.
갈보리교회 : 박 조 준 목사
= 내 용 =
오늘 아침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그리스
도인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씀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 자유에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서 방종한 생활과 살고 있는 것을 지적합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
의 자유란 절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 봉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가운데서 그 참 모습이 들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 그리스도
인의 자유를 계속 누릴 수가 있습니까? 그 답은 성경을 쫓아서 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를 자유로운 상태에 머물게 해 주십니다. 성경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육체에 정력을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
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의 삶에
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자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를 북돋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가 없다
고 하시면 우리의 자유는 숙명적으로 방종으로 흘려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그 본성이 자꾸만 살아남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는 바울이 말하는 대로 선한 싸움을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바로 하려고 할 것이면 날마다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육신이 죽고 영이 사는 생활"이것이
곧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스도 교인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육
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
면서도 아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
에 육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아침 읽은 말씀 가운데 기록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고 그랬습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냐 하는 걸 보면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포도 열매를 맺었으면 포도나무임에
는 틀림없습니다. 사과를 맺었으면 사과나무임에는 틀립없습니다.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라고 하지만은 그 생활의 열매가 육신적인 열매를 맺는
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아직도 교회는 다니지마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입니
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육신적인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
으로 받을 수 없다고까지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 열
매를 맺습니다.? 오늘 아침 읽은 말씀 가운데 아홉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이 아
홉가지를 오늘 아침 다 생각할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중에서 세가지
사랑과 희락 그리고 화평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
니다.
요사에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는 흔해 은혜 충만히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
다고 자랑을 하고, 간증을 하고 심지어 자기처럼 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충만
히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우까지도 보게 됩니다. 사실 성령을 충만
히 받는 사람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라고 할 것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
각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듣기는 들었지마
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약하고 겁이 나고 맥이 없어
서 결국은 마귀에게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5장에서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
은 것은 당연한 일이요, 또 해야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
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나타나는 현상은 여러 가지이기때문에 한 마디로 말
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생활과 인격이 열매로 나타나는
데 대개 아홉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기 되는 사랑과 희락 그리고 화평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그
리스도인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인
에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으뜸되는 희락은 하나님 안에서의
희락이고, 가장 그윽하고 깊은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방문했을 때 형편을 여러분은 잘 기억하실 것
입니다. 처음에는 바울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신앙 생활을 바로 잘해 왔었습니
다. 그런데 바울이 얼마 동안 자리를 빈 동안에 거짓 교사들이 살그머니 들어
와서 유대교의 할례에 대한 교훈을 아주 교묘하게 가르쳐서 저희가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서로 믿음으로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다 없어지게
되고 미움과 시기의 싹이 자라게 되고 있는 것을 사도 바울이 발견했습니다.
사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처음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저희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에게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으로 이 모든 약점을 덮어 줄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대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
회 성도들의 마음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 거짓 교사가 들어가게
되고, 거짓 영이 들어간 다음에 성령의 역사가 줄어 들게 될 때는 전에는 상상
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얼마나 얼마나 사랑했었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세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
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얼마나 사랑했으면 바울에게 눈이 라도
뽑아 줄려고 했을까. 왜요? 바울이 그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그 밝
은 광채를 본 다음에 눈이 좀 나빠지지 않았어요. 바울이 복음 전파 하는데 제
일 지장되는 게 눈병이거든요 그래서 아예 차라리 내 눈하고 바꾸었으면 선한
눈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할 정도로 눈을 뽑아 줄려고까지 했던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저희에게서 사랑이 없어질
때 사랑의 반대인 미움의 행위가 나타나게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성령의 첫째 열매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이 계명을
명령으로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을 보세요." 새 계명을 너흐이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
가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8절에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요한 1서 4장 19절에도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
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
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잠언 25장 21절에
보면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은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했습니다. 자, 이렇게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데, 여러분 우리의 마
음은 어떻습니까? 안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가 없습니다. 이게 고백입
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게 되면 사랑 안하고는 못견딥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헬라어에는 사랑에 대해서 세가지 낱말이 있습니다.
"에로스" 라는 말을 있습니다. 이것은 정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가페"라는 사랑이
있는데 이것은 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에로스"정적이고 "필리
아" 인간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신적인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귀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요긴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면서
그 결론이 믿음.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
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너무 너무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가령,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
정을 생각해 보세요. 사랑이 없는 가정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한 가족을 가지면 뭣합니까? 사랑이 없는 지옥인데 아무리 큰 집을 쓰고
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
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말씀할 때도 제일 강조한 것이 큰 집 사라, 높은 지위
얻어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는 그리스도
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다 주신 것처럼 아내를 위해서 모든 걸
주는 사랑을 하라고 그랬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는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범사에 순종하며 사랑하는 것처럼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하며 사
랑하라고 했습니다. 부부간 뿐이겠습니까? 가족 사이에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
간에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동포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보세요 영원한 것입니다. 얼마 동안 사랑하다가
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할 때는 뭐 없이는 못 살것 같이
사랑하고 누가 반대해도 사랑하다가 얼마 안 가서 서로 사랑이 없어져 가지고
이혼하는 것을 봅니다. 이게 왜 그런줄 압니까? 이건 아가페적인 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것, 인간적인 것 언제
나 변합니다. 얼마 못 갑니다. 그러나 영적이고 신적인 아가페 사랑은 영원합니
다. 사랑은 길이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그랬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가페의 사
랑입니다. 사랑은 웅변적인 말이나 공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실제적입니다.
사랑은 큰일을 가능케 하는 믿음도 아니요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나 예배가 아
닙니다. 그러면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전서 13장에 간략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
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
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믿으며 바라며 참으며 견딘
다는 말의 순서를 보세요. 참는다는 말과 견딘다는 말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
데 바울이 이 두 낱말 사이에 믿으며 바라며라는 말을 넣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참으며 견디는 사랑을 완전히 보충해 주고 있습니다. 믿으며 바란다는
말은 미래의 뜻을 포함한 말들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인정하지만 그 고통이 지
나면 승리가 있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지마는 절대로 짐이 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행복합니다. 한 사람 사랑하면 그만큼 행복합니다. 열 사람 사
랑하면 그만큼 넓게 행복해집니다. 백 사람을 사랑하면 행복의 그 범위가 그만
큼 넓어질 겁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면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
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원수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
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된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원수까지도 사랑
하니까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볼 때 사랑으로 보세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천사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미움으로 보는 사람의 얼굴을
보세요 마귀 보고 싶으면 그저 그거 보면 됩니다. 왜요? 미움은 마음이 괴로워
서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사랑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령 충
만히 받았다고 하면서도 남의 흉이나 보고 미워하고 하는 것은 성령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여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분이 계십니까? 무엇 가지고 알
수 있습니까? 사랑이 충만한가 그렇지 못한다. 하는 걸 보면 분명히 압니다.
복잡한 과정이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희락,기쁨은 성령의 둘째 말입니다. 사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기쁨의 열매를 맺습니다.
요한복음 13장 사랑의 열매를 말씀했고, 14장에는 평화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
했고, 15장에는 기븜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공통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와 같은 열매 가운데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 부터
왔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기준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기쁨도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평화도 세상이 준 것 같이 아니한 주님의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
의 종교입니다. 참 신앙에는 반드시 기쁨이 동반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 주
는 기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은 세상에
주는 기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은 주님
께 속해 있습니다.
시편 100편을 보아도 "온 땅이여 여호와를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
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했습니다. 세상이나 육신이 주
는 기쁨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기쁨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육신의 기쁨은
환경과 조건에 의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은 기뻐하고 흐린 날은 슬퍼
합니다. 일시적인 기쁨이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기쁨은 영혼의 기쁨이요 하늘의 기쁨이요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내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맑아도 기뻐하고 흐려도 기뻐합니다. 형
통해도 기뻐하고 역경에도 기뻐합니다. 건강해도 기뻐하고 병들어도 기뻐합니다
들어와도 기뻐하고 나가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령의 열매인 기쁨이 있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마
음이 슬플 때는 무려해집니다. 피곤해집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새
로운 힘을 더해 줍니다. 기뻐하는 생활이야말로 능력 있는 생활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기쁨으로만 하면 힘들은 게 없습니다. 똑같은 일이라
도 기쁨으로 하는 것과 기쁨 없이 하는 것은 하늘과 땅입니다. 가정에 일을 보
는 주부님들이 이 더운 여름에 집에서 빨리하고 밥을 기쁨으로 해 보세요. 내
식구가 맛있게 식사를 할 것 생각하고 기쁨으로 해 보세요. 내 식구가 깨끗한
옷을 입을 것을 생각하고 기쁨으로 빨래해 보세요. 힘이 덜 듭니다. 일이 잘
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주부가 기쁨이 없이 불평과 원망 가지고
일을 해보세요.' 나는 이 더운 여름에 밖에도 못 나가고 빨레나 푹푹.'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보세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일은 같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환난이 많고 죄악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성령을 통해서 기쁨을 소유해야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혼란을 이기고 어려움이 변하여 밝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당한 일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어 고생하는 여자를 고쳐 주었는데 이것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억울해 하지도 않았습
니다. 그러면 저들에겐 감정이 무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을 통해서 오는 하늘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밤중
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미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듣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고랑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간수도 예수를 믿게 되고 그의 가
정에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한
하늘의 기쁨은 놀라운 기적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봉사생활을 해도 기쁨이 필요합니다. 약한 사람을 도와 주고, 가난한
사람을 붙들어 주며 병난 사람을 찾아 위로하고 역경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
아 주는데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어디서 옵니까? 주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오는 기쁨을 소유하게 될 때 우리가 봉사 생활을 할 수 있는 능
력을 얻게 되는 겁니다. 봉사뿐만 아닙니다. 우리에게 수시로 닥치는 시험을
이기는데도 마음에 심령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임하는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라야 다가오는 모든 시험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빈 집에 도둑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예배당
도 다닌다고 하고 신앙 생활도 한다고 했는데 시험에 빠집니까? 교회는 다니지
마는 참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니까 마음 속에 성령을 통해 오는 기
쁨을 소유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그 마음이 비어 있으면 마귀가 그 안에 쑥 들
어옵니다. 참된 신앙으로 그 마음 속에 주님이 주신 기쁨, 영혼의 기쁨으로 충
만한 사람은 세상의 기쁨을 볼 때 시시하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
에 기쁨을 볼 때 시시하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에 기쁨의 노래가
있으면 내 영혼에 참 만족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에 더러운 죄악이 침노
하지를 못합니다. 아직도 그런 기쁨 없습니까? 세상에 뭐 좀더 좋은 게 없겠나
생각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다가 마귀에게 딱 잡히고 여러분 마음 속에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시험에
들지 않게 되시를 원합니다.
화평 이것은 세째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피상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것은 재물이나 지위
나 권력 같은 세상 환경에서 오는 것이고 또 다시 그 환경이 빼앗아가는 평안
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된 평안입니다. 환견에 좌우되지 아니하는 평안입니
다.
여려분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신앙 생활하면 아무
런 어려움도 당하지 아니하고 평안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
면 기독교나 미신이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
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준다 하였습
니다. 예수님의 평안이 무슨 평안이겠습니까? 육신적인 평안이겠습니까" 아마
육신적인 면을 따진다면 예수님처럼 고생한 사람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날 때 어디서 나셨습니까? 마구에서 나셨습니다. 갓난 아기 때 애굽
에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30년 자라면서 아버님 목수의 집에서 고생하며 자랐
습니다. 학교라고는 문 밖에도 못 가보았습니다. 외국여행 한번도 못해 봤습니
다. 책이라곤 한 권 쓴 것도 없습니다. 전도하시는 동안에도 얼마나 고생하셨습
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는 깃들일 곳이 있지마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어서 고생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쫓아 다니면서 눈에 불을 켜고 이렇게 말하면 요렇게 비난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렇게 음모하는 이런 가운데 살다가 나중에는 십자가를 지신 분이 아닙니까?
예수의 일생은 육신적으로 말하면 한 마디로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며 여기 말씀하시는 주님에 평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심령에 평안을 의
미합니다.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지마는 그 심령의 평안을 빼앗기
지 아니하는 참된 평안이었게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의 평안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막힘이 없는 언제나 같이 하는 생활을 할 때 오늘 깊
은 심령의 평안입니다. 사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 주님과 함께 한 사람은 언제
나 이런 심령의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
데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환영하는 것을 본 헤롯은 좀더 인
심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도 헤아려고 사도 베드로를 구속해서 깊은 감옥에
가두고 군인들로 하여금 단단히 지키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형편을 언제 어떻게 될런지 알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데
성경에 보게 돼면 베드로는 그날 밤에 감옥 안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던지 천사가 와서 깨울 때까지 잠을 잤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일 형장의 이슬이 될 수 밖에 없는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깊고 편안히 잠잘 수가 있었습니까? 그 마음이 평안했기 때문입
니다. 주님의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환경과 처지에 이르던지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요새 흔히 말하는데 천만원짜리 침대에 누워서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좋지 않은 단칸 방에 살아도 편안하게, 마음만 평안
하면 그게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화평이 있어야 무슨 일을 해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화평이 있어야 건강도 좋아집니다. 마음이 화평해
야 학생이 공부를 잘 합니다. 마음이 화평해야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장사를 잘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그를 믿는 사람 마음 속
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불안과 초조 가
운데 사는 인생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 충만히 받아서 사랑이 여러분 마음 속에 넘
치게 되실 바랍니다.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에 화평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임해서 진정한 평화를 맛보며 이 험한 세상
을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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