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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환목사/전도하는 주님의 마음 (마 9:35-38)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전교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 저희반이 한 종목을 남기고 종합점수 일등을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한 종목이 400M계주였습니다. 다행히 저희 반에 달리기 선수가 한명 있어서 우승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육상선수인 동료가 1번 선수로 20M 정도 벌려놓아 이제 일등이라고 난리를 치며 응원을 했는데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3번 선수가 마지막 주자인 4번에게 바턴을 잘못 넘겨주어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3등 안에도 못들어 저희 반은 종합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신앙생활도 영적 계주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이후로 2000여년동안 복음의 계주가 계속되어 내게까지 복음이 전달되었는데 나는 이 바턴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가? 혹시 내대에서 신앙이 중단되지 않는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전도로 누군가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왜 전도를 해야 할줄 알면서도 못하는가? 어느 연구소에서 설문 조사한 결과 그이유가 10가지가 있는데
1.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
2. 전도의 필요성을 그다지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며.
3. 전도가 부끄럽고 창피하기 때문
4. 욕을 먹을까 겁이 나서 못하고
5. 어찌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기에 못하고
6. 해야 할 다른 일들이 너무 많고 바쁘기 때문이며
7. 본 교회가 멀기 때문이며
8. 행실이 모범이 못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9. 해봐도 안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고
10.전도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많은 성도들이 전도가 두렵고 용기가 안나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설사 해본다고 해도 거절할까 두렵고 욕을 먹을까 두렵기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혼자 하지 않고 항상 두명 이상씩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둘씩 짝을 지워 보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명하신 마지막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18-20)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라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아라/. 그리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로만 전도를 명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이 이땅에 사시면서 직접 전도의 모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세요. 모든 도시와 촌을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셨고 회당에서도 수시로 가르치셨고 천국복음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접 모든 병자들을 치료하시며 모든 약한 것을 고치면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못하는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전도자의 마음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그 전도의 마음과 우리의 전도의 마음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도의 자세도,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전도하셨으며 어떤 마음으로 하셨나요?
1. 열심으로 전하셨습니다.(35절)
오늘 봉독한 말씀을 잘 보세요. 모든 성과 모든 촌을 두루 다니시며 전하셨습니다. 여기 성이란 도시를 말하고 촌이란 시골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전도하셨고 당시의 사람들이 사람취급하지 않는 세리, 창녀, 죄들에게도 전도하셨습니다.
어디든지 복음을 들고 가시여 그야말로 열심히 전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하셨다고(막3:20) 하셨습니다.
너무 쉬실 시간이 없었으나 그런 와중에도 주님은 기도할 시간을 만드셨고 간혹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자 하시곤 배에서 쉬셨으며 주무시기도 하시고 습관을 좇아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며 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에스겔 39:25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 하셨습니다.
왜 우리 주님이 그토록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을까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경 오시거나 여행 오신 것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혼 살리는 그 목적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이 아니라 “죽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하나 하나를 살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셨는지요? 그때 저는 그 응급환자들을 살리는 구조대와 소방대 사람들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들의 행동을 메스컴을 통해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인지라 천천히 여유를 부리지 않습니다. 한시, 일분일초가 급합니다. 들고 뜁니다.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그 위험한 곳에도 아랑곳 않고 뛰어듭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일분일초를 그토록 열심히 뛰셨습니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까지 온 것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그처럼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도 당신의 일군을 세계만방에 보내시어 끊임없이 복음 證據되게 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일하고 계십니다. 한시도 낭비함이 없이 열심과 성실로 온세계 만백성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 열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멸망이 뭔지도, 심판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2. 다양한 형태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다니며”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다니며 전하셨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와 두로와 시돈 땅에도 가셨습니다. 복음은 가만히 앉아서도 전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주님은 가라고 명하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너희는 가서” 라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며”라고 했고 사도행전1장에는 “땅끝까지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다녀야 전하고 선포하며 전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 않으면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라는 단어는 영어로 미션(mission)이라는 단어로 쓰는데 “보낸다” “전한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보냄 받은 자를 말하고 크게 보면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선교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일생에 몇 번은 복음을 들고 세상 백성을 향해 나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주님은 가르치는 사역을 하십니다. 교육입니다. 복음은 선포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 선생들을 세우셔서 목양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양육입니다. 아이를 출산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먹이고 입히고 성장을 시켜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주님의 공생애의 절반은 제자 양육에 바쳤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 제자들을 보세요. 주님께 교육 받을 당시는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12명중 하나는 배신하고 그중 하나는 모른다고 부인하고 무인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주의 성령을 받으니 엄청난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치료하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주님은 놀라운 능력으로 각색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복음전파를 위해 때로는 사람의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며 인간의 약함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창조하신분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인간의 각종 질병을 능히 고치시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영혼구원을 통한 인간성 회복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전파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전도지로만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방송으로, 인터넷으로, 이메일로, 다양한 도구로 활용해야 합니다.
3.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도했습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을 깊이 살펴보면 주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다른 말로는 불쌍히 여기셨다는 뜻이며 동시에 긍훌히 여기셨고 그 긍휼은 단순한 긍휼이 아니라 깊은 사랑을 동반한 긍휼이었습니다.
“긍휼”이라는 뜻이 뭡니까? 영어성경을 찾아 읽어보았더니 영어성경에는 그냥 'Love'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고 번역했으면 간단하겠는데 그걸 왜 긍휼이라고 해서 헛갈리게 하는 것일까? 왜 '사랑'이 아니고 '긍휼'일까요?"
성도 여러분 .
사랑이나 긍휼이 똑같은 사랑이지만 그 개념은 서로 다릅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이 있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같지 않습니다. 또 젊은 사람들끼리 남녀 간에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은 수평적 사랑입니다. 그런데 '긍휼'이라고 하게 되면 이는 아주 높은 위치에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랑을 긍휼히 여긴다 하지 않습니다. 아주 위대하고 높은 분이 아래 사람을 향해 베푸는 사랑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矜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이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망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9: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웃에게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요? 그 동기는 긍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듯이 긍휼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긍휼을 구하는 자를 주님이 참으로 귀하게 여기십니다. 성경에 矜恤이란 단어가 183번 기록되었는데 그 중에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43번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윗이 하나님께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자체가 긍휼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크신 긍휼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어느 장로님에게 아들딸 8남매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들이 다 훌륭하게 자라났는데 특별히 셋은 줄줄이 서울대학교를 나왔고 대학원을 나오고 박사가 되고 했습니다. 참 대단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하루는 심방을 해서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자녀들을 잘 기르는 것이냐구요. 그 장로님은 "제가 뭐 한일이 있나요? 저는 아이들 때문에 걱정해 본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한번도 우리 아이들은 병원에 가는 일도 없어요. 병원하고 우리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인 권사님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권사님 왈 저도 한일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학교 문에도 못나왔습니다. 예수믿어 겨우 한글이나 깨우칠 정도의 수준인데 제가 뭘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하더랍니다. 그래도 뭔사 비법이 있을텐데 말해보라고 권하니 한가지를 말하더랍니다. 저는 아이들이 잠과 씨름하면서 공부하느라 애쓰고, 잘 먹이지도 못하고 입히지도 못했는데 밤새워가면서 공부하는 걸 보니 불쌍해서, 불쌍해서 내가 어떻게 잠을 자겠어요? 그래서 그 옆에 앉아 저는 책도 못보고 할 일없으니까 그냥 뜨게질만 떴다 풀었다, 떴다 풀었다 했었지요." 하더랍니다. 그것이 자녀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아이들이 공부할 때에 언제나 곁에 앉아 있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요새 소위 잘났다는 어머니들, "너 못하는 건 네 책임이다. 학비를 안줬냐, 밥을 안먹었냐, 옷을 안줬냐? 에이, 멍청한 것"하는 어머니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네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닙니다. “미안하다, 공부하라고 해놓고 나는 놀러 나갔고, 델레비젼만 보았고... 네가 어미 잘못 만나서 이 꼴이 되었구나”할 수 있는 마음이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긍휼이라는 것은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 내가 책임을 진다”. 이게 긍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 지셨습니다. 아무도 죄의 값을 대신 물으라 하지 않고 오직 당신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긍휼로 우리를 감싸고 용서하시고 도우시고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262장을 봅시다.
♪어둔 죄악 길에서 목자 없는 양같이 모든 사람 길 찾아 헤맨다.
자비하신 하나님 독생자를 보내사 너를 지금 부르니 오시오,
이때라 이때라 주의 긍휼 받을 때가 이때라 지금 주께 나아와
겸손하게 구하라 구원함을 얻으리 얻으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구원하셨듯이 오늘 우리도 이웃을 향해 긍휼히 여김을 가져야 합니다. 지옥이 뻔히 보이는데, 심판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데 어찌 그냥 둔단 말입니까? 수많은 심령들이 도와 달라하는데 어찌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그 긍휼이 우리에게 있다면 전도는 저절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은 놀라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4. 추수꾼이 나타나기를 기도하며 전도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37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주님은 지금도 추수할 일꾼이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추수할 일꾼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여러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바로 추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간증집을 보니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데 전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다른 이야기는 늘 하지만 한번도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은 설교를 듣고 나서 전도를 못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비서에게 한번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비서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전도를 하였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저한테는 한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도 없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추수를 기다리는 수많은 일꾼들이 살고 있습니다. 게중에는 건드리기만 하면 거둘 수 있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친척중에, 이웃과 주위에, 그리고 직장에 많은 영혼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영혼들을 외면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야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말 한마디도 걸어보지 못하고 산다면 과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그 긍휼의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 것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추수꾼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온세상을 향해 외칠 추수꾼을 기다리십니다.
어떻게 응답하실 것입니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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