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셨다라는 주장과 로마와 유대교가 만들어 낸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시체 훔쳐 간 거야, 시체 도난설, 죽었다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거야, 예수 기절설, 여러분 이 상반된 주장 가운데 뭐가 훨씬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입니까? 시체 도난설과 예수 기절설이 더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겁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겁니다. 왜요? 여러분, 우리가 매년 마다 사순절도 지키고 부활 주일도 지킵니다. 때로는 어떤 지역의 교회가 함께 모여서 부활절 새벽에 예배도 함께 드립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는 우리가 그렇게 열심을 다해서 부활절을 지키지만 예수가 부활했다는 메시지를 손톱만큼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여 경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초대 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었을까요? 예수의 부활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면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삶을 제자들이 살아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 부활을 신뢰하게 된 겁니다. 얼마나 힘있게 외쳤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삶을 제자들이 살아낸 겁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죠? 베드로입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베드로는 예수가 재판받을 때 예수와 한편인 것이 발각이 되면 자기도 죽임을 당할까봐 3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우리와 똑같은 전형적인 소시민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것 때문에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배반한 존재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이런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가보시면 대제사장이 베드로에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너 한번만 더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벌벌 떨면서 아마 각서를 썼을 것입니다. 다시는 부활을 말하지 않겠다고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가 다시는 예수 부활을 말하지 말라는 대제사장에게 도리어 큰 소리로 이렇게 저항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 가운데 뭐가 옳은지 얘기해보라고 하면서 도리어 대제사장을 훈계합니다. 사람이 바뀐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뀝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내 것을 기꺼이 우리의 것으로 내놓는 겁니다. 여러분 일반 사람의 특징이 뭐죠? 내 것을 철저히 지켜내려고 하고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이기적인 죄악된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행전 2장과 4장을 보면 초대 교인들은 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기꺼이 내어 놓습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뀐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이 뭐냐면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셨음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진짜 예수의 부활의 진실성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뭡니까?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도저히 살아낼 수 없는 삶을 이 땅의 크리스천들과 교회가 살아낼 때만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그리고 부활한 예수를 이들이 만났구나 라는 것을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는 이런 믿음의 모습이 정말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뭐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 이 나라는 명사도 되고 동사도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동사가 될 때는 다스린다, 통치한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즉 어디가 하나님 나라입니까? 뭐가 하나님 나라입니까 라고 할 때 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겁니다.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말은 뭐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름답게 구현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가정이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름답게 일상 속에서 구현되는 그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될 과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회개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을 헬라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메타’라는 말은 바꾼다는 말이고 ‘노이아’라는 말은 인식, 관점이라는 말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인식과 관점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어떻게요? 세상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세계관, 세상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가치관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켜내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는 노예들을 부려 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노예들을 마음껏 부려먹기 위해서 노예를 뭐라고 규정했냐면 노예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일만 하는 기계, 사람의 말만 하는 짐승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래야만 노예들을 마음껏 부려먹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안 들죠. 노예는 일만 하는 기계이기 때문에 1년 365일 내내 일을 시켜도 상관이 없습니다. 말만 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았을 경우에는 얼마든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사회가 노예를 부려먹기 위해 만들어 낸 노예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노예를 뭐라고 얘기합니까? 노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이다, 주인이나 종이나 그리스도 안에 하나이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노예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 노예가 바로 너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인식이 바뀝니다. 여러분 노예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노예를 대하는 모습이 바뀌겠죠. 이것을 우리가 총칭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하여 삶의 변화까지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태어나서 이 땅에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판단의 기준, 세계관, 물질관, 인생관 등이 대부분 다 세상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겁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것이고 미디어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것이고 이 땅의 교육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겁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세계관과 가치관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일치하는 것은 우리가 붙잡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그것들을 내어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가치관을 새롭게 해야죠. 이 모든 과정을 뭐라고 합니까?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할 때,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복음을 살아내는 겁니다. 복음을 살아낸다는 것은 바꿔 얘기하자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요즘은 우리가 교회에서 발견하기 어렵지만 우리 한국 교회 초기에 사경회를 많이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07년에 평양 대부흥 운동 아시잖아요. 평양 대부흥 운동 하면 우리는 무슨 부흥회를 생각하기 쉽지만 평양 대부흥 운동의 핵심은 사경회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몰락에 대해 안타까워 합니다. 한국 교회의 타락에 대해 안타까워 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말씀으로부터 멀어짐에 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교회 오는 사람은 많아졌습니다. 예배는 참 뜨겁습니다. 찬양도 참 뜨겁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과 사모함이 너무 없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이 뭐냐면 손을 들고 하나님을 두 시간, 세 시간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들도 성경을 30분 읽으라고 하면 못 읽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는 겁니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데 그 찬양을 통해서 나의 종교적 감성을 발산하는 것은 참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도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없습니다. 내가 경배하고 있는 하나님,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초기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2주, 한 달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이것을 사경회라고 합니다. 평양 대부흥 운동, 우리 나라의 놀라운 부흥 운동은 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한국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면서 이것저것 프로그램은 많이 도입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점점 식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벤트는 많은데, 가장 중요한 말씀에 대한 배움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다음 중요한 것이 뭐냐면 머리로만 말씀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말씀을 손과 발을 통해서 삶을 통해서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 한국 교회 초기에 정말 중요한 전통을 다시 계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신앙 토론회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사경회를 할 때 오후에 1시간씩 했던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사경회라고 하는 것이 2주, 한 달 동안 하루 종일 말씀을 공부하는 겁니다. 말씀을 계속 배우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배우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후에 1시간씩은 말씀을 배우는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구체적인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를 토론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황해도에 감바위 교회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이런 이슈를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것을 토론한 겁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뭘 결정했냐면 말씀을 쭉 배워보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은 첫째 상호존대를 하는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는 남자들은 여자에게 하대했고 여자들은 남자에게 존대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보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상호 존대를 하길 원하신다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하루 두끼, 또는 세끼 식사를 할 때 겸상을 하길 원하신다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들은 다 독상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모두 독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어디서 밥을 먹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조선의 질서였고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다짐하고 말씀을 배워보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식사를 할 때 상호 겸상을 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것을 일상의 삶 속에서 순종한 겁니다. 지켜낸 겁니다. 얼마나 놀랍냐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일요일에 성경, 찬송 들고 교회 가는 것으로 증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의 삶 속에서 아내를 존귀하게 대하고 식사할 때마다 남편과 아내가 겸상을 하는 모습을 통해서 나는 더 이상 조선의 가치, 조선의 질서, 조선의 문화를 추종하는 조선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한 겁니다. 로마서 12장 1절이 말하는 것처럼 몸을 통해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겁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 교회가 돌아가야 할 개혁의 핵심이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제대로 배워야죠. 그리고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또는 가정 단위에서, 구역 단위에서, 교회 공동체 단위에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함께 논의하고 토론하고 그리고 토론의 마지막에는 우리가 함께 이것을 지켜내자 라고 약속하고 그리고 서로가 그것을 잘 지켜낼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지해주고 그리하여 정말 우리가 이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기심과 탐욕과 욕망에 지배받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일상의 삶을 통해서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형성되었던 가치관과 세계관이 말씀으로 전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제대로 앎을 통하여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그런 신앙의 삶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하면서 우리가 거하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아름답게 구현 되어지는 그런 일들이 더욱더 확장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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