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기초가 아닌 것(1) 인간의 감정 - 이한규 목사
어떤 진리를 추구하는 청년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진리를 찾아야겠다고 산에 올라가
몇 개월이 지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아무리 내려오라고 설득해도
그는 진리를 찾지 못했다며 내려오지 않기에
어떤 목사에게 자기 아들을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후 그 청년은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 아들을 어떻게 설득시켰습니까?"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설득시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다고 설명만 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진리를 잘못 이해하는 모습이 많이 목격됩니다.
진리는 어떤 특이하고 이상한 형태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종류의 진리가 있겠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설교의 왕자라고 불렸던 스펄젼 목사님은
죽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의 신학은 매우 간단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었다(Jesus died for me)'라는 네 단어로 요약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이 확립된 것이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다른 곳에서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리는 어느 곳에서 발견될까요?
우리는 흔히 진리의 적을 두 가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도 이하로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도 이상으로 믿는 것입니다.
불신은 전자의 죄악이지만, 미신은 후자의 죄악입니다.
방언, 신유, 계시 등을 무조건 무시해버리는 것도 죄악이지만,
그러한 것들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그것으로
신앙의 전부를 삼는 일도 죄악입니다.
방언, 신유, 계시 등의 역사를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하고 배척함은 물론 진리가 아니지만,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의 무질서한 모습을
성령 충만이라고 받아들임도 진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현상으로
인준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은사와 기적을 체험했다고
그만 감정에 도취되어 신비 체험만을 하려고
여기 저기 순례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옛말에 "전쟁에 이긴 후 투구를 벗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체험이 깊을수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단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누가 어떤 체험을 했느냐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종교를
'인류의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강렬하고, 가장 끈질긴 환상의 성취'로 간주하고
종교를 지진, 홍수, 질병, 죽음같이 잔인하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연의 위협에 대한 심리적인 방어로 간주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철학적 논리로는 타당한 생각인지는 몰라도
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히 심리적인 방어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정신적인 위안을 주기도 할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인격을 만들어내고 일상생활의
완전하고도 영속적인 조화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감정적 체험만의 기독교는 심리적인 위안만을 제공하여
비 개인 후에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무지개에 불과하지만,
진리의 기독교는 삶과 인격을 변화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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