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세례와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행 2:37-38)
행2장을 가리켜서 초대교회 탄생 장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문 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전도하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본문은 불같은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하여 능력 있는 설교를 하다가 그 설교를 듣고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
①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초대교회(37)
여기 '이 말을 듣고'에서 이 말은 베드로의 설교를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자신들도 모르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탄식을 했습니다.
왜? 이런 탄식이 터져 나왔는가? 그의 설교가 너무도 은혜롭고 감격스럽고 감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의 심령이 찔림이 온다는 것은 복 받을 조짐이요 우리 신앙의 인격이 변화되는 즉, 물이 포도주 되는 과정인줄 믿습니다.
⑴베드로의 설교는 '주 예수를 믿어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이것이 모든 설교의 주제요, 핵심입니다. 사실 예수 없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⑵예배 시간이 어떤 시간입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시간입니다.
생각하면 우리의 형편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잿더미에서 앉아서 회개해야 될 형편입니다. 먼저 정치 지도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각 분야 지도자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찔림을 받고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에 살길이 있고 여기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회개뿐입니다. 니느웨성이 회개하여 민족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습니다. 저마다 피리를 불어도 슬퍼하지 않고, 소고를 쳐도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양심이 화인 맞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정말 '어찌할꼬?' 탄식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질병 때문에 '어찌할꼬?' '가정문제 때문에, 자녀들 문제, 사업문제, 물질문제, 고난문제'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⑶그러나 더 높은 차원의 탄식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탄식해야 합니다.
바로 믿지 못한 것 때문에, 충성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믿지 못하고 살지 못한 것 때문에 이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부정적인 입술, 용서하지 못한 것, 인간의 수단과 방법대로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못한 것도, 주일 성수 못한 것도, 감사하지 못한 것도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찔림이 오고 깨달음이 오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찔려" 영국의 주경학자 '부르스'는 마음이 찔렸다는 것은 '양심에 자극을 받았다'로 해석했습니다. 즉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원어의 뜻은 '찔려 관통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어찌할꼬!'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회개의 공동체입니다. 모이면 그들은 기도했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어찌할꼬!' 하는 자들이 복 받은 자들입니다. /믿/
기독교의 축복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란 맑은 물이 되기 위해 정수 과정을 거치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를 하면 할수록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집니다. 회개란 주님을 떠났던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교회를 떠났던 사람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가 날마다 더하면 지옥이 됩니다만 회개가 날마다 더하면 천국이 됩니다. /믿/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질문이 마음이 아파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양심이 찔려 견딜 수 없어 나온 고통 속의 질문입니다. /할/
②'우리가 어찌할꼬'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3가지의 명령입니다(38).
⑴너희가 회개하라! 회개란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음, 생각,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우는 것만이 회개가 아닙니다. 참 회개는 뉘우침이 아니라 돌아서는 것입니다. 뉘우침은 아무리 해봐야 변화가 없습니다. 뉘우치고 돌아서야 변화가 생깁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일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8:1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주님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았는데, 돌아가서 계속 간음을 행하면 참 회개가 아닙니다.
㈂죄와 멀리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경우를 보자! '내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고, 다시는 토색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하였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진정한 회개는 손을 깨끗이 씻는 것입니다.
약4:8절에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정결케 하라' 손을 깨끗이 한다는 말은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바로 하라는 말입니다. 손의 행실 곧 우리의 삶입니다. 불결한 마음은 두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이 더러운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도 손이 깨끗한 것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영향권은 우리 마음과 손으로 하는 일속에 옵니다.
약4:9절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회개를 바로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⑵세례를 받으라! 세례의 영적인 의미는 옛사람의 죽음이요,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세례란 말은 '씻어 정결케 한다.'는 뜻인데, 믿음으로 죄 씻음 받는 자에게 그 증표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말했습니다. /할/
▶세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사함 받는 비결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살겠다는 서약입니다.
㈁새롭게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다시 새롭게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받은 다음부터는 천국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죄에 대해선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신의 혈기, 교만, 욕심, 불의한 모든 자신의 정욕은 날마다 죽는 생활에 힘쓰고 이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새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육신의 사람이 죽으면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뜻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는 '인 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백성, 내 자녀다'라고 인 치신 것입니다. 사41:10절을 보세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멘!/
⑶성령을 받으라! 깨끗한 심령 속에 성령이 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자연적인 인간(육체적 인간) 걷고, 뛰고, 먹고, 배설하고, 잠자고, 자식 낳고 하는 자연 법칙과 생리 원리를 따라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을 말합니다.
㈁정신적 인간 뭔가를 깊이 사색하고 무엇을 만들고, 사상이나 학문을 연구하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꿈을 갖고 노력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영의 인간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부여하신 영혼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영혼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혼이 죄로 오염되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마치 안경이 더러워서 사물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속 사람을 건강하게 치료하여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엡3:16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여기서 속 사람은 영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 속 사람이 바로 서야 예배를 바로 드릴 수가 있고, 기도도 바로 할 수 있고, 헌신이나 봉사도 바로 할 수가 있습니다. 영혼은 건강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 속 사람을 치료하고, 나의 정신과 영혼을 통일시킵니다. 나의 육체가 제멋대로 동작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지배합니다. /아멘!/
또 성령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롬15:13절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어려움이 올 때 그 차이가 납니다. 성령의 사람은 사업이 무너지고, 어떤 큰 어려움이 와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사람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성령의 능력은 나에게 소망과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믿/
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행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할/
본문의 베드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의 출신은 갈릴리였고,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성격은 직선적이고 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지만 구원의 확신도 그다지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것도 잘 몰랐습니다.
그뿐입니까? 빌라도의 법정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오순절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뒤로부터 무서운 것이 없어졌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 안의 최대의 쟁점은 겁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당시 사도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하고 담대해졌습니까? 사도바울 역시 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환난도, 위험도, 적신도, 죽음도, 칼도, 겁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그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양심에 찔림을 받아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가슴을 칠 때, 베드로는 서슴없이 "너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외칩니다. 자신이 성령을 받고 보니까 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는 A.D. 1050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 300년 동안 지속 되어온 바이킹 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기독교 국가가 되어 오늘날 선진국 대열에서 앞장 선 나라가 되었습니다.
17세기 말, 영국과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사회가 극도로 혼란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퇴폐 향락주의가 판을 쳤고, 대낮부터 술 취한 사람들은 거리를 매웠고, 범죄가 심해져 감옥은 초만원이었습니다.
그때 이래서는 영국이 망한다고 생각한 '존 웨슬러'와 '찰스 웨슬러' 형제가 일어나 젊은이들, 대학생들에게 일대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켜 결국 그들이 죽어 가는 영국을 살렸습니다.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의 여파로 사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휘트필드', '무디' 목사 같은 영적 지도자가 일어나서 미국은 복음으로 살려냈습니다. 그들 모두 다 성령 충만한 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과 성령 받았다는 것과는 다룹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이 땅에 40일간 계시면서 11번이나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번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습니다. 꼭 예수를 영접한 여인들에게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받아라!'고 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꼭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 오셔서 성령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내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체험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주님께 붙잡히는 강도가 높습니다.
손으로 땅을 파는 것보다는 호미로 파는 것이 쉽고, 호미로 파는 것 보다 삽으로 파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포크레인으로 찍어버리면 게임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성령의 은사 받으면 게임이 끝나버립니다.
엡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경은 성령 충만과 술 취함과 대조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술 취하게 되면, 소극적인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담대해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겁이 없어집니다. 간덩이가 커진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도 소극적인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술 취한 사람은 술에 힘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할/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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