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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牧會자)는 세례요한의 설교는 안 되어요.

by 【고동엽】 2022. 2. 15.

牧會자는 세례요한의 설교는 안 되어요.

세례요한의 相對는 잠간 모였다가 구경하다가 지나가는 사람 상대이다. 그런고로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고 하였다. 초임목사들이 세례요한의 열정으로 강단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유사한 설교로 외치는데 백해무익하고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노를 쌓고 곧 쫓겨난다. 쫓겨나지 않으면 책망받은 성도가 떠난다. 떠나는 그 성도를 통해 얼마나 전도될런지 아는가? 책망받을 만하여도 사랑으로 양육하면 자리를 채우고 시간이 지나면 본질로 회귀하고 그를 통해 많은 전도가 되고 교회는 부흥한다. 쫓겨나도 외쳐야 한다는 그는 요단 강변의 세례요한이지 목회자는 아니다. 그런 용맹군은 교회를 떠나 요단강변에 가서 외치라.

牧會자는 상처 입은 자를 치료하고(영적치료까지) 위로하고 사랑하고 도와주는 자여야 한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만난 자를 치료하여 준 사마리아인과 주막집 주인이어야 한다. 이들은 참 목회자의 모형이다.
牧會자는 담임하는 교회에서 평생 한번도 책망하는 설교는 금물이다. 책망 설교 듣고 고치는 자는 없다. 아직 그것도 모르는 목사는 애송이 목사이거나 석두목사이다. 고치는자 없는 줄 알면서 책망설교하는 목사는 석두목사 아닌가? 책망받은 사람은 반대로 목회자를 향해 책망하는 마음을 갖고 목회자와 거리가 생기고 너 부터 고치라고 주문한다. 그러는 책망이 목회가 되겠는가?
성도가 고쳐지기를 원하면 자신이 죽어 송장냄새를 풍기고 거기서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여 성령이 함께하시는 감동적인 설교와 그런 삶을 살면서 보여 주면 성도들은 닮는다.

목회자는 치는 설교를 하면 망한다. 갈등한다. 분열된다. 쫓겨난다.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망한다.

치는 설교는 잠간 왔다 가는 부흥사는 조금 효력이 있을 수도? 그러나 담임목사의 사주를 받고 하면 역효과가 난다. 서울동노회 X 교회 담임이 한 장로가 너무 너무 미워 부흥사를 청해 놓고 주문을 하였다. 유명하다는 L. 부흥사가 지혜없이 담임의 증오의 감정을 전수 받아 직설적으로 그 장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저속한 상 말로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그 결과가 담임에게 어떻게 미쳤는가를 생각하여보 라. 담임의 주문은 은혜롭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책망은 잠시 왔다 가는 부흥사는 입으로 시작하여 입으로 끝나니 가능할지 모르나 목회하는 교회에서 평생 한번도 치는 설교는 않은 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같이 살면서 삶을 통한 감동을 보여 회개케 하여야 하는 직업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책망 설교를 하고 그의 삶이 강단의 설교와 다를 때에 그는 위선자로 전락한다.
목회자는 사랑과 섬김만을 하여야. 그 속에 책망의 효과보다 더 위력있는 회개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아마추어 후배목사님들!
지혜로운 자는 남의 경험을 내 경험으로 수용하나 미련하고 둔한 石頭목회자는 반드시 시행착오를 하고서 깨닫는다. 필자도 초기에 세례요한이 된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복음이요,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직설적 책망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소개하면 그 교회 최고 어른이시고 주동되시는 분의 회갑연에 축하 예배를 인도하러 갔는데 그 어른의 장남이 이혼을 하고 객지에서 후실을 얻어 살고 본부인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데 집사이다. 회갑연에 큰 아들도 오고 후실 부인과 그 몸에 난 손자 손녀도 왔다. 그 분위기에서는 은혜로운 회갑연에 축하 말씀만 전하고 끝나야 했는데 동민이 가득찬 마당에서 첩질은 죄악이다. 회개하여야 한다고 세례요한인것 처럼 회갑연과 상관없는 말로 외치고 위세 당당히 돌아왔다. 그 어른의 회갑연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어겠는가!.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겠는가?

지금 생각하여도 철딱서니 없는 언행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인이 되었지만 그때 그 분들에게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 된다.

말은 바른 말이지만 그때 그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수많은 아마추어들이 미성숙한 자기 모순은 모르고 지금도 세례요한 인 줄로 착각하고 필자와 같이 철딱서니 없이 외치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본다.

경북 어느 교회 학벌좋고 설교 잘하고 훌륭한 장래성이 있는 목사로 인정받던 초임 목사가 영광스럽게 부임하여 임시목사 3년 청빙 받았는데 장로님의 예배태도를 책망하고 고집부리다가 남은 임기 1년반 사례받고 쫓겨났다. 1년반 사례주어 보냈으니 그나마 고마운 교회이다. 그는 지금도 자기 부족은 모르고 어느곳에서 그 교회 장로들을 욕하고 있거나 깨달았으면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똑똑한 젊은 목사들이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래서 이런 글을 쓰고 있다.

또 한 예를 들면 필자는 지금 주로 경북 영천 삼창에 20여명이 모이는 은목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거기에 거주하는 은퇴목사님 들이 돌아가며 설교한다. 필자는 고학을 하며 너무 굶고 고생하여 많은 병을 얻었다. 결핵성 늑막을 심하게 앓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늑막이 붙어 자유롭지 못하고 폐결핵으로 전이되어 심하게 앓았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잠들기전에는 옆구리가 아프고 기관지 고장으로 기침을 심하게 한다. 기침 제어약을 먹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배시간에도 의자에 앉으면 비스듬이 앉고 소리내어 찬송을 부르지 못한다.

90도 각도로 앉으면 옆구리가 결려 견디기가 어렵고 찬송을 부르면 기침이 나기 때문에 속으로만 부른다. 그런 건강으로 목회한 목사를 30년이나 잘 도와준 당회원들과 교우들에게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런데 얼마전 은목교회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좁은 공간에서 필자를 향해 직설적 책망을 하는 것이다. 예배시간에 찬송을 안 부르는것이 예배인가? 목사들이 평생 교인들을 가르쳤는데 예배자세를 똑바로 해야 되지 않은가? 하는 등등. 찬송을 안 부로고 비스듬이 앉는 사람은 필자밖에 없으니까.

설교를 속으로 웃으면서 들었다. 설교 후 나는 웃으면서 은혜많이 받았습니다 회개합니다. 하고 내가 그렇게 한 태도에 대한 건강상에 설명을 하였다. 그 목사님이 당연히 할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됨을 알면서 그렇게 못하는 사람의

입장을 전연 고려하지 못한 좁은 안목의 실수를 한 것이다. 필자는 그 설교들 듣고 조금도 감정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은퇴후에 그런것에 감정이 상하거나 섭섭할 정도라면 어떻게 30년의 장기목회를 하였겠는가!

그 설교를 듣고난 후 필자의 생각을 말한다면.
여기가 어디 인데! 평생 목회한 늙은 목사들이 모인장소에서 책망하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설교인가!
상황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늙은 은퇴자들만이 있는데서 저렇게 설교한다면 과거 목회하던 교회 교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을까? 교회 공동체란 천태만상의 상황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안목이 너무좁다. 추리력이 너무 약하다. 사고의 그릇이 너무 좁다. 상대의 약점을 보는데 너무 예민하다. 이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필자의 해명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가!

후배목사 여러분!
이런 기탄 없는 이런 글을 읽으시면서 넓은 안목과 넓은 마음을 가지시기를 희망합니다.

철딱서니없는 아마추어 목사님들!
장로들과 교인들의 부족함만 보고 치지 말고 덜 조각된 자신의 규각과 미성숙한 자신의 과오부터 고쳐 나가시라. 필자는 교인들의 욕구충족을 위하여 설교 잘하는 부목사를 주일 강단에 세웠다. 그가 설교하다가 조는 교인보고 졸음 마귀 쫓아 내라고 고함을 쳤다. 다음주일 필자가 설교하고 그는 사회를 보았는데 뒤에 앉아서 껏덕 자덕하면서 쿨쿨거리며 자는 것이 아닌가. 그 후 그 에게 '강단에서 목사님을 졸게하는 졸음 마귀는 어떤 마귀입니까 ?'하고 물은 적이있다. 아마추어들은 그런 모순을 많이 범하고 있다. 부흥사는 그렇게 책망하고 조는 것도 안보이고 가 버리면 되지만 담임목사는 같이 있으면서 자기 삶을 보이는 직업이다.

세례요한은 외쳤다. (마3:7)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가능하다.

사도바울. 고전9: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교회안에서는 사랑과 용서와 위로만이 목회가 된다., 장기간 성도들과 같이 갈 교회에서 치는 설교는 한번도 하지 말라. 목회자는 세례요한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목회자의 궁국적 목적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댓글 : *배진현님의 글을 읽고 평생 책망 말라는 구체적 구분을 명시하지 못한데 대하여 보충 설명합니다.
복음 전파를 하는 데는 죄의 지적과 책망이 없이는 복음의 본질을 밝히고 구원을 전할 수 없습니다.반드시 복음 전파에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은유적이든 책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책망금지의 필자의 논지의 본질은, 의견충돌로 쌓인 감정, 개인적 갈등으로 사인 증오의 감정, 욕구 불충족의 감정

항상 목회자 반대편에서 면전 복배하고 나가서 헐뜯는 자를 향한 감정 등을 자기중심적 불만의 감정을 내포한 책망을 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적이든 감정적이든 책망은 일대일 맞상대로 책망하는 것은 안됩니다. 당사자는 복음적이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자기감정을 내포한"책망과 일대일의 직설적 책망은 백해무익한고로 하지 말라고 한 것을 이해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2.20.오후6시. 필자.

 

*필자의 글을 더 참참고하시길 원하시면 다음카페 "목회상담원"에 들어가셔서 장달윤 칼럼을 보시면 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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