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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안에서 참 자유! (갈 5:13)

by 【고동엽】 2022. 3. 18.

예수 안에서 참 자유! (갈 5:13)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참 조용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인심 좋고 인정 많고 이웃을 존중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누구를 지배하고 침략해 본 일이 없는 순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민족이 근대 역사 중 두 가지 불행한 역사를 거치는 동안 많이 변했습니다. 하나는 일제로부터 36년 동안 강제로 점령당한 역사이고 또 하나는 6,25를 통한 고난을 당한 역사입니다.
  우리민족이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고난의 지배를 당하는 동안 '자유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달은 점'입니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사람이 자유를 빼앗기고 사는 것이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사회의 법이 자유를 박탈당하고 맙니다.
  본문은 그 소중한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다시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
  신학자 몰트만은 '신앙은 속박이 아닌 해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아는 순간부터 '정신의 자유 함, 육신의 자유 함, 영적인 자유 함'이 한꺼번에 주어집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운명의 문제나 내세의 문제'까지도 자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를 떠나면 당장 그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자유를 빼앗기면 당장 멍에를 메게 되는 데 그 멍에가 몇 가지 있습니다.

 

  ①죄의 멍에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가장 먼저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합니다. 죄인은 언제나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죄인은 밝은 곳을 싫어합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불안해집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혼자서, 어두운 곳으로, 숨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자유 합니까? 아닙니다, 혼자 있어도 마음의 불안함, 정신적인 불안함, 영적인 불안과 갈등이 언제나 나를 구속합니다. 그것이 멍에이고 속박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가지고 자유를 남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육체는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을 아니고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육체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욕구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정욕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피 흘려 준 자유라도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여러분은 자유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저속한 본성의 방종으로 바꾸지 마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재 일도 장래 일도 운명의 문제도 다 예수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진정으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할/
  요8:31-32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삭개오는 자유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냥 모으고 소유하면 행복해 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악착같이 동족을 괴롭혀 가면서 모으고 뺏고 착취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날이 갈수록 더 갈증이 심해지고 목마름이 더 깊어지고 만족함은커녕 자신을 옥죄이는 속박을 느끼고 멍에는 더 무거웠습니다.
  그러다 삭개오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다 벗어 던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삭개오는 순간 다가오는 영적인 자유를 느끼고 그 무거웠던 멍에를 다 벗어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우리 동포에게 나누어주고 내가 그동안 착취한 것을 4배로 변상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찾아온 것이 완전한 자유 함이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복이었습니다. /아멘!/

 

  ②육신의 멍에입니다.
  오늘도 이 육신의 굴레와 멍에에 씌워진 채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질병에 걸려서 고쳐지지는 않고 회복될 전망은 없고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고통은 찾아오고 먹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인생, 그것이 육신의 굴레이고 멍에입니다. 차라리 죽고 싶은데 죽어지지도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면 몰라도 없는 사람들은 너무 큰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고 미래가 없고 살길이 망막할 때, 그것이 육신의 멍에고 굴레입니다. 또 늙어 자식들로부터 조용히 공양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 늙은 몸인데 자녀들이 외면하고 갈 곳은 없고 그래서 거리로 내 몰린 몸 하나 둘 곳이 없이 초라하게 살아가는 노년의 삶, 그 삶이 멍에이고 속박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조용히 죽어야 하는데 죽을 준비는 안 되고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운명의 시간이 되면 두려워지고 생각이 골똘해 지는 법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굴레이고 멍에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그 자유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그래서 예수를 알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알고 믿는 순간 그런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 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멘입니까?/

 

  ③정치적인 멍에입니다.
  백성들은 누구보다도 나라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나라는 빼앗기고 백성은 고난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지도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50년 넘게 자유를 빼앗기고 저렇게 살고 있습니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부모 잘못 만난 것 보다 훨씬 더 불행해집니다.
  일제 때 우리민족이 고난을 당한 것도 나라의 지도자들을 잘못 만나서 그렇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나라를 어떻게 경영했으면 나라를 다 빼앗깁니까? 그때 당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던 백성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러면 나라의 지도자들이 잘 해 주어야 하는데 매일 모여서 싸움이나 하고 상소나 올리고 원수 갚는 일에 매진하고 그랬으니 그 나라가 온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라를 빼앗기고 남들로부터 지배당하고 고난 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어떻습니까? 다 접어두고 이번 연평도 사건에서 보면 이 땅의 안보의식이 얼마나 풀어져 있었습니까? 거기다 이 나라는 근면정신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제 좀 살만 하니까 근면정신은 사라지고 노는데 주력하고 이제 좀 편해 하니까 음란에 온 나라가 푹 빠져버렸습니다. 거기다 지금 열심히 일해도 부족한 판에 노사문제를 보면 참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미국의 교육자 '버틀러'라는 사람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며 살아가는 부류가 있고, 또 하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만 수수방관하며 살아가는 부류가 있고, 세 번째 부류는 일을 창조하고 만들고 살아가는 그 시대를 이끌고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사회적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를 이끌고 살아가는 소수의 부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④우리의 사명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사명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한다는 것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을 구속하는 새로운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주어지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적인 삶에서 복음 적인 삶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전도의 기회로 삼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간수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나중에는 총독이 바울을 찾아와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롬1장에서 '복음의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마음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전9: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할/
  복음을 전할지라도 뭐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까?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늘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뿐이지요. 빚진 사람은 당연히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하나님께서 그 빚을 탕감해주었어. 저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 밖에 안 돼.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마음인줄 믿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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