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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믿음의 주인공이 되라! (마 15:21-28)

by 【고동엽】 2022. 3. 17.

큰 믿음의 주인공이 되라! (마 15:21-28)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떠나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두로와 시돈은 서로 이웃 하고 있는 항구 도시로써 아합시대의 그 유명했던 왕비 이세벨이 바로 이 시돈 지방 출신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되셨는데 이 여인은 이방 여인, 가나안 여인, 그는 다른 곳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께 나와 귀신들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고쳐달라고 할 자격이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합니다. 유대인도 아닙니다. 선민도 아닙니다. 당시 개로 취급받던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자격도 없는 이방인이 주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28절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주님께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이 여인을 한 번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①이 여인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귀신 들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딸의 병을 고쳐 보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백약이 무효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딸만 쳐다보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 내게 이런 고된 시련이 오는가 하는 생각에 고민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딸이 죽을 것만 같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평화도, 기쁨도, 안정도 올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치는 것을 생활의 최우선으로 삼고 여기에 온 마음과 신경을 쏟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그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바로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할/

 

  ②이 여인에게는 뜨거운 열망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는 일은 가벼운 장난이 아닙니다. 한번 살아보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다부진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요행을 좋아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요행도 오지를 않습니다. 삶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믿/

  여기 이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뭔가 이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틀림없이 내 딸이 고침을 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 두고 갔더니 제자들이 길을 막습니다.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에게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뜻이 분명했습니다.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 여인의 길을 누가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일에 목적이 분명하기만 하면 방법과 길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제자들이 길을 막으니까 소리로 직접 호소를 했습니다. 22절을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의 그 음성은 확신과 믿음과 모성이 깃들은 음성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비장하게 들렸겠습니까? 지금 자식이 죽어가고 있는 판국인데 무서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서 한 가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요구해서 한 되면 ‘부르짖으라.’고 했습니다. 또 성경은 ‘입을 크게 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채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장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존심이고 체면입니다. 어떤 분은 처지가 아주 딱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죄가 커서 못 믿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도 처지가 딱해서 ‘함께 기도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다가 문제가 터지니까 염치없이 기도를 합니까?’ 그럽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겸손한 말같이 들리지만 사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지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삶에 대한 열망을 보게 됩니다.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하는 굳은 의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방법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는 열망과 열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아멘!/

 

  ③이 여인에게서 무서운 결단과 각오를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가기만 하면 문제는 다 풀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고쳐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으로부터 반응이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묵묵부답’입니다. 22절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그랬더니 23절에는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욕입니다. 그래서 더 큰 소리로 호소를 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랬더니 계속 무반응이었습니다. 계속 소리를 지르니까 제자들이 예수께 ‘한 말씀해서 보내시지요.’ 그럽니다. 여기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기도야 말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보면 모든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고백은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는 기도뿐입니다. /할/

  예수님이 두 번째 반응은 ‘인간 차별의 말씀’입니다. 24절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다시 말하면 내가 온 것은 내 백성을 위해서 왔지 이방인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사람이 살다가 가장 슬플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무시당할 때입니다. 차별 대우를 받을 때입니다. 사람이 못 배웠다고 무시를 당할 때, 가진 것이 없어서 무시를 당할 대, 집이 없어서 무시를 당할 때, 이때가 가장 슬플 때입니다. 서럽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보십시오. 어지간하면 그쯤에서 포기해 버리고 말았을 텐데, 더 큰 소리로 ‘내 딸을 고쳐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랬더니 세 번째 반응이 나옵니다. 26절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럽니다. 이 여인을 개 취급합니다. 이것은 모욕의 극치입니다. 이쯤 되면 딸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냥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면 결국은 나만 손해입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내 딸은 죽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27절에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럽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에게도 부스러기는 줍니다. 큰 덩어리는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고 나에게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것이라도 주십시오.’ 그런 말입니다.

이 여인은 딸의 행복을 위해서, 딸의 치료를 위해서, 내 딸이 고침을 받기만 한다면, 그 일념으로 이 여인은 온갖 수모도, 마다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이 같은 집념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면 누가 그 앞길을 막겠습니까? 운명이 그 앞길을 막겠습니까? 사람이 막겠습니까? 사탄이 어떻게 그를 시험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까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신 우리 주님이 인자하신 얼굴로 그 여인을 극찬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 우리 모두 이 여인의 신앙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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