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 7:13-14)
마5-7장을 일컬어서 산상 수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보화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셨다고 해서 산상 보훈이라고도 부르며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의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톨스토이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미치다시피 탐독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산상 수훈의 특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원칙을 제시해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마5-7장에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사실 산상 보훈의 말씀은 한결같이 행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고, 수고와 희생과 땀이 요구되는 말씀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했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몇 가지 각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우리 속에 일어나는 ‘갈등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엄밀히 말하자면 평안의 생활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고민이 많은 생활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싸움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언제나 자기와 싸워야 하고, 욕망과 싸워야 하고, 육신과 싸워야 하는 생활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언제나 자꾸만 정도에서 이탈하려는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질서를 깨 보려는 육감이 들어 있고, 타락해 보고 싶은 속성도 들어 있고, 거역해 보고 싶은 마음도, 어떤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인간의 본성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이 같은 욕망과 싸워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본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좁은 길을 가는 생활입니다. 그러자니까 그 길을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넒은 길은 사람들이 가기가 아주 쉽습니다. 거기에는 재미도 있고, 평안함도 있고, 굳이 갈등을 느끼며 싸울 필요도 없는 그런 길입니다. 주어진 대로 그냥 즐기며 가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그 길은 넓어서 가기는 재미있고 쉽지만 그 길은 결국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기를 ‘너희는 좁은 길로 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려고 하면 갈등을 각오해야 합니다.
②좁은 길을 가려고 하면 ‘청빈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양심껏 살고, 믿음을 그대로 지키며 살자면 우선 돈을 제대로 벌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양심껏 살아가지고는 돈이 많이 벌어지지가 않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청빈을 각오해야 합니다. 가난이 무서운 사람은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저 넓은 길을 가면서 적당히 편법도 쓰고, 적당히 얼버무려 나가며 살아야 부자가 될 수 있고, 세상에서 적당히 입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처세술이고 이 시대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적당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적당히 속이기도 하고, 편법도 쓰고, 적당히 얼버무려 가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손쉽게,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면 개중에는 청빈을 감수하고 수고도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당히만 하면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입신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과감히 거부하고 청빈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바로 이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지탱되어 가고 그래도 희망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할/
③좁은 길, 좁은 문은 ‘고독의 길’입니다.
사람이 잘 살아가다가도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이 들 때 고독을 느낍니다. 사람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될 때 사람들은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넓은 길로 가면 그곳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기도 쉽고 재미도 있고 편하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모두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길에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사람들은 수고롭게 좁은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나 외로운 길이고 고독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려고 하면 고독을 감수해야 합니다. /믿/
그런데 그 고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죄수를 독방에 가두기도 하는데 그것은 특별대우가 아닙니다. 죄인 중에서도 중죄인을 독방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것은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치도록 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인들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고, 대화할 만한 사람도 없어서 언제나 혼자입니다. 손자들도 노인들을 싫어합니다. 할 일도 없고, 사람도 없고, 언제나 혼자입니다. 그래서 종종 아파트에서 노인들이 자살을 해서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고독이 무서운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그 책 속에서 여주인공이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게 보이신 그 길은 너무나 좁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길은 홀로 가야 하는 고독한 길입니다. 이 길은 고독을 감수할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할/
④그 좁은 길로 가려면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 프란체스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앗시시에서 어느 부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그는 사교계의 명사로, 탕아의 우두머리로 뒷골목에서 방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방탕을 하면서 살아가던 그가 어느 날 환상 속에서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 ‘은혜 받은 자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때 그가 중생을 하게 됩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변화를 받고 새 삶을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전도자가 됩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버립니다. 방탕 생활도, 환락의 생활도, 세상에 대한 미련도 모두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부터 나는 좁은 길을 가련다.' 그 후 그는 문둥병자들에게 찾아가서 입을 맞추기도 하고, 거지들과 함께 구걸을 하기도 합니다. 또 소외 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 후대의 사람들은 ‘예수가 재현하여 다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를 ‘성 프란체스코’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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