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계2:10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과 그 외 여러 순교자들의 피와 그 기도 때문에,
하나님은 아직은 한국교회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라는 내용이 담긴 설교문.
직접 들어보세요.
▲저는 <십자가의 신비, 십자가의 길>을 설교할 자격이 없습니다. ←설교제목
사도바울도 예수님 알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내가 모르겠다. 그때 가서야 알겠다. 예수님 더 알기를 그렇게 사모하고 사모한다.’
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십자가의 길을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이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십자가의 주님을 조금 바라보고, 조금 알고, 조금 사랑하고,
나도 주님 가신 그 길을 조금이나마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런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시는 이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 만큼 거룩하고 축복된 길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길만큼 참 저주스러운 그런 비참한 길도 없죠.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비참한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들이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갈 수 있게 된
가장 신비로운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유대인들도 ‘저건 아니야’,
헬라인들도 ‘저건 진짜 종교가 아니다’ 라고 무시하고 멸시했던 십자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 멸시를 받는 것이다. 천대를 받는 것이다.’
라고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만을 알기를 작정했다. 십자가만을 사랑하기로 작정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다.’ 라며 십자가를 사랑했습니다.
스데반을 비롯해서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에 미쳐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갔는데
오늘 날 우리는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뭐 십자가 노래는 잘 하죠.
십자가 설교는 유창하게 하죠. 감성적으로 흥분해서 십자가 노래도 잘 하고
이성적으로 너무 머리가 좋아서 십자가에 대한 설교도 잘 하지만
사실은 십자가를 싫어하고,
십자가를 지고가는 그 길을 거부하는 우리들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늘의 길을 버리시고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저주받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천사들을 보내고, 이사야를 보내도 안 되고, 아무도 안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오셔서
저주의 길,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는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 길을 준비하셨어요.
가난과 고난과 비난의 길.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33년을 사시면서도 마찬가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33년 동안이 전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때가 되어서 제자들에게
‘나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돼. 3일 만에 부활하게 돼.’
그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 전체는,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십자가의 길, 그 길로 일평생을 사셨다는 겁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살아내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오래 전부터 그를 예언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영광의 길로 오실 것이 아니라,
멸시, 싫어 버려짐, 간고, 질고, 슬픔, 아픔, 고난, 찔림, 상함, 징계, 채찍, 죽임.
이런 단어들을 쭉 나열했어요.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실 것은, 이사야는 미리 예언하셨어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실어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임함이며,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고, 범죄자 중에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도다.
그러나 실상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고
태어나실 때부터 그런 모습을 지니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보여주신 그 모습이 무엇인가요?
‘이 망할 새끼들. 아니 나를 잡아 죽이려고 해?’ 그런 심판과 저주는 하나도 없어요.
손양원 목사님처럼. 스데반처럼. 주님의 길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이렇게 멸시하고 때려 죽이는데,
그래도 베드로는 의협심이 있어서 칼을 빼어들죠.
‘베드로야, 칼 집어넣어. 내가 기도하면 천사들이 내려와서 저것들 다 때려죽일 수 있어.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 너를 비롯한 죄인들을 구원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느냐. 가만히 둬라. 내가 죽어야 너희를 구원할 수 있다.’
그 길에 분노는 없었습니다. 저주도 없었습니다. 욕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그렇게 분노도 없었고, 증오도 없었고, 욕하는 것도 없었을까요?
그저 긍휼, 용서, 자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못된 것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에는 분노, 증오, 욕은 하나도 없었어요.
▲우리는 악의 세력에 대해서 분노를 하죠.
무슬림. 공산주의. 독재정권 등등. 그리고 그 분노를 자기의 정의라고 하죠.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런 정의의 칼은 없었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긴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이루신 것이 뭔가요?
저주받아 마땅한 저들의 죄사함과 구원을 가져다 주신 것.
제일 먼저 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 군인들이 깜짝 놀랐겠지요.
그 군인들을 지휘하던 백부장은 더 놀랐어요. ‘어떻게 저런 분이 있을까.’
마지막에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쭉 바라보고 너무 놀라서 ‘저 분은 의인이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그랬어요.
로마 군인들의 죄사함과 구원이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간구하시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어요.
백부장도 구원을 얻었겠지요. ‘저 분은 의인이다.’
아마 평생 나가서 ‘저 분은 의인이다. 내가 부하를 시켜서 잡아 죽였는데
그 분은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우리 부하를 위해서 기도하셨다. 저런 분이 어디 있느냐. (없다)’
로마 군인들도 그랬겠지요.
‘우리가 못을 박는데 저 분은 분노하지 않고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구원 받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나타내 보이신 것은 분노가 아니에요.
증오가 아니에요.
요새 우리 목사들이 분노가 많아요. 증오가 많아요. 불쌍히 여겨요.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시던 하나님처럼,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고 이루신 것은 도무지 공로가 없는 것이에요.
마지막 강도까지, 강도도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이상하다. 저런 분이 계시구나. 예수여 나를 좀 기억하소서.'
그러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는 평생 아마 영원토록 그 간증을 했겠죠.
‘나는 예수 믿은 일도 없고, 나는 착한 일 한 것 한 가지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나한테 그러셨을까.
나는 예수여, 그 말 밖에 한 일이 없는데..’
▲십자가로 가시는 그 길은
도무지 모순되는 일, 저주받은 일들이..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그 길을 좀 걸을 수 없느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너희들도 십자가를 좀 질 수 없느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너희들도 좀 십자가를 질 수 없느냐?
아비나 어미나 다 버리고, 세상의 것을 다 버리고
내가 성부 하나님 버리고, 성령님 버리고, 천사들 다 버리고 여기 온 것처럼
너희들도 아비 어미 다 버리고, 나처럼 좀 십자가 질 수 없느냐.
밭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좀 다 버릴 수 없느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
자기의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니
너희도 그 길을 좀 걸을 수 없느냐.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없느냐?
▲베드로는 처음에 그 십자가의 길을 싫어했어요. 제자들도 다 싫어했어요.
막달라 마리아와 성모 마리아만, 요한만 거기 십자가 밑에 있었지
나머지는 다 도망갔다고 했어요.
베드로는 나 그 길 안 가겠다고 했어요.
부활의 주님을 세 번 만난 다음에도, 디베랴 바닷가로 내려갔어요.
그래도 또 찾아오시죠. '요나의 아들 시몬아.
사랑이 있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라도 나를 좀 사랑할 수 없느냐?'
그래서 그 제자들을 다 십자가의 길로 가게 만드시죠.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로 가게 만들었죠.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매를 맞으면서 기뻐해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로 인하여 욕을 먹고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기뻐하였노라. 하늘에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는 이 길로 걸어가야 된다. 존경받는 길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이다.
나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처음에는 다 싫어했지만, 베드로 뿐만 아니라 다 싫어했지만
주님이 찾아오시고 40일 동안 또 찾아오시면서, 결국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게 만들어 주셨어요.
우리들의 모습이, 그 이전 제자들 비슷하지 않을까요?. 회개하기 전에 제자들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십자가를 노래는 하고 설교는 하면서.. 사실은 십자가를 싫어해요.
고난도 싫어하고, 천대도 싫어하고, 죽음도 싫어해요.
그런데 십자가의 길로 걸어간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 몇 사람은 오늘 간단하게 생각하고, 좀 우리도 걸어갈 수 없을까. 나도 걸어갈 수 없을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참 부족한 죄인 중의 죄인이에요.
날마다 고백하는 것은 첫째로 나한테 죄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은혜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내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나도 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까.
나도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재물 되는 삶을 살다가, 재물 된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내 죄를 맨날 회개하면서 시편57편을 오늘 읽었는데, 제가 매일 읽는 시편이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도 주님이 가신 길을 걸을 수 없습니까?'
제일 먼저 누가 십자가의 길을 걸었나요?
스데반 집사에요.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람. 그런데 그의 마음과 얼굴에는 분노는 없어요, 증오는 없어요.
그저 하나님만 증거해요.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성자 예수님이 일어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처럼, '나를 돌로 치는 저 사람들을,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겠죠.
어떻게 성자 예수를 따라서, 저렇게 돌에 맞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죽을 수 있는가.
스데반이 제일 먼저 십자가의 길로 걸어갔을 거예요.
그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만든 사람이에요.
▲스데반이 사울을 바울로 만들죠. 그 결과 안디옥 교회를 만들죠. 세계 선교를 시작하죠.
뭐 토마스 선교사도 마찬가지에요.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지 않고는
이 세상에 구원도 없고, 교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그런 말이 사도행전에 많이 나와요.
성 어거스틴도 그랬고, 박윤선 목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의 기도가 없었다면, 사도바울은 없다.'
만약 돌에 맞아 죽을 때의 스데반의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사도바울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놀라운 길인가요, 사도행전의 역사를 만드는 길이었어요!
그 다음에 걸어간 사람은 사도 바울, 그는 예수를 박해했죠. 스데반 돌로 쳐 죽였죠.
그런데 그 십자가의 신비 앞에 녹아져요. 아마 스데반 때려죽인 다음에도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멀리 외국까지 가고 있었죠. 그런데 예수님 나타나시죠.
그의 가슴에 변화가 일어나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 죄를 많이 지은 사람에게 은혜가 더 많이 임할 수 있어요.
길선주 도사에게, 은혜가 더 많이 임할 수 있고
이기풍 깡패에게, 은혜가 더 많이 임할 수 있고
그 사도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 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도 예수님은 '나는 의인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어요.
못된 것들만 부르러 왔어요.
사도바울이 은혜를 받으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세상에 좋아하던 것 다 똥으로 여겨요. 학문 다 버려요.
그래서 성 프란시스도 학문을 버려요.
사도바울도 학문을 버려요. 한경직 목사님도 학문을 버려요.
어떤 의미로 버리는 것이, 십자가에 더 가까이 가는 거예요.
'나는 예수와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했다. 내 몸이 예수를 죽인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
나는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닌다.'
사도바울은 예수에 미친 사람. 십자가에 미친 사람. 십자가만을 전했어요.
십자가만을 자랑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 때문에
이기풍 목사도. 꼭 사도바울의 회개처럼 고백 했고, 칼빈도 그랬고
이기풍 목사님, 길선주 목사님, 사도바울 때문에
그 사도바울의 죄 고백을 자기의 고백으로 삼았죠.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그 다음에 또 한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이 제일 칭찬하신 일곱 교회 중 하나가
서머나 교회에요. 부자 교회 아니에요.
라우디게아 교회는 부자 교회인데 아주 제일 못됐다고 했어요.
제일 교회당도 크고, 제일 큰 교회에요. (큰 교회가 모두 다 잘못 된 것은 아니에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이 크다고 자랑했어요. 그래서 잘못 된 것이죠.
서머나 교회. 궁핍과 가난. 거기서 위대한 십자가의 길로 간 사람이 나타나요.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리라.' 라고 예언을 주셨는데,
실제로 그후, 주후 155년 경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이 순교를 당해요.
성경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그 때 계시록 2:10절에 말씀한 그 사람이
바로 폴리캅이었을 것이라고 봐요. 물론 다른 사람도 나타날 수 있지요.
저도 초대 교회사를 전공한 사람인데, 그는 초대 교회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예요.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요. 그 사람 때문에 초대교회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요.
아마 스데반 이후에 가장 위대한 순교자입니다.
서머나 경기장에 붙잡혀가요. 거기 총독이 협박을 해요.
내게 야수가 있다. 내게 불이 있다. 야수가 너를 물어 삼키게 하겠다. 불태우겠다.
여러 가지 협박을 해요. 황제가 신이다. 그 말만 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그런데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저는 그 고백들을 제가 <초대 교회사> 강의를 할 때, 늘 읽어주어요.
‘나는 86년 동안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섬겨왔소.
그리고 그 분은 한 번도 나에게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그러나 총독은 계속해서 협박을 해요. 폴리캅은 또 대답해요.
‘나는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부인할 수 없소. 똑똑히 들으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
총독이 다시 나는 야수를 가지고 있다. 너를 잡아먹게 하겠다.
폴리캅은 ‘야수들을 풀어 놓으시오. 우리에게 변절이란 있을 수 없소.’
(주기철 목사님도 나중에 그러죠. 변절은 있을 수 없다고!)
총독이 다시 협박을 해요.
'네가 야수를 멸시하면 너를 불태워 죽이겠다.'
그러자 폴리캅이 또 그래요.
‘당신이 위협하는 불은 한 시간 동안 타고 곧 꺼질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악한 자들을 위해서 예비해두신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소.
왜 이렇게 지체하시오. 빨리 하려던 일을 하시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고, 은혜가 넘쳤다고 해요.
총독이 화가 났어요. 군중들이 소리를 질러요. 불 태워버리라고 해요.
그를 장작 위에 올려다 놓고 묶으려고 하니까
‘나를 묶을 필요가 없소. 그대로 타 죽는 것이 좋겠소.
전능하신 주 하나님, 당신의 사랑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천사들과 권세들과 모든 피조물과 그리고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께 찬양을 올립니다.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수에 참여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그러셨죠. 주기철 목사님도 그러셨죠. (순교자의 수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셨죠)
‘이것으로 인하여 그리고 모든 것을 인하여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을 송축하며 당신께 영광을 돌립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종이시며, 영원한 하늘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과 성령과 함께, 당신에게 지금으로부터 세세토록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그리고 불을 태웠어요. 장렬하게 순교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폴리캅의 순교 때문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고
서머나뿐 아니에요.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폴리캅이 십자가의 길로 감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어요.
자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었어요. 그런데 폴리캅이 붙잡은 말씀이 뭐냐.
계시록 2:10절이에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 주기철 목사님도 평생 붙잡은 말씀이 그 말씀 계2:10절이에요.
손양원 목사님이 평생 붙잡은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정양순 사모님이, 손양원 목사님이 여수에서 다른 감옥으로 옮겨가실 때, 잠깐 길에 만났을 때
그 짧은 시간에 다른 안무 묻지 않고 정양순 사모님은
"여보, 이 말씀 아시죠?" 계시록 2장 10절을 지적했어요.
그러자 손양원 목사님은 "염려하지 마세요. 그저 기도만 해주세요."
폴리캅이 붙잡았던 그 말씀을, 우리 한국 교회에 대표적인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똑같이 붙잡고 그 길로 가셨어요.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길인지 몰라요.
주기철 목사님, 다 신사참배 무릎을 꿇었죠.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이 원래 부산에서, 마산에서 목회하시다가
평양 산정현 교회로 가서 목회 하시다가 네 번, 다섯 번, 감옥에 들어가서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 갖은 고통을 다 당해요.
그 날 일사각오. 그 분은 일사각오에요.
사자와 같은 용맹한 일사각오인데, 그 성품은 비단결 같이 부드러웠어요.
자기를 죽이는 일본 경찰, 공산당. 그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었어요. 사랑을 베풀었어요.
일본 최고 경찰들이 해방된 후에 ‘조선에 진짜 목사가 있었다. 주기철 목사였다.’
공산당원 주영화도 '그 분은 진짜 귀한 분이었다.' 그랬어요.
참 우리 선배들은 두 가지를 다 겸했어요. 손양원 목사님이 그랬죠.
-주님을 향해서는 사자같은 일사각오의 신앙. 죽어도 좋습니다. 하는 그 기개!
-그러나 원수 같은 사람들에게는 긍휼, 용서, 사랑,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니까요.
▲주기철 목사님도 그러셨어요.
주기철 목사님이 1944년 4월 21일 해방되기 1년 전인, 9시 30분 순교의 제물이 되시죠.
그 전에 38년에 1차 검속되었다가 석방되고
38년에 8월에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또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되고,
39년에 3차 검속되어 있다가 9개월 후에 석방되고
40년에 4차 검속이 되었다가 평양 형무소에 4년간 있다가. 그렇게 네 번이네요.
그렇게 많은 고문을 당해요.
그런데 감옥에 있다가, 잠깐 나와서 목회하시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 가요.
교회당 옆에 들어와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해요.
그러면서 그 때 기도할 때
‘내가 이제 순교하면 천국에 가서도, 이 조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다.’
그 말씀을 하셨어요.
▲저 김명혁 목사는 그 말씀을 어제도 오늘도 늘 기억해요.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의 순교의 피를 보시고
'주기철 목사님이 조선교회에서 기도하시겠다고 그랬는데
그 기도 소리 들으시고 나를 좀 불쌍히 여겨주실 수는 없습니까.
이성봉 목사님이 나를 위해서 열 번 이상씩 안수기도를 해주셨는데
그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실 수는 없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교회당에 가서 엎드려 눈물을 쏟으며 기도를 하신 다음에
‘오종목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설교를 하셔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해주시옵소서.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섯 번째, 내 영혼을 언제나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의 기도를 조금 더 소개하면 너무 귀해요.
‘오종목의 기도’라는 제목의 마지막 설교에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고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 년 살고 천 년 살면 뭣 합니까.
오 주여, 이 목숨을 아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고 하여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시옵소서.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주시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에 절하지 못합니다.
아 내 주여,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 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라.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이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아멘.
▲주기철 목사님의 후배요, 수제자가 손양원 목사님이죠.
손양원 목사님도 순교자 되기를 그렇게 사모했어요.
‘나도 주기철 형님처럼, 주님을 위해서 순교할 수 없을까.’
사실 저는 그 두 분의 순교 때문에
아직까지 하나님이 한국 교회 버리지 않고, 우리를 그래도 살려 주시지 않을까..
종종 생각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하늘에 가서도 기도하시겠다고
그 그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살려주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 선배들은 십자가의 길을 이렇게 걸어가셨어요.
▲1944년 4월 21일. 저 김명혁은, 그 때 평양에 있었어요.
1944년 4월에,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이 다 그때 순교를 하셨지요.
순교 신앙, 주일 성소 신앙, 새벽 기도 신앙을 주일 학교 선생님에게 배움 받고
제가 10 살 때 나도 그 길을 가야지 하다가
11살 때 두 분 목사님이 순교하신 그 곳에
제가 제 아버님(김관주 목사)이 평양 서문밖 교회 목사님으로 계시다가
감옥에 들어가서 순교하셨으니까
그게 다 그 피가 흐르죠. 그래서 제가 그것을 받지요.
그게 얼마나 보배인지 몰라요. 그게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김화식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같은 평양에서.
그래서 이번 6월달에 순교자 기념 사업회에서
'이번에는 평양에서 순교한 분들 한 여섯 명 기리면서 예배를 드립시다.'
제가 제안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요..
순교의 핏소리가, 지금도 하늘을 향해서 호소하시겠죠.
▲그 다음 끝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분, 주기철 목사님의 수제자 손양원 목사님.
(시간이 없어서 간단히 하는데) 손양원 목사님은
어렸을 때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해요.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매를 맞아서 피를 흘리고 와요.
그 때 아버님 손종일 장로님이 야단치지 않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아들을 더 때려주소서.
더 귀한 종으로 삼아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손양원 학생은, '나 학교 안가도 좋아.' 그 때부터 그거예요.
그래서 결국 순교의 길로 걸어갔죠.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의 그 가슴에는 분노가 없어요.
자기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죠.
두 아들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 밤새 통곡하며 기도하시다가 나오시면서
'저거 불쌍해서 어떻게 해.
내 두 아들은 천국 갔는데, 저거(안재선 등)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것 죽으면 어떻게 해. 저것 용서해야지, 아니 사랑해야지.'
그래서 손동희 딸을 보내죠. 그래서 원수를 풀어달라고.. 호소하죠.
손동희 딸이 그러죠. '어떻게 (안재선을) 그냥 용서하지.. 아들까지 삼느냐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았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냐.'
결국 딸이 가서 그 말을 전할 때
안재선을 취조하던 그 군인이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고
'위대하시다. 위대하시다'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고 그랬어요.
과수원에서 자기를 총살할 인민군을 위해서도 기도하시다가
위평 과수원에서, 손양원 목사님 1950년 9월 몇일 날 순교하시죠.
저는 '이 두 분 때문에 아직까지 한국 교회를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
두 분은 주님께 대한 충성 뿐 아니에요.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에요.
일본 사람, 공산당, 나환자,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
▲제가 한 가지 더 해요.
로버트 J. 토마스. 1866년 9월 5일이에요. 대동강에서 순교를 해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요.
그런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 전에
그 분이 평양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고난의 길을 걸어요.
예수님이 33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다가 순교하신 것처럼,
갑자기 되는 것은 없어요.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고난의 길을 걷다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처럼, 갑자기 되는 것은 없어요.
자기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아기가 죽어요. 얼마 후에 아내도 죽어요.
얼마 후에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던 장인마저 죽어요.
이 죽음의 슬픔이.. 어떤 의미로는 유익하게 되요.
죽음을 이기게 되요. 어거스틴도 그래요.
로마에서 돌아올 때 어머니 죽죠. 가장 친한 친구 죽죠. 아들이 죽죠.
그것이 성 어거스틴으로 만들어요.
슬픔과 아픔. 고통이에요. 그것이 십자가의 길로, 순교의 길로 인도해요.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대동강에 와서 성경책을 던져줄 때 박춘권이 그의 목을 자르죠. 그럴때 분노가 없어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책을 받으세요.'
박춘권이 회개하고 장로가 되고 교회를 개척하죠.
토마스 선교사가 한 사람이 죽은 것이, 거기에 그치지 않아요.
조선 교회를 만드는 거예요.
1866년 9월 5일. 그 순교가 없으면 조선 교회가 아마 없을지도 몰라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구나. 세상의 운명을 바꾸는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
이 세상의 우주의 운명이 바뀌어진 것처럼
스데반이 순교함으로, 사도행전 역사가 바꾸어진 것처럼
사도바울이 순교함으로, 마게도니아 유럽의 역사가 바뀌어진 것처럼
십자가의 길, 폴리캅 감독을 비롯해서
수많은 우리의 선배들이, 다 지금 거론할 수 없지만
종교개혁 시대 때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고
특별히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우리가 너무 존경하는 분들!
나도 좀 그 길을 걸을 수 없을까.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주님의 은혜가 너무 크니까 조금 갚기를 원하고
내 죄가 너무 많으니까 조금은 죗값을 치르기를 원하고
사실 다윗과 욥도 조금씩 죗값을 치루었어요. 아마 사도바울도 그렇게 했겠죠.
내 죄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을까.
나도 누군가를 위해서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주님이 원하신다면 아프가니스탄을 가던지,
북한을 가던지, 어디가서 십자가의 길을,
최봉석(권능) 목사님도, 주기철 목사님도, 김화식 목사님도, 저의 아버지도 그 길을 걸으셨는데
나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그 길을 좀 걸을 수는 없을까.
그래서 이런 일을 할 수 없지만
한국 교회에 조금 도움이 되는 거름이 되고, 북한에도 거름이 되고
그 어떤 지역에 거름이 될 수는 없을까.
‘하나님 나를 그저 불쌍히 여겨 주시고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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