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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설교편◑/김명혁목사 명설교(55편)

화해를 원하시는 하나님 (1강) 골3:12

by 【고동엽】 2022. 3. 9.

화해를 원하시는 하나님 (1강)           골3:12                 

                                                                                                            

▲도입

금년 2015년 1월2일 오후2시에, 임진각에서

한국교회 지도자 2천여명이 그러니까 거의 다 모였습니다.

거기서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습니다.

 

부족한 제가 잠깐 동안 말씀을 전했습니다. 북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우리의 죄를 자복합니다. 우리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북한 동포들을 끌어안고 울지도 못합니다. 하나님,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북한 동포들이여, 우리들의 무정함을 용서해 주소서.’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화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 하나가 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비, 용서, 사랑을 베풀 때,

다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인생은 만남이요,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락 인사말)

그래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인생이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목회도, 설교도, 행복도 만남입니다.

더 깊은 행복은 나눔에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요? 거기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 이신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썼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이 누구이신 것을 알고, 또한 내가 누구인 것을 알기 위함이다..’ 라고 했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의 중요함을 역설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지만, 오늘 두 가지로 간단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실까요?>

 

 

◑1. 화해의 하나님

 

▲먼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도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노년의 사도요한에게 설교를 부탁하면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 반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 그 내용만 설교했답니다.

다른 설교를 하라고 해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설교만 고집했답니다.

 

사랑을 조금 더 확장해서 설명해 보면, ‘긍휼, 용서, 자비’입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다 용서하십시오.

자비..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비를 베푸시고, 여러분은 ‘사랑하시는 분이다’..

라는 느낌이 들게 하십시오.

 

우리 죄인을 불쌍히 여겨서 ...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친하게 지내요.

그래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서로 친하게 울면서 끌어안고 울기도 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고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얘기를 오늘 드릴리고 하는데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주 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이십니다. 이것은 백번 천번 반복해서 말해도 좋습니다.

 

긍휼 용서 자비 사랑보다 귀중한 말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은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십니다.

‘긍휼 긍휼 긍휼’ 그렇게 시편에서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십니다. 145:9

 

그 다음에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내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맨날 울면서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깨끗이 사하소서’

 

시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다윗의 노래입니다. 그 다음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다,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시103:8 여호와는 자비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아마 성경중에 제일 귀한 성경구절이 요3:16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긍휼, 용서, 자비, 사랑,

 

▲성자 예수님께서도 그러셔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또한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너의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포하셨죠.

 

나는 자비를 원한다. 제사보다.

 

마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할 수 없느냐?

예수님도 그러셔요.

 

▲성령님도 그러십니다. 성령 하나님도 긍휼, 용서, 자비, 사랑에 우셔요.

탄식하시면서 우시며 기도하신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넘어지면 붙잡아 일으켜주시고,

우리 대신에 기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5:5b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리고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의 그 사랑, 긍휼 용서 자비 사랑,

성자 예수님의 긍휼 용서 자비 사랑, 그걸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십니다.

우린 그걸 모르니까, 사도바울이 롬5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 성령님이 이것을 나에게 부어주셨다.

성령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다. 내가 무슨 말할 것도 가르쳐 주신다.’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성령의 자비, 긍휼.. 그런 말이에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 쭉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본래 이런 것과 상관이 없던 분노, 증오, 저주의 사람, 때려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찾아오신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의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쓸 때마다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을 예찬했습니다.

 

빌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보십시오. 사도바울도 사랑 긍휼 자비를 항상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의 종교입니다.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을 무시하는 기독교는, 가짜기독교입니다.

아무리 수많이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도, 진리에서 떠난 기독교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을 내세우고, 진리의 깃발만 내세우고

막 야단만 치고, 음악만 틀어놓고..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을 무시하는 것은 가짜 기독교입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구원 받았는데도 서로 싸울 수가 있습니다.

교회끼리도 서로 싸울 때가 있을 수 있겠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문제로 분쟁이 생길 수도 있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서로 싸울 수도 있고요,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잠깐 생길 수도 있겠지만,

곧 긍휼과 사랑으로 서로 화해해야 합니다. 그게 기독교의 본질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구약 때부터, 화해를 말씀하셨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같은 형제인데 서로 싸웁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인도해서, 야곱이 에서를 만났는데,

무릎 꿇고 울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을 만났을 때 ‘이 못된 형들아’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나를 여기에 보내서 내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면서 웁니다.

구약에서도 창세기부터 이렇게 화해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이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그런 사람이라도 써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너 어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자세는, 좀 생각해봐야 합니다.

‘너희가 625 일으켰지?’

요셉의 형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아먹은 거나 비슷하죠?

동족을 죽음으로 내 몰았으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상황에서도 ‘화해’를 언제나 강조합니다.

화해를 이렇게 많이 강조해 주셨습니다.

 

▲신약에 오면, 너희를 모든 세상과 화해하게 했다.

너희를 모든 세상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자기 형제끼리만 화목하는게 아니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엡2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그리고 너희로 세상과 화목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어요.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바울서신에도, 화목, 평화, 하나.. 이게 다 나옵니다.

엡2장에,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를 화해와 화목이라고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개요
 
엡1장 우주적인 통일
엡2,3장 이방인과 유대인의 하나됨
엡4장 교회의 하나됨
엡5장 남편과 아내의 조화
엡6장 부모 자식 및 주인과 종의 질서, 조화
 

 

이렇게 분명히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는 화해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저 놈은 망해야 돼’ 합니다.

 

상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망하기를 바란다면

그런 적의를 품게된 이유가 있겠지만, 무슨 피해를 당한 게 있어서 그렇겠지만

성경적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 가운데 “일부”는, 북한에 대해 극단적 적개심을 품고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아주 보수주의자였습니다.

제 고향이 이북이고, 제가 10살 때 홀홀단신으로 남하한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북한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기 힘들겠죠.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화해/화목/평화하라’고 명하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예배, 예물? 그것보다 먼저 형제랑 화목하고 나서,

내게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5:24

화해를 하지 않으면, 예배를 아무리 많이 드려도, 별 소용 없다는 뜻입니다.

 

사1장에 보면, 고아, 과부, 나그네랑 화목하지 못하고,

그들을 멸시하는 사람은,

그들의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겠답니다.

 

하나님은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아보고,

그런 가운데 내게 와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사58장은 더욱 그러십니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궁핍한 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하는 금식(기도)은

하나님이 절대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 금식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화해를 원하시고,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빠진 예배는, 그저 종교행사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시니까, 다 화해합니다.

16지역에서 온 각계각층의 사람들, 흑인도 있었을 것이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언어가 통합되고 (화해를 의미합니다.) 서로 하나가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화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그래야 되는데,

일본도, 중국도, 러시아도, 북한도, 미국도, 모슬렘도 다 화해해야 되는데요..

 

 

◑평화의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레26: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리고 아들을 보내셨는데,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사53:5

 

아기 예수님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자기를 때려 죽입니다.

눅23:34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때 백부장이 감동을 받고,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눅23:47

 

그 못된 로마군인들까지, 화해로 그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북의 화해를 위하여

에스겔에게 ‘남과 북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되게 하리라’

그래서 막대기를 취하여, 연합케 되리라는 예언을 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19장에 보면, 마지막에는

앗수르와 이스라엘과 애굽이 하나가 되는

대화합과 화해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사19: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앗수르와 애굽이, 어떻게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들 이방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화해 뿐 아니라, 하나를 이루셨습니다.

온 세계가 십자가 아래, 하나가 됩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

이와 같이 성령도 하나 되게 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베푸시며,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지막 비전이고, 마지막 뜻입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게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절대적인 것입니다.

화해, 평화, 통일!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안에서는 사회를 봐도, 교회를 봐도, 화해가 없습니다.

서로 싸웁니다. 남북은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저는 원래 이런 설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인데,

성 프랜시스를 바라보고, 손양원 목사님을 바라보고, 한경직 목사님을 바라보고

스데반 집사님이 자기를 죽이는 사울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제 자신이 조금씩 바뀌어졌어요.

 

저는 과거에 반일주의자요, 반공주의자요, 반모슬렘주의, 반자유주의..

전부 비판만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렇게 바뀌어졌습니다.

친일이 되었고, 친북이 되었고, 친모슬렘이 되었고, 친자유주의가 되었습니다.

물론 복음주의적 제 정체성을 고스란히 지닌채 말입니다.

 

그래서 자꾸 공산권과 모슬렘 권을 찾아갑니다.

가능한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폅니다.

러시아, 중국, 방글라데시, 아프간 등지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사랑을 펼 때,

그들의 입에서 할렐루야가 나오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아, 사랑이구나!’

 

진리도 있어야 되지만, 예, 진리를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진리, 진리, 진리 그러면, 저는 베드로의 칼이 떠올려집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그 다음에 진리가 충만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서가 진리는 나중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도 보면, ‘가르침’(진리)은 나중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예수님은 사랑의 ‘행하심’이 먼저였습니다.

진리의 ‘가르침’은 나중이었습니다.

 

문둥병자도 만져주시고, 각종 환자도 손을 대사 고치시고,

백부장도 불쌍히 여기시고, 간음한 여인도 만나 주셨습니다.

 

긍휼, 용서, 자비의 행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다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3천명이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아, 하나님의 뜻은 다 하나가 되게 하는 거구나’

화해하고, 그리고 평화를 이루고,

그게 계시록 5장, 7장에 쫙 나옵니다. 시148편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끼리’를 좋아합니다.

성경은 그게 아닙니다.

모든 방언과 족속이 함께 모이고, 심지어는 천사들과 동물들까지 다 모입니다.

 

▲시148편에 보면, 온 우주가 하나가 됩니다.

온 우주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합니다.
사람보고만 찬양하라가 아닙니다.

 

시148:3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찌어다

4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찌어다

7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8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9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10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1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이렇게 동물들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데,

우리가 함부로 동물을 죽이는 일은, 가급적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은 아닌데,

 

돈을 벌기 위해서, 너무 자연을 훼손하고,

동물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그래서 별로입니다.

물론 동물도 우리의 음식을 위해서 주셨지만, 불필요한 죽임은 안 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다 하나님이 지으신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주를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시104편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무슨 동물을 먹이시고, 뭘 입히시고..

 

그래서 하나님은 모두에게 긍휼 용서 자비 사랑을 베푸십니다.

심지어는 동물 하나에게 까지요.

 

마지막에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함께 회복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우리가 상상을 못하는 곳이 될 겁니다.

온 우주의 회복이 일어나니까요.

 

에덴의 회복, 낙원의 회복,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거기엔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다고 그래요.

우리 사람도 있고, 천사도 있습니다.

 

온 우주의 화해, 평화와 통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보다 놀라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근원은 긍휼, 용서, 자비, 사랑입니다.

 

니느웨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내가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하셨습니다.

 

로마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교의 도사, 지도자였던 길선주를 ‘길선주야’하고 부르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승려들하고도 화목하게 지냅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들의 모임>을 제가 만들었습니다.

거기엔 천도교, 원불교, 가톨릭 지도자들이 다 참여합니다.

 

모일 때마다 식사를 하지요.

그때마다 스님은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간절히 기도를 하죠.

모두가 ‘아멘’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러다가 내가 나중에 목사가 되면 어떻하지?’ 라고 말합니다.

어떤 스님은 ‘내가 옛날에 사실은 교회도 다녔는데, 그때 목사님이 부드러우셨다면,

제가 지금 목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따듯하고 부드럽게 대하면, 싸울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아, 하나님이 자비 용서 긍휼 사랑을 베풀 때, 다 하나가 될 수 있구나’

저는 이것을 아주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기도를 날마다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혹시 제가 제물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되는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남북한을 불쌍히 여기시고

남북한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우리들을, 남한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위해 바쳐지는

조그만 제물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여, 순교자들이 흘린 핏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은혜의 도구, 화해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평화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통일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성경적 원리는, 통일과 화해에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큰 제물이 되셔서, 다 이루셨지만,

스데반이 제물되어 사도바울이 생긴 것처럼, 우리 작은 제물들도 필요합니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제물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변화되고

저까지 조금씩 변화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 각자가 누구를 위해서 평화와 화해의 제물 되는’

프란시스가 그랬지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래서 저 자신도 ‘내가 화해와 평화의 도구가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은 제가 갚게 하시고,

그 망극한 은혜를 조금은 갚고는 죽을 수 없습니까?’ 라는 기도를 제가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도 같은 은혜와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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