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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주권/롬 11:1-6, 25-36

by 【고동엽】 2022. 3. 8.

롬 11:1-6, 25-36 /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주권

 

 

세상에 많은 나라들이 존재하지만 아마도 이스라엘 처럼 독특한 역사를 지닌 민족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수상을 지냈던 데빗 벤 규이엄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 나라 처럼 세계 역사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나라가 또 있겠는가?”라는 말을 했습니다. 유명한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교수는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신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과거 프러시아 제국의 한 황제가 황실에서 일하고 있었던 황실목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신을 믿고 싶지만 신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없어서 못 믿겠다”는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이 때 황실목사는 “폐하시여, 제가 폐하에게 하늘과 땅을 창조한 신이 살아있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증거를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구체적 증거를 알 수가 있습니다.”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2,000년 가까이 국토를 상실한 채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운명으로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위 반유대주의라는 전 세계의 격렬하고도 거센 핍박을 견디면서도 자기 고유의 문화와 전통과 철학과 종교와 언어를 그대로 보존했다가 무려 2000년만인 1948년 5월 14일, 극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민족 국가를 부활시키는데 성공한 드라마같은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을 보시기 바랍니다. 불과 한국 민족이 40년도 안되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우리 민족의 고유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린 것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 모든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요,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음에도 가장 많은 노벨 수상자를 배출하여 세계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민족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주권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오한 기독교 역사 철학의 한 중요한 결론을 11장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관을 한 마디로 대변해 줄 수 있는 역사 철학의 요약을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바울 사도는 만물이 주로부터(from Him)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through Him) 진행되고, 다시 주에게로(to Him) 돌아간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본보기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사에 있었던 세 가지의 사건을 들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합니다. 그 세 가지의 사건은 첫째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하셨다는 것과 두번째는, 이스라엘 민족을 잠시 버리신 버림의 사건, 세번째는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이 세가지의 사건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주권론을 본문을 통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성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으로 선택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난 어떤 우수한 자질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이스라엘 국가가 주변 지상의 많은 나라에 비교해서 훨씬 더 도덕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셨을까요? 본문은 그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의해서 선택되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9장에서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했으나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여기서 야곱과 에서는 개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얼마나 사랑받지 못할 짓을 많이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경륜, 그것은 야곱을 통해서 이루어질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특별한 계획이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에게 있었고 그 계획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막상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를 거절했고 복음을 불순종했습니다. 그것이 9장과 10장의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10장 16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한 바를 주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여기서 말씀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이 다 복음을 불순종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선택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 무효가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많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아직도 믿는 사람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바울 사도 자신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명을 남겨 두신 것 처럼 아직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남겨 두셨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지금도 하고 계시다는 것이 본문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남은 자들이 믿음의 백성으로 남아서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특별한 자들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택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실이 본문의 5절과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 하느니라”. 로마서 11장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민족으로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때문이며, 하나님의 주신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비단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될까요? 우리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나은 점이 있어서 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특권을 누리는 것일까요?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을 복음의 자리로 인도하게 되는 이러한 놀라운 쓰임을 받는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의 업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때문이며 우리를 그렇게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 때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스라엘 역사의 버림받은 사건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의 섭리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소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불순종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해 놓고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불신앙의 자리에 있도록 그대로 허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이유는 이방인의 구원의 기회가 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11절).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하나님 앞에서 넘어졌기 때문에 구원이 이방인에게 도달하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셨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구 경기중에 하나님께서 복음이라는 공을 이스라엘의 마당에 던져 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받아 드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복음의 공을 거절하고 공을 차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복음의 공은 이방인에게로 가서 전 세계로 돌아 다닙니다. 이 복음을 받은 민족마다 구원을 경험하고 축복을 경험하게 되며 나라가 달라지고 사회가 변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날 역사의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주님 앞에 돌아올 경륜을 준비하셨고, 그 때까지 복음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로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어 역사의 새로운 무대가 펼쳐지도록 섭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많은 민족 가운데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외의 다른 모든 민족들은 하나님께서 버리기로 작정하셨다고 이해한다면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교리 가운데 선택의 교리를 가장 극단적으로 전개한 것을 ‘이중작정의 교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논리적으로는 그 구원의 자리에서 빠진 사람들은 지옥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라고 믿는 것을 ‘이중작정의 교리’라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논리적으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성서적인 근거는 전혀 없는 교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선택을 믿지만 이중작정은 믿지 않습니다. 선택의 교리에 대한 가장 성서적이고 창조적인 접근이 있다면 그것은 소명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선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많은 이방 민족들이 구원을 얻게 하려는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복음을 거절하고 또한 선민된 축복을 이웃 나라들에게 나눠주지도 않았고 자기들만 특권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버림받음은 그들 자체의 버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버림이 오히려 이방인들의 구원의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다 신기한 하나님의 섭리인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거절하자 마자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제공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야 할 놀라운 축복을 이방인들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 사도는 이 사건을 참 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이하에 보시면,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꺾여졌습니다. 그 꺾여진 가지의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였습니다. 그랬더니 참감람나무의 뿌리로 부터 받아 올리는 자양분과 수분과 진액을 돌감람나무 가지가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꺾여진 참감람나무 가지는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그 꺾여진 자리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절한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이방인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된 놀라운 축복을 전 이방인들이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사람이 받고 일본인들이 받고, 전 세계의 민족들이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전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한 사실이 세계 역사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결코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진 열방들에게 복음의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섭리인지요! 여기 잠시 동안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성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잠시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을 받은 사건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섭리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의 신실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백성을 쓰시겠다는 언약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영원히 버림받은 상태 속에 있다면 그 약속이 무효화 될까요? 그럴 수 없다는 선언으로 본문의 로마서 11장 1절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릴 수 없다는 증거로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유대인인 바울 사도 자신이 믿음을 갖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느 날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그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6). 민족적으로 그 백성 전체적으로 부흥이 일어나게 되고 그들이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것을 27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그때가지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가 될까요? 그 답변이 25절에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열방들 가운데 복음의 기회를 충분히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최후의 이방인이 주님 앞에 돌아올 때에 그 때부터 하나님의 역사의 초첨은 다시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저버린 복음은 전 세계로 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어느 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신기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주권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로 사마리아로 전해지며 사도행전 마지막 장에 보시면그 당시의 1세기의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까지 전해졌습니다. 로마로 들어온 복음은 다시 게르만 민족에게, 앵글로 색슨족에게로, 그리고 전 세계로 돌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했습니다. 최후의 이방인이 주님 앞에 돌아올 때, 그리고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 후, 역사의 마지막 문이 닫혀지기 시작할 때 복음의 최후의 부흥은 다시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바라보던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주권론을 전개합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라”(36절).

 

 

 

우리는 그 역사적인 사례를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시작된 복음, 그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 그러나 그 민족의 복음을 향한 불순종이 이방인에게 기회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온 세상에 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시면 말세의 한 징조 가운데 하나가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된 후에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충분히 온 세계의 열방들에게 전해진 후에야 역사의 마지막 끝이 올 것입니다. 역사의 최후의 드라마는 다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일어날 부흥일 것입니다. 아직도 지구상에서 가장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고 있는 민족은 모슬렘과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는 최근에 심상치 않은 부흥의 징조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그 어느 때 보다도 유대인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유대인 전도단체들이 급속히 늘어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계속적인 유대인들의 핍박속에서도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향해서 돌아오고 있다는 부흥의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면서 이 회복 속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의 신실성을 보십시오. 그분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야 말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이방인인 우리들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지며보면서 본문은 두가지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도 하나님을 바로 믿자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한결같이 믿는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야는 믿지를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교회를 출입하면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베푸시도록 기도하고 가족들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며 열심히 믿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죄로부터 구원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그것은 옛날 유대민족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들이 버림받은 것은 구원에 대한 가장 중요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0-21). 21절의 신랄한 경고를 주의해서 보십시오. 원 가지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향한 구원의 신앙을 갖지 못했을 때 단호히 그들을 버리셨던 하나님께서 돌감람나무 가지라고 꺾지 않으실까요? 제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편리와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만 나의 변화를 위하여,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나의 구원의 신앙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참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둘째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놀랍게 드러난 장면을 관찰할 수 있었던 바울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역사는 영어로 history라는 단어인데 본래 his 와 story라는 두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역사를 시작하시고, 민족들을 시작하시고, 만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역사를 운행하시다가 역사를 종결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과 손길을 관찰할 수 있었던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장의 마지막 부분인 33절에서 36절에서는 주님 앞에 찬양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장의 32절까지는 일종의 논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논문의 제목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 역사를 관찰하다가 놀라우신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논문을 계속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갑자기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대목이 33절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주관하시고 완성하실 주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며 오직 주님께만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고 있는 찬양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이 되어야 할까요? 그분이 이스라엘의 주인이시라면 대한민국의 주인도 되십니다. 파스칼이 ‘팡새’에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하다가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는 울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신 구원의 하나님께서 동일한 그 구원을 내게도 주시고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고 나를 쓰시고 나를 섭리하시는 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을 찬양드립니다. 내 한평생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내 개인의 역사에도 주인이 되시오니 나를 인도하시고 주장하셔서 나를 쓰시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의 찬양과 권세와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아멘.

 

롬 12:1-2 / 이 세상을 본 받지 않으려면

 

 

어느 사회에서나 전통과 가치관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와 그 사회 속에 숨통을 튀어주려는 새 것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는 함께 공존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분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의 이 세상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일수록 세상에 대해서 도피주의적 태도를 갖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너무 가까이 하다가 더럽혀지고 오염될 지 모른다는 속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유주의자일 수록 세상에 대해서 세속적인 태도를 갖습니다. 세상에 대한 참여를 강조하다 보니까 자연히 세상과 가까워지기 때문에 세속화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예수님께서는 보수주의자였을까, 아니면 자유주의자였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저는 예수님은 보수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니셨다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 17:14)라고 고백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결코 세속적인 자유주의자는 아니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17장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다”(요 17:15-18)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멀어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의 한 복판에 서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사명을 감당하기를 여전히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결코 도피주의적인 태도나 보수주의적인 생활태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이 세상의 한복판에 살면서 이 세상에 기여를 해야하지만, 이 세상에 결코 속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어려운 주문처럼 보입니다만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 세상을 본 받지 말라”고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이 세대를 변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것이 본문의 질문인 것입니다.

 

로마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가 첫 부분이며, 두번째 부분은 12장부터 16장까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 부분은 교리적 부분이라고 부르고, 두번째 부분은 윤리적인 부분입니다. 첫번째 교리적 부분에서 제기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죄인인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며 그에 대한 정답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믿으므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의롭다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올바른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한 답변을 본문의 12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11장까지의 교리적인 부분과 12장부터의 윤리적인 부분이 연결되는 고리인 12장의 첫 단어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면, 그리고 이 세상을 극복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우리의 몸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 중의 하나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체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 순간 주님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몸은 우리의 몸이 아니며, 이제는 하나님의 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이하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가 자주 성도들에게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크리스챤들은 술을 마시면 안됩니까? 혹은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합니까? 성경 어디에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그 어디에도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피워도 괜찮을까요? 저는 술을 마셔야 하는가? 마시지 말아야 하는가? 담배를 피워야 하는가? 피우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을 해 오는 분들에게 저의 대답은 정말 술을 마셔도 좋은가, 담배를 피워도 좋은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면 술마시기 전에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지, 혹은 담배를 피우기 전에 정말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하실 수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지를 주님 앞에 먼저 물어 보시라고 대답을 합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굴뚝이나 술독으로 만드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보다는 더 위대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로마서 6장 13절에서 우리의 몸이 의의 병기가 될 수가 있고 동시에 불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의의 도구가 될 수가 있고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부엌의 아내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제 아내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있으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저 칼을 통해서 어떤 멋진 요리가 등장할 것인가 하는 기대로 인해 아내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은 저를 감동시킵니다. 그러나 똑같은 부엌의 칼이 강도에게 들려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하고 무섭습니까? 같은 도구가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기능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있습니까? 나의 입술을 통해서 가난하고 고독하고 외로운 이들을 격려하는 말들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 손이 하나님의 손이 되어 힘이 없고 연약하며 무력해 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다정한 손으로 쓰임을 받고 있습니까? 내 발이 하나님이 가라하는 곳을 향해서 가고 있으며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사용되고 있는지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사탄이 여러분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누가 우리의 몸을 붙들고 있으며 사용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몸은 의의 도구로 혹은 불의의 도구로 사용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악한 사탄의 도구로서 사용될 수가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얼마나 자신들의 몸을 죄악의 도구로, 불의의 병기로 사탄 앞에 내어 놓고 살고 있는지요? 오늘 이 시대에 아직도 만연되고 있는 알콜중독, 흡연, 마약, 무절제한 성적 타락, 혼외정사, 혹은 AIDS(후천성 면역 결핍증)와 같은 끔직한 병을 보십시오. AIDS의 원인이 많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성적인 타락에 빠져있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 통계에 보니까 2000년까지 지구촌에서는 적어도 1억의 인구가 AIDS로 희생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이내에 이 지구촌에서 무려 8억의 인구가 AIDS로 사망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어쩌면 AIDS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이 끔찍한 사실 앞에 서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떤 도덕적인 책임을 물려 주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시작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드리라’는 단어는 본래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제물을 드린다고 할 때에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거룩하다’는 말은 성경에서는 언제나 단순히 깨끗하다는 뜻보다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구별되었다고 고백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의 몸은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까? 식사할 때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건강으로 모든 정열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서 내 몸과 내 시간과 내 전 존재를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내 입술이, 내 손이, 내 발걸음이, 내 심장이, 내 호흡이, 내 전 존재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먹고, 마실 수가 있으신지요? 이것이 바로 자신을 ‘거룩한’제물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본문은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단위에 제물을 올려 놓을 때에 반드시 각을 떴습니다. 죽은 제물, 피 흘리는 제물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하나님께 사용되도록 바쳐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살아있는 제물로 우리의 존재, 우리의 생애 전체를 주님 앞에 바칠 수가 있는지요?

 

 

여러분, 제가 질문을 한가지 드려보겠습니다. “순교가 어려울까요? 아니면 날마다 순종하는 삶이 더 어려울까요?”. 안이숙사모님께서는 순교를 하시려다가 못하셨는데 그 분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 어쩌자고 순교하지 못하게 하시고 날마다 이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라고 말씀하신답니다. 큰 맘을 먹으면 저도 순교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눈 딱 감고 잘 죽으면 이 다음에 역사 책에라도 남을지 모르니까 인간의 영웅적인 심리의 동기에 의해서 단 한번의 순교는 어쩌면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것은 날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매 시간,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이 원하시는 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행위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가 있을까요? 과연 그것이 우리자신의 의지의 결단만으로 가능할까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롬 12:1).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나타난 중요한 의의 주제는 어떻게 인간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가를 살펴 보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분의 자비하심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구원이 내 힘과 내 노력,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던 것처럼 오늘 하루를 사는 거룩한 삶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그 모든 사랑과 은혜를 의지해서 거룩한 몸으로 너희들의 전 존재와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입니다. 본래 영적 예배란 말에서 ‘영적’이란 단어는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오역은 아니지만 오해될 가능성이 있는 번역으로 원문 그대로의 번역은 아닙니다. 이 단어를 보다 원문에 가까이 번역하면 ‘그것이 마땅한(합당한) 예배이다’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예배 다음에 따라와야 할 진정한 예배이다 라는 것입니다. 축도와 함께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란 예배를 드린 후에 우리의 삶의 전 영역 속에서 어떻게 이 말씀을 갖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구로 쓰여지기 위해서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생활, 우리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렇게 사용하고 계신지요?

 

둘째,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첫째로는 몸을 드리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몸을 지배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려면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2절). 여기서 본 받지 말고 할때의 ‘본’이라는 단어와 변화를 받으라의 두개의 단어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같은 단어의 뿌리에서 나왔는데 전혀 다른 두개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본 받지 말라고 할때는 "confirm"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변화를 받으라는 단어에는 "transform"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변화를 받으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질적인 변화, 즉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이 질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 제가 제 자신의 삶의 꼬라지를 보아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목회의 가장 커다란 좌절은 이 많은 예배와 성경공부, 그리고 이 많은 훈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정말 변할 수 없을까요? 성경은 변할 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변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변화를 받으라고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 변화를 받는 방법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이란 점진적인 새롭게 함을 말합니다. 이 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나에 대해서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그 많은 삶의 조건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변화를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소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점진적이지만 반드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가 가능할 수가 있을까요? 여기 변화를 받으라는 단어는 수동태로 씌여졌습니다. 수동태란 변화의 조건을 형성하기만 하면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우선 우리의 마음이 부패될 수 있는 상황이나 사건이나 사람을 멀리 하셔야 합니다. 가까이 하다보면 더럽힘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저질 비데오나 저질 책자는 없으신지요? 주의 영이 오늘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신다면 주님이 보시기에도 안타까운 것들이 없을까요? 저질 TV 프로그램을 지나치게 많은 시간 보시지는 않는지요? 여러분의 주변에 저질 친구들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시편 1편 1절에 보시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중요한 동사 세 가지가 나란히 나옵니다. 지능적인 동사들인데 첫째 악인의 꾀를 좇아서 걷지 아니하며 할 때, "walk"(걷다), 둘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할 때에 "stand"(서다), 세번째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다 할 때 "sit"(앉다)라는 세 개의 단어입니다. 걷다 보면 서게 되고 서다 보면 펄썩 주저 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예 처음부터 악인의 길에 서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원칙에 분명히 어긋난다고 할 때 비록 내가 지불해야 할 희생과 대가가 있을지라도 이런 것들을 향해서 "no"라고 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마음의 성결을 촉진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시기 바랍니다. 만나기만 하면 신앙의 자극을 받게 되는 분들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좋은 찬양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집안을 좋은 영감의 찬양으로 가득채워 보십시오. 유행가만 한참 듣다 보면 짜증스럽고 고달프고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영감이 가득찬 찬양, 헨델의 클라식 음악들, 아름다운 복음의 성가들로 여러분의 가정을 채워 보십시오. 그런 찬양을 듣기만 해도 용기가 나고 위로가 생기고 삶에 대한 의욕과 도전으로 가득차게 되는 찬양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조건 형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말씀을 가까이 하고 늘 기도하는 이 변화의 조건을 형성하기만 하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변화할 것입니다.

 

오래 전 한 선교사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사막지대에서 선교하는 분이셨는데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는 불모의 지대에 선교사님의 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님의 사모님께서 부엌 바로 뒤에서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니, 사모님께서 설겆이 할 때마다 그 물을 뒤 뜰의 같은 장소에 매일 버린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일 물을 같은 장소에 내 버리자 어느 순간 토양이 바뀌었고, 그곳에 한 씨앗이 바람에 날려와서 떨어지게 되자 어느 날 갑자기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낸 것입니다.

 

한 순간에 가능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늘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매일 아침 5분간 성경보고, 5분간 기도하는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5년후, 10년후, 15년 후에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내 자신의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불평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엔가는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삶이 객관적으로 관찰되었을 때 “저 친구 정말 변했다”고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주 앞에 드리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만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3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다음에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삶이 출발하는 첫번째 중요한 자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사모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초점을 맞추도록 하십시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마음을 지배하는 열쇠는 의지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바꾸어 지려면 의지의 변화가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딜레마는 우리의 의지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7장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고 고백했던 바울 사도의 고백을 통해서 이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종교 개혁자였던 마틴 루터는 이것을 ‘의지의 속박(bondage of will)'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속박의 사슬은 과연 깨어질 수 있을까요? 성경은 물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의지의 속박을 깨뜨리고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도울 때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깁니다. 제가 여러분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무척 어려우시겠지만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준행하는 삶은 아니어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이 있는 것을 고백하실 수 있으신지요?” 적어도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분의 뜻을 즐거워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온 기도 중 가장 위대한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만이 선하시고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뜻만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을 향한 가장 완전하신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도록 구하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내 뜻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과, 죄와 악을 향해서 달려가는 삶의 자세를 끊어 버리기 위해서 자기 희생과 자기 결단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해서,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영광스러운 우리의 삶의 미래를 내다보며 또 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그들의 삶의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면서 날마다의 구체적인 삶의 결단 앞에서 “내 뜻대로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가 있으신지요?

 

저는 이제 이 세대를 본받기를 거절하고 이 세대 속에 빛나고 아름다운 증거를 남겼던 미국의 한 크리스챤의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제롬 하인스의 소원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의 무대위에 서서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를 향해서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페라단의 가수가 되자마자 자신이 그동안 추구해 온 것이 겨우 이것이었단 말인가 하며 말할 수 없는 공허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뉴욕의 아파트에서 공허한 가슴을 달래면서 TV를 켰는데 마침 빌리 그래함목사의 전도대회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하시기 직전에 한 분이 나와서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라는 찬양을 죠지 베르리쉐아 라는 분이 베이스의 영감스런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롬 하인스는 충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도 나처럼 내 길을 걸어갔으면 내가 설 수 있는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저기서 저런 노래를 부를까 의아해 하며 빌리 그래함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날 그는 설교말씀을 통해서 죄악 속에 있었던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TV의 브라운관 앞에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하기 시작헀습니다. 그가 변하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고가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오페라 무대를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오페라 무대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노래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는 고민을 하다가 오페라 무대에 계속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적이 달라졌고 더 이상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이 스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그는 오페라 무대에 당당하게 서서 창조의 하나님을 계속해서 노래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거의 10년간 아름다운 오페라 가수로서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주께 영광을 돌리면서 오페라 가수로서의 삶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오랫동안 소원하던 오페라 작품의 주인공으로 뽑히게 되었고 계약서에 사인한 후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연습 중 서곡에서 춤이 나오는데 그 춤은 거의 나체의 몸으로 춤을 춰야 했습니다. 본래의 작품은 그런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왜 이런 내용이 필요하냐고 묻자 현대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이 필요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자기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 가운데 저질스런 욕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아파서 원래 이런 가사가 없었지 않냐고 항의하며 부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감독은 현대 오페라에서는 이것이 필요한 것이고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요했고 부르기 원치 않으면 메니저를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의 유명한 빙(Mr. Being)이라는 메니저를 찾아가서 항의를 했습니다.이런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그는 그렇다면 할 수 없다며 다른 사람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롬 하인스가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막대한 수 만불을 지불하고 오페라의 가수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오페라단 사무실에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그 순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진정한 기쁨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해가 저무는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 나오면서 그는 자기에게 감동을 주어 자신을 변화시켰던 죠지 베브리쉐아의 복음성가를 밤하늘을 향해서 홀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여러분, 제롬 하인스는 실패자요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세상은 그를 냉소할지 모르나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정한 자유와 참된 기쁨을 경험한, 이 세상을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롬 12:3-8 / 지혜롭게 생각하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뇌기업으로 알려진 IBM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IBM의 창설자인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Senior)이라는 사람은 회사의 창업기 때에 사무실의 모든 벽마다 “think(생각하라)”는 단어를 부착해 놓았다고 합니다. 회사의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그는 종종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좀더 깊이, 더 분명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연설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회사의 번영기 때에는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각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의 3절에서 우리에게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원문에 보시면 ‘지혜롭게’ 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관적으로 번역된 것으로 ‘지혜롭게’라는 말의 본래 뜻은 ‘냉철한 판단, 혹은 건강한 판단’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씀은 ‘냉철한 판단에 근거하여 생각하십시오’라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감성적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는 보다 더 이성적 종교에 속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두 부분으로 나눌 때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적 부분이라는 것을 강조했고 12장부터 16장 마지막 장까지는 크리스챤들의 윤리적 삶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삶을 바로 살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혹은 이웃을 어떻게 잘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제기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개인적인 이기심을 뛰어 넘어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길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르게 설명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일에 가장 커다란 방해가 있다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물론 과소평가도 나쁜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열등감의 발로이며 이런 사람들은 좀처럼 쓰임을 받지 못하는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히려 과소평가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것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왜냐하면 과대평가를 하게 되면 자신을 신(神)인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완전하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시도를 믿고 있는 우리들의 믿음의 분량은 아직도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3절에 보시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관해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십니까? 여기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원문에 보시면 “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제한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과 믿음을 갖고 있어도 여전히 제한된 존재이며,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에 불과하다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들어야 할 복음은 소크라테스 복음입니다. 즉 “네 자신을 알라”는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지혜롭게 생각하십시오. 냉철하게 올바른 판단을 하십시오.

 

둘째로, 우리들의 지체에 대하여 올바른 사고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들의 이웃에 대해서, 다른 성도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들의 믿음의 분량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부족한 우리가 완전하시고 충만한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이것이 신앙의 가장 커다란 명제입니다. 부족한 내가 어떻게 내 안에 오신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은사와 직분과 역할을 주셨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신 이유는 우리가 부족함이 많지만 하나님의 은사를 소유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형성할 때 바로 이 교회를 통해서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중요한 의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저마다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를 통하여 함께 사역하는 것을 배울 때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놀라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와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만한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첫째 단원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요, 또 하나의 특성은 이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꿔 말하면 지체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 마치 나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웃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웃의 존재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과 갖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면 내 이웃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4절을 보시면, “우리가 한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고 6절에도,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처럼 행동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왜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고 자기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하고 끊임없이 이웃을 비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 안에서의 다양성을 아직도 발견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교만한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획일성일 뿐 일치성이 아닙니다. 일치라는 개념은 성경적이지만 획일은 결코 성경적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다양한 개성과 다양한 은사, 그리고 다양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들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치된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획일적으로 사고하고 획일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이웃을 비판하고 고발하고 비난합니다.

 

최근의 젊은 여기자인 전여옥씨가 쓴 베스트 셀러 가운데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분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 말하는 풍토에 대해서 자기가 직접 살아본 일본에서의 산 체험에 근거해서 “일본에게서 배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역습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지적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은 오늘날 너무나 규격문화의 틀에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획일적인 문화는 결코 선진문화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진문화는 선택의 다양성이 있어야 하는데 일본의 모든 문화적인 지향은 지나치게 획일화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몰개성 패션주의’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여자들은 다 똑같은 루이비똥 백을 들고 다니고 시계는 다 롤랙스, 샤넬, 카르티에 시계를 차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문화 속에서는 새로운 창조적인 21세기의 문화를 지향할 수 없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우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개성과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일치된 한 목표를 향해서 갈 수가 있을까요? 이것이 교회의 과제입니다. 교회의 상처가운데 하나는 교회 속의 어떤 사람들이 지나치게 교만해서 자기처럼 다른 회원들에게 똑같은 생각을 강요하고 똑 같은 스타일을 강요할 때에 교제의 상처와 갈등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젊은 목사님이 새 교회에 취임을 하셨는데 그 교회는 갈등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 갈등의 원인은 평신도 지도자들 가운데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과 비난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이 교회의 일상적인 풍토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목사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성도들을 깨우쳐 주려는 목적으로 강대상에 무엇인가를 담요에 둘둘 말아서 들고 나오셨습니다. “여러분, 이 담요 안에는 한 생명체가 있습니다. 지금 열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하고 담요를 열자 종이 한 장이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큰 눈이 하나 그려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생명체는 아니지만 사람의 눈입니다. 여러분, 이 눈을 보시면서 솔직히 느끼는 감정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사람들이 “징그럽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젊은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에게도 이처럼 한 시각만 있다면 우리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에게는 다양한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 다양한 시각이 어우러져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 나갈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다르다는 사실때문에 서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어우러져 주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광스러운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서야 합니다.”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이런 지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교회안에 가져야 할 성도의 인식인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은사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강조한 것처럼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입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섬길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물론 없는 것 갖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갖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다른 성경 말씀에 보시면 이 외에도 다른 여러가지의 은사가 있지만 본문의 로마서 12장에서는 대표적인 크리스챤의 봉사의 동기를 형성하는 은사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에 주신 은사를 가지고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사역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서야 할 자리를 발견한 사람,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내게 그 일을 맡겨 주셨다는 확신 속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브라함 링컨의 일대기에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 당시 링컨의 정치적인 정적 중에서을 특별히 스탠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적이 있었습니다. 링컨의 일생 전기를 읽어보면 이 사람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링컨에게 욕설을 많이 해 댔는지 한번은 “여러분, 오리지날 고릴라를 보시려면 동물원에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스프링휠드, 일리노이에 가시면 거기에 오리지날 고릴라가 있습니다.”라고 링컨을 비웃었습니다. 그곳은 링컨의 고향이었던 것입니다. 링컨이 생긴 것을 가만히 보면 정말 고릴라같이 생겼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정부의 장관 각료를 조각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장관 자리의 적임자를 두고서 링컨이 말하기를, “아, 이 자리는 스탠튼이 좋겠소.”라고 그의 정적을 추천했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참모들이 깜짝 놀라서 묻기를, “어떻게 그 사람을 추천할 수가 있는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링컨은 자신의 특유의 미소를 띠고서 말하기를 “여러분들, 이 자리는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비판했느냐를 토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 자리에 누가 가장 적합한가를 논의하는 자리이며, 제 생각에는 그가 가장 적합한 자라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한평생 그 자리에 서서 흔들림이 없이 맡겨주신 삶의 목표를 향하여 자기의 여생을 몰고 가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제가 은사를 사용하는 실질적인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잠정적으로 여러가지 일들을 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서도 여러가지 일들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가대에도, 주일학교 교사로도, 안내위원으로도, 그리고 우리 교회 안의 여러 위원회가 많이 있는데 각 위원회마다 다 들어가서 봉사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봉사를 할 때 가장 큰 기쁨과 환희가 있는지요? 그 일만 하기만 하면 너무 너무 기쁜, 그런 일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워싱톤교회에 있을 때 한 자매에게 들은 간증인데 자기는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이 일 저 일을 해 보아도 기쁨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중보기도의 사역이 시작된 이후에 기도시간에 가서 중보기도를 시작하니까 너무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제게 와서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평생 할 일을 마련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매님처럼 자기에게 맞는 사역을 발견할 때까지는 여러가지 일들을 잠정적으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는 그 일에 대한 평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만 평가를 해 보실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평가를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평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자기만 그 자리에 적임자라고 스스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제 목소리가 괜찮으니까 성가대의 은사를 주셨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성가대에 끼어서 찬양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만 인정을 받아서는 안되며 자타가 공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정확하게 냉철하게 평가해 보시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평생 헌신을 자원하시기 바랍니다. 확신이 들면 이 일을 평생 하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성가대를 보고는 어떤 분이 우리 교회 성가대에는 나이 많은 분이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젊은 분들이 다 어디로 갔냐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이 많은 분들이 계신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미국교회를 방문해 본 경험을 통해서 참 부러운 것 중에 하나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열심히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성가대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분들은 평생 봉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은퇴할 때가 가까워 오면 은퇴하기를 많이 기다리십니다. 왜 그렇게 은퇴를 기다리냐고 물어 보면 은퇴 후에 교회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려고 기다린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미국교회의 큰 교회를 가 보시면 그 교회의 사역자의 절반 이상이 다 자원봉사로 이루어집니다. 주어진 시간동안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플로리다주의 한 큰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그 목사님의 비서가 여러분이 계신데 그 중에 한 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환한 미소를 띠고 찾아오는 분들을 맞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은 평생동안 비서로 일하시다가 은퇴하신후 교회에서 자원봉사로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어떤 행정상의 조정을 위해서 임명하는 절차가 있지만 저는 성서적인 진정한 방법은 자원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안내에 은사가 있다고 생각되어 자원하시면 그런분은 교회에서 임명해 주시는 것과 상관없이 평생동안 안내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 인상보고 괴로운 사람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자타가 함께 인정한다면 안내를 평생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회봉사에 은사를 주신 것 같다고 확신할 수만 있으면 그 사람은 사회봉사위원회에서 평생을 일하셔야 합니다. 위원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위원장을 하신 후에도 다시 위원으로 내려 오셔서 함께 섬길 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위원장을 그만 두셨다고 그 일을 몰라라 하면 안됩니다.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내가 서야 할 그 자리에 서서 중요한 것은 내 한평생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중요한 것은 은사를 계속해서 개발해야 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우리 편의 책임도 있습니다. 은사를 개발하는 방법은 은사를 땅에 파묻지 말고 계속해서 성실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본문의 6절 이하에 보시면 각각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의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만약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메세지를 자기의 짐작과 생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가짜 예언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해야 합니다.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자꾸 섬겨야 그 은사가 개발됩니다. 또한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계속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은사가 개발되는 것입니다. 권위하는 자, 권위한다는 것은 권고하고 위로한다는 것이며 현대적인 개념으로 바꾼다면 상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종종 구제의 은사를 갖고 구제의 사역을 하다보면 돈을 많이 만지게 됩니다.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성실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구제의 은사를 가졌으면 성실함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합니다. 다스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나태함 속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한 긍휼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병원 심방을 많이 하게 되며 과부와 고아들을 돌아보는 사회사역 쪽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찌푸리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즐거움으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한 평생 기쁨으로 섬기려면 생각해야 할 세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먼저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를 하십시오. 둘째는 이웃에 대해서, 내가 이웃과 어떻게 더불어 잘 일할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셋째로는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은사를 주셨으며 이 은사를 따라서 내가 어떤 사역을 한 평생 감당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애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 주님께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이루어 제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습니다”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제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자기의 사역 앞에 한 평생 성실했던 사람을 언급할 때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얼마나 멋지게 인생을 사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카터 대통령이 어렸을 때 성장과정에 있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후에 자신의 은사를 살펴 보니까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일학교 교사를 일찌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어김없이 자신의 고향 죠지아주의 플레인스에 있는 작은 자기의 본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얼마전 미국의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는데 요즘 그 교회가 카터대통령 때문에 많이 부흥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관광객들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 구경을 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관광객들이 카터 대통령이 주일학교를 가르치는 광경을 뒤에서 구경한 뒤, 구경이 끝나고 나면 의례히 빠지지 않는 행사 중의 하나가 카터대통령과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계속 사진을 찍으려면 힘들지 않냐고 기자들이 질문하자 그는, “나는 기쁨으로 사진을 찍힌다. 나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을 수가 있는 것이 오히려 기쁘다. 나는 앞으로도 평생 계속해서 찍히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하는 이것이 진정한 섬김의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은퇴한 대통령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바로 카터입니다.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분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왜 사람들이 카터를 찾습니까? 다른 것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가 믿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타임지가 대통령을 그만 두고 난 뒤에 카터의 활동을 소개한 문구 가운데 아주 인상적인 대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the only President who used White House as the stepping stone(백악관을 디딤돌로 사용했던 유일한 대통령)”. 이 말은 어마어마한 말입니다. 백악관이 그의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권력이 목표가 아니고 대통령이 목표가 아니라, 백악관을 디딤돌로 사용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서 자기의 한 평생의 삶을 드려 복음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이 한사람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다가오는 추석절, 우리는 함께 모여서 우리들의 선조들의 일들을 추억하며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먼 훗날 내가 떠나간 내 삶의 자리를 지켜보며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우리의 아빠는, 엄마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시다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는 고백을 할 수가 있을까요?

 

롬 12: 9-21 / 행동하는 사람

 

 

여러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워지는 손양원목사님의 일생을 잘 아시지요? 사람들은 그분의 삶의 위대함을 말할 때 그분의 생의 마지막의 순교라든지 혹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양자로 삼은 그런 극적인 사건을 보통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손목사님의 삶이 남기신 감동은 이런 사건들 속에서 찾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은 결코 일회용의 사랑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그분의 삶이 남긴 최대의 감동이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삶의 일관성, 혹은 사랑의 일관성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평생을 철저하게 사랑함으로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는 어진 사랑의 목자셨습니다. 6.25동란시 피난을 가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던 이유는 단순한 데 있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교인들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결코 예배당 안에만 갇혀 있었던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1,000명 이상되는 나환자들과 동거동락하며 그들과 더불어 사셨습니다. 이런 그분의 날마다의 삶속에 나타난 한결같은 사랑이 어느 날 자기의 두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였던 그 청년까지도 용서하고 자신의 아들로 삼는 사랑의 실천을 가능하게 한 것 뿐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마지막에 순교했다, 원수를 아들로 삼았다는 극적인 사건 뿐만이 아니라 그분은 날마다 사랑함으로 살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9절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엔 거짓이 없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거짓이란 말을 다른 유사한 말로 바꾼다면 위선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위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사랑은 결코 일회용의 연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관성이 있는 행동이어야 합니다.“사랑엔 거짓이 없다”는 말의 ‘사랑’이란 낱말이 희랍어에서는 ‘아가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들을 향하여 혹은 세상속의 불신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참된 사랑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절).

오늘날 사랑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을 좋아하고 끌어 앉는다는 포용의 의미로만 사랑의 언어가 씌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참된 사랑은 악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악인은 용납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어떤 사람의 악행이 미운 나머지 그 사람까지도 거절해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우리가 악인을 사랑하고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사람의 삶속에 있던 악까지도 눈을 감고 넘어가 버리는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속에 있는 죄와 악에서 그들이 떠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해야 하며 선에 속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참된 사랑은 형제의식의 발로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형제란 누구입니까? 탈무드에 보면 “형제란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서로 의지할 수 있고, 서로 붙들어 세워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라는 재미있는 정의가 있습니다. 육신의 형제도 귀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는 얼마나 더 귀합니까? 사실 참된 신앙의 사람은 영적인 그리스도안에서의 형제와 자매를 육신의 형제와 자매 못지 않게, 그와 다를 것이 없는 꼭 같은 형제와 자매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형제들은 더욱 중요합니다. 인간적인 형제는 지상으로 끝나고 말지만 그리스도안에서의 형제와 자매는 영원까지 그 관계를 지속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기업을 함께 나누어 받은 형제와 자매의 시선으로 같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바라 본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얼마나 달라질까요? 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우애와 존경의 삶은 형제의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로 부르고 영원을 함께 나누어 받은 형제의 의식을 갖고 다시 한번 곁에 계신 형제와 자매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얼만큼 달라져야 할까요?

 

 

 

뿐만 아니라 참된 사랑은 주님을 섬기는 열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들의 삶의 동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물리적인 세상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인격, 구체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겠다는 인식앞에 도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께 대한 열심이 식어버리면 사람에 대한 사랑의 열심도 식어버립니다. 순수한 인간적인 휴매니즘의 사랑이 오래 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동기가 빈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어 붙들린 바 되었다면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의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가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장에 서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사랑은 소망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처하고 있는 환경이 아무리 역겹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만약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두가지를 할 것입다. 첫째는 견뎌야 할 것이고, 둘째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들은 견디면서 기도할 것입니다. 12절을 보면,“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빛나는 소망을 바라보며 그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떤 환란 중에도 참을 것이며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참된 사랑은 소망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 사도는 참된 사랑은 성도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굉장히 문화적인 변천과 함께 약식화되었지만 고대 중동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최고의 사랑을 표현할 때의 사랑의 표현방식을 읽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맨 먼저하는 것은 이마에다 키스를 하고 그 다음에 입에다 키스를 합니다. 그 다음에 오른쪽으로 끌어 앉고 왼쪽으로 끌어 앉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두 손을 한참 흔듭니다. 또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발까지 머리를 숙여서 발을 잡고 흔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표현방식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을까요? 제일 처음 이마에다 키스를 하는 것은 내 머리로 당신을 늘 생각하고 있다는 표현이며, 입에다 키스를 하는 것은 나는 당신에 대해서 항상 좋은 말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른쪽으로 끌어 앉고 왼쪽으로 끌어 앉는 것은 나는 당신의 좌우에서 항상 당신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며, 손을 잡고 흔드는 것은 나는 구체적으로 당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함께 도울 것이라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발까지 머리를 숙여서 발을 잡고 흔드는 것은 당신이 가는 어느 곳이라도 나도 함께 가겠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추상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같은 믿음의 형제와 자매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인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무엇때문에 어떤 필요 앞에 서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성도들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을 비단 나와 똑 같은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만 향해서만 나타낼 것이 아니라 불신앙의 사람들, 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없는 이 불신앙의 세속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이 사랑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내 믿음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나를 핍박할 수가 있습니다. 나를 핍박하고 나를 적대시하는 그런 이웃들 앞에서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불신자를 향한 사랑의 표현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그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을 맨 처음 부르셨을 때 그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후 그에게 기대하시기를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을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축복의 근원, 달리 말하면 축복의 도구, 축복의 통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 이유는 나 혼자 잘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그 축복을 통해서 우리도 이웃들을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로 쓰임을 받기 위해서 성경은 가장 실천적인 최초의 단계로 내 입술로 이웃들을 축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혀가 이웃들을 축복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고있습니까? 여러분, 야고보서를 보시면 우리의 혀를 가리켜서 샘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말을 하다가 저주의 말을 쏟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야고보는 같은 한 샘에서 어떻게 쓴 물과 단 물을 함께 낼 수가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는 여기서 일관성 있는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언어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축복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나는 오늘도 이웃을 축복하며 살고 있습니까?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참된 사랑은 이웃의 삶의 자리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삶속에 우리가 동참하지 않는한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즐거워하는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번씩 강조된 “함께”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현대의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때 공동체의 삶 안에서 우리의 문화를 가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산업화되어 가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적 삶의 의식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극도로 개인주의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축복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한 집안에서 TV 보는 일도 각자 합니다. 가족들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 TV를 사 주고 따로 따로 자기가 원하는 TV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편하게 되었다고 하고 이만큼 잘 살게 되었다고 때때로 자부하기 조차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축복일까요? 옛날에는 흑백 TV 한 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아서 같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 대한 식구들 모두의 의견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마다 TV를 한 대씩 갖고 본 이래로 우리는 공동체적인 삶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TV 뿐만 아니라 전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한 집에 전화 한 대로는 살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미 나타나고 있듯이 우리들의 자녀들이 삐삐를 차고 다닙니다. 추석 선물로 최고의 인기품이 삐삐 전화기라는 광고도 보았습니다만 이제는 전화도 각자가 사용해야 합니다. 내 비밀을 아빠도 참견하지 말라는 것이며 내 삶은 내가 살아야 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십대들이 얼마나 자기 개인전화와 삐삐를 선호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식구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것 뿐이 아닙니다. 침대로 개인용 침대, 화장실도 이제는 개인용 화장실을 써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뿔뿔이 나누어지는 개인주의적인 삶을 우리는 문명의 발전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잃어버려져 가는 것은 공동체적 삶의 유대감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5절)고 하십니다. 1세기의 크리스챤들에게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그런 문명의 혜택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 좇겨 다녔습니다. 지하 동굴에서 카타콤의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코이노니아를 상징하는 이런 유명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지금 서양에서는 미국 목사님들이 주례를 하실 때 그 말을 종종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슬픔을 나누면 슬픔은 반감되고 기쁨을 나누면 기쁨은 갑절이 된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그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슬픔을 나누다 보면 슬픔은 오히려 반으로 줄어들고, 내가 기뻐할 때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어서 기쁨을 나누다 보면 기쁨은 갑절로 커집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적 삶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나눔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요즘 신문지상을 요란스럽게 장식하고 우리에게 충격을 가져다 준 지존파의 사건을 보십시오. 이 사건이 난 이후에 시편을 읽다가 ‘지존’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때마다 지존파의 충격이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이런 비극이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외국생활을 하다보니까 서구에서 소위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한국에서 부자들을 보는 시각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서구사회에서는 대부분 잘사는 부자들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많은 부자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적의 과정뿐만 아니라 축적된 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서구의 부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 부(副)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의 생애의 마지막을 바라보게 되면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 있어서 사회사업기관이나 교육기관, 혹은 선교기관 등에 자신의 재산을 자선기금 등으로 아름답게 정리하는 것을 보면서 이 부라는 것이 꼭 미움과 질시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사회의 불행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했고, 또 부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보여준 모본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 비극은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당연한 결과일지 모릅니다. 언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고통과 함께 진지한 고민을 해 보셨습니까? 우리 사회의 한 구석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느끼는 그 아픔과 고통과 그 절망과, 몸부림쳐도 나올 수 없는 안타까운 수렁에 빠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진지한 고민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불신자를 향해서 우리의 시각을 돌리라고 말씀하면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이 말씀앞에 순종했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참된 사랑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참된 사랑은 겸손함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의 세속사회를 향해서 표현해야 할 사랑은 겸손한 것이어야 합니다. 교만의 최대 비극은 무엇입니까? 교만한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신을 낮춤으로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어 오시고 종으로 자신을 낮추신 그분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은 사랑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을 방문하시면 탄생기념교회가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데 이상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예수님 탄생기념교회의 들어가는 성벽의 문은 아주 낮고 작게 설계가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 왔다가 그 교회로 들어가기 위해서 다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낮추시고 인간이 되어 오시고 종이 되셨으며 우리의 발을 씻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왜 우리가 자신을 낮추지 못할까요?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16절). 사랑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참된 사랑은 최선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평화하라”(18절).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음 우리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지 못할 상황도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의 편에 설 때, 혹은 자기의 양심을 위배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진리의 편에 설 때, 어쩔 수 없는 불화의 관계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타협을 거절하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긴장하고, 그것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불화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정황을 제외하고는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가능한한 평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지구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만이라도 이 말씀 앞에 진지하게 반응하고 진지하게 순종한다면 세상은 얼만큼 달라질까요?

 

 

 

 

마지막으로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구체적인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

우리가 이웃을 향해서 선을 베풀 때 그 이웃이 원수라고 할 지라도 선을 베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챤 자매가 이혼을 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서 한 목사님을 찾아와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선 이 크리스챤 자매가 이혼까지 결심하게 된 것이 안타까워서 “그래도 이 수많은 세월을 함께 살아온 남편이 아닙니까? 남편을 좀 더 사랑할 수가 없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자 이 자매는 “남편요? 그 인간은 남편이 아니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럼 남편이 아니라고 하십시오. 적어도 20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다면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친구로서 사랑할 수는 없습니까?”라고 다시 물으니까, 그 자매가 대답하기를, “친구요? 그 사람은 이제까지 한번도 제 친구가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좋습니다. 남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라면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까?”하자, “이웃요? 저는 차라리 이웃과 살면 살았지 그 인간하고는 살지 못하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또 다시, “남편도 아니요, 친구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라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이 자매는, “누구라니요? 원수지요, 원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께서 안타깝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원수라고 생각하고 사랑할 수는 없는지요? 성경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 말씀을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까? 여기 오늘 본문은 그 원수를 향한 우리들의 사랑의 자세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쌓아 놓으리라”(20절)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언뜻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보입니다. 본래 이 말씀은 잠언 25장 21절과 22절의 인용입니다. 잠언서를 읽어 보시면 좀더 쉽게 문맥속에서 이 말씀이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 25:21-22).

한국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문화적 배경이 흡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옛날에 추운 날씨에 아주 소중했던 것은 화로의 숯불이었습니다. 때로는 날씨가 추워지면 이웃에 숯불을 빌리러 갈 수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화로를 머리에 이고 가서 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그때에 비록 내게 여유가 없고, 더없이 소중한 숯불이지만 이웃이 숯불을 빌리러 오면 그 불을 빌려 줍니다. 그러면 그 이웃은 머리에다가 숯불을 이고 갑니다.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 그 이웃이 비록 나를 학대하고 괴롭히던 이웃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정말 필요로 할 때 그 필요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가 가까이 지내던 목사님 한분에게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군대에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내무반에서 최고의 고참이 되었을 때 졸병이 들어왔는데 그 졸병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꼭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고 자는데 몸을 흔들면서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꼴 사나왔다고 합니다. 자기는 믿지 않았지만 저렇게 유별나게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 친구가 괜히 미워졌고 그러다 보니까 기압도 주고 일도 더 많이 주고 구박도 많이 하고 괴롭히며 그렇게 하면 좀 포기할까 했는데 밤이 되면 어김없이 또 흔들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밤에 술이 취해서 돌아와서 보니까 또 흔들며 기도하고 있길래 화가 나서 진흙이 잔뜩 묻은 군화를 집어들어서 그 친구를 향해서 던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술이 취해서 잠이 들었는데, 새벽녁이 되자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깨서 보니까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가만히 살펴 보니 저쪽에서 그 졸병이 자기의 진흙묻은 군화를 깨끗이 닦고 있더랍니다. 어떻게 하나 보려고 가만히 지켜 보니까 그 군화를 깨끗이 닦은 이후에 자기의 침대 앞에다가 가지런히 갖다가 놓더랍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이 목사님은 저 사람이 흔드는 기도가 가짜가 아니라 그 속에 정말 사랑이 있었구나라고 생각되어 나중에 그 졸병에게 사과하고 그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후에 나중에는 목사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 킹 쥬니어가 노벨상을 받고 나오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직도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사랑입니다.”라고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을 모르시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라”(요 3:16).

그런데 요한일서 3장 16절을 기억하는 분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체험한 사람들이 순종해야 할 그 다음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못지 않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6-17).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경험하셨습니까? 그 사랑을 아셨습니까? 그 사랑안에서 그리시도인으로 다시 거듭나는 경험을 하셨다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가 순종한다면,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이 말씀 앞에 순종하기로 결단한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질까요?

 

제가 한국에 나온 후 어느 날 TV 프로그램에서 유행가 가요를 듣다가 그 가사를 통해서 큰 은혜를 받 았습니다. TV를 보다가 유행가 가사를 받아 적은 것은 제 평생 처음있는 일입니다만 가사가 매우 성경적이라고 느껴져서 그 가사를 적어보았습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었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최근에 우리의 가슴마다 가정마다 한국사회에 끼친 이 엄청난 지존파 사건의 충격은 바로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그것은 저의 책임이며 교회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정말 끌어 앉고 사랑하고 나눌 수가 있었다면 이 비극은 불필요했던 비극이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이기심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체험하고도 그 사랑을 실천하기를 거부했던 우리들의 죄입니다. 우리들을 용서해 주시고, 이 땅의 교회들이 깨어나게 하시고 그리하여 이 사회가 달라질 수 있는 사랑의 기적을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롬 13: 1-7 / 국가에 대한 의무

 

 

마태복음 22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아주 미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선생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마 22:17)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백성을 배신하는 매국노라고 규탄할 속셈이었고, 혹은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로마 정부의 국법을 어기는 반역자로 고발할 속셈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은전 하나를 내 보이시면서 이 은전에 누구의 형상이 그려져 있느냐고 물어 보셨고 그들은 가이사의 형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의 의무, 즉 지상의 정부를 향한 의무와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의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복음은 국경을 초월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국경은 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넓은 시야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우리의 생명의 젖줄이 되어진 조국을 향한 발전에 기여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몇가지로 논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질서 유지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라”(1절).

 

이 말씀은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많은 독재자들에 의해서 남용되어 온 유명한 성경귀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피하려고 하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성경에 나온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굴복’이나 혹은 ‘복종’이라는 단어보다는 ‘반항’이라든지 ‘저항’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매력적인 단어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종이나 순종을 즐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특성 중의 하나가 반항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있어서의 저항의 합법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삶의 자세로서 복종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가르침들을 살펴 보십시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고,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라고 가르치며, 종과 상전과의 관계-이것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고용인과 피고용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전들에게 복종하라”고 계속해서 이 복종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있습니다. 그것은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질서유지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켜서 ‘권세자’라고 말합니다. ‘권세자’라는 단어를 들을 때 조금은 저항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말 가운데 세도가라는 말과 비슷한 느낌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세력을 잡은 사람들이 자기의 힘을 남용하는 역사적 실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 단어에서 어딘지 모르게 저항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가 이 질서유지의 책임을 가진 사람 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권세자라는 단어 대신에 그 말을 바꾸어서 질서 유지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사용했습니다.

 

권세는, 즉 모든 힘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정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것을 강조하면 즉각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나올 수 있는 또 하나의 반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히틀러같은 악한 지도자에게도 복종해야 합니까?”, 혹은 “김일성이나 김정일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까?” 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에 두 가지의 종류로 구별을 합니다. 첫째는 ‘최선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래 원하시고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최선의 뜻을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하나의 뜻은 ‘허용적인 뜻(의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인간의 타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타락은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신학자들까지도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한 것을 본래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락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타락을 하나님이 허용하셨습니까?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허용하셨을 때 그것이 당장은 우리의 눈에 불합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온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것이 최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다 혹은 허용적인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히틀러나 김일성을 세우신 것이 본래 하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선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하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시고 승인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악을 허용하심으로써 선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시고, 불의를 허용하심으로써 의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에 가서는 사람과 역사에 이 모든 것이 유익이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면 질서 유지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악한 제도도 그 제도나 그 정권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가 나쁜 정권을 경험하게 되다 보면 차라리 이런 정권이나 법 자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무정부주의적인 쪽으로 우리의 생각이 극단적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없는 세상이나 일체의 법이 폐기된 사회를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회는 극도로 무질서해 지게 되고, 이런 혼란이 오면 제일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완전한 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도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정과 사회의 질서 유지의 차원에서 정부나 제도를 허용하고 승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사람의 공의를 위해서 질서 유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실제적으로 한 나라를 향해서, 사회를 향해서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권세라는 말을 할 때 비단 최고의 통치자만 연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종류의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 전체를 포함시킬 수가 있습니다. 저는 크리스챤들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이런 실제적인 사회생활 속에서도 반영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얼만큼 우리는 우리가 살아오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제도안에서 이것을 협조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지키려는 신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4절에서는 모든 종류의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사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의도해서 세우셨든, 아니면 하나님이 허용해서 세우셨든 우리의 복리와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셨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래 이 하나님의 사자란 말은 보편적으로 목사들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영적인 지도자를 가리킬 때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는 법을 집행하는 모든 관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세우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유익과 한 사회의 안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을 세우셨다면 그들에게 협력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운전을 잘못해서 경찰에게 걸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경찰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믿습니다. 제가 한국에 나와서 보니까 한국의 경찰들이 아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고가 나면 사고를 조사하는 경찰에게 삿대질을 하고 어떤 때는 경찰과 싸우는 경우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장 민주적인 사회라고 하는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경찰한테 불순종하면 당장에 수갑을 채우고 땅에다가 밟아 놓습니다. 그래도 반항을 하면 쏘아 버립니다. 법 집행을 위해서 일단 순종하고 나중에 법정에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순리이지 반항은 일체 허용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단, 자기가 잘못했을 경우에 경찰에 걸렸다면, “참 수고하십니다. 저는 걸려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얼마입니까? 처벌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크리스챤입니다. 억울한 경우라고 생각이 들면, “제가 별로 위반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판단하신다면 할 수 없지요. 제가 나중에 항의하겠습니다. 일단 주십시오. 그러나 어쨌든 참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이렇게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최대한으로 협조를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5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벌금을 많이 내는 것을 인하여서가 아니라 내가 잘못했다면 스스로 자신의 양심때문에 시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으로서, 또한 한 사회를 살아가는 공시민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한 삶이기 때문에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것이 애국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제일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선한 국가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을 통해서 이 땅의 우리의 사회속에 선을 이루시고 의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 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4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선’이라는 단어와 ‘악’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그들을 세우셨다구요? 선을 집행하기 위해서 혹은 의를 집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회속에 지도자를 승인하시고 세우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사회가 보다 선해질 수 있도록 참여할 수가 있습니까? 이 선을 집행하는 도구로 세워주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이것을 적극적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선과 공의가 증진될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신령한 크리스챤이 되면 이 사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신앙이 좋은 사람일수록 사회나 역사로부터 도피하는 현상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치가 오염되고 그동안 잘못된 정치의 현장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정치를 한다고 하면 왜 그런지 그 사람을 잘못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치적이란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정치는 삶의 방식이고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정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 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크리스챤들이 되도록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일까요? 이 땅에 의가 진행되고 그리고 선이 증진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협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증진되어야 할 의의 문제를 보았을 때 우리는 얼만큼 참여하고 있습니까? 환경보호 운동, 신체장애자를 돌보는 운동, 정당하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자신의 표가 도둑맞지 않도록 감시하는 공명선거운동 등 이런 일들을 크리스챤들이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 도피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사실은, 시민으로서 적극적으로 선을 증진시키는 일에 참여해야 하고 소극적으로는 악을 방지하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신 목적이 그들을 통해서 선이 증진되고 악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면 이 땅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악이나 부조리나 제도적인 모순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고치고 예방하며 악이 발을 부치지 못하는 사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칼을 잡고 법을 집행하는 정부가 만약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집행하는 도구로서 변신한다면 크리스챤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크리스챤들의 딜레마입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속에서 이런 딜레마 앞에 직면하는 역사적 정황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경우에 이런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전통은 그리고 이 사상은 본래 성경을 읽은 크리스챤들에 의해서 이 땅에서 선포되었던 소중한 시민의 권리이며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나간 시대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시민 불복종의 권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세가지의 중요한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전제는 더 높은 권세자요 궁극적인 권세자이신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눈 앞에 보이는 그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경우를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왕은 그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것에 순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풀무불 속에 들어갈 각오를 하고 왕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더 높은 권위, 모든 권세의 궁극적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시면 관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도하지 못하도록 금했습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입니다. 만약 그들의 명령을 따르면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명백한 거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했습니다. 그들은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양심때문에 할 수 없다고 “노”를 선언했습니다. ‘시민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는 첫번째 전제는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눈 앞에 보이는 권세자들의 어떤 요구나 명령을 향해서 우리는 “노”를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시민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할 또 하나의 전제는 폭력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왕들의 명령을 불복종하고 거절하고 우리의 권리를 요청하고 주장하는 모든 상황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폭력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윤리적인 전통이 가져온 이 세계속에 기여한 가장 놀라운 선언이 있다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올바른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수단이나 비합법적인 수단, 성경이 승인하지 않은 수단을 가지고 올바른 목표를 추구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노조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수단은 적어도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는 용납될 수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교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위대한 성경적 원리를 끄집어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폭력 저항운동의 원리’입니다.내가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고 주장하는 그 순간으로부터 철저하게 끝까지 폭력이 아닌 정당한 수단과 과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할 때 두번째의 중요한 전제는 폭력이나 그릇된 수단이나 방법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저항이 우리의 삶의 자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저항을 하다보면 어느 경우엔 우리가 저항을 위한 저항을 할 수가 있고 또 저항이 체질화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할 수 없다”고 명백한 선언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저항을 위한 저항을 체질화시키다 보면 우리의 생리가 체질적으로 생리적으로 부정적인 인간이 될 수가 있고, 이 사회나 역사속에 아무런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저항이 필요한 순간에서 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권세자들을 향한, 그리고 우리의 삶 그 자체를 향한 순복의 자세가 상실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기의 자식에게 “이웃 집에 가서 무엇인가를 훔쳐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가난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 때에 크리스챤의 아들이라면 그 명령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순종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도적질을 금하셨기 때문이고 또한 나의 양심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자기의 의견을 관찰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너 이렇게 먹고 살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니? 이웃 집에 가서 하나만 들고 와라”고 했을 때 이 아들의 태도가 “당신이 인간야? 나 오늘부터 이 집에서 안살아”라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올바른 크리스챤의 아들이라면, “아버님, 저는 지금까지 아버님의 명령을 거스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적질은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버님에게 모든 것을 반항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님이 명령하시는 어떤 것도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 사건 앞에서 “노”를 선언하는 순간에 있어서 조차도 아버지를 향한 복종의 자세는 상실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자칫 잘못하면 그 저항이 우리의 체질화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증진되는 것이며 우리의 사회가 선한 사회가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크리스챤들의 궁극적인 삶의 자세로 첫째는 세우신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의 국가가 선하고 의로운 국가가 되도록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납세의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6-7).

 

성경은 나라를 향한 우리들의 의무 가운데 하나가 세금을 잘 바치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애국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세금을 내는 목적의 하나는 국가라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며 또 하나는 세금을 통해서 온 국가민에게 혜택을 분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이웃사랑의 실천의 길인 것을 아시나요? 그 세금이 잘 쓰여짐으로써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낼 때는 정직하게 내야 하며 또한 기쁨으로 내야 합니다.

 

제가 이랜드의 박성수사장을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그분이 세금을 잘 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기업이념입니다. 얼마 전에 만났는데 2000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서 세금을 가장 잘 내는 열 사람중의 한 사람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금년에도 계속 세금을 더 많이 낼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세금을 낼 때 좋아하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나와서 보니까 그 때 한참 초토세 때문에 사람들의 인상이 다 궂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사람들도 세금을 잘 내기는 하지만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심지어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미국 국기를 보면 색깔이 빨강과 하얀색과 파랑색의 세 가지의 색깔이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세금을 낼 때에는 그 얼굴이 세가지의 색깔로 된다고 합니다. 먼저 세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두번째 고지서를 받게 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그 다음에 세금을 막상 낼 때에는 파랗게 된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세금을 많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더 많은 이웃들에게 축복을 나누어 준다는 것인데 그것이 왜 싫습니까? 이것은 마치 십일조를 더 많이 드리게 되면 수입이 더 많아졌다는 것인데 그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만 미국의 아주 순진한 청년 하나가 목사님의 십일조 설교를 듣고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하나님, 내 한 평생 저도 십일조를 내기로 결심합니다.”라고 작정했습니다. 그 당시에 10불이 있어서 1불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얼마 후 그의 한달 수입이 100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0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해서 한달 수입이 1,000불이 되었습니다. 100불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장사가 너무 잘되어서 한 달 수입이 10,000불이나 되었습니다. 그러자 1000불을 십일조로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워지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순진한 청년은 십일조를 설교하던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십일조를 내기로 하나님과 목사님 앞에 약속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드려 왔습니다. 10불중의 1불이 어렵지 않았고, 100불중의 10불도 낼 수가 있었고, 심지어는 1,000불중의 100불도 낼 수가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10,000불 중의 1000불은 못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혹시 하나님과의 약속도 취소라는 것을 할 수가 없을까요?”하고 묻자 목사님께서는 머리를 극적 극적 긁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취소는 안되네. 그러나 이렇게는 할 수가 있네.

 

 

여러분, 내가 많이 벌고 많이 공익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인지요? 하나님의 사역에 그 축복을 나눌 수가 있고 또한 이웃들의 축복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인지요? 세금을 내셔야 합니다. 아주 정직하게 내셔야 하고 기쁨으로 내셔야 합니다. 얼마 전 우리교회의 사무회의를 하면서 우리교회가 아직 조직이 제대로 안 갖추어져 있지만 교회의 사역자들로부터 세금을 정확하게 내는 일을 자진해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추상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이웃을 축복하면서 살 수 있는 놀라운 삶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요, 기쁨일까요? 그리고 우리의 사회가 보다 더 의롭고 선한 사회가 되어감을 바라보는 것, 비록 어떤 나라도 완전할 수는 없지만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소금이 되고 빛의 삶을 추구할 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통치는 한 나라 안에 확장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이 온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넘치고 평화가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이 세계를 보고자 하는 이 목적때문에 이 땅의 크리스챤들은 가장 정직하게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국가를 향해서 우리가 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주께서 세우신 권세자들에게 복종하십시다. 그리고 선한 국가가 되도록 힘쓰고 참여하십시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일부를 정직과 기쁨으로 나누는 납세의 의무 앞에 충성하십시다.

 

롬 13: 8-14 / 우리시대의 청지기

 

 

최근에 페스트라는 질병이 한국 땅에도 상륙할 것에 대비해서 의료보건계가 초비상사태에 돌입했습니다. 다행히 이런 전염병의 침투를 사전에 알고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지요. 그러나 우리는 페스트보다도 더 무서운 정신적인 질병이 우리사회를 뿌리로부터 부식시키고 있는 위기를 현저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윤리의 실종이요, 가치관의 실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매스 미디아에서는 성폭력, 살인, 하극상 등의 뉴스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답답한 것은 우리사회가 이러한 비극의 예방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때에 이땅의 크리스챤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유명한 역사가였던 아놀드 토인비교수는 “사회가 중병을 앓을 때 그 사회의 체계 안에는 그 사회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역량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이 말은 사회의 체계 안에는 치유의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만약 희망이 있다면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만 있을 수 있다”고 다시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회란 단어는 매우 추상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키자고 부르짖지만 사회는 좀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다만 희망이 있다면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들 가운데서, 이런 사회의 깊은 책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길만이 이 사회 변혁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위기를 자기의 온 몸으로 절감하는 용기있는 개개인들의 헌신과 결단을 통해서만 사회가 새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토인비교수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창조적인 소수(Creative Minority)'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이 땅의 크리스챤들이 한국사회안에서 창조적 소수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로마서 13장 1절에서 7절까지 국가에 대한 크리스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함께 묵상했습니다. 오늘 로마서 13장 8절이하 1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사회 전반에 대한, 혹은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인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의무를 적극적인 의무와 소극적인 의무로 나누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적극적인 의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절)

 

여러분, 오늘날 우리사회의 대표적인 문제들이 본문의 네가지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간음, 살인, 도적질, 탐욕, 정확하게 우리사회의 문제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사실상 우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만 하면 단순하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렵다면 다시 질문해 볼까요? “간음하는 것이 쉽습니까? 간음을 안하는 것이 쉽습니까?” 간음을 안하는 것이 쉽습니다. 간음을 하려면 얼마나 어렵습니까? “살인하는 것이 쉽습니까? 안하는 것이 쉽습니까?” 물론 살인하지 않는 것이 쉽습니다. 살인을 하려면 음모를 꾸며야 하고 계획을 해야하는데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처럼 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쉽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죄를 짓고자 하는 본성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안지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우리는 죄악의 심연속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가려는 모습을 우리 자신속에서도 발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특별히 신약성경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라는 소극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대신에 보다 더 적극적인 노력을 강조합니다. 많은 말이 필요가 없고 오직 한마디 사랑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이웃에 사는 한 여성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간음하거나 성폭력이 가능할까요? 내가 내 이웃에 있는 한 사람을 정말 내 목숨처럼 사랑한다면 살인이 가능할까요? 내가 정말 내 이웃의 소유를 나의 소유처럼 존중히 여기고 그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다면 도적질이 가능하겠습니까? ‘사랑하십시다’ 이 한 마디안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십계명을 두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제 1계명 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대 신적(神的)인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제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의 계명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인 대인관계에 관한 계명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계명들을 다 암송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두 가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가장 커다란 계명은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 하나님 말고 더 수중히 여기는 우상을 섬길 수가 있을까요? 거짓된 우상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안식일에 주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탐욕이 가능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안하려고 하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시면 됩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사회의 모든 문제를 예방하는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가 안고있는 모든 문제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의 부족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 안에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삶의 배경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결손가정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가정에서도 부모의 사랑만 경험하며 자랄 수 있었다면 별로 문제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들은 사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가장 비이기적인 사랑, 가장 순수한 사랑, 가장 조건이 없는 사랑을 받아 본 사람들이 크리스챤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5장에서 바울사도가 이 사실을 강조한 것을 살펴 보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내가 받을 심판의 자리를 그가 대신 취하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조건없고, 가장 비이기적이며,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안목으로 꽤 뚫어 보았을 때 내 속에 있는 더러움과 추함,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흘리신 피로 내 죄를 씻어 나를 의롭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한 우리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 을 믿고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깨닫는 순간 동시에 주어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에서의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란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동안을 사랑하고도 남는 사랑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사랑치 않는 것은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실패했다면 사랑하지 않아서 입니다. 물론 우리의 이웃들 가운데는 좀처럼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안에서도 그런 분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 교회의 충성스런 집사님 한분이 찾아와서 “목사님, 우리 아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상담을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아들을 만나보셨는데 정말 다루기 힘든 청년이었고 이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답니다. 이것을 짐작이나 하셨는지 그 어머님께서 다시 목사님께 찾아와서, “목사님, 제 아들을 보면 참 한심하지요. 쳐다보고 싶지도 않으시지요. 그러나 목사님, 제 아들을 보고 싶지도 않으시면 저를 봐서라도 제 아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세요. 그 아이는 제 아들이니까요.”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주변에서 아무리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너 그 사람보기 싫거든 나를 봐서 사랑해다오.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사랑하는 딸이니라. 네가 판단하기에 수용할 수 없는 그 사람의 모든 고약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내 아들이고 딸이니까 나를 봐서라도 사랑해다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면, 그리고 냉혹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를 향한 준엄한 명령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사랑하기 어려운 한 이웃을 향해 구체적으로 오늘도 노력하시는지요? 이것이 이 사회를 향한 저와 여러분의 의무임을 아시는지요?

 

이것이 적극적 의무라면 소극적인 의무는 자신의 구원을 완성할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 13:9)

 

어떻게 자신의 구원을 완성한다는 얘기가 이 사회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와 관련될 수가 있을까요? 때로는 신문을 볼 때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이사회를 냉혹하게 비판하지만 동일한 잣대를 가지고 여러분 자신은 스스로를 얼마나 비판하십니까? 사회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는 냉혹할 정도로 비판하는 우리가 때로는 동일한 잣대로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는 매우 소극적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네가 이웃을 미워하면 그것은 살인하는 것이며 이웃을 향한 정욕은 바로 간음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근엄한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가 손가락질하는 그 사람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일까요? 한 사회의 변화는 결국 구성원의 변화가 없이는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의 변화는 바로 나 자신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를 탓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변하고 있습니까?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기독교 신학의 표현을 빌면 자기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우리는 죄악의 영원한 형벌로 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구원을 완성했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분에게 저주받을 염려가 이제는 없습니다. 죄의 형벌에서는 이제 완전히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내 삶이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습니까? 오늘 구체적으로 나를 엄습하고 있는 죄악과의 싸움에서 저와 여러분은 얼만큼 승리하고 계십니까?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내게 성취된 과거일뿐만 아니라 아직도 현재요, 미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말씀은 그 구원의 완성의 때가 가깝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우리가 사모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가 역사속에 다시 돌아오실 그 때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비로서 역사의 어두운 밤은 거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회가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이유, 때로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어두움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밤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고 쉽게 어두움에 적응해 버리고 어두움과 타협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 이 어두움이 거쳐버리고 깜깜한 밤이 새벽으로 바뀌는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홀연히 우리의 삶의 장에 침투해 들어오는 그 빛 앞에 어두움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속속들이 노출되는 그 순간, 우리는 얼마나 당황해하며 부끄러워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깝다는 것은 심판자인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을 결산할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종말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그 분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서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 빛이신 그 분 앞에서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의 행적이 낱낱이 노출되는 그 순간이 다가옵니다. 여러분과 저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그분앞에 서게 될까요? 그래서 성경은 지금은 자다가 깰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시고우리의 구원의 완성의 시간이 도래하였으니 정신을 차리라고 하십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린도후서 7:1)

 

성경은 때때로 구원을 이미 과거의 시제로 처리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주님을 닮아가야 하고 주의 거룩함을 이루어 가야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아직도 구원은 현재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2절의 말씀에서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나에게 시작되었고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이 이루어져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참빛되신 주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이 준비되어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사회의 어두움을 감지하시고 답답해 하십니까? 제발 이 어두움의 위기를 감지하시기 바랍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11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다”(12절)고 분문은 계속해서 이 ‘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때’라는 말은 단순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랍어로 카이로스라는 단어로 씌여졌는데 바로 ‘위기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위기의 때입니다. 우리가 오늘 존재하고 있는 사회는 위기의 사회입니다. 이 사회의 위기성과 개인의 위기성을 얼만큼 감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 위기를 감지하셨다면, 주님 앞에 서서 홀연히 내 삶을 결산하고 그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매우 부끄러운 존재로 나타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스스로 두렵다고 느끼시거든 부끄러운 옷을 벗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등의 부끄러운 옷들을 벗고 그 대신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웅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4절에서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 즉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옷이 날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옷은 어떤 의미에서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벼운 옷을 입으면 가볍게 행동하고 싶어지고 무거운 옷을 입으면 무거운 행동을 하고,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하게 행동하고 싶어지고 거룩한 옷을 입으면 거룩한 행동이 나옵니다. 편한 옷을 입으면 편하게 늘어지고 싶고, 정장을 입으면 정장다운 행동을 하고 싶어지는 동기가 부여되는 것을 봅니다. 아침에 옷을 입고 나오면 그 옷은 하루의 삶을 지배하는 상징이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옷이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고 우리의 존재의 한 부분이 되며 그 옷이 우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옷이 우리를 지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옷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리스도가 내 삶의 표현이 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의와 사랑과 자비와 온유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전 이탤리에서 북아프리카 출신의 한 청년이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졌습니다. 마니교는 방탕을 합리화하는 이단이었습니다. 교리적으로 그 방탕이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능의 표현이라는 것을 강조하던 이 이단속에 심취한 그는 편안하게 마음대로 죄를 지었습니다. 이 사람은 수사학을 전공하였고 수사학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탁월한 웅변을 통해서 자기의 저질의 행동과 부도덕한 삶을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변증할 수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까지 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죄를 지으면서도 그의 양심이 늘 허탈하고 불안하고 공허했던 어느 날 갑자기 자기의 집 바깥의 정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소리가 들려 오기를 “펴서 읽으라, 펴서 읽으라”는 소리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보니 마침 자기 앞에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 성경을 딱 펼치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3장 11절이하의 말씀이 그의 눈 앞에 들어 왔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그는 이 말씀 앞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자기의 입술로 찬송하던 예수, 자기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예수 앞에 다시 돌아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위대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성어거스틴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만약 적극적으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노력을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책임을 지고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갈 수가 있다면 이 구별된 삶이야 말로 우리의 사회 변혁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사회를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부터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에 영국사람들이 가졌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아마도 인류역사를 통해서 대영제국의 전성기 때의 영국사람들이 가졌던 자부심 이상의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대영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세계의 모든 나라들 속에서는 영국인처럼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 당시 영국인들이 다른 모든 민족과 다르다는 사실, 그들의 구별된 삶을 변증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하는 몇가지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냄새가 안나기 위해서 날마다 목욕을 하며, 둘째는 정장을 하는 것이며, 셋째는 똑바로 걷는 것입니다. 지금도 영국에 가보면 경찰들이 똑바로 걷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수들이 도망을 쳐도 경찰이 뛰지를 않습니다. 대영제국의 경찰들은 자기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똑바로 걸어야 합니다. 넷째는 날마다 자기의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영제국 국민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크리스챤들이 대영제국의 국민들 만큼의 자부심만이라도 갖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정도의 자부심만 갖을 수가 있어도 이 사회는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하여,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크리스챤답게 살기 위하여 거룩한 말씀을 읽고 말씀에 합당하게 살도록 자신의 삶의 책임을 질 수가 있다면 오늘 우리 사회는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롬 14: 1-12 / 형제를 판단치 맙시다

 

 

신약성경, 특히 바울서신서에는 분별이라는 단어와 판단이라는 단어가 매우 자주 출현합니다. 그런데 분별과 판단이라는 말은 매우 유사한 단어이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분별이라는 단어가 생산적인 뜻을 가짐에 반하여 판단이라는 단어는 파괴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별을 장려하고 판단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신학자는 분별이라는 단어의 뜻을 정의하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여러가지로 분석하고 연구해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분별의 결과는 상대방을 이해하게 됩니다. 반면에 판단은 어떤 사람의 한두가지의 외적인 행동에 근거하여 그 사람의 인간됨에 관하여 쉽게 결론을 내리고 속단을 해 버립니다. 그 결과는 항상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형제를 비판하지 말며 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의 사실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형제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1-3절)

 

“믿음이 연약한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3절)

 

1절에서 ‘의심하는 바’란 말의 뜻은 의심스러운 문제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냐, 혹은 비진리의 문제가 아니며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것을 판단하는 명확한 문제가 아니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로서 행동을 명확하게 할 수 없는 의심스러운 어떤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견해나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그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문제들에 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의견이 다른 이유는 성경에서 분명히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계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본문의 1절부터 3절까지에서 보면 우상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되었던 고기를 먹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런 것을 기피하고 채소만을 먹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비판은 종종 형제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받아드린다’는 말의 반대말은 ‘거절한다’는 말입니다. 3절에 보시면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원문에 보시면 ‘제외시킨다’는 단어로 씌여져 있습니다. 즉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형제를 제외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어떤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그 사람을 거절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과의 교제를 거절하는 것은 한 형제를 거절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종종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너무 선택적인 교제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영성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누가복음 18장 10절이하에 보시면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왔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7:11)고 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따로’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세리들과는 접촉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영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면서도 다른 그리스도인을 받아 들일 때도 선택적인 교제만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바리새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주님께선 누가복음 15장에서 우리가 잘 아는 맏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너무 기뻐하시면서 그 아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의 한 때의 실수나 잘못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고 기뻐하며 받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형님은 동생을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아버지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고 속상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받아 주셨는데 우리들이 받아 주질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들이요, 딸이라고 부르시며 받아 주셨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내 형제요, 자매인 그들을 받아 주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 가운데는 없는지요?

 

제가 한 가지 부끄러운 고백을 하겠습니다. 제가 1년전에 우리교회를 개척하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좋은 교인들을 보내 주셔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대하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저 사람만은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자꾸 모여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경건의 시간(QT)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시작하면서 날마다의 공동기도제목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보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이 원하셔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감정적으로는 어떤 안좋은 측면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받아 주시고 보내 주신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신 사람을 우리가 받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고 형제를 제외시키고 형제와의 교제에 있어서 죄를 범치 아니 하려면 하나님이 그 형제를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각자 마음에 확정할 문제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4-6절)

 

우리가 어떤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확정하는 유일한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말씀입니다. 그러나어떤 문제들은 성경말씀에 의해서 진리와 비진리를 확정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에 관해서는 각자 마음에 확정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분문에서는 두가지의 사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먹는 문제입니다. 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사용했던 제물을 사 먹는 것에 관한 것인데 그 당시에는 우상신에게 제사가 끝나면 거기에 사용된 제물을 시장에 내다가 팔았었습니다. 그런 제물을 사다가 먹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관해서 비판하기를 우상신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고기는 고기일 뿐이며, 다 같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성경은 후자의 사람들을 가리켜서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하다 혹은 약하다고 말씀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규범은 이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는 어떤 문제를 율법화시켜서 주장하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믿음이 좁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날을 지키는 문제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이것은 바꿀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인 안식후 첫날인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게 되자 두 그룹사이에 문제가 일어 났던 것입니다. 또 세번째의 그룹도 있었는데 그들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이 주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연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이 문제를 놓고 평생을 연구하는 신학자도 있지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만약 우리가 주님께 이 문제를 물어본다면 주님께서는 “네 마음대로 지킬지니라”고 답하실 것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5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절)

 

그러나 각각 마음에 확정해야 하는 동기는 중요합니다. 그 동기가 “주를 위하여”서라면 주님은 각자 마음에서 확정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어떤 분들은 우리교회에서 주일날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떤 음악 박사께서 강연을 하실 때에 복음성가는 사탄의 음악이라고 공격하시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현대의 복음성가도 모르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대답은 “네 마음에 좋은 대로 부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감격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클라식이나 팝이나 네 마음의 동기를 표현할 수 있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부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극장에 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하는 문제,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하는 문제, 사교춤을 추어도 좋은가 안좋은가, 담배를 피워도 좋은가 안좋은가 등 여러가지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주변에 있습니다. 여러분께선 지금은 아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한때는 이런 문제들이 심각하게 문제로 제기된 적이 있었습니다.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골프를 칠 수가 있느냐, 그것은 너무 사치이며 만약 골프를 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골프를 친다면 크리스챤으로 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현대를 살면서 골프 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현대적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시편 23편에 보면 주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며, 주님께서도 골프를 좋아하실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요? 주님의 뜻은 “각자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십니다.

 

진리나, 비진리로 명백히 규정지을 수 없는 문제에 관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형제가 형제를 , 자매가 자매를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만이 궁극적으로 심판의 주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7-12절)

 

성경은 인간관계에 관한한 두가지의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변화를 위한 조건을 형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 일을 우리가 하려고 하면 할수록 상대방이 변화되지 않으므로 더 신경질이 나고 상대적으로 더 큰 실망과 좌절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며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두번째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왜 판단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우선 우리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

여기서 바울 사도는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판단치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스스로를 판단치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자학의 늪에 빠져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치 않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 정확치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절에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판단하실 이는 주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선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오는데 주님만이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9절에서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롬 14:9)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고,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도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진정한 판단은 살았을 때 보다는 죽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산 자를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만이 심판과 판단에 대한 유일한 권한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의 로마서 14장 4절에서 형제나 자매를 쉽게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판단하고 심판하실 유일한 권한을 갖고 계신 분은 우리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은 마지막 심판날을 작정하셨음에도 이 순간 이 시점에서는 세우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을 세우십니다. 만나면 격려하고 칭찬하는 일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제발 비판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만나면 따뜻하게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심지어 심판의 권한을 갖고 계신 우리 주님조차도 심판을 유보하시고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셔서 세우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쓰임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놀라우신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공의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판단할 권한도 주님께만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 사람이 심판대 앞에 드러나 우리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주님이 하셔야 할 심판하는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일, 그리고 사람을 심판하고 판단하는 일은 주님의 고유한 권한에 속하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판단하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서 각인이 자기의 일을 직고해야 한다면 심판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다시 골프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골프치는 사람들은 골프 안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형제님, 저는 형제님을 존경합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린 후에 말씀을 묵상하고 병든 자를 심방하는 형제의 놀라운 신앙을 존경할 뿐 아니라 저는 형제님을 부러워합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또한 골프를 안 치는 사람들은 골프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1부예배 나가시고 골프를 치신다구요. 그렇게 하시고도 신앙생활을 잘 유지하시는 것을 보니 존경스럽습니다. 골프치시니까 건강에 좋으시다구요. 제가 혹시 먼저 죽거든 우리교회를 계속 지켜주시기 바랍니다”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해 주고 서로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에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이 우습지도 않은 일로 싸운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교인들이 열심히 헌금을 해서 교회당 건축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 건물을 지어놓고는 입당하기도 전에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강대상의 카펱의 색깔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싸우다가 분열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웃으실지 모르지만 여러분 자신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 가지고 흥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주변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시시한 것 가지고 흥분하는 사람들을 보면 진짜 흥분해야 할 문제들-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 세계를 어떻게 선교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어떻게 주의 제자로 만들 것인가-에 관해서는 흥분하지 못하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성경귀절을 보고는 웃었습니다. 사사기 12장의 말씀입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삿 12:6)

그 당시의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이라는 발음을 못했습니다. 이 발음을 못한다고 길르앗 사람들이 비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엔 그 문제로 에브라임 사람들을 사만 이천명이나 죽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인간의 갈등이나 공동체의 갈등을 살펴보면 아무 일도 아닌 일 갖고 흥분하고 비판하는데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부자사이에 갈등이 심했는데 나중에는 한 지붕밑에 살면서도 서로 말도 안하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들이 마음이 괴로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실에서 아랫층으로 내려오다 보니까 아버지께서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이미 아랫층에 내려와 계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용서를 구하게 되었고 그날 밤 부자사이에는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려서는 여행도 함께 하고 운동도 함께 하며 좋은 사이였다고 말하자, 아들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버지, 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함께 집근처의 호숫가에서 초록색 보트를 타고 놀던 것이 생각나요” 그러자 아버지는 “아니야, 그 보트는 하늘색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은 초록색이었다고 우기게 되었고 그날 밤 부자는 화해 속에 잘 나가다가 아무 것도 아닌 보트의 색깔때문에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는 웃지 못할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11장까지는 교리에 관한 말씀이었고 12장부터는 크리스챤의 삶에 관한 말씀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12장에서 사랑은 섬기는 것이라고 강조했고, 13장에서 와서는 사랑은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14장에 들어와서 사랑은 약한 자를 용납하고 수용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로 달라도 좋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세워주면서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한평생 후회없는 삶을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롬 14:13-23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려면

 

 

한국에서 산업시찰을 마친 어느 외국인에게 제가 소감이 어떻냐고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생각보다 한국이 많이 발전된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왜 그렇게도 최대가 많으냐고 물었습니다. 가는 공장마다, 회사마다, 소개를 받을 때마다 한국 최대의 설비, 아시아 최대의 규모, 세계 최대의 공장 등 이런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고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한국인들은 유난히 큰 것을 좋아하는 민족인듯 합니다. 저는 그 이유가 너무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선 우리나라의 이름부터가 대-한민국이고, 우리나라의 최고 정치 수반을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우리나라의 정치 최고의 권력을 말할 때에는 대-권이라고 말합니다. 최고의 학부를 가르켜서 대-학교, 대-학원이라고 부르고, 외교관을 가르켜서는 대-사, 길의 이름도 강남대-로, 양재대-로 라고 부르며, 소로라고 쓴 길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다리도 한남대-교, 영동대-교, 성수대-교 등 대-교라고 부르며, 술도 대-포, 왕대-포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반대로 우리민족은 아주 작은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것을 형태화한 경멸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소인배, 소심하다, 소극적이다, 소시민적이다, 형용사로는 째째하다, 좀스럽다, 조잡하다, 잘다, 좀씨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비극적인 한국의 대형사고들을 목격하면서 이것은 우리가 모두가 작은 것을 천시한 결과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수대교 사건도 그렇고, 아현동 가스폭발 사건도 누군가가 공사를 할 때, 혹은 관리를 할 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 작은 것에 성실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우리 민족 개혁의 비전이 있다면, 우리 민족의 체질적인 개선이 요구된다면 이제부터라도 작고 시시하게 보이는 일에 성실하게 노력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일도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한 경고를 던지고 있습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롬 14:20)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는 가장 소중한 열망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업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마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먹는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대로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 합당한가, 아닌가에 관하여 성도들 사이에 이견이 생겨 났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상대방을 비판하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상대방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이 매우 작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들은 작게 생각하는 상대방을 비판하는 그 일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업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가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서로 다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업을 세워나갈 수가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던지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려면 형제들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먼저는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지체가 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잘 세워지기만 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아름답게 성취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위대한 계획을 세웠다고 그 교회가 위대해 진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르고 견고하고 아름답게 세워진다면 하나님의 일은 저절로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형제들을 세워나갈 수가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두가지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먼저 소극적으로 우리가 형제들을 세우려면 형제들을 판단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이미 강조한 것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 14:13)

여기서 ‘부딪힐 것’과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주의하라고 하는데 이 두가지는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단어입니다. ‘부딪힐 것’이란 내가 의도하지 않고 어떤 행동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다면 나의 행동은 ‘부딪힐 것’입니다. ‘거칠 것’이란 내가 의도적으로 형제들에게 장애물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 형제와 자매들이 넘어졌다면 나의 행동은 ‘거칠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간에 형제들이 나로 인해 넘어질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특별히 이 말씀을 믿음이 강한 자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강한 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자유를 주신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사용할 때에 질문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때문에 우리가 취하는 행동이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지, 아니면 형제들을 세우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담배를 피우는 것에 관해서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찾아봐도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나는 담배피울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답배를 한 대 피우는 것을 보고는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든다면, 결과적으로는 그의 자유는 형제를 신앙적으로 시험에 들게해서 넘어지게 만들었다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어느 날 오래만에 제 동창생들과 함께 다방에서 만났는데 친구들이 목사지만 맥주 한잔은 어떻겠냐고 권했다고 하십시다. 저는 제가 맥주를 한잔 마셨다고 해서 큰일이 난다거나 그 일이 결정적인 죄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제게는 한 잔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가 한잔을 마시는데 하필이면 우리 교인이 그곳에 들어왔다가 그 장면을 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그 광경을 목격한 후에 목사님이 위선자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한다면 나는 나의 자유를 합당하게 사용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말라”(롬 14:15)

결론적으로 마시거나 피운다고해서 그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며 그것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바울 사도는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1)

내 행동이 형제를 거리끼게 만든다면 안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소극적으로는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리낄 것을 두지 않음으로 형제를 세워야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우리는 부단히 형제들의 관계와 교제속에서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덕을 세워야 할까요? 우리는 덕이라고 말하면 유교사회의 덕목으로 전통적인 덕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덕의 개념은 매우 단순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 때문에 상대방에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불이익을 주고 어려움을 준다면 그것은 덕스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역사에도 좋은 크리스챤 가운데 담배를 피운 사람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고서 어떤 형제의 마음이 거리끼게 되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부담이 되어 그 형제를 적극적으로 설득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 담배피우는 것이 죄라는 말씀이 한 군데도 없다는 그분의 설득에 이 형제가 설득을 당해서 결국에는 이 형제도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형제는 담배를 피기 시작하자 그의 양심에 거리낌이 생기고, 마음의 죄책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침체의 늪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형제를 ‘망케한다’(16절)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증진시켜 나갈 수가 있을까요? 그 대답은 단순합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만나실 때마다 그들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나의 건강한 일과 언어와 행동을 통해서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형제와 자매들을 세워나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는 우리의 삶의 질적인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언제나 가려져 있는 나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아프리카의 감비아를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감비아 대사관의 어떤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얘기를 통해서 감비아에 대해서 짐작하게 됩니다. 그 나라의 문화와 감비아 사람들의 예절과 상식, 태도등 감비아라는 한 나라에 관해서 감비아 대사관의 한 사람을 통해서 보게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삶과 행동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고 그 나라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속에서 요구되는 본질적인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그 대답을 1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

 

천국의 본질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다음에 천국에 가면 거기에도 먹고 마시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되게 만드는 특성을 3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의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며, 기쁨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해 전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친구의 안내를 받아 영국 관광을 했었습니다. 우리가 버킹햄궁전을 막 지날 때에 그 친구가 말하기를, “오늘은 여왕이 저 궁전 안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묻자 “그 궁전의 꼭대기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면 여왕이 그 안에 계시다는 증거이며, 깃발이 없으면 여왕이 없다는 증거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장에 의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의의 왕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장에 기쁨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쁨의 왕이 거하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평강의 깃발이 휘날리고 계십니까? 그것은 평강의 왕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의 왕이 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느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흥분하고 감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지배하심으로 내 삶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져 가는 우리들의 삶의 질적인 성숙을 추구함으로서만 하나님의 일은 세워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번째로,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오해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일을 교회안에서 봉사하는 일로만 제한하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도 물론 하나님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의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시적인 활동적 봉사만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앞에 나와서 이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니까”(요 6:28). 이 질문의 배경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이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는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주님은 하나님의 일이란 눈에 보이는 대단한 가시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의 본질은 날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선택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수많은 결정과 선택에 의해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루종일 해야하는 그 수많은 선택을 여러분은 믿음으로 결정하고 하십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바울사도는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2-23)

 

믿음으로 좇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만약 무엇을 먹을까 말까 하고 의심이 된다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에 거리낀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용하고 있는‘믿음으로 살라’는 표현을 단적으로 다시 말한다면 ‘양심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양심은 인생을 인도하는 오류없는 안내자는 아닙니다. 성경은 양심조차도 부패되어 있고 마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은 아직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 있어서 믿음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나침반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말씀을 할 때마다 믿음과 동시에 양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오늘날 한국의 세무서에서 일하는 모든 공무원들이 참된 크리스챤이 되어서 양심껏 정직하게 돈을 관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수대교의 공사와 관리를 맡은 분들 중에 크리스챤으로서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공사를 하고 관리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이 사회의 혼란과 부패와 어두움의 원인이 있다면 믿음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꿔말하면 양심대로 살지 않습니다. 내 안에 주께서 원하시는 양심을 따라 내게 주어진 삶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웃들이 여러분을 관찰하고 보면서 “저 사람, 참 믿음의 사람이고 크리스챤이야”라고 인정해 줄수 있을까요?

 

여러분, 크리스챤이라는 단어속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숨어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원래의 뜻은 작은 그리스도입니다. 감비아 대사관 직원의 행동이 그 나라를 대표하듯,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분과 저의 행동은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거느리고 있던 병정 가운데 알렉산더 대왕과 꼭 같은 이름을 가진 졸병이 있었습니다. 그 졸병 알렉산더의 행동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더의 이름이 짓밟히고 있다는 소문이 어느 날 알렉산더 대제의 귀에 들어 왔습니다. 어느 야심의 한밤중에 알렉산더 대제는 예고없이 졸병 알렉산더의 막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날도 술에 만취에서 떨어져있다가 알렉산더 대제가 왕림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서 경례를 부쳤습니다. 대왕은 “네 이름이 알렉산더라지?”라고 물었습니다. “듣자하니 네 행동이 고약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노라. 두가지를 명령한다. 첫째, 네 이름을 바꾸어라. 왜냐하면 네 이름때문에 내 이름이 욕을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기 싫거든 네 삶을 바꾸어라.” 오늘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주님을 대표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할 때에 주님도 꼭 같은 명령을 하시지 않을까요? “네가 크리스챤인가?, 네가 크리스챤이라는 간판을 떼든지 아니면 네 삶을 바꾸어라”.

 

하나님의 일을 굉장한 큰 일을 해서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나는 형제와 자매들을 부지런히 세워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믿음의 선택을 하며 믿음따라 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롬 15:1-13 / 한 마음 한 입으로

 

 

여러분, 앞으로 남은 여러분의 생애가 꼭 한주간만 남았다면 그 엿새를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제가 오래 전에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했더니 아주 기발한 대답들이 속출했습니다. 그 대답들은 대충 5가지의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관광형으로 구경이나 실컷 하고 죽겠다고 한 사람들이고, 둘째는 철학자형으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으며, 세번째는 로맨티스트형으로 연애나 실컷하고 죽겠다고 했고, 네번째는 망각형으로 술에 취해서 다 잊어 버리겠다는 사람드리며, 다섯번째는 식사형으로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죽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데 가장 괄목할 만한 사건은 두가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가르치시고 둘째는 기도하셨습니다. 소위 다락방의 강화라고 불리우는 마지막 설교를 제자들에게 하셨는데 그 설교의 핵심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대목을 가장 많이 설교하셨습니다. 마지막 밤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보내셨습니다. 십자기를 지시기 위한 기도를 하셨지만 그 기도 가운데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가장 길게 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17장 기도의 내용중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은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것들을 강조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과 최후의 소원은 한마디로 말하면 세계의 복음화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복음화의 주체는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숙제를 감당해야 할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계복음화의 숙제를 감당할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도 제자들이 하나가 되려면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는 소극적인 접근으로 형제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5장에 들어와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하나됨의 모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됨의 삶을 살아 가려면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서로를 기쁘게 하고자 힘써야 합니다.(1-3절)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2-3절).

 

주님은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시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라고 되어있는데 이 말씀을 원문에 보시면 “이웃에게 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웃을 기쁘게 해야한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NIV라는 영어성경에 보시면 "please his neighbor for his good(그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웃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유익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참된 일치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교훈 가운데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 1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밤 설교를 준비하다가 쉬고 싶어서 TV를 켜서 보니까 “21년만의 외출, 박재란쇼”란 프로그램 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자기의 간증을 솔직하게 하는 것을 보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젊었을 때 이혼을 하고 고통스러웠지만 미국에 가서 주님을 영접한 사실을 쇼무대에서 담대하게 간증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당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쇼의 마지막에 자신이 정말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는데, 그분은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의 노래를 자신의 간증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고 이웃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자신의 기쁨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인간관계속에서 누가 먼저 희생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희생을 해 주기를 바라지만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절)

 

자신이 신앙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신앙이 약한 사람을 위해서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모본이었습니다. 저 하늘의 영광을 내어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이유, 이 땅에 오셔서도 자기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버려주신 희생적인 삶의 이유는 저와 여러분을 이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새로운 삶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절)”

 

구약성경의 주를 비방하던 사람들의 비방이 나에게도 경험되었다는 것, 내가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핍박을 받으면서도, 비방을 받으면서도, 아니 죽어가면서도 나는 이웃의 유익을 추구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주님의 심정을 바꿔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만 구원될 수 있다면, 네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있다면, 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면 나는 기쁘게 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며 죽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실제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 6절이하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가운데 참된 일치의 교제를 위해서 얼마나 우리 자신의 유익을 희생하고 양보하며 살고 있을까요? 내가 연약한 형제의 약점을 감당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얼만큼 희생하고 있습니까?

 

꽤 오래 전에 독일의 목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가 통역을 했는데 메세지가 아주 좋았고 저도 은혜를 받았었습니다. 집회가 끝나자마다 이분이 바깥에 나가시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보니까 담배를 피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분은 독한 것이 아니고 취미로 한다고 했지만 저는 한국에서 담배를 피우시면 큰일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은 독일에선 괜찮은데 한국에선 그러냐고 하시면서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그러면 내가 다시 들어가서 사과를 하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과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담배만 피우지 말라고 했더니 그 목사님께선 정말 미안하다고 저에게 사과를 정중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독일에서도 가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아주 담배를 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시험에 들려고 했다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다른 사람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과감히 끊겠다고 했고 그래서 이분과 저의 교제는 다시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챤의 교제의 태도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제 참된 교제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서로를 기쁘게 하기를 힘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서로 같은 뜻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그들의 뜻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5-6절)

 

여기서 ‘뜻이 같게 하여주사’라는 말이 어떤 번역에는 ‘마음이 같게 하여주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출신도 다르고 성장 배경도 다르며, 교육수준도 다르고, 그동안 섬겨왔던 교회의 성격도 다 다릅니다. 또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동일한 문제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는 출신배경이 다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세리 마태와 같은 친로마주의자가 있었습니다. 또한 열심당원이었던 유다와 같은 반로마주의자도 있었습니다.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자도 있었으며 유식한 자도 있었고 무식한 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선 그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른 것을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구원의 사건을 빼놓고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를 가르칠 때 주님이 강조하셨던 제자다운 삶의 태도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가 있다면 인내와 서로 격려하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절)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모습 소위 성서적 삶의 전형은 우리에게 인내와 안위(격려한다)를 해서 같은 소망을 갖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우리의 하나님 자신을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도 그 하나님을 닮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인내하고 안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 가운데 빌립보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

 

여기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 다 여성의 이름입니다. 아마도 이 두 분은 빌립보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말씀으로 미루어 두 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쓰게 된 배경의 말씀을 살펴 보면서 이제 빌립보서 2장 2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2-4)

 

우리가 품어야 할 같은 마음의 공통 분모는 무엇일까요? 그 결론이 바로 2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이 말씀을 바꿔말한다면, 유오디아여 주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순두게여 당신도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그 주님의 마음은 바로 인내와 안위로 가득 찬 분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참으셨는가는 당신의 제자중에 당신을 팔고 배신할 가룟 유다가 있었음을 아시면서도, 얼마 후에 이 유다에 의해서 팔리우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유다를 대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 권하듯이 친절하게 그에게도 예외없이 같은 떡을 권하시며 떡을 먹으라고 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인내를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시면 가룟 유다를 가리켜 “저를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은 저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를 용납하게 만들고 그를 품을 수 있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대해서 제 아내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저는 본래 매우 비판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제 아내가 누구를 비판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아내에게 섭섭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제 아내가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면 아, 그분이 아내에게 섭섭하게 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느 날 오후에 집에 들어오는데 아내가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아내를 섭섭하게 했나하고 자세히 들어보니까 “남편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클라이맥스에 보면 서로 전선에서 총대를 겨누고 있던 군인 하나가 총대를 팽개치면서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피와 살이 있고 나도 피와 살이 있는 인간, 당신도 실수할 수 있고 나도 실수할 수 있는 인간, 당신도 죽어야 하고 나도 죽어야 하는 인간, 왜 우리가 총을 겨누고 있단 말이요, 우리가 어째서 적이란 말이요.”하고 총을 던져 버리고 서로 끌어앉는 전쟁터의 휴매니즘을 그린 내용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우리를 한 가족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한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는 늘 같은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마음을 갖고 비록 이웃들이 나를 섭섭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된 교제 가운데서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영광스러운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 서로를 기쁘게 하고 둘째, 서로 같은 뜻을 같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번째는 서로 수용하는 태도를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절).

 

여러분, 인간관계에 있어서 왜 용납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우리는 수용함으로써만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4장에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형제를 판단하면 반드시 인간관계에 상처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주님은 어떤 모본을 보이셨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수용하기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우리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수용하셨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찾아 오실 때에 저와 여러분에 대한 주님의 기대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물론 우리를 향한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향한 기대가 우리의 삶속에서 충족된 이후에 받아주셨습니까? 아니면 그 기대가 전혀 채워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를 받아주셨습니까? 우리의 삶은 오늘도 주님의 기대에 못미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를 조건없이 받아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탕자를 받아주신 아버지처럼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탕자가 먼나라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먼저 뛰어나와서 아들을 끌어앉고 아무 조건없이 그를 받아 주셨습니다. 이 엄청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탕자는 아버지께 죄송하고 미안해서 이제는 아버지의 기대에 합당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기대가 충족된 후에 받아주셨습니까? 아니면 받아주신 후에 기대를 이루는 삶이 시작되었습니까? 후자가 맞습니다. 먼저 아버지께서 받아주시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아버지를 위해서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받아 주셨다면 여러분은 주변의 이웃들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대를 유보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우리의 기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먼저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관계의 상처가 왜 생길까요? 기대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덕규 작사 작곡의 ‘가시나무’란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가 매우 철학적이고 신앙고백적인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은 편할 곳 없었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딪치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이웃이 쉬고 싶어서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따뜻함을 경험하고 싶어서 접근하는데 나는 날카로운 비판력만 가지고 이웃을 무시하고 이웃을 비판하고 그들을 향한 높은 기대치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속에 녹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면 당신이 먼저 열납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먼저 받아주신 그 사랑속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궁극적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이웃의 변화를 요구하신다면, 여러분과 교제하는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기대하신다면 그 변화를 먼저 조건으로 제시하지 마시고 그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롬 15:14-33 / 예수의 일꾼이 되어 삽시다

 

 

설교자들은 청중들이 그 설교자들이 선포한 말씀을 다 기억해 주기를 물론 소원합니다. 그러나 청중편에서 생각할 때 그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기억되는 설교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들은 어떤 선교사님의 인상 깊은 설교를 매우 오랫동안 기억합니다.참으로 이상하게도 서투른 한국 말로 선교사님이 설교하셨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그대로 기억합니다. 그 때 선교사님은 선한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를 가지고 설교하셨는데 제가 그 아웃라인이 그대로 생각이 납니다.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세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종류는 없어야 만 될 사람, 둘째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세째는 꼭 있어야 하는 사람, 세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첫째로 없어야 만 했던 사람, 그들은 길에서 강도질을 했던 강도들입니다.둘째로 있으나 마나한 사람들, 그들은 지금 강도 만나 쓰러진 이 사람 곁을 그대로 지나치고 있었던 사람들, 레위인, 제사장들, 그 시대의 대표적인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강도 만나 쓰러진 이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나 도움이 될 수 없었던 있으나 마나 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셋번째 종류의 사람은 꼭 있어야 될 사람, 없어서는 안될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이 아주 단순한 아웃라인이 명쾌하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뇌리 속에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꼭 있어야 될 사람을 가리키면서, 예수의 일꾼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16절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일꾼,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일꾼이라는 이 단어는 매우 독특한 희랍어 단어 하나가 쓰이고 있습니다.바울이 보통 자기를 말할 때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이라고 말하는데, 종이라는 단어와 다른 매우 독특한 희랍어 단어 하나가 쓰이고 있습니다.이것은 본래 공무원들, 공적인 사역자를 가리키는 말이였고, 그 당시 희랍 사회에는 주로 네가지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한 종류의 사제들, 또 하나는 합창단원, 또 하나는 운동가, 네번째는 군인을 가르칠때 일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제들은 신에게 제사드리는 사람이고, 합창단원은 말할 것도 없이 노래부르는 사람이고, 운동가는 그 당시에 토취, 횃불을 들고 레이스를 하던 경주자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는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때 희랍의 시민들은 네 가지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 했느냐하면, 사제들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신에게 접근할 수 있고, 합창단원으로 인해 인생이 즐거울 수 있고, 운동가들이 있어서 삶의 활력을 느낄 수가 있고, 그리고 군인들이 있어서 안심하고 우리가 살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이 네가지 종류의 소위 직업적인 사람들에 관해서 고대 희랍사람들 특별히 아테네 시민들은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 곧 아테네 시민들의 프라이드 였습니다. 이들은 명예로운 공적인 봉사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그들의 지역사회(community)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일꾼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단어가 사제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로 의미가 좀 변했습니다. 이 단어는 꼭 있어야 할 사람, 없어서는 안될 봉사자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명예로운 일꾼을 가르킬 때 쓰여졌습니다.그런데 바울사도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사도가 무엇때문에 자기 자신을 예수의 일꾼이라고 소개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가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하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의 일꾼, 하나님의 일꾼, 우리가 이런 평판을 받을 수가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복된 삶일까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의 일꾼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 편에서의 사랑 혹은 호의를 뜻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 2:8을 다같이 암송해봅시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구원받은 것 만이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좀 다른 각도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구원을 받은 자로서, 구원을 받고 보니 이 은혜가 소중하고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또한 구원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내가 내 사랑하는 가족, 내 사랑하는 이웃,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영생에 동참할 수 있도록 구원하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본문에서는 그런 의미로 은혜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담대히 너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16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의 일꾼이라는 말을 이 구절에서는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나는 복음의 제사장이 되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동참시킨 이 하나님의 복음, 이제 이 복음을 다른 사람이 듣고 예수 없이,하나님 없이 살던, 복음 없이 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방인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는 내가 복음의 제사장이 된 것 이것이 또한 은혜가 아니냐? 구원받은 것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자로서 이방인들을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주님 앞에 바치는 이 놀라운 삶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냐." 고 생각한 것입니다. 은총의식,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엄청난 특권을 주셨다는 특권의식이 바울사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한 평생을 계획하면서 내가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겼으면 좋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의무로만 생각하면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우리 한달 동안 노력하다가 거기서 끝날지 몰라요. 그러나 이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전도할 수가 있다는 것, 천하 보다 더 귀한 영혼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놀라운 특권입니다. 이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그들과 더불어 사랑을 나눌 수가 있다는 사실은 주께서 내게 주신, 감당할 수 없는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기쁜 마음으로, 감격스런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주앞에 드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1800년대가 저물어 가는 후기에 영국의 가난한 소외계층을 상대로 복음전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전도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당시에 무감각하고 부도덕성에 빠져가고 있던 영국 사회 속에 충격을 가했습니다. 영국 사회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그의 강력한 복음전도, 그리고 이웃에 대한 그의 구제의 사역, 사랑의 사역, 이것들이 잠들어 가는 영국 사회를 흔들어 깨워, 영국사회를 일대 변혁시키는 운동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이 구세군 운동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904년 킹에드워드 7세는 월리암부스를 버킹검 궁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그에게 치하의 말씀을 했습니다. "당신 정말 수고했소, 당신의 수고 때문에 이 사회는 달라질 수 있었소" 그러면서 킹 에드워드 7세는 앨범하나를 내놓고 사인을 하라고 했습니다.보통은 왕의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거꾸로 이 왕이 월리암부스의 사인을 받기를 원해서 앨범하나를 내놓았습니다.

그 앨범에 역사에 남을 만한 명구를 월리암부스는 기록 했습니다.이러한 기록을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폐하시여!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성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그러나 폐하시여! 나의 야망은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한 사람을 만날때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더 귀한 가치로 정말 바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이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가 있다는 이 사실,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은혜,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은총의식이 바울사도로 하여금 내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한것이라면 우리도, 주의 일꾼으로 내 남은 여생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꼭 필요한 존재로 쓰임 받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주께서 진실로 여러분에게 전도 할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같은 특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둘째로 우리가 일군되어야 할 이유는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며 살기 위해서 입니다.

새해가 되면 자랑할만한 여러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외시킨 계획은 악한 자랑이고, 허탄한 자랑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말짱 헛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대부분의 자랑거리, 우리가 친구나 이웃을 만나 우리의 입 속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랑거리들을 분석해 보면 속 내용이 전혀 없는 헛된 자랑이 얼마나 많은지요. 전도서의 기자의 고백처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들 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단어는 추운 날씨에 여러분이 아침에밖에 나가서 입김을 불면 포물선을 그립니다. 잠시 후에 사라집니다. 그런 단어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의 자랑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고 말합니다.사람들이 쏟아내는 허다한 자랑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예외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보면 예수님께 대한 자랑, 주님께 대한 자랑만은 복된 자랑 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지혜, 우리의 구원, 우리의 능력, 우리의 소망, 그리스도는 진실로 우리들의 자랑이십니다. 진실로 예수님께 대한 자랑은 아무리 자랑해도 모자람이 없는 저와 여러분의 자랑일 것입니다.예수의 일꾼의 보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어떤 보람이 있다면 그 보람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찬송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 찬송을 작사한 존 뉴튼이란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우리 신앙생활의 경험을 통해 반드시 발견하는 세가지 놀라운 체험이 있다.첫째는 내가 죄인이라는 발견, 두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래도 용서하신다는 사실이고 세번째 놀라운 것은 그런 나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그런 나를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쓸 것이 있어 나를 부르시고 사용하고자 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바울이 그 자랑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17절을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18절에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의 일꾼으로써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나로 말미암아 말하게 하시고, 일하게 하시고, 말씀을 주시고, 일감을 주시고, 위대하신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메세지를 주시고, 이 말씀이 단순한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내가 행하는 그 일이 단순한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하나님의 일 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표적을 주시고, 기사를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는 바울이 전하고 있던 메세지를 입증하기 위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마지막절 16:20에 보시면 "다른 표적으로 말씀은 확실히 증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전한 메세지가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승인하신 메세지 였다는 사실을, 불신의 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은 바울의 메세지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를 부여하십니다.왜 그랬을까요?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주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맡기실 때는 반드시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인 것입니다.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 그냥 나가서 전도만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병고치는 권세, 귀신을 쫓는 능력을 동시에 허용하셨습니다.병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 내는 것도 목적이 아닙니다.그것은 바울의 전도와 예수님의 제자들의 전도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란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승인하신 놀라운 하나의 표적에 불과 했던 것입니다. 그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께서는 능력으로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여러분! 오늘도 가장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이 있다면 어디에서 입니까?선교의 현장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의 말씀 앞에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불신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메세지를 증거하게 될때 그 메세지를 입증하고 보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역 가운데 주께서 함께 하셨던 일들은 잠시 회고 했습니다.나에게 말씀을 주시고, 나에게 일감을 주시고,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일감이 하나님의 일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주셨던 것입니다.이것은 누가 하신 일입니까?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이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꾼된 특권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게 되면 성도들에게 꼭 한가지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 창고에 그리스도인들이 만약 청구만 하였더라면 쓸 수 있는 자원들이, 기도만 했었더라면 우리가 붙들어서 사용할 수 있는 무한대의 능력이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바울처럼 "주님 나를 써 주십시요. 내가 부족합니다. 내가 연약합니다. 내가 말도 할 줄 모릅니다."고 말하십시오. 이렇게 주 앞에 나를 내놓기만 하면, 하나님이 쓰시기를 원하면 쓸 수 있는 능력을 주께서 허용하시지 않으실까요?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위대한 가능성을 낭비하고 그것을 사장하면서이 땅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올때 주께서는 능력을 준비하시고 그 권능을 사용해서 한 평생 한번 주님의 일을 놀랍게 할 수 있게, 위대한 가능성을 주셨건만우리는 조그만 부분도 사용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저 유명한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어느날 아주거친 대리석, 돌을 보면서미친사람 처럼 친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다비드가 걸어 나온다. 다비드가 걸어 나온다."고그것은 거친돌이었어요. 이 돌이 다듬어지기만하면 거기서 다윗상이 만들어질 놀라운 가능성을 그는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를 생각 할 때마다 얼마나 형편없는 제자인가 성경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넘어지며, 쓰러지며, 엎어지며, 계획하고 잘 취소하고 그대로 살지 못하고 하는 제자 였습니다. 이런 시몬 베드로를 처음 만나던 그 순간,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그를 만나고 예수님께서 처음 주셨던 제일성이 이 어떤 메세지 였습니까?"네가 장차 [게바]라 하리라"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신 별명입니다. 그 뜻이 뭡니까? 반석입니다. 여러분 반석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중한 반석,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반석, 이 반석의 이미지가 베드로에게 어울립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쉴새 없이 포기하고 넘어지고 또 쓰러지는 그의 연약성을 보시면서도 그가 참으로 그의 삶이 주 앞에 드려지기만 하면 주께서 그의 삶을 붙잡았을 때 초대교회가 세워지는 터전으로 반석처럼 쓰임받는 시몬의 가능성, 시몬의 위대한 내일의 가능성을 바라보시면서 내가 장차는 게바라고 하리라고 한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무엇을 하고 우리에게 남은 여생을 살까요?우리의 연약성을 바라 볼때마다 낙심하는 자들임을 발견합니다.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가 아닙니다.능력은 주께로 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이 주님 앞에내 삶을 내 놓을 용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주님, 저를 사용해 주십시요. 내가 가진 온갖 무력함과 그리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를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내놓기만 하면 내게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위대한 일을 나타내시며, 한 평생 하나님의 능력을,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으로 생애를 사는 가능성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하나님이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 삼으셨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세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 입니다.로마서 15장 2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나아가면서 예수님의 축복을 가져가길 원합니다.우리는 축복하면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입니다.소위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오복, 오래살고, 돈벌고, 부자되고, 아들 낳고, 딸 낳으면 안되고-- 하는 등의 축복들 말입니다.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런 축복을 연관시켜서 생각합니다.한국인들의 축복관이 너무나 물질적입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비판의 상당 부분이 정당한 비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잘못되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정당한 몫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빼앗는다면 그 비판은 너무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축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부하다 제 마음 속에 얼마나 넘치는 은혜를 받았는지 몰라요.제가 축복이라는 한 제목을 가지고 성경구절을 뽑아서 공부를 했습니다.그리고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은 축복의 책이다."고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는 진실로 축복의 하나님이시다."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나서 하나님의 첫번째 행위가 어떤 행위였습니까? 창세기 1:28을 다같이 읽겠습니다."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충만하라" 처음 인간을 창조하시고 2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셨어요? 복을 주십니다. 창조된 인간에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첫번째 역사는 축복의 역사였습니다. 축복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범죄했습니다.인간의 최초의 범죄 그리고 타락의 사건 때문에 축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창세기 3장이 타락의 장입니다. 타락의 사건이 지나간 후, 창세기 5장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5:2을 다같이 읽겠습니다."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축복의 주제가 다시 되풀이되고 있는 장면을 보세요.타락이후에 하나님은 다시 축복하시겠다는 선언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불구하고 사람을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창세기 6장에 노아의 홍수사건이 일어납니다.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시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 했습니다.드디어 심판이 왔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지나간 후 창세기 9:1 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 생존자들에게 다시 어떻게 약속하십니까?축복을 주십니다. 축복의 주제가 다시 되풀이 되어 지속되고 있는 이 장면을 보십시오! 유명한 창세기 12:2 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믿음의 조상신앙공동체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십니까?"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 중의 하나가,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내가 복을 받은 후에, 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것입니다.이는 아마 구약 중에 가장 위대한 구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3)땅의 모든 족속이 너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성취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니다.정확하게 창12:3 에 근거하여 바울 사도는 어느 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놀라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8 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가르켜서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은복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방인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을 갈라디아서 3:8 에서는 구원의 축복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시고 메시아를 영접한 사람들이 예수 없이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위대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여러분!여기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물질적인 축복으로 국한시키지 마세요.이제 메시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 캄캄한 사망, 흑암속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놀라운 축복을 생각해 보세요.여러분! 전도가 축복을 나누어주는 행위인 것을 믿으십니까?가장 위대한 축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 한다해도전도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혼이 지옥으로 가도록 버려둔다면 그것이효도입니까? 제가 조금 전에 소개한 구세군의 창설자 월리엄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서 기도 드렸어요. "하나님,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의 지옥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들은 뛰쳐나가 이 복음의 불붙는 가슴으로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

사랑하시는 여러분!우리가 이웃들에게 나눌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본문으로 돌아와서, 로마서 15:19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보면, 동남쪽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탈리아와 마케도니아와 독일의 접경 지역을 가리켜서일루리곤이라고 말합니다. 서북쪽의 끝입니다. 동남에서 서북쪽의 끝까지 바울은 자기가 갈 수 있는 발걸음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미 복음이 들어간 곳보다는 들어가지 않는 지역, 남의 터를 밟지 아니하고 바울은 아직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과 사람을 찾아 그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으로 나갔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복음만 전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하고, 전도만 하면 되는가?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는 예루살렘으로 먼저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기근이 들어 많은 성도들이 궁핍함에 처해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서, 그 물질적인 구제를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우리가 축복을 나눌 때 우리가 항상 극단에 빠지면 안됩니다.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만 하면 되는가요?아니에요. 바울은 물질적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또한 그들을 돕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지역에 자기가 전도한 성도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복음이 시작된 예루살렘 지역에 기근이 들어 많은 성도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저들을 도웁시다."고바울은 헌금을 모아 가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나누고 또한 물질적인 헌금을 동시에 그들과 나누길 원했습니다.그러나 예루살렘을 거쳐서 나는 마침내 로마로 가길 원한다고 말합니다.그러나 바울의 발걸음은 로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28절 읽어보십시다."그러므로 내가 이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겠다! 이 한 작은 거인의 불타는 야망을 보십시오.스페인은 그 당시 땅끝이었습니다. 내가 서반아까지 가기 전에 만족할 수 없다.나는 로마에 있는 당신들을 만나 축복을 전하고 또 다시 영적인 축복을, 구원의 메세지를 전달한 후에 나의 발걸음은 스페인까지 미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한 세상을 살고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남기고떠나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인생으로 창조하실 때 축복하신 하나님, 왜 축복하셨을까요? 우리가 축복만 받을 것이 아니라 받은 축복으로 이웃들을 축복하고,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축복을 남기면서 떠나가는 인생이 되십시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얻은 놀라운 축복을 이 세상 땅끝까지 가서 이 축복을 나누고 떠나길 원했습니다.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이 한해 동안 받으시고 그리고 이 축복을 이웃들과 후회없이 나누는 삶,그 삶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롬 16:1-24 / 교회의 일군되어 삽시다

 

 

 

세 사람의 일군이 교회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길손이 세 일군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슨 일들을 하고 계시지요?” 그러자 첫째 일군이 대답하기를 “보시면 모르겠소? 우리는 노동을 하고 있소.”라고 했고, 둘째 일군은 “돈을 벌고 있소다”라고 대답했으며, 셋째 일군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세 사람은 공간적, 지리적으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세 사람의 삶의 태도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 사람중 누가 참된 교회의 일군이었을까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 마지막 장에서 그의 생애의 유일하고 최고의 비전이었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 주께서 세우신 교회를 위하여 바울과 함께 더불어 수고하고 있는 일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시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에는 모두 33명의 교회 일군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숫자가 같아서 외우기 쉬우실 것입니다. 그중의 24명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었고 나머지 9명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겐그레아 지역도 넓게 말하면 고린도 지역안에 포함됩니다. 그중에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습니다. 여성의 이름이 9명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이도 있었고 늙은이도 있었으며, 싱글도 있었고 부부도 있었으며, 귀족도 있었고 노예도 있었습니다. 사업가도 있었고 공무원도 있었으며, 유식한 사람도 있었고 무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함께 더없이 소중한 교회의 일군들이었습니다. 한 해의 일군을 세우는 마당에 있어서 오늘 우리는 이들이 어떤 의미에서 바울 사도에게 교회의 일군이라는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참된 교회의 일군은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을 통해서 얻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들은 주님의 일군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 입니다. 3절에 보시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7절의 마지막 부분에도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말씀이 나오고, 8절에서도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 9절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10절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를 말씀하며, 11절의 마지막 부분에도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계속적으로 12절과 13절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En Christos)”라는 이 단어는 바울 신학, 즉 바울의 신앙고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우선 그들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며 둘째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계속 거하고 있는 사람이며 셋째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할 때 포함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교회의 일군은 먼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셔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교회의 일군이 되다면 그는 교회에서 대접이나 받고 어떤 계급을 갖는 것으로 착각하는 교권주의자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초대교회에 바울 주변에 있었던 일군들은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증거하던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 주님의 일군들이었던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브리스가와 아굴라부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부인의 이름이 먼저 등장하고 있는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같은 사람으로 브리스가는 그 이름을 줄여서 애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을 보면 부인의 신앙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부가 우리들 가운데도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들 부부가 어떻게 주님의 일군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사도행전 18장 2절에 보시면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 시절에 유태인들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추방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쫓겨나서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에서 쫓겨나야 했던 불행이 오히려 바울 사도를 만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때부터 바울과 더불어 동역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7절에 보시면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라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친척이었습니다. 7절 첫머리에서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의 친척인데 바울보다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야사(野史)에 의하면 이들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 거기서 받은 충격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먼저 예수를 믿고 나서 그들은 자기 가문에서 똑똑한 바울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바울의 회심의 배후에는 바울이 예수를 믿도록 기도한 친척들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추청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했고 바울과 더불어 전도했을 뿐만 아니라, 7절을 다시 보시면 “나와 함께 갇혔었다” 고 말씀하는 것처럼 나중에는 바울의 복음사역에서 바울이 받는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어 이 고난을 함께 나누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군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절에 보시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라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루포는 잘 모르지만 루포의 아버지가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시면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본래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유대인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가 골고다에서 처형되기 위해서 가고 있는 광경을 구경하던 중 재수없이 걸려 군병들에 의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 가면서 자기 곁에 따라 오는 예수님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있었던 그는 그의 고난이,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범상한 죽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그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만나게 됩니다. 억지로 끌려 가던 그가 자원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교회에 끌려서 나오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가끔보면 아내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나오고 계시는 남편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주님을 믿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레네 시몬은 자기가 예수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아들만 훌륭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내도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13절에 보시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루포의 어머니는 구레네 시몬의 아내입니다. 바울 사도는 루포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레네 시몬의 아내가 나중에 바울 사도의 전도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온 가족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믿고 주 안에 살아가며 주님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 안에 있었던 사람들-그들은 주님의 일군들이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하면서 로마서 16장처럼 시간이 많이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사람마다 숨겨진 역사를 다 찾아 보려니까 시간이 무척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름마다 숨겨진 아름다운 감동적인 얘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명단에 보시면 로마의 귀족들도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0절에 보시면 “아리스도불로”가 등장하고, 11절에는 “나깃수”가 등장하고, 15절에는 “네레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다 로마의 귀족들이었습니다. 아리스도불로는 헤롯대왕의 손자로서 그 당시에 로마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나깃수는 클라우디오라는 유명한 로마 황제의 개인적인 비서였습니다. 네레오는 도미티니아누스황제 시절에 그 황제 바로 아래에서 막강한 권력을 잡고 있었던 훌레비우스 클레멘스라는 집정관의 비서역할을 맡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로마의 귀족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기독교가 잔인하게 핍박을 받던 시대에 살면서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위험한 시대에 살면서 위험하게 크리스챤이 되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네레오같은 사람의 얘기는 로마의 역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이 사람에 관한 많은 일화를 수집할 수가 있습니다. AD 95년에 로마에서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로마의 막강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크리스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발표된 것입니다. 도미티아누스황제가 크리스챤들을 가혹하게 핍박하는 명령을 내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넣고 있었던 그 동일한 해에 황제의 바로 밑에 있었던 훌레비우스 클레멘스 집정관이 크리스챤이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어 온 로마가 발칵 뒤집히는 깜짝 놀랄 뉴스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클레멘스의 비서가 바로 네레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훌레비우스 클레멘스의 아버지도 아주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훌레비우스 사비누스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AD 64년 로마의 네로황제가 로마에 불을 질러놓고 그 책임을 크리스챤에게 덮어 씌어 모든 크리스챤을 가혹하게 잡아들이게 했던 총 책임자가 바로 훌레비우스 사비누스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의 아들이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것은 깜짝놀랄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한 야사에 의하면 원형 경기장에서 크리스챤들의 몸이 야생동물들에게 던져져 길길이 찟기움을 받는 순간, 그리고 크리스챤들의 몸이 화형식에서 불타 올라 하늘을 향해서 연기로 끓어 오르는 장면을 보면서도 찬양을 멈추지 않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그리스도는 구세주요, 주님이라고 담대하게 증거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최고 책임자의 아들이었던 클레멘스가 충격을 받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경기장에서 찬양이 가능하게 만들었을까를 고민하며 비밀리에 크리스챤과 접촉해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뒤에서 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네레오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우리보다 훨씬 믿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교회의 일군이기 전에 주님의 진정한 일군이었습니다.

 

둘째로, 참된 일군이란 주님의 일군일 뿐 아니라 주님의 사람들의 일군이었습니다.

 

교회는 조직체이기 전에 살아있는 유기체(생명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Organization일 뿐 아니라 Organism인 것입니다. 구속받은 사람들이 만드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 공동체의 생명력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이 모여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조직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생명력은 숫자가 그렇게 많지가 않아도 그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생동하는 유기체였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다 그런 일군들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영광스럽게 멋지게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동시에 또한 사역자들이었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먼저 1절의 뵈뵈에 대해서 보십시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1절). 겐그레아는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9마일쯤 떨어진 항구도시였습니다. 뵈뵈는 거기에 있다가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납니다. 그리고 바울로부터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바로 로마서라는 편지를 가지고 겐그레아에서 고린도를 거쳐 로마까지 달려왔던 사람이 뵈뵈라는 자매였습니다. 바울은 뵈뵈를 그가 친히 추천하는 일군이라고 로마교회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이자매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2절). 그는 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을 특권처럼 생각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은 영광스럽게 1세기에 펼쳐져 갔습니다.

 

그 다음에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 함께 사역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고린도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리가 바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절에 보시면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교회 앞에 개방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집 개방이 쉽지 않죠? 헌신이 없으면 자기의 집을 열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가니까 같이 에베소로 갑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에베소에서도 다시 자기의 집을 개방을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 바로 그들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로 가기까 다시 로마로 갑니다. 아니,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먼저 로마에 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3절부터 보시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3-4절)고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목숨의 위협을 받았을 때 생명을 걸고 바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얼마나 행복한 동역자들을 갖고 있었는지요?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시면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은 “저희는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나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랑의 동역의 역사가 바울 사도와 더불어 1세기의 세계를 복음화하는 위대한 힘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22절에 보시면 더디오라는 재미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22절)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더디오란 말은 셋째(The third)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어떻게 셋째가 될 수가 있을까요? 그 당시 로마사회의 노예들은 이름을 박탈당했습니다. 어떤 귀족이 노예를 여러 사람 고용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첫째야, 둘째야, 셋째야 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이 더디오는 셋째였을 것입니다. 그 다음 절에 보시면 “구아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구아도란 말은 넷째라는 뜻입니다. 아주 흥미있는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노예였지만 지성이 있고 똑똑한 노예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고 바울의 사역에 중대한 도움을 제공합니다. 22절에 보시면 이 편지를 더디오가 대서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사랑하시는 여러분, 로마서는 바울이 친히 쓴 편지가 아니라 아마도 바울이 성령의 영감 속에 불렀을 것이고 더디오가 대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탄생했고 우리가 이 편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더디오가 이렇게 반응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가 편지나 불러주는 대로 쓰는 사람입니까?”. 만약 뵈뵈가 이렇게 말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편지가 갖고 왔다 갔다 하려고 집사가 된 줄 아십니까?”. 그러나 그들은 작은 일을 작은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역들을 통해서 위대한 복음의 사역이 1세기안에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교회에 대한 충성이라는 말은 매우 모호한 단어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조직체를 향해서만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충성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에 대한 섬김이요, 동역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주님의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만드는 일군들이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등장하는 이 33명의 일군들을 쭉 소개하면서 이 16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거의 매 구절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개인적으로 문안을 전달한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문안이 그들의 삶 속에서 생활화(Life Stye)가 되기를 바울이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요.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문자 그대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입을 맞추며(Holy kiss), 서로 문안하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지금의 저희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제가 처음에 미국에 유학하러 가서 제일 당황했던 것은 앞에서 간증을 하고 나오면 미국교회의 자매님들이 와서 껴안아주고 키스를 해 주었을 때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성공적인 교회생활의 열쇠는 교제에 있습니다. 교회안에 사랑의 교제가 있으면 그 교회는 생동합니다. 그 사랑의 교제를 잃어버리면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교회안에 성도의 교제가 아름답고 견고하고 영광스럽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군들은 생명을 걸고 교회안의 교제가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따뜻하고 풍성하도록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로마교회에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교회는 그 위기를 직감하고 위기를 예방함으로 그 위기를 잘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위기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있었고 로마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기를 예방하고 극복했습니다. 어떤 위기가 있었는지를 17,18절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7-18절). 로마교회에 분쟁을 야기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절을 보시면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대다수의 성도들은 견고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중요하고도 예언적인 권고를 그 다음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20절). 왜 평강의 하나님을 강조했을까요? 평강의 하나님의 반대는 분쟁의 신입니다. 그 분쟁의 신은 바로 사탄인 것입니다. 사람이 대적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대적이란 말이고 마귀란 말의 뜻은 영어로 Devil이며, 희랍어로는 디아볼로스라는 하는데 디아라는 말은 영어의 가운데(between)라는 뜻이고, 볼로스란 말은 던진다(throw)란 뜻입니다. 즉 ‘가운데 던진다’라는 것은 자꾸만 던져서 헤쳐 놓고 이간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전문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형제와 형제 사이를, 자매와 자매 사이의 따뜻한 교제를 헤치는 것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귀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서 우리들 가운데 평강의 교제가,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져서 이 교제 가운데서 주님의 사역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제를 잘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잘 이루어지고, 교제가 아름답고 신바람나고 영광스러우면, 이 교제 가운데서 우리가 못할 일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이 평강의 아름다운 교제를 세워가는 것이 교회의 일군들의 책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을 주님께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날 때 교회가 여러분의 묘비 위에다가 묘비문을 새긴다면 여러분의 교회를 향한 수고, 주님을 향한 수고에 대해서 어떻게 비문을 새겨주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한국에 와서 묘지에 갈 때마다 그 비문들을 보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그냥 ‘OO에 태어나서 OO에 죽다’ ‘OOO 사장, OOO 박사’ 교인들은 ‘고 성도 OOO 잠들다’ ‘집사 OOO, 장로 OOO’ 이렇게 씌여져 있습니다만 그동안 외국에 살면서 가끔은 묘지에 가보면 재미있는 비문이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제가 본 비문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비문은 “부지런한 내 딸 여기에 잠들다. 부활의 때에도 제일 먼저 일어날 것이다”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나 어떤 분이 보시고 와서 제게 말씀해 주신 것 중에서 “참 말 많던 내 아내 드디어 입을다물다.”라는 비문을 보았다고 합니다. 제가 본 것 중에는 “사랑하는 내 아내 여기에 잠들다 제발 내 아내를 깨우지 말아다오”라는 비문이 기억납니다. 여러분은 한평생 주님 섬기다가 가실 여러분의 무덤위에 어떤 비문이 새겨지길 바라십니까? 저는 이런 비문이 새겨졌으면 좋겠습니다. 10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벨레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너무 아름다운 이 한마디 선언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무덤 위에 그렇게 새길 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이 원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객관적으로 여러분의 수고와 봉사를 평가하면서 마지막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OOO 잠들다”라고 하는 비문을 새길 수가 있기를 바랍니다.

 

12절에 보시면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이들은 쌍둥이였습니다. 이 드루라는 이름은 로마식에 의하면 쌍둥이에게 부치는 이름이었습니다. ‘배나’라는 말은 우아, ‘보사’라는 말은 셈세를 뜻합니다. 우아하고 섬세한 이름을 가졌던 쌍둥이 자매들의 수고에 대해서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라고 말씀합니다. 12절의 후반부에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가 나옵니다. 이들은 다 여성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해의 봉사가 끝났을 때, 아니 우리의 일평생의 봉사가 끝났을 때 교회가 여러분에 대해서 어떤 기록을 할까요? 이것은 바울 사도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지만 기록되도록 역사하신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생애가 끝났을 때 주 앞에서 이런 인정, 이런 칭찬과 가치를 남기는 봉사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롬 16:25-27 / 나의 복음

 

 

여러분, 교회가 가진 최대의 자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빌딩일까요? 시설일까요? 아니면 많은 숫자의 사람일까요? 우리가 사회적 관점에서 교회가 사회적 조직체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해도 교회가 복음을 잃어 버리면 그 교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서 내려오는 전설적인 얘기입니다. 젖소가 우유를 유난히도 생산치 못하던 어느 해, 어떤 젊은이가 그 까닭을 알고져 밤새도록 젖소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밤 중에 달밤을 휘어감은듯한 아름다운 선녀 하나가 하늘에서 양동이를 이고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젖소들에게 다가가더니 우유를 짜내어 양동이에 가득 채우고는 다시 하늘로 가지고 올라가는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이튿날 이 젊은이는 한 꾀를 냈습니다. 그 젖소 우리 바닥에다가 큰 그물을 깔고 기다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밤 중 그 선녀가 다시 내려옵니다. 기다렸다는듯이 선녀가 우리에 다가서자 그물을 잡아당겼습니다. 이 선녀는 곧 그물망에 생포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누구시며 무엇하러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저는 하늘나라의 마을에서 내려 온 선녀입니다. 우리 마을에 우유가 부족해서 그 우유를 가지러 왔습니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젊은이는 “그러면 저와 결혼을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선녀는 “꼭 3일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하늘 고향마을에서 준비를 해가지고 와서 결혼을 하겠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청년은 선녀를 보내주었고 선녀는 약속대로 어김없이 사흘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선녀는 하늘나라에서 돌아올 때 큰 박스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당신이 이 상자를 열어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 결혼을 하겠다”고 해서 약속을 한 후에 결혼을 하고 수주간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자기 아내가 장보러 간 사이에 젊은이는 그 상자를 열어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살짝 상자를 열어보니 놀랍게도 그 큰 상자는 빈 상자였습니다. “이상하다 왜 빈상자를 가지고 열어보지 말라고 했을까”하고 의아해 하고 있는데 아내가 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 남편의 얼굴을 보자 아내는 직감적으로 눈치를 채고 “왜 열어봤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큰 소리로 대답하기를 “아니, 뭐 텅 빈 상자를 갖고서 그러느냐”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는 선녀는 아주 슬픈 얼굴을 하고 말하기를 “이제 저는 당신 곁을 떠나야 겠습니다. 약속을 어겼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언젠가 당신이 반드시 열어보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그 상자를 빈 상자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상자는 빈 상자가 아닙니다.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고향마을의 공기와 향기가 가득차 있는 제게 있어서는 더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저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을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가 본 소중한 것을 같이 소중히 여길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당신과 제가 어찌 머물러 같이 살 수가 있을까요?”라고 대답하고 떠나갔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는 교회가 지닌 가장 중요한 자산인 복음이라는 가치위에 세워집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비밀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위대한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면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비밀인 복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백을 함으로써 로마서를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를 기록하면서 바울이 줄기차게 강조하고 가르치고 선포해 왔던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는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복음의 영광스런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12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이 복음에 근거한 복음적 삶이 무엇인가를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결론 맺는 이 장면 속에서 다시 복음의 비밀에 대한 영광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저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만은 바울이 직접 자기의 손으로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아니 그러면 다른 것은 바울이 직접 기록하지 않았단 말입니까?”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은 지난 시간에 빠지신 분입니다. 16장 22절을 보시면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구술하고 바울의 비서였던 더디오라는 사람에 의해서 대서되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면서 바울은 이것이 자신의 메세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기 위해서 이 부분만큼은 자기의 손으로 직접 기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시력때문에 별수없이 그 비서를 시켜서 기록하게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 마지막 소중한 편지의 결론을 맺는 장면에서 바울은 힘들었겠지만 친히 붓을 잡고 그가 그토록 강조해 온 로마서의 마지막 결론적 메세지인 복음의 영광을 친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의 확신을 찬미형식으로 기록합니다. 이 마지막 찬미형식으로 나타난 결론 부분에서 바울의 입술을 빌려 다시 고백되는 바울의 복음은 “나의 복음”이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에게 전달된 복음, 그의 삶을 바꿨던 복음, 그의 삶의 초첨이 되었던 복음, 그것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의 내용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우리 말 성경에는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이라고 번역되어 복음과 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이 구별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직접으로 번역하면 and라는 접속사가 붙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희랍어에서는 and를 나타내 주는 Kai라는 이 접속사가 때로는 and(- 과)로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영어의 even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나의 복음 곧,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가장 위대한 소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첫장에서부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 왔습니다. 이제 바울이 로마서의 위대한 편지를 기록하기 시작한 로마서 1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는 나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선택함을 입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2절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복음은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관한 것 즉 복음은 그리스도 라고 말씀합니다. 3절 이하에서 바울은 “이 아들 그리스도로 말하자면 육신으로는 다윗혈통에서 나셨고, 영적으로 말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시다. 참된 사람으로 참된 하나님으로, 참된 인간으로 참 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가 복음이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게 전달된 복음에 관해서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중요한 그의 결단을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인 복음에 관해서 말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에 있는 시민에게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로마제국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피정복지에서 끌어온 황금을 축적하고 있었던 눈부신 황금의 왕국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그 당시에 최대의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철학적인 체계를 발전시킨 지성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로마의 최고의 정치권력으로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로마의 눈부시게 축적된 이 황금이 단 한사람의 인생도 바꿀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이 한 사람의 인생의 삶을 바꾸는데 무력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로마가 발전시킨 위대한 철학적인 체계가 단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울은 로마가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로마가 정복한 피 정복지인 유대땅 팔레스타인의 작은 나라 출신의 바울은 이제 복음을 가지고 자기나라를 정복했던 로마제국을 향해서 나아가면서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의 생명이며 나의 소망이며 나의 삶의 이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첫째는 유대인에게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복음을 동족에게 전했습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깨닫는 사람마다 삶이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가지고 그 당시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던 헬라 사람들에게 나아갔습니다. “이 복음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에게요”. 이제 그 당시에 헬라문화를 받아들여 최고로 번성했던 로마의 왕국을 향해서 나아가면서 복음은 또한 로마인에게도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일까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달리는 구원이 없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달리는 변화가 가능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고 증언되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이라고 로마서의 마지막의 결론에서 다시 확인하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오늘 여전히 여러분과 저에게도 복음인 것을 고백할 수가 있으신가요? 복음의 핵심, 복음의 진수, 복음의 유일한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25절).

 

둘째로, 바울은 이 마지막 부분에서 복음의 계시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서 영세 전부터 하나님은 복음을 준비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기를 “영세 전부터 감취었던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만유가 존재하기 그 이전 부터, 영세 전부터 복음이 감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마음 안에 복음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창조를 계획하실 때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날 것을 보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닫고 감격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하고, 그가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죽어야만 하고,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새로운 생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인류를 위한 재물로, 인류의 새로운 생명을 위한 가능성으로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창세전부터 죽임을 당하기로 예비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영세 전부터 계획된 이 복음이 26절에 보시면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는 비밀이 계시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었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받고 새로워지는 비밀이 나타났습니다. 이 비밀은 사실은 구약성경에서부터 증언되어 왔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가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실 것을 증거되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복음을 복음으로 확실히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이 복음을 글로 문자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26절을 읽어보십시오.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26절). 여러분, 복음에는 난해성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난해한 철학이 있고 난해한 책이 있지만 그러나 복음에는 난해성이 없습니다. 복음에는 추상성이 없습니다. 복음은 가장 구체적인 것입니다. 공부를 한 사람도 안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복음, 누구나 쉽게 깨달아 알고 이 복음을 통해서 그들의 삶이 변화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글을 통해서 전달되고 기록된 복음, 이제 이 복음은 만질 수 있는 복음이요, 눈으로 읽을 수 있는 복음이요, 귀로 들을 수 있는 구체적인 복음으로 증거되었습니다.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전 인류앞에 우리가 죄사함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길을, 변화의 길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전달되고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계시가 있습니다.

 

세번째로 바울은 복음의 축복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첫째로 복음이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는가를 말씀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없이, 예수님없이, 성령님없이 사는 사람들, 이 땅에 수 많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이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그들이 복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이 믿어 순종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26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성경을 기록했다면 “모든 민족으로 믿어 구원받게 하시려고”라고 썼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구원이라는 단어 대신에 순종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원은 마지막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앞에 왔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구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복음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예수믿고 죄사함받아 구원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순종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으십니까? 모든 이방인으로 하여금 복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일까요? 바울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람의 불행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의 뜻을 거스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 보았더니 허무요, 저주요, 방황이요, 무의미였습니다. 그후에 비로소 우리는 깨닫습니다. 순종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철도위을 달리고 있는 철마가 그 철도길을 떠나기를 원하게 되면 파선이요, 끝장입니다. 철마의 행복은 예정된 그 길을 따라 그 길을 순종하여 그 길을 걸어감이 철마의 행복인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하늘안에서만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 기류를 거스릴 때 새들은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기류안에 순종하며 법도안에 머물며 날개칠 때 새들은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경험합니다. 바다속에 헤엄치는 물고기의 진정한 행복은 물결을 거스림이 아니요, 그 물결에 따라서 살아갈 때 물고기들의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사람들에게 이런 유혹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글쎄, 기독교가 이것 밖에 없을까? 예수 믿고 죄사함받고 구원받으라고 밤낮 똑같은 소리말고 다른 복음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을 넘겨다 보는 그 순간부터 그 삶은 오히려 흔들리게 됩니다. 이상한 사실이죠? 여러분, 신자가 진정으로 삶을 견고케 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일은 복음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이 구원이요, 순종의 놀라운 삶을 열어 주지만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통해서 다시 그들의 삶과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할 수가 있습니다. 26절의 후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26-27절). 믿음의 성도들은 복음을 받아 드린 다음에 복음 안에서 다시 견고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피상적으로만 받아 드리면 늘 똑같은 소리같게 생각되고 다른 복음은 없을까 하고 찾게 됩니다. 옛날 그런 생각을 했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 드리고 보니까 밤낮 같은 소리만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복음은 없을까?, 다른 진리는 없을까?, 보다 심오한 진리는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그 당시 유행하던 종교적 철학사조인 영지주의를 넘겨다 보기 시작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2절에 보시면,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크리스챤들에게 “보다 심오한 철학을 원하는가? 보다 심오한 종교적인 신앙을 원하는가? 거기에만 안주하지 말아라. 더 깊은 비밀이 있다”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서 바울은 “비밀은 따로 없다. 그리스도가 비밀이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그분을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깨달은 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지식, 모든 지혜의 모든 보화가 다 감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유혹 앞에 흔들리고 있는 그 당시의 골로새 교인들에게 바울은 “그것은 공교한 말이고 속임수”라고 말하고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골 2:5)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 질 수가 있습니까? 다른 철학, 다른 사조를 넘겨다 볼 때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 지고 깊어 질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유명한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어떻게 믿음이 굳게 될까요? 그리스도를 받아 드렸다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유치하게 느껴진다면, 복음이 내게 만족이 되지 못하고, 복음이 능력이 되지 못하고, 복음이 소망이라고 고백할 수가 없고, 복음이 내 삶에 폭탄이라고 고백할 수가 없다면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라, 더 깊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라,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믿음에 굳게 서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가면 여기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은 달리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왜 예수를 믿고도 내 삶이 허무하고 방황할까요?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이신 그리스도 안에 빠지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요, 목회자인 미국의 볼드윈(Baldwin)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2대에 여러가지 철학과 종교를 공부했다. 그리고 이 철학과 종교에 비해서 복음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추구하고 공부하는 철학과 종교들에 비해서 복음은 너무나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30대에 내가 추구하던 철학과 종교들이 내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 전혀 대답일 수가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지 시작했을 때 복음은 비로소 심오하게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40대에 나는 인생의 스트레스와 삶의 모든 문제들과 싸우면서 복음을 의지했을 때 복음은 능력으로 다가왔다. 비로소 복음은 나에게 위대한 것이었다. 나는 50대에 들어와서 내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성취가 허무하게 느껴졌을 때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그때 비로소 복음은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다. 60대가 되어 내 친구들이 하나 둘씩 이 세상을 떠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내 손에 잡고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 둘씩 빠져 나가기 시작했을 때에 내가 붙들고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 밖에 없었다. 60대의 복음은 나에게 유일한 것이었다. 더 이상 복음은 내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복음은 더 이상 심오한 것도 아니었다. 복음은 더 이상 위대한 것도 아니다. 복음은 더 이상 중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은 유일한 것이다. 복음없이 나는 살지 못한다. 복음은 나의 삶의 전부다. 복음은 나의 인생이다.”

 

여기에 복음의 축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복음은 불신자들에게는 구원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놀라운 삶을,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복음을 붙들면 붙들 수록 내 삶과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놀라운 축복에 대해 지금까지 나눈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 복음을 찬미합니다.

그것이 마지막 구절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7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복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찬미를 돌리는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라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흔들렸던 자기의 인생, 이 철학에서 저 철학으로, 그리고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이 사조에서 저 사조로 방황했지만 아직도 그의 인생은 끊임없는 방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다메섹에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의 삶은 비로소 견고할 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해 보았더니 이웃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자기 동족이 변하고 이방인들이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인류의 소망이요, 전 세계의 희망인 복음을 가지고 땅끝까지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견고함의 근거요, 모든 민족들의 소망이요, 인류의 소망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인생을 달려 왔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영원 전부터 준비해 놓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케 하시다가 마침내 복음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을 오해하지 않도록 글을 통하여 분명히 기록하게 하여 말씀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이신 복음을 준비하여 마침내 복음이 그에게 전달되고 복음이 그의 인생을 바꾸고 이 복음을 통해서 인생을 살게 된 자기의 놀라운 삶을 바라보면서, 복음을 통한 구원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얼마나 지혜로우신가를 묵상하다가 바울은 이렇게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바울에게 물어 보십시다. “당신에게 무슨 야망이 있습니까?”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야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야망입니다.” “당신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비전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비전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나는 로마서 1장에서 이미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제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고자 합니다.” 그는 또한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가리켜서 본문의 마지막 단원에서 “나의 복음”(25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달되었던 복음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통해서 전달된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지만 나의 삶을 바꾸고 내 이웃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 이 놀라운 복음은 더 이상 예수님의 복음일 뿐 아니라 동시에 나의 복음이 된 것입니다. 감히 나는 이 말씀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이 복음은 바울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동시에 이동원이라는 사람의 복음입니다. 나의 삶을 바꾸었고 나의 삶의 희망이요, 내 삶의 초점이요, 내 삶의 전부가 된 이 복음을 향해서 나도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을 위해서 내 인생을 드리고 싶어 합니다.” 저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주 별볼일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제 가슴에 한 맺힌 두가지 소원이 있었다면 하나는 돈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명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날 복음을 들었습니다. 제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이상하게도 제가 청소년 시절부터 붙들고 있었던 그 두가지의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한번도 부자가 되고 싶은 유혹앞에 제 마음이 사로잡혀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깨끗히 그 소망을 가져 가셨습니다. 목회생활을 하는 동안에 주님은 저의 필요를 성실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저는 주신 모든 것을 가장 필요한 생활비를 제쳐 놓고는 주님 앞에 다 드렸습니다. 감히 돈에 관한 한 저는 욕심이 없다고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유혹도 주님께서 가져 가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드리고 복음을 만난 후에 단 한번도 어떤 자리를 제가 의도적으로 찾거나 추구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한가지 욕심만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욕심입니다. 복음이 저를 통해서, 또 제가 섬기는 교회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더 듣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그들이 구원받고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복음이 우리 민족안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을 바꾸는 소망인 이 복음이 다른 민족들에게도 증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을 받아드린 민족들이 입술을 모아 전능하신 하나님앞에 영광과 찬미를 돌리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저의 복음의 환상이요, 복음의 비전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복음의 비전위에 굳게 서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만드는 주인공들이 복음에 미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복음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절대로 흥분하지 않는 사람들, 복음이외에는 아무 것도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사람들의 구원이요, 사람들의 생명이요, 민족의 소망이요, 인류의 소망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내 생명도, 내 젊음도 내 삶도,내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위대한 교회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 복음의 축복이 여러분의 축복이고 저의 축복일 수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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