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황권의 창시자(590~604 재위)·신학자.
행정·사회·종교의식·도덕 등을 개혁하였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신국 Civitas Dei〉을 사상의 근거로 삼아 중세에 틀을 갖추게 된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사회를 고안하였다. 여러 업적 가운데 미사 개혁은 '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를 낳게 했다. 8세기부터는 '교회 박사'(doctor of church)로 인정받았다.
1. 그레고리의 생애와 사상
그레고리 1세는 540년경 로마의 귀족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두명의 로마 주교를 배출하였는데 아가페스투스1세(535-536)와 그레고리의 증조부였던 페릭스 4세(526-530)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의 온 가정은 모두 신앙심이 두터운 어머니 실베리아와 성자라고 할정도의 칭호를 받는 두명의 고모가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시장직에 있었는데 죽자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의 대부분은 자선기관에 바치고 남은 돈으로는 여섯개의 수도원을 세우는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수도사가 되어 엄격한 금욕 생활과 수도 생활을 통하여 경건한 생활을 했지만 결국 그로인하여 그의 건강은 매우 병약하였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돌이켜 보면 정치적으로는 외부의 야만인족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러운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가 6세가 될무렵 에는 야만족인 토틸라가 로마에 침입하여 로마라는 이름을 역사상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할정도의 야망으로 로마를 수없이 괴롭혔다. 10세가 될 무렵에는 이탈리아 내에서 고트족들이 정복되기 시작 하였고 유스티니안들이 권력을 장악하는것들을 목격하며 성장하였다.
결과적으로는 게르만 민족들의 이동에 큰 여파를 이탈리아가 뒤집어 쓰면서 사회는 혼란 스러웠지만 한가지 게르만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유스티니안들의 죽음과 그레고리1세의 등극사이에 세명의 주교들이 거처갔다.
그레고리1세는 후대에 교회 음악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가대를 조직하기도 하였고 예배순서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선교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영국에 최초로 어거스틴을 선교사로 파송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무었보다도 빼놓읗수 없는 것은 그가 저술한 책들이다. 그가 저술한 목회율(Pastoral Rule) 에서는 사제직의 본질과 특성을 강조 하였으며 또한 목회자로서 마땅한 실천야 될 생활들을 강조하였다, 목회율 가운데서도 교회 행정에 관한 부분은 백미(白米)라 할수 있을 정도로 중세교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한다. 또한 그는 사도들의 설교가 보여주는 법칙들을 기록하기도 하였는데 사도들이 보여준 설교는 모든 것의 근원은 내부의 영적 생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재산은 영적인면보다는 물질적 이익을 올리기 위하여 잘 정비하였고 또한 교구는 종교적 성공을 위해 잘 조직되어 있었다.
또하나 그가 저술한 “욥기가 주는 교훈(Morals on the book of Job)” 이라는 책은 문예 부흥시대 이전까지의 윤리학의 기본 교제로 사용될 정도로 아주 유명하다. 그리고 그의 신학사상에서도 라틴 교회가 낳은 4명의 박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로마의 주교제를 교황제로 조직의 패턴을 바꾼 사람의 하나로 꽃을 피었다고 할수 있다.
그의 생애동안 그의 삶은 그가 가졌던 칭호처럼 “하나님의 종들을 섬기는종”의 화신이라 할만큼 큰 중세 교회의 훈륭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604년 3월 12일 64세의 일기로 주고 말았다.
4.. 그레고리 1세 의 신학
1) 서론
중세교회의 역사 가운데 그레고리 1세가 교황의 황제 재직으로 기간은 590년 9부터 604년까지 14년간 눈부신 활약으로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그가 교황으로 황제의 직위를 겸하게 되기도 하였는데 황제의 직위를 겸하게된 이유는 이러하다. 476년 서로마가 망한뒤부터 서로마에는 그레고리1세가 등극할때까지 황제가 없었기 때문이다.3)
또한 그레고리1세 이후 이탈리아내에서 교황의 권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황제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은 또 한가지의 이유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레고리1세 이전부터 롬바르트 야만족들이 침략하기 시작을 하였는데 이들과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앞장을 서야 하는데 롬바르트족을 방어할 책임을 교황이 맡게 되었다. 그레고리1세는 교황으로서 황제가 해야될 어려운일 까지 잘 수행하게 됨으로서 교황의 지위까지 부상시키게된 것이다.
바로 교황이 롬바르트족들과 로마 제국들 사이에 평화 협상의 문제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레고리는 황제로서 이일들을 잘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레고리는 롬바르트족들과 로마 제국사이에 평화 협상의 문제를 잘 해결한후부터 그 결과로 교황청이 정치적인 면에서도 유리하게 작용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레고리 1세는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던것이다. 그는 그후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교황제도를 수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2). 신학
하르낙은 중세시대를 일컬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리면에서 기독교를 생각해볼 때 중세교회는 초대 교회사의 부속에 지나지 않지만 제도로서 생각할 때는 초대교회사가 중세 서방교회에서 처음으로 완성된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성경은 그 다른 어느 지식이나 과학보다도 더 무한하고 위대하다고 그는 말한다. 어거스틴이 가르친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의 중심 인물이며, 구약은 신약의 예언이고 신약은 구약의 해설이라고 한다.
그레고리는 마지막 교부요 첫 교황이며 중세 카톨릭의 전형을 보인 지도자로서 중세 기독교의 문을 연 인물이다. 그는 독창적인 천재성을 없었으나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을 중세에 전달한 통속적인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다.5)
그의 작품은 성경주해, 그중에서도 욥기해설(Moralia), 목회자의 임무(Regula Pastorralia)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Dialogues)과 설교집등이 있다.
그레고리의 신학은 카톨릭 교리를 세운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대표적인 신학 사상은 연옥사상과 성례론이다. 그후 그레고리의 신학은 후대 스콜라 신학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레고리1세의 신학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회의 실제적인 생활면에 있어서는 제롬의 극단적인 금욕주의(禁慾主義)와 고행주의(苦行主義)를 따랐으며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어거스틴의 사상을 본받았고 그 이후 그의 신학은 반 펠라기우스 주의로 기울어 졌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그레고리의 삼위일체와 기록론은 324년 네케아회 때로부터 칼케톤회에 이르기까지의 신앙을 잘 계승하였지만 인간론(人間論)과 구원론(救援論)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신앙과 성경의 교리를 이탈하였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가경을 포함하여 유전을 성경과 동등시하며 말씀보다 교회에 우선한 권위를 두고 있다. 그리고 카톨릭교회의 계급제도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와는 달리 교황과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등으로 나뉘어 불려지고 있다.
3). 구원론
그레고리의 신학사상과 행정능력은 그가 저술한 경건한 이탈리아의교부들의 생애와 기적 그리고 로마 카톨릭 성직자의 성격과 임무 등에서 알수가 있다. 그는 성경의 해석을 우화적으로 해석한 궤변들이 많다.
그레고리의 신학은 예정론보다는 성예론에 관심이 많다. 인간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때 구원을 받고 세례이후에 지은죄는 회개하여 보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후에 지은죄는 공적과 참회에 도움이 되는 성찬에 참여하는것이라고 한다. 성찬은 주님에 희생의 반복이기 때문이라 면서 화채설(化體說)의 길을 열어 놓았다. 화체설이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씀보다는 성례 위주와 사제 주의의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이다. 개신교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을 행하고, 기념설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카톨릭의 헬라 정교회에서는 세례, 견신례, 고해, 미사, 혼례, 종유, 서품등을 성례로 행하고 있으며 카톨릭 교회에서는 세례, 견진, 성찬, 고해, 혼인, 임직, 종부로 7성례를 행하고 있다. 또 한가지 그레고리1세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 사이에 연옥이라는곳이 있는데 그 연옥에는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영혼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그 영혼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던지 헌금을 드리던지 봉사의 일을 하게되면 그 영혼들이 천국을 갈수 있다는 학설을 만들어 그의 신학의 일부로 확정하였다.
연옥사상은 그레고리 그 이전 이미 헤르마스(Hermas)서에 암시되어 있었고 키프리안과 어거스틴에게서부터 부분적으로 가르쳐 지기 시작 하였지만 그레고리는 신앙의 중요한 요목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희미하지만 마태복음 5: 26절을 인용하여 최초로 입증을 하였다.
따라서 그는 카톨릭교회의 의식을 신의 은총으로 중요하게 보았고 그 의식은 성도들의 외적인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을 시켰으며 연옥을 지나 하나님 나라에 갈수 있다고 가르쳤다.
동방교회는 죽음과 심판의 중간 상태를 말하나 서방교회에서는 그레고리 이후 연옥설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작은 죄들은 죽음 이후에도 심판전에 연옥의 불로서 정결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전3:11-15절) 다른 사람들의 중보 기도로 연옥에서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분명하게 가르친 사람이 그레고리1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계명을 부여해 주셨는데 계명을 부여받은 사람은 그 계명을 지킬 때 인간은 의로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된 원죄에 대하여는 세례를 통하여 용서되며 사는동안 짓는 모든죄는 성례전을 통하여 용서받을수 있기 때문에 계속적인 성례와 고행을 통하여 죄를 완전히 탕감을 받아야 한다고 하여 성례의 의식을 말씀의 귄위 위에 두고 있다. 그후 가톨릭신학의 구원론은 참회의 통회, 자백, 면제, 탕감이라는 순서를 통하여 죄를 사함받고 구원에 이를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세상에서 살 때 구원받은 이후에 짖는죄는 고행과 성찬을 통하여 사함을 받을수 있고 죽음 이후에 해결되지 못한 죄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중보기도를 통하여, 헌금을 드릴때마다 액수에따라 구원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가르친 최초의 사람이 그레고리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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