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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부활신앙 /롬 4:14-25

by 【고동엽】 2022. 3. 8.

롬 4:14-25 / 아브라함의 부활신앙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기록을 말할 때, 제일 많이 인용하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네스북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지니는 정확성이라는 권위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한번 이 책을 들쳐 보았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무거운 사람이 얼마나 되나? 1069파운드, 즉 약 530Kg쯤 됩니다. 세계에서 제일 키가 큰 사람이 얼마쯤 되나? 8피이트 11인치입니다. 약 2미터 60센티쯤 됩니다. 세계에서 제일 아기를 많이 낳은 여인이 몇명이나 낳았나? 를 찾아보니까 69명이나 낳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아기를 늦게 낳은 여인이 몇 살에 낳았을까? 하고 보니까 1956년 10월에 57세된 여인이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맞습니까? 틀립니다. 제가 드디어 기네스북의 틀린 것을 잡아냈습니다. 이 부분의 세계최대의 기록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라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90세에,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 부부에게 일어난 이 변화 - 이것은 얼마나 충격적이 경험이었습니까? 거의 포기했다가 약속한대로 이삭을 낳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변화중의 하나는 그가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 교인들이 점차 부활신앙을 잃어버려 가고 있습니다. 어떤 교인은 제게 와서 솔직히 “목사님, 저는 부활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자신의 문제를 안타깝게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에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앞에 놓고 중요한 두 가지의 물음을 던지려 합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어떻게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을까요? 둘째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부활신앙은 왜, 혹은 무엇때문에 중요했을까요? 우리는 이 대답을 통해서 어떻게 부활신앙을 소유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 이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서 왜 중요한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고져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어떻게 이 부활신앙이 형성되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나는 부활을 확실히 믿습니다.”라고 부활신앙에 대한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만날 수가 있다면, 그들이 이 부활신앙에 도달하게 된 경로를 조사해 보면 우리는 두가지의 과정을 일반적으로 추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경험적 과정을 통해서, 둘째는 논리적인 사색의 과정을 통해서일 것입니다.

 

경험적 과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체험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무슨 체험이든, 기도의 응답의 체험이든,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온 어떤 체험이든, 신앙의 체험을 갖게 되면 즉각적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확신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구나.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계시구나”라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수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경험적 과정을 통해서 부활신앙을 확신하게 되는 하나의 경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경로는 논리적 과정을 통해서, 즉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부활신앙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시작합니다. “죽음으로 과연 모든 것이 끝날까?” 이 질문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가장 커다란 딜레마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경우에 악인이 득세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이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 세상입니까? 이 불공평을 수정하기 위해서도 내세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부활을 통해서 악인이 대접을 받고 득세하는 그 모순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는 이런 사고를 가지면 부활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철학자인 칸트가 부활신앙을 확신하게 된 경로였습니다.

 

또는 그리스도인들 경우에 “성경을 찾아보니까 하나님은 아주 성실하십니다. 그는 거짓말하시지 않습니다. 약속하시면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약속하셨다면 부활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면 부활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는 것을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신앙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 부활신앙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는 두 가지 과정을 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경험적 과정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이었으며, 사라는 90세 였습니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보면 그 잉태가 정말 가능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의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의 말씀처럼 100세가 된 아브라함을 묘사하기를 자기 몸이 죽은 것과 같았다고 했는데 100세가 되면 살았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사라의 경우에는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에도 홀연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이적을 통해서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아닌가요? 이 기적을 체험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또 하나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죽었던 태, 내 육신도 거의 죽었던 이 상태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가능할 수가 있었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능력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자, 이 경험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발견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이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있어서 부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부는 이 잉태의 경험을 통해서 부활신앙의 확신이란 놀라운 체험 앞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경험적 과정이라면 또 하나는 논리적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논리적 과정을통해서도 부활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 시간이 경과됩니다. 기적과 같이 태어난 이삭이었는데 이삭을 바라보시면서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주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이 말씀은 이삭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사고의 혼란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아들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생각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아들을 약속의 아들로 주셨다. 이 아들을 통해서 많은 후손들이 생겨나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갈등했겠습니까? 그러나 순종하기를 원했던 아브라함은 마침내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브라함은 중요한 사색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내 아들을 다시 바치면 모든 것이 끝나고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가 되는데 나는 명령대로 바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아들은 반드시 다시 살아야 한다. 내가 비록 순종의 결단을 통해서 이 아들을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내 아들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라는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이것이 지나친 제 추측일까요? 성경에서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의 11장 17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음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순종하기 위해서 아들을 바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확신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경험적 과정이든 혹은 논리적 사색의 과정이든 부활을 마침내 확신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백세, 구십 세에 하나님이 주신 “네 아들은 반드시 태어난다” 는 말씀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을 수 없는 중에 아브라함이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또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색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언약하셨다면, 내 아들 이삭을 통한 하나님의 생명의 번식이 가능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부활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나는 부활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도 거리가 먼 것을 쉽게 여러분 앞에 증명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그 사람이 동시에 말씀에 대한 권위와 영광을 신뢰하는 사람인 것을 여러분 앞에 증명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부활신앙에 관한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말씀을 공부해 보시고, 순종해 보시고, 묵상해 보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 보세요. 이 말씀속에서 만난 하나님, 말씀속에서 경험한 하나님, 마침내 그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영광의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 부활을 가능케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신뢰하는 자리에 도달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형성과정입니다.

 

두번째는 부활신앙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부활신앙을 확신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본문을 피상적으로만 읽어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무런 장애도 없이 이 부활이라는 엄청난 믿기 어려운 사실을 믿을 수 있었을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관찰하게 되면 우리는 질려 버립니다. 그것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나 믿을 수 있었지 우리 같으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절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아직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이것은 거의 흉내낼 수 없는 것이며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 다음절 20절을 보셔도 이 상황, 이 나이에 도달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의심치 않고 오히려 믿음에 있어서 더욱 견고해 졌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었는지 우리를 질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좀 더 깊이 연구하면 다른 결론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쓰여진 “믿음이 견고해졌다” 혹은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라는 동사는 희랍어의 부정과거란 동사가 쓰여졌습니다. 희랍어 문법을 연구해 보면 부정과거 속에서도 여러가지 용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총괄적 용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총괄적 용법이란 사전을 찾아보면 “어떤 동작이 지속되는 기간이 얼마이든 그것을 총체적으로 하나로 보아 나타내는 결론”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여기, 약속을 의심치 않았다라는 말은 결론적으로 총체적으로 볼 때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꾸어 말한다면 아브라함도 의심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고, 믿음이 흔들리는 그런 유혹과 위기도 있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해지는 믿음을 넘어서서, 흔들릴 수 있는 생각과 회의의 가능성을 넘어서서 마침내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의심치 않고 견고해 질 수가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본래의 기사의 보도와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제 창세기 17장 17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앞에 아브라함이 처음에 보인 반응입니다. 그는 웃었습니다. 그러면 사라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보시면, 창세기 18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 사라도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웃는 것을 보시고 사라에게 따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3절에 “왜 사라가 웃느냐”고 하자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승인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겉으로는 웃지 않았지만 속으로 웃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니야 네가 웃었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속으로 웃는 것까지 다 보셨습니다. 여러분, 속으로 하시는 말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태어나자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삭의 뜻은 ‘웃음’입니다. 이 웃다가 낳은 놀라운 아들을 보면서 그들은 ‘웃기네’라고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도 의심의 순간이 있었고, 회의의 순간도 있었으며, 믿음이 연약해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하느냐 안하느냐 보다도 의심이 올 때 어떻게 넘어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날 때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라를 도와 주셨는지를 살펴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4절에 보시면,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왜 부활을 확신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그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부활이 불가능할까요?

 

제가 성경공부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일본의 유명한 종교가인 우찌무라 간조에게 어떤 대학생이 와서 “선생님, 왜 믿기 어려운 기적을 자꾸 믿으라고 하십니까? 제가 성경공부를 하는데 성경에서 기적같은 이야기를 빼놓고 읽으면 안될까요?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다니셨다는 얘기, 부활했다는 얘기를 빼놓고 성경공부를 하면 안될까요?” 라고 질 문을 하자 그는 “학생, 성경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수락하기 어려운 그런 기적들을 다 제거하고 성경을 공부하면 성경에서 꼭 두 가지가 남네. 그것은 이쪽 뚜껑과 저쪽 뚜껑만 남게 되네.” 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창세기 1장 1절인 성경의 처음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 이것이 기적입니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절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끝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심판의 주로 구름타고 역사 속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기적을 빼면 양쪽 뚜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함이 있겠느냐.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신앙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부활신앙의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마침내 장애물을 넘어서는 비밀인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 서십시오. 당신을 창조하신 여호와, 우리로 숨쉬게 하시는 여호와, 우주를 지배하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자라면 그 하나님에게 부활이 가능한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이 부활신앙의 결과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부활신앙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첫째 결과는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세상을 놀라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를 믿으면서도 우리의 믿음이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믿음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믿음의 가치를 나타내지 못하고,세상을 놀라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이 상식과 이성이라는 한계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상식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믿을 수 있는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별 수 없이 살다가 죽는 인생, 좀 착하게 살아보자”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상식과 이성의 한계에 묶여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상식과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전능성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활을 믿는다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내 삶속에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내 삶을 바꾸시며, 내 삶의 꿈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신뢰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부활신앙은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은 부활신앙을 통해 자신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죽어 있는 태와 마찬가지였던 그 아내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마침내 자손을 주실 것으로 믿은 아브라함에게 성경은 말하기를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구원과 그의 믿음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건만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성경이 이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믿을 수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23절, 24절의 말씀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외아들 독생자 이삭의 부활을 믿을 수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도록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온 세계가 들어야 할 놀라운 메세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리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구원은 적극적인 측면과 소극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측면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구원의 적극적인 측면은 우리가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불의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놀라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위하여 주께서는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마지막 25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제가 몇년전에 미국의 후버댐을 구경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댐이라고 하는데 처음에 이 댐의 이름은 불더댐이었는데 나중에 바뀐 것입니다. 그 후버댐 앞에 갔을 때 큰 게시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버댐에 관한 소개를 설명했겠지 하고 앞에 가서 보니까 뜻밖에도 거기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쭉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설명을 보니까 그것은 이 댐의 공사가 사막에서 이루어진 건설이었기 때문에 너무 많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쭉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의 귀절에 제가 영 잊지못할 이런 인상 깊은 문귀가 씌여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왜 죽었는가? 이 사막에 다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이 메마른 땅이 다시 장미꽃처럼 피어나기 위해서이다”

저는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을 모시고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시고 누우셨던 그 빈무덤 앞에 여러분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곳에 간판을 쓸 수가 있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여기 나의 사랑하는 주님께서 피흘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이유, 그것은 사막같던 내 인생에 생수의 강이 다시 흐르고 메마르고 황폐한 내 삶이 장미꽃 같이 피어나기 위해서이다”고.

 

 

롬 5:1-11 / 구원의 축복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해서 발달한 현대적 사업이 있다면 아마도 보험업이 아닐까 합니다.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동차 보험을 들고, 또 비행기 타는 기회가 많아지니까 항공보험, 해상보험, 그리고 건강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료보험을 들고, 모처럼 장만한 내 집에 대한 애착과 집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주택보험도 들고, 도난보험, 화재보험도 들곤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축구스타들은 발이 생명이기 때문에 발보험을 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발가락보험이 되겠지요?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손 보험을 들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무슨 보험을 들까 생각하다가 주둥이보험을 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이런 모든 유형의 보험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보험이 있다면 아마도 생명보험일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도 생명보험을 들으라는 가입권유를 받았는데 그 필요성은 충분히 납득되고 동의가 되면서도 다음의 두 가지 때문에 주저가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내가 아직은 죽을 때가 되진 않았는데.”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들어봤자 내가 받는 당장의 유익은 없지 않은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에도 불신자의 입장에서 사고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천국 가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 신앙이 지금 당장 살아가는 오늘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며 축복이 있느냐라는 반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복음이 사후의 저기에서 복음일 수가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복음이 지금의 여기에서도 복음일 수가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그 대답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예스)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에는 미래적 차원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믿는 자들을 위해서 선물로 준비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현재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9절을 읽어보시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받고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벗어나 천국에 갈 것이라는 구원의 미래적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은 조금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10절에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얼마나 놀라울 것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11절을 읽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가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씀은 바로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놀라운 삶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구원의 현재적 축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문은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의롭다함을 얻었다하는 사실을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얻어지는 열매, 즉 칭의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입니다. 화평을 누리자는 말이 영어 성경에 보시면 ‘우리가 현재 평화를 갖고 있다(We have peace)’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현재적 축복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로, 성경은 이것을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평화라고도 말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화평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화평이라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은 주관적 평화가 아니라 객관적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느낌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것은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한다’는 말은 영어로 ‘Peace with God’(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이룬다)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 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본문 10절의 첫부분에 보시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까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가 있는 곳에 진노를 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시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편에서도 자신의 죄 때문에 자기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부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10절을 보시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원수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화해자로서 죽으신 것이며 또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는 놀라운 사건이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대한 가장 드라마틱한 설명을 해 놓은 것을 인도네시아의 이리안쟈라는 정글에서 사는 식인종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돈 리챠드슨이라는 선교사가 쓴 ‘화해의 아이’란 수기의 책을 읽다가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그 야만의 식인종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까를 고민하다가 어느 날 자기의 선교 대상이었던 사위부족이 이웃부족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할 것이 확실시되자 그들의 지도자의 아들을 상대부족에게 내어주게 되고 그 아들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자 마자 곧 전쟁이 끝나는 광경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돈 리챠드슨 선교사님은 사위부족에게 설교할 기회가 있게 되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렇게 생생하게 설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의 아이(Peace Child)’로 주셨습니다. 이 화해의 아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된다는 사실이 실제로 우리의 삶속에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문의 2절을 통해서 그 대답을 발견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두가지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 있다’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들어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인지 아십니까? 죄인인 나를 속속들이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내가 나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입니까? 요즘 투시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이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만약 제가 이 투시의 은사를 가져서 여러분을 다 투시한다고 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안다면 제 앞에 설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하물며 전능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요?

 

비유건대,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구약에 보시면 옛날 중동지방의 왕가의 습관 가운데 하나는 왕을 만나려면 왕이 먼저 불러야만 왕 앞에 나아 갈 수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왕비라 할지라도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고 만약 왕의 부름없이 나아간다면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얘기가 구약의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더가 자기 삼촌인 모르드개의 요청을 받고 유대민족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기 위해서 왕 앞에 나아가서 얘기를 해야 겠는데 나갔다가는 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유명한 결심을 한 뒤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자기 마음대로 왕 앞에 나아갔을 때 죽지 않고 살수 있는 한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왕이 지팡이 비슷한 홀을 내어 밀고 그것을 잡으면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에스더 왕비를 본 순간 갑자기 그녀가 사랑스러워져서 홀을 내어 밀었고 에스더 왕비는 그 홀을 잡아서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던 우리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순간 그분 앞에 나아오는 우리들을 괜찮다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는 그 특권이 얼마나 두려운 특권인지 여러분이 히브리서를 읽어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는 말씀에서처럼 그냥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꼭 강조되는 단어가 있는데 ‘담대히’ 나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감히 설 수가 없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권만 주실 뿐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서 있다는 말은 그냥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말이 아니라 서서 그분의 얼굴을 뵈옵고 서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과 대화하며, 서서 그분의 사랑을 입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과 더불어 누릴 수 있는 교제와 대화의 놀라운 특권, 저주의 대상이었던 내가 감히 그분 앞에 서서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이 특권이 내게 주어진 은총의 특권임을 믿으시는지요?

 

둘째로, 성경은 구원의 축복으로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기쁨이라는 명사는 나타나지 않지만 기쁨이라는 단어가 동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즐거워하느니라”(2절)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쁨의 삶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저는 우리 한국 크리스챤의 삶속에 좀더 기쁨이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한 선교사님과 함께 일할 때 그분이 제게 왜 한국 크리스챤들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오기 전까지 바깥에서는 명랑하게 얘기고 하고 웃기도 하는데 교회당에 들어서면 갑자기 인상이 달라집니다. 얼마나 어둡고 우울한지 모른다고 하시길래, 제가 갑자가 변명할 말이 인색해서 대답하기를 “선교사님, 한국 교인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 마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교사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래요, 그러면 그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은 잊어버렸나요?”라고 하시더라구요. 다시 사신 주님,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놀라우신 그 주님을 통해서 당당히 마땅히 누려야 할 이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누려야 할 이 기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우리는 세가지의 이유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할 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리라” 고 하십니다.

 

로마서 3장 23절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달라진 모습입니까? 이 말씀을 묵상하던 죤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은 천국이란 말과 동의어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계시된 곳이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즐거움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 거센 비바람 그 많은 역경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가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가 있는 이유는 주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즐거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젊은 연인들이 잠시 후에 결혼하면 같이 살게 될 신혼의 집을 생각만 해도 감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의 구원의 즐거움의 이유는 그리스도적 인격에로의 성화의 확신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지금 그 주님을 닮아가도록 주께서 역사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3절과 4절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먼저 여기서 ‘연단’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어 성경에 보시면 연단이라는 단어가 Character(인격, 개성)이라는 단어로 씌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인격이 아니라 이 인격이라는 단어는 시험에 합격되어 통과된 인격이라는 뜻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주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연단 시켜 주님이 원하시는 인격으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환난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환난이란 말은 본래 ‘--아래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 당시에 이 단어가 씌여진 유래를 살펴보면, 감람유 같은 기름을 만들때 보통 그 당시의 기계는 아래에 감람나무 열매를 놓고 위에서 꽉 눌러서 기름을 짜냈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스트레스나 우리를 괴롭히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환난은 우리를 빚어 만들며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인격을 닮아 사는 삶과 그 인격에로의 연단인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후에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 인내야 말로 얼마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시고 싶어하시는 주님 자신의 인격인지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만들어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의 열매는 원하면서도 그 과정을 견디질 못해 합니다. 누구나 다 인내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인내하는 과정은 견디기가 매우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발 저에게 인내를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인내는 당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즉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만들어져 간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바울사도처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환난이 허용되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한 단계가 있습니다. 그 환난이 왜 오는지, 내가 그 환난을 왜 겪어야 하는지, 그 환난을 왜 통과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그 환난 중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가 있다면, 그 환난 중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환난 중에도 다가오시는 주님, 그리고 환난의 깊이보다 더 심오한 기쁨으로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해 보셨는지요? 그때 우리는 환난의 비바람과 역경과 캄캄한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환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찬양할 수가 있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세번째의 구원의 축복은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 평생의 삶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희망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은 내일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 군목이 참호마다 다니면서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데 어떤 참호에 가서 “젊은이, 기도해 드릴까요? 기도제목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 젊은이는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희망들은 이루어지면 별볼일 없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소원했던 희망이 성취되자 마자 또 다른 좌절과 허무를 느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 희망의 초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들의 희망은 이기적이고 지나치게 순간적인 희망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내용을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정말 붙들어야 하고 기대해야 할 소망은 인격적인 소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소망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는 소망입니다. 4절의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워 우리가 빚어 만들어야 할 인격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입이다. 이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할 소망인 것을 믿으십니까?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반드시 주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비바람, 폭풍우 속에서도 주께서 나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빛나는 인격으로 빚어 만들어 주 앞에 세워주실 이 희망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 희망 때문에 바울사도는 자기의 육신이 낡아가는 황혼을 바라보면서, 젊은 날의 로맨스와 젊은 날의 모든 기대가 사라지는 인생의 노경에 처해서도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내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쇠하지 아니하는 흥분속에 날로 더 큰 기대와 영원한 희망, 주님은 마침내 나를 주님 닮은 놀라운 사람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손해, 오늘의 영광, 오늘의 내가 받는 중상과 모략, 내가 받는 슬픔과 내가 받는 까다로운 짓밟힘이 모든 인생의 역경과 뒤틀리는 관계 속에서도 주님은 나를 빛나는 존재로 세우시기 위해서 이런 환난의 틀속에 집어넣고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네번째의 구원의 축복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적 소망이 마침내 실현될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주께서 우리안에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난을 만날 때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도 똑같이 환난을 만납니다. 신자라고 환난이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환난속에서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는 사람들은 환난에도 불구하고 그 환난속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고 기뻐할 수가 있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랑의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서 부은 바 되었다는 말은 문법적 완료형입니다. 한번 부어졌는데 그 효과가 지금도 충분한 효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부어주신 사랑은 우리가 평생을 사용할 수가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넉넉한 이 사랑의 강을 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이 사랑을 체험했나요? 십자가 앞에 섰을 때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 그 사랑은 또한 내가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는 능력의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그 사랑의 깊이, 그 사랑의 놀라움을 아시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내가 주님 만나기 전에 어떤 모습의 인간이었는가를 본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본문은 네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본래 “연약한 자”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약한 자라는 말은 사실 연약한 번역입니다. 원문에 보시면 ‘무력한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 우리는 인간을 강한 사람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남자들도 예쁜 여자만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무력한데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6절 후반부에는 우리가 “불경건한 자”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있었던 불경건한 사람이었음에도 그 추함을 보시고 아시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표를 빗나가고 있었던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식도 계속 방황하면 꼴 보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나의 방황을 아시면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되었을 때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무력했고, 불경건했고, 죄인이었으며,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음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아무 능력이 없었음에도 우리의 최선의 선도 나를 구원하기에는 절대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불경건함과 추함을 보시면서 아시는 하나님, 나의 죄인됨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원수됨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신 분이시라면, 이제부터 우리가 사랑하지 못 할 사람이나, 사랑하지 못할 환경, 사랑하지 못할 운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는 사랑치 못할 사람이나, 환경이나, 운명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넉넉한 사랑으로 한평생 세상을 이길 능력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롬 5:12-21 / 구원의 근거

 

 

저의 둘째 아들 범이가 어렸을 적에 무척 갖고 싶어하던 장난감 중의 하나가 영국 병정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친구가 갖고 있던 장난감을 보고 갖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난감이 쉽게 구해지지가 않아서 제 마음속에 꼭 사줬으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제가 영국 집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영국 병정을 꼭 사오겠다고 약속하고 집회를 떠났습니다. 아들과의 약속 때문에 집회하는 가운데도 그 영국 병정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중이 염불에는 생각이 없고 잿밥에만 골돌한다고 하듯이 저는 집회를 인도하면서도 계속 영국 병정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회를 끝마치고 호텔로 오자마자 주변 가게에 가서 살 수 있는가 찾아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분들에게 영국 병정을 사고 싶다고 얘기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혼자서 찾아보았습니다. 마침 시외에 호텔이 있었기 때문에 가게를 다녀 봤는데 그 영국 병정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떠나는 날이 되자 이제는 최후의 희망을 공항 안의 상점에다 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샀으면 좋았을 텐데 강사가 도착하자마자 영국병정을 사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오늘이 마지막 기회이기에 할 수 없이 공항에 도착하자 상점에 들어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마침 그 상점에는 없다고 하며 공항 끝에 있는 다른 상점에 가보라고 하기에 마중 나온 집사님들의 양해를 구하고 뛰어가서 천신만고 끝에 그 영국 병정을살 수가 있었습니다. 늦게 공항에 나갔기 때문에 비행기를 놓칠 뻔했지만 다행히 그 병정을 사갖고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둘째 아들이 '아빠' 하고 뛰어 나오더라구요. 문을 열자마자 '영국 병정 !' 하고 소리치길래 ‘샀다‘ 하고 보여 주니까 제 손에서 잡아채자마자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 버리고 저를 다시는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실 제 아들에게 그 영국 병정을 건네주면서 그것을 주기 위해서 얼마나 천신만고의 노력을 다하였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조차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결론을 내리기를, "아, 이 녀석이 원하는 것은 영국 병정 선물이었지 아빠를 기다린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또 아빠가 그 선물을 구하기까지의 노력한 과정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아주 섭섭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로마서 5: 1-11까지의 본문으로 소위 구원의 축복들에 관한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리게 된 구원의 결과, 즉 구원의 선물들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화평이라든지 흑은 기쁨, 그리고 연단된 인격이나 소망, 사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고 나서 얻게 된 일종의 보너스와 같은 선물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로마서 5: 12 이하에서 우리가 이런 구원의 축복과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가를 다시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결과를 누리기를 원하지만, 다시 말하면 구원의 축복을 따먹기는 원하지만 그 구원의 축복과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그 원인에 무관심할 수가 있다는 우리의 약점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원인이 어디 있는지 그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여러분과 제가 오늘 누리고 있는 구원의 영광을 더욱 알게 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로써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바울 사도는 아담의 범죄의 사실을 먼저 우리에게 증언함으로써 애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시면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한 사람'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한사람' 아담과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인류에게 끼친 어마어마한 영향을 또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끼친 어마어마한 영광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끼친 전인류적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와 타락은 그 한 사람만의 타락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으며, 마찬가지로 애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행동이 전 인류에게 영향을 가져왔다는 차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그 영향력의 내용이나 스케일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이 두 가지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가져온 가공할 결과를 지적함으로써 거기서부터 구원받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인류를 대표하는 범죄였다는 사실을 본문의 출발에서부터 역설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 라."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결과로써 사망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 한 사람의 범죄였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그 죄에 참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인류 전체가 사망이라는 결과 앞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편에서 보면 매우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라고 지적하고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 한 사람의 행동은 자기 혼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인류를 대표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한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그 결과에 참여하는 사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파일럿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그 비행기에 탄 전체의 사람들이 같은 비극을 경험합니다. 회사의 대표되는 한 사람의 그릇된 결정 때문에 그 회사 안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운명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인류는 운명 공동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저 유명한 시인이었던 존 던이라는 사람은 "인류는 누구나 섬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대륙의 한 부분이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것은 운명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모두가 다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원인은 죄였습니다. 이 죄는 본질적으로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 최종적인 결과가 바로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사망을 두려워할까요? 그것은 사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죄와 사망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찾아온 죄와 사망을 그대로 방관하신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복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런 죄와 사망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 처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입니다. 죄와 사망의 자리에 있었던 인류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자 했다는 사건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찾아온 범죄와 사망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을 통해서 죄와 사망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처방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은혜의 뜻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죄와 사망앞에 서 있는 인류 앞에 마땅한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심판과 정죄일것입니다.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하고 정죄받아 마땅합니다. 이제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심판이라는 단어와 정죄라는 두 개의 단어를 보십시오. 심판은 한 사람 아담 때문에 마침내 인간을 정죄의 자리에 두게 했다고 합니다. 심판 받아 마땅하고 정죄 받아 마땅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자 했습니다. 이 은혜는 단순히 우리가 죄를 사함받고 아담이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물론 구속은 회복의 의미를 포함하고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아담 때문에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회복 이상의 사실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엇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17절에 보시면 '의'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라는 단어는 죄 대신에 강조된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류에게 하나님은 죄 사함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의롭다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엄청난 적극적인 선물인가요? 죄의 자리에 있었던 인류에게 '의' 를 주시고자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18절에 보시면 또 하나의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 입니다. 죽음 앞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인류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 다음 21절의 말씀 속에서 또 하나의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생‘ 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새생명일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은 영원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광을 누리며 영원에 거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심판 받아야 할 우리가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 세 가지의 놀라운 선물을 보세요. ’의'와 '생명'과 '영생' -죄대신에 의를, 사망 대신에 생명을, 심판 대신에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의도하십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 찬송가의 작사자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의 전반부에서 강조되었던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신 '사랑'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가운데서도 아가페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이 아가페적 사랑이 의도하는 핵심은 바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사랑의 결단을 하셨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그분은 마침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죄 대신에 의를, 사망 대신에 생명을, 그리고 심판 앞에 처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된 가장 중요한 배경, 흑은 근거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구원의 놀라우신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근거하고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순종을 하셨는지 본문의 19절에서 예수님의 순종의 위대성과 아담의 불순종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여기서 바울 사도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결과적으로 죄인이 되었고,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순종이 쉽습니까? 아니면 순종이 더 쉽습니까? 여러분의 경험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제 경험으로는 불순종하는 것이 훨씬 쉽더라구요. 의롭게 사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죄 짓는 것이 쉽습니까? 죄 짓는 것이 더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마도 쾌락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상한 사실입니다만 불순종은 언제나 우리에게 쾌락을 수반합니다. 히브리서 11:25에 보시면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바로의 아들로서 왕이 될 수 있는 특권을 거절하고 광야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받을 것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서 주목할 단어는 '죄악의 낙'이라는 것입니다. 죄 짓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죄에는 언제나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죄악의 낙‘앞에 먼저 붙어 있는 '잠시'라는 단어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쾌락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잠시 후에 이 쾌락은 쓰디쓴 비극적인 고통의 대가를 우리에게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잠시 후면 사라질 쾌락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순종보다도 순종이 훨씬 더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어렵고 사람 앞에 순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순종에는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죄 짓는 이유는 쾌락이 수반되기 때문이고 반대로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 이 사실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짤막한 시간이지만 지금 제가 오랜만에 부모님과 할머님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외로우시니까 제 방에 들어와서 자꾸만 무슨 얘기를 하시는데 제가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날마다 반복적으로 하십니다. 그 할머님의 얘기를 들어주는 일이 쉬울 것 같습니까? 제가 마음속으로부터 이런 기회가 많지도 않을텐데 할머님께 효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도 고통스럽더라구요. 제 방에 들어와서 하시는 얘기가 말이 안돼도 열심히 듣고 할머님과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요즘 저는 이를 악물고 순종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순종에는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나면 할머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요. 그 모습을 보며 제 마음에도 기쁨이 넘쳐납니다.순종은 고통이 수반되지만 그 이후에 말할 수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쁨을 제공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서 5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일생을 히브리서 기자가 묘사하면서 8절 이하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시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 가셨다면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더 이 순종을 연습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한평생은 이 순종을 연습하는 생애였다고 말해도 과언이아닙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류를 향한 구속의 경륜을 쟁취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구유에서 태어 나셨고,나사렛 조그마한 촌락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서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바을 사도는 빌립보서 2:6 이하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의 순종의 절정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그 골고다 언덕에 보혈의 피를 뿌리시며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 엄청난 죽음을 수용하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것이었습니다.오늘 저와 여러분이 누리는 구원, 우기가 찬양하는 구원, 우리 마음속에 놀라운 특권으로 고백하는 이 구원의 즐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사건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분이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근거는 그리스도의 통치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우리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면 우리가 방금 고백한 구원의 즐거움의 의미는 어디로 갈까요?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우리의 구원이 언제든지 상실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는 구원이라면그것은 얼마나 불안할까요?그러나 제가보는 성경, 제가 접하는 성경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면,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한 번 주신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결코 빼앗아 가지 않는다고 약속합니다. 그 많은 도전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반드시 보존되고 완성되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믿는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의통치인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만 주셨을 뿐만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을 다스리기 원하십니다. 그가 우리를 이니도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본문을읽어 보시면 '한사람'이라는 단어 못지 않게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왕노룻’이라는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는 죄악의 왕 노룻 또한 사망의 왕 노릇 하는데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망처럼 강력한 지배자가 어디 있습니까?누가 사망을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사망이 왕 노룻 하고 죄가 왕 노릇 함으로 사망과 죄의 지배를 볏어날 수 없었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담당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써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옮겨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한 그날부터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21절의 선언입니다. 2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룻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룻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아담에게 속해 있을 때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들어온 죄의 지배, 사망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은혜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다른 단어가 있다면 사랑일 것입니다. 은혜의 지배란 바로 사랑의 지배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지배 아래 있어 그 은혜가 왕 노릇 함으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은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지나간 한 주간의 삶의 여정 속에서 죄를 범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했습니다.

20절의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온혜가 왕 노릇하고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바을 사도갸 역설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더욱'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넘친다’는 단어가 영어 성경에 보시면 'Overflowing(막 넘쳐서 흐르다)'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회랍어로 보시면 이 단어가 본래 밀물처럼 닥치는 홍수를 설명할 때 쓰여진 단어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죄가 있고 이 죄와 싸우면서 우리는 긴장하고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은혜 아래 있는 정도들에게는 이 은혜가 마침내 우리를 삼킬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홍수가 밀어 닥치듯 넘치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범하는 수도 있지만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영생의 완성에 도달하고야 말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은혜의 통치일 뿐만 아니라 의의 통치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은혜로 계속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계속 사랑해 주시니까 죄를 계속범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시면 그분의 통치는 은혜의 통치일 뿐 아니라 의의 통치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7절에 보시면 우리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사람임을 강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임을 고백하시나요? 그러나 동시에 믿음으로 의롬다 함을 받은 사람인 것도 고백하시나요? 그러면 우리는 은혜의 선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이제 의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놀라운 삶을 얻었다면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경험합니다. 물론 실패와 쓰러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재기할 때마다 더욱 의로와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통치는 은혜의 통치이면서 동시에 의로운 통치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예수 처음 믿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때 어느 시골 교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선하게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한국판 탕자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 재산을 달라고 해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가게 되었답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면서도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는 반드시 돌아와야 해"라고 타일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 뜰 앞의 단풍나무를 가리키며 "아들아, 가을이면 이 단풍나무는 언제나 붉은 빛으로 타오를 거란다. 그러면 그때마다 너를 기다리마. 고독하거든, 네가 돈을 다 쓰고 모든 것을 잃어 버리거든, 아버지 생각이 나고 고향집이 생각나거든 잊지 말아라. 가을철 이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 때 나는 너를 붉은 심장으로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고 꼭 돌아오거나" 하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떠나갔습니다. 몇 년이 흘렀습니다. 가을이면 이 아버지는 어김없이 집 나간 자기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니까 단풍나무가 병이 들었는지 색깔이 회미해지더랍니다. 안되겠다 싶어 하인들을 명하여 붉은흩이불을 있는 대로 다 가져다가 빨갛게 물들이라고 했답니다. 하인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아들 때문이야. 아들이 돌아오다가 단풍나무가 잘 보이지 않으면 내 사랑이 식은 줄 알 거 아닌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마침내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지붕까지도 빨간 흩이불로 다 덮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해 가을, 마침내 이 아들이 집을향해서 돌아오다가 산 길 모퉁이를 돌자 자기 집 지붕마다 나무마다 걸려 있는 붉은 옷감을 보고서는 풀썩 주러 앉아 울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이 비유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추 있는 단어가 바로 '더욱 넘치는 은혜'라고 생각됩니다. 지붕마다 나무마다 아버지의 사랑을 걸어놓고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향한 변함없는 내 사랑이 너를 기다리고있단다" 하며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 도상에서 실패하고 쓰러짐에도 변함없는 동일한 그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일어설 것이며 이 사랑과 이 은혜 때문에 계속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전진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설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야말로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고 있는 근거요. 원인인 것을 확신하십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요,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구원의 축복 안에 살고 있음은 그분의 은혜와 의의 통치 때문임을 알고 그 은혜와 그 의를 찬양하는 삶을 살아 가십시다.

 

롬 6:1-14 / 죄에서 자유하려면

 

 

한 청교도 설교가가 광장에서 청중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죄책이라는 짐입니다. 참된 행복은 이 죄의 짐을 벗는 데 있습니다.” 이 때에 한 젊은이가, “그 죄책이라는 짐이 몇 파운드나 됩니까? 나야말로 아무 짐도 느끼지 못하니까 나는 행복안 사람이 아니겠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설교가는 그 청년을 향해서 이렇게 반문하기를, “청년이여, 만약 시체의 위에다가 400파운드의 무게를 올려 놓은들 그 시체가 느끼겠소, 안 느끼겠소?” 라고 했답니다. “그야 못느끼겠죠?”라고 청년이 대답하자, “맞소,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은 아무 죄책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요. 누군가가 자기의 죄책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살아나기 시작한 중거라고 말할 수가 있소.”라고 설교가는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기쁨이 있다면 죄사함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새롭게 해 주셨다는 이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슬픔이 있다면 우리가 용서받은 그 확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경험하는 구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죄책과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어느 정도 성경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여전히 더욱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 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계속적인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니까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더 많이 죄를 짓자”라는 궤변을 전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본문의 6장 1절이하의 말씀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궤변을 향하여 사도는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삶의 장에서 죄로 더불어 실제적으로 싸워 승리하는 삶은 정말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 자유한 삶, 그리고 실제로 승리를 누릴 수 있는 삶의 열쇠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세가지의 단어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알라’, 둘째는 ‘여기라’, 세번째는 ‘드리라’는 단어입니다.

 

첫째의 ‘알라’라는 단어는 3절에도, 6절에도, 9절에도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라는 말입니까? 바울사도는 먼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선 이것이 의미하지 않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것은 죄가 우리 안에서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죄의 엄청난 세력은 아직도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굴복하게 하고 유혹받게 하고 있습니다. 죄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죽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잘 죽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기 위한 금욕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더욱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죄에 대해서 죽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과거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을 때 우리도 그 때 죽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사실을 연합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님께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과 그의 부활의 사건에 이미 동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연대화, 즉 그리스도의 사건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의 죄를 짊어지고 나를 대신해서 그분이 죽으셨고, 또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이 부활하신 것이라면 그분이 죽었을 때, 나도 죽은 것이고, 그가 부활했을 때 나도 영적으로 부활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영적인 분명한 사실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여러분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히 새로워 진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을 상징화하는 의식이 침례입니다. 침례교회에서는 물을 뿌리는 대신에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옵니다. 물 속에 들어갈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그의 죽으심에 연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라는 말씀이 나오고 또 4절에도 보시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5절에 보시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이 침례라는 의식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장사식이요, 장례식이요, 동시에 부활식입니다. 제가 가끔씩 침례를 주면서 보면 장례식하러 들어가는데 들어가서 죽지 않으려고 막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면 제가 막 밀어버립니다.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의 새 생명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표시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침례 의식 자체가 옛사람을 죽게 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일어난 영적인 사건을 상징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십자가의 사건에 동참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나도 죽은 것이고 그가 다시 사셨을 때 나도 다시 산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긍정적으로 말하면 옛 사람이 죽었으니까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신분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신분의 삶, 바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왜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정체의식의 확신의 결여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이 국제화를 이뤄가고 있는데 한국인도 이제는 달라졌고 국제적인 시민이 되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런 행동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별 수 있나라고 생각하면 그런 행동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서 일어난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의식-하나님이 옛 사람을 죽게 하셨고 새 생명을 주셨고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면 변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었을 때 정말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부활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안다는 사실이 믿는다는 사실보다 더 강력한 것을 아십니까?

 

저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회심한 후에 탕자의 자리에서 돌아온 새로운 사람이 된 후에 길을 가다가 옛날에 함께 어울리던 거리의 여인을 만났습니다. 어거스틴이 못본 척하고 지나가려고 하자 그 여인이 좇아오며 “저예요. 저 몰라요?”물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이 대답하기를 “너는 너지만 나는 내가 아니란 말이야”라고 했답니다. 한국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자기의 장인에게 “김익두 사망”이라고 부고를 보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장인의 속을 썩였으면 제일 먼저 장인에게 김익두가 죽었다고 보냈을 까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승리의 삶의 출발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나의 옛 사람은 죽고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는 ‘여기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여길지어다’라는 명령형으로 되어있습니다. 11절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은 본래 회계사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나의 계정에 입금이 되었으면 현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여기라고 할 때 쓰여진 것입니다. 여기서 여기라는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라’는 단어의 의미와 가장 근사한 단어가 있다면 운동권에서 많이 쓰고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의식화’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의식화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라’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10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단번에 죽으셨다가 그가 다시 살으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지 않았는데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지을 일이 생길 때, 막 성질이 나려고 할 때, “나는 죽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죽은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기쁘심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신나고 감격하고 흥분하고 이 새로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나를 다시 살려 주신 주님만을 향하여 산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인식-‘알라’는 사건을 기초로 하여 끊임없이 그렇게 여겨야 할 의식화의 과정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거지와 왕자의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암행 순시차 나가셨다가 다리 밑에서 거지 소년을 보았는데 어쩐지 마음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거지 소년을 데리고 궁궐에 들어오셔서 만조백관 앞에 서서 “오늘부터 이 소년을 내 아들로 삼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이제 분명한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거지는 죽었고 왕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저녁에 주무실 시간이 되었는데 왕자가 막 대궐 바깥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어디 가냐고 묻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다리 밑에서 자야 편하다”고 대답하자 신하들이 “아닙니다. 왕자님, 왕자님의 주무실 곳은 대궐 안에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이 왕자가 다시 대궐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시녀들이 좇아가면서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라고 묻자 “내가 본래 거지라서 내가 세수하는 곳이 다리 밑에 있다”고 하자 시녀들이 “아니예요 왕자님, 세수하실 곳이 대궐 안에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질문드리겠습니다. 이 왕자가 왕자다운 행동이 나타나려면 거지 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아니면 왕자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나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라 거지는 죽었고 새롭게 왕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당분간은 거지같은 행동이 계속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워낙 오랫동안 거지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았음에도 죄인같은 삶은 계속될 지 모릅니다. 그래도 계속 확인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하셨다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의식화하셔야 합니다.

 

세번째는 ‘드리라’는 것입니다. 알라와 여기라는 단어가 지적 인식과 연관되어 있는 단어라면 드리라는 단어는 우리의 의지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을 때 나도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살려 주셨다면 나는 계속적으로 이 사실을 나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여기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에 나는 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기 죄를 이기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먼저 죄를 이기려면 중요한 것이 죄를 이길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크리스챤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패배의식입니다. 이 땅에서 성화가 어차피 완성되지 않을테니까 나는 패배할 수 밖에 없다고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이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고 그 가운데 새 사람으로 살게 하셨다면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더 이상 죄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는 승리자로 살 수가 있다는 이 놀라운 가능성에 근거해서 죄를 이길 수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본문의 6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의 몸이 멸했다고 하는 번역은 지나친 번역입니다. 본래 여기서 멸했다는 것은 죄의 도구로서 우리의 몸을 지배하던 힘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무력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성어거스틴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자였으나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죄를 짓는 것이 당연했지만 예수를 믿고 달라진 것은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어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짓는다면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성령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죄를 이길 수가 있음에도 우리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새로운 사람이 된 후에는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지배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죄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시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치지 않고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죄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죄여, 사망이여, 사탄이여, 너는 나를 다스릴수가 없다. 나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주여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만이 내 삶의 통치자가 되는 것은 마땅하다. 오 하나님! 그러므로 내 삶의 전 존재를 당신 앞에 바치나이다” 라는 이 고백이 결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분기점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본문의 12,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롤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항복하고 바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나를 다스리고 통치하실 때, 나의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주께서 약속하시는 빛나고 거룩한 삶의 승리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죄에게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지배는 사실상 끝난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졸병으로 갔을 때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전방에 배치가 되어 갔는데 그 부대의 내무반에는 김 하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김 하사라고 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여러가지 벌을 받았지만 제일 무서운 벌은 한 밤중에 팬티바람으로 집합시켜서 줄빠따를 때리는 것입니다. 쭉 서서 제일 끝에 있는 사람이 그 다음 사람을 때리고 순서대로 그 다음 사람을 때리는 벌인데 제가 제일 졸병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맞았겠습니까?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정말 소형총이라도 있으면 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제가 들어간지 얼마 안돼서 김 하사가 제대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이야말로 얼마나 기쁜 복음이었는지요? 그 이후 김 하사는 제대를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제대를 했는데도 그 사람이 계속 두려운 것입니다. 그가 제대한지 사흘 뒤에 술 취해서 찾아와서 “집합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에 다 일어나서 매를 맞았습니다. 그 다음 날도 김하사가 한 밤중에 술 취해서 찾아와 다 집합을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내부반에서 가장 고참이었던 김병장이라는 사람이 벌떡일어나 “야, 김하사! 넌 끝났어”라고 소리치더니 우리를 향해서 “아무 염려말고 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날 김병장이 그렇게 위대해 보일수가 없었습니다. 그 김병장만 아니었으면 전 김씨 성을 가진 자를 쳐다보지도 않을려고 했었는데 김병장 때문에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날 밤 얼마나 잘 잤는지요.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에 없는 아첨을 해 보았습니다. “김병장님 존경합니다. 제가 김병장님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 악질 김하사의 시대는 끝나고 김병장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계속 강조하는 것이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죄에게 순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이제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되셨다면 그분의 온전한 통치를 경험하도록 그분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롬 6:15 -23 / 순종할 이유

 

 

미국의 로스 엔젤로스의 거리를 지나다가 한 젊은이가 붉은 글씨로 인상적인 문귀를 새겨놓은 티셔츠를 입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I'm a slave for Christ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라는 문귀였습니다. 지나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기특하더라구요. 자신의 신앙고백을 써 놓았다는 것이 귀하게 보여서 몇 걸음 지나간 후에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그의 등 뒤에는 “Who's slave are you? (당신은 누구의 노예입니까?)”라는 문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당신은 누구의 노예입니까? 노예란 자유가 박탈당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다면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우리는 6장 1절 이하 1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는 참된 승리의 삶은 무엇일까요? 라는 중요한 질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과 우리는 이 사실을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의식화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의 마지막 요소는 우리의 삶을 주 앞에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드리는 것이 곧 순종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께 순종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는 은혜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14절과 15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 14절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의 법 아래 있습니까? 아니면 은혜 아래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의 자녀 가운데 어떤 자녀들은 법 아래 있지는 않은지요?자식들을 위한 헌법을 제정한 가정은 없습니까? 법이라는 것은 법에 대한 순종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어길 때 거기에 대한 형벌을 또한 제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식들 이렇게 살 것”이라는 법을 제정해 놓고 이 법을 어길 때에는 우리 가정에서 추방하거나 혹은 호적에서 지워버림 등등의 벌을 제정해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은 안계신지요?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부모의 법 아래 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은혜 아래에 두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하나님의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을 때와 은혜 아래 있을 때 언제 더 죄를 덜 짓게 될까요?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법 아래 있을 때라고 대답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을 때 오히려 죄에 대한 승리가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14절의 말씀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14절).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힘은 율법의 힘보다도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힘이 타율적이라면 은혜의 힘은 자율적입니다. 율법의 힘이 강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은혜의 힘은 감동적인 것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엡2:8)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요?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오늘도 살고 있다고 고백하십니까?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나는 죄를 마음대로 범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죄를 지속적으로 범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 사람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하나님의 처벌을 피할 수가 없이 하나님 앞에 정죄되어 있었던 과거의 우리의 운명과 비참성을 깨닫고 거기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이 죄를 범하도록 인도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15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엠 알 디한(M.R. Dehaan)이라는 설교가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봉건시대의 사회구조를 전제로한 일종의 예라서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적절한 예라고 생각되어 소개합니다. 과거 봉건시대에는 주인들이 노예로서 하녀들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어떤 사회의 경우에는 노예에 대한 엄격한 법률까지 제정되어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 하녀들은 주인의 법 아래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자기의 하녀를 위해서 이런 법을 제정한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상시간은 반드시 아침 6시어야 하며 7시까지는 집안의 모든 청소를 완료할 것, 그리고 8시까지 주인의 모든 식사준비를 완료하고 9시까지는 자녀들을 위한 모든 뒷바라지를 끝낼 것 등등의 하루의 일정을 정하고 규칙대로 수행하며 그렇게 하지 못할때는 추방도 가능하고 매질도 가능한 법률을 정했다고 한다면 그런 법 아래서 행동하고 붕사하는 하녀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하녀와 주인 사이에 일이 벌어져서 이 주인이 하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내로 맞아 들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주인의 아내가 된 이 여인은 아직도 주인의 법 아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제는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사랑 아래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이 함부로 막 살겠습니까? 전에 6시까지 일어나야 했던 이 여인은 이제는 10시까지라도 잘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법 아래 있을 때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잊어버리지 않는 여인이라면 주인의 엄청난 사랑과 호의로 자신이 주인의 아내라는 놀라운 신분이 된 것을 깊이 깨닫는다면 이제는 5시쯤 일어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은 지금 비슷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순종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를 범할 수가 있을까요? 일시적인 실수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고 그분 앞에 내 삶을 던질 수 밖에 없고 그분을 따라갈 수 밖에 없고 그분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요?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유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노예가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참된 자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다른 말로 ‘의의 종’이라는 단어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이라는 말은 바꿔말하면 의의 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이 바로 ‘의’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의의 종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보시면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20절에 보시면 매우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20절). 이 말씀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면 의를 행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된 자리에서 자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죄에 대해 자유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드린다면 에베소서 4장에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말고 참말을 말하라고 하고 도적질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도적질하지 말고 구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장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언제 거짓말장이의 딱지를 면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을 거짓말을 중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언제 또 거짓말을 시작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던 그 입술에서 참말이 나올 때 그는 비로소 진실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때에야 그는 거짓에서 참 자유한 것입니다. 이제는 도둑질하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언제 도둑놈이라는 불명예스런 명칭에서 자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도둑질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언제 또 도둑질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성경은 도둑질하던 사람에게 구제하라고 가르칩니다. 남의 것을 빼앗던 그 손이 오히려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손으로 변할 때 이 사람은 비로소 도둑질하는 것으로 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죄의 종된 자리에서 자유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죄의 종이 안되겠다는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의의 종이 된다는 사실은 의의 근원이 되신 유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가 있을까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뿐만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복종하는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된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리도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절). 다시 말하면 “이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그 증거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주님의 교훈의 본을 순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100% 순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열망, 새로운 소원,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싶어하는 순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죄의 종에서 자유하게 된 증거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삼고 그분의 교훈을 따르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때에 진정한 자유를 경험합니다. 이것은 탕자가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곁을 떠나가고자 한 이유는 아마도 자유를 위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버지의 잔소리가 굴레처럼 느껴졌고 함께 사는 것이 구속처럼 느껴져서 자유를 위해서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한동안 그는 자유를 만끽한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얼마 후 주머니가 비기 시작하고 자기의 주변에 의미없는 친구들이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돼지를 치는 우리 속에 들어가서 그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한 순간 그는 자신이 자유가 아니라 비참한 노예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 품에 있을 때보다 더 다른 의미로 참담한 죄인, 죄악의 종, 타락의 종, 방종의 종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안 받아 주시면 “아버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얻었사오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만 보아주십시오”라고 간청할 결심을 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자식을 종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산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아버지의 품 속에 있었건만 그는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들은 하늘에서만 자유할 수가 있고,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물속에서만 자유롭습니다. 어느 날 물고기가 왜 나는 물 속에서만 살아야 하나 하고 육지로 나아가면 죽고 맙니다. 철도를 달리는 철마는 레일 위에서만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남편들은 아내의 품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그 입구에 큰 글씨로 써 붙인 “아내를 사랑하라”라는 성경귀절을 볼때마다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이처럼 남편의 자유는 아내의 품 속에만 있으며 아내의 자유는 남편의 품 속에만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품 속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 쉴 때까지는 내게 참된 안식이, 참된 평안이 없었습니다.”

 

세번째는 열매 때문입니다.

이것이 21절에서 2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인간은 다 노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의 노예이든가 아니면 의의 노예입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면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결과라는 말 대신에 열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시면,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종된 그 열매의 마지막이 사망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죽는다는 사실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죄의 종이 된 결과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도 사망의 징후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냄새가 지금부터 나기 시작합니다. 죽는 냄새는 썩는 냄새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부터 부끄러운 일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는 일, 불법한 일들, 썩고 냄새나는 일들에 거하게 됩니다. 반대로 의의 종이되면 그 열매는 무엇일까요? 19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의의 종이 되면 그 결과는 거룩함입니다. 여러분, 거룩함을 사모하십니까? 수년전 작고하신 기독교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가 암 치료를 위해서 미국에 오셔서 어느 대학교에서 설교를 하셨을 때 저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마치 예언자적인 비장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는 미국의 크리스챤들을 질타하면서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불신자와 다른게 무엇입니까? 크리스챤들의 삶의 목표는 행복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거룩함을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라고 도전하셨습니다. 과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는 자신의 삶의 목표를 거룩함이라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을 때 그 열매는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얻은 영생은 그냥 영원히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개념 속에는 질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할 뿐 아니라 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에 전혀 새롭고 거룩한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거룩한 삶을 이루어 나갑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내가 거룩하게 닮아오던 그 주님과 더불어 거룩한 나라에서 영원히 거룩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강조할 때는 영생이 열매라고 하지 않고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결과가 영생이라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순종해야 하고 그러면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23절에서 분명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여기서 삯이라는 단어는 은사라는 단어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삯은 마땅히 행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삯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던 그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영생은 지금 얻는 것이지만 내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을 때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거룩한 삶을 살 책임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거룩함을 완성하여 거룩하신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되는 이 마지막 열매를 위하여 기쁘게 오늘도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생의 선물을 말씀드리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5년전 신문, 미국 라디오, 텔레비죤에서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매일 기재되고 방송되었습니다. 라이언 화이트 (Ryan White)라는 AIDS에 걸린 소년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13살때 혈루병으로 수술 중에 수혈을 잘못 받아서 이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소년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밝고 아름답게 살았으며 학교생활도 기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문기자들에게 알려지고 또한 텔레비죤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은 5년동안 살다가 18살에 죽었는데 죽기 직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 소년을 찾아 갔습니다. 유명한 레이건 대통령도 찾아가서 선물을 주었고, 도널드 트럼프라는 거부 부동산 업자도 찾아가 막대한 선물을 주었으며 마이클 잭슨도 찾아가 선물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선물을 가장 많이 받은 소년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죽음 직전의 한 크리스챤 잡지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이제는 너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구나. 이 아버지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가 없음을 용서해라”고 하자 이 라이언이라는 소년은 대답하기를 “아빠, 물론 저는 선물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아무도 아빠 같은 선물을 저에게 준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저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잖아요 아빠 때문에 저는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었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어요 이제 저는 죽어도 천국가는 것이 확실하잖아요. 아빠는 저에게 가장 위대한 선물을 주셨어요.” 이 기사는 많은 미국인들을 울렸습니다. 맞습니다. 이 아버지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해 줄 일이 많이 있겠지만 결국은 인간이 부딪쳐야 하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 죽음을 넘어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영원을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 자녀들에게 줄 수가 없다면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준 부모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이 라이언 화이트 소년은 영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가진 사람답게 그의 삶이 당당하고 거룩했습니다. 밝은 삶을 살았으며 이웃에게 친절했습니다.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며 살았던 이 소년의 당당하고 놀라운 삶의 비밀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동일한 영원한 삶의 결과를 기대하는 저와 여러분이라면 오늘 주님을 믿고 섬기고 그에게 순종할 수 있음이 얼마나 기쁨이고 감격인지요?

 

롬 7:1-13 / 어떤 여인의 경험

 

 

어떤 C 라는 여인이 L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L이라는 남자 분은 일종의 완전주의자로서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이 C 여인은 이런 남편이 존경스러웠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남편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가정생활에도 철저한 규칙을 제정하여 시행했습니다. 규칙을 깨뜨린 식구들에게는 엄격한 법칙을 적용했습니다. 아내는 잘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실수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점차 모든 면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마침내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과부로 홀로 됨이 충격이었지만 솔직히 자신의 내면에서는 어떤 해방감마저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몇년 후에 직장 친구의 소개로 J라는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J라는 남자분은 사고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분이었습니다. 이런 경험 탓인지 그는 매사에 이해심이 많고 동정심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아내가 실수할 때에도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늘 따듯한 위로를 베풀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이 여인은 점차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규칙이 없어도 그녀의 새 가정에는 따듯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고 한없는 애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새로운 활기로 가득 찼고 그녀는 매우 의욕적인 미래를 계획하고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바로 본문의 말씀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이 C라는 여인은 바로 크리스챤의 상징이고 J라는 새 남편은 Jesus(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분을 인생의 새로운 주인으로 남편으로 섬기기 전에 우리는 모두 율법을 섬기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L이라는 사람은 바로 율법(Law)의 약자를 상징합니다.

 

교회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안든 간에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규범은 율법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함께 율법에 매인 바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유대인들의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로마서2장에 보시면 바울사도는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양심이 율법이 되어 ‘하라, 하지말라’ 라고 우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양심의 목소리는 율법의 기능과 본질적으로 유사합니다. 우리는 다 율법이라는 규범에 의해서 살지만 우리의 딜레마는 율법이 하라는 것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은 더해지고 우리는 양심의 명령, 도덕의 명령을 따라 살지 못하는 자신의 범죄한 삶의 모습을 볼 때마다 삶에 있어서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우리가 어느 날 예수라는 새로운 남편을 만납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율법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율법이라는 남편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율법 그 자체의 기능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메세지를 계속해서 던져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 그 자체를 통해서 우리가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율법의 기능 그 자체는 현존하는 것이기에 4절에서 이런 설명을 부연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 말씀처럼 옛 남편과의 관계가 남편이 죽으면 청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상징하기 위해서 동원된 남편이 죽었다고 설명을 했지만 율법 그 자체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4절에서 바울사도는 율법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임을 당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는 예수라는 새로운 삶의 원리를 가지고 살게 되었기 때문에 율법과의 관계는 죽음을 통해서 청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을 살아가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산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을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도덕과 신앙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혹은 흔히 말하는 종교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명제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첫째로 삶의 동기가 다릅니다.

 

우리가 율법을, 도덕을 혹은 양심을 삶의 주인으로 알고 살아갈 때 그 삶의 동기가 있다면 그 동기는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육신적 동기’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라고 육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8장에도 계속 육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먼저 육신이라는 말은 육체가 아닙니다. 육신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크리스챤이 되기 전에, 거듭나기 전의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이기심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변화되지 않는 타락한 본성을 가리키며 성경은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육신의 특징이 있다면 한마디로 계속해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도덕적 열망이 있습니다. 양심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깊은 동기를 살펴보면 자기 과시용이며 자신이 의롭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하고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에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6절은 5절과 대조를 이룹니다. 6절은 “이제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원문에는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시작되지만 여기서 “그러나”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6절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에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보통 자연인의 삶의 동기는 양심에 따라서, 혹은 도덕에 따라 산다고 말한다면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동기는 성령에 의해 산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을 때 주의 영이 내 삶 안에 임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그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을 한마디로 말할 수가 있다면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높이고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삶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주의 영이 그 마음 속에 거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시작하면 그 속에 삶에 대한 새로운 동기가 생기는데 그 동기가 바로 예수님을 나타내고 싶어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 크리스챤들도 도덕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과시용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 오신 예수님을 높이고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같은 율법을 행하지만 율법을 행하는 마음 속의 동기가 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라는 이 새로운 삶의 동기가 오늘 여러분을 지배하고 계신지요?

 

두번째로 삶의 욕구가 다릅니다.

 

우리가 율법을 주인으로 하고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욕구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죄악의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을 맺게 하였더니”

 

 

이미 말씀드렸듯이 율법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율법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해가 없도록 바울사도는 로마서 7장 12절의 말씀에서 율법의 본질을 규명해 놓았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여기서 율법의 본질을 세가지로 규명하면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의로운 것이며 선한 것입니다. 율법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우리인 것입니다. 거룩하며 의롭고 선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의 연약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바울사도는 8장에서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8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서 보시면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연약성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본성 때문에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의 고민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추한 곳으로 달려갑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의롭게 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는 의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불의로 달려갑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선한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선한 메세지를 들으면서 우리의 발은 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고민과 좌절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는 두 가지의 명령으로 요약될 수가 있는데 특히 “하지 말라”는 명령, 예를 들어서 “더럽게 살지 말라”는 메세지를 들으면 우리는 더럽게 살고 싶어하는 본능이 일어납니다. “불의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 불의를 실험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그 악을 알고 싶고 그 악에 참여하고 싶은 호기심을 느낍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육신이요, 본성이며 여기에 인간의 도덕적인 교육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도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도덕은 우리가 가야할 길은 제시하지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은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서 정죄받고 절망했던 우리들이 어느 날 삶의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만납니다. 그때 우리 안에는 새로운 삶의 욕구가 생기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5절에 보시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역사했지만, 이상하게 율법의 메세지를 들으면서 우리는 죄악의 정욕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새로운 열망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욕구는 사랑의 욕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욕구가 생깁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이미 로마서 5장의 첫머리 부분부터 강조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5절)고 말씀하고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었던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랑을 알았습니다. 가장 비이기적이고 가장 비타산적인 조건없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십자가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사랑을 부어주신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삶의 욕구인 것입니다. 그 주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하고 노력하다 보니까 옛날 율법이 요구했던 그 삶을 우리가 성취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율법만 보면서 율법대로 살아가려 할 때에는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깨뜨리는 삶을 살았지만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선해지는 결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진리를 바울사도는 8장 4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육신을 좇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육신은 아직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동기를 가지고 이제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좆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보여 주시는 주님을 나도 보고 그 주님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그 영을 좋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붙들고만 있을 때는 되지 않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까 내 삶이 저절로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선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동시에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함을 통해서 율법을 성취하는 놀라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 얽매인 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무율법주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그 도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를 사랑하기 시작하게 되자 내 삶이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량 청소년인 한 학생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모가 별별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다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가정에서는 부모가 노력을 다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불량 학생이 한 좋은 여학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불량 학생이 좋은 여학생을 만나서 사귀고 사랑에 빠지게 되자 마자 그는 누가 잔소리를 하지 않았는데도 머리를 깎고 옷을 단정히 입기 시작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변한 것입니다.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비슷한 예를 어떤 잡지를 읽다가 발견했는데 화란에서 엘리나라는 78세 된 할머니가 있었는데 이 할머니의 평생 소원이 담배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50년간 담배끊는 크리닉에도 가보고 별별 노력을 다했는데도 담배를 못 끊고 어느새 78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엘리나 할머니가 79세 된 제이슨이라는 노인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제이슨이라는 노인이 말하기를 “내가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데 한가지 때문에 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그 이유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데 같이 살 생각을 하니 한심하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그래요? 그러면 내가 끊지요”라고 하고 그 순간으로 담배를 끊었답니다. 50년간의 딜레마가 한 순간에 극복되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기사의 마지막 줄에 “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사랑의 힘은 의지의 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멋지게 기술해 놓았습니다. 자기의 의지의 힘으로 끊어야지 하고 노력할 수록 더 유혹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시작하자 그 사랑은 순식간에 그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의 비밀은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라 사랑의 변화입니다. 바울사도는 8장에서 이 사랑이라는 엄청난 주제를 밀고 나갑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8:35)라고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후서 5장 13절 이하에서는 자신의 삶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러분, 저는 미쳐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미쳐 있습니다. 내가 미쳤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삶은 어차피 다 미쳐 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무언가에 다 미쳐 있습니다. 골프에 미치든 주색잡기에 미치든 무엇인가에 다 미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변화시켜 주신 놀라운 구세주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행복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시작한 후부터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 삶은 변화됩니다. 그리고 내 삷은 도덕을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여기 우리의 삶에 새로운 욕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욕구입니다.

 

세번째로 삶의 열매가 다릅니다.

 

육신에 있을 때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죄의 정욕이었습니다. 그 정욕은 5절에서 보시면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4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전에는 단순히 도덕적인 삶이 내 삶의 규범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남편에게로 시집을 가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전에 사탄을 위하여 열매를 맺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전에 육신의 열매를 맺던 우리가 이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극적인 삶의 대조를 보십시오. 당신은 아직도 타락한 육신의 본성을 좇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고 있습니까? 오,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을 좇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 맺어지는 그 놀라운 열매, 그 풍성함의 열매를 아시는지요?

 

바로 이 부분을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다같이 5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룰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무엇을 안하겠다고 결심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그가 나를 감화하실 때 주님 기뻐하시는 일만 해 보세요. 그러나 아직도 육체를 따라 살면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이 19-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이런 것들이 사망의 열매입니다. 처음에는 비슷하게 출발하고 인간은 모두 다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깊은 곳에서는 그의 삶이 맺어가고 있는 열매는 사실은 이런 냄새나는 사망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좇아갈 때는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요? 22-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열매라는 단어가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열매는 한 열매의 9가지 측면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9가지의 인격적 특성들은 결국 한 인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스럽고, 정말 희락으로 충만한 분, 정말 화평으로 충만한 분, 정말 오래 참으셨던 분, 이 대표적인 인격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에 사로잡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의 보여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살면 주님을 닮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 삶의 마지막에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는 그 주님을 닮아 내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세워지는 황홀한 감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는 달라지지 않고 변화되지 않습니까? 바르고 의롭게 선하게 살기를 원하는 열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의하고 악하고 더 더럽혀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우리의 도덕적 결심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어떤 여인의 경험처럼 주님을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동기와 욕구가 새로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롬 7:14-25 / 전쟁과 승리

 

 

중국의 철학자 가운데 왕양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살고 있었던 시대에는 특별히 도둑이 들끓고 전쟁이 끊임없던 시대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제자가 자기의 스승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이 도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그 때에 왕양명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느니라”. 제자가 “선생님, 무슨 문제입니까?”라고 묻자, “내 마음의 도둑을 먼저 잡아야 하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한 때는 전쟁이 한참일 때 그 제자가 나아와서 묻기를,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그 때 왕양명이 대답하기를,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느니라”고 하자 그 제자가 “선생님, 무슨 문제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가 인간의 내면의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C.S. Lewis(시 에스 루이스)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구도의 정신을 상실한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진지한 구도자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서 한번 승리해 보겠다는 그런 거룩한 전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교회는 전의를 상실한 군인들로 꽉 찬 모습과 같다’고 지적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군인들이 너무 기압이 빠졌다고 생각한 나머지 어떤 지휘관이 자기의 병사들을 집합시켜 놓고 말하기를 “우리가 북쭉과 싸울 떄 공군력은 확실히 우세하다. 그러나 육군이 문제다. 당신들은 북한에 있는 적병을 한 사람 맞았을 때 그 한 사람을 과연 책임질 수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한 병사가 손을 번쩍 들어 말하기를 “저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옆의 사람이 손을 번쩍 들어서 하는 말이 “저는 그대신 집에 가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이런 군인들의 전의의 상실보다도 더 큰 비극이 있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있어서는 무관심하다는 사실입니다. 더러는 관심을 갖지만 그 싸움의 준비가 불철저하다는 비극입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을 보시면 히브리서 기자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이런 개탄을 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전쟁터를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잘 알려진 귀절들이 있습니다. 18절,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

 

이것이 우리의 갈등이 아닌가요? 본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아마도 24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 바울사도를 통해서 들려오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뇌와 갈등의 신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어쩌면 이 처절성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오늘 본문을 주해하면서 본문에 나타난 경험을 대표하고 있는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주경학자들은 중생하기 이전의 구도자들의 모습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주경학자들은 이것은 중생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며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경험은 우리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처음에 본문을 주해하면서 본문에 나타난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할 수 없는 나”-이 안타까운 자기 자신의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생하기 이전의 모습이라는 입장을 갖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 입장을 바꿔서 이것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투쟁의 장이다라고 그 결론을 바꿉니다. 그는 좀 더 성경말씀을 연구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의 경험과 연륜이 더해 가고 자기의 깊은 내면을 직면하면서 그는 마침내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중생한 이후에 그들의 내면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전쟁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이 결론에 동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크리스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터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싸움에서의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 알아야 할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율법의 기능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부도덕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도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을 어디서 찾냐면 도덕을 가르치고 율법을 가르치자는 방법을 시도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독교의 교회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합니까? 우리가 단순히 올바로 살자라는 도덕적인 강조만으로 혹은 율법의 강조만으로 사회나 개인이 새롭게 개혁된 사례가 역사속에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한 사회가 깨끗해지고 개인이 새로워지는 그런 역사는 도덕을 강조하거나 율법을 강조할 때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하기 시작했을 때, 도덕을 강조하지 않아도 그들의 삶이 새로워지는 그런 부흥이 개인과 사회속에 일어났던 사례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강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율법만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율법의 기능에 대한 무지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을까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 바로 로마서 7장 7절부터 13절까지에 나와 있습니다. 그 대답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7장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 말씀은 율법이 우리를 거륵하게 하지 못한다면 율법이 죄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율법이 주어졌습니까? 사도는 대답하기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율법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가장 민감한 이런 계명을 사례로 듭니다. 우리가 1계명, 2계명 할 때는 “하나님 저는 우상숭배한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율법을 지켰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율법 가운데 “탐내지 말라”는 계명 앞에 나는 무죄하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성경은 말하기를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내가 탐냈을 때 그것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우리가 운전하고 다닐 때 노란 중앙선이 침범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교통법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중앙선을 침범하고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법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중앙선을 넘었을 때는 “잘못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좀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 법규, 계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못박아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가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처럼 율법의 기능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율법을 경험하면, 진정으로 율법을 대하게 되면 “나는 죽었다”고 복창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거짓되게 경험하게 되면 자기의 프라이드만 살찌우게 됩니다. 자기가 이렇게 도덕적으로 사는 굉장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요구하는 거룩함의 요구가 어떤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참으로 깨닫게 되면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한 나,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나를 보게되고 “하나님, 저는 살 길이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을 7장 9절에서 아주 실감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하나님의 율법앞에 섰을 때 꼼작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 발견이야말로 위대한 발견입니다. 이것이 승리의 첫번째 스텝입니다. 이 발견후에야 “하나님, 저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가 있을까요?”라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그 때에야 하나님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를 준비하셨는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십자가로 달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바로 율법의 문제를 다루면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깨우치시는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일차적 기능은 구원의 기능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여기에 율법의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우쳐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필요성을 자각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내면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첫번째 가장 중요한 스텝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내면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자아의 본성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율법의 기능을 참으로 체험하게 되면 동시에 일어나는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기 육신의 연약성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14절에 보시면,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절에는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을 향한, 선한 것을 향한 소원함은 내게 있습니다. 이 소원함은 주님이 내게 주신 새생명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내게 새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고,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새생명을 압도하는 거대한 육신의 힘이 있습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부패성의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죄악의 힘, 혹은 본문에서 죄악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굴레 씌우고, 나를 구속하고, 나를 지배하는 죄악의 법이 아직도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죄의 법이 내 마음속에 새롭게 들어온 하나님의 법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크리스챤으로 산다는 것은 자연인보다도 더 심각하고 더 본질적인 존재의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양심의 갈등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오신 후 죄 때문에 겪는 갈등은 양심의 갈등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의 타락한 양심은 어느 정도 자기의 죄를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성령은 절대로 죄를 합리화하지 않습니다. 그 죄를 정죄합니다. 양심은 마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마비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죄를 토할 때까지, 포기할 때까지 성령은 내 안에서 탄식하고 신음하며 나로 갈등하게 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갈등인 것입니다. 이 갈등을 겪으면서 바울사도는 중요한 발견을 합니다. 17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어쩔 수 없이 율법을 깨뜨리며 살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거듭난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성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는 밖의 문제가 아닙니다. 때로는 환경을 바꾼다거나 구조를 개선하면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나의 모순, 나의 갈등, 내 속에 일어나고 있는 내면의 전쟁터의 본질적인 원인은 내 속에 거하고 있는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 바울은 이제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즉, 하나님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속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1장부터 5장까지 일련의 중요한 물음을 제시합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바울은 소극적으로 접근하면서 율법을 지키려는 행함으로는 하나님앞에 절대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받을 수가 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칭의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의롭다함을 얻는 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두번째로 부여되는 중요한 과제는 성화의 문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성화의 문제를 추구할 때만은 행함으로 성화를 이룰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몸부림을 해 보고 발버둥을 쳐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몸부림을 할수록 발버둥을 칠수록 더 깊은 수렁속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울은 마침내 발견하면서 내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도무지 없다는 사실을 결론으로 맺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칭의가 불가능했던 것처럼, 성화도 우리의 행함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이 바울의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에 의지해서 어느 정도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의 본성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힘으로 성화를 성취하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갈등이 심화되면서 정점에 달한 고백이 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이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두번째 중요한 스텝은 내 힘으로 성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힘으로 가능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한 나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기능이 율법의 한계를 가르쳤고, 자아의 본성을 알수록 우리는 자기 자아의 한계를 깨닫습니다.

 

세번째, 바울사도는 우리 내면의 전쟁에 있어서 승리하기 위하여 가장 놀라운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아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25절의 놀라운 선언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러분, 만약 25절이 없었다면 로마서 7장은 비극의 장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 7장의 처절한 신음의 고백이 마지막 절에서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은 절대로 패배의식이 아닙니다. 패배를 넘어서는 승리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 내면의 전쟁에서의 진정한 승리의 근거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의 내면의 죄악과의 싸움에서 승리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인 방법은 8장에 나와 있습니다. 다음 주일을 기대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7장에서는 승리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근거는 예수님의 구원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때 이 구원이라는 말은 항상 죄라는 단어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을 더 자세히 분석해서 나누면 우리는 세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나를 죄악의 형벌에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내가 죄때문에 받아야 할 형벌, 지옥가야 할 형벌은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완전히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형벌과 저주의 대상이 아닌것을 믿으시나요? 나는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지 죄악의 형벌의 대상이 아닙니다. 죄악의 형벌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형벌말고 또 하나의 세력이 있습니다. 내가 죄악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죄악의 거대한 세력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재의 싸움, 이것이 바로 성화의 과제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도 8장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고 죄악의 세력과 싸우면서 구원을 받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는 죄라는 존재 자체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입니다. 죄로부터의 최종적인 승리, 궁극적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재림하실 때, 그 때에 나도 부활의 새로운 몸을 얻을 때, 죄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죄와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가 될 줄로 믿으십니까? 여러분, 이것을 궁극적 구원이라고 말하는 데 이 궁극적 구원에 대해서 로마서 8장 18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다음 시간이 기대되지요?

 

그러나 문제는 오늘입니다. 오늘 나는 쓰러지고 넘어지고 좌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좌절과 실패와 갈등의 장에서 벌떡 일어나 내 내면 속에서 빛나고 거룩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고-내가 굉장하다고자신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성령님을 통해서 나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마지막으로, 영광스러운 마지막 승리를 얻을 자 임을 확신하시나요? 그렇다면 오늘의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좌절하거나 실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승리할 자임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미국사람들과의 편지 교환을 할 때 종종 크리스챤들에 있어서 편지의 마지막 마무리에 이렇게 쓴 편지를 보았습니다. “승리편에 서 있는(On the victory side, On the winning side)”라는 표현인데 궁금해서 제가 잘 아는 미국 목사님 한 분에게 왜 그 표현을 많이 쓰는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물어보았더니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 표현을 맨 처음 쓴 사람은 저 유명한 청교도 장군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장군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상황이 매우 불확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분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쓰고 있는 편지에다가 맨 마지막에 쓰기를 “승리편에 서 있는 올리버 크롬웰”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공문서에도, 모든 사신-개인편지에도 이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장군에게서 내려오는 공문서를 읽을 때마다 그 휘하의 참모들과 스텝들은 그들의 상관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음을 느꼈고 그 결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전세는 바뀌었고 이 전쟁에서 그들은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주님의 갈보리의 승리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오늘날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순간의 사건앞에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피흘리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침내 궁극적인 최후의 승리를 가지고 주님앞에 영광스럽게 설 자임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나의 피흘렸음에도, 쓰러졌음에도, 연약함에도, 눈물흘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다시 용납하시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내 손을 잡아주시면서 “너는 승리할 자야. 일어나야 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빛나는 손을 잡고 승리의 저 높은 고지, 최후의 승리를 선포하는 그날을 향해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롬 8:1-17 / 승리를 위하여

 

 

바로 며칠전 자기를 낳고 기른 부모였던 한약상 부부를 칼로 난자하고 불에 태워서 살해한 박한상군의 역기적인 전속살해사건 뉴스로 인해 온 국민적으로 충격과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사건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고백한 경찰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자면 그의 광기어린 행동에는 적어도 두가지의 감정적 의식이 원인이 되었던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가 유학 갔다온 그를 어느 날 불러 놓고 “너를 호적에서 빼 버리겠다”는 그 말을 했을 때의 절망감- 나는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절망감-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정죄의식입니다. 또 하나는 “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놈이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일종의 패배감의 두가지 원인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 절망감과 패배감 때문에 그는 자포자기했고, 이 사건은 그런 자포자기에서 비롯된 엉뚱하고도 엄청난 비극이라고 진단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아침, 정확하게 동일하고 같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정죄의식과 패배의식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삶의 비극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로마서 7장의 후반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싸움에 대해서 함께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싸움에 지쳐서 넘어집니다. “나는 아무래도 희망이 없는 사람인 모양이야. 이 싸움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나는 승리할 수가 없다”라는 절망감과 패배감, 혹은 정죄의식과 패배의식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면 우리도 영적인 자포자기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극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패배를 예방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다시 승리를 향하여 일어서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승리를 누릴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들을 지배할 수 있는 이런 정죄의식이나 패배의식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주님은 이런 정죄의식과 패배의식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라는 것이며 우리는 결코 이 정죄감이나 패배감의 포로로서 살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가장 정점을 이루는 고백이자, 로마서 8장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37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의 가장 중요한 승리의 선언입니다.

 

한 신학자는 “우리가 성경을 한 보석반지에 비교할 수가 있다면, 성경중에서도 로마서는 그 보석의 부분에 해당될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로마서 8장은 보석중의 가장 빛나는 부분에 해당된다.”고 말했습니다. 승리의 선언, 그러나 이 승리를 위해서 우리는 이 두가지 정죄의식과 패배의식에서 탈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우리를 정죄의식에서 해방하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이야기를 바꿔 말한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의 도상에서 자신을 정죄할 필요도 없고 또 정죄해서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이 정죄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바꾼다면 가장 근사한 단어가 버림을 받는다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8장이 출발하는 이 위대한 1절의 선언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십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결코 정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8장 1절의 선언은 8장의 후반부에 가서 가장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는데 그 정점에 가서는 이런 선언으로 끝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말씀이 나오고 마지막 38, 39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인생의 도상에서 우리가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범죄할 수가 있습니다.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면 주께서 나를 버리신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의 사랑의 대상이 된 그의 자녀들을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속에서도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것-바로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러고도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포기하라 어차피 승리는 틀렸다.”고 우리의 양심도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선언을 들어보세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진 하나님의 자녀를 주님은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고 본문은 선언합니다.

 

탕자가 돌아올 수 있었던 원인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받아 주신다. 내가 타락했지만, 내가 방황하고 있지만, 내 삶의 처지가 말이 아니고 내 아버지를 실망시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를 다시 받아 주시고 나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라는 기대가 없었다면 이 탕자는 돌아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탕자가 방탕한 삶을 먼 나라에 가서 살면서 그의 타락의 극치가 어떤 자리까지 도달했습니까? 그는 마침내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먹이인 쥐엄열매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탕자와 돼지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탕자에게는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돌아올 수가 있는 아버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탕자와 돼지가 본질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넘어질 수가 있어요. 범죄할 수가 있어요.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삶에 있어서 최악의 절망감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정죄의식의 포로가 될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2절에 보시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을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왜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했을까요? 지금까지 우리가 율법의 기능을 강조할 때 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라 하지말라 이런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한 나와 하지말라 한 것을 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망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했다”는 말씀을 잘못 읽어서 어떤 특정적인 신앙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해방되었고, 그래서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게 되면 우리의 거룩한 삶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강조되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바울사도가 강조했던 전체를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이 되었을 때 일어난 놀라운 사건, 이것은 이미 해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회적으로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율법아래 있던 내가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에서 살도록 우리의 삶의 자리가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로마서 6장 14절에서 바울사도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면 율법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중의 하나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집 자식들이 부모의 법 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아래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법 아래 살고 있다면, 잘못했을 때 법대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다행히 부모의 은혜 아래 또는 사랑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끊임없는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일어나는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여기서는 은혜라는 단어 대신에 생명의 성령이라고 씌여졌습니다. 이 생명의 성령의 삶의 원리가 너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게 되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고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말의 뜻은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뜻일까요?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고 따라서 율법의 저주나 정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만 이제 우리를 지배하는 삶의 원리는 성령의 인도에 의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게 되면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게 됩니다. 율법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지 않아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게 되면 율법이 이렇게 살라는 삶의 기준을 오히려 성취하는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4절에 나와 있습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우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8장의 하반부에서 바울사도가 다루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미리 맛보기 위해서 8장 26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율법 아래 살고 있다면 율법을 깨뜨렸을 때 그 율법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할 때, 타락할 그 때에 성령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된 삶을 살 때, 우리가 넘어지고 타락할 때 성령은 우리를 정죄하는 대신에 탄식하시고 탄식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돕는다는 단어가 본래 희랍어에서는 매우 재미있는 경우에 많이 씌여지는 단어입니다. 어떤 경우인가하면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들이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집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다시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서 돕게 됩니다. 여러분 부모님들 가운데 정상적인 부모님이시라면, 여러분의 어린 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울 때 넘어지면 어떻게 하십니까? 제가 정상적인 부모를 강조하는 것은 요즈음 비정상적인 부모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이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진다면 정죄하는 대신에 “괜찮아. 다시 일어나 걸을 수가 있어. 일어나 다시 걸으라”고 도울 것입니다.

 

이제 스스로 걸음마를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연령과 시점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어나지 못한다면 부모는 탄식하며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하고 살다가 잘 되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지만, 양심도 우리를 정죄하고, 친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있지만 성령님만은 우리를 탄식하며 돕습니다. “다시 일어나야 해”하고 우리가 다시 일어나 재기하고 승리를 향하여 걷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죄의식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죄의식의 포로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삶을 위해서는 이런 정죄의식 뿐만 아니라 패배의식에서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래도 희망이 없다, 미래가 없다는 이 절망감, 또 하나 우리의 삶을 깊은 패배의 늪속으로 침몰시키는 의식중의 하나는 “나는 또 시도해도 넘어질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패배를 당연한 삶의 양식으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패배가 내 삶의 모습이 되고 결국에 가서는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이 자포자기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패배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며, 패배해서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를 몇가지로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세가지를 제시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사고)을 주시기 때문이며, 새로운 행동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에, 또한 새로운 신분을 주시고 그 신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보장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패배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첫째로, 새로운 생각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본문에 의하면 육신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부패성이 요구하는대로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의 초점은 끊임없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거듭났을 때 내 안에 찾아오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중의 하나는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사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생각입니다. 6절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육신대로 생각하며 살면 그 결과는 사망이고, 그러나 성령님이 내게 주신 생각대로 소원대로 살면 두가지 결과가 있는데 그것이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속에서 생각자체를 바꾸어 주십니다. 여러분, 인간의 변화는 내적으로 옵니다. 오늘의 부모들이 자녀를 교육시킬 때도 보면 어떤 부모님들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서도, 자녀를 교육할 때 있어서만은 매우 율법적으로 교육시키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 이것 해라. 하지 말라”는 것이 자녀교육의 패턴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하라고 하면 더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합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하라는 것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 하면 부모들은 자녀를 비난합니다. 그러면 비난을 받는 자녀들은 부모를 비난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비난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자녀교육을 못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비교적 건강하게 자녀교육을 하는 부모들을 보면 그들은 율법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먼저 동기를 부여합니다. 동기를 부여한다는 말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안으로 부터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동기부여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술중의 두가지는 칭찬과 격려입니다. 칭찬과 격려를 하면 신바람이 나서 합니다. 남편에게도, “오늘 또 늦었어요. 차라리 나가세요”하면 “그래 나간다”하고 나옵니다. 그 대신 “참 늦게 오셨네요. 오늘 너무 피곤하셨던 모양예요. 푹 주무세요”라고 하면 “아내가 나를 이해하는구나”하고 좋아합니다.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밤낮 놀기만 하고 공부도 못한다”고 혼내는 것보다 “야, 너 가만히 보니까 운동이 굉장히 소질이 있구나. 그 잘하는 운동에다가 공부도 잘하면 좋겠지”라고 칭찬을 해 주면 격려를 받아서 더 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칭찬과 격려에 너무나 인색합니다. 잘되는 가정들을 보세요.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부모는 자식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또한 교회를 보세요. 목사는 강대상에 올라가면 교인들을 패고, 교인들은 목사를 비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을 봅니다. 격려하고 칭찬하고 동기부여가 되면 사람들이 신바람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서 하라 하지말라 하는 율법적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생각을 불러 일으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울사도는 빌립보서에서는 다른 말로 표현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인데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대한 소원(생각)만 주실 뿐 아니라 또한 행하게 하십니다. 크리스챤 생활을 단순하게 말한다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소원에 대해서는 No(아니라)라고 하고, 그러나 내 안에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생각에 대해서는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 우리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 새로운 생각을 우리 안에 두시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행실을 가능케 하십니다.

 

여러분, 인간의 삶에 있을 수 있는 최대의 기적이 있다면 부활입니다. 인간 최후의 절망은 사망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 부활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인간 최후의 절망인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의 힘,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성령님이 오늘 본문에 보시면 너희 안에 거하시고 계시다고 합니다. 본문의 11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부활의 영인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고 그 성령님이 너희들의 부활을 보증한다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13절에 보시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에서 어떻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가 있을까요? 바울은 이미 단순하게 대답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님의 생각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육신의 생각-부패하고, 너저분하고, 우리를 좌절하고 타락시키는 생각을 향해서는 좇아 하지 마세요.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대로 살면 그 순간 몸의 행실이 죽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는 부활의 삶을 삽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그분이 기대하시는 생명의 삶, 창조의 삶, 그리고 평화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불화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평안케 하십니다. 이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살 때에 우리의 육체의 행실이 죽을 것이고 부활의 삶이 가능한 것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패배할 필요가 없는 이유, 주께서 새로운 생각을 주시고 새로운 행실을 가능케 하시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분에 따른 특권을 보장하셨습니다. 그 신분이 바로 양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양자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양자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령이 오신 다음에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이제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양자란 말이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못하지만 이 성경이 씌여지던 그 당시의 로마의 문화권에서 양자는 매우 높은 수준의 특권으로 간주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로마사람들은 양자를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가 있는데 자식을 낳을 때는 생각도 안하고 그냥 낳지만 양자를 삼을 때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자기의 선택의 의지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잘 골라서 생각하고 그를 자기의 양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 문화권에서는 자기가 낳은 자녀와 조금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낳은 자녀보다 더 귀하게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양자를 삼게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가정교사를 부쳐 줍니다. 아주 우수한 가정교사를 통해 그의 부모가 어떤 분인가를 잘 소개해 주고 그리고 부모가 원하는 교육을 충실하게 시킵니다. 그리고 교육이 끝나가게 될 부분에 그 가정교사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대를 위해서 그대에게 양부모가 된 분들은 놀라운 상속을 준비해 놓았다”고 격려해 줍니다.

 

성령님의 하시는 일도 똑 같습니다.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부르게 하십니다. 여기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른다고 했습니다. ‘아바’라는 말은 원래 아람어입니다. 그 다음의 아버지란 단어는 희랍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아람어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중한 표현이 없습니다. 우리 말의 아빠란 말과 똑 같습니다. 여러분, 본래 유대인들이나 유대인의 전통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조차 황송하게 생각해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정 불러야 할 때는 ‘아도나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서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쳤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셨다면 그 아람어에서는 아버지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아람어를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은 그 일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계속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의 가정교사와 같은 역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의 가정교사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새로운 가정교사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시는 대신에 그분이 우리의 사랑하는 아빠이시고, 그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에서 이 빛나는 약속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님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삶을 날마다 살 수가 있다는 놀라운 특권, 뿐만 아니라 가정교사의 교육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너의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 이런 놀라운 재산을 준비하셨고 너는 그 상속자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이것이 17절의 말씀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넘어지는 순간도 있고 쓰러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어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패배자로 이 땅에서 끝날 사람이 아니야. 인생의 마지막 걸음 저 건너편에 너를 위해서 빛나는 천국과 영원의 기업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상속자란 말이야.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너를 위해 준비하신 이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그 영원한 곳의 상속자가 돼야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빛나는 영광의 상속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잠시 우리를 지치게 하고 쓰러지게 한다고 할찌라도 우리가 넘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부산의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홀어머니로서 행랑을 하시고 콩나물 장사를 하시면서 자식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이 어머니께선 무척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자식들이 다 성공하고 장성했는데도 자식들과 같이 사시지 않고 혼자 자그마한 오두막집에서 사셨습니다. 자식들이 너무 미안하고 황송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어머니, 이제는 아파트로 이사가시지요. 아니면 단독주택으로 옮겨 가시게 해 드릴께요.”라고 하며 하도 졸라대자 어느 날 이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정 원하니까 나를 위해 집을 지어라. 내가 원하시는 집은 바닥이 반드시 유리로 지어야 하느니라. 유리뿐만 아니라 기둥을 꼭 12개를 세워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 기둥의 밑바닥은 반드시 보석을 박아야 하는데 그 보석의 색깔이 다 달라야 한단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집은 문을 12개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자 자식들은 “어머니, 농담하시지 마세요. 그런 집이 어디있어요?”하자, “없으면 그만 두게. 나는 그 집을 하늘나라에 갖고 있으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의 당당한 삶, 그분의 소박한 삶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식들을 기대지 않고 당당하게 사셨던 그 삶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저 빛나고 영광스러운 상속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소망이 있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때때로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를 왜소하게 한다 할지라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 신분에 따른 보장이 있고, 새로운 생각속에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지원이 함께 하신다면 왜 실망하십니까? 왜 넘어지십니까? 우리는 패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며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사람인 것을 오늘 주님 앞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롬 8:18-30 / 탄식에서 영광으로

 

 

세계 제2차 대전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연합군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중요한 두 날이 있었습니다. 한 날은 1944년 연합군이 독일군을 패배시키기 위해 노르만디의 해안을 상륙하던 날이었습니다 이 날 연합군은 결정적 승리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 날을 가리켜서 연합군은 D-Day(Decision Day:결정의 날)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날이 전쟁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연합군은 이날부터 독일군의 가장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연합군은 독일군의 수도인 베를린을 점령하고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그 베를린을 함락시키던 그 날이 바로 결정적 승리가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날을 가리켜 연합군은 V-Day(Victory Day:승리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신학자들은 흔히 이 두 개의 중요한 날인 노르만디 상륙의 날인 D-Day와, 베를린 함락의 날인 V-Day를 예수님의 초림과 예수님의 재림이란 두 개의 중요한 사건에 비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던 그 순간, 예수님 초림의 절정의 순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경험하고 여러분과 저의 신앙의 결정적 승리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우리들의 신앙의 D-day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격렬한 사탄의 저항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 이 싸움이 끝날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 사탄은 완전히 패배하고 우리는 영원한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을 가리켜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V-Day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오늘이라는 이 순간은 소위 D-day와 V-Day의 그 사이의 시간,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그 사이에서 살고 있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고, 죄사함을 경험하고, 기쁨을 경험하고, 평화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싸움을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패배를 경험하기도 하며, 때로는 심각한 고난을 경험합니다. 이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우리 내부에서의 깊은 신음과 탄식을 가능케 할 수도 있습니다

 

. 오늘 본문에는 소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세 가지의 탄식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탄식이 변하여 어떻게 영광스런운 영광으로 변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분문이 시작하는 18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개의 단어는 “고난”과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절부터 보시면 이 “고난”이라는 단어 대신에 이 고난이 우리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낳는 세 가지의 탄식을 계속적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첫번째 탄식을 성경은 ‘피조물의 탄식’ 혹은 ‘자연의 탄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의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성경은 피조물이 혹은 자연이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피상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자연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합니다. 자연의 내면을, 피조물의 깊은 내면을 성찰해 보십시오. 자연은 탄식과 신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타락과 범죄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인간에게 절망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부패시키고 온 피조물에게 고통과 탄식을 가져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피조물의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 가운데 20절 이하에 보면 “허무, 썩음, 종노릇, 고통”등의 단어가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 유명한 일본의 종교인이었던 내초(우찌무라 간조)선생은 로마서 8장을 강의하면서 이런 자연의 탄식을 탁월한 언어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쓴 로마서 연구의 8장 강해에 보시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은 천연의 미,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하지만 그 미는 겨우 표면으로 그친다. 이면으로 들어가면 자연은 미가 아니라 추이다 조화가 아니라 혼란이다.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다. 여름의 야산에 백화가 피기를 다투는 양상은 아름답지만 촌충과 벌레가 끼는 모습은 얼마나 살벌하고 패괴인가? 시인의 마음은 이것을 보면 공포에 떨고 찬미의 노래는 끊겨 버리리라. 뱀은 개구리를 잡아 삼키려 하고, 개구리는 벌레를 잡아 먹으려 하며 벌레는 서로를 죽이려 하지 않는가? 뱀을 노리는 독수리가 있고 독수리를 노리는 다른 새가 있다. 꾀꼬리의 소리가 아름답다고 해도 뱀은 그 둥지에 침입하여 알을 삼키려 하고 메는 그 새끼와 어미 새를 옅보며 둥지 속의 단란을 깨뜨리고 있지 아니한가? 여름의 숲은 결코 에덴의 동산은 아니다. 수중에서도 마찬가지다. 연못에 몇 마리의 기성장어가 있으면 다른 어류들은 복부에 구멍이 뚫리고 피를 빨리우고 쓰러져 그 자취를 끊기에 이르른다. 그들이 삶을 두려워함은 아주 심각하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희롱하는 모습, 족제비가 닭을 습격하는 모습은 무정하기 그지없고 잔인하기 짝이 없다. 꽃피는 벚꽃은 아름답지만 그 새 잎을 갉아먹는 벌레는 보기마저 소름끼치고, 솔을 먹는 청 귀뚜라미며, 벼를 말라 죽게 하는 비류는 이루 다 셀 수 없다. 실로 귀를 땅에 대고 들어보라. 자연의 신음고리가 들리지 아니하는가? 가로되 나는 아프다. 나는 고통스럽다. 인자여, 나를 빨리 구원하라. 너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탁월한 묘사인가요? 오늘 본문은 이 피조물들이 그들의 진정한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일까요? 본문의 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 즉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회복된 모습으로 우리가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자연도 기다리고 있는다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 날에 피조물도 가장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연은 그 회복된 영광을 가지고 인간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자연은 지금 저와 여러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자연은 불완전하게 부분적으로 그 아름다움과 축복과 혜택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있을 뿐입니다. 자연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가 청산되고 완전한 상태에서 미의 회복, 축복의 회복, 그 영광의 열매를 먹고사는 그 날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나 그 때까지 자연은 그 탄식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 속에서 그 날의 회복을, 주님 다시 오실 때의 피조물의 완성의 그 날을 기다립니다. 여기에 피조물의 탄식이 있습니다.

 

둘째로, 본문은 성도의 탄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리라.” 여기서 우리란 성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즉 성도들까지도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열매란 단어는 원문에 보시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많은 축복들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고, 기쁨을 누리며, 죄사함의 평안이 우리 마음 속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구원, 기쁨, 평안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 오자 누리기 시작하는 일종의 열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것은 장차 먼 훗날 나중에 경험하게 될 성도들의 위대한 축복의 한 서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창세기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종이 자기 주인의 아들인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주인의 고향을 향해서 여행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드디어 자기 주인의 아들의 신부감인 리브가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자기가 예비한 선물들을 안겨주기 시작합니다. 금반지, 손목거리, 귀거리, 팔거리들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의 주인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며 그가 함께 살게 될 신랑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를 설명합니다. 그가 받기 시작한 선물은 그가 장차 받을 축복의 서곡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가나안의 정탐군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가 어떤 곳인가를 정찰한 후에 돌아와서 자기들이 가져온 열매들 - 포도나무 열매, 귤, 무화과나무 열매들은 백성들에게 맛보게 합니다. 그 열매를 맛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가서 맛볼 그 아름답고 풍성한 땅의 광경을 상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미리 맛보는 것을 전채(Appetizer)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오자마자 천국에 가서 누릴 그 영광스러운 축복을 미리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구원, 기쁨, 평안들은 Apptizer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Apptizer를 맛보면서 주님이 나를 얼마나 더 축복하실까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진행되면서 기대했던 축복보다는 우리의 삶에 고난이 경험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놀라운 축복을 예정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구원의 첫번째 축복들을 맛본후에 우리의 삶의 장에서 고난 앞에 직면시키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본문의 30절을 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 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절). 하나님이 우리를 작정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녀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셨습니다. 이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 약속은 마지막에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구원교리의 가장 마지막 절정이 바로 영화(Glorification)의 교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롭게 되기까지의 그 과정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 답변은 29절에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29절). 하나님이 우리를 작정하시고 부르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 받도록 바로 우리들의 인격의 성숙과 우리의 삶의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의 삶 속에 고난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영화로움을 작정 받고도 이땅에서 피할 수 없는 고난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성도들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난의 이유는 우리의 영혼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의 구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뿐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절).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영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아직도 시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본능적인 욕망의 제한을 받아서 굶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음하고 탄식합니다. 때때로 긴 고난의 밤중이 계속될때, 우리는 그 고난의 건너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다보지 못한 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질문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고통과 고난을 받는데 주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이 시편을 읽어보시면 종종 시편기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을 말할 때 "숨어계신 하나님(Hidden God)"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이 숨어 계시다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영국의 유명한 여류 크리스챤 문학가 한 사람이 “숨어계신 하나님(Hidden God)"이란 제목으로 수필을 썼습니다. 그분은 수필 가운데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어떻게 숨여계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었는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자기의 조그마한 아기를 아기 침대에 뉘어놓고 잠을 재운 후에 불을 끄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울기 시작합니다. 당장 좇아가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 아기가 자립하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엄마는 참습니다. 울음소리는 점점 더 켜져 갔습니다. 엄마는 같이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립니다. 엄마는 이렇게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아가야, 나는 너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단다. 엄마는 너를 도울 수가 있단다. 그러나 너는 이 울음을 이기고 혼자 그 방에서 자는 것을 배워야 해.” 이 독백을 하는 중에 그녀는 순식간에 그가 질문했던 시편 속에 나타난 숨어계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삶이 곤고할 때 이 숨어계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얼마든지 우리를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때때로 그분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 우리 곁에 숨어계신 모습으로 탄식하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신음과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탄식이 있습니다.

 

세번째로 성령의 탄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성령께서 왜 탄식하십니까? 성령님은 자신의 문제로 말미암아 탄식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는 피조물을 바라보며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이 오히려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싸움과 그리고 살육의 경쟁속에 빠져있는 이 슬프고 괴로운 피조물을 바라보시면서 성령님은 탄식하십니다. 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고 고통속에 신음하고 탄식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성령님은 탄식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 속에 빠져서 비틀거리고 방황하고 절망하고 탄식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성령님이 함께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탄식은 절망적인 비탄만은 아닙니다. 성령은 이 탄식을 통해서 우리를 돕고자 하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26절에 보시면,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성령님은 우리를 두가지로 도우십니다.

 

첫째로 우리를 위해서 성령께서 기도하십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의 고난의 한밤 중에, 내 삶이 흔들리고 있는 들판에서 기도하려고 할 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조차 몰라서 방황했던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때때로 무엇을 빌바 조차도 알지 못하는 방황이 성도들의 삶 속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이런 생각해 보셨는지요? 만약 우리가 소원하는 대로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주님이 다 응답하신다고 하십시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꼭 축복되 결과만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경우 우리들의 기도는 단순한 우리들의 욕심일 수가 있습니다. 그 많은 욕심이 성취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절망적이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을까요? 내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내 삶이 하나님의 원하는 모습 그대로 만들어지고, 내 인격이 빚어지고 내 삶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참으로 이루어질까를 아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 밖에 없습니다. 26절을 다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그러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제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내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성령님이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것조차도 모르는 나 자신 때문에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내가 나를 아는 것 이상으로 나를 아시는 하나님, 나의 과거를 아시고 내 현재를 아시고 미래를 아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내게 최선인가를 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진정한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니다. 나의 삶이 나의 비틀거림과, 부정직과 나의 그릇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기까지 버티고 서 있는 이유가 성령님의 기도요, 간구 때문인 것을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성령님이 우리를 돕는 방법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연약해 질 때에 우리 곁에 다가와서 우리의 짐을 덜어 주십시다.

 

제가 여기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님이 두신다고 할 때 그 돕는다는 단어가 어떤 경우에 씌여졌는가를 로마서 8장의 처음 부분을 강해할 때 한 용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단어가 많이 씌여진 하나의 용법은 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쓰러진다고 해서 부모는 그 아기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걸음마, 넌 일어날 수 가 있다”고 결려하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부모의 도움을 말할 때 씌여지는 단어입니다. 성령님도 그렇게 도와주십니다. 또 하나의 이 단어가 씌여진 경우의 예는 한 사람의 무거운 짐을 지고가다가 더 이상 버틸수가 없게 되었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곁에 오더니 그 짐을 같이 들어주고 가는 경우에 씌여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가다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곁에 오더니 그 짐을 같이 들어주고 가는 경우에 씌여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쓰러지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내 곁에 다가오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해 보셨습니까? 요한복음서에 보시면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보혜사란 “부름을 받아 내 곁에 와서 서 계신 분”이란 뜻입니다. 내 삶의 위기와 난관 속에서 나를 돕기 위해서 내 곁에 재빨리 다가와 내 짐을 함께 들어주기를 원하시는 성령님! 우리는 때로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 아예 이 짐을 없애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를 돕는 많은 방법 주에 하나는 그 짐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짐을 지고 가면서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내 모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짐을 성령님으로 하여금 같이 들어주시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탄식할 때 어떻게 이 탄식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탄식이 내일의 영광을 가져오게 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스러움을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이 오늘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의 목적을 성취하는 거룩함으로 연결되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영광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하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25절) 성경은 계속 소망을 강조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광, 그러나 오늘의 고난과 비교될 수 없이 주님이 준비하신 그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생각건대”(18절)라는 단어로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단어는 본래 계산해 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삶의 장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장차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하신 그 영광과 비교한다면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을 바라보고 오늘이라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둘째로 그 영광을 예비하시고 오늘 내 삶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2차대전 이후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명절 가운데 최대의 명절이 있다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이 되면 꼭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의 제목은 히브리 말로 “아니마민”이라고 하는데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본래 저 혹독한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작사되고 작곡된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야가 나를 돕기 위해서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유대인들을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 다음 절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메시야는 너무 늦게 오신다.” 자기의 동료들이 비참하게 개스 사형실로 불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이 슬픈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수용소 안에 있던 젊은 외과의사 출신의 한 유대인은 이 노래 부르기를 거절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다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한 그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상황속에서도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믿었고, 오히려 그 삶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한밤중에 일어나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줍게 된 유리 파편 조각 하나로 피를 흘리면서 면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치의 경찰들이 개스실로 불려 갈 사람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의 방에 들어왔다가 이 청년에게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수염이 없는 새파란 청년의 얼굴을 보게 되자 차마 그를 죽음의 개스실로 끌고 가지를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곤 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전쟁이 끝났고 이 청년은 수용소의 얼마되지 않은 생존자의 대열속에 끼여서 수용소를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수용소를 빠져 나오던 날 그는 이 노래를 다음과 같이 고쳐서 불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야가 반드시 나를 찾아와 나를 도우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 믿음을 포기한다.”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오늘 내가 경험하는 그 어떤 고난도 어떤 역경도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내 생애속에 성취하시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 삶을 사용하신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다같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28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내 삶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거룩한 성숙을 성취하고 쓰임받을 만한 생애로 내 삶을 붙잡아 사용하신 후에 주의 거룩한 영광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오늘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믿는다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어두움과 이 자연의 탄식과 환경의 탄식, 내 안에서 일어나는 깊은 신음과 탄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유대인 젊은 외과의사 처럼 노래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마민, 나는 믿습니다. 나의 메시야가 내 삶이 처하고 있는 역경과 어두움 속에서도 도와주실 수가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서두러 이 믿음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이 영광을 맛보지 못합니다. 거룩함의 축복을, 그리고 그 어느 날 그 분 앞에 영광스럽게 세워지는 이 축복을 서둘러 포기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탄식, 성도들의 지금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경험하는 탄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탄식하시며 우리의 거룩한 영광을 성취하도록 일하시는 성령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롬 8:28-39 / 승리의 확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삶의 과제에 있어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하는 결정은 우리가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는 것이 승리와 성공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사사기서에 보시면 기드온의 삼백명 군대와 맞서서 싸우던 미디안의 군대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들의 군대의 숫자나 훈련 상황이나 병기들은 기드온의 군대를 수십배, 수백배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밤 미디안의 군인 한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의 진영으로 굴러들어 옵니다. 그러자 미디안의 군대 진영이 왕창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깬 후에 그 꿈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한 군사가 해석하기를 우리 진영에 굴러 들어온 보리떡 한 덩이는 아마도 기드온의 군대일 것이다. 우리 군대가 패배할 모양이라고 나팔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거대한 미디안 군대 전체에는 순식간에 패배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해 버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확신을 가진 것이 마침내 승리를 가능케 한 경우들을 우리는 종종 역사에서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종교개혁 당시에 카톨릭 교회는 단순히 종교적인 교권만 가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모든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유럽 전체를 카톨릭 교회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거대한 교권에 맞서서 싸웠던 한사람 마틴 루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한 사람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종교개혁하면 마틴 루터 한 사람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마틴 루터와 더불어 짝을 이루어서 함께 동역 했던 친구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사에 등장하는 필립 멜랑크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마틴 루터보다 약 15살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굉장한 친구였습니다. 얼마나 친했느냐 하면 두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유언에 따라서 부부지간도 아닌데 리틴벨크의 한 무덤 안에 묻혔습니다. 마틴 루터가 일종의 행동주의자였다면 필립 멜랑크톤은 이론적인 학자였습니다. 루터는 종종 종교개혁을 하다가 실망했습니다. 좌절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자기의 어린 후배였지만 친구였던 멜랑크톤은 늘 루터 곁에서 말하기를 “당신이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진리라고 확신할 수가 있다면 그 진리는 반드시 이길 것을 믿어야 하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쓸 때마다 말할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멜랑크톤은 마틴 루터에세 성경의 한 구절을 늘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꼭 같이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말씀이 있는데 그 구절이 바로 로마서 8장 31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그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종교개혁에 대한 승리를 확신했고 마침내 종교개혁은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확신을 본문에서 바울사도에게서 발견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는 로마의 막강한 정치력이 그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신의 조그마한 거인인 믿음의 사람이었던 바울사도는 그 세계를 복음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승리가 반드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본문의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사도의 승리에 대한 확신의 고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확신은 저와 여러분의 확신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세계를 바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나의 믿음은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 승리에 대한 확신을 형성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승리의 확신의 근거를 본문에서는 몇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거듭난 성도들이라면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승리로운 계획을 준비하셨다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불행이나 고통도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무효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8절을 시작하면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8절과 그 전의 26절을 비교하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26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최선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순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결정이 최선의 결정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알지 못하고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하며 우리가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미지수의 상황들이 인생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렇게 많은 우리가 모르는 것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우리가 삶의 도상에서 경험하는 역경도, 불행도, 사고도,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고 말할 때 선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냥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라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그 선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다음 구절의 설명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29절). 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셨던 선이란 바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형상을 본 받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경험하든, 그 모든 불행과 역경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최고의 선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일이 마침내 완성된 상태를 가리켜 기독교 교리적으로 영화의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정하시고 어느 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분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내가 그를 믿는 순간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아니라 나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의롭다함을 받고 주 앞에서 새로운 삶을 출발한 나를 그대로 놓아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건과 모든 삶의 경험들을 통해서 나를 연단시키시고 빚어 만드시사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인격을 본받게 하시고 마침내 그를 닮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마지막 세워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 순간을 가리켜서 “영화”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바울은 이 사실을 “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느낀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을 만날 때 고통은 고통입니다. 솔직히 아무도 그 감정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픔은 아픔이요, 고통은 고통이며 슬픔은 슬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기쁨일 수는 없지만 슬픔 그 자체가 영광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통도 슬픔도 불행도 역경도 재앙도 마침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그것 이 내 인격의 연단을 통해서 나를 빚어 만들어 어느 날 주님 앞에 세워지는 그 순간,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존재로 나의 영화로운 인격을 그분은 완성하시고야 말 것을 나는 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그것도 먼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까운 형제들에 의해서 오해당하고 팔리움을 받고 죽음의 사지로 던지움을 받게되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출하는가 했더니 먼 나라 이국 땅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랍고 오묘하신 섭리는 마침내 요셉을 애굽땅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 그 나라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까지 세워 놓으시지 않으셨나요? 사랑하는 조국 땅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구걸을 하기 위해서 고향에서 자기의 형제들이 찾아 왔습니다. 자기를 죽음의 사지에 몰아 넣었던 자기의 형제들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곡식을 구걸하고 있는 장면은 요셉에게는 가장 적절한 보복의 기회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자리에서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근심하지 마소서. 나를 팔고 죽이려고 했던 당신들의 과거의 실패 때문에 나를 두려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을 도울 수가 있고, 기근에 처한 내 민족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앞서서 나를 이 곳에 보내시고 이 모든 상황을 섭리하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원망이 없습니다.”라고 형제들을 당당히 용서하고 그 상황 속에서 넉넉한 승리자로 설 수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근거는 하나님의 선물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실패를 경험하는 동안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진정한 필요를 그의 선물을 통해서 반드시 채워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가운데 하나님 자신의 최고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값진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옛날 부흥목사님들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어떤 아들이 다섯 있는 분이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와 얘기하는 중에 그 친구가 아들 하나를 달라고 하자, 어떨결에 아들이 다섯이나 있으니까 하나를 줄테니 양자로 잘 키워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 부인에게 혼나고 약속을 안 지킬 수가 없어서 잠자고 있는 다섯 아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들을 주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첫아들은 장남이라서 안되겠고, 둘째 아들은 다섯 아들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지혜로운 아들이라서 안되겠고, 셋째 아들은 다섯 아들중에서 제일 미남이고 자기를 쏙 빼서 닮았는지 모릅니다. 도저히 셋째 아들은 안되겠다 생각이 들었고, 넷째 아들을 보니 늘 병약하고 비실한 아들인데 그런 아들을 남에게 주는 것이 도저히 불쌍해서 안되겠고, 다섯째 아들을 보니 막내를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이 들었답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이 구절에 나타난 논리를 가리켜 ‘보다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로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외아들까지 주셨습니다. 자기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 다른 작은 것들은 왜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삶의 도상에서 역경과 고난의 폭풍우와 비바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약속합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동일하신 그 분이 아들과 함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왜 아니 주시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하면 얼핏 생각하기에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워낙 물질주의의 지배를 받은 한국인들의 사고, 특별히 현대처럼 물질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우리의 모든 사고가 물질지향적입니다. 본문의 성경구절에서 “모든 것”이라고 강조할 때 그 “모든 것”에 대한 바울사도의 견해에는 하나의 일관성이 있습니다. 28절로 다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절). 모든 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본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본 받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본문의 32절에서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은 어떤 것일까요? 불행, 역경, 재앙, 오해, 억울한 사건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 앞에 사랑을 받은 자요,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빛나고 아름다운 그 인격을 본받게 하실 것을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인격적이며 도덕적이며 영적인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아름다운 인격으로 영화롭게 그 분 앞에 세워지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예비하시고 그 계획을 예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계획을 반드시 성취하시고야 말 것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당당한 고백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성격은 영원함입니다. 한번 나를 사랑하시기 시작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이라는 이 현재의 삶의 순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그 아픔과 고통과 그 손해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비틀거리고 주님을 떠나고 싶어하고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막아버리는 나의 실패와 무지와 나의 영적인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은 변치 않고 끝까지 완성될 것을 믿으십니까? 바로 이 영원한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 승리의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의 이 중요한 명제 앞에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있는 사건이 있을까요? 35절에서 이렇게 답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저와 여러분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가상적으로 제시해 봅니다. 그는 먼저 외적인 환경적 요인들을 제시합니다. 예컨대,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등이 나옵니다. 계속해서 38절에 보시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즉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어떤 사건도 그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 못할 것입니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우리를 공격하고 위협하는 어떤 영적인 존재들의 공격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지금 경험하고 있는 어떤 일도 미래에 경험하게 될 어떤 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굉장한 초자연적인 능력의 사건도, 높음이나 깊음이나- 인간에게는 저 높은 곳과 깊은 곳에 대한 공포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서도,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 속에서 인생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위대하게 살아낸 한 한국인의 감동적인 얘기를 접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 작가인 정연희씨가 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맹의순이라는 한 신학교 출신의 사람에 대한 얘기입니다. 6.25 사변의 피난길에서 그는 빨갱이로 오해를 받아서 체포를 당해서 포로수용소에 들어갑니다. 그는 유달리 이웃을 돕고 복음전도에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피난길에 빨갱이로 오인되어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그런 경우에 우리처럼 “하나님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십니까?”라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용소에 들어 가자마자 거기에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고 전도할 수 있는 대상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모아서 광야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광야교회가 세워지던 그 날 그는 너무 기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는 알았어요. 나를 여기에 보내신 이유를 알았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맹의순 선생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째서? 왜? 라는 질문은 깨끗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 수용소에는 중공군 포로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맹의순 선생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갈 수가 없었던 중국, 그곳에 가기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앞에 이 중국 사람들이 몰려오다니...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 주셔서 섬길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내 주시니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립니다. 날마다가 감격이고, 선교의 현장이며, 봉사의 현장이고, 복음전도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는 세월이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맹의순 선생의 친구들이 그가 억울하게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석방 탄원서에 자기의 이름만 서명하면 수용서를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맹의순 선생은 그 서명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보내셨는데 나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 날도 새벽 한 시, 두 시, 세 시까지 중환자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손 발을 씻기고 복음을 전하고 찬송가를 가르쳐주고, 시편23편을 읽어 주다가 그 자리에서 숨이 거둡니다. 수용소 밖의 교회에서 그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편지 한장을 가지고 옵니다. 편지는 포로 수용소에 있었던 중공군 포로들 거의가 서명한 편지였습니다. 그 장례식장에서는 이 편지가 읽혀졌다고 합니다. 번역된 편지의 그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맹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자,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의 주였던 맹의순 선생이 정말 가셨습니까?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국군인 의사들을 도우며 우리의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했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그의 행동은 희생과 헌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여일했습니다. 우리는 대개가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고 우리를 전장에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맹선생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까지 일일이 글씨를 가르쳐 가며 찬미가를 불러 주셨고, 나무 십자가를 안고 다니며 그 뜻을 성심껏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은 새벽 1시, 2시면 늘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더욱 심하고 무서운 고통에 짓눌리는 시간에 선생은 고통을 다스리는 천사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선생의 한 손에는 성경책이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주고 주물러 주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선생의 손에는 신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 손이 얼굴에 닿으면 시원하고 가벼워졌습니다. 선생이 발을 씻어 주시면 천상에 오른 것처럼 평화로워지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염치없이 한번만 더 한번만 더 그분의 손으로 씻기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선생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닫고 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말이 통하지않는 것에 대해 별로 불편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잘 사는 사람 몇몇이 우리들의 기회를 빼앗았기 때문에 저들만 기름지게 살고 우리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모택동의 깃발 아래 모여 공산주의만 잘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미국이나 구라파의 몇몇 나라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포로가 되었고 그렇게 되고 보니 쓰레기 같은 낡은 무기로 무장된 총받이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들은 무더기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붙잡혀 포로가 되고 팔 잘린 자, 다리 잘린 자, 눈 잃은 자, 살점 달아난 자, 동상으로 살이 문드러진 자가 되어 적군의 손에 의해 치료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될 대로되라는 심사와 끝없는 원망과 증오가 굳어져 우리의 마음은 깜깜하기 이를 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맹선생이 오셨습니다. 맹선생의 숨결은 우리의 껍데기를 녹여 주었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고 두껍고 어둡던 마음의 문을 기도와 찬미의 손과 사랑으로 녹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가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의 시작이 예수 그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의 모양이고 내 죄를 인해서 예수가 그 위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나의 죄가 죽고 사랑이 살아남으로 승리했고 그 승리가 영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8월 11일 새벽에도 마지막 환자를 씻기고 난 선생은 자신의 눈물을 씻을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시편 23편을 우리말로 더듬 더듬 읽어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이 말씀을 봉독하신 후 그분은 한번 더 힘차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시고 나서 먼 곳을 바라보시며 쓰러지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을 믿었을 뿐만아니라 알았고 그리고 이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자신의 삶의 목적인 것을 알아서 사랑의 명령 앞에 순종했던 맹의순 선생의 마지막 고백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이 편지는 마지막에 이런 중공군들의 내용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거제리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들 일동.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넉넉한 승리가 아닌가요? 최악의 고통을 최선의 승리로 이끌어 낸 위대하고 넉넉한 승리의 고백이 아닌가요? 이 고백은 바울의 고백과 얼마나 닮았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도상에서 정말 내게 필요한 모든 인격적이고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들을 성실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된다는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바울과 한가지로, 또한 맹의순 선생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9:1-13 / 민족을 위하여

 

 

자기가 속한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는 두가지의 극단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한가지의 극단을 민족지상주의라고 할 수가 있다면 또 하나의 극단은 민족이 없는 세계주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민족지상주의란 자기 민족에 대한 맹목적이고 편견적인 집착에 근거한 것입니다. 세계 역사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민족주의는 대부분이 국수주의로 발전해 갑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가 통치하던 나치 독일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민족인 게르만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유대인 대학살을 감행했고 그 결과로서 민족과 민족 사이에 대대적인 전쟁을 초래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이 민족지상주의와 대조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극단이 있다면 그것은 민족없는 세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족주의의 피해를 극복해 보려는 이상주의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 시도가 성공한 사례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뿌리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세계주의적 시도가 실패한 대표적 사례가 있다면 소련의 경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얼마전 사회주의 체제의 구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결과는 민족주의적 국가에로의 핵분열 현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건강한 민족관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열방들과 이 세상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나를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기 민족 사회에 복음적이고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가 있어야 하겠다는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세계주의자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의 부르심은 세계를 향한 것이었고 그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그의 일차적인 소명은 자기 민족이 아닌 세계의 모든 열방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단 한번도 자기 민족, 자기 조국을 망각한 일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선교여행을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에게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고 있는 로마서의 일차적인 독자도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 크리스챤들을 향해서 편지를 띄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었던 진한 민족애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8월을 맞게 되고 우리 민족의 유월절인 8.15를 맞이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의 민족사는 대단히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교차로에 서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인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애의 본질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규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민족 구원에 대한 소원을 볼 수가 있고 ,동시에 바울 사도의 민족 구원에 대한 믿음을 볼 수가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 사도의 민족 구원에 대한 책임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사도의 민족 구원의 소원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1절)

 

로마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번째 부분인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구원론을 전개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구원이 없이 살고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악의 참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본질을 8장까지 전개했습니다.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구원얻은 성도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버림을 받지 않고 궁극적으로 승리하고야 만다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영광을 확신하면 할수록,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나같이 이 영광스러운 구원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내 친구와 형제와 골육과 이웃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울 자신도 자기의 골육과 친척, 더 나아가서 자기 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스라엘 동족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얘기 하면서 1절에서 두가지의 단어로 자기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한 단어는 ‘근심’이란 단어이고 또 하나는 ‘고통’이라는 단어 입니다. 그런데 이 두개의 단어 앞에는 각각 ‘큰 근심’,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 큰 근심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치지 않는 지속적인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민족에 대한 구원의 문제였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여기서 바울이 원하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로마서 10장 1절을 보시면 명백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롬 10:1). 바울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이, 자기의 골육, 친척, 친구, 형제가 구원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 원했느냐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소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끊어진다’ 라는 말을 주목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이 말은 대단한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로마서의 8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동일한 ‘끊는다’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했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같은 단어가 9장에 들어와서는 어떤 의미로 씌여지고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형제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또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내 이웃과 내 민족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소원한다는 의미로 씌여져 있습니다. ‘끊어진다’라는 단어를 쉽게 표현한다면 ‘내가 대신 지옥에 갈지라도’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가야할 지옥을 내가 대신 간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형제들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면 나는 차라리 그것을 소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암 부스는 그 시대의 영국 크리스챤들이 왜 전도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답답해 했습니다. 복음을 알고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이웃들의 영혼에 대해서 무관심한 그 시대의 크리스챤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어느 날 “하나님, 영국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눈을 열어 지옥을 볼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면 우리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붙들고 목놓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암 부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베풀어 준 놀라운 은혜를 간증해야 하며 동시에 이 구원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경험해야 할 지옥의 참상을 계속적으로 생각해 보는 일이다.”

 

바울사도는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내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다. 그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것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 이웃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는 끊을 수 없는 자이지만 내가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들이 가야 할 지옥을 대신 갈지라도 내 희생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나는 그들의 구원을 소원한다.” 아마도 이 고백을 하면서 바울은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자주 지옥에 대해서 설교를 했기때문에 교인들이 싫어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고 부정적이라고 압력을 가해서 마침내 목사님께서 사임을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 새 목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교인들은 새 목사님을 통해서 새 메세지가 나올 것을 기대했었는데 마침 오신 새 목사님도 가장 좋아하는 설교의 제목이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인들이 꼭 같은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서도 목사님을 쫓아낼 생각을 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상해서 묻기를 먼저 목사님께서 지옥 설교만 한다고 해서 목사님을 바꾸었는데 왜 새로 오신 목사님께서도 지옥 설교를 하는데 가만 있느냐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대답하기를 전에 지옥을 설교하던 목사님은 매우 담담하게 때로는 위협적으로 설교를 했는데 이번에 오신 목사님은 지옥 설교를 하시긴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설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의 모든 영혼을 책임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 골육, 친척, 형제, 나와 가까이 피부를 맞대고 살게 된 사람들을 향한 어떤 부담과 책임감을 느끼신다면 오늘 바울의 고백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그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느끼고 있는 이 기쁨과 환희를 그들이 느낄 수가 있다면, 그들이 이 구원의 삶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내가 차라리 지옥을 경험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 안타까운 자기의 사랑하는 민족을 향한 민족 구원에 대한 바울의 소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얼마나 우리 주변의 이웃들과 형제들을 향하여 바울 사도와 같은 부담을 갖고 있을까요?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민족구원에 대한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아무도 나를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한번 구원받은 성도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구원의 자리에 세워 그들을 향한 계획을 완성하고야 말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백과 함께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청중들 가운데 자연히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번 선택하셨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하고 살고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라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9장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두번째 부분인 9장과 10장, 11장은 바로 유대인의 구원문제와 하나님의 주권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민족에 대한 구원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다스리고 주관하는가 하는 주권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맞습니다. 오늘 내 민족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고 메시야를 등지고 살고 있으며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간섭하셨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내 민족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광을 경험하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내 민족에 대한 구원을 믿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고백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권론과 함께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예정론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우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울은 여기서 개인의 예정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관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정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한 개인이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느냐 아니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민족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4절과 5절에서 먼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던 종교적인 특권들을 열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신앙적으로 축복하셔서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4-5절).

 

어떤 특권들을 열거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 아니라 나중에 양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고 많은 축복의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거기다가 육신으로 말하자면 메시야도 유대민족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런 굉장한 축복을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버리실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민족의 역사를 섭리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6절이하의 말씀에서는 종교적인 언약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백성들과 언약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 민족을 선택하셔서 메시야를 주시고 이 민족을 위대하게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현재의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 때문에 폐기될까요?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난해한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귀절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무 지나치게 묵상하다가 완전히 잘못된 분들도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3절)

어느 두 신학자가 이 귀절을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한 신학자가 말하기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할 수가 있단 말이냐?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더니 다른 신학자가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 다음 부분인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야곱의 일생을 보십시오. 사랑받을 만한 일을 했습니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야곱,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자기의 아버지까지도 속였던 야곱을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이 사랑했다는 이 뜻이 무엇일까요? 먼저 한가지를 분명히 한다면 이 말씀은 야곱이나 에서, 개인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맥 전체를 통해서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대표자로서의 야곱과 에돔민족을 대표하는 대표자로서의 에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에서를 결코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축복하십니다. 물론 야곱의 가계를 통해서 메시야를 주시고 특별히 그 가계를 사용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에서를 저주하시거나 버리신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문맥에서 나오는 ‘미움’과 ‘사랑’의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사용하는 소위 히브리의 문법적인 시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다른 예를 복음서에서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도리를 가르치실 때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으신 나머지 정말 여러분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와 자기 목숨을 미워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두 개의 상반되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강조하려는 한 단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반대의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그의 최고의 사랑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한다면 내게 있어서 부모와 형제와 처자를 사랑하는 사랑은 상대적으로는 미운 정도밖에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도 에서를 문자 그대로 미워하셨다거나 혹은 에돔의 자손을 미워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가계와 이스라엘 자손을 특별히 쓰시려는 계획을 가지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였습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는 지금 왜 이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편지를 쓰던 그 시대에 있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런 행실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도 전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특별히 이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이 백성을 계속해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속한 내 민족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내 민족을 지금까지 간섭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께서마침내 어느 날 이 민족 속에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다시 우리 민족에게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베풀어 주시고야 말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구원에 대한 바울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저와 여러분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민족 역사에 대해서는 어떤 신앙을 고백해야 할까요? 저는 바울이 자기의 사랑하는 민족을 향해서 고백했던 믿음과 동일한 그리고 동질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민족을 향해서도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한 많은 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책 전체가 추천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 책의 상당한 부분은 기독교적 역사관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저는 종종 젊은 형제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추천하는 책이 있는데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이 쓰신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란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한국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셨고 하나님이 어떻게 민족사에 섭리하셨느냐 하는 섭리사관을 그 책에서 전개하고있습니다. 여러분, 한국민족이 매우 종교적인 민족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우리 민족은 참 종교적인 민족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 민족은 종교적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칠성각에서 미지의 신을 섬기고 있었고, 뒤뜰에 정한수를 떠 놓고 알지 못하는 어떤 신을 향해서 정성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다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 자체는 우상숭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신이 없을 때 가짜 대용품을 숭배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우리 민족은 드디어 복음이 들어왔을 때 전 민족적으로 복음을 받아드리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빠른 시일내에 한국과 같이 교회의 부흥을 체험하고 영적인 부흥을 체험한 민족이 교회 역사상 또 어디 있습니까? 오늘날 한국민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는 도덕적으로 부도덕한 방향으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중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려면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끝났을까요? 저는 어쩌면 바울과 동일한 심정으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족의 한 많은 역사속에 간섭하시고 마침내 어느 날 복음을 가져다 주신 하나님의 이 민족을 향한 사랑의 계획이 계시다면 이 민족의 부도덕과 실수와 하나님 앞에의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고 우리 민족에 대한 기대를 갖고 계시다”.

 

돌아가신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영기장로님은 가나안학교에서 훈련을 시킬 때마다 큰소리로 이런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나는 애국가를 주신 것이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는다. 이 민족이 똑바른 정신으로 애국가만 부를 수만 있다면 이 민족은 산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이 역사를 지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가 있다면 이 민족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바울사도와 동일한 심정으로 우리의 표류하는 역사 그리고 불안한 역사의 현장에서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하는 민족, 이 나라 이 겨레,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이 전개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민족 구원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본문에서 이 민족 구원에 대한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원할 때 그 소원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책임의 감당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소원은 소원으로 끝나고 맙니다. 예컨대, 통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민족의 한 맺힌 소원인 통일, 우리는 얼마나 이 통일을 부르짖으며 소원해 왔나요? 그러나 아직도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통일이 우리의 역사 속에 정말 실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어떤 책임 감당과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가지고 민족의 통일을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기류가 생겼습니다. 독일의 통일이후에 몸살을 앓는 통일 후유증의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통일 비용이 너무 비싸다. 통일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정말 통일을 소원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신중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일을 진심으로 소원한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통일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 전체가 지금보다 살고 있는 수준보다 반쯤 줄여야 할 것을 결심해야 하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민족 역사의 슬픔인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통일의 조국을 성취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원은 말하지만 책임의 자기에서는 회피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북한 땅의 민중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그들의 육체적인 굶주림 못지 않게 더 커다란 굶주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굶주림입니다. 적어도 북녁 땅의 내 사랑하는 겨레의 95%이상은 저들의 생애속에서 단 한번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의미를 들어보지 못한 민중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안타까운 모습으로 육체의 굶주림보다 더한 굶주림으로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수년전 제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들이 얼마나 복음을 소원하고 있는지를 테스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 안타까운 모습으로 복음을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를 붙들고 전도를 해 보아도 평생에 처음으로 듣는 복음의 소리 앞에 눈을 열고 귀를 열고 그들은 신기한 듯이 이 복음의 메세지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반쪽의 복음화를 위해서, 아니 범위를 더 좁힌다면 우리의 주병의 이웃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책임을 다하고 계신지요?

저는 우리 한국이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커다란 손실 하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공동체 의식의 상실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공동체 의식이 없었던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제일 자랑스럽게 사용하기 좋아하던 말은 “우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집, 우리 식구, 심지어는 아내도 우리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학교, 우리 믽고, 우리 나라”등 그만큼 우리에게는 공동체 의식이 소중했습니다. 그러다가 서구의 개인주의 문명이 들어오면서 우리는 어느 사이에 이기적인 민족으로 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라는 의식은 우리 가정 바깥에는 적용이 안됩니다. 한국 사람이 공공의식이 없는 이유는 자기 집만 벗어나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휴가철에 도처에 버려진 쓰레기, 자기 집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우리의 집 안에서만 적용됩니다. 집 바깥에는 절대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도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들의 구원문제를 위해서는 기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파트의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의 구원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들은 내 골육이 아닌가요? 그들은 내 친척이 아닌가요? 그들은 내 형제가 아닌가요? 그들은 내 이웃이 아닌가요? 바울의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내 골육과 친척의 구원을 위하여는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에게 있어서 그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는 두 가지의 단어가 있었다면 하나는 복음이고 또 하나는 민족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틴 루터에게 누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사상(주의)은 무엇입니까?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죽기까지 복음주의, 나는 죽기까지 독일주의”

 

한국 학교 사상 가장 존경할만한 교사가 있었다면 저는 무교회주의 출신의 김교신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의 한평생을 지배하던 두가지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서”와 “조국”이었습니다. “조국을 성서 위에, 내 사랑하는 조국을 하나님의 말씀인 거룩한 성서 위에”

 

사랑하시는 여러분, 코스모폴리탄이요,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선교를 꿈꾸었던 바울 사도 그러나 동시에 그 가슴 속에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자기의 조국, 자기의 골육, 자기의 친척, 자기의 이웃을 향한 이 애타는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 골육이, 내 친척이, 내 형제가, 내 이웃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이것을 소원한다.”

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우리 민족, 우리 역사,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이런 구원의 부담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롬 9:14-33 / 남은 자의 구원

 

 

우리가 개인적으로 전도를 하다보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되십니까? 무엇보다도 첫째로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특별히 그 상대가 믿을 만한 충족한 조건을 갖춘 분인데도 복음을 받아 들이지 못할 때 이 안타까움을 한층 더 더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대대로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 전통을 가지고 있는 분이거나,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가 다 크리스챤이시고, 미션 스쿨 출신 이시고, 사회적인 지위도 퍽 괜찮고 성경도 알고 찬송도 알고 있는데도 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볼 때에 이 안타까움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당시에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을 때 바로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9장 4-5절에서 바울사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특권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사도가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전도할 때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면서도 또 한편 우리 마음속에는 감사의 마음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믿지 못하는 예수를 나는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신앙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된 소수의 무리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적인 독특한 명칭 하나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27절에서 등장하는 ‘남은 자’(ramnant)라는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27절).

이 ‘남은 자’란 말 속에는 두가지의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남은 자란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둘째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구원받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섭리와 역사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국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그 정황을 묘사하기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우상의 제단앞에 엎드러졌다’고 말합니다. 단이란 이스라엘의 북방의 끝에 있는 도시이며 브엘세바는 저 남방의 끝에 있는 도시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도처에 우상의 제단들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믿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그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 선지가 얼마나 고독했던지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만 남았습니다.” 이 말을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믿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습니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선 엘리야에게 “아니야, 이 시대에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을 칠천명이나 숨겨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이들은 점진적으로 이방문화에 동화되면서 신앙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방의 문화와 전통과 종교속에 물들어 가고 있었을 때에도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당(Synagogue)을 세워서 율법(Torah)을 읽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 날을 주신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드디어 포로생활이 끝났을 때 바로 이 남은 자들이 그들의 고향땅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이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가 이 남은 자의 반열에 참여하여 인생을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당신이 남은 자 속에 끼여 있다고 믿으십니까? 이 시대에 종교인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교회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고 있는 남은 자들속에 나도 한 사람이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다시 27절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말하기를 ‘남은 자’만 구원의 영광을 누리고 ‘남은 자’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대부분의 자신의 동족이 불신앙의 길로 가고 있는 안타까운 정황을 지켜 보면서 개인적인 자기의 신앙의 고백을 로마서 9장에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포함해서 매우 소수의 그룹에 속하는 적은 무리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원의 영광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메시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놀라운 이유가 바로 ‘남은 자’의 구원, ‘남은 자’의 삶의 특권에 대해서 불신앙의 민족들 앞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술어를 빌려서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선택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두가지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모세에게 하신 말씀으로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15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노예되었던 애굽 땅에서 떠나는 출애굽의 경험은 일종의 구원의 경험, 해방의 경험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들인 구원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들의 실수 때문에 노예생활을 시작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끌어내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비참한 애굽의 노예가 된 자리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자인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사건을 지적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얻은 것은 그들이 구원을 호소했기 때문도 아니요, 그들이 구원자인 모세를 따라 나서기로 결정했던 때문도 아닌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 백성들이 구원을 호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따라 나서기로 결정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것은 피상적인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이 구원을 받고 애굽땅을 떠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받은 후에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구원을 위협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 났습니다. 특별히 바로는 이 백성들을 다시 애굽으로 끌어 가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이 바로를 쓰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팍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도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다시 끌려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보전하고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의 굳은 신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구원을 지키시고 보전하셨으며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오늘 내가 남은 자의 반열에 서서 구원의 영광을 누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때문인 것을 믿는 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21절이하에 등장하는 토기장이의 비유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만듭니다. 두개의 그릇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그릇은 긍휼의 그릇이며, 또 한 그릇은 진노의 그릇입니다. 여러분, 토기장이가 이런 저런 그릇, 즉 긍휼의 그릇이나 진노의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여기서 진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도, 혹은 긍휼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도 만드실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의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22절은 “만일”이라는 가정법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흙으로 긍휼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을 만들었을지라도, 혹은 진노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럴 수 있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진노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초점은 진노보다는 긍휼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22절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진노의 그릇이라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또한 그 긍휼의 대상으로 예비된 그릇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내신다면 그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시겠느냐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24절에서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를 막론하고 우리는 바로 주님의 긍휼의 여김을 받으실 대상으로 작정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오늘까지 그 구원을 누리면서 구원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다가 중간에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저 사람은 왜 지조가 없을까. 나는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오늘 본문을 통한 하나님의 메세지는 그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진정한 근본적인 원인도, 그리고 오늘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고 지킬 수 있었던 원인도, 구원을 폐기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무효화할 수 있는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을 지킬 수 있었던 그 모든 배후의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의 교리 혹은 선택의 교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정의 교리나 혹은 선택의 교리를 전개할 때 바울 사도는 즉각적으로 불러 일으킬 두가지의 반론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 선택이 사실이라면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버리시는 하나님은 불공정하신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할 것을 미리 예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어떤 사람을 선택하고 쓰시고 또 다른 사람은 거절된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인가요? 바꿔말한다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이 아닐까요? 라는 질문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바로같은 인물을 강팍하게 하셔서 그를 사용하셨다면 장차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바로를 어떻게 심판하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요?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19절의 말씀입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선택의 교리는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불합리하다고 사도에게 반론을 던질 것임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렇게 예상되는 반론에 답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합리적이십니다.”라는 논리를 전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연구해 보시면 바울 사도는 그런 대답을 진술하지 않고 있는 것이 본문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른 대답으로 이끌고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나 작정의 교리를 말하게 되면 감격하게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반발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이 선택의 교리는 얼마나 영광스런 사실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작정하셨으며, 나를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을 그가 친히 지키신다라는 사실은 얼마나 감격할 일입니까? 그런데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선택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꼭 한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 권한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쇼핑을 가서는 고를 것 다 고르고 선택할 것 다 선택하면서도 하나님만은 선택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교묘한 지성의 타락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택의 교리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깊은 곳에 있는 이 선택의 교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을 향한 도전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20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십니다. 그가 만약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면 그는 정말 하나님이실 수가 있을까요? 그보다 놀라운 사실은 선택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나를 버릴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그 사실때문에 왜 감격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할까요?

 

바울 사도는 불신앙의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선택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내게 특별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의 죄성에도 불구하고,나의 무자격에도 불구하고, 나의 공로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옛날 애굽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때문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남은 자의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던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때문이라고 바울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작정이나 선택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이 작정이나 선택의 교리를 기계적으로 혹은 숙명론적으로만 접근하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부분의 메세지를 깊이 묵상해 보면 성경은 절대로 선택의 교리를 기계론적으로 풀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인격적인 것입니다.

 

22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시고자 하사-여기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자 어떤 진노의 그릇을 예비하신다 할지라도, 또 그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꼐 시비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이 진노를 작정하시면서도 이 진노의 밑바닥에 숨어있는 사랑을 보십니까? 진노는 사랑입니다. 그의 진노하심이 사랑이라면 선택은 더욱 더 사랑이 아닐까요? 그분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웠다는 이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 사도는 호세아의 메세지를 구약에서 인용합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절). 선택의 교리는 본래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으로,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던 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사랑의 메세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의 교리는 성경에서 생동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사랑의 드라마는 호세아 자신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얼마나 생동하는 모습으로 증언되고 있습니까?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은, 남편 몰래 바람이 들어 부정을 했습니다. 그녀는 한번 뿐이 아니라 두번째로 부정을 했습니다. 호세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한탄했을 때 하나님께선 다시 가서 부정한 아내를 데려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호세아가 부정한 아내로 인해서 가슴아프고 답답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해 가슴아프고 답답한 하나님의 심정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유일한 경배와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그 하나님 보다도 세상과 짝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 백성은 다 간음한 자들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오늘도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내 답답함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다시 끌어 앉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열납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내 백성들이 아직도 내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을 향한 나의 끊임없는 지속적인 사랑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얘기가 아닐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직도 크리스챤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우리의 굳은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날마다 살아가는 내 삶의 현장을 하나님이 보실 때, 내 삶의 모습을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들을 향해서 징계하고 싶어하실까요?

 

2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함과 같으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보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에게 여러분은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정죄하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로 소돔이요, 고모라이신 줄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속에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주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어거스틴이 갑자기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를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다가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는 벌써 나를 작살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주의 공의대로 우리들을 처리하였다면 벌써 너희들은 소돔이 되고 고모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남은 자로 남겨 두신 이유는 그의 끊임없는 지속적인 사랑으로 그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용서의 교훈을 가르치실 때에 내 이웃이 네게 허물과 실수와 잘못을 범할지라도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왜 일흔 번, 일곱 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요? 그것은 끝없는 용서, 무한한 용서를 가르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용서의 밑바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그 조건없는 긍휼의 풍성한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오늘도 지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아직도 남은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로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세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반드시 요구하는 한가지의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고 경배하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 의가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의’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의’를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자 한 그들의 행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그들의 행위를 의존해서 율법을 통해서 의를 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의’를 얻은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서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30절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그런즉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30-31절). 율법의 행위를 좇아 간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자리에 이르지 못하였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의를 이룰 수가 없다고 버림받았던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강조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이 시대의 가장 신앙적인 혼란은 믿음이란 단어가 믿음의 대상이 강조되지 않은 채 믿음이란 단어 그 자체가 강조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때때로 그 믿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최선의 행위도 나를 의롭다 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죄성을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보혈을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순간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닐까요?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시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행위에 근거하여 의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어느 날 만나게 될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아닌 심판자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만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두가지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분을 떠난 채로 자신의 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어느 날 거치는 돌, 부딪히는 돌, 혹은 깨는 돌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잘 들어 두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날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님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요즘 테러리스트 한 사람이 잡혀서 세계의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만, 과거의 영국에서 테러리스트 한 사람이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 그가 청년이었을 때에 최초로 그가 어떤 살인 사건에 가담해서 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주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아주 유능한 변호사가 이 사람의 변호를 맡아서 그의 놀라운 변호를 통해서 이 사람이 정죄되는 것을 면하게 만들어 주고 보호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변호사는 이 사람이 석방되던 날, “이제 당신은 다시는 이런 일에 가담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사람은 그런 일을 계속했고 나중에는 아주 흉악한 테러리스트가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잡혀서 법정에 끌려 와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과거에 자신을 변호해 주던 그 변호사를 판사로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를 특별히 아껴 주었던 그에게 또 한번의 긍휼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판결하는 판결문에서 이 판사는 유명한 이런 판결문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 때 나는 당신의 변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변호인이었던 내 말과 내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지금 나는 당신의 변호인이 아니라 재판관입니다. 나는 당신의 죄대로 당신을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꼭 같은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경험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느 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주님은 당신의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일 것입니다. 오늘 나는 그리스도의 그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이 된 것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살고 계신지요?

 

결론을 맺습니다. 내가 남은 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확인하신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심 때문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때문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신다면 한평생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정말 남은 자인지 아닌지 그것이 확실하지 못합니다. 제가 전도한 분 중에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선택된 것만 알면 믿을 텐데 제가 그것이 확실치 않습니다.”고 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선택되었기를, 혹은 선택받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정말 원한다고 대답하시더라구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시라고 하자 그분은 그렇게는 안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선택받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된 자들은 그 믿음을 고백하게 마련이니까요.그러므로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꼭 한가지 밖에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신다면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확실히 영접하고 고백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선택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이 삶의 자리에서 이 복된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내가 선택받은 자인 것을 확신하고, 남은 자로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수많은 이웃들이 불신앙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 남은 자의 영광스런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주님앞에 여러분 앞에 내려진 그 은혜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롬 10:1-21 / 복음의 책임을 다 하려면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1절).

 

본문 1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9장을 함께 살펴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이 불신앙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겨 두사 저들을 구원하시고 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의 구원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나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하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갖게 되는 질문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하시면 됐지 우리의 전도가 필요없지 않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복음선교에 있어서 인간편의 책임이 있는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 드리는 인간편에서의 결단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인간 편의 응답이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는 매우 역설적인 것 같지만 사실 성경은 이 양자를 꼭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사실은 기독교 교회 역사에 있어서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편만을 강조하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책임편만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구원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사상을 칼빈주의라고 불렀고, 인간편의 응답과 책임을 더 강조하는 신학 사상을 가리켜서 알미니안주의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신학생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다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두 그룹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이쪽도 저쪽도 속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느 때까지 중간에서 머뭇거리겠는가고 빨리 결단을 내리라고 하자 그 사람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칼빈주의 쪽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왔냐고 묻자,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칼빈주의가 더 성서적인 것 같아서 결정하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칼빈주의자 쪽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서 온 사람은 받아주지 않습니다. 여기에 온 것도 하나님이 결정해서 왔다고 말해야지 당신이 결정해서 왔다고 한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알미니안 쪽으로 갔습니다. 그들 역시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고 이 사람은 대답하기를, “저 쪽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이 곳이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왔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알미니안주의 쪽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기는 스스로 자율적인 의사로 결정한 사람들만 오는 곳이지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온 사람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고 했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영원한 우리 인간이 대답할 수 없는 신학적인 역설이 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계획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앙의 결단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인간편의 책임있는 선교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라고 양자를 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하나님의 작정을 강조한 바울 사도가 10장에서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복음의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인 특권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 가운데 있는 이유는 복음의 진정한 지식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2절). 바울 사도는 여기서 ‘열심’이라는 단어와 ‘지식’이라는 단어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습니까? 그러나 그 열심이 꼭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은 필요한 것이나 열심을 참된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보다 복음에 대한 열심을 더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몇사람이나 될까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찾아가고 싫어해도 계속해서 열심히 찾아가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열심때문에 그들을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히틀러에게 광적인 충성을 바쳤던 사람들의 충성은 가히 종교적 충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을 보면서 그들이 진리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습니까? 오늘 한국사회의 일각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주사파의 문제를 보십시오. 사회가 그렇게 싫어해도 거의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아직도 사회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열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3절).

 

자기가 확신하는 자기의 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망각된 채 내가 내 열심으로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들이 추구했던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Torah)인 ‘하라’하는 계명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는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삶의 방식으로 구원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었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으며,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이미 하지 못했고 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해 버린 율법을 파괴한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율법을 파괴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었던 우리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받고 의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의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의롭다고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의가 주어진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의로운 하나님과의 교제속에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비밀이 바로 구원의 감격이 아닐까요? 구원은 율법을 지키려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본문을 읽어가다 보면 6-7절에서 난해한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 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 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 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6-7절).

 

이 말씀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 갈까요? 아니면 저 깊은 땅 속으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절). 하나님의 말씀은 메시야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말씀이 증언하고 있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로만 구원이 가능한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가까이 와서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을 제쳐놓고 자기의 열심으로만 구원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구원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 앞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을 산 기도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실대로 알고 또 받아드리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분명한 복음의 진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수락하는 것이지만 미신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받아드리고 그 허상의 진리를 향해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또한 불신은 분명한 진리를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구원은 복음의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 열심은 있으나 정확한 지식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그들과 똑같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열심이 특심한 종교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던 이유도 그의 종교적 열심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으며 그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서 다메섹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믿고 있었던 그 하나님이 자기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죄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는 종교에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구원의 참된 지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참된 구원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절대로 복음의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구원 체험의 가장 외적인 표현은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요, 나의 주님이십니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도 입술로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적 환경에 익숙해 지면 종교적 모방을 능히 할 수가 있습니다. 남들처럼 기도하는 척 하고, 남들처럼 신앙고백도 할 수 있고, 사도신경도 줄줄이 외우기도 합니다. 정말 내 입술의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그 사실을 믿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9절).

 

본래 신약성경은 희랍어로 기록되었는데 소위 희랍 사람들에게 마음에 관한 정의를 물으면 간단히 “인간의 지성과 의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첫째 단원에서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알아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대부분 두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작용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구원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지식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사실만 안다고 구원이 아니라 그 사실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시면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귀신들이 믿는다는 표현은 ‘지식적으로 안다’라는 의미에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유일한 하나님이신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귀신처럼 지식적으로 사실을 알기만 하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귀신의 믿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삶을 드리고 정말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알지만 그 부활이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그분앞에 삶을 드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지식 이상의 것입니다. 어느 날 이 구원의 놀라운 지식이 전달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복음의 사건인 것을 깨닫고 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드리 그 분만을 구원의 주님으로 신뢰한 이 놀라운 사건이 여러분에게 일어났었습니까?

 

제가 탄 배가 난파선이라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조선이 등장했습니다.이 난파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첫째 구조선이 왔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난파선에서 구조선으로 옮겨 타야합니다. 아직까지도 난파선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도 그 목숨을 난파선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의지하던 난파선에서 내 목숨을 구조선에다 맡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시라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사건이 여러분의 생애에서 정말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까?

 

입술로 시인하는 그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9-10절).

 

마음으로부터 이 사실을 받아드리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술로 뜨거운 감격속에서 그 사실을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내 구속자가 되시니’라는 찬송을 부를 때이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이 사람들은 신앙의 기초를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은 아직 머리에 머물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아직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이 내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우리는 복음을 발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사건이 있을까요? 이 보다 더 위대한 경험이 있을까요? 이 보다 더 위대한 사실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침묵할 수가 있을까요? 이제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이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신체의 구조를 통해서 복음의 책임을 설명하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먼저 머리로 구원의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발로 걸어 가셔야 합니다. 복음없이 살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우리의 발걸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 책임을 감당하고 계신지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절).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에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을 강조했고 본문의 10장에 들어와서는 이 구원이 실현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런 구원의 작정과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기 위하여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9장과 10장이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 초대교회 이후 17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선교에 관한 한 전 지구상의교회가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선교를 하기는 했었습니다만 전 교회적으로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일이 1세기부터 시작해서 1700년대까지 깜깜한 암흑시대였습니다. 그러던 1787년의 어느 날, 영국의 한 젊은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성경이 너무 좋아서 성경을 계속 읽다보니 성경의 매 페이지 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우 단순한 마음을 갖고 있던 이 청년은 기도하기를 , “하나님, 아직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저를 보내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세계지도를 만들어 복음을 한번도 접하지 못한 지역을 찾아 표시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어느 지역으로 보내실 것인가를 생각하며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고 있던 이 젊은이는 너무나 마음이 뜨거워져서 한번은 목사님들의 모임에 찾아가서 “목사님들, 제가 성경을 읽어보니까 선교를 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리랜드 박사는 “젊은이, 앉게.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면 자네가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네. 그런 광신자같은 소리를 말게.”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젊은이는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의 그의 전기에 보면 그는 그 당시 자리에 앉으면서 “박사님 맞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나 제가 없이도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수가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에는 하나님은 당신이나 저를 통해서 그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를 동조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서 그는 인도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현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유명한 윌리엄 켈리입니다.

 

가지 않는다면 누가 복음을 전할까요? 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들을 수가 있을까요?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요?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비단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날마다의 우리의 삶의 장에서 만나는 복음없이 주님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복음선교의 책임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본문은 15절로 끝납니다.그러나 16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보냄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선포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복음을 거절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불순종한다고 거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이것이 바울을 지배하고 있던 유일한 한가지의 관심이었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노라”

 

제가 미국에서 가깝게 지냈던 목사님 가운데 한분으로부터 어느 날 직접적으로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하루라도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밤에 잠을 편히 주무시지 못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 날도 “하나님, 오늘도 누군가를 만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발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식당에 가셨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식당에서 일하는 웨이츄리스의 서비스가 너무 엉망이었습니다. 접시를 팽개치듯이 던져 놓고 가버리고는 다시는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아침부터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팁을 안 놓고 식당을 나오려고 하는데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면서 “혹시 그 자매가 불쌍한 자매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팁을 풍성하게 놓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성령님께 순종하여 팁을 10불이나 놓고 나왔답니다. 미국에서 아침식사에 10불 팁을 놓는 것은 거의 기적에 속하는 일입니다. 막 나오는데 그 자매가 “선생님께서 돈을 잊어 버리고 가셨습니다”고 하며 따라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팁이라고 했더니 왠 팁을 이렇게 많이 주시냐고 물었답니다. 이분이 대답하기를 “자매여, 오늘 아침 자매의 마음이 왠지 너무 무거운 것 같아, 자매의 마음을 좀 유쾌하게 만들고 싶어서 팁을 넉넉하게 놓은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이 자매는 선 채로 막 울면서, “선생님, 미안합니다. 제가 선생님에게 좋은 태도를 갖지 못했지요? 사실 저는 어제 밤에 이혼을 당했습니다.”라고 고백하더랍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자매와 함께 그 자리에 다시 앉아 복음을 전했고 그날 아침 그 자매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만일 그 날 성령님의 인도하심 앞에 민감하지 않았더라면 그 귀한 영혼을 잃어 버릴 뻔 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워졌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복음의 지식을 머리로 받으셨습니까? 마음으로 믿으시고 입술로 고백하시나요? 이제는 발로 가서 전할 시간입니다. 당신이나 제가 안 한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또한 지금 안 한다면 언제 할 수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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