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 (엡 6:1~3 )
벌써 올해도 시간이 흘러 5월이 되었고 오늘은 5월 7일 주일로서 교회에서는 어버이주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빼고 온천하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부모를 인정하고 고마워할 때 그 마음에 감격을 느끼고 모든 피로를 잊게 됩니다. 어버이날이 되어서 늘 사용되는 문구라도 자식들이 부모에게 편지 한 장 보내는 것 기뻐하고 또 늘 사용하고 있는 물품 하나라도 선물할 때 감격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에 사랑이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평범한 인사말 한마디에 감격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을 세워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혹시라도 자식의 몸이 아플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남들에게 자식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도 부모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때 자식된 도리로서 지나온 시간들이 송구하고 또 아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자식된 도리로서 특별히 부모님께 대한 우리의 섬김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이 지상의 모든 역사를 계승하고 문화를 계승해 가는데 정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즉 부모를 통하여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을 통하여 또 다른 자식이 있고 이와 같은 세대를 계승해가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상에 교회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봅니다. 이제 오늘은 모두가 자식된 도리로서 특별히 부모님에 대한 우리의 섬김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만약 오늘 부모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그 부모님을 천국에서 이미 기쁨 가운데 영접하셨고 이 지상에 있는 많은 부모님들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소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리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모님께 대한 자녀들의 순종함과 공경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천년 전에 사도바울에 의하여 쓰인 이 본문이 왜 써졌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잘 하고 있으면 이런 본문이 필요가 있겠습니까? 워낙 잘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권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주위를 환기시키고 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신 제도의 아름다움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부모를 공경하라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되어야 될 일이지만 그것역시 되지 않을 어려움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 중에 하나로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인간세계에 쉽지는 않으나 하나님께서 꼭 이루셔야할 내용으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역사를 이루고자 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을 주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자녀의 본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부모님의 마음을 따르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연세가 들면 우리는 현실과는 다른 고루한 생각을 가지실 수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연륜이라는 것이 전혀 무시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 지혜를 따르는 것이 우리들에게 매우 유익이라는 것을 삶의 시간을 보면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이가 드시면 기억력도 떨어지고 두뇌 회전능력도 많이 늦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우리들에게 특별한 주어지는 축복이 있으니 그것이 이제까지 알고 있는 사물의 단편적인 지식의 조각들이 연결고리를 통하여 종합적으로 맺어져 이루어지게 되고 그것이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삶의 내용들이 단편적인 조각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삶을 다 통합해서 조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경륜을 거치면서 그것이 종합되고 연합되어 모든 사물을 통찰하여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생기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삶의 연륜과 경험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현재 내가 어떻게 있어졌나를 잊지 말고 생각하면 특별히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을 그냥 지나쳐도 될 만큼 가벼운 소리가 아님을 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처음상태를 생각해 보면 정말 부모님의 은혜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부모의 사랑과 돌보심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음을 봅니다. 특별히 우리가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인품과 인간적인 도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의도를 성취해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합니다. 나를 위한 것인가 정말 부모님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결국 부모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저도 한 3년 전까지는 저의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88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님이 제가 집에 가면 꼭 곤란한 질문을 한 가지씩 하세요. 무엇인가하면 어쩌다 밤에 늦게 들어가서 밤 10시, 11시, 12시에 들어 갈 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머님 방 찾아서 인사를 드리면 "밥 먹었냐?" 하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밤 10시 11시 되었는데 그때까지 밥 안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그때 밥을 안 먹었다고 한들 집에서 밤 11시, 12시에 밥을 먹겠습니까? 그런데 꼭 밥 먹었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면 그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예 밥 먹었습니다. 잘 지냈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왜 필요 없는 질문을 하십니까"라는 대답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지요. 그런데 그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들으면 비단 밥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인사를 건넴으로 말미암아 자식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염려하고 또 배려하고 또 그 상태를 알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밥에 국한 되어 질문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도 나이가 들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드려야 합니다. 나무도 그 나뭇잎이 조그마할 때가 있고 장성해서 수목을 이룰 때가 있고 가을에 물들어 떨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흘러가면서 삶의 유전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제 자식이 나이 들면 젊었을 때는 부모의 도움을 받던 자식이라도 이제는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고 이해를 해드리는 자식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모님에 대하여 생각할 때 피곤하다 생각하지 마시고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 것인가를 생각하여서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아야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을 보면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있던 믿음이 이제는 그 자식대의 손자 대에 흘러서 이와 같이 디모데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이와 같이 순전한 믿음이 있는 것은 네 어머니와 네 외할머니의 믿음에서 전수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모를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매우 큰 축복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길임을 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격과 믿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부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녀 그것은 그 만큼 자기의 삶에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셨고 우리의 부모님들은 또한 이러저러한 삶의 환란과 고초를 거치면서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연륜 속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처를 가진 부모님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녀는 그만큼 자기 삶에 자신이 있고 또 뿐만 아니라 마음에 넉넉함을 말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입지가 굳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과거의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를 창피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입지가 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과거에 있었던 어려운 이야기들을 오히려 마음에 부끄러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부모님이 혹시라도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말이나 행동을 하신다고 해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부모님이기 때문에 더욱더 배려해 드리고 그 부모님께서 이제까지 우리를 키워주시기 위해서 애쓰신 결과 그와 같은 지경에 이르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부모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약한 사람을 배려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 강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강자의 특징은 약한 사람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배려하고 보살펴 드리고 이해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든든히 서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부모님 같으면 내가 잘 섬기겠는데 나와 매일 만나고 매일 관계를 이렇게 이루어 가고 있는 정말 내 부모만은 잘 모시기가 어렵다는 경우가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갈수 있을 법도 합니다. 어쩌다가 만나는 분들 일 년에 몇 번 만나시는 분들 왜 잘해드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늘 보고 늘 관계 속에서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충분히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 부모님으로부터 전수를 받아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제가 목사이다 보니까 여러 가정을 다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정을 심방해 보게 되면 그 가정에서 노인 분들이 계신 가정이 여럿 되십니다. 오늘도 이제 1부, 2부, 3부, 4부, 5부, 6부까지 이렇게 다 70세 이상 되시는 성도님들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같이 위로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들이 있는데 1부 예배는 좀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1부 예배 때 앞으로 나오시라고 했더니 이 안에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아침에 7시 예배를 드리는데 70세 이상 되시는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아, 굉장히 일찍 일어나시니까 1부 예배에 오시고 또 이렇게 계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교회에서 목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1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지요. 아마 여러분 그 이유를 잘 아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분이 1부 예배에 오셨습니다. 허리가 굽고 어깨도 굽어지신 많은 부모님들 또 저기서 이 앞까지 걸어 나오는데 아주 상당히 시간이 걸립니다. 걷는데 불편하셔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전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사모해서 매주 하나님 앞에 나오시는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서 참 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심방을 가면 부모님들이 집에 계신 경우에 좀 특징이 있습니다. 다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이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가 가면 목사하고 얘기를 좀 하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목사가 가면 얘기를 들어 드리지 않습니까? 제가 늘 분위기를 보면 그 부모님이 말을 하는 순간 자식들은 긴장을 하기 시작해요. 안 그렇습니까? 굉장히 긴장을 하시는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을 하실까? 아주 굉장히 긴장을 하시는 것 같아요. 또 자식들의 비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러한 긴장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부모님들은 대부분 자식들을 키우실 때 어떻게 키우셨는지 그 자녀들이 자랄 때 어떻게 자랐는지 그와 같은 모든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잘 자라주는 것을 고맙다 그렇지만 그 얘기를 하는 과정가운데 자식들은 마음속에 조마조마한 마음도 있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연세 드셔서 자식하고 기호와 취향이 달라서 이러저런 얘기를 하실지라도 오히려 듣는 목사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우리 부모님들을 모시고 계신 그 인격이 너무나 훌륭해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무런 어려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정말 내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 있는 내 부모님을 아끼고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가 어찌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이 좁았던 것 같습니다. 뭐냐하면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부끄러워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어머니가 저를 42세에 낳으셨습니다. 그리고 제 위로 5명이 있는데 첫째하고 저하고 20살 차이입니다. 옛날에 그런 가정 많았잖아요. 저희 어머님이 22살에 맨 위 형님을 낳으셨고 그 다음에 누이가 넷이 있고 그 다음에 막내로 저를 42살에 낳으신 것입니다. 요즘도 이렇게 교회에서 보면 나이 드셔서 자녀를 낳으신 분들이 있는데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위로 다섯이나 있고 제가 여섯 번째로 막내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다 좋습니다. 제가 보니까 막내로 위에 형제가 많은 사람은 자라면서 돈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한 바퀴 돌면 되니까요. 그래서 용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초등학교 때나 다닐 때 부모님들이 학교에 오시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저의 어머님이 오시면 할머니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어린마음에 그게 좀 창피하다고 느꼈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마음을 느꼈었는데 제가 아주 조그만하지만 마음이 좁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중고등 학교 때는 선생님들하고 진학상담을 한다든가 할 때는 저희 누님이 오시면 마음이 좀 나은 것 같고 그랬습니다. 좀 커서 생각해 보니 내가 어떻게 치사한 생각을 가졌는가 하고 많이 회개가 됩니다.
사실 어머님이 3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점점 연세 드시면서 저도 나이가 들면서 어머님이 나이가 드시는 것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첫째 제가 어머님을 같이 가까이에 모시게 되니까 노인들의 모든 심정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이렇게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그 정서를 이해할 수 있고 거기에 쉽게 잘 맞추어 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어머님이 화요일만 되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분도 바르고 화장도 하시고 그러세요. 왜냐하면 화요일에 모세대학이 있습니다. 모세대학에 다니셨는데 제가 자동차로 태워 드릴까요라고 말씀드리면 절대 거절을 하세요. ‘나는 안타고 걸어간다’고 늘 그러셨습니다. 어머님이 건강하시니까 걸어가시는 것도 있습니다. 또 괜히 혹시라도 작은 일이라도 이렇게 부담 끼치거나 가야할 곳을 마다하고 기다리거나 하는 것들이 마음속에 혹시 염려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거의 세상 떠나시기까지 부지런히 교회를 걸어서 다니셨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녀들에게 조그만 걱정, 신세도 끼치지 않고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하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시는 것을 봅니다. 교회에 계신 연세 드신 분들을 뵈면 목사를 목사로만 보지 않고 아들과 같이 보시니까 훨씬 제 마음도 편하고 또 그분들도 편하셔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고, 목회에 도움도 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부모님들은 나이가 드셔도 자식들에게 이러 저러한 도움을 주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부모가 자식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그저 연약한 부모님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 부모님들이 자식을 위하여 많은 수고와 애씀의 끝에 마지막까지 자식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받들어 순종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고 계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은 부모님께 무엇을 많이 해드려서 기쁘신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이 편안하게 그 기호와 정서를 맞추어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님들이 연세 드셔서 뭘 많이 누리시겠습니까? 뭘 가지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또 누려야 얼마나 누리시며, 얼마나 많은 치장을 하시며, 얼마나 많은 것을 드시겠습니까?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존재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즉 부모님이 ‘내가 자식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무엇을 많이 받아서 좋아하시지는 않습니다. 자식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다고 생각될 때, 자식들이 아직까지 나 때문에 기쁨을 얻고 있다고 생각될 때 부모님들은 마음의 기쁨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자식들이 부모님에게 큰 은혜를 입는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도 키워보고 부모의 입장에도 서보지만, 사실은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애정의 10%만 부모님께 쏟아드려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파트에서는 다른 방의 소리가 잘 들리는 편입니다. 밤에 부모님의 방에서 기침소리가 들리면 ‘기침하시네, 어디 편찮으신가’ 하고 그냥 자지만, 아이들이 기침을 하면 일어나서 가봅니다. 그것이 부모님과 자식에 대한 마음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식이었을 때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을 것이고, 또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그렇게 키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자식의 면류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인물들이 다 부모님을 잘 공경한 분들임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삭을 모리아산의 번제단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때 이삭을 얻었고 이삭이 십수년의 소년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은 백십 몇 세 쯤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나이에는 이삭이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도망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중에서 이삭에 대한 기사는 별로 없지만 이삭이 믿음의 조상 반열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많은 특별한 사항은 없을지 몰라도 이삭에게는 그와 같이 부모님을 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아름다운 믿음이 있었기에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서 이러저러한 여한의 곡절 끝에 그의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아버지 야곱을 마차를 보내어 초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식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성공하게 되면 바로 그것을 통하여 부모도 영화로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부모가 기뻐지면 그것이 자식에게 은혜의 면류관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란 자식이 부모님에게 자랑거리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는 곳에 오래 살다보니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동네 골목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동네에 계신 분들이 제게 꼭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어머님이 전에 목사님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하고 꼭 인사를 하십니다. 어머님은 아들이 목사인 것이 마음에 많이 기쁘셨나 봅니다. 그래서 아마 동네 사람들에게 얘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하셨나 봅니다. 얼마나 기쁘셨으면 그렇게 하셨겠나라는 생각에 이러저러한 마음의 느낌을 가져보았습니다.
사실 부모님들이 아무리 나이가 드셔도 부모님들의 역할과 자리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집안이건 노인 한 분이 계시면 그 노인이 계신 집안으로 다 모이게 됩니다. 저도 어머님을 모실 때는 온가족이 저희 집으로 모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시니 전처럼 자주 모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노인은 노인으로서의 역할과 힘이 있고 또 온가족의 결속력을 이루는 위치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년기를 영적으로 볼 때, 이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인격이 완성되어서 마지막으로 최고의 완성품을 이룬 후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살아온 모든 인생이 집약되어 완성되기 직전이 바로 노년기입니다. 노년기는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천국의 문 앞에 있는 최고의 중요한 시기요,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작품이 완성되는 최종적인 시기인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도 이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이 노년기에 이르러 하나님의 축복 속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입니다.
자연의 섭리는 부모를 통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부모가 되어 또 자식을 낳는 것처럼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대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그 존재가치를 누리게 해드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인 것입니다. 잠언 23장 22절을 보면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아비에게 청종하고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우리 부모님을 기쁘게 하며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부모를 공경함으로 축복을 누리는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서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부모와 자식관계가 언제나 쉽게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수천년 전의 모세시대에도 이와 같은 말씀했으며, 또 사도바울의 시대에도 이와 같이 연필을 들고 기술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부모님을 섬겼느냐에 따라 내 자녀들이 우리들을 어떻게 섬기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제가 부모님을 부끄럽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그대로 받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서점에 갔었습니다. 중학생 아이 하나, 초등학생 아이 하나와 책을 좀 사려고 갔습니다. 이리저리 고르고 저도 책 좀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애들 둘이서 저를 불렀습니다. “왜?” 그랬더니, “아빠가 너무 큰 소리로 얘기해서 우리 창피해 죽겠어.” 그랬습니다. 제가 책을 보다가 무엇을 물어보고 하는데 목소리가 컸나봅니다. 저는 제 목소리가 컸는지 잘 몰랐습니다. 제가 창피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아 내가 심은 대로 거두는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면서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잘 섬기면 자녀들도 부모님을 잘 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서 가르치는 모범의 원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부모를 잘 섬기게 될 때, 왜 이러한 축복의 역사까지도 허락하셨을까요? 그것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셨고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 자녀들을 키우신 것을 보게 됩니다.
제게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일입니다. 그 때만해도 ‘새벽밥’이라는 것을 하셨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 두개 싸시던 그런 부모님의 시대였습니다. 어느 날 우연치 않게 어머님이 양말을 벗으셨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발에 화상을 입으셨는데 흉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화상의 치료는 다 되어있었습니다. 아마 어머님이 밥을 하시다가 뜨거운 솥을 발에다 떨어뜨리셨나 봅니다. 큰 화상을 입으셨는데 자녀들에게 일절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랑을 쏟으신 것입니다. 혹시나 자녀들이 알면 걱정하게 될까봐 완쾌될 때까지 혼자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발에 화상을 그렇게 입었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온 집안을 뒤집었을 것 같습니다. 화상 입었다고 온 집안에 얘기했을 것입니다. 그 치료기간도 길었을 것인데, 아마 굉장히 시끄럽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는 겨울에 어머님이 스웨터를 입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펼쳐서 보니 기브스를 하셨던 것입니다. 낮에 어디 나가셨다가 넘어지셔서 팔이 골절이 된 것입니다. 연락을 하셨으면 되었을 것인데 연락을 안 하셨습니다. 80세 후반이 되신 노인이 혼자 가서 기브스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병원에서 집에 연락하라고 했는데, 내가 집에 아무도 없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아마도 고령인 분이 오시니 걱정이 되어 집에 자식들에게 연락하라고 했나 봅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다 하시고 치료받으시고 기브스까지 하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과자까지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대단한 할머니죠? 제가 그것을 보며 느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엄살은 절대 부리지 말아야겠다.’
웬만한 일 어려워도 어렵다 하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머님은 어려운 일이 있으셔도 꼭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뭐 별거 아니다.” 사실 우리에게 그러한 어려움이 있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또 노인이 되면 잘 치료도 안 될 터인데 얼마나 불편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자식들이 걱정할까봐 마음에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어도 오히려 자식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또 조금이라도 걱정하지 않게 하시며 자식들을 더욱더 강하게 만드신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런 이러저러한 말씀을 하지 않아도 그와 같은 삶의 모습을 통하여 지혜를 배우고 삶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부모님들은 이와 같은 사랑과 희생과 헌신으로 자식들을 키워가고 있고, 그 가운데 마음에 여러 가지 은혜들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저 어려운 일 있어도 자식들에게 어려움을 알리지 않고 감내하며 자식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부모님께 잘 못해드린 것이 있어 마음에 후회되는 것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 잘해드려야 합니다.
“기회 있을 때 잘해드립시다.”
기회 있을 때 잘해드려야 합니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는 부모님의 말씀의 뜻에 따라서 주변 이웃들에게 우리의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모시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해야 될 의무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감사이고 자랑이기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부끄러워하면 우리의 자식들도 우리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부모님을 잘 섬기는 것이 최고의 고매한 인격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주의 백성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부모님들을 잘 모시고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이 되고 하나님 앞에는 영광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주의 축복이 임하시며 부모님들은 건강하게 이 세상에 사시다가 주님 부르시는 날, 문득 아름다움으로 그 나라에 입성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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