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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 /롬 1:1-17

by 【고동엽】 2022. 3. 7.

목차

롬 1:1-17 / 우리는 누구인가? 1

롬 1:18-32 / 하나님이 내어 버리실 때 8

롬 2:1-16 / 하나님의 판단 15

롬 2:17-29 / 표면적 신앙의 함정 22

롬 3:1-18 / 다 죄 아래 있다 29

롬 3:19-31 / 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36

롬 4:1-13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44

롬 4:14-25 / 아브라함의 부활신앙 51

롬 5:1-11 / 구원의 축복들 57

롬 5:12-21 / 구원의 근거 63

롬 6:1-14 / 죄에서 자유하려면 69

롬 6:15 -23 / 순종할 이유 74

롬 7:1-13 / 어떤 여인의 경험 79

롬 7:14-25 / 전쟁과 승리 85

롬 8:1-17 / 승리를 위하여 91

롬 8:18-30 / 탄식에서 영광으로 98

롬 8:28-39 / 승리의 확신 104

롬 9:1-13 / 민족을 위하여 110

롬 9:14-33 / 남은 자의 구원 117

롬 10:1-21 / 복음의 책임을 다 하려면 124

롬 11:1-6, 25-36 /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주권 130

롬 12:1-2 / 이 세상을 본 받지 않으려면 136

롬 12:3-8 / 지혜롭게 생각하라 143

롬 12: 9-21 / 행동하는 사람 149

롬 13: 1-7 / 국가에 대한 의무 156

롬 13: 8-14 / 우리시대의 청지기 163

롬 14: 1-12 / 형제를 판단치 맙시다 169

롬 14:13-23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려면 174

롬 15:1-13 / 한 마음 한 입으로 179

롬 15:14-33 / 예수의 일꾼이 되어 삽시다 184

롬 16:1-24 / 교회의 일군되어 삽시다 191

롬 16:25-27 / 나의 복음 197

 

 

 

롬 1:1-17 / 우리는 누구인가?

 

 

파리에서 죄수 한사람이 여자로 분장하고 탈옥을 했습니다. 목소리도, 몸짓도, 옷차림도 영락없이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도시 중심가에서 아주 쉽게 체포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패숀 의상이 걸려있는 양장점 앞을 이 사람이 그냥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여자라면 그냥 지나갈 리가 있겠습니까? 이와 비슷한 얘기가 한국에서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 한 분이 무단 탈출을 했습니다. 이 환자는 평소에 자기가 남자인데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유달리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을 하다가 아마도 명동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가 보았더니 아닌게 아니라 패숀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를 쉽게 찾았다고 합니다. 이 두개의 에피소드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인식하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죄수는 여장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여성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남성처럼 행동하고 만것입니다. 반대로 정신병원의 환자는 자기가 남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여성이라는 여성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여성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그만큼 내가 누구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느냐 하는 자기 정체인식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내가 어떤 태도를 갖고 삶을 사느냐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기 정체감 혹은 자기 정체인식(Sense of Identity)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 사도의 유명한 자기의 정체인식에 대한 고백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 자신을 누구로 인식하고 있었느냐를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본문이 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까. 다시 말하면 바울이 자기를 누구로 느꼈느냐가 오늘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왜 중요성을 갖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바울은 가장 상징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시대를 살아간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도인 이것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의 자기 인식은 어떤 면에서 우리들 자신의 자기 인식이 되어야만 하겠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바울은 자기만 그렇게 느끼고 인식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6절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즉 바울은 자기 얘기를 한 다음에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너희도-로마에 살고 있는 너희들도- 이 말 속에는 오늘날 20세기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 자신을 누구로 인식했습니까? 우리는 본문 1절의 그의 유명한 고백을 통해서 바울의 자기인식을 세가지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종이라는 말을 들을 때 이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까? 종이라면 자유가 없는 사람의 이미지를 제일 처음 떠올리게 됩니다. 종이라는 단어를 표기할 수 있는 희랍어 단어가 몇가지가 있는데 바울사도는 그 중에서도 자기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주인에게 철저하게 예속되었다는 의미를 가진 둘로스(doulo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인 나 바울은 ..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종이라고 하면 주인에게 억압당하고 무시당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종의 이미지를 그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로만 사용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사실 구약에도 보면 이 종이라는 단어의 의미지가 부정적이 아니라 때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씌여진 예가 더러 있었습니다. 예컨대,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모세의 율법가운데 이런 법규가 있었습니다. 어떤 종이 주인을 위해서 6년을 일하고 제 7년이 되면 안식년에 주인은 이 종에게 자유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이 주인에게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제가 지나간 6년동안 살다가 주인님하고 무척 정이 들었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따라서 저는 앞으로 나가서 자유하지 않고 한평생 주인님을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면 이 주인은 종을 데리고 와서 귀에다가 송곳으로 구멍을 뚫습니다. 멋으로 뚫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영원한 종에 대한 표시입니다. 이 표시를 갖게 되면 그날부터 주인은 그 종을 더 이상 종으로서 취급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아들과 똑같이 대우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런 경우에 우리는 종에 대해서 이런 개념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종’, ‘자유의 종’ 즉, 종은 종인데 자유한 종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때문에 자기의 자유를 오히려 주인에게 반납하고 스스로 자원해서 종이 된 사람이며 그가 종이 된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애정때문에 그 자유를 반납하고 기꺼이 그 주인의 심부름을 하며 한평생 그 주인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한 종! 아마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문화속에도 비숫한 종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 로마에 있어서도 종이라는 것은 아주 천대를 받고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종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때때로 로마사회 속에서도 매우 달라질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주 지체높은 귀족의 종이 되었을 때, 아니 로마의 종 가운데서 어떤 자유인보다도 어깨를 높이며 프라이드를 가진 종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의 황실에서 심부름을 하는 황제(가이사)의 종들입니다. 나는 가이사의 종이다. 이것은 굉장히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어쩌면 그런 개념들을 인식하면서 오늘 이 본문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로마의 황제의 종이 문제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울은... 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다메섹 도상에서 주인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이후부터 강렬한 빛앞에 노출되어 이 빛앞에 포박된 바울이 자기를 부르던 그 음성의 주인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친 이후, “주여 뉘 시오니이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시작한 이후 바울에게서 새로운 신분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종) 바울은!’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이 바울이 가졌던 동일한 고백을 사랑하는 이웃들 앞에 여러분은 고백하실 수가 있습니까. “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동원은”. 1절에 다같이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고백하기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의 삶이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은 종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 즉, 자아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종의 삶이 불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만약 그 종이 매우 중요한 사명을 위임받은 종일 경우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종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도로 인식합니다. 종은 종인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본래 이 단어의 유래는 황제나 왕으로 부터 특수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자를 뜻할 때 이 단어가 씌여졌습니다. 매우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왕이 친히 어떤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탁하고 그를 축복하며 떠나 보냄을 받은 자가 사도입니다. 오늘날의 개념과 가장 유사한 개념을 생각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대사(Ambassador)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며 그 나라로 부터 매우 중요한 임무를 받고 파송을 받은 사람 그래서 사도의 자격은 반드시 자기를 보내신 높은신 분과 알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자격입니다. 김현희가 비행기를 폭파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 수가 있었던 것은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를 만나 사명을 친히 부여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앞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자격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사람이라야 사도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의 사도직이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제자들처럼 살았던 제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 주님을 친히 만났다. 다메섹도상에서 나는 그 주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주님이 내게 친히 그 임무를 주었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종종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이 문제가 되는 부분에서 자기변명을 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더냐 내가 그 주님을 친히 보지 못하였더냐’(고전 9:1)고 합니다. 왕중의 왕이신 그분을 뵙고 그 경험속에서 자기를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울! 그리고 그 Mission을 위하여, 나를 이 놀라운 사명을 위해서 불러주신 그분이 또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 바로 사도의 의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사도로 인식합니까? 좁은 의미로서는 예수님의 12제자 같은 분이 사도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분 앞에 왔습니다. 우리가 그분앞에 왔을 때 우리를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셨는지요. ‘내가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나도 너희들을 보내노라.’ 주님 앞에 나왔을 때 나를 받아 주시고 나를 용납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다시 세상으로 나를 보내신 그분, 그런 의미에서 사도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들으시는지요!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복음의 전령으로 인식합니다. 우리 1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는 임무를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인데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바울의 자기 인식입니다. 복음의 전령!

 

내가 왕에게 보내심을 받긴 받았는데 아주 나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이런 악역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가 있습니다. 나쁜 소식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저도 그런 역할을 꼭 한번 한적이 있습니다. 군대에 갔었을 때 저에게 주어진 1차적인 보직이 영현계였습니다. 영현계란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화장해서 처리하여 박스속에 넣어서 그 집에까지 갖다 주는 일입니다. 이 보직에 떨어졌더니 옆의 사람들이 좋은 보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시체 태울 때 옆에서 놀기만 하면 되고 갖다 주기만 하면 되니까 아주 좋은 것이라고 축하까지 해 주더라구요. 왜 나에게 이것을 시켰느냐고 물어보니까 서류를 져보다가 전도사한 과거가 있어서 이것도 잘하겠다 싶어서 시켰다고 합니다. 서너사람이 짝이 되어서 가는데 제일 졸병이었던 제가 박스를 붕대처럼 매어서 드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제 일차적 파견을 받아서 경상도 밀양근처에 갔는데 어떻게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어떤 놈이 내 아들을 죽였느냐”고 작대기를 들고 뛰쳐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그 박스를 거기다 두고 그냥 도망갔습니다. 그렇게 혼이나서 한번 갔다와서는 “하나님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나요? 바꿔달라”고 기도하고 상관에게 바꿔달라고 했더니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해서 영어를 곧잘 하니까 거기에 맞는 일을 달라고 했더니 얼마 후에 카츄사에 파견을 받아서 옮겨 가게 되었는데, 저는 그 때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악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책임을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런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좋은 소식(Gospel)을 위한 전령으로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유앙 겔리온)이라는 단어가 맨 처음 씌여진 때가 이런 경우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거기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해방의 명령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자유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이때 처음으로 유앙겔리온이라는 기쁨의 소식, 복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우리의 이웃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자유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구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삶이 가능합니다”라고 바로 이런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가 기다리고 있는 최대의 기쁜 소식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묻고 있는 가장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의 일평생의 삶은 무의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떻게 삶을 살 수가 있는가?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자가 필요합니다.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이 복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2절 말씀을 보시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은 새 소식은 아닙니다. 이 복음은 전에부터 있었던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예고하셨고 약속된 소식인 것입니다-“어느 날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사람들의 죄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을 맛볼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 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 역할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을 아주 잘 알아야 하고 사람의 사정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라고 합니까. 3절에 보시면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참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십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절에 보시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4절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참 사람이시며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만나면 제일 괴로운 질문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하나님이냐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입니다. 질문을 바꿔보면 사람의 아들도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이신가? 의 정답은 그는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라고 말합니다.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사람이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둘중에 어느 것 하나를 부인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모든 이단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든지 아니면 인성을 부인하든지 둘중의 하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사정을 얼마나 잘 아실까요. 또한 그는 참으로 사람으로 오셨으니까 사람의 사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중보자, 화해자가 될 수 있으신 유일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때문에 인간을 진노할 수 밖에 없으셨던 하나님이 그 인간을 향하여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자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그리고 인간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변하기 위하여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의 전령자로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인식에 근거하여 자기의 역할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또한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그리고 주께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저와 여러분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것을 우리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서 복음을 위해 보내셨다고 믿고,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령으로 살기를 그분이 기대하신다면 우리가 해야 할 그 사역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을 두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사역입니다.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분류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낮은 사람 높은 사람, 무식한 사람 유식한 사람, 별볼일 없는 사람 별볼일 있는 사람,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우리는 두가지로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입니다. 결국 우리의 사역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나는 신자와 불신자를 어떤 태도로 근접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두가지로 규정할 수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 만날 때, 격려하여 그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에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는 일평생, 바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된 삶의 모습임을 오늘의 말씀 앞에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믿는 자, 신자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1절을 읽어보시면,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즉, 그는 “나는 로마에 있는 당신들을 만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여러분들을 섬김으로서 여러분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믿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성숙하고 강화되고 있습니까.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신앙이 성숙치 못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교회와 특별히 목사에 대한 발언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같이 만나서 한바탕 교회를 욕하고 목사를 욕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여러분 주위의 분들이 어떤 영향을 받겠습니까. 여러분, 교회에 대한 혹은 우리의 영적 지도자에 대한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자녀들 앞에서의 우리의 발언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컷 교회와 목사를 욕해놓고 다음 주일에 왜 교회에 안가냐고 하면 자녀들이 가겠습니까? 무슨 영향을 받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의 신앙이 자라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그의 신앙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떻게 했습니까. 9절에 보시면 바울은 로마교인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을 자기의 이웃으로 인식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도의 교제의 시작은 먼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돕기를 원한다면 그들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로마에 있는 당신들을 내 마음에 품고 먼저 기도했습니다. 거기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시작은, 생각나는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10절에 보시면 그가 위해서 기도하고 있던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기 위해서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만큼 바울은 기도했던 그들을 만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사람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아주 논리적인 전개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만 읽고 나면 바울에 대한 인상을 아주 차겁고 논리적이고 아주 냉철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귀절을 보면 바울이 꼭 그런 사람만 같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제 TV를 보니까 한국에 와서 새로 배운 말인데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이라고 하는 단어를 들었는데 바울도 그런 알부남인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설교할 때 소리를 많이 지르니까 저보고 무섭다고 하는데 저도 알고 보면 아주 부드러운 알부남입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기도했으며, 또 그들을 만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울도 그들을 통해서 또한 도움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12절에 보세요.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말씀으로 도울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저를 도울 수가 있습니다. 저는 20년 목회의 연륜이 지나가면서 짧다면 짧은 목회기간이었지만 목회를 하다보면 많은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내 부족함 때문에 때로는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오해를 받기도 하고, 목회를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이런 사람을 ‘나의 아리스다고’라고 부릅니다만.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아리스다고란 인물에 대해 가끔씩 언급을 합니다. 이 사람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리스다고란 사람은 언제나 바울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항상 말없이 곁에 서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때면 항상 등장하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던 그 이유도 항상 마음이 외롭고 지치고 낙심이 될 때마다 조용히 와서 “목사님, 기도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라고 격려해 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모르지만 이 사람은 저의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어떻게 저 사람을 세울 수가 있을까를 생각하며 서로 서로 세우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 전령으로 바울은 믿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저와 여러분의 소원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우리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14절에 바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은 스스로를 복음의 빚진 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야만인에게도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혹은 유식한 자가 무식한 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에 대한 최대의 편견은 부자의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게 선교할 수가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1세기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유대와 로마를 비교해 보세요. 유대는 로마에 의해서 정복을 당했습니다. 힘으로 말하자면 로마가 강자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 했다면 로마의 강자, 자기들을 정복한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당시 로마가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아직도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문화는 그리이스문화였습니다. 희랍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대표였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은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보세요. 나는 이 복음에 빚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16절에 보시면 내가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직장의 상관앞에서 이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시지는 않습니까. 많이 배운 사람들앞에서 기가 죽어서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없나요? 그러나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의 자랑과 영광은 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권력을 가지고 세계의 도로망을 설치하여 세계를 통하게 만들었습니다. 로마는 그 힘을 가지고 알려진 모든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로마는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로마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무력합니다. 희랍인의 찬란한 문화는 세계의 지성을 제공했지만 희랍의 지성으로도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만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복음만이 내 사랑하는 이웃이 누구이건- 그들이 내가 접근하기 어려워 보이는 나보다 높은 사람이든,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이든 상관없이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인간,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방황하고 고독하며, 인생의 영원한 운명을 알지 못하고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으로 내 이웃들을 바라보며 능력인 복음을 가지고 이웃들을 접근하고 계신지요!

 

복음은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17절에 보시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죄용서와 구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 구원의 적극적인 측면으로 복음은 인간을 의롭게 만듭니다. 인간이 어떻게 의로워질 수가 있는가? 우리는 모두가 다 의를 열망합니다. 노력을 해 보았습니다. 결심을 해 보았지만 작심 3일이었습니다. 도덕이 나를 의롭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경험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하며 무엇이 의로운 삶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그 많은 율법에 통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이 바울을 의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나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예수 앞에 왔더니 예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그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내 양심의 가책에서 나를 해방하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나를 의롭다 하신 그 날부터 그 의로움을 향한 열망을 내 속에 주시고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복음! 누가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제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본문에서 아주 좋아하지 않는 번역은 15절에 ‘할 수 있는 대로’라는 말입니다. 이 번역은 마치 할 수 없을 때는 못하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영어번역을 봐도 “I'm eager 혹은 I'm ready” 즉, “최선을 다하여”라는 뜻입니다. 나는 준비된 상태로 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대상 속에 저들을 바꿀 수 있는 저들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도상에서 믿는 사람 만나면 격려하고 도와줘서 우리 주님 사랑하도록 만들고, 내 인생의 도상에서 오늘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가 누구이든, 내가 그 사람보다 얼마나 못 배웠거나, 지위가 낮거나 상관없이 복음이 없어서 외롭고 복음이 없어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은 사람들, 복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대상들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자가 되십니다”라는 이 복음을 전하도록 나를 불러 주시고 보내주시는 주님,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 보내심을 받아서 오늘도 복음의 전령으로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을 살기를 원합니다”라는 이 고백이 우리 자신들의 역할이요, 우리 자신의 인식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롬 1:18-32 / 하나님이 내어 버리실 때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 Ingersoll이란 사람이 큰 광장에 청중들을 모아 놓고 무신론 강연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강연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는 매우 흥분한 어조로 갑자기 자기의 시계를 풀면서 소위 신에 대한 유명한 도전장을 냈습니다. “내가 앞으로 신에게 5분간 시간을 주겠소. 나는 5분동안 신을 저주할 것이오. 신이여 당신이 살아있다면 나를 저주하고 나를 형벌하시오” 그리고 5분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로 신을 모독하는 발언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5분 후에도 그가 계속 연단에 서 있게 되자 그는 더욱 소리를 높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보셨지요? 이만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분히 입증된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저 뒤편에 있던 한 노인이 앞으로 다가서면서 “한마디 해도 되겠소?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제가 감히 당신의 연설에 대해서 평가를 할 수가 있다면 당신은 오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의 비존재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했다고 생각하오. 왜냐하면 내 경험에 의하면 내가 섬기는 나의 신은 내가 그 하나님을 거스릴 때, 그는 나를 책망하시고 때로는 나를 징계하셨소. 왜냐하면 나는 그가 그대로 버려둘 수 없는 그의 자녀이었기 때문이요. 오늘 당신에 대한 신의 침묵은 당신의 신에게 버림을 받은 사람인 것을 충분히 증명할만 하오.”라고 유명한 대답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 노인의 대답은 대단히 성서적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앙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한 양상은 그 사람들을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24절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여기 ‘내어 버려두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26절에도 같은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똑 같은 표현이 한번 더 등장합니다. 28절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라고 반복해서 말씀하고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아파트 옆집에 살고 있는 아이가 잘못을 한다해도 그 아이를 꾸중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집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 잘못할 때 그대로 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설득합니다. 그리고 호소합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들어서 때리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시지요? 그대로 버려둘 수 없는, 포기할 수 없는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버려두고 맙니다. 이것이야 말로 최대의 징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없이 삶을 살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 이방인들의 죄악들을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한 양상이 그들을 그대로 버려두는 것입니다. 아니, 로마서는 복음의 책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왜 로마서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구원의 복음을 말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필요한 버림받은 상태에 놓여있는 절망의 현실 앞에 사람들은 분명히 직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혹은 환자에게 치료의 복음이 들려지기 위해서는 그가 처한 그 병세에 대한 엄격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어 버려두신 삶-이 삶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이 내어 버려두신 삶을 얘기해야만 할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구원이 필요한 삶을 우리가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로 그 삶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는 삶입니다.

 

그것이 18절에서 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8절에서의 진리를 막고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여기서의 진리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설명이 그 다음 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곧 진리입니다. 바로 진리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인데 그 진리가 저희 속에 있음에도 진리를 거절하고 기피하고 고의적으로 그 진리를 거절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을 향한 사람들의 가공할 반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내 속에, 아니 우리 가운데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를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진리는 우리의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습니다. 밖에 있는 진리, 자연을 보세요. 자연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20절의 증언입니다.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그 자연을 바라보십시오. 그속에 나타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그 자명성, 그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만한 이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진리를 막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리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있습니다. 저 유명한 철학자 칸트가 말한대로 “저 밤하늘에는 무수의 별들이 반짝이고 내 마음속에는 양심의 도덕률이 빛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양심도 하나님을 알만한 우리 속에 있는 하나의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양심이 양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요?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기도 모르게 신을 찾는 두가지 케이스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압도할 만한 영감어린 자연속에 처하게 될 때, “야-!” 하고 신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알프스의 산록에 올랐을 때 같이 온 관광객중에 스님이 한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놀라운 압도하는 광경을 보더니, “야, 누가 만들었을까!”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인간이 절대절명의 위기앞에

 

봉착할 때에 저도 모르게,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알만한 분명한 진리가 우리 가운데 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불경건과 불의때문입니다. 18절에 보시면 불경건이란 하나님을 향한 그릇된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나 불의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사람을 향한 그릇된 자세를 말할 때, 이것을 불의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먼저 불경건을 말하고 불의를 말합니다. 이 불경건과 불의때문에 진리를 막고 있다고 합니다.

 

십계명은 엄격하게 말하면 두개의 돌비에 새겨진 것입니다. 십계명은 두개의 계명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제 1계명부터 4계명까지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관계에 있어서의 계명들입니다. 대(代) 신적(神的)인 계명입니다. 그러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계명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속에서 주어지는 계명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계명을 깨뜨리는 것, 이것이 불경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향하여 잘못된 삶을 사는 모습 이것이 바로 불의의 모습입니다. 이 계명을 깨뜨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진리앞에 서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진리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진리를 알만한 분명한 진리의 자명성 앞에 서면서도 자기의 불의를 커버하기 위해서, 자기의 불경건을 커버하기 위해서 진리를 막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버림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버리신 삶의 또 하나의 모습은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21절에서 23절까지의 증언입니다.

 

여러분이 종교에 대한 어떤 글이나 책을 읽어보면 종종 세속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씌여진 종교에 대한 글들을 접하게 됩니다. 이런 글들이 소위 종교의 발전을 말할 때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들을 읽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연을 숭배했다. 소위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혹은 물활론 또

 

는 자연숭배에서 시작한 인간이 조금 깨이면서 발전하면서 다신론을 섬기게 되고, 그 다음에 인간의 지성이 좀더 성숙하고 발전하면서 비로서 하나의 유일신을 섬기는 고등종교를 섬기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종교에 관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성경의 증언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가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타락하면서 다신론에 떨어지고 더 타락하면서 더 저급한 것을 섬기는 자리로 전락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증언입니다.

 

2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말씀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앉혀 놓고 썩어질 사람을 섬기다가 그 다음에는 금수를 섬기다가 더 전락해 버리면 버러지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락해 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은 역사나 문화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우리는 종종 지나간 세기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문화가 좀더 발전하면, 과학이 좀더 발달하면 사람들은 모든 미신을 포기할 것이며 우상숭배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 현대가 미신을 포기한 시대처럼 보여집니까?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현대는 미신이 최고로 리바이블되어지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할 수록 사람들이 더 미신을 좇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제가 얼마전에 신라호텔에 가보니까 호텔 로비에 토정비결을 갖다 놓고 보고있더라구요. 여러분이 혹시 미국을 방문해서 책방에 들어가게 되시면 과학이나 여행등 여러 session 들이 있는데 그중에 반드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New Age session입니다. 여러분 New Age Movement가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는 굉장히 성행하고 파급되고 있는데 이 운동의 본질이 미신입니다. 그것을 과학의 이름으로, 예술의 이름으로 미화시켜 놓고 현대인들이 심각한 우상숭배로 떨어져 가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인 존재다” 라고 한 유명한 벌코크의 말처럼 불치료적으로 종교적인 인간이 참된 하나님을 떠나가면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없는 자리에 가짜를 숨겨 놓아야지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대용품,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점점 더 저급한 신을 대용품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 세속적 인본주의의 정신입니다. 그러다가 금수 즉 자연을 섬기다가 나중에는 아예 버러지를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세요. 이것은 천천히 이루어져가는 하나의 전락의 과정, 타락의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를 통해서 한 때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들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때가 챤스입니다. 그 때에 내가 회개하고 진리를 수용하는가 아니면 이 진리를 거절하고 도피해 버리는가. 그렇다면 결국 마지막에 가서 우상숭배의 자리로 전락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무신론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가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의 한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가 있는 최대의 종교적 비극이 있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왔다가 그냥 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도 부지기수로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이라는 찬송만 부르다가 주님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가까이만 왔다가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그 주 안에서 새로 태어난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하고 거의 하나님에 대한 느낌을 갖고 가까이 오기는 하지만 그대로 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깊은 우상숭배속에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어버려두신 삶의 현장의 또 하나의 증거가 여기 우상숭배로 전락해 가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어 버리실 때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될까요?

 

그 세번째는, 정욕의 노예로 사는 삶입니다.

본문의 24절에서 27절까지의 증언입니다.

 

도스토엡스키가 한 유명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약 신이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확신만 한다면 사람들은 못할 일이 없다”는 무서운 말을 했습니다. 그나마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이러다 혼나지” 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떤 신의 의식이 그들의 양심을 억제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없다고 확신할 때 이 땅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공할 이 세상의 삶의 현장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토스토엡스키의 얘기를 이렇게 명제를 바꾸어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가 신이라고 느낀다면 이런 사람들이 못할 일이 없어지고 맙니다. 신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또 하나는 내가 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못할 일이 더욱 없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에 대한 절대판단의 기준이 결국은 자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연출할 삶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신이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누가 상관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용감한 타락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용감한 타락이 나타나는 제일 가시적인 첫번째 삶의 현장이 있다면 성적인 현장입니다. 사람들이 죄속에 빠져들어갈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중에 하나가 성적인 타락입니다. 그리고 왜 성적인 타락이 제일 먼저 나타나는가에 대한 답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장 추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성적인 타락이 최악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것이 동성연애의 현상입니다. 이성을 실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동성을 실험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편지를 기록하던 로마의 문화속

 

에 이미 등장하고 있었던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26,27절의 증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여러분, 바울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로마의 황제는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황제숭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자기가 신이라고 사람들이 섬기자 자기가 신이라는 신의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그들이 못할 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먼저 수많은 여인들을 자기의 성적인 희롱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자 마침내 동성을 자기의 사랑의 대상으로 실험하기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역사는 기록하기를 로마의 처음의 15명의 황제들 가운데 14명이 동성연애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미나는 사실은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만드는 작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그 당시의 로마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일종의 어용 철학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로마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또한 동성연애자들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랄하게 하나님을 떠난 그 당시의 삶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우상숭배로 전락했을 때에 정욕의 노예로 전락하면서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극악한 삶의 하나의 현상이 동성연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그 당시에 이미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습니다. 27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사를 읽어보면 로마의 역사학자인 타키투스는 말하기를 로마의 황제의 최대의 고민이 성병 처리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태리를 방문해 보신 분들은 폼페이에서 그 폼페이의 최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 폼페이의 자리를 관광하면서 실감있게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지나간 날 단순한 로마의 비극에 불과할까요.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오늘 이 시대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살아계신 복음주의 신학자가운데 Cal Henry박사란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이 있다면 그 철학의 사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대주의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상대주의(Relaticism)라는 것은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사람들은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니까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도 불가능합니다. 이 가장 위험천만한 철학,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최대의 철학은 바로 상대주의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 시대의 모습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삶의 장면이 바로 성적인 타락입니다. 이 성적인 타락에 대한 가공할 타락의 극악한 현상이 바로 동성연애의 삶의 현장이 아닌가요? 로마의 시대를 처벌하신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이 시대의 이런 성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AIDS입니다. AIDS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이 아니라 아이고 이제 다 살았다의 약자라고 합니다만. 물론 이 병의 피해자 가운데 무고한 피해자가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AIDS가 이 시대에 끼치고 있는 가공할만한 이 삶의 공포를 들여다 보세요. 얼마 안 있으면 이제까지 전쟁에서 죽은 숫자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숫자가 이 AIDS로 죽어갈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가면 오래지 않아서 이 지구상에서 10명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AIDS로 죽어갈 것이라는 경고가 나와 있습니다. 만약 이 시대를 돌이키는 회개의 역사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버리신 세대, 정욕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삶의 현장을 지켜 보십시오. 우리는 바로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의 삶의 모습은 무도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본문의 28절에서 32절까지의 내용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29절에서 모든 불의-불의는 사람을 향한 삶의 그릇된 자세를 말합니다. 또한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등등의 리스트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인 문제들 뿐이라고 진단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 불의에 빠진 원인이 어디있습니까. 불의는 항상 불경건 다음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이 순서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먼저 경건치 않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이 불의속에 빠지고 있는 원인을 28절의 첫머리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도덕적인 원인이 아니라 신앙적인 원인입니다. 28절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또한 저희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세대, 하나님을 떠난 이 세대는 별수 없이 이 불의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 결과가 도덕의 실종 즉 무도덕한 삶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극치에 달하면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 도덕적 가치관의 전도를 보십시오. 무엇이 나쁘냐는 것입니다. 왜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양심으로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자들을 오히려 옳다고 두둔하는 이 가치관이 전도된 오늘의 무도덕의 세태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여기에 도덕적 허무주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덕적인 개혁운동을 제시

 

합니다. 혹은 사회적인 개혁운동을 제창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도덕의 실종의 문제는 이런 도덕적인 개혁운동만으로 절대로 치유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뿌리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뿌리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었을 때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 심판주이신 그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고 경외할 때 어떻게 죄를 범할 수가 있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어린이들이 4층에서 어머니들과 함께 예배를 보고 있고 또 어린아이들에게 예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따로 이 예배를 중계하고 비디로도 보여주고 하는데 엄마를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캔디로 주고 비디오도 보여주고 음악도 틀어주고 또 그 아이들이 유쾌하게 그 환경속에서 1시간 동안 잘 보낼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우리가 열심히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4층의 엄마를 떨어져 있는 아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어떻게 해야 해결합니까. 엄마를 만나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4층에 있는 아이들에게 마음의 근본적인 평안은 절대적으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간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여러가지 삶의 처방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 문제가 아닙니다. 어거스틴이 얘기한 그 유명한 말대로 “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 그 품안에 쉴 때까지는 나에게 결코 평안함이 없나이다” 고 한 것처럼 그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해결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가지의 유형의 삶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불신앙의 삶을 보았습니다. 이 불신앙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자 본문이 시작되는 18절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즉, 불신앙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그것은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를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18절과 가장 대조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17절에 나와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불신앙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고 하고, 그러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소유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는 삶을 살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불의함을 깨닫고 내 불의를 회개하고 나 혼자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해도 안됩니다. 단순한 결심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하나님 없이 산 것을 깨닫고 불의한 삶의 현장을 주 앞에 회개하며 내 마음에 하나님을 소유할 때 그리고 의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주의 의가 옷 입혀지고 또 의를 따라 나타나는 놀라운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이 불의한 하나님의 심판앞에 처한 이 시대의 문제, 이 시대의 삶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는 구원의 소망의 시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도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안 계십니까? 교회는 나오고 있지만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사람은 안 계신지요? 내 불경건과 불의를 주 앞에서 처리하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까? 이 불의한 내 모습을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내어놓고,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게 나를 내어놓고 “하나님, 나를 다스려 주십시오”라고 고백할 때 이것이 바로 구원의 희망이요, 시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롬 2:1-16 / 하나님의 판단

 

 

교회에 다니는 네 친구가 야보고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하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첫째 친구가 “나는 사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담배를 끊지 못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자기에게 있는 복잡한 이성관계를 고백했습니다. 세번째 친구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어렸을 적 부터의 악습 가운데 하나인 도벽의 습성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사실은 슬쩍 한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네번째 친구가 아무 말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왜 너는 말하지 않느냐. 너만 통뼈냐”고 하니까 자기는 말하기가 곤란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다 했는데 너만 안하면 어떻하냐고 했더니 그럼 할 수없이 얘기하겠다고 하면서 “나의 약점은 남들의 흉이나 결점이나 약점을 알게 되면 불고 다니는 것이 나의 약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얘기한 세사람은 큰일 났습니다.

 

그러나 네째 친구의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타락한 인생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약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남의 약점을 드러내고 남을 판단하는데서 묘한 쾌감을 느낍니다. 타락한 인간성의 한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와같은 판단의 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허물과 약점이나 결점이나 범죄에 대해서 판단할 경우 판단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범죄보다도, 판단의 죄가 더욱 심각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묘한 사실은 이런 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현저한 범법자의 유형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사람들, 도덕적인 사람들, 그리고 매우 종교적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일 수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경고하고 있는 이 말씀을 받아야 할 대상은 유대인들입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존심이 매우 강한 유대인을 향해서 바울사도는 이 말씀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의 18절이하 마지막 부분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죄목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주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이 어떤 죄 가운데 살고 있는가 즉, 이방인들의 죄에 대한 리스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방인들의 죄를 논술하고 있는 동안 이 얘기를 듣고 있었을 유대인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 지당한 말씀이오. 그런 이방인들이야말로 정죄를 받아 마땅하오”라고 유대인들은 함께 바울사도의 이 고발앞에 아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얘기를 계속 하다가 갑자기 이 논지의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방인들-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우상숭배에 빠져 있으며 그리고 얼마나 그들이 어둠가운데 있는가를 말씀하던 바울사도는 갑자기 그 대상을 바꾸어서 유대인들을 가르킵니다. “그러면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다른 줄 아십니까. 여러분들도 이방인들과 본질적으로 똑같이 죄인임을 아시는지요?” 오늘 본문의 말씀의 톤은 그런 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없이 살고 있는 그들을 향해 경솔한 판단의 죄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성경은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죄속에 빠져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그들도 판단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판단이 어떤 것인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나를 판단하고 있는 그들도 어느 날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서야 합니다. 그 판단은 어떤 판단일까요? 주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판단하실 때 이 하나님의 판단은 어떠한 유형의 판단일까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판단의 세가지 중요한 규범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진리대로” 판단하십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 다음 2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여기서 진리대로 라는 말에 밑줄을 그어놓으십시오. 여기서 진리라는 단어는 거짓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런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크래머(Crammer)라는 신학자는 여기서 진리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하기를 “현상의 기초가 되는 저변의 실체”라고 말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그 현상의 기초가 되는 저변에 숨어있는 실체-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겉으로 나타나는 유대인들은 분명 우상숭배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그토록 고발하고 정죄하던 우상숭배와 대체로 상관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현상만으로 판단한다면 유대인들 가운데 극도의 성적인 타락은 만연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동성연애는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파괴적인 잔인한 범죄는 아직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보편적 사회현상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런 현상때문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이방인과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저 로마인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현상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 현상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실체를 봅니다. 그리고 그 실체의 면에서 파악할 때, “유대인들이여, 당신들도 이방인들과 꼭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죄인임을 아시나요?” 이것이 바울의 지적입니다. 그들에게 살인의 죄는 없었지만 그 살인의 죄를 야기시키는 동일한 미움의 죄가 그들의 안에 있는 것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간음의 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간음을 유발하는 동일한 동기인 음욕이 그들 안에 있는 모습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동성연애는 없었지만 도착적인 성의 실험에 흥미를 갖고 이를 즐기는 타락성을 바울은 그들 존재의 깊은 곳에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여,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으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실체에 있어서는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는 현상만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를 판단하실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판단하실 때, 그것이 오늘의 판단이든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자리든 전능자, 창조자, 심판자이신 그분 앞에서 우리가 판단을 받을 때 그의 판단은 진리대로 입니다. 이 하나님의 판단앞에 나 자신이 서야 한다면 우리가 이웃을 쉽게 경솔하게 판단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행한대로” 판단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여기에 행한대로 라는 단어에 줄을 그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판단하실 때 그는 행한대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거야 지극히 당연한 상식적인 이야기죠. 행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여기서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의 행함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상당히 의롭다는 이 특별한 자부심으로 도취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행함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세요? 그것은 두가지의 원인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함에 있어서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그 율법을 날마다 듣는 분위기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함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율법을 따라 살고 있다는 얘기는 다른 차원의 사건인 것을 아십니까. 내가 그 율법을 날마다 듣고 살고 있다는 것과 그 율법을 행하고 살고 있다는 얘기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듣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착각하고 있는 경우는 없을까요! 여러분, 이 유대인들의 착각이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의 착각일수도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십시오. 12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이 말씀을 던지고 있는 그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바울이 이 말씀을 왜 하고 계시나요? 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율법-모세를 통해 전달된 토라 그것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을 소유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대로 살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것대로 살지 못할 때 당신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 율법이 당신을 판단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심판의 날, 당신들은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율법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그 율법에 의해서 심판받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율법없이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심판을 받을까요? 그들도 율법없는 그 상태속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율법은 문자적인 율법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그들의 양심에 씌여진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14절,15절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결국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라와 하지말라의 두가지입니다. 양심도 비슷한 기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므로 양심은 씌여지지 않은 불문의 율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경우 그들은 이 양심의 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율법대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특권이었습니다. 거룩한 특권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특권입니다. 여러분, 공산권이 열리기 시작할 때, 그 공산권을 다녀온 사람들이 제일 감격스럽게 하는 얘기가 성경 하나만 주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의 소식이었습니다. 평생 마치 쪽복음처럼 강대상에서 부분적으로 들려주는 설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 말씀인 성경이 처음으로 그 손에 쥐어졌을 때의 그 감격을 우리는 능히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자랄적만 해도 깨끗한 성경을 한번 가져보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자랑이었는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이 얼마나 많은 시대속에 살고 있습니까. 성경도 그냥 성경이 아니라 Study Bible-연구할 수 있는 성경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아가페성경, 엠마오성경, 오픈성경, 큰글성경, 작은 글성경등 별 성경이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에게 이 성경이 주어졌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 성경이 많다는 이유때문에 내가 성경처럼 산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설교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삶의 수준이 그 설교의 수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정확하게 그 당시에 율법을 자랑하며 율법을 경청하며 날마다 율법을 읽으며 살고 있던 그 유대인들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들은 항상 율법을 많이 듣는 분위기 속에 살다 보니까 자기의 삶이 그렇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들음은 동시에 책임을 요구합니다. 그 들은대로 응답하십니까? 내가 듣는 이 말씀 앞에 내 삶과 내 전 인격이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에 부응하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요? 이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 그 모습이 보이나요? 아니라면 주앞에 서는 날 이 율법에 의해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주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그는 우리가 성경책을 얼마나 갖고 있었느냐는 그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평생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는 것으로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 앞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비약해서 그러니까 기독교의 구원론이 율법을 행하는 행함에 의존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처럼 미리 결론을 내리지는 마십시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까? 얻을 수가 있어요. 완전히 행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완전히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러나 이 긍휼을 얻기 위해서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그 율법대로 살지못한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의인되지 못한 나, 죄인이었던 나, 의롭게 살지못한 자신의 삶의 모습을 주님앞에 참으로 깨달은 그 사실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주변에서 빙빙돌고, 불신자보다는 비교적 낫기 때문에 내 삶은 이웃들보다 전혀 낫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가 우리를 판단하실 때, 그의 심판은 “행함대로”일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판단하십니다. 16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여기서 은밀한 것은 문자 그대로 은밀-비밀입니다. 그는 비밀까지 심판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그 행위를 만든 배후에 있는 우리의 동기를 판단하시고 우리의 사고와 생각까지 판단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찌기 11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경건을 추구할 때 그 경건을 내면성에서부터 추구하기 보다 외면적인 것으로 이 경건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유대인의 문서를 읽어보면 경건의 걸음거리까지 연습한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은 얼마나 경건한 모습입니까? 우리는 종종 중동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기도할 때 그 대상이 알라신이든 여호와 하나님이든 얼굴을 완전히 땅에 엎드리고 오랜 시간을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경건의 모습이 경건의 내면성을 보증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도 그런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엉망으로 하고 살다가 주일 아침에는 경건하게 하고 교회에 간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까요? 찬송할 때도 경건하게 부르기 위해서 목소리도 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경건한 목소리가 한국에 오니까 따로 있더라구요. 거룩한 목소리 -자기의 목소리로 기도하지 않고 기도할 때는 갑자기 목소리가 달라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소위 그럴듯한 경건의 외면성을 갖추기 때문에 그것으로 우리의 내면도 괜찮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겉과 속은 매우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들은 실제로 자기의 비어버린 내면을 메꾸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겉을 꾸미고 단장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좋은 자동차, 지나치게 요란한 화장-저는 적당한 화장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 지나친 자기과시, 지나친 자기자랑, 지나치게 자기에게로 시선을 끌어 오려는 행동, 이런 것들은 자기의 고장난 내면을 위장하려는 방어기제의 마스크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삶들을 살던 대표적인 유형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니었나요?

 

복음서를 읽어보시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책망하실 때, 예수님의 가장 신랄한 책망, 가장 무서운 도전은 밑바닥의 삶을 살던 창기나 세리에게 던져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대표적인 종교인들을 향하여 주님의 가장 신랄한 책망과 도전의 메세지가 전해진 것들을 기억하시나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을 장식하는 사람, 무덤같은 내 삶의 표면을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으로 장식하고 과시하면서 살지만 그 속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 않나요? 더러운 뼈들이 굴러 다니고 있지 않나요? 주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의 외면에 의해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은밀한 것을 꽤 뚫어 보시며 판단하시는 주님, 심판의 그 날,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다시 16절을 읽어 보십시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그날-그 심판의 디 데이-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는 그 날에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그 날에는 모든 것은 백주에 드러날 것입니다. 내 생각이 드러나고 내 동기가 드러나고 내가 가장하고 있었던 내 밑바닥의 모습이 그분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날, 그 은밀한 것에 의해서 그분이 나를 심판할 것을 아시나요?

 

여기에 심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지금은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오늘이라는 현재에 그분을 구원의 주님으로 받아 드리지 못한 사람들은 마지막 날, 그분을 심판의 주님으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아버지 하나님은 심판의 권세를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날, 그가 심판의 주님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님되신 속성을 말씀해 주는 복음서를 읽어보시면 이런 표현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의탁하시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의탁하지 않고 사람들을 지나치게 믿지 않은 이유가 바로 사람들의 속을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속을 아십니다. 우리의 내면을 불꽃같은 안목으로 꽤뚫어 보시며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그 은밀한 것으로 저와 여러분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세가지의 규범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진리대로, 행한대로, 그리고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판단앞에 오늘 서 보십시오. 그리고 그 판단앞에 서야 할 그날을 바라 보십시오. 오늘 이 본문의 도전은 우리에게 어떤 결론을 요구하고 있을까요? 결론은 명백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지나치게 비약해서 우리가 사회를 향한 비판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야 하는 것처럼 오도하지는 마십시오. 이웃을 돕기위한 판단이라면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누군가 이웃을 판단할 때, 그의 실수 그의 잘못에 대해서 그가 겪고 있는 그 가슴의 아픔과 똑같은 정도의 아픔과 그의 허물을 인해서 흘리는 연민의 눈물이 없다면 이웃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위한 도움의 동기, 그를 사랑하려는 동기, 그의 허물을 교정하여 새로운 삶의 장에 그를 다시 세우고 싶은 동기가 아니라면, 그의 아픔과 동일시하여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고 함께 가슴이 메어지고 찢어지는 동일한 아픔과 그의 실수를 향한 안타까이 여기는 연민의 눈물이 없다면 형제여, 이웃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프란시스의 말입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만으로 유일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둘째로, 자기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이웃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 성찰과 자기비판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비판하고 성찰할 때, 다른사람들과의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서 자기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가 저 사람들 보다는 낫지 않은가”라는 상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에 의해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자신을 성찰할 때 언제나 그 기준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시고 나를 인간으로 세워주시고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느 날 구원받게 하시고 나를 이 자리에 세워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안목으로 오늘 나 자신을 판단해 보셨습니까? 현상이 아니라 진리대로 판단하시고 행한대로 판단하시고 나의 은밀한 것까지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판단해 보셨나요? 우리가 이 판단 앞에 서셨다면 세번째의 결론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회개하는 자리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잘못된 자기 비판은 자기 학대속에 빠지게 합니다. 이것은 불필요한 비판이고 우리는 이런 비판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학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자기성찰을 위한 비판-자기의 삶의 새롭게 태어남을 위하여, 내 삶에 있어야 할 진정한 교정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람직한 성숙을 위한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은 얼마나 필요한 것입니까!

 

진리대로 나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저 밑바닥에 숨어있는 내 모습을 보시는 그분앞에 나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자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행한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양심을 져버리고 그리고 주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따라 살지못한 이 불순종의 죄인으로 주님앞에 서 보셨나요? 내 비밀까지 헤아리시는 은밀한 것을 판단하시는 주님앞에 서 보셨습니까? 그리고 “오 하나님, 사람 앞에서는 몰라도 창조주 하나님, 당신 앞에서는 저는 별수없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으셨나요? 이 고백은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4절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4절을 읽으시겠습니다.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아도 내 삶에 벼락이 내리지도 않고, 재앙이 오지도 않고 괜찮다 라고 하는 이유때문에 나는 주님앞에서 합당치 못한 이 삶의 모습을 그대로 고집하며 사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아직 내 삶속에서 하나님의 재앙과 하나님의 폭풍우와 먹구름과 내 삶을 교정하기 위한 하나님의 강렬한 채찍이 내리지 않은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분은 그분의 길이 참으심과 그분의 넉넉한 용서안에서 나를 따뜻하게 회개의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오늘도 인내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며 지금도 인내하시는 하나님,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길이 참으신다는 말이 영어단어에는 "longsuffering"이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참으심은 하나님 자신께는 차라리 고통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진노할 수 밖에 없으신 그의 거룩하심, 그러나 이 진노를 참으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회개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다음 절인 5절의 경고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아도 아무 일이 없고 그냥 하루 하루를 지나가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 하루 하루가 진노를 쌓고 있는 날인줄을 아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를 거절할 때, 내 삶에 대한 진정한 돌이킴이 없을 때,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진정한 돌아옴이 없을 때, 내 하루 하루의 삶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진노를 하루 하루 쌓고 있는 그날임을 아시는지요?

 

선택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서 내 죄인됨을 그분앞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모시고 그분을 전적으로의지하는 삶으로 돌아오시겠습니까? 아니면 계속해서 이 하나님을 거절하고도 아직 내 삶속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매우 도덕적인 삶, 매우 자신있는 삶, 매우 상식적인 삶을 가장하고서 만족하며 오히려 이웃을 비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계속 살아가시겠습니까? 그러나 늦기전에 이런 내 삶의 모습을 주 앞에 노출하고 용서를 구할 때,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자비롭게 여기시며 품에 안고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앞에 돌아오시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하루 하루 진노를 쌓아가시면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시겠습니까? 이 선택과 결단은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다.

 

 

 

 

 

 

 

 

롬 2:17-29 / 표면적 신앙의 함정

 

 

중국이 서방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기 전에 미국에서 한 중국스파이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여러해 동안 미국정부기관에서 일하며 완전한 미국인 행세를 했습니다. 우선 그의 생김새가 영낙없이 서양사람이었고 아마도 중국인구가 10억이 넘으니까 그 많은 사람가운데서 서양적 얼굴을 가진 사람을 고르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하며 제스츄어도 전형적인 미국사람의 제스츄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를 수상하게 여긴 한 정보요원이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유럽여행 중에 한 시내버스에 그 사람 곁에 서서 일종의 시험을 해 보았는데 그것은 휘파람을 불면서 미국국가를 불러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내가 미국인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쉽지가 않습니다. 꼭 두가지 경우에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미국인이라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첫째 경우에는 미국에서 명절이 되면 예를들어서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에 식구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대부분 TV의 미식축구를 보는 것을 즐기는 일입니다. 그때 미식축구가 시작되기 전에 미국국가를 부르는데 그때서야 자기가 미국인이라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미국국가를 불러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중국국가를 휘파람으로 불러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한번 흘깃 쳐다보더라고 합니다. 계속 휘파람을 불자 발로 장단을 맞추는 것을 보고 그가 중국 스파이라는 확신을 갖고 체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는 완전한 미국인을 가장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의 혈관속에는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중국인의 리듬이 계속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미국인이 될 수가 없었던 가장 중요한,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면 이 사람은 미국인으로 태어난 사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미국인처럼 행동하고 미국인이 되는 것을 모방했지만 결국 미국인이 될 수 없었던 가장 저변의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그는 미국인으로 태어난 사실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모방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이 교회에 가니까 나도 교회에 가고 남이 찬송을 부르니까 나도 찬송을 부르고 남이 기도하니까 나도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남이 성경을 읽으니까 나도 성경을 읽어봅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고 연륜이 흘러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생각하기를 “나도 이만큼 교회생활에 적응을 했으니까 나도 크리스챤이다”라고 간주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것이 전적으로 착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나는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모방했을 따름이지 아직 크리스챤으로 태어난 사실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영적으로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정말 영적으로 거듭난 일이 없다면 내가 이 모든 교회생활에 무난히 적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전혀 크리스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누가봐도 그리스도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 속사람에 있어서는 나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전혀 무관한 사람으로서 아직도 교회당 안에 들어와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누가 진정한 유대인이냐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본문 28절, 29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표면적 유대인-겉으로 나타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유대인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9절의 오직 이면적 유대인-내면적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외관상으로만 표면상으로만 내가 유대인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내면적으로 유대인이 되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함께 그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표면적 유대인의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따져 보려고 합니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를 드나들면서도 아직도 표면적 신앙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 오랜 세월, 교회와 많은 접촉을 하고 교회생활에

 

익숙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내 신앙이 표면적 신앙속에 빠져버린 그 함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를 같이 분석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사도는 그 원인을 우리가 종교적 특권에만 집착하고 종교적 책임(의무)에 태만한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유대인이 자랑하는 종교적 특권에 대한 열거로 시작합니다. 17절에 보시면 그들은 우선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이라고 말할 때 서양사회에서 특히 미국에서는 JEW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일종의 욕입니다. 그러나 본래 유대라는 단어의 뜻은 매우 아름다운 뜻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 유다라는 단어의 뜻은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된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모세의 율법, 토라-우리의 삶에 가장 소중한 규범이 될 수 있는-하나님의 율법을 갖고 있었고, 듣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었던 놀라운 특권을 인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갖고 있었고 알고 있었고 율법의 교훈을 날마다 경청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은 특권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정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만물을 섭리하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18절에 보시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규범을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이것을 알지 못하는 혼란은 얼마나 커다란 혼란인지요?

 

뿐만 아니라 18절에는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겼다’고 합니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무분별이야 말로 오늘 이 시대의 도덕적 혼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는 바 선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사람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동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지식, 도덕적인 지식은 굉장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중에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 만세전부터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 성경말씀을 읽으며 살게 하시는 특권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삶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니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 것과 같습니다.

 

물론 감사해야 겠지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종교적 특권에 대한 감사에서 우리의 삶이 그쳐버린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바리새인의 삶이 되는 것을 아십니까? 누가복음 18장을 다같이 찾아보시겠습니다. 9절이하에 보시면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세인이 어느 날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얘기입니다. 11절의 바리새인의 기도의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은 세리 근처에 가기도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따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종교적인 특권, 그들을 구별하시고 성별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특권에 대해서만 집착하고 이 특권에 따른 의무는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르게 만드신 그 이유, 나를 구원하신 이유, 나를 선택하신 이유,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그 이유,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감사하면서도 이제 주님이 내게 기대하시는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표면적인 신앙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을까요? 첫번째로,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종교적인 특권에만 집착하고 그 의무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표면적 신앙에 그쳐버린 두번째의 이유는 그들은 타인을 가르치는 일에는 열중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의 자부심이 어떤 것입니까? 19절을 읽어보시면 그들의 자부심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어떤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습니까? 제일 인상적인 것이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눈먼자의 길잡이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0절을 보시면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가르치는 교사로, 또한 어린아이의 선생-어린아이같은 미성숙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21절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면-너희 스스로를 어리석은 자의 교사로 자처한다면, 눈 먼자의 길잡이로 스스로를 자처한다면, 어린아이의 성숙을 지도하는 선생으로 자처한다면-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여, 왜 너는 너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사도의 지적이 있습니다. 아니, 바울을 통한 성령 하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남에 대해서는 굉장한 기대를 걸면서도 동일한 기대를 자신에게는 왜 갖지 않나요?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데 사사용하는 그 비판의 기준을 왜 자신의 삶을 달아보는 기준으로는 사용하지 않나요?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에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자신을 비판하는데는 지나치게 관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다른 사람들이 부정한 행동을 하면 도적질이라고 규탄을 하면서도 내가 똑같은 일을 할 때는 그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다른 사람들의 스캔달에 대해서는 간음이라고 정죄하면서도 나의 스캔달에 대해서는 그것은 고독한 나의 스트래스 해소요, 외도라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자라고 지

 

적하면서도 성경을 읽을 때에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지적한 이 말씀을 그냥 스치고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성경을 모르는 이웃을 비판하면서도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비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남들을 가르치는 자여, 왜 그 동일한 가르침으로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너는 선생 소리를 듣는 것을 즐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 나는 오늘부터 주일학교 교사는 절대로 안하겠다고 결심하지 마세요. 그것도 잘못된 적용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의 맹점이나 약점을 보지 못하는 맹목성이 있습니다. 스스로 약점을 보지 못하는 소위 blind spot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는 전혀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결점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칭찬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신 사람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그러던 다윗이 어느 날 범죄하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에게 예언자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다윗에게 시정 얘기를 합니다.

 

“왕이시여, 저 아래 지방에서 일어난 서민들의 얘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촌에 있는 한 도시에 두 사람이 살았슴니다. 한 사람은 아주 부자이고 또 한 사람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이 부자는 많은 양떼들과 많은 소떼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은 꼭 암양 한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잣집에 어느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자기의 많은 양떼와 소떼 중에 한마리 잡는 것이 아까워서, 자기가 종처럼 부리고 있는 자기의 총 재산이 양 한마리 밖에 없는 가난한 자기의 종에게서 그 양을 빼앗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이런 발칙한 놈 같으니라구. 지금 이 시대가 개혁시대인 것을 모르는가. 정의사회의 구현을 위해 당장 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이 하고 있는 흥분은 사실 누구를 향한 흥분이어야 합니까?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선지자가 왜 이런 얘기를 했습니까. 다윗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부인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가 없었던 다윗이 자기의 신하 우리야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내를 빼앗고도 자기의 양심의 범죄를 은폐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절정에서 드디어 선지자 나단은 흥분하고 있는 다윗을 가리켜서 “왕이시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도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이 아직도 표면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이유- 진정한 성숙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진정한 삶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 못하는 원인은 타인을 가르치는 일에는 열중하면서도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계속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얘기를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남을 가르치고 내가 남에게 선전을 할 때는 어느 정도 이고(ego)의 만족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자기과시일 뿐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가르침, 동일한 진리, 동일한 메세지, 동일한 복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적용되어야 할 삶의 자리가 바로 나의 삶이고, 이 말씀으로 깨져야 하고, 이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하고, 거룩해져야 할 첫번째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임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모습은 아닌지요?

 

세번째의 원리는 그들이 신앙의 상징에는 애착을 갖고 있었지만 신앙의 내용에는 무관심한 까닭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종교적 상징은 바로 할례였습니다. 할례가 무엇인지 다 아시지요? 쉽게 말하면 포경수술입니다. 피부의 한 부분을 벗겨내고 잘라 냄으로써 이제 나는 구별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에 대한 최대의 욕설은 “할례도 받지 못한 놈”이라는 말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있어서 다윗이

 

왜 흥분하고 있습니까? 할례받지도 못한 저 인간에게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쩔쩔매고 있는 것에 흥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할례는 그들이 속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외적인 상징의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할례나 무할례를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상징에 부합하는 삶의 내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주께서 할례를 명하실 때, 그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외적인 상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내용에 있었다는 사실을 주님이 이미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예레미야 4:4 에 보시면, ‘유대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할례는 피부의 가죽을 베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피부의 가죽을 베기 전에 먼저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속하고 있음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이제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 거룩을 사모하며 그 하나님의 거룩을 내 삶에서 성취해내야 할 삶의 과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할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상징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중성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어떤 모습으로 상징하고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에 출석하고 교인이 되면 자기 집 아파트에다가 교패를 부칩니다. 중요한 것은 교패를 부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다운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 나와서 옛날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은 요즘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물고기를 부치고 다니는 차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상징으로서 부치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부쳤으면 운전을 잘 하셔야지요. 교통법규도 잘 지키구요. 얼마 전에도 제 앞에 얌체같이 차가 들어오길래 어떻게 저렇게 운전하나 하고 쳐다 보니까 그 차에 물고기가 딱 부쳐져 있더라구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차라리 저렇게 운전하려면 떼고 다니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은 나는 그것을 아예떼고 내 마음대로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는데 그건 더 악질입니다. 그것을 부쳐 놓았기 때문에 조심하게 되고 그리스도다운 간증을 지키게 되고 내 삶을 보호하게 된다면 부치는게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 외적인 상징은 우리들의 위선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세요?” 라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들은 “저는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예요” 세례는 아름다운 신앙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미하는 바가 삶속에 있으신가요? 아마도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저는 세례정도가 아니가 성서적 침례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침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물속에 들어갈 때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의 옛사람은 죽었고 물속에서 나올 때 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 상징을 나타내기 위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 상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러면 죽었다가 다시 산 자로서 그분의 새생명 가운데서 살고 행하는 삶의 모습은 얼만큼 나타나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상징 그 자체보다도 그 상징이 의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속에 당신의 삶의 자리에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모하며 내 삶속에 내 마음속의 깊은 곳에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며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 싶어하는 그 열망이 그 삶의 감격이 우리 자신 속에 살아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사도처럼 고백하실 수가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주께서 내 마음속에 오셔서 내 마음에 살아계시고 내 의식을 지배하시고 내 생각을 다스리시고 나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오, 내 안에 주께서 살아계십니다!” 라는 것이 여러분의 고백이고, 삶의 내용이며, 여러분의 삶의 실상인지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 중요한 점검을 자신의 삶속에 실현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분명한 증거가 나타나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움직이시고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지배하고 계신 것이 내 삶의 자리에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는지요? 여러분의 이웃이 그것을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있습니까? “저 사람 예수 믿고 말씀공부하더니 분명히 달라졌어”라고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나타내고 있는지요? 아니면 “교회가는 것은 분명한데, 찬송도 가끔 부르는 것 같은데 그것 밖에는 달라진게 없어”라는 말을 들으시는지요?

 

외적인 상징, 표면적 상징만을 붙들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오늘 바울사도가 24절에서 지적한 지적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성령님의 지적이 아닐까요.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 실체가 없는 삶, 그 내용이 없고 고백이 없는 삶, 그 실상을 가지고 있지 못한 외적인 형식, 상징만인 삶을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 모독을 받고 있다고 하십니다.

 

왜 우리의 신앙이 외면적, 표면적 신앙에 머물러 있을까요? 신앙의 상징에는 집착하고 있지만 그 신앙이 의미하는 내용을 내가 추구하지 못했던 삶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당신은 표면적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아니면 내면적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구세주와 주님으로 찾아오신 주님, 그가 나를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 그가 내 안에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 그가 내게 주신 이 삶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나타내며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아직도 내가 가야할 길이 멀지만, 주님이 분명히 내 안에 살아계시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 주고 계시다는, 이 속사람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면적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고백과 영광과 열매를 갖고 계신지요? 아니면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혹시 아니신지요?

 

 

롬 3:1-18 / 다 죄 아래 있다

 

영국에서 한 청년이 장난삼아서 London의 유명인사 20명을 뽑아서 명단을 만든 다음에 일제히 똑같은 시간에 꼭 같은 전문을 발송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인사 20명이 같은 시각에 일제히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메세지는 단순하지만 분명합니다. 죄인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한 말씀을 그대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위대한 복음의 책인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그 첫장에 먼저 찬란한 헬레니즘의 문화위에 건설된 대 로마제국의 국민을 향하여 그 죄악을 폭로합니다. 로마인의 죄악은 그 당시 하나님없이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의 죄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했던 문화, 그들이 자랑했던 정치, 그들이 자랑했던 그 사회와 상관없이 그들이 얼마나 깊은 불신앙과 부도덕의 죄악속에 침륜되어 있는가를 고발했습니다. 이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로마서 2장에 들어가서 바울사도는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이들은 로마인이나 헬라인에 비해서 매우 도덕적이고 또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논증하고 고발했습니다. 이것이 2장의 내용입니다.

 

이제 3장으로 들어왔습니다. 3장에서 바울은 일종의 유대인, 혹은 헬라인, 로마인을 망라한 죄에 대한 결론을 내립니다. 3장의 결론의 요약을 우리는 3장 9절에서 찾아 볼수가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면 어떻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선언하였느니라” 다 죄 아래 있느니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바울사도는 3장에서 그가 어떻게 이 결론에 도달하게 된 관점을 두가지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다 예외없이 죄인일까요?

 

첫째는, 죄인이 아니라는 변론이 성립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만날 때에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종교적일 수록 전도를 해 보면 그들이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이라는 딱지가 그 사람의 자존심이나 혹은 종교적인 자존심을 매우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르켜서 “거룩한 죄인의 자존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장에서 바울사도가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할 때, 나는 하나님의 선민이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유대인의 죄악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었을 때 유대인들이 느꼈던 심정이 아마도 이런 사람들의 심정과 동일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방인들과 같은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3장의 서두에서 그들이 죄인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항변하고 있는 유대인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일종의 가상적 변론으로 전개합니다. 그는 아마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에게서 이와같은 질문을 사실상 들었고 바울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똑같은 답변을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그들이 죄인됨을 지적했을때 우리가 이방인과 꼭 같은 의미에서 죄인일 수는 절대로 없다고 항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변론의 근거를 우리는 세가지로 크게 요약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 특권을 그들은 변론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3장의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만약 이방인과 똑같은 죄인된 사람이라면 유대인이라는 특권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할례의 유익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사실상 바울을 향해서 던질 수 있었던, 그리고 실제로 바울이 직면했던 질문일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2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바울은 유대인에 주어진 신앙적인 특권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라는 것을 바울이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꼭 이런 얘기를 덧붙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게 된것은 놀라운 특권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신들은 이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바울은 그들에게 던지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만 해도 후레쉬라이트(손전지)가 매우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에 산을 행군하는 군인들에 있어서 그들이 손전지를 지급받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들에게 손전지가 주어져서 불을 켜서 어두운 밤길을 행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 손전지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빛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손전지가 주었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용하지 않거나 혹은 사용할 줄을 모른다면 그 주어진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토라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이 굉장한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특권이 당신들의 삶을 하나님이 기대하는 삶으로 만들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의 항변의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후에 이 백성들을 통해서 행하시고자 하는 많은 언약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될까요? 이 민족을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언약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들과 약속들은 어떻게 될까요. 무효화될까요? 그렇다면 그 약속들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은 바로 이 문제를 3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서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미쁘심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성실성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 백성들을 통해서 하시겠다고 하신 그분의 계획들은 무효화되는 것일까요? 바울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하신 대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성을 높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정당화해 주지는 결코 못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바울사도에게 제기했던 또 하나의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선의 도구로서 그들이 쓰임을 받고 있다는 근거로 그들이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항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번째의 논변은 일종의 궤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울과 얘기를 하면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고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고, 또 그들 가운데도 많은 악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렸습니다. 그러니까 궤변을 제의합니다. 이 궤변은 일종의 소피스트적인 궤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하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상대적으로 나타났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욱 드러날 수가 있었다면 우리의 악함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 수가 있느냐는 논거입니다. 그것이 5절과 7절과 8절을 통해서 계속됩니다.

 

 

‘그러면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여러분 우리는 비슷한 논리를 통일교의 교인들을 만나서 전도해 보면 그런 궤변을 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통일교의 교인들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반론합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이고 예정이라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룟 유다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가룟 유다의 반역과 배신까지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구속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반역과 배신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쉽게 얘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떤 이상한 친구가 제가 못마땅했던지 강단으로 뛰어 올라와서 제 안면을 있는 그대로 가격을 하고 때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제가 워낙 철면피가 되어서 까딱하지 않고 “형제여, 저기가서 앉아요. 나는 형제를 용서할 수 있어요. 끝까지 설교나 듣고 얘기하십시다”라고 아주 태연하고 담대하게 제가 그 사람을 받아 주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여러분이 꽤 감동을 받으시겠지요? 그 사람이 나를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흥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하여 용서하고 오래 참고 용납하는 인격수양의 도구로 삼았다면 그것은 저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저를 때린 사실이 정당화될 수가 있을까요? 물론 여러분들이 우리 목사님 대단하시다고 감동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악행까지 사용해서 내 인격수양의 도구로 또 주께 영광을 돌리는 사건의 도구로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저를 이유없이 때린 행위는 정당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똑 같은 논리를 여기서 전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그 불의한 것이 용서될 수가 있을까요? 바을의 대답은 결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이 그들이 이방인과 꼭 같은 죄인으로 분류될 수 없다는 모든 변론이 무효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과 꼭 같지는 않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는 변론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가 없다면 그 많은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죄인입니다. ‘다 죄 아래 있느니라’라는 성경의 엄격한 판단과 하나님의 선언앞에 누가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그들이 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두번째 이유를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죄인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10절에서 12절까지 읽어보시면 우리의 죄인됨에 대한 일반적 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의인도 없고 구도자도 없고 선인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상대적인 비교에서는 의인도 성자도 있을 수가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관점일 뿐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의인도, 진정한 구도자도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자고로 서양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우상적인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이 세가지의 종류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의인이요, 두번째는 위인, 세번째는 성자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위인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대신 구도자란 개념으로 바울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세기까지만 해도 구도자들-진리를 찾는 자들을 위대한 사람(위인)으로 삼았습니다. 구도정신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는다든지 진리를 찾는다든지 위대한 가치관을 추적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까지만 해도 구도자는 굉장한 위인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고 선언합니다. 이 바울의 선언앞에 즉각적인 이런 반박이 가능합니다. “아니, 수많은 철학자들이 신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수많은 종교인들이 진리를, 절대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입니다. 칼.바르트(K. Barth)라는 신학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상이다. 사람들은 우상을 찾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이 찾고 있는 대상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들의 지성의 만족을 위한 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범속한 사람들은 단순히 자기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에 불과합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그리고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 여러분이 찾고 있는 하나님은 그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단순한 우상일까요?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찾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한 우상을 찾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세가지의 단어를 신용하지 않는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Africa의 람바레네의 성자 슈바이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우리에게 빛을 던져 준 위인인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원주민과 끊임없이 불화와 갈등을 겪었으며 자기가 치료하는 환자들로부터 매우 냉정적인 사람이며 그들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슈바이쳐의 다른 전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킨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던 전기들도 있는 것을 아시는지요. 이것이 슈바이쳐의 다른 면모입니다.

 

우리가 미국여행을 할 때에 어린아이들을 가진 부모님들은 예외없이 디즈니랜드를 찾습니다. 우리는 Florida에 가서 Disney World를 방문할 때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어린이에게 꿈을 준 Walt Disney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에 대한 신화적인 많은 아름다운 자서전들이 씌여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Mark Elliott라는 사람이 Walt Disney에 관한 새로운 전기를 썼습니다. “평생을 FBI의 비밀요원으로 지냈고 유대인에 대한 각별한 편견을 갖고 반유대주의 운동을 벌였으며 철저한 알콜중독자로서 밤을 지새우면서 괴로워했던 사람”-그의 이런 다른 얼굴을 여러분은 접하셨는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다’고 말씀하시며 성경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선언앞에, 이 하나님의 진단앞에, 이 창조주와 심판자의 진단앞에서 누가 예외임을 말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만약 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나의 죄악성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 속에 있는 부패성-칼빈의 말처럼 전적으로 부패한 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래도 내 안에 있는 연약성과 아직도 존재하는 부패성을 알기에 끊임없이 성령의 지배앞에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한 훈련속에 살아가는 훈련의 사람”- 이런 사람은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의 사람입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 이런 죄인들에 대한 일반적 서술을 했던 바울은 13절에서 17절까지 죄인들에 대한 구체적 진단을 시작합니다. 이 진단의 내용을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 다음은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 보세요. 그러면 죄인됨이 스스로 자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고 있는 말소리를 끊임없이 들어보세요. 다듬어진 말 말고 무의식 속에 터져나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어보세요. 거기에 섞여 나오는 사람들의 진실을 보세요. 사람들의 행동을 보세요.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여기 그들의 언어속에 그들의 행동속에 나타난 사람들의 죄악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3절부터 17절까지 바울사도는 특별히 두가지의 죄악을 집중적으로 고발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죄악이며 둘째는 행동의 죄악입니다. 왜 바울사도는 언어의 죄악을 먼저 말할까요? 언어는 마음의 거울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어느 사이에 내 속에 나를 증언하는 그 말들이 쏟아져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읽어 보시겠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언어의 통로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관찰해 보시면 먼저 목구멍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혀, 입술, 입 순서로 언어가 나오는 통로를 추적한 것입니다. 시작이 목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열린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방에 가보면 그 무덤의 입구가 한국처럼 흙으로 덮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입구를 돌로 막아 놓습니다. 중동같은 열사의 뜨거운 사막지방에서 그속에 있는 시체가 얼마나 썩는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돌을 굴려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속에서 썩는 악취냄새가 풍겨나옵니다. 여러분, 이따금씩 같지 않은 말, 더러운 말, 한심한 말, 짜증과 미움과 시기와 불평과 중상을 쏟아 놓고 있는 사람들의 입을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겉으로는 한번도 말해 본 적이 없지만 속으로는 항상 “또 무덤 열렸구나”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행동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대표적으로 행동의 죄악을 말하면서 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까요? 그 다음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파멸이라는 단어는 파괴라는 단어로 다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며 하는 일이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어떤 사람을 살인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러나 나 때문에 가슴 상하고 나 때문에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 때문에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고 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상

처를 주어서 피를 흘리게 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요.

 

사람들은 인간을 생산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매우 위험한 파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날 인간의 문명이 이룩해 놓은 거대한 산업화속에서 우리가 어떤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자연계가 파괴되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이 산업화의 대가로 지불하고 있는 끔찍한 고통의 세계를 여러분 지켜 보십시오.

 

지난번 우리가 수질오염사태를 겪었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뿌린 씨를 우리가 거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문명과 건설의 이름으로 우리가 파괴해 온 이 잿더미, ‘인생 그가 가는 그 길에 파멸이 있고 고생이 있다’는 말씀이 사실이 않은가요? 마지막절은 그 이유를 지적합니다. 사람들이 언어에 있어서 행동에 있어서 이 죄악속에 빠진 자명한 죄인됨의 이유를 마지막 절에서 지적합니다. 1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저희의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내 존재를 지배하고 있었더라면 사람들은 다르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오십시오. 오늘 이 말씀앞에 예외일 수 없는 죄인됨을 주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보여 주셨다면 그 하나님 앞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그러나 두려우신 심판의 하나님이 동시에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복음을 알고 계신가요? 바울은 지금 이 복음을 말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놀라운 조화가 십자가의 사건인 것을 아시나요? 죄인들이 피할 곳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십자가 앞입니다. 옛날 구약성경에 자신의 죄를 인하여 나갈 길이 없었던 그 사회속에서 용납될 수 없었던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의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이 도피성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마다 용서를 받습니다. 새로운 삶을 경험합니다. 십자가는 도피성입니다. ‘다 죄아래 있느니라’라는 선언앞에 예외일 수 없는 나, 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었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그의 피를 흘려 나의 죄값을 지불하신 십자가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 주님 앞에 오십시오. 거기에 용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이 주님앞에 와서 그분이 주시는 용서와 그분이 베푸시는 새생명을 체험하고 “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날 용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속에 주님을 향하여 삶을 바꾸게 된 이 은혜, 이 경험,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저와 여러분의 경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롬 3:19-31 / 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한국에서 미혼 남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해서 통계를 낸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결혼에 있어서 상대방이 될 여성에게 성적인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통계를 내 보았는데 아직도 한국에서 50%이상의 남성들이 자기 배우자가 될 여성에 있어서 성적인 순결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남성 자신에게 있어서 성적 순결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20%정도 만이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순결을 얼만큼 지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은 10% 미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간단한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우리 한국사회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남존여비 사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남존여비의 사상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남-남자가, 존-존재하는 한, 여-여자는, 비-비참하다”는 뜻이라는 조크도 있습니다만.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도 어느 정도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구라파의 사회가 얼마나 후리섹스(성 개방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개방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예외적인 성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계입니다. 이상한 사실입니다만 정치 지도자를 뽑을 때에 만큼은 도덕적인, 성적인 순결을 몹시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곤역을 겪고 있습니까? 클린톤도 그랬고, 챨스 로비라는 상원의원도 지금 혼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얼마전에 영국 내각 각료들에게서 섹스 스캔달이 일어나서 영국 국가가 막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국민들이 똑같은 도덕적 수준의 잣대를 가지고 자기들의 삶을 평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치적인 지도자들에게는 도덕적인 순결을 요구하면서도 자신들의 삶속에는 그와같은 순결을 전혀 중요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원색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나는 개판이어도 너는 개판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중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단순한 인간의 이중성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역설적인 말이지만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는 진지한 희망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속에서나마 거룩함을 보고 싶어하고 내 자신에게 있는 불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속에서나마 의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아직도 내재하고 있는 의와 거룩함에 대한 진지한 열망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들의 죄에 대한 리스트를 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의 범죄를 살펴 보았습니다. 3장에 들어와서 바울사도는 전반부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없이 “다 죄아래 있느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꼼짝없이 죄인으로서 정죄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또 사실 문자 그대로 이미 죄인으로서 주님앞에 정죄된 우리, 이런 우리들에게 있어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소망은 없을까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이것이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죄인이 되어버린 우리가 이 죄를 넘어서서 죄를 극복하고 죄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을까요? 사도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는 이 사실을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본문의 첫번째 강조점은 율법의 행위로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20절의 선언입니다.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율법의 행위-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도덕적인 노력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육체는 하나도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의 도덕적인 행위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든지 혹은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내가 이렇게 노력하니까 애쓰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터이지”라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의식은 왜 그럴까요? 그 대답은 “왜냐하면 아직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앞에 혹은 율법 아래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서를 읽어 보시면 사도 야고보는 율법을 가리켜서 거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시자 마자 거울을 다 보셨지요? 거울을 보신 소감이 어떻셨습니까? “야, 볼수록 너는 참 멋지구나”라는 소감을 갖고 오늘 아침 거울을 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아니면 거울을 볼때마다 이게 웬말입니까? 간밤에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헝크러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거울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거울을 본 사람은 자신의 수치를 압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지 않은 사람은 아주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퍽 괜찮은 사람으로 알고 활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앞에 서 본 사람은 그렇게 자부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마전에 텔레콤 계통에서 일하고 계신 어떤 분이 저에게 와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얼마 안 있으면 우리가 얼굴을 보면서 통화할 수 있는 전화가 곧 나올 것 같습니다”고 하시는데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야, 이제 절망이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보통 전화를 받을 때 침대에서 퍼져서 전화를 받곤 했는데 여러분들이 저에게 전화를 했는데 제가 침대에 퍼져서 전화를 받는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그럴 순 없잖아요. 그렇다면 24시간을 긴장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앞에 서 있는 거울은 우리의 외부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거울이 우리의 외부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한 동기와 의식의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사고들까지도 다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그 거울앞에 섰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내 생각, 내 욕망, 찌꺼기 같은 내 속에 있는 더러움에 대한 생각들까지도 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그 거울앞에 섰을 때에 무엇을 느끼실까요?

 

마찬가지로 성경을 진지하게 본다는 것은 거울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을 때 이 성경속에서 내 모습이 나타나지 않던가요? “형제를 향해서 미워하는 마음만 가져도 그것은 이미 살인한 것이라”는 말씀을 읽을 때 “아, 내가 살인한 자로구나”라고 깨닫고,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을 읽고는 “내가 별수없이 간음한 사람이로구나”라고 진지하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매 페이지 앞에서 나의 죄인됨을 발견하지 않으시나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애써서 부인하고 퍽 괜찮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유는 참으로 율법앞에, 혹은 율법아래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에게 율법이 없다면 인간의 마음속에 주께서 허락하신 양심의 율법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양심도 율법의 기능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라,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심도 같은 기능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해서는 안돼, 혹은 마땅히 해야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 보면 종종 그들이 이런 대답을 합니다. “저는 믿지는 않지만 양심껏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다른 데 가 보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종종 이런 반문을 던집니다. “그래요? 선생님, 양심껏 사신다고 하셨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그러면 선생님은 정말 양심대로, 양심이 요구하는 대로 사셨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율법은 제쳐놓고 양심의 율법이라는 거울앞에 서 보십시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어떤 결론을 내릴까요?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율법앞에 참으로 선다면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토해져 나올 결론은 딱 한가지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할 말이 없는 죄인이예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아래 참으로 서 본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이 다 닫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율법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할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 양심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볼 때에도 내가 주님앞에, 창조주앞에 그리고 나를 심판하실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정말 율법아래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함의 율법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모든 입은 닫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번째 강조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의 어떤 노력도, 어떤 최선의 사람의 최선의 노력도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이것이 23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한 신학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은 달리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완전하신 하나님앞에 한번 서 보세요. 그분은 완전하세요. 조금의 어두움도 용납될 수 없는 완전히 거룩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어떤 인간이 도달할 수가 있을까요?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소식이 21절부터 전개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제는” 이라고 시작되고 있는데, 원문에 보시면 “그러나 이제는” 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조하려는 의도가 있기 떄문입니다. 그 전 구절에 보시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이제는(But Now)” 즉, 율법외에-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는 인간들에게 율법이라는 방편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 놀라운 길이 열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닐까요? 이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 절을 보시겠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율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았던 의롭다함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까? 24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율법의 기능을 두가지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율법의 기능이라는 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라 하지말라”하는 하나님의 율법앞에 섰을 때에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또 하지말아야 할 것을 해 버린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표준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려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표준에 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우리의 삶속에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코 율법을 폐기하거나 율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울사도가 율법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마지막 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왜냐햐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다면 결국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함, 의롭다함이 우리의 삶속에 이루어 질수가 있다면 율법의 요구가 나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것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도덕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이것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딜레마는 우리가 해야 할 것,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몰라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또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딜레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죄를 예수께서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24절을 다시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여기서 값없이란 말은 우리 편에서 볼 때는 값없이지만 이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하나님께서 이미 지불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절의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는 말씀에서처럼 그 대가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질머지시고 십자가에서 거룩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그 값비싼 대가를 담보로,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는 값없이 예수님앞에 온 순간 죄사함을 얻고 뿐만 아니라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 놓으신 일입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의 행위입니다. 도덕이나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행위에 기초해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어느 부자 청년 관원이 어느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이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질문부터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질문 속에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즉,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할 수도 없습니다.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 주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다만 그분을 통해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놀라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이 아닌가요?

 

어떤 설교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굉장히 많은 종교가 있지만 엄격하게 성경의 시각에서 나누어 보면 두가지의 종교만이 존재한다. 한 종교는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이며 그 종교의 모토가 있다면 ‘하라(Do)’이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의 복음은 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었다(Done)'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율법을 깨뜨리고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대가를 다 지불해 놓으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의 마지막 절정에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외치십니다. 그의 마지막 보혈이 갈보리의 언덕에 떨어지는 그 순간 그는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사함이, 용서함이, 구원이 값없이 선물로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놀라운 복음이 아닌가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값없이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습니까?

 

옛날 우리 선배 목사님이 “기독교의 의란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면서 한문의 ‘의(義)’라는 단어를 설명했던 기억이 지금도 제 머리속에 생생합니다. 의라는 한문을 쓰려면 먼저 ‘양(羊)’이라는 단어를 쓰시고 그 아래에 ‘나’라는 아(我)자를 쓰셔야 합니다. 그렇게 설명하시면서 기독교의 의(義) 즉 복음이 말하는 의란 “한문 글자의 모습처럼 내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리기 위한 제물로 오신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는 그 순간 하나님은 나를 향해서 “의롭다”라고 선포해 주십니다. 그가 내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기에 그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값없이 나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며 그 의로우신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선물로 주신다고 선포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시나요? 오늘 본문에서 복음은 율법으로 불가능했던 의롭다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세번째로 오늘 본문은 이 중요한 결론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서, 26절에서, 28절에서 계속적으로 바울 사도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6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절)

 

이 로마서 3장을 공부하던 저 유명한 마틴 루터, 카톨릭이 요구하는 그 모든 수행을 통해서도 마음속에 참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던 루터는 1장에서 깨어지고 2장을 읽고 3장을 읽고 3장에서 28절에 도착하자 그는 이 말씀에서 “믿음으로”라는 단어 앞에다가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 놀라운 사실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의라는 예복을 받는 손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종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우리가 받는 구원의 사건을 설명하실 때 그것을 결혼잔치에 참여하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잔치에 참여하려고 하는데 예복이 없어요. 그래서 거절을 당했습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이 잔치에 들어가기 앞서서 자기의 더러운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잔치석상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합당한 의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 앞에 온 사람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먼저 행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두가지 측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소극적인 측면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이 잔치석상에 온 사람이 헌 옷, 더럽혀진 옷을 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벗기만 하면 안됩니다.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 헌옷을 벗은 사람들에게 주인은 이제 예복을 입고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사람에게 한 희고 아름다운 예복을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줍니다. 선물로 값없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럽혀진 옷을 벗을 뿐만 아니라 그 희고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주 앞에 나온 사람마다 우리를 그의 보혈로 씻어 죄사함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의 예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기서 예복은 의,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 예복을 그냥 받는 손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랑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다만 내가 얻을 수 없었고, 성취할 수 없었던 나의 의, 내 어떤 노력도, 내 도덕적인 수준의 어떤 몸부림도 가져올 수가 없었던 나의 의, 그러나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용서의 근거를 제공하시고 우리에게 의를 선물로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드리는 믿음, 이것이 바로 구원얻는 믿음입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하는 믿음이 아니라 정말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언제나 두가지의 단계를 필요로 합니다. 첫째 단계는 구원의 필요를 자각해야 합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구원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감격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구원의 필요를 느끼려면 먼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답답한 사실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전도해 보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라고 전도하면 겉으로는 고개를 꺼떡이지만 속으로는 “죄인은 죄인이지만 내가 너보다 더 죄인일 것은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만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죄인됨을 깨닫습니다. 그때 우리는 오순절의 자리에 섰던 사람들처럼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 안타까움이야말로 구원의 필요를 자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구원의 필요를 자각한 다음에 우리의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때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없을까요? 물속에 빠진 사람이 아직도 자기가 자신을 구출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물속에 뛰어든 구조자에 대해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아직도 자기를 의지하고 있는데, 자기가 살 수 있다고 믿는한 전혀 구조자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꼼짝없이 내가 죽는다라고 허우적거릴 때 그리고 자신의 소생에 대해서 거의 절망적인 마지막 단념을 해 버렸을 때 그 순간 내 앞에 구원자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감격일까요? 그 때에 할일은 내 앞에 다가오는 구원자앞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구조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제일 건지기 힘든 사람은 구조하려고 왔는데도 자기 혼자 살려고 발버둥하는 사람이 제일 건지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반대로 아예 쭉 뻗어버리고 맡기는 사람이 제일 구조하기가 쉽다고 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나는 당신만 믿습니다”하고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에 와서도 그 쥐꼬리만한 자기의 이고를 아직도 의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자선이, 선행이, 윤리적인 자존심이 아직도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없고 그리스도에 대한 흥분이 없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내 어떤 최선의 노력도 나를 구원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절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주신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만 믿습니다”라고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구하시네 구하시네 곧 구하시네”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속에 있는 절망과 내 속에 있는 불가능을 아시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으로 의지하고 그분이 나를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이 감격을, 이 의롭다함을 얻으셨는지요?

 

롬 4:1-13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소위 현대적인 학문이 발달되면서 사람들은 한 분야를 연구하며, 한 단계의 연구를 마무리할 때 마다 소위 논문이라는 것을 쓰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써 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논문작업에 있어서 실질적인 작업가운데 하나가 인용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논문이라는 것은 인용의 짜깁기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인용을 하는 이유가 도데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나보다도 더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한 말이나 연구 결과를 인용해서 내 주장이나 나의 의견을 보완하고 강화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이런 학문활동의 경향은 설교하는 강단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시면서도 여러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는 습관이 도래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초기 야사에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돌아온 어떤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시골교회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이 분의 설교는 저 유명한 철학자나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엮어졌습니다. “발트는 말하기를, 볼트만은 말하기를...”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싸르트르는 말하기를, 키에르 케골은 말하기를, 니체는 말하기를...” 그리고 예배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이 많으신 장로님 한분이 목사님에게 소감을 피력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오늘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매우 유식하게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두가지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시자,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셨답니다. “그 첫째는 그 많은 분들을 인용하셨는데 목사님은 진작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한번도 얘기하지 않으셨고, 둘째는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장로님이 말씀하셨다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인용귀절이나 사례가 일반적 청중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4장에 들어오면서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의 사례를 열거합니다. 그 사례를 인용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편지를 썼을 때 로마서를 받는 일차적인 독자는 바로 로마에 살고 있는 소위 유대인 크리스챤들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유대인에 있어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 가장 권위있는 사람하면 누구를 들을 수가 있을까요? 바울사도는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 이 두 사람의 사례를 열거하면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함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사실의 의미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의 사례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를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라는 장소에서부터 팔레스타인(가나안) 땅으로 모험적인 이민을 성공시킨 사람이었습니다. 불모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의 첫번째 개척을 시도한 뉴프론티어. 평생을 통해서 그의 삶속에 결정적으로 지적할 수 없는 어떤 흠도 없었던 매우 도덕적인 사람. 단순하고 직선적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네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이 축복을 받았던 사람. 지상에서 가장 유익한 독특한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서 가장 숙명적인 아랍민족들의 동시조상이었던 이 사람, 동시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 많은 크리스챤의 믿음의 조상으로 동시에 추앙을 받았던 이 사람 아브라함. 이런 아브라함을 소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런 놀라운 이력서와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원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타당한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사람의 배경을 소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부여될 수 있는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이 모든 놀라운 타이틀과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서는 하나님 앞에 절대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아브라함, 이 잘난 아브라함, 이 대표적인 아브라함이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었다면 여러분과 저 가운데 자신의 행위나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 사람이 도무지 존재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중의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율법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해 보시면 아브라함의 생애속에는 구체적인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구체적으로 그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씌여진 율법으로 전달했던 사람은 모세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나중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때에는 율법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13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러면 또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얘기를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종교적인 의식이었습니다. 그 할례를 받음으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있었다면 그것이 아브라함의 구원에 있어서 할례가 중요했던 한 조건이 아닐까요? 그러나 본문의 9절이하에 보시면 바울사도는 무엇을 지적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창세기 17장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먼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9절과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된 것이 할례를 받음으로써냐 아니면 무할례시냐? 정답은 무할례시입니다. 그는 할례를 받기 전에 그가 참여했던 종교적 의식과 상관없이 먼저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본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대상에 그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았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의 대상이었던 하나님,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긍휼때문에 그 구원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방편 혹은 채널에 불과합니다. 은혜의 뜻이 무엇이죠?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편에서의 일방적인 호의입니다. 본문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러므로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절을 보십시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제가 만약 제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재산이 다 떨어졌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할 수 없이 제가 어떤 공장에 가서 저를 하루만 고용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십만원을 받았다고 해 봅시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제가 받은 십만원은 삯입니까? 은혜입니까? 만일 그것이 노동의 대가로 받은 것이라면 그것은 여전히 삯입니다. 일한다고 했지만 저는 하루종일 공장에 와서 맴돌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장의 공장장이 제가 좀 아는 분인데 저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이 여겨서 만약 그 돈이 없으면 꼼짝없이 굶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집안 식구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제가 하루종일 일을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저에게 하루가 지난 다음에 십만원을 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것은 삯입니까? 은혜입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인 것입니다. 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만한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사람의 어떤 일도 어떤 선도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가 이 일을 했기 때문에 이 일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은 마땅히 저를 받아주셔야만 합니다”라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할 수도 없고 해 봤자 우리가 해 놓은 그 일이 주님 앞에서는 별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일한 것이 없이 일을 할 수도 없었는데 그런 경건치 아니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그분을 우리가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못 접근하시면 나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더니 나를 무조건 의롭게 봐 준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매우 불공평한 어떤 분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인일지라도 그분앞에 나온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도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만 강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의 사건을 보시면 하나님이 어느 날 별이 빛나는 찬란한 밤에 아브라함을 바깥으로 이끌어내시고 아브라함에게 별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앞으로 이와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한명의 자식도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그 수많은 자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만 가지고는 아브라함이 저에게 자손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은 알 수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그 설명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가 있냐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3장 8절을 보시면,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없이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복을 받습니까? 이것은 구체적으로 아브라함 그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자손들이 어떻게 인류에게 축복이 될까요? 갈라디아서 3장을 계속 읽어보시면 16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아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이 무조건 많은 자손을 둘 것이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자손 가운데서 한 중요한 자손이 올 것인데 그 자손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자신의 선행과 자신의 결심만 가지고서는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는 무력한 인류, 죄속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서 그리스도, 메시야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시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내용을 우리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네 후손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자를 보내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의 최선, 우리의 행함, 우리의 의가 아직도 우리를 구원하기에 무력하고 부족했던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메시야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함과 죄사함이 가능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다른가요?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믿음이 아닐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장차 보내주실 메시야를 믿었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이미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죄악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3장으로 다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7절에 보시면 바울사도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와 아브라함 사이에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감히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한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동일한 믿음이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 아브라함이 붙들었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똑같은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아들인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었던 아브라함,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그토록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함이 그를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앞에 나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었음과 동일함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 줄을 믿으시나요?

 

■ 다윗의 사례

두번째로는 다윗의 경우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었던 케이스를 예증하기 위해서 바울사도는 두번째로 다윗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에 두개의 봉우리가 있다면 하나는 아브라함이고 또 하나는 다윗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마태복음 1장 1절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누구입니까?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것은 다윗의 별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진 목자였습니다. 그 백성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다윗, 그는 위대한 경륜의 지도자였습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민족을 통일했던 위대한 통일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노래와 악기는 귀신들을 좇아냈고 그 민족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백성들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고난의 역사와 어두움의 터널을 승리롭게 지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하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그 수많은 시편의 대부분에는 다윗의 시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합니까? 이런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일까요? 오늘 우리가 강조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런 존경을 받아 마땅한 다윗도 그의 행위와 그의 업적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존경받는 지도자요, 대통령이요, 한 나라의 국부요, 역사의 위기에서 그 민족을 구출한 구국의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그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한 사람이었고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십시오. 본문의 6절부터 보시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불법과 죄란 말이 나옵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한 사람이었고 죄인이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생애 가운데서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어느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자기 민족을 위협하던 골리앗에게서 자기 민족을 극적으로 구출했을 때, 그 때 다윗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아니, 남과 북으로 나눠져 있는 한 민족을 그가 통일하고 국민들에 의해서 그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추대를 받는 순간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러나, 본문은 그때가 다윗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다윗의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불행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다윗은 내면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왕이요, 지도자요, 음악가요, 시인이요, 추앙을 받는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내면적으로는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이런 불행은 그 어느 날에 있었던 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됩니다. 자기가 거느리고 있었던 부하의 처를 간음했던 사건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빼앗었던 그 사건으로 다윗은 더욱 불행해 졌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과 자리를 이용해서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그 사건을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완전범죄의 성공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후에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어졌고 노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때의 다윗의 심정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고백이 시편 32편에 나타나 있습니다. 3절과 4절의 고백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자기 마음속에 경험하고 있었던 죄책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입니다. 이 견딜 수 없는 마음속의 안타까움과 갈등과 영혼의 황폐함과 육체적인 쇠약도 함께 있었음을 이 고백을 통해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기의 친구였고, 선지자였던 나단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 친구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와서 그가 지금 고독해 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자기 불행의 원인에 직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해결되지 못한 죄였습니다. 비로서 그의 도움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그 순간,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용서를 확인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윗은 자기 생애에 처음으로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 행복에 대한 고백을 시편 32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 시편의 처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허물의 사람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시작한 후 5절에 보십시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로마서의 본문으로 돌아오십시오. 4장 7절의 말씀이 시편 32편의 인용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라고 했는데 여기 중요한 단어가 둘이 나옵니다. 첫째는 사하심이고 둘째는 가리움입니다. 사하신다는 단어는 본래 원어에서는 없앤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자기 죄가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기록을 없앨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갈등입니다. 둘째로 가리움입니다. 죄인들은 자기가 죄를 범했다는 그 자체보다도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죄가 노출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 가리워보려고 노력합니다. 닉슨도 감추어 보려고 하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요즘엔 클린톤대통령이 또 감추어보려고 하다가 화이트 워터사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핵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가리워지지 않습니다. 가리울 수 없는 죄문제, 없앨 수가 없는 죄문제.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의 죄를 완전히 없애 주실 수가 있다면, 그리고 만약 여러분과 저의 죄가 완벽하게 가리워 질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일까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일년중의 가장 놀라운 날이 있다면 그것은 속죄일입니다. 이 속죄일날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상징적인 사건을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해마다 이 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이 하는 일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양이나 염소를 한마리 선택합니다. 이 양이나 염소를 아사셀양이라고 불렀습니다. 대제사장은 이 속죄양이나 염소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그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이 속죄양이나 염소에게 옮겨진다는 표시입니다. 그 다음에 그 양으로 하여금 광야로 가게 합니다. 그러면 온 백성들은 그 속죄양이나 염소 한마리가 광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주목하다가 드디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면 백성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집니다. 그것은 죄를 지고 그 양이 가는 모습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해서 어느 날 역사의 수평선에 등장한 예수님을 가르켜서 요한이 증언했던 인상깊은 메세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의미를 기억해 보십시오.

 

이 속죄일날 제사장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을 합니다. 이번에는 양 한마리를 가지고 장막안에 들어가서 번제단 앞에서 그 양을 각을 떠서 잡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취해서 성소를 거쳐 휘장을 열고 지성소안에 들어가서 언약궤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언약궤란 상자였는데 그 상자 앞에 뚜껑이 있습니다. 그 뚜껑을 가리켜서 시은소, 혹은 은혜의 보좌(Mercy Seat)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그 언약궤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종종 언약궤 속을 들여다 보고 싶은 충동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어보자 마자 그들은 즉사를 당했습니다. 언약궤 속에는 3가지가 들어 있었는데 첫째는 깨어진 돌-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했음을 보여주는 돌이 들어 있었고, 또 하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하나님의 권위 앞에 거역하고 도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만나였습니다. 이 만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 광야를 행진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나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도리어 원망의 대상으로 바꾸고 있었던 범죄를 그들은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표적 3가지의 범죄-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린 범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던 범죄, 하나님의 축복을 도리어 원망으로 바꾸고 있는 범죄였습니다. 다행히 이 범죄의 내용물을 담고 있는 언약궤의 뚜껑은 닫혀져 있습니다. 닫혀져 있는 뚜껑에다 대제사장이 피를 뿌립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피만 보입니다. 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1장이 시작되면서 사도 베드로는 크리스챤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위하여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언약궤를 우리의 마음과 한번 비교해 보세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뚜껑을 열어 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서 무엇을 보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그의 율법을 깨뜨린 범죄, 그의 축복을 원망으로 바꾸고 있었던 범죄, 그의 권위를 냉소적으로 경시하고 도전했던 우리들의 범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했을 때,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보혈로 피뿌림을 얻은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은 무엇밖에 보시지 않습니까? 피입니다. 여기 우리의 죄가 완전히 가려진 하나님의 완전한 처방을 믿으시나요? 진정 우리들의 죄가 그분안에서 완전히 해결된 이놀라운 하나님의 처방을 감사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된 행복 - 그 행복이 당신의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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