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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제자 강해 설교 모음
12제자 강해설교1
12제자를 찾아서
마10:1-4, 막3:14-15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큰 두 가지 사역을 말하라고 한다면 첫째는 구속사역이요 또 하나는 제자사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객관적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완성된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역 초기부터 열 두 제자를 따로 불러서 교육하셨습니다(마 4:18-22, 10:1-4; 막 1:16-20, 3:13-19; 눅 6:12-16; 요 1:35-51). 특히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실 때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눅 6:12), 이는 열 두 제자를 세우시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구속사에 있어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며 직접 따라다녔습니다(마 13:16; 요일 1:1-3).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신약교회의 토대를 놓은 사도들이었습니다(엡 2:20). 이들을 통하여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고 또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구속사역을 계속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제자와 교회는 주님께서 정하여 놓으신 아주 중요한 구속방법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당시 일반 제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 제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의 구약을 토라(torah)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토라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최고의 생활방식은 이 토라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열정을 가지고 토라를 가르쳤고 그것에 따라 살며 토라에 순종하였습니다. 6살이 되면서부터 황소에게 꼴을 먹이듯 토라를 먹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녀들을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말씀교육은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교육은 생존의 열쇠였습니다. 1세시 유대인 역사학자인 유세비우스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녀들의 교육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1. 첫 단계교육-베트 세페르(Bet Sefer, 책의 집)
6살에서 10살까지 이루어지는 기초교육
랍비가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의 손가락에다 꿀을 발라주고 그것을 맛보게 한 후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다고 말해주기도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 올리면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것이 말씀이라는 것을 연상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10살이 되면 토라를 거의 외우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지역에서 살던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이 토라였던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모세 5경인 토라를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암송하는 것이 말씀을 보존하는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단계-베트 달무드(Bet Talmud, 배움의 집)
10살부터 14살까지의 아이들을 가르침
이때부터 학업을 계속하지 않는 학생들은 가업을 배워야 했습니다. 가족이 신발이나 포도주를 만들거나 농사를 짓는 경우 아이는 언젠가 그 가업을 이어받아 다음 세대로 물려 줄 수 있도록 부모와 친척들의 제자가 되어 가업을 익혔습니다.
한편 여기에서 계속 교육을 받은 최고의 학생들은 히브리 성경의 나머지를 외워야 했습니다. 열세 살이나 열네 살 정도가 되는 우수한 학생들은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까지 서른아홉 권의 구약성경을 암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공부방법은 구술 전통을 공부합니다. 즉 수천 년 동안 뛰어난 지성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토론했고 말씀의 의미와 말씀대로 사는 법을 놓고 고심했던 그 이야기들이 방대한 구술전통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성경 한 절 한 절마다 그것을 가지고 토론하고 고심하고 주석을 단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첩첩이 쌓여 있었습니다. 학생은 성경 본문뿐 아니라 해당 본문에 대해 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배우게 됩니다.
랍비가 학생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까지 해주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개 또 다른 질문으로 응수하는 것이 그 당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랍비들은 학생들이 단순 암기한 정보를 나열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학생이 그 말씀을 이해했는지, 말씀을 가지고 씨름을 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질문이 랍비의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셋째 단계-베트 미드라쉬(Bet Midrash, 배움의 집)
14살 이상이 되면 이제 탈미딤(Talmidim, 제자)이 되기 위하여 지원.
이미 공부를 포기한 아이들은 가업을 익히거나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그러나 더 공부를 하기 원하는 학생은 이제 랍비가 되는 과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학생은 잘 아는 랍비를 찾아가서 “랍비여,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학생이 한 랍비의 탈미딤이 되기 위해 지원한다는 것은 곧 그 랍비의 멍에를 메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는 스승이 가르친 것처럼 가르치는 법을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랍비는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아이가 재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아 아이가 내 멍에를 전할 수 있을까? 이 아이가 나처럼 될 수 있을까? 이 아이에게 자질이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아이에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토라, 전통, 다른 랍비들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이 십대 아이를 엄격하게 테스트를 하게 됩니다. 아이에게 자질이 없거나 최고의 학생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랍비는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토라를 아는 것이 분명하지만 내 탈미딤이 될 자질을 갖고 있지는 않구나”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가서 가업을 잇도록 하라”고 권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질이 충분한 아이에게는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학생은 부모와 회당과 마을과 친구들을 떠나 스승이 했던 일을 배우는데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 어디든 가게 됩니다. 구전법과 율법을 상황에 적용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스승처럼 되고자 삶 전체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이미 가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이미 제자 되기를 포기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가업을 이어가는 것을 선택한 청년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너희들도 나처럼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랍비들은 자질 있는 제자들을 찾았지만 주님은 세상적 기준에서 미달인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기준은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참 랍비, 참 스승인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요한 15:16절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참으로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의심도 많았고 성격도 괴팍하였고 또한 시기심, 질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끝까지 저들과 함께 하면서 저들의 삶과 인생, 그리고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 훌륭한 것입니다.
2.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가르쳤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복음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을 말하고 있는 곳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15절에 보면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과 ‘보내사 전도하게 하심’과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가 있게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I)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제자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에 그냥 교실에서만 가르치시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늘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무리들에게 설교나 강론하실 때에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길가면서도 가르치셨고, 집에 들어가서 식사할 때에도 가르치셨고, 일상적인 대화나 논쟁 중에도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교육의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식사하시면서 대화 중에 진리를 가르쳐 주셨으며, 또 질문이 있으면 자연스레 대답하시는 것이 곧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간이 다 교육 시간이었으며, 모든 환경이 다 교육 환경이었다.
2) 보내사 전도하게 하심-사도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사람들에게로 보내어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냥 가르치기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직접 전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교육은 ‘이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습’이 뒤따랐습니다. 물론 ‘이론’은 없이 ‘실습’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무리와 함께 가르치시기도 하고 제자들만 있을 때 따로 가르치시는 등 여러 모양으로 가르치신 후에, 그들을 직접 현장으로 내어보내어 전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현장으로 내어보내실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도 하고(대부분의 경우) 따로 제자들만 보내시기도 했습니다(마 10:5-23; 눅 9:1-6). 열 두 제자 외에 또한 70인을 택하여 전도하러 보내시기도 했습니다(눅 10:1 이하). 이러한 파송 후에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에는 경과와 결과 보고를 받았으며(눅 9:10, 10:17), 잘한 것은 칭찬해 주시고 미흡하거나 잘못된 부분은 책망하거나 권면하셨습니다(눅 10:18-20; 막 9:29).
3)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가 있게 하심-사역
예수님의 교육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가 있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말만 있는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율법을 해석하고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을 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마 7:29). 예수님의 가르침은 힘이 있고 권세가 있었으며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실제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자신이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신 분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권세는 제자들이 일상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권세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기도할 때에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세’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경건 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에(고전 4:20), 기도 생활과 경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전도란 말의 지혜로 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고전 2:4), 예수님께서는 새벽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하셨고(막 1:35), 제자들에게 기도부족을 책망하셨으며(막 9:29),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6:41). 이런 교육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였고(행 1:12-14),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도 규칙적으로(행 3:1, 10:9) 또는 특별한 때에(행 4:23-31, 12:5,12, 16:25) 기도에 힘씀으로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제자 교육은 오늘날의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세상 교육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함께 생활하며 자신의 삶을 함께 나누는 교육이었으며, 교육 시간이나 장소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전방위 교육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교육은 이론만이 아니라 실제가 함께 있는 산교육이었으며, 배우면서 사역하고 사역하면서 배우는 이론과 실제의 통합 교육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교육은 단지 말뿐인 지식교육이 아니라, 그 전파되는 복음에 자신의 권세를 주시는 능력교육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에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훈련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한 마디로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엡 4:22-24; 골 3:9-10; 딛 2:11-14).
열두제자연구2
개인전도의 챔피언;안드레
요한복음 1:38-44, 막1:14-17
제가 먼저 그림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구 같은지 한번 알아맞히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닮아 보이십니까? 오늘은 안드레를 같이 공부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안드레를 먼저 소개하려고 합니다. 왜 그를 먼저 소개하는지 말씀을 듣다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 출생: 예수님의 고향으로 유명한 나사렛에서 동쪽으로 40Km(약 100리)정도 떨어져 있는 벳세다 출신입니다. 그러나 자라기는 가버나움에서 자랐습니다(막1:29)
* 부모: 어부인 아버지 요나(나중에 요한으로 불리움)와 어머니 요안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 이름의 뜻:“남자”“사람”이란 뜻을 가졌다.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
“남자다운 남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I. 주님의 부르심(요1:38-39)
안드레는 처음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안드레는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안드레가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안드레는 그의 친구와 함께 예수님께 함께 대화를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날 저녁에 함께 지내며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참으로 의미 있는 귀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시간을 제10시쯤 되었더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제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가 1:14-17의 말씀에 의하면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은 다시 안드레를 만나게 됩니다.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기에 이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결국 안드레는 첫 번째로 부름 받은 제자가 됩니다. 안드레에게는 이 두 날이 참으로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 그와 처음으로 대화와 교제를 나눈 날이요, 또 하나는 이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날입니다.
Ⅱ. 개인전도의 챔피언(요 1:40-42)
그는 사람을 주님께로 소개하는 일을 잘해서 ‘전달자’ ‘소개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대중전도도 중요하지만 개인전도는 더 중요합니다. 개인전도는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좋아하는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전도자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아니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지 못하면 개인전도는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안드레는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좋아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안드레가 예수님에게 데려온 세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안드레는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지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는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따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완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열려 있는 사람이었고 유연한 사람이었고 순발력과 적응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안드레가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를 즉시 예수님에게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형제간의 인격적 관계가 좋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형제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신뢰하고 서로 존중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형제나 친척을 귀중히 여기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형제나 친척으로부터 신뢰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개인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전도의 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안드레는 이름 없는 한 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요6:8,9을 읽습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어느 날 5천명 이상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떡을 구해서 그 무리들을 먹이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때 빌립은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떡도 없고 돈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열려있고 순발력이 있는 안드레는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안드레 선생님, 여기 떡이 있어요. 엄마가 나 먹으라고 싸 주신 보리떡 다섯 개가 있어요.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도 있어요"
안드레는 본래 어린아이들을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아이들을 사랑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안드레 선생님을 좋아하며 따랐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린아이가 선뜻 안드레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행동에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돈으로 치면 별 가치가 없었지만 정성으로 치면 너무나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안드레는 어린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정성을 귀중하게 보셨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바친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그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오병이어로 5천명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셋째, 안드레는 헬라 사람 몇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요12:20-22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 사람 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 몇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안드레가 인간관계가 원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방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 포용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안드레가 헬라 사람 몇을 만났습니다. 헬라 말로 인사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먼 길을 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는 대화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 점심 식사정도는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도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III. 겸손한 안드레
1) 마가,행전// 4번째 자리
2) 마태,누가// 2번째 자리
3) 그는 중요한 사건에서 제외되었다.(주님의 산상변화. 주님의 고뇌의 기도현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Peter가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임을 알자. 그는 자기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그를 주님께 인도해서 지도자가 되게 했다. 자신은 3대 제자 축에 못 들고, 뒤로 물러섰다. 자기가 인도한 형 Peter 와 동료 John과 James 형제가 주요제자가 되고 자기는 소외 되었어도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불평 없이 뒤로 물러나 둘째자리에 앉는 겸손을 보였고, 단지 주님을 섬김으로 만족하고 충성되고 성실히 사는 사람이었다. 안드레는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로 "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던 겸손을 배운 것 같다. 높은 지위의 열망은 있으나 뒷전에서 조용하게 주님께서 생각해 주시는 것만 감사하면서 만족하고 뒷전에 처진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한 사람씩 주님을 믿는 승리자가 되도록 인도하였다. 교회에서는 베드로 같은 몇 명의 용감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더 필요한 사람은 눈에 뜨이지 않는 뒷전에서 일을 하는, 깊은 신앙을 가진 많은 안드레가 요구된다. 참으로 능력 없으면서도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것을 던져주는 사나이다운 제자였다.
IⅤ. 그 후 안드레의 삶
유대의 역사가인 Eusebius의 책 “HistoryⅢ”<교회역사>와 위경인 <안드레 행전:AD 260년>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Ephesus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 후 Greece의 아가야라는 지방으로 와서 페투테라는 곳에서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 지역 총독인 ‘에게테스의 부인’과 동생까지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한다. 그러자 총독은 정치적 목적으로 안드레를 처형할 수밖에 없자 예수를 포기하라고 회유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자 그 분풀이로 Andrew를 고문하고, 끝내 X형의 십자가에 밧줄로 묶어두어서 서서히 죽게 만듭니다. 고통 속에서 Andrew는 AD 69년 11월말에 이렇게 기도하며,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오, 그리스도 예수님이시여, 나를 받아 주소서!
내가 본 그 분, 내가 사랑한 그 분 안에서 나는 내가 되었습니다.
주님이시여, 당신의 영원한 나라의 평안 가운데 이제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그래서 Catholic에서는 오늘날에도 X를 “St. Andrew Cross”라고 부르며, 11월 중에 하루를 “안드레의 날”로 지키며, 열심히 전도합니다. 그리고 전도 방법에 있어서도 안드레처럼 가장 친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을 “안드레식 전도”라고 불리어 집니다.
머릴로라는 화가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성 안드레의 순교”입니다. 그 그림에는 X자의 십자가에 안드레가 매달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옆에 어린 소년 하나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눈물을 흘리는 소년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소년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던 소년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자신이 드린 그 보잘 것 없는 음식이 기적을 통하여 5천 명을 먹도록 만들었던 사건을 소년은 평생 기억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님께로 인도했던 안드레를 그리워하며 사랑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안드레가 남긴 가장 위대한 교훈은 “한사람 비젼”(ONE MAN VISION)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사상입니다. 그가 한 사람 베드로를 인도했기 때문에 3천명의 회개한 역사를 이루어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시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 소년을 소개함으로 인하여 5천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한사람 비젼”입니다.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젼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매일 저녁 예수믿을 사람들을 초청하는데 한 사람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어린 소년 하나가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결국 그 부흥회 기간에 소년 하나만 주님을 영접하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실망하였습니다. 그 집회는 실패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이 누구입니까? 아프리카 선교에 불을 지펴서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도록 만들어냈던 리빙스톤이었습니다. 누가 실패라고 볼 수 있습니까?
에드워드 킴벌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구두를 고치는 청년에게 구두를 고치는 동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누구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이 청년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함으로 그가 바로 D.L. Moody가 되었습니다. 미국 교회사에 위대한 부흥의 물결을 일으킨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고 그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이끌어내는 것이 한사람 비젼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개인전도를 통하여 한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주여, 내게 한 사람을 주소서.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제자 강해설교3
빌 립
요한복음1:43-46
오늘 사진을 보면서 누구인지를 알아 맞춰보십시오. 물론 함께 읽은 성경본문을 보면서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그의 성격이나 인물이 어떨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인상을 보면서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빌립에 대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빌립은 그 이름의 뜻이 “말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름은 아마 북쪽 갈릴리에 그리스의 영향력을 주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의 이름을 따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그 당시 벳새다 지역을 다스렸던 통치자 중에는 빌립이라는 이름의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이름을 빌려서 아들에게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유대인 부모들은 이방인의 이름을 자녀들에게 지어주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이 자라난 가족적 배경은 보수적인 유대인 가정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가정의 배경을 가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문서에 의하면 그는 스불론 지파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헬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습니다. 결과 빌립은 그리스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뿐 아니라 그리스에도 멧세지를 전하는데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벳새다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동향인 빌립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요4:4) 메시야를 찾으려는 안드레나 베드로처럼 빌립도 마찬가지로 메시야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의 성격은 어떠할까요? 빌립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곳은 요한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아마 사도 요한과 빌립은 친밀한 친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에 대하여 나름대로 관찰하고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빌립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의 인물됨을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오늘 본문 1:43을 함께 읽으십시다. 이 내용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먼저 주님을 만나고 나서 다음날에 주님께서 빌립을 만나셔서 나를 좇으라고 부르시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제자도 같은 방법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안드레: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 이에 안드레와 요한이 “선생님 어디 사십니까?”고 역으로 물어보고 나서 주님과 함께 교제의 시간을 보냄으로 제자의 길을 시작하게 됩니다. 다정한 대화를 통하여 주님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 원래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만나자 마자 이름부터 바꿔주었습니다. “내가 새이름을 주겠다. 앞으로 네 이름은 게바, 혹은 베드로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시몬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빌립은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됩니까? 주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은 “나를 좇으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단도직입적이고 강경한 투로 말씀하시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도전적입니다. 그리고 빌립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대로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빌립은 결단력이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한번 결단을 하면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45절에 보면 그는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합니다. 친구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이미 구약의 내용을 알고 있었고 또 그 메시야를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자기들이 기다리던 그 분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따르기로 한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확신이 있다면 행동으로 나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확신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을까? 그 기준을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자마다 다 개성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자신이 믿는 것을 남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자신 있게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주님은 찾으셨습니다.
2) 요한 6:1절을 보면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5병 2어의 사건이 기록된 내용입니다. 4절-5절을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라고 주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왜 빌립에게 물으셨을까요? 빌립이 어떤 대답을 할지를 알고 싶으셨을까요?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요?
빌립이 7절에서 대답을 합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의 답을 생각하면 그가 참으로 계산에 빠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만 5천 명을 계산할 때 한 사람당 얼마의 식사비를 계산하여 총 액수를 산출해 낸 것입니다. 결국 무슨 얘기입니까? 200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노동자가 200일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놓은 돈의 액수입니다. 그만한 돈은 지금 갖고 있지도 않고, 또 그만한 돈이 있다고 해도 음식을 한꺼번에 살 수 있는 시장이나 식당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빌립의 답은 불가능이라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을 왜 생각하느냐는 것이 빌립의 대답입니다. 빌립은 참으로 계산에 빠른 이성적인 사람, 현실주의적인 사람, 실용주의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요12:20-21을 함께 읽겠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여기에 보면 이방인들이 빌립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모십이 나옵니다. 왜 빌립에게 이방인들이 찾아 왔을까요? 그 이유는 제가 서론에서 말씀드렸지만 빌립은 유대인이었지만 헬라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름자체도 유대식 이름이 아니라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말도 통하고 또 마음이 통하는 빌립에게 부탁을 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빌립이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직접 예수님께 가서 저들을 소개할 수도 있는데 먼저 안드레에게 가서 의논을 합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주님께 말씀드려서 이방인들을 주님께 소개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매우 신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신중한 사람이 주님께서 한 마디로 나를 좇으라하자마자 주님을 따라 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의심하고 여러 가지로 계산을 할만한 데 한 마디로 주님을 따라갔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4) 이제 마지막으로 빌립에 대한 기록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요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부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입니다. 확인하고 싶어 하는 빌립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실을 그냥 어정쩡하게 아는 척하고 넘겨 버릴 수는 없는 철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책망합니다.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은 매사에 신중하고 너무나 따지고 너무나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고 들은 것들, 그 엄청난 기적들, 그런데도 나를 믿지 못하고 또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느냐며 책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초대교회의 문서들은 소아시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합니다. 라오디게아, 골로새 등지에서 사역했는데 자주 갈라디아 지역을 순회하였다고 하며, 갈라디아 사람들이 불란서 고올(GAUL)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 곳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도 합니다. 특히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무리들에게 잡혀서 몰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면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훗날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져서 빌립을 기념하는 교회당에 안치 되었습니다.
빌립이라는 제자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빌립과 같은 사람은 많은 생각을 하고 따져보고 계산하고 신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확신이 없으면 도저히 움직이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이 발달된 사람, 미리 계산하고 치밀히 계획해야만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확신이 서기만 하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확신이 서자마다 그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 망설임 없이 따라갔습니다.
확신이 설 때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깨달음이 올 때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유부단하게 있다가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빌립은 처음에는 망설이고 의심하고 계산을 하지만 그러나 일단 확신이 서면 확실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 계산적이다 보니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게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는 믿음의 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믿음의 자리인 것입니다.
가끔 교회에서 빌립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수치로 계산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산을 세우고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할 수 있다 없다를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계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계획 세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세운 이 계획 이상의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생각과 의견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비교하여 말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이상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의지하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학생시절에 자유주의적인 책을 읽다가 믿음이 흔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비판하는 글을 읽다가 신앙이 흔들린 것입니다. 고민하다가 성경을 가지고 시카고에 있는 휘튼 대학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성경을 의심하고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며 기도를 할 때 조용한 달빛 아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그리고 이 말씀을 사실 그대로 선포하라”는 음성입니다. 그는 이 후로 자신의 이성과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의 설교에는 “성경이 말씀하기를...”(The Bible says...)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결단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하라고 하는 일들을....
12제자 강해설교4 순전한 사람-나다나엘
2008-07-30
순전한 사람:나다나엘
요한 1:43-49
오늘은 12제자 시리즈 공부 가운데 세 번째의 인물을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먼저 그의 사진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착실하게 생겼지요? 그래서 오늘 나다나엘을 순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 나다나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 먼저 그의 이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다나엘이 제자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그의 이름이 나다나엘이라고 하지 않고 “바돌로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시몬을 부를 때에도 “바요나 시몬아!”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도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왕족의 이름을 따서 지었지만 그러나 왕족은 아니었습니다. 실지 본래 이름이 나다나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나다나엘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부모님이 아들을 낳고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일 것입니다.
2. 어떻게 주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나다나엘이 제자가 되는 과정은 그의 친구 빌립의 전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을 만난 빌립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가서 자신이 성경에 기록한 메시야를 만났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나다나엘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나사렛에서 무슨 메시야가 탄생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계속 친구 빌립이 강권하여 “와, 보라!”라는 권면에 함께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기 아는 사람들을 주님께 소개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안드레가 자기 형 베드로는 주님께 소개하고 또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주님께 소개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만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제자의 큰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톰 해리슨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I am OK, You are OK』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사람이 타고난 본성을 바꾸기가 참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바뀐다거나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톰 해리슨은 이 책에서 몇 가지 이유가 있으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아주 어려운 고통을 당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과 의지를 다 버릴 정도의 환난이나 고난을 당하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나면 사람은 그것을 통하여 변화를 가져올 큰 결단을 하게 됩니다. 내 지식이나 내 생각으로 볼 때에 '이제는 다 끝났다' 싶을 때, 인간 능력과 그 의지의 한계를 넘어설 때 그 절망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생의 새로운 궤도 수정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음에는 '유레카 스테이지'(eureka stage)에서 사람이 바꾸어진다고 했습니다. '유레카'(Eureka)라는 말은 헬라어로 '찾았다'는 말이다. 영어로 하면「I have found it」이라는 말이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을 때, 엄청난 깨달음이 있을 때 사람들은 변화를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산삼을 캐는 사람들이 산삼을 발견했을 때 뭐라고 소리 지릅니까? “심봤다!”라고 한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유레카”라는 말은 엄청난 것을 찾거나 별견했을 때 지르는 소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발견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옛날 시라큐스의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공중목욕탕에서 깊은 사색을 하다가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는 너무 기뻐서 옷도 입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가면서 '유레카'(Eureka), '유레카'(Eureka)를 외쳤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것을 찾았을 때, 내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내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을 때, '아, 이것이다' 하고 감격할 때에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랑이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랑이 있다. 나는 버림받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계셨다. 나는 아무 쓸모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나를 소중하게 쓰시고 계신다. 이 위대한 역사를 발견하는 순간에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나다나엘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소개로 주님을 만났는데 그 주님을 만난 순간 그는 그의 인생을 바꿀만한 놀라운 분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부터 기억하고 있는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칭찬을 해주고 기억해주시는 주님을 만났을 때 나다나엘은 세상에서 엄청난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게 된 동기는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내 인생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주님을 만남으로 제자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인생을 투자할만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내 생명까지 드리고 싶은 분으로 믿을 때 우리의 삶을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3.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사람입니다.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로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집들은 방을 하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무화과나무 그늘은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경건한 이스라엘인은 당시에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을 하다가도 시간으로 말하면 9시, 12시, 3시, 세 번만은 딱 멈추고 조용히 기도합니다. 철저하고 규모 있는 기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제목과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필요합니다.
또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묵상하고 기도하는 열성 이상으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약속을 찾으려고 구약을 공부했을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다.(요 1:45). 빌립의 이 말은 메시야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무화과나무 밑에서 구약성경을 펴들고 메시야의 강림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무화과나무 그늘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아침마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장소를 무화과나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분의 골방을 무화과나무 그늘로 생각하시고 거기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면서 주님을 기억하며 기도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24시간 중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시간을 기억하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우리의 모습은 바로 시간을 내어 주님을 기억하며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둘째로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매우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무시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친구의 강권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였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그리고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엄청난 칭찬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다나엘에게 오히려 그를 높이 칭찬하고 인정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아래 있을 때부터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너무나 놀랬습니다. 자신을 이미 알고 있고 또 자신이 기도하는 모습, 그리고 성경을 묵상하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리고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으로 칭찬을 들었을 때의 나다나엘은 엄청난 분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그 분에게 맡기게 됩니다.
“간사”라는 말은 물고기를 낚을 때 사용하는 “미끼”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미끼를 이용하여 사람을 속이고 자기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정직해야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면 그것은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다나엘에 대한 기록이 우리가 읽은 이 본문 외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의 성품이 조용한 성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그러면서도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다 보니 남들에게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의 영향력이 있는 삶을 살았던 제자가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셋째로 그는 마음을 열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즉시 자기가 발견하고 깨달은 진리를 인정하며 주님께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경은 고백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너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고,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시인하겠고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너를 부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참으로 진정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거짓된 고백, 잘못된 고백도 할 수가 있습니다. 정직한 고백이 되기 위하여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지 않는 입술만의 고백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어...”라고 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고 하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이 고백은 진실된 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참으로 기뻐하였습니다.
4. 마지막으로 그의 마지막 생애는 어떠했을까요?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 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짓고 모셨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습니다. 이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주님은 오늘 정직한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격적으로 그렇게 드러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진실된 청년, 정직한 사람,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의 업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명성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성령 충만했던 제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조용한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지만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제자입니다. 조용히 하루를 주님을 만나는 경건의 시간으로 시작해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참된 인격과 성품으로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 나다나엘입니다. 자신이 믿는 신앙을 만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며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드러내는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12제자 강해설교5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마태
마9:9-13
오늘은 4번 째 제자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은 성경을 봉독하기 전에 영상에 나오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아맞히는 것으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짐작이라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리가 길고 또 수염이 있는 사람, 유대인 같기도 하고, 십자가를 갖고 있는 모습이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한번 상상해보면서 이제 말씀을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마 9:9-13 누구입니까? 예 마태입니다.
먼저 그의 이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레위”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마태를 레위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마태”로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 (막2:14/3:18/눅5:27/6:15). 왜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마 그의 첫 이름은 레위였는데 그리스도를 믿은 후 예수님께서 마태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셨을 것입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그의 부모와 고향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일 것입니다. 그의 제자가 되기 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는 솔직하게 자신을 “세리 마태”라고 했습니다.(마 10:3) 세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의 공무원인 신분으로, 로마가 통치한 식민지의 세무관리가 되어 로마가 정한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관의 세리들은 사람들을 정지시켜 검색하거나, 짐을 조사하고,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밀수품을 색출하기도 합니다.
마태는 어디에서 근무하였습니까?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교역하는데 참으로 좋은 위치입니다. 다메섹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간선도로로 짐을 가득 싣고 내려오는 대상들은 마태가 근무하는 세관에서 멈추어 2-12%에 달하는 통행세 혹은 관세를 지불해야 합니다. 또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어부로부터 세금을 받아 들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가끔 마태에게 세금을 바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같은 민족들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첫째는 로마의 앞잡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매국노와 같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세금을 거둔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착취하는 마피아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금 중에서 10-12%를 자신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이상을 자기 것으로 삼기도 하고 또 이유 이상으로 세금을 많이 부과해서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이 흔했던 직업입니다. 로마제국이라는 권력을 배경으로 하고 로마 군사의 힘을 이용하여 강제징수하고 사람들을 협박하여 감언이설로 속여 빼앗기도 합니다.
높은 세금 수탈에 서민들이 고통을 당하는 동안 세리들은 점점 부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에 봉사하는 직업 때문에도 미움을 받는 세리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더러운 사람들로 보였고, 외국 정부와 야합하는 공모자요 매국노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이방인이나 창기와 한 통속으로 취급되었습니다.(마 18:17/21:31). “세리와 죄인”은 사회적으로 최하층 사람의 통칭이기도 합니다(마9:9). 더구나 이들은 재판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었으며, 일반 죄인을 조롱할 자격도 없었고, 회당에 들어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리의 돈은 연보로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인 문둥병자의 지위로 버림을 받았다.
그가 어떻게 제자로 부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마태도 예수의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신 곳도 가버나움입니다. 형제와 사촌들과 함께 시몬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직업을 포기한 이야기와 지붕을 통하여 수족이 마비된 사람이 예수께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건도 가버나움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마태는 들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중풍환자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도 내심으로는 자신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사무실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말씀으로 “나를 좇으라”(마 9: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압도당하고 영접하심에 너무도 기뻤던 마태는 그 자리에서 성결함을 느꼈습니다. 그의 마음은 평강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즉시 순종하여 나와서 사무실의 문을 닫았습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묻는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7-28)고 기록을 하였습니다. 마태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순간적이었습니다.
1.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
당시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받던 세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 중에는 민족주의자, 열심당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매국노라고 생각하는 세리가 자기들과 함께 같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갈등과 다툼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대외적으로도 많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주님은 전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태를 택하신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사악한 사람일지라도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선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며 그 은혜는 모든 인간에게 고루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태를 질시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사랑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한 사나이, 마태를 보신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사랑의 은혜는 죄짓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습니다. 베푸시는 예수님의 계획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복음전파에는 다양성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있기에 마태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은 미래를 창조합니다. 사랑은 부정적인 세상을 긍정적인 세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주님이 마태를 품에 안으시고 그를 제자로 받아주시는 순간 마태의 미래는 환히 밝아오는 아침이 되었습니다.
2. 그의 이름이 레위에서 마태로
부모님이 그의 이름을 원래 레위로 지었는데 아마 주님께서 마태라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기 조상들의 이름을 붙여주면서 레위사람처럼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보통 부모들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부모의 소원과 간구가 담겨져 있는 이름을 짓는 경우가 흔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녀들의 이름을 지으셨지요? 첫 딸인 한나는 성경의 한나와 같은 여인이 되라고 제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리고 한솔이는 제 아버님이 첫 손녀의 이름을 자기가 짓지 못한 섭섭함에서 미리 아버님이 지어서 보내주셨는데 뜻은 “영원한 푸르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영원한 상록수처럼 세상에 밝고 깨끗함이 지속되는 인생이 되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부모님의 뜻이 제사장이나 성전에서 봉사하는 귀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했는데 그만 가장 멸시받고 유대인들이 적대시하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까지는 제사장이나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랍비 학교에 가서 철저한 유대인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완전히 부모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보니 출세라는 것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리타분하게 성전에서 제사장이 되거나 성전에서 시무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보다 로마의 권력과 힘을 갖는 것이 더 출세하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도 계산을 잘 해야 하며 장부를 만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당시 로마 정부에 고용이 되어서 관리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언어는 필수적입니다. 아람어, 헬라어, 히브리어, 거기에다 라틴어까지 할 수 있어야 하는 직업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학력이 높은 사람이 마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악의 대접을 받고 있었던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어떻게 출세지향적인 사람이,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던 인생이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기 인생을 바치고 따를만한 분은 만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따르고 싶은 대상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출세보다도,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기쁨, 삶의 의미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 초라해 보이고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요새 젊은이들은 자기 정열을 바칠 수 있는 비젼과 꿈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이나 꿈을 찾지 못한 것이 오늘 젊은이들의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바치고, 내 삶을 바치고, 내 모든 것을 드리고 헌신할 수 있는 진정한 대상이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우 찾는 것이 가수, 배우 등 연예인, 스포츠맨 등이 요새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목적입니다.
수년전에 타임지에 소개되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미국의 어느 똑똑한 청년 대학생이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남미 여행을 갔습니다. 멕시코, 구바 등을 구경하는 중에 쿠바의 공산주의자와 접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산주의자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확신 속에 살고 있는지, 자기들이 믿고 있는 공산주의 사상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자기 인생을 바치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동을 받아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하는 애인에게 절교의 편지를 보낸 것이 타임지에 실렸습니다. “이제 나는 내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하였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이제부터 나의 애인, 나의 목숨, 나의 전부, 나의 생명이 되었습니다.”라고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토인비 교수는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독교에서 도적맞은 페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오늘 우리의 열정과 헌신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오늘의 마태처럼 주님을 위하여 내 생명, 삶, 인생을 바칠 수 없을 때 우리는 헛된 곳에 인생을 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바쳐야 하는 열정과 헌신을 세상에 바칠 때 그것이 바로 헛되고 헛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믿음은 풍성한 잔치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직후 마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때 세리와 다른 사람들도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눅 5:29). 잔치의 내용이나 넓은 집은 많은 손님들의 접대하는 데 충분했으며 모든 것은 마태의 재산정도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이 잔치는 훌륭하게 돈을 쓰는 것이었으며 또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축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는 모두 가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 마태는 무척 기쁜 일이었다. 마태는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둘째는 작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과거를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직업을 떠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간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일종의 송별파티였으며 옛 생명의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함을 고백하는 의미가 있는 파티입니다. 셋째는 증거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옛 친구에게 증거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잔치에 친구들을 청하였습니다. 자기의 변화된 삶을 증거 하기 위하여 파티를 연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잔치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내가 주님을 만나 구원받은 그 순간에 우리는 파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마지막 제자들과 이별을 하면서도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이 재림할 때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계시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 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현대 예배는 “축제이며 잔치이다”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연구하면 할수록 잔치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매일 떡을 떼며 즐거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주님을 만나는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감격과 기쁨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업적과 생의 마지막을 알아봅니다. 마태 시대의 사람들은 세리는 변화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마태의 잠재능력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예리했고 훈련되어 있었으며 용모가 출중하고 헬라인과 라틴 사람과 아랍인에 대하여는 정통하였습니다. 미래가 인생의 목적에서 돈을 단념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신 예수께서는 그가 신약의 첫째 권을 쓸 수 있도록 변화시키고 감동을 주셨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겨냥하여 쓴 것입니다. 마태는 구약 속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약속된 참 메시야가 예수임을 증명하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마태는 복음을 쓰면서 일생을 살았다. 마태가 에디오피아와 바사에서 복을 전파했다는 전설도 있다. 어느 날 에디오피아에서 에굽으로 향하여 돌아오는 길에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만나 창에 찔려 거기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 주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세상에서 비판받는 사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일지라도 주님은 그의 미래와 가능성을 보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외모나, 직업, 현재의 약점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내 생명을 불사를 수 있는 목적과 대상을 찾았다면 담대히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우리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102장 찬송을 함께 부른다.
12제자 강해설교6
불타는 정열의 사람:시몬
막3:13-19, 마10:1-4, 눅6:15, 행1:13
오늘은 5번 째 제자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영상에 나오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아맞히는 것으로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짐작이라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을 옆에 두고 있는 사람, 여러분 마음에 한번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잘 모르시죠? 오늘 읽은 본문을 봐도 12제자 이름이 다 나와 있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힌트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 분과 같은 이름이 제자가운데 있습니다. 하나 더 힌트를 드린다면, 이 분은 이름만 나와 있지 사실 그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없는 제자입니다. 누구시죠? 예 시몬이라는 제자입니다.
성경에 그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가나안인 시몬, 혹은 셀롯인 시몬”이라고 제자들의 명단에 나올 때 기록된 것뿐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셀롯당에 속했던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셀롯당이라는 것은 열심당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당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마지막으로 강력한 지파로 등장한 셀롯(열심당)등이 있었습니다. 시몬은 “열광적”을 의미하는 카나나이오스(Kananaios)라고 합니다. 사실상 카나나이오스는 열심당에 대한 아람어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인이라고 쓰여진 단어는 지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정치적인 명칭”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인 시몬”이라는 말은 유대의 극단주의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셀롯인 즉 열심당원 시몬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Zealots 유대의 극단적인 애국정당의 이름. 가나안당이라고도 했다)
이 열심당은 A.D6 년경에 갈릴리 유다라는 사람이 창설하였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그들의 신을 숭배하는 것은 믿음에서 어긋난다며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신앙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하였고 그들이 사상적인 배경은 B.C 167년경에 마카비 형제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외세의 침입에 대하여 민족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것을 우리는 열심당의 기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행5:37절 이하에 보면 유대지도자들이 사도들을 잡아서 모두 없애고자 할 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가만히 두라 이거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께로 나왔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니 가만두어라 라고 할 때 갈릴리 유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유다가 바로 열심당의 기원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사에 자기 민족을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또 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극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로마에 대하여 친근한 경향을 보이면 자기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죽여 버리는 잔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적인 애국자이며 자유 투사였고 로마제국의 점령에 항거하는 과격파였습니다. 이들은 외국의 세금부과에 반대하여 투쟁했으며 자신들의 의견을 고무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음모를 꾸미고 종교적인 열성이란 이름을 빌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난폭한 테러를 자행하였습니다. 일종의 “극렬 민족주의 집단”이 바로 열심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작은 야고보라는 제자도 열심당 출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독립운동과 관계된 매우 중요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사해주변에 있는 큰 바위 산인 마사다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자연적으로 구성된 험한 바위와 오랜 세월이라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천연의 요새라고 불릴 정도로 험하고 접근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대략 3년 동안 960여명의 사람들이 로마 군대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마지막 자존심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대부분이 열심당원들입니다. 로마의 군병들이 도저히 마사다를 함락시킬 수가 없자 그들이 옆으로 길게 토성을 쌓아서 마사다에 공격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군병들 즉 이방인들에 의하여 죽음을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무려 100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집단 자살을 하였던 곳이 바로 이 마사다라는 곳입니다. 지금도 유태인들은 징집되어 군인이 되는 서약을 이곳 마사다에서 행합니다. 거기에서 파는 모든 기념품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마사다는 결코 다시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글입니다. 여기에서 끝까지 목숨을 걸고 항전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열심당에 가입하려면 불타는 격정과 철저하게 헌신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결심이 없다면 가입이 불가능했습니다. 일종의 비밀결사대원처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결사당원들입니다. 암살, 테러를 지향하는 단체입니다. 로마는 이들을 가장 경계하고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에도 그 장면이 나옵니다. 지붕의 기와가 떨어진 것을 열심당원들이 숨어서 로마의 지휘자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의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이 당파의 당원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배경과 성격과 기질을 어느 정도 알게 해주는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몬이 주님의 제자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을 기대하고 주님을 따랐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사야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힘들고 어려울수록 과거의 다윗 왕이 다스리던 시대를 그리워합니다.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메시야 대망사상입니다. 구약의 예언을 바탕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기를 바라는 그런 메시야사상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런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못 다한 민족 해방의 꿈을 예수님이 이루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이 말씀을 들은 시몬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로 열심당원들이 주장하는 목표와 같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외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하여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이 혁명의 지도자가 될 것을 기대하며 따랐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4-6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때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한 제자가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로 봤을 때 누가 이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이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제자 중에 이렇게 과격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주님이 왜 이러한 자를 제자로 삼으셨을까? 많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싫어하셨습니다.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그런데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제자를 데리고 다닌다면 분명 로마나 유대 정치인들에게는 경계의 단체로 오해받을 가능성도 있을텐데 주님은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열심당원은 로마정부의 미움과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제자가 되어 함께 다녔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시몬을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그의 무엇을 가능성으로 보았을까요? 두 가지를 그의 성품 속에서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첫째는 그의 뜨거운 열정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의 가슴에는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불, 정의를 위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시몬의 가슴에 타고 있는 불길을 주님을 보신 것입니다. 그 불이 복음을 위한 불길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신 주님은 로마로부터 위험한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을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시몬의 열광은 자제되고 정화되어 바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만일 족쇄를 벗어난 그의 열정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된다면 그는 얼마나 훌륭한 영적인 군사가 되겠는가? 주님은 강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원하셨습니다. 시몬의 열정은 사도들 전체에 불을 당겼을 것입니다. 그의 열정은 쉽게 옮겨졌으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을 불붙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을 제자로 삼고 싶어 하십니다.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인도의 선교사 헨리 마틴은 인도의 해변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에서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불태우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스펄젼은 “당신의 교회에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느냐?”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답하기를 “열성을 가진 열광자를 보내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불같은 시험에 그냥 녹아내리는 성도가 아니라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위하여 마음과 힘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저녁에 함께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뜨거운 복음의 열정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시몬의 마음에 화합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리 마태와 셀롯인 시몬이 함께 자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봐서는 절대 용납이 될 수 없습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로마제국에 팔렸던 사람이고 시몬은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었다. 시몬은 열렬한 애국자였으나 마태는 매국노였다. 마태는 로마제국의 도구였으나 시몬은 압제자의 적이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때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들의 암살대상자 명단 위쪽에 자리 잡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팀웍을 이루어 함께 생활하며 주님을 따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물론 여기에는 주님의 포용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품안에 모든 성품들이 녹아내리고 서로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화합의 정신,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슴에 안고 있는 그의 사랑에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도 자기가 갖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이제 열린 마음으로 마태를 대했을 것입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제자들의 팀웍에 협력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나와 이념이 다른 사람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같이 어울려서 거기서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입장의 사람을 제자로 삼으셔서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많은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도 할 수 없는 사랑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해야 합니다. 원수까지, 나와 생각과 사상이 다른 사람까지, 나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을 때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몬은 과격한 혁명가였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믿고 있는 사상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의 사상과 생각들이 하나씩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우리가 말하는 그런 검이 아니라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뜨거운 열정이 세상적 혁명에서 복음에의 혁명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심당원 시몬의 시야를 드높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만이 보이는 그의 눈길을 들어 온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고 민족주의의 차원을 넘어서 세계주의자가 되게 하였으며 편협한 애국주의자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인류를 위한 넓은 사랑을 지니도록 그의 시야와 사상을 넓히고 높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문서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에서 전도를 하고 다음에 북아프리카로 가서 에집트에서 전도를 많이 하고 나중에는 영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런던에 복음을 맨 처음 전한 사람, 그래서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열 두 제자가운데 특별히 가나안인 시몬을 좋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후 페르시야로 옮겨와 복음은 전하다가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톱으로 켜서 마지막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173장을 찬양합시다.
12제자 강해설교 7
꼭 필요한 사람:야고보
(마태복음 10:2-4)
다시 12제자 강해설교를 합니다. 먼저 사진을 보시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알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강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인데 이 그림을 보고 누구인지 알아 맞추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힌트를 드린다면 이 사람의 이름은 제자 중에 둘이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한 일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친 동생 중에도 이 이름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예 야고보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 작은 야고보는 말하고 행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12제자의 일원으로 선택을 받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훌륭히 성취하였다는 것만 남아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하여 한일이 없어서 “잊혀진 제자”라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은 잘 알려진 이름이었습니다. 즉 같은 이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는 야고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3명이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에서 이 세 사람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자주 혼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혹시 혼동을 일으킬까봐서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1)12제자 가운데 중요한 제자
요한의 형제로서“우뢰의 이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격 급한 사람인데 헤롯대왕에 의하여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한 제자입니다.(행12:1) 이 제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2)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주님 부활하신 후, 율법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예루살렘에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발언하였던 사람입니다. 교리적이고도 명확한 발언을 한 후,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부각된 사람입니다.(행1:14, 15:13) 그는 처음부터 형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요7:5)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고전15:4) 이때부터 결정적으로 주님은 단순히 육신적인 형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오신 분이심을 신뢰하고 그의 삶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귀한 장로로 그리고 지도자로 사역을 하게 됩니다.
3)12제자 중 9번째로 기록된 작은 야고보(마10:3, 막3:18, 눅6;15, 행1:13)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제자를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패오였고 어머니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있었던 마리아입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작은 야고보”라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보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불려 졌던 것으로 봅니다. 야고보가 둘이나 되다보니 구별을 하기 위하여 키가 작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이 야고보는 키가 작았던 사람이며, 이 사람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알패오였으며, 요세라는 사람과 형제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에게는 마가복음 2장 14절을 보게 되면 또 한 명의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레위는 세관에서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레위를 다른 말로 말하면 마태로서 레위라는 이름을 마태의 다른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레위를 가리켜서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마태가 야고보의 형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서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좋은 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작은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분들은 그가 열심당원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열심당원에 속해 있다가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사상을 버렸다고 합니다. 나라 찾기 운동에 열심이던 사람들이 어느 날 민족이라는 것보다 더 커다란 이상이 있다는 것을, 민족이라는 것보다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더 숭고하고 더 위대한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민족을 위한 열심에서 그들이 복음을 위한 열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참으로 귀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그가 열심당원이었다면 그의 집안 내력이 참으로 재미있어집니다. 형제지간에 서로 대치되는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인 마태는 세리로서 친로마-앞잡이였고 반면에 야고보는 열심당원으로 반로마-저격수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사상적으로 서로 완전히 다른 형제가 한 집안에 있을 때 많은 갈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갈등과 서로 대적하는 관계가 있을지 모르나 주님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녹아들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주님의 온유하심, 주님의 관용, 넓은 아량으로 모든 제자들을 품에 녹일 수 있는 능력이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보통 색깔이 같은 사람끼리 모일 가능성이 있지만 주님에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일반 선교기관과 다른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 이름으로 하나를 이루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가 주로 무엇을 지향하느냐 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갈라놓으면 안 됩니다. 파당을 지어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한 계급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 이상이 높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자기 제자로 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을 죽이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로마인들을 죽이기 위한 음모와 저항 속에서 그들의 청춘을 불사르던 사람들도 주님은 사랑하셨으며, 그런가하면 로마에 아부하지 않고는 자기 목숨을 지킬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관리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도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가지지 못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기독교는 가진 사람에게도 예수가 필요하고, 그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꼭 같이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여당도 필요하고 야당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제자에 대한 별명을 “작은 야고보, 그러나 꼭 필요했던 제자”라고 붙였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그의 업적이나 말을 찾을 수 없지만 제자들의 이름이 나오는 곳에는 항상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야고보의 기사 가운데는 그가 무슨 말을 했다는 기록조차 없었습니다. 참견도 안 하고 떠들지도 않고서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했던 사람, 이 사람은 참으로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숨어서 자기의 할 일을 열심히 했던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바울의 친구 중에 아리스다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별로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이 제자는 바울과 함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설교한 일도 없습니다. 기적을 행한 일도 없습니다. 또 위대한 어떤 가르침을 교육시킨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어려울 때는 항상 옆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었을 때에도 바울과 함께 있기를 원하여 자진해서 수감됩니다. 바울이 배에서 파선하고 어려웠을 때에 아리스다고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무인도인 섬에 도착해서 괴로움을 겪고 있었을 때에도 그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는 수난의 현장에 아리스다고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습니다.
실로, 우리 중에 이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필요합니까? 겉으로 나타나는 굉장한 일을 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꼭 있어주는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어 주는지요! 저는 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제가 설교 할 때에 그냥 앞에 앉아 있어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준비했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설교자는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주는 사람, 이 사람은 작지만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정말 필요했던 제자였습니다.
당신은 이 작은 야고보가 아닌 야고보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예수님의 우편에 앉혀 달라고 선거 운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야고보는 말하기보다는 기도를 더 즐기고, 설치기보다는 자기가 있어야 할 조용한 자리에서 말없이 그 자리를 메꾸며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 하고 있던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해서 유대인 역사학자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그를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제일 예수님을 닮았던 제자가 작은 야고보였다”
이 아름다운 제자 작은 야고보는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나중에 시리아에 가서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 의해서 시리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쳤는데도 야고보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자 그들은 톱을 가지고 작은 야고보를 켰습니다. 역사가 지나간 후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야고보를 묘사할 때 그의 인생을 상징하기 위해서 톱 그림을 그려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묻혔다가 나중에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AD. 572년에 로마로 그의 유해가 옮겨집니다. 로마에 이 사람이 묻혀 있던 그 교회를 처음에는 성 빌립과 성 야고보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 교회 이름을 “거룩한 사도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Apostle)라고 바꾸었습니다.
1. 작은 사람이 됩시다.
그것은 작은 사람이 되는 훈련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작은 것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시하셨습니까? 생각나십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씀을! 그런데, 이 세계에서 사실은 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작으면서도 제일 큰 것을 좋아하는 민족은 어느 민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구의 휴마라는 유명한 사람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이야기를 해서 현대인들은 다시 작은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것만 생각한 나머지 환상적이고 공상적인 것을 쫓아다니기 시작합니다.
2. 성실한 사람이 됩시다.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처럼 작은 것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큰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그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사람, 바로 작은 야고보의 모습입니다. 힘들다고 떠날 때, 포기하지 않고 제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주님은 그를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별로 업적이 없어도, 말하는 제주가 없어도,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는 없어도 주님의 제자의 자리에 서서 말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을 오늘도 주님은 찾고 있는 것입니다.
12제자 강해설교8
작지만 필요한 사람:유다(다대오)
마태복음 10:2-4
오늘도 함께 공부할 제자의 사진을 보십시다. 앞이마가 시원하게 벗어진 것이 누구를 닮은 것 같습니다. 누구일까요? 지금까지 한번도 알아 맞추시는 분이 없었는데 오늘도 아마 알아맞히기가 힘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을 빨리 알려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분은 유다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아닙니다. 12 제자 중에 같은 이름이 셋이나 됩니다. 시몬, 야고보, 그리고 오늘의 유다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배신자 유다와 조심스럽게 구별하느라고 "가롯 유다가 아닌 유다가.."(요 14:22)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kjv 영어번역에 보면 마10:3절에서 다대오를 레비어스(lebbaeu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냥 “다대오"(막 3:18)라는 이름만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그대로 유다라고 했습니다.(눅 6:16/행 1:13) 결국 “다대오, 레비어스, 유다”라는 세 가지 이름이 동일인임을 알게 됩니다. 초대 교부 가운데 제롬(Jerom)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는 다대오라는 제자에 관해서 "세 이름을 가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에 열 두 제자의 명단이 언급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 사람이 등장한 예는 꼭 한 번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별명을 붙이면서 "성경에 꼭 한 번만 나타난 제자"라는 표현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나타난 것을 보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작은 야고보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이제 다대오의 성품과 그의 인격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는 선교적 관심이 남달랐던 제자였습니다.
다대오 유다에 대한 기록이 한 번 나오는 곳이 바로 요한복음 14:22-23입니다. 함께 읽으십시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가룟인이 아닌 유다가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나타내 주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왜 안 나타내시려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질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야라는 사실을 제자들인 우리에게는 말씀해 주시고, 증거도 보여 주시고, 확신시켜 주셨으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 자신을 왜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일종의 선교적 관심을 지닌 질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교훈과 진리를 자기만 독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선교적 차원으로서 포용력이 넓은 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내가 받는 은혜, 내가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가슴에 뜨겁게 타오를 때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다대오 유다의 마음에는 주님과 같이 다니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한 제자였던 유다는 이 귀한 말씀, 너무나 좋은 주님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을 가지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기도하라고 전할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기도의 은사와 축복을 받으신 분입니다. 기도로 병을 고침 받고, 기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전화를 드리면 항상 끝에 가서는 “기도 열심히 해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십니다. 목사에게 기도하라고 훈계하시는 분이 저의 어머님이십니다. 기도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누구든지 만나면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은 사람은 꼭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그것을 많이 사람이 경험하고 그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다대오 유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이 많았던 제자입니다.
원래 본명이 유다였던 이 제자가 왜 다대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요? 아마 이 다대오라는 이름은 다른 제자들이 붙여준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구별 짓기 위하여 붙여준 별명입니다. 그런데 그 별명이 이 유다의 성품이나 인물됨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의 별명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별명이라는 것은 내 습관이나 취미, 그리고 사람됨이나 특성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별명에 담겨진 것은 다대오라는 말의 뜻은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별명인 레비어스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의 명사[렛]에서 나온 것으로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슴은 어떤 깊은 마음이나, 심성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주며 그리고 깊이 있고 조용한 자신의 어떤 가슴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던 이미지를 가진 제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줍니다.
성경외의 다른 자료 문서을 통해서 간접적인 제자들의 모습을 알 수가 있는데 다대오 유다는 모든 제자들의 사랑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던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하던 제자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인물 연구를 하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요한이 “적극적인 사랑의 사도”라면, 이 유다는 “조용한 사랑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유다는 떠들썩하지 않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면서 제자들을 화목하게 만들었고, 불평과 원망대신에 자기의 할 일을 꼬박꼬박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호칭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의사인 누가]를 부를 때 그 이름 앞에 애칭을 붙여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불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를 부를 때에 제자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고 “다대오 유다, 즉 사랑받고 있었던 유다”로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유다, 사랑하는 유다여"라고 문서들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앞에 나와서 설친 사실도 없고, 여전히 조용하게 자기분수를 지키면서, 그러나 자기의 몫을 다하고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이름이 없었지만 고요하고 우리 모두에게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참 좋은 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리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다대오 유다는 찬양을 하는 제자였습니다.
초대의 어떤 교부가 기록한 책 가운데서 아주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만큼 신빙성 있는 그런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단서로 채택될 수는 있는 그 문서에 보면 단편적으로 열 두 제자의 인물 비교를 하는 장면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룟 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제자이다. 또 가룟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사람은 찬양하고 있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 위하여 값 비싼 옥합을 깨드렸을 때에 그 기름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유다 다대오는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제자들이 떠들썩하면서 소리 지르고 흥분할 때도 유다 다대오는 말없이 고요하게 한 구석에 있었던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분쟁을 일으키고 아우성을 칠 때도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었을 때 조용히 한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제자가 바로 다대오라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양"입니다. 그 이름의 뜻에 맞게 항상 찬양을 하면서 기쁨과 감사, 그리고 충만한 사랑의 가슴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은혜를 끼치는 조용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이름값을 하지 못했으나, 다대오 유다는 정말 이름값을 했던 제자입니다. 다대오에게는 특기가 없습니다. 어떤 굉장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을 인도할 만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도 아닙니다. 또 다른 제자를 전도하는 일 가운데 앞장을 섰던 제자도 아닙니다. 많은 제자들에게서 주의를 끌만한 두드러진 인물이나 개성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열 두 제자 중에 한제자로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은 인격의 질적인 특성 때문에 유다 다대오라는 제자가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필요하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대오의 삶을 보면 항상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듣고서 나같이 은혜를 받고 항상 감사와 찬양으로 살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제자들과 달리 남을 세워주고 인정해주는 복된 제자였습니다. 남의 단점을 보지 않고 오히려 장점을 보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제자였습니다. 아마 다대오 유다는 leader의 역할보다 follower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우리 문화를 가리켜서 "졸병이 없는 문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에게 "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보면 거의 전부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대답합니다. 다 대통령이 되면 졸병은 누가 합니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행복한 졸병이 필요합니다. 리더는 되겠다고 하는데 따르는 자가 되기를 싫어합니다. 제자들은 따르는 자입니다. 스승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서 그를 배우는 것이 제자입니다. 다대오 유다 같은 사람은 가장 따르는 자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미국 교회에 보면 어떤 사람은 평생 부목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직분으로 평생을 늙어 가면서도 그냥 기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부목사들은 그 직분을 원목이 되기 전의 실습과정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머리 역할을 하려고만 하면 누가 손의 일을 하며, 누가 발의 역할을 하고 누가 심장의 역할을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모든 직분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머리는 하나만 있으면 족합니다. 저는 이 문화 비평가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국 교인들에게 필요한말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더 많은 베드로보다도 더 많은 유다다대오일지도 모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를 섬기는 더 많은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 일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표면에서 일할 사람은 하고, 숨어서 일할 사람은 숨어서 일해야 하며 저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주의 이름만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나라만 확장될 수 있다면 그냥 기쁘고 그리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도를 구하는 우리에게 유다 다대오와 같은 아름다운 주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도록 기도하십시다.
다대오 유다는 시리아로, 아라비아로, 페르시아로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중심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그 도시에서 그는 정말 놀랍고 눈부실만한 선교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돌로매라는 제자와 둘이서 동역하면서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 될 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해외 선교를 나갔다가, 시리아라는 곳에서 칼을 맞아 마지막 순교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의 모든 것을 다 흉내를 내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테니스를 배울 때 가르치는 선생의 자세를 흉내 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자세가 나의 자세가 될 수 있을 때 실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세에서 응용할 수 있는 실력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흉내내십시오. 주님의 인격을 흉내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주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성경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주님을 본받는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신 이유도 열심히 흉내를 내라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자기 주장을 버리고 주님의 사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가며 흉내를 내다보면 어느 날 나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운명이 변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2제자강해설교9
스승을 배신한 제자:가롯 유다
마태복음 27:3-10
오늘도 제자의 사진을 보면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특이한 제자를 공부하려고 하는데 너무나 유명하기에 한번 알아 맞춰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한 얘기를 통하여 힌트를 드리려고 합니다. 엘 그레코(El Greco)라는 화가는 교회로부터 사도 개개인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에 대해서는 비열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기에 따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배신 직전의 순간을 묘사하는 「겟세마네의 그리스도」라는 그림에서 오른쪽 구석에 간신히 보일만큼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그 그림을 본 기억이 없는데 볼 수 있다면 이 사람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누구일까요? 예 맞았습니다. 그는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원래 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던 지파가 바로 유다지파입니다. 메시야가 바로 이 유다지파의 후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유다라는 이름을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제자 중에 이 유다라는 이름이 둘이나 있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중에도 유다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유다서는 사도 유다가 쓴 성경이 아니라 주님의 친 동생인 유다가 기록한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얘기를 합니다. 주님의 친 동생 중에도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 이후에 이 이름은 저주받은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유다라는 이름을 짓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오늘날 이 유다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보면 참으로 두려움이 있습니다.
1) 웹스터 新 學生辭典//“배신자, 특히 우정을 가장하여 배신하는 사람”
2) 유다색깔//붉은 머리카락. 유다나무//유다가 목매여 자살한 나무
3) 유다염소//도살장으로 가는 가축을 앞에서 인도하는 동물
4) 유다의 키스//비열하게 남의 등을 찌르는 가면을 쓴 친절한 행위
5) 유다사제//예수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세속적인 이단자
6) 유다 구멍//감방 안에서는 볼 수 없고 밖에서만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지난번 유다 다대오를 공부할 때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찬양”이라는 뜻을 지닌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름값을 하지 못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출신은 헤브론 남쪽 조그만 성읍 유다 이쉬 케리옷(Judas Ish Kerio-th) 출신으로 갈릴리 출신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제자가 되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가 유다 갈릴리 출신인데 이 유다만큼은 남쪽 지방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그가 지방색으로 인하여 왕따를 당했을 것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혼자 소외당해서 시기와 질투로 주님을 배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주님이 택하셨을 때에는 배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암살할 의도를 가지고 기회만 노리는 흉악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주님은 12제자를 택하시기 전날 밤, 철야기도를 하시고 신중히 사도들을 선택하셨습니다.(눈 6:12-12) 유다는 높은 이상을 가졌으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적임자였습니다.
그도 다른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밤하늘 아래서 함께 앉아 떡을 떼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산상수훈을 들었으며, 소경이 다시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폭풍을 잠재우며 귀신을 쫓고 성전에서 강도들을 몰아내고 어린 아이를 안고 축복해 줄 때 유다는 예수님의 앞에 있었습니다. 유다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도하러 다니기도 했으며 귀신을 내쫓기도 하였습니다.(눅 10:17-20) 유다를 열 두 제자의 회계로 택한 것은 동료들이 그를 상당히 신임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요 12:6). 마태가 세리였기 때문에 돈을 다루는 데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다의 재정적인 전문지식도 다른 사도들보다 돋보였던 것입니다. 동료들 전원의 동의를 받아서 그는 돈을 가방에 챙기고 지불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로 출발할 때에 그는 신중하고 정직했으며 유능하고 실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다는 타락했습니다.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참으로 비참하게 자살로 끝을 맺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유다가 자신이 저지른 무서운 죄에 대한 책임을 알았다면 그는 왜 그렇게 악하게 타락했을까? 유다를 타락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1)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사악한 행동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몇 단계를 거쳤습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유다는 자신이 배신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다는 세속의 왕국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메시야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고 통치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유다는 새로운 왕국에서 영광과 권세를 누릴 생각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왼편 뺨도 갖다 대라는 교훈과 내일을 염려하지 말하는 충고, 이 땅에서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충고와 적을 사랑하라는 충고 등은 유다의 생리와는 상반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후 예수께서는 가까운 제자가 아니면 모두 자기로부터 떠나가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 6:68)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답하였다. 이 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직접 경고를 하셨다. 요한은 이에 덧붙여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킴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0-71)고 썼다.
2) 유다의 탐욕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바르는 것을 본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주지 않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유다에 대하여 지적하였습니다. 탐욕은 죄로 인도하기 때문에 십계명의“탐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의 탐욕은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고 성경의 말씀대로 유다는 돈의 노예가 되어 사망을 낳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3)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탐욕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육체적 본능에서 욕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우리 환경이 그 욕심을 채우게 될 때 욕심은 행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의 과정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먼저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생각을 집어 넣습니다.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갖고 있는 생각들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생각들을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우리가 점검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주님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이 떡을 떼어 주면서 “이 떡을 받은 자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말을 하는 순간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단의 종이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팔아버릴까라는 정도로 사단은 생각만 집어 넣었었는데 이제 유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도록 하기 위하여 생각만이 아니라 아예 사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어라고 말을 하셨습니까? (요6: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아예 마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가만히 방관만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에게 여러번 경고를 했고 또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첫번째 경고를 하셨습니다. (요13:10)“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유다의 발을 잡고 씻으시는 예수님의 눈이 유다의 발에서부터 굳어진 얼굴로 더듬어 올라가며 이 말씀을 했을 때 유다의 양심은 두근거리며 아픔과 가책을 느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 말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엎드려 회개하여 자신의 마음에 갖고 있는 생각을 빨리 몰아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경고는 유월절 최후의 식사 때였습니다. 사복음서는 제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팔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폭탄이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충격을 받아 깜짝 놀라 조용해진 제자들은 제각기 “주여, 내니이까?”라고 여쭈어 봅니다. 다른 제자들의 무서운 반사적인 행동 때문에 유다가 스스로 자신의 흉악한 죄를 깨닫기를 예수께서는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위선자답게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 26:25). 이러한 대화의 내용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유다는 위선과 거짓, 가식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양심 불감증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런 깨달음이나 회개가 없었습니다.
세번째 경고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였습니다. (눅22: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이 때 주님은 유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다정하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들어간 그의 마음을 전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 마지막 호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유다의 종말은 어떻게 끝이 났습니까? 후회와 회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유다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사도로서의 사명도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유다도 베드로처럼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유다는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나 회개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된 유다는 그 밤을 캄캄한 곳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이튿날 아침 예수께 선고가 내려진 사실을 알고 유다의 마음은 슬펐습니다. 은전 30냥이 그의 손에서 화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다가 발걸음을 재촉하여 회당으로 돌아와 안으로 들어가서 비탄에 잠겨 가지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과 교제하고 가르침을 받아 감동했던 죄인 유다는 죄책감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큰 나무가 서 있는 근처의 벼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너머로 밧줄을 던져 단단하게 잡아매고 밧줄의 한 쪽 끝은 목에 감아 매듭을 지은 후 낭떠러지로 껑충 뛰었습니다. 다락방에서 베드로가 말한 유다의 죽음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행 1:18)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 중 유일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지 않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던져버린 돈은 나그네들의 묘지를 샀는데 그 밭 이름을 피밭이라고 하였습니다. 아겔다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밭이 되었습니다.(행1:19)
12제자 강해설교10
언제나 앞장섰던 제자:베드로
요한 21:15-18
오늘도 한 제자의 사진을 보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누구일까요? 오늘도 혹시 알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본문을 통해서 짐작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리의 사나이, 열정의 사나이, 앞장서는 사나이, 천방지축 사나이 등으로 불리는 시몬 베드로입니다. 시몬 베드로에 대해서는 많은 사건들과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 대해서는 자주 설교를 듣기도 하고 또 공부도 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한번 그의 이력서를 작성하든지 아니면 그에 대해서 추천서를 한번 써 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다른 분에게 베드로를 소개하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그에 대해서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 같이 소개해볼까요? 우선 그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그의 고향은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팔레스틴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서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자라셨고 또 제자들도 이 갈릴리 출신이 11명이나 되는 것을 보면 갈릴리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갈릴리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지방이었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로 인하여 신약에서는 자주 거론되는 이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초창기 복음의 싹이 자라난 곳에 갈릴리입니다.
그 갈릴리가 지도상으로 어디에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ppt지도참고) 이 땅이 축복을 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되면 여러분의 고향이 축복을 받습니다. 땅과 지형이 좋아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축복을 받으면 우리 고향이 이름이 나게 됩니다. 봉화마을을 보십시오. 경남 김해의 시골이 갑자기 명소가 되었습니다. 관광지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그 곳이 시골이요 또 무시당하는 곳이었지만 예수님이 자라나시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택하셔서 훈련시키고 또 복음을 처음으로 전파한 곳이 되기 때문에 아주 의미있는 마을, 축복의 마을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가족관계와 직업, 그리고 학력을 말씀해 보십시오.
베드로의 부친은 요한(혹은 요나, 요 21:15)이었고, 그의 형제 야고보, 요한도 역시 어부였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대로부터 가업으로써 종사한 모양입니다. 그는 주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습니다. 후세의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바나바의 형제 아리스도브로스의 딸로서 일남 일녀가 있었다고 하나, 근거가 희박합니다. 다만 그가 결혼했으며, 장모도 생존하고, 형제 안드레도 같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막 1:29,31) 그리고 학력은 첫 서론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회당에서 공부한 정도의 교육수준을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설교할 때에 사람들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행4:13)라는 얘기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매우 급하고 저돌적인 성격입니다. 다혈질과 우울질이 섞여 있는 성격입니다. 충동적이고 성급하고 경솔하고 무모하며,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명랑하며 반응이 대단히 빠른 사람입니다. 항상 질문을 잘하여 12제자의 대변인이기도 했습니다. 심사숙고하는 요한이 무덤 밖에서 서성일 때 베드로는 곧장 들어갔던 것을 보면 매우 행동파인 사람입니다.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베드로도 당장 주님처럼 물위로 걸었던 유일한 제자이기도 합니다. 용기와 비겁, 강함과 나약함이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주님을 잡으려고 온 사람 중에 말고의 귀를 짜르는 용기가 있었지만 막상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비겁함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감정의 굴곡이 참으로 복잡하여 어떤 때는 천국으로 또 어떤 때는 지옥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순발력이 있어서 주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시원한 대답을 해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네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실 계획까지 말씀해 주시면서 천국 열쇠까지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님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님께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얘기합니다. 그때 주님이 책망을 합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호되게 야단을 맞게 됩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무엇입니까? 시몬입니다. 히브리 이름입니다. 본명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게바”(아람어) 혹은 헬라어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요한1:42)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를 반석 같은 이름을 주셨을까요? 그는 반석이 아니었습니다. up & down이 매우 심한 사람인데 왜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셨을까요? 앞으로 그렇게 되라고 한 것일까요? (요1:42)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하실 때에 “장차”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앞으로 반석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여간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제자였습니다. 언제나 앞장서는 제자, 누구도 그를 따라 올 수 없었던 제자, 일이 많이 탈도 많았던 제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사건과 기록이 참으로 많아서 어디에서부터 말씀을 나누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많은 부분 중에서 마지막 결론적인 본문을 택했습니다.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 그리고 같이 다니면서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을 다 생략했습니다. 오늘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하는 것부터 그리고 다시 베드로를 회복시키는 장면만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베드로의 주님을 부인하는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4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이때 베드로가 잽싸게 나서서 말을 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게 않겠나이다.”아마 베드로는 사실 진실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포기할지라도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겠다는 결단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말과는 상관없이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또 힘주어 말을 합니다. 정말 주님을 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맹세하며 저주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것은 완전히 주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뭐가 두려웠을까? 반석이라고 부르는 베드로가 그렇게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가 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처음부터 베드로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결단이 이렇게 약할 수 있을까? 아무리 다짐을 하고 다짐을 하지만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큰소리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의 삶이 무너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점이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함이 우리를 세상 모든 유혹과 시험에서 우리를 이기게 만드는 능력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를 좋아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의 솔직함과 진실됨에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좋은 척하지만 실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사람보다 베드로처럼 있는 그래도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더 사람들로부터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오해도 하고, 그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싫어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점점 그의 솔직담백함에 끌리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슴을 치며 울었을까요? 이것이 회개입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새우는 베드로, 거짓말에, 책임회피에, 은혜 모르고 비겁하고 배신했던 베드로는 자신을 믿고 사랑했던 주님을 배반한 비겁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요? 가룟 유다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하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의 삶이 망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므로 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진심으로 주님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을 주님은 기억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 21장에서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3년을 살았는데 자랑스럽기만 하던 그가 깊은 절망 속에서 허덕일 때 이를 해결해주실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갈릴리 고기잡이로 돌아 가버린 제자를 찾아서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호수로 다시 오셨습니다. 이 날도 이전처럼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야 주님임을 알았습니다. 실망과 슬픔, 그리고 불신앙이 주님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제 베드로에게 특별히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이 참으로 의미가 있는 질문입니다. 먼저 주님이 주신 이름, 베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이름을 부른 것은 바로 지금 베드로가 과거로 돌아가 버린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베드로가 실수할 때 주님은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 또 과거로 돌아가 버렸구나!”“옛 습관을 못 버렸구나!”라는 책망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주님이 사용하신 “사랑하느냐?”는 질문의 사랑은 “아가페”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대답할 때 사랑이라는 단어는 “필레오”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아가페적으로(무조건적인)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데 반하여 베드로는 “예, 필레오적(친구의 우정)으로 사랑합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앞장서던 베드로, 자신 있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베드로,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절대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순한 양처럼 겸손해진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이제 베드로를 다듬으신 것입니다. 제멋대로의 반석이었던 베드로를 이제 다듬어진 반석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랑거리, 우리의 재능, 우리가 갖고 있는 장점들이 무력하게 될 때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는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아직도 세상적인 힘, 세상적인 생각, 세상적인 능력을 의지할 때는 하나님은 아무런 역사도 하지 않으십니다. 온유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길들여진 힘을 말합니다. 엄청난 힘이 있는데 그 힘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힘이 있을 때 주님은 광야로 보내서 광야학교에서 훈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다듬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난 부분을 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제가 대학교, 신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할 때, 그리고 다시 Th. M 과정을 공부하기까지 얼마나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모릅니다. 가난했던 저의 가정에서는 저를 대학도 보내지 못할 정도였지만 부모님의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입학해서도 시골교회의 목회자 자녀들에게 주는 수업료혜택을 받고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조교로 있으면서 목회상담학 석사과정도 다 마치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부를 다 마치고 이제 목회를 해야 하는데 공부를 할 만큼 했으니 이제 큰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이력서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큰 교회에 이력서를 보내 면담을 하고 이제 다 됐으니 기다리면 된다고 해서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내노라 하는 교회에 이력서를 다 냈지만 하나님은 전혀 응답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초조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왜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일까? 기도하는 중에 이제 큰 교회를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은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 주에 기독공보를 보니 퇴계원에서 부목사를 구한다는 광고가 났습니다. 바로 이력서를 그곳으로 보냈는데 그 주에 연락이 왔습니다. 만나보자는 것입니다.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리자 소 똥 냄새가 나는 시골입니다. 기차길이 있는 시골이었습니다. 교회는 다 쓰러져가고 비가 새고... 버스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젊은 분이 청바지를 입고 저를 찾았습니다. 그 분이 목사님이었습니다. 당장 저를 동역자로 부르시고 첫 부목사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시절, 모든 것을 안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이룰 것처럼 생각했던 때입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인생이 바로 그것입니다.
12제자강해설교 11
첫 순교자 야고보
막10:35-45, 사도행전 12:1-2
12제자를 강해하면서 이제 몇 제자가 남지 않았습니다. 12제자를 다 마친 다음에 여러분에게 퀴즈대회를 하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각 제자들의 특징을 한번 정리하는 의미에서 퀴즈를 풀면 좋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그림을 보면서 누구일까요? 를 풀어봅시다. 지금 그림은 누구일까요? 예 오늘은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에 대하여 공부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으십시다. 먼저 마가복음의 내용을 읽고 다음에 사도행전의 내용을 읽겠습니다.
제자 중에 이름이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서로 별명을 불러주거나 아니면 어느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구별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35절에서도 “세베데의 아들 아고보와 요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 자녀들이 자랑스럽다면 자랑스러운 자녀들의 아버지 되는 것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아버지는 자기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안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잘 되는 것입니다. 내가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리 울 때 부모에게 자연스러운 효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갈릴리 지방에 세베데(zevedee)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배도 소유하고 가정에 종을 두고 살만한 부자였다.(막1:19-20) 그에게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두 아들, John과 James가 있었습니다. 그는 두 아들이 다른 가정처럼 자신의 가업을 이어 가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던 어느 날, 베드로, 안드레 형제와 함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정도로 적게 기록 되어 있으나(막 5:37, 14:3) 그는 훌륭했기에 그는 훌륭했으므로 3대 제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첫째로 우뢰의 아들이었습니다.
요한이 동생인지 야고보가 동생인지 성경은 정확하게 구별하고 있지 않습니다. 보통 야고보를 형이라 생각하고 요한을 동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두 형제는 너무나 폭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주님께서 “우뢰의 아들”(The sons of Thunder, Boaneqe)이라는 뜻을 가진 “보아너게”라고 별명을 지어 주셨습니다.“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3:17) 왜 이러한 별명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폭풍우 같은 기질을 가졌으며, 태풍과 같은 정열이 있었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잠하다가도 노여움을 화산처럼 폭발시키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사마리아 지역을 여행하셨습니다. 일행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쉴 곳을 간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였습니다. 시장하고 피로에 겹친 제자들은 불친절한 접대에 화가 머리까지 나서 화가 났습니다.“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나이까?”여쭈었습니다.(눅9:54) 소돔성을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켰던 것처럼 그렇게 화풀이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과격한 말을 한 제자가 바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랑의 사도라고 부른 요한이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온 제자들입니다. 요한은 그 후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아직 요한은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나중에 자세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야고보도 위대한 사도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행1:8)“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증인이 되라 하셨을 때,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8:25) 실수한 일을 지적하여 주신 주님의 교훈을 곧 바로 실천하는 사도였습니다. 옛날 자기를 거절했던 사마리아 촌에까지 순회 설교를 했습니다. 하늘로 부터 멸망의 불이 내리는 대신 성령의 불꽃이 강림하여 이들의 가슴에 내리도록 한 제자가 바로 야고보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과 모든 삶을 따라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제자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가장 믿고 신뢰했던 제자라고 한다면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가장 앞서는 제자, 무엇이든지 맡기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일을 이루어내는 제자가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장 사랑했던 제자는 요한입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 이 제자가 바로 요한을 가리킵니다. 가장 주님을 잘 배우는 제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변화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뢰의 아들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으니, 그리고 사마리아를 불로 심판하기를 원하다가 이제는 그곳으로 가서 복음의 불을 피웠던 야고보 형제를 주님은 참으로 사랑했기에 항상 주님 가까이 있었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3인방이 바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습니다. 이들은 변화산상에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을 모셨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가장 주님을 따랐던 수제자들이었습니다.
둘째로 야망이 있었던 제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37절을 보시면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부탁을 합니다. 아마 형제의 의가 참으로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함께 주님에게 와서 서로 부탁을 하는 모습을 보면 형제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앞으로 정치적인 정권을 잡게 될 때 자기들을 주님다음의 2인자들이 되도록 미리 부탁을 하는 모습입니다.
야고보는 부자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많은 유산을 팽개친 채 예수를 따랐을 것입니다. 내일 아침걱정 안하는 사람이 없이 굶주리는 사람 많던 그 당시에 이 거대한 상속을 포기하고 따른 데에는 그들이 야망이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제자들은 남출신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내버릴 것이 별로 없어서 어려움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특히 야고보는 모든 제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장자이기에 그의 결단은 굉장한 신앙이거나 아니면 야망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보다 더 나은 야망을 위하여 자기에게 돌아 올 몫을 포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야망은 그 집안에 있는 모두의 야망이었다고 봅니다. 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청탁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마20:20-21)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두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그 집안에 흐르는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집에서 구하는 것은 바로 힘입니다. 권력의 힘을 이제는 갖고 싶은 것입니다. 돈을 가지면 권력을 가지고 싶고 권력을 가지면 돈을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돈과 권력은 함께 따라 다닙니다. 돈있는 자에게 권력자들이 달라붙고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돈있는 사람들이 붙어서 더욱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더욱 사회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에게 하시는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주님은 저들의 부탁에 답을 하십니다. 이 잔은 무엇입니까? 바로 순교의 잔입니다.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라고 하였습니다. 이 피에 동참할 수 있는 자가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신학교마다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일 년에 만 명 이상이 목사 안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서 사역을 하게 될까요?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목회자가 영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부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의 삶이 세상적 영광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목회자의 배우자를 택하는 순위에 이발사 다음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자가 붙은 직업순위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의사, 변호사, 박사 등입니다. 십자가를 생각 안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잔을 마시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채우려고 하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특히 이민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가운데 하나가 우리 직분자들이 사회에서 채우지 못하는 세상적 야망을 교회에서 채워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인정을 받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캐나다 사회에 적극 개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야망의 발산지가 한인회, 한인들이 모이는 여러 단체들에서 분출하려고 합니다. 한인단체들이 서로 싸우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야고보는 위대한 첫 순교자입니다.
12제자 중 성경에 그의 죽음이 기록된 사람은 예수님을 팔고 양심에 가책으로 자살한 가룟 유다와 순교자 야고보 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제자들은 다 전설로만 알려진 순교입니다. 성경에 정확하게 순교했다는 기록된 것은 야고보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만치 그의 순교는 당시에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순교는 큰 용기 없이는 못하는 죽음이기에 확고한 신앙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간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을 간 야고보는 분명히 용기 있는 사람이요, 솔선수범의 사람이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쓴 잔을 가장 처음으로 마셨던 제자가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우리는 헤롯이 왜 제일 먼저 야고보를 체포하였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은 열성과 야망이 있는 야고보가 뛰어난 지도자이기 때문에 힘찬 소리로 외치는 야고보의 입을 막고자 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할 때 베들레헴 주변에서 태어난 어린 생명을 다 죽인 폭군 대 헤롯의 손자입니다. 헤롯이 야고보를 가장 먼저 죽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체험한 후, 야고보는 Spain에 가서 전도하였습니다(12제자전) ‘땅 끝까지 이르러 내증인 되라(행 1:8)’는 예수님의 유언을 실천키 위해 당시에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Spain까지 배를 타고 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곳에 많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Spain에 있는 유대인 거류민과 유대인 노예들에게 복음전도와 위문을 목적으로 갔을 것입니다. 유대인 노예들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갔거나, 헤롯에 속아서 팔려간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야고보가 다 알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자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하여 야고보를 죽였다고 합니다.
① 유대인 노예들을 선동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씌웠습니다.
②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는 기독교운동을 독립운동으로 두려워했고
③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저지른 인기 장난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가 체포되었을 때, 그를 고소했던 자가 그의 용기와 자제력에 깊은 감동을 받아 세례받기를 원하였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야고보와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Herod Aqippa Ⅰ라고 기록된 사람에 의해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그의 유골은 지금의 Spain 콤로스 텔라라는 성전에 묻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순교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도 순교적 신앙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모두가 순교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면 희생할 수가 있습니다. 희생은 사랑의 척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위해 희생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12제자 강해설교12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
요한 1:35-42, 막1:19-20
지난주에는 “누구일까요?”를 하지 못했습니다. ppt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제 남은 두 제자 가운데 “누구일까요?”를 하도록 하십시다. 누구일까요?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 주님을 사랑했던 제자입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예 말씀하신대로 그는 요한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가장 흔한 이름일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들이 있다면 아마 peter, john, andrew, james 등일 것입니다. 누구나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사랑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이름을 우리의 후손들이 자기 자녀의 이름으로 짓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한번은 인터넷에서 제 이름을 집어넣고 사람 찾기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같은 이름이 많은지요? 성이 다른 사람까지 세면 더 많을 것입니다. 스님도 있고, 대학교수도 있고 영사도 있고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이름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름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나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름 지어주는 직업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하는데 그러한 곳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 쉽게 사람을 성공시키려고 하는 데서 오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5) 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았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습니다.(마 10:2) 그래도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친구인 안드레와 함께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세례 요한이 자기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난 후 요한은 고기잡이하러 돌아왔으나 나중에 두 번째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나를 따라오너라.”는 부르심에 응답을 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들이며 형제, 그리고 친구들이었던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큰마음을 먹고 아버지와 배와 고기와 직업을 버린 것이 요한의 제자로서의 출발입니다.
제자들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에 별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냥 “주님께서 부르시니 예, 하고 따랐나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넘어가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제자가 된다는 것이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고민, 갈등, 그리고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이렇게 쉽게 주님을 따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자신들의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할 때 무엇인가 다른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2) 보다 더 나은 희망과 비젼이 보일 때 그것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3) 무엇인가 큰 사명과 인생의 목적이 있을 때 그것을 쫓게 될 것입니다.
4) 무엇인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매력과 힘이 있어서 주님을 쫓았을 것입니다.
5)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더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어떠한 이유가 되든지 간에 주님을 따른 제자들은 그 결단이 결코 헛되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나의 인생을 투자할 만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떤 것을 포기해도 이보다 귀한 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떤 직업과 사업보다도 이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없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된 이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라고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그의 형 야고보를 공부할 때 이미 많은 부분을 공부했기 때문에 반복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다(막 3:17)고 했습니다. 이 형제들의 활화산 같은 성품은 주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했을 때 잘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또 이 형제는 앞으로 올 왕국에서 높은 자리 둘을 주십사고 예수께 간청하는 절제 없는 야망을 갖기도 했습니다. 주 예수는 이들의 불같은 열망과 경건하지 못한 욕심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삼 년간 훈련시켜 폭풍 같은 성격을 잠재웠으며 우뢰를 조용하게 변화시켰습니다.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또 오늘 새롭게 공부할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도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막 9:38-40, 눅 9:49-50 에 보면 요한이 아주 편협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던 중에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 위를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낮선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다가 조용해지더니 고쳐졌습니다. 요한이 이 낯선 사람에게 큰 소리로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도 없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일도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얘기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를 했습니다(막 9:38).
그런데 예수께서는“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한자니라”(눅 9:50)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병 고치는 이 사람은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 전문적으로 귀신을 쫓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행 19:13-14). 이 사람은 어디에서인가 예수의 말씀에 감동을 받은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곤고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도들과 동등한 영적 은사를 사용하여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대한 그의 야망이 시기와 질투로 연결되어 이러한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사도로서의 자부심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요한은 주 예수의 이름을 의탁하여 주 예수의 일을 행하는 데 제자 아닌 사람을 제외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목회자들에게 주는 귀한 교훈입니다. 모든 것을 목회자가 다 해야한다는 생각을 깨드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은사를 가진 귀한 평신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목회자보다 더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훌륭한 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권위를 강조하려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사이를 계급으로 구분해버린 중세시대의 로마 캐톨릭의 피해가 아직도 우리 교회 안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개혁을 했어도 그 사상은 아직도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말씀 안에서, 교회의 질서 안에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마음껏 사용하며 봉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평신도 목회, 그리고 팀목회와 연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요한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부끄러운 면들이 많았지만 요한은 주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오백여 형제가 있었으며(고전 15:6), 그 중에 모인 무리의 수는 일백 이십 명이고(행 1:15), 그 중에 예수께서는 칠십 인을 따로 제자로 세웠습니다.(눅 10:1). 이들 가운데 열 두 사도가 있으며 사도 가운데 핵심이 되는 세 사람이 있으며 이 중에서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주 불리게 되었습니다.(요 13:23, 20:2,
21:7) 요한은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다”는 이름의 뜻 그대로 주님의 사랑받는 일생을 살았습니다. 분명히 요한은 제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세 제자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다락방에서는 그리스도의 품에 앉기기도 했습니다(요 13:23). 초대교회의 문헌을 보면 요한을 예수님의 가슴에 기댄, 사랑을 의미하는 “에피스테티오스”(The Episte -thios)라고 자주 부르고 있습니다.
어느 정원사가 정원의 흙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느냐?”고 물었더니 진흙은 “사람들이 나를 장미꽃 옆에 두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성급한 청년 요한은 성인이 되어 온유한 성격으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요한의 야망은 줄어들었습니다. 편협한 외골수적 성격도 사라졌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격렬한 성격의 청년에서 마음 착한 성인이 된 것입니다. 요한의 성품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격려를 해줍니다.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불평하기 좋아하는 청년이라 해서 반드시 고집 세고 이기적이며 잘 투덜대는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성장법칙에 따라서 떫고 시퍼런 과일이 달콤하고 맛좋은 과일로 익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가 오래 되었고 또 교회 다닌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예수님의 성품을 닮지 않았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만 다녔지 사실 주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지 않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향기가 우리의 삶에 묻히도록 가까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의 인격이 나 자신에게 스며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장 가까이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사도 가운데서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가 유일하게 요한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습니다(요 19:26 -27)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마리아를 모셔온 후 자기 친 어머니처럼 섬겼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뿐이었습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그 이유와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용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예수를 처음 따를 때 가장 어린 소년이었던 요한은 열 두 사도 가운데서 제일 장수했습니다. 요한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성도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서 어떤 문제와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논한다면 “사랑의 훈련”입니다. 사랑은 줄수록 늘어납니다. 격정적이고 사나웠던 성격의 소유자 요한은 그 격정이 주님께 포로가 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주님의 성령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을 때, 그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사도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남을 사랑할 때 또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소아시아 태생으로 요한의 제자이면서 폴리갑(Polycarp)과 잘 아는 이레니우스(Irenaeus)는 말하기를 요한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에게해 복판에 있는 아름다운 섬인 밧모에 요한이 유배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계시록의 인사말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라고 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사랑했던 제자인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 1,2,3서를 쓰고 또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서속에서 신학적인 논리를 알려고 하면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고, 기독교의 윤리에 대한 것을 찾으려고 하면 야고보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사도요한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말씀해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 중에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경퀴즈 대회에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택한 이유입니다.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구스타프 도오르라는 유명한 화가가 주님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떻게 주님의 초상화를 그릴까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에 그를 사랑했던, 예수를 잘 믿는 믿음의 친구가 그에게 찾아와서 이런 유명한 충고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자네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나, 그러면 자네는 주님의 형상에 더욱 가까운 주님의 모습을 그릴 수가 있을 것이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5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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