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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8복 강해 설교 모음.hwp

by 【고동엽】 2022.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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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복 강해 설교 모음

 

 

복시리즈1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12:1-3

주 음성외에는 더 기쁨없도다(500장)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458장)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우리 민족은 복의 민족입니다. 복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민족보다 더 큽니다. 제가 어릴 때는 수(壽)자와 복(福)자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불에도 수복이라고 써놓았고, 베개에도 수복이라고 써놓았고, 옷에도 수복이라고 써놓았고, 밥그릇에도 수복이라고 써놓았고 심지어 숟가락에도 수복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어디에나 수복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수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 5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서"에는 5복을 수(壽), 부(富), 귀(貴) 강녕(康寧), 자손중다(子孫衆多), 이 다섯을 얘기합니다. 상류층이 말하는 5복입니다. 반면에 "통속편"에는 5복을 부, 수, 강녕, 고종명(考終命), 유호덕(攸好德)이라고 합니다. 고종명이란 죽을 때 조용히 고통 없이 죽는 것을 말하며, 유호덕이란 덕을 좋아하고 베푼다는 뜻입니다. 통속편의 5복은 서민들의 복입니다. 상류층과 서민층의 복의 내용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조건적이고 외부 환경적인 복들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행복의 기준을 외형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물질적으로 환경 조건이 갖춰지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물질이나 권력을 많이 소유하고, 육신의 쾌락을 통해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인 오해라는 사실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 행복은 결코 재산 순도 아니고, 지위 순도 아닙니다. 2차적 요인에 불과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물질이 행복감을 주는 게 사실이지만, 일시적이고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그렇습니다. 물질이 적을 때는 행복감의 상승효과가 크지만, 일정 범위를 넘어가면 물질 증가가 행복감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유엔에서 173개국 대상으로 국민소득, 교육수준, 평균 수명 등을 측정함으로 인간개발지수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행복지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방글라데시가 145위였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한 대학에서 시행한 다른 조사에서 주관적 행복도를 조사했더니 여기서는 방글라데시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적, 육신적 조건이 행복에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들을 보면 대개 구미의 선진국들입니다. 특히 사회보장제도 가장 잘 되어 있는 북유럽의 나라들입니다. 이해가 안 되지만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육체 속에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조건만 충족시킨다고 해서 내면의 행복감까지 충족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지은 유명한 "행복론"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가져야만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명랑한 정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밝게 볼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정서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정서가 없다면 누구도 행복할 수가 없다. 만사를 밝게, 긍정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두 번째는 건강한 몸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건강 하나만 있어도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당신이 건강을 잃어버리고 덜커덕 병원에 입원해 보세요. 이제 여러분은 딱 한마디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좋으니 건강 하나만 있다면 나는 만족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정서적 평온이 있어야 합니다. 만족을 아는 정신적 자세를 말합니다. '이만하면 행복하다. 이만하면 넉넉하다.' 는 마음입니다. 사도바울의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리고 나아가서 약간의 외부 자산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산에 대해서 이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당연히 필요한 재산, 이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꼭 필요한 재산. 두 번째는 여유 있는 재산. 그래서 남에게 베푸는 거예요. 주고 싶을 때 주고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그런 여유. 이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일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서 일하는, 이런 여유재산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불필요한 재산이 있다고 했어요. 불필요한 재산, 이 재산 때문에 근심도 많고, 걱정도 많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잃어버리고 자기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가 필요한 자산 외에 더 가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찾아오게 됩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인생을 살피면 잘 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불필요한 재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부부가 갈라지고 자녀들이 부모를 거역하고 결국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철학자의 행복론에 대하여 많은 공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를 지적하라고 한다면 그러한 행복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문제는 많이 제기하지만 그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인생에 있는 많은 고민들은 들어내지만 그 문제의 해결책은 제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론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명랑한 정서, 건강한 몸과 마음, 만족하는 자세, 그리고 남을 베풀 수 있는 자산 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선언 속에서 다 찾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문말씀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라서 우리는 소홀히 넘어가기 쉽지만 그러나 2006년도 오늘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이 말씀의 놀라운 축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본문 속에서 두 가지의 축복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2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너는 복이 되리라”(Thou shalt be a blessing)고 하였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브라질 성경에서도 Voce sera uma bencao 이라고 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이것을 “존재의 축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축복이 가장 근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축복입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저서 가운데 To Have or To Be 라고, "소유와 존재"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 원인은 바벨탑 비전에서 비롯된다." 그랬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만들 때의 일을 생각해보세요. 시날 광야로 가서 바벨탑을 높이 쌓아서 하늘까지 쌓아서 흩어짐을 면하자, 안정과 번영을 누리자, 그랬습니다. 이 교만이 오늘도 세계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죠. 소유한 만큼의 존재의 가치가 있고 그로 인하여 행복하다는 그릇된 철학과 오해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보다 존재가 더 행복함을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치를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복덩이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복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복덩이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무엇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신분은 정확하게 알기만 하면 우리는 신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복덩이는 어디가도 행복하게 삽니다.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아도 기쁨이 있습니다. 부요롭게 되어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더 할 일이 많습니다. 이민와서 살아도 행복하고 한국에 살아도 행복합니다. 왜냐면 나 자신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소유해야 복이라고 생각을 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귀하고 중요한 존재이기에,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주님은 그 귀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를 안 합니다. 신명기 8장 16절에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환난도 결국은 우리를 복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돈은 있는데 인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식은 있는데, 덕이 없습니다. 많이 공부해서 무엇을 알기는 아는데 덕이 없어서 모든 인간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불행합니다. 또 권세는 있는데, 지혜가 없습니다. 이것도 복이 못됩니다. 자식은 많은데,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자식은 많이 두었는데, 자식들이 전부 부모를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그 자식이 어떻게 복이 되겠습니까? 자식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부모라면, 그것은 인생을 확실히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은 있는데, 명예가 없습니다. 그 굴욕적이고 부끄러운 생을 더 살아서 무엇 하겠다는 것입니까? 명예가 없는 건강, 아무 소용없습니다. 절대로 장수가 복이 아닙니다. 명예가 함께 할 때만 장수가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복이 되면 우리의 인격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적 신분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우리는 존재적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축복은 사명적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3절을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유 즉 하나님의 복덩이가 된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사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의 근원이 되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대한 축복선언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은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포루투갈 성경은 por meio de voce todos os povos do mundo serao abencoados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너를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말은 복의 근원지 혹은 복의 통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수돗물의 수원지에서 맑은 물이 만들어져서 각 가정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듯이 아부라함이 복의 근원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늘의 복이 이 땅에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쌓아 두는 창고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길을 떠남으로 그는 하늘의 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복은 나만 소유하고 또 나만 누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에게 베풀고 또 남을 배려하는 곳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행20:35에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즉 I am so happy because of you!라는 말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 때문에 나는 참으로 행복합니다.”라고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복으로서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고생을 하더라고 그 고생을 기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낳습니다. 그 소망으로 인하여 고생을 하더라도 고생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존재적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되면 남을 위한 사랑도 마찬가지로 충만하게 됩니다.

 

앞으로 마태복음에 있는 8복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이 복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소유한 존재의 축복과 사명자의 축복을 가르치는 내용들입니다. 세상의 축복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복을 소유하신다면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2006년도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였던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입니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람의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즉 어떤 경력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 어떤 배경과 성장 환경을 '갖고 있는지', 자동차는 어떤 것을 타고 다니는지, 집은 몇 평에서 사는지, 이렇게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삶을 말합니다. 현대인들 가운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또 하나는 ‘존재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즉 존재의 의미를 둔다는 말은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애쓰지 않고 존재 자체를 즐거워하고 자기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소유에 집착한 사람’은 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요, ‘존재에 집착한 사람’은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남을 위한 축복의 근원으로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복입니다.

 

 

 

 

 

 

 

 

복시리즈2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2006-01-11

심령이 가난한 자

 

마5:1-3

 

마태복음에서 5장 6장 7장은 예수께서 특별히 산에서 말씀하셨다하여 산상보훈 또는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견해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이 산상수훈을 가리며 “복음 전체의 중심이다, 성경의 종합이다”라고 격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산상수훈은 기독교의 윤리와 교리, 그리고 복음 내용을 요약한 귀한 말씀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처음시작을 8복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 받기를 원하는 주님의 마음 쓰심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사용한 복이란 단어는 희랍어 마카리오스(makarios)입니다. 이 말은 4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의 존재나 속성을 가르칠 때 사용되었습니다.

(딤전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딤전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이 말씀은 인간의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서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둘째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축복의 단어인 blessing이란 말은 원래 앵글로 색슨어에서 “피의 제사”(bleeding)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피의 제사를 드릴 때 성별하여 드리는 제사에서 축복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행복은 소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셋째로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생애 속에 기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 benedicere는 영어로는 “누군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좋은 이야기를 해주다(to speak well of)”라는 뜻입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말하든지 그 상대방에 대하여 좋은 이야기를 하며 상대방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 복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대 역사가이며 문학가인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이 단어를 사막의 오아시스에 비유하였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마르지 않는 생수를 소유한 자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말씀하신 이 복의 개념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고 인격적인 복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말하고 있는 행복의 개념입니다. 외적인 기준이 아니라 내적인 기준을 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격이 변화되고 그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면 그들에게 주님은 복을 선포하십니다.

 

둘째는 이 팔복이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8복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하는 축복들입니다. 여기에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기에 오신 여러분은 모두가 주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이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의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입니다. 여기서 ‘가난’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프토코스’인데 일반적인 궁핍 상태가 아니라, 철저한 파산 상태를 의미합니다. 도저히 홀로 설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의 상태가 바로 가난한 자의 상태였습니다. 그 아들은 물질적으로도 가난했지만 마음으로도 가난한 상태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돈이 없습니다. 그 땅에 가뭄이 들어서 먹을 것조차 없었습니다. 도저히 구제받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구약에서는 이사야 42장 3절에 “너희는 상한 갈대이고 너희는 꺼져가는 등불이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기초가 어디인가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입니다. 땅 중에서 갈대가 피어나는 땅은 황무지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땅, 저주받은 땅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에게는 갈대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겠으나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지겨운 잡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다 그 갈대가 꺾여 있으니 가장 저주받은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저주받은 자리에 부패되어 있는 죄인들의 모습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로부터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아 나온 걸레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꺼져가고 있습니다. 제 심지가 거의 다 타버렸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구제불능 상태입니다. 스스로 빠져 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남의 도움이 없이는 구제받을 수가 없습니다. 탕자는 이러한 상태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아버지를 찾게 만드는 지점이 바로 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 가도록 하나님은 가끔 우리의 주변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 자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을 멀리 하십니다. 심지어 아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더라도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한 자란 한마디로 자기 의(self-righteous)에 도취된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자기 의에 만족해서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모든 것을 충족했다고 착각하는 불행한 자입니다. 영적으로 부한 자로서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리새교인들입니다. 그들은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지식도 있고 신앙도 있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얼굴을 들고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옵기는, 나는 토색도 아니하고 불의한 일을 한 적도 없고 간음도 하지 않았으며 일년에 두 번씩 기도를 하며 십일조 바쳤습니다. 그리고 저 세리들과 같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라고 구할 것이 없는 거만한 기도를 했습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가난한 세리들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들은 성전에 들어 왔지만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오!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등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윤리적 기준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러나 우리는 도저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라고 했으니 그러한 기준을 우리가 지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힘이 없으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기준을 지킬 수 없지만 그래도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처럼 하는 위선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하나님과의 타협점을 정해놓고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주일날 예배 봐주기, 십일조 바쳐주기 등입니다. “하나님 제가 예배는 봐 드리겠습니다. 십일조는 바치겠습니다. 그 대신 제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지 마십시오. 저를 하나님의 아들을 삼는다든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준다든가 하는 것으로 저를 골치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냥 죽으면 천국이나 보내주시고 그걸로 때워 주십시오. 그 대신 제가 이 정도는 해드리겠습니다”이렇게 타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성도들의 깊은 절망감에서 나오는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들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라며 탄식을 하였습니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은 한 마디로 파산된 신앙입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그 마음이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은 가난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은 세 가지의 마음 자세를 갖게 합니다. 첫째는 절망감입니다. 완전한 패배감입니다. 뼈를 깍는 고통이 수반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실패만 하는 인생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도 없습니다. 캘빈은 이것을 절대타락, 구제불능 등의 말로 표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죄가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매 순간 느끼면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절망감에 빠져있을 때 곧 그 때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의 육신적 조건들이 자기 존재일 줄 압니다. 아닙니다. 세상의 조건들은 악세사리처럼 떼었다 붙였다 하는 겁니다.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은 벌거벗고 왔다가 벌거벗고 갑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이 자기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은 한낱 죄인이요 멸망할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 가난한 심령입니다.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와 같은 모습입니다.(눅18:13~14)

 

마지막으로 ‘갈망’입니다. 거지와 같이 갈망하는 겁니다. 누가 어떤 거지에게 1천원 지폐를 주니까 화를 내더랍니다. 자기가 거지냐고 ... 맞습니다. 그는 아직 철저한 거지가 아닙니다. 동전 한 닢을 줘도 매달리며 감지덕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거지입니다. 철저한 거지의 마음이 바로 가난한 심령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를 시42:1에서는 물을 마시려 갈급해 하는 사슴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언제 심령이 가난하게 됩니까? 우리는 오직 절대자 하나님,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밤새 고기 한 마리 못 잡았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갔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고기가 많이 잡혀서 즐거워해야 할텐데 이상합니다. 그는 엎드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제 모습입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발견할 때 비로소 그는 가난한 심령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그는 평소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체험하고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사6:5) 라고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민자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 적응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심령이 가난한가 아니면 심령이 부요한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디에서나 잘 적응하는 자입니다. 더 이상 낮아질 자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자아가 깨어진 자입니다. 다 박살이 나서 이제 더 이상 깨어질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얄팍한 자존심마저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바닥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기장 낮은 곳에 임하셨던 주님이 바로 가장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사신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버림받은 상태에서 울부짖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면 마찬가지입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릴 때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인인 나, 하나님이 없으면 영 죽을 나, ... 그럴 때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 :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행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우리가 장차 들어갈 천국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그 전에 현재 이 세상에 임해 있는 천국을 가리킵니다. 미래의 천국은 물론 특정한 장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통치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은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17:20~21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 질 때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예수님이 임하셔서 왕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 심령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가운데 하나님에게 속한 신령한 복이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십자가 대속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영혼의 기쁨과 감격, 사랑과 평안, ... 죄와 고통, 갈등과 슬픔, 걱정과 근심, ...세상에 속한 것들이 다 사라집니다. 마치 어둠 가운데 빛이 다가오면 어둠은 물러갈 수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빛의 권세입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 누릴 것과 동일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천국을 시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변의 환경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행복입니다. 천상의 행복!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쁨으로 고백하며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 행복을 맛보셨습니까? 이미 맛 보셨으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혹시 그 맛을 보지 못했다면 먼저 가난한 심령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엄청난 행복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물밀듯 밀려올 것입니다. 그래서 부디 이 천상의 행복으로 세상의 온갖 근심과 고난 다 이기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장차 들어갈 천국의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시리즈3 애통하는 자의 복

 

2006-01-18

애통하는 자의 복

 

마5:4

 

성경에는 역설적인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패러독스’라고 하는 역설의 말씀들이 있는데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궤변 같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오묘한 진리가 듬뿍 담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어라,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라,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남을 먼저 대접하라” 같은 것들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나 계속 되는 8복들이 모두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개념과는 반대되는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대되는 개념들이 오히려 복이라는 것은 곧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면 복이 될 수 없는 영적인 것임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8복의 시작은 심령이 가난할 때 가능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면 그 다음 복들이 따라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을 잘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가난해질 때 이제 다음에 오는 복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 8복은 하나 하나 떨어져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목걸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이루는 귀한 복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해 지셨습니까? 나의 존재가 완전히 깨어지셨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십니까? 이제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에 낙심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목마른 사슴처럼 주님을 찾게 되는 그런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오늘은 그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복입니다. 바로 애통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눈물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약 9가지 정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한 애통이란 말은 헬라어로 ‘펜테오’(πενθεω)인데, 본래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애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 중에서 가장 강한 뉘앙스를 가지는 말입니다. 마치 심장을 꿰뚫는 듯, 뼈를 깎는 듯, 살을 에는 듯 아프고 슬픈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말로는 아마 ‘단장’이란 말이 가장 근접한 의미를 가지지 않나 생각됩니다. 단장(斷腸)이란 말이 생긴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진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러 가다가 한 지역을 지나가는데, 한 병사가 아기원숭이를 한 마리 잡아옵니다. 그러자 어미 원숭이가 슬피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옵니다. 마침내 배에 올라타자마자 그만 죽고 맙니다. 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까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기원숭이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슬픔을 가리켜 ‘단장의 슬픔’이라 부릅니다.

 

애통이란 말은 이처럼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강한 것인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의 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늙은 야곱이 통곡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열두 아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하루아침에 행방불명이 되어버렸습니다. 도무지 소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게 되자 이 늙은 아버지 야곱은 옷을 갈기갈기 찢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두르고, 땅을 치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날마다 통곡했습니다. 이렇게 통곡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사용하신 애통이라는 단어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애통이 복이 된다니 일반 상식으로 봐서도 이것은 뭔가 잘못된 진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는 것이 복이다”라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반대되는 개념을 가지고 아주 확실한 진리를 강하게 표현할 때 이 역설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약4:9 봐도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는 말씀도 참으로 이상하게 들립니다. 웃으면 복이 들어오지만 반면에 자꾸 울고 짜면 복이 나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을 잘 묵상하면 그 안에 풍성한 영적 진리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진리를 발견할 때 진정 복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귀한 진리를 발견하시고 주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애통은 과연 어떤 애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나의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애통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애통함이 무엇인지를 같이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죄에 대한 애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지은 자가 그 죄로 인하여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참회시를 봐도 그의 애통함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는 그가 밧세바를 범하고 죄악을 은폐하고자 남편 우리아를 살해한 후에 회개하고 쓴 겁니다. 그가 잘 했다는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으로 볼 때 절대 군주인 그가 그 정도의 일 눈 딱 감고 지나가면 감히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춰볼 줄 아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의 위대함입니다.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시51:2~3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Broken Heart)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통회하는 마음, 그것이 상한 마음, 깨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다윗왕은 고백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시 42:3)

 

베드로도 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해 보십시오. 뭐가 다릅니까? 인간성이나 잘못한 것은 둘 다 비슷합니다. 다만 가룟 유다는 죄책감으로 후회하다가 자살한 데 반해, 베드로는 애통해 하며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마27: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 일반적인 죄책감이나 후회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죄책감이나 후회는 혼자서 괴로워하고 마는 겁니다. 반면에 애통은 회개하는 것인데, 자신의 죄악이나 허물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에게 나아가 사죄의 은총을 구하게 됩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turning)을 가리킵니다. 결국 하나님께로 돌이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마른 눈으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눈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이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눈물, 애통함이 잇는 사람이 죄 사함의 은총을 체험하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함으로 보시는 게 아니라, 불의함을 애통해 하는 눈물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애통의 눈물은 하나님이 가장 아름답게 보시는 거룩한 다이아몬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다이아몬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세상을 향한 애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웃과 세상을 향해 흘러나갑니다. 애통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모습만 보고 애통해 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이웃과 세상을 보면서 동일한 애통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애통함입니다. 죄악 가운데 있는 세상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죄악 중에 있다가 멸망할까봐, 예수님 알지 못해서 참 만족과 기쁨, 평안을 맛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까 안쓰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애통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먹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애통하며 눈물을 흘린 것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세 번 눈물을 흘리셨는데 다 인간의 죄악과 그로 인한 비참한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우신 것(눅19:41)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신 것도 인간의 죄와 비참한 운명을 보신 까닭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훌륭한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시대를 바라보면서 울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도성 시온의 성벽아, 큰소리로 주께 부르짖어라.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처럼 흘려라. 쉬지 말고 울부짖어라. 네 눈에서 눈물이 그치게 하지 말아라." (레애2:18)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애통은 곧 중보기도, 복음 전도, 선교의 열정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셋째로 사명자가 가지고 있는 애통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일 때문에 많은 아픔과 고난을 당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20:19).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빌3:18). 시편 126편 5절 말씀이 불꽃처럼 다가왔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그릇 하나씩을 주면서 세상에 내려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담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천사는 "사람들이 금을 좋아하니 저는 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은 금을 좋아하지만 천국에는 온통 황금으로 되어있으니 금은 아무 쓸데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천사는 그릇에 여성의 아름다운 미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에는 모두 아름다운 사람들도 되어있으니 여성의 미도 관심이 없다" 그러자 어떤 천사가 그릇에 인간의 눈물을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통곡의 눈물,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용서의 눈물, 헌신의 눈물, 희생의 눈물 등 이런 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눈물을 보시고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눈물이 있다." 하나님은 눈물을 보시고 기뻐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눈물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만해도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애통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당시는 8.15 광복이후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이었고,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눈으로 보면서 살아야했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그렇게 가뭄도 자주 연속되었는지 모릅니다. 조금 후에 6.25가 터졌는데 그때의 상황이란 그야말로 사람 사는 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 교회에 모이는 우리 선조들은 눈만 감았다 하면 울었습니다. 자기 죄를 놓고 통곡하고, 예수 안 믿는 식구들을 위해서 통곡하고, 나라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습니다. 눈이 붓도록 울었습니다. 마루 바닥 여기저기에 눈물 자국이 너무 진하게 박혀서 걸레로 닦아도 닦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위로가 또한 굉장히 컸습니다. 울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도무지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 재미로 더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세대는 눈물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눈물이 말라버려서가 아닙니다. 눈물은 약자의 상징이라 생각하거나 아니면 눈물은 불행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없는, 그러면서 즐거움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 세대에 주님은 다시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죄악이요 행동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는 우리의 모습을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맡은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일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은 눈에 눈물이 있는 자들을 찾으셔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날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시리즈4 온유한 자의 복

 

2006-02-01

온유한 자

 

마5:1-12

 

지금까지 두 가지 복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기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간단히 첫째복과 둘째 복을 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의미함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롬: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고 하였던 고백을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집을 나갔던 탕자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하던 그 모습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둘째로 애통하는 자란 이제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달은 자의 감정의 상태입니다. 자신의 지금 처한 상태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죄를 보며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슬픔으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이 바로 이러한 애통함이었고 다윗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밤새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요를 적시며 슬퍼하던 모습(시6:6)이 바로 애통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세 번째의 복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는 복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37:11의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라는 말씀을 약간 수정해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보통 온유하다고 하면 “부드럽다. 약하다. 온순하다.”등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힘이 센 자, 강한 자가 더 인기를 끌고 또 영향력이 있고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니 해서 강자만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반대입니다. 물 속에서만 보더라도 큰 물고기는 중간 물고기를 잡아먹고, 중간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또 작은 물고기는 더 작은 것으로 계속해서 먹어 나가는데, 이상하게도 멸종되는 것은 큰 물고기들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가장 작고 연약한 물고기가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멸종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가면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나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강한 동물의 심볼인 호랑이나 사자 등은 점점 멸종되어 가고, 약하고 힘없는 동물들은 갈수록 늘어나니 약육강식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생물학적으로 재미있게 풀이하기로는, 약한 동물들은 온순하여 사랑을 잘해서 번식이 왕성하며, 강한 큰 동물들은 사랑을 할 줄 몰라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자나 범은 사랑한다는 것이, 숫놈이 암놈을 죽여 버린다고 하니 번식이 되겠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자연계에서 도 온유한 종류가 땅을 차지하고 있듯이 인간 세계에서도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함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이 뜻하고 있는 온유의 개념을 생각하겠습니다. 온유란 헬라어로 '프라오스(praos)'인데, 이 말 자체가 윤리적 용어로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온유란 두 극단(extreme)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지 극과 극에서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동양철학에서도 중용을 강조하는데, 이 중용이 바로 온유의 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에서도 온유를 하나님의 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를 가려서 분노하자는 의미에서 "옳은 시간에 노하며 그릇된 시간에 분노하지 않는 자"에 대해 말했습니다. 분명히 의분은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모른다고 물러서는 나약함은 온유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분노하지 않고, 옳은 일을 위해서만 의분을 갖는 것이 온유입니다.

 

둘째,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을 온유라고 합니다.

동물에게 적용되는 말하면, 사람의 말을 잘 듣도록 길들여진 동물을 온유한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인간 쪽으로 돌려서 표현하면 본능과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을 온유라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감정들을 다스리지 못하여,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들을 저질러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단 실수한 일은 뉘우쳐도 다시 되돌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자기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양심에 의해서, 진리에 의해서 자신을 다스리고, 나아가서 본능까지도 다스릴 줄 알아야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동물들의 힘은 사람까지 잡아먹는 힘입니다. 그런데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지니까 밖에 내어 놓아도 괜찮습니다. 마치 순한 양처럼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줄넘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온갖 재롱을 부립니다. 허리케인처럼 통제되지 않은 바람은 그 힘이 파괴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잘 다스려지면 건설적으로 사용됩니다. 풍력 발전을 하는 바람처럼 생산적인 바람이 되기도 합니다. 홍수처럼 통제(=治水)되지 못하면 난리가 납니다. 그러나 댐을 막아서 잘 조절하면 전력도 생산하고, 농사에도 도움이 됩니다.

 

셋째는 온유를 형용사적으로 표현해서 '프라우테이스'로, 겸손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풀이하면 스스로의 무지와 연약함을 깨닫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배움의 자세, 바로 그런 겸손이 온유의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부족함을 알기에 충고를 받아들이고 남의 힘도 의지할 줄 아는 자세를 말합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의 자세는 “나도 실수 할 수 있다. 나도 틀릴 수 있다. 나도 모를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항상 겸손하게 됩니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온유는 두 가지 태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또 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 : 겸손,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자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의 손에 잘 다듬어져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항상 순종할 수 있는 인격”을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유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온유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내어 맡기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태도 : 관용, 용서, 섬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인정하기에 겸손히 하나님 앞에 순종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관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이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이 죄를 지어도 용서할 줄 압니다. 그리고 섬깁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하셨으며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 갈 때 시므이가 저주하자 흥분해서 죽이려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16:10~11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진압 후 환궁할 때 시므이가 태도를 바꾸어 용서를 빌자 그대로 봐 줍니다.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는 겁니다. 모세는 구스 여인과 재혼한 자신을 비난하다 하나님의 저주로 문둥병에 걸린 미리암을 위하여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인정을 하셨습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요셉은 애굽 총리의 권력으로 보디발의 아내,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섬겼습니다. 두려워하는 그들을 보고 울었습니다. 이게 온유함입니다. 이 외에도 수없는 사람들이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람들을 섬겼음을 봅니다.

 

온유는 마음이 가난해지고 마음이 애통하는 자가 가지는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입니다. 자신을 내 세우고 자신을 의지하던 자만한 마음을 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진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 자세입니다. 위로 하나님께 대드는 대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는 마음자세를 말하고, 옆으로 이웃에게 대드는 대신 이웃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참용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잘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 참 용기”라고 할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참 용기를 지닌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온유한 자입니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힘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놓았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두었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 들어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첫날에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먹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습니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팔복 중 하나입니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다시 보면 ... 예수님께서 “내게 배우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 그랬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통제하고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통제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 겁니다. 셀프 컨트럴은 예수님의 컨트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속박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사랑에 감동되어서 자진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구하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이 우리 마음 속 왕좌에 좌정하셔서 우리의 언행심사(마음, 생각, 언행, 인격)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러면 우리의 인격 속에 저절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갈5:2~23. 그 9가지 열매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온유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심으로 온유하기 원하십니까? 늘 말씀과 가도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 안에 온유한 인격이 아름답게 형성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기 원하신다면 우리를 온유하게 만드신 후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완전히 깨뜨리셔서 부드럽게 만드신 후 사용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의 성도들을 권면 할 때마다 겸손하고 온유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엡4:2).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딤전6:11).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딤후2:24,25).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귀한 성품, 인격이 바로 온유임을 초대교회에서부터 강조하여 왔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강조가 그 당시 교회에서 필요한 지도자의 자질 중의 하나임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가 받을 축복은 무엇입니까?

(시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무엇입니까? 문자적으로 말하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승리한 자에게 주시는 상급을 의미합니다. 그 길고 힘들었던 광야생활을 마치고 이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전하고 풍성한 땅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땅은 승리한 자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또한 땅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섭리 아래에서 하나님의 배성의 고유한 축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상속자,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받는 것을 말합니다.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땅인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복시리즈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2006-02-0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5:6, 엡4:21~24

 

주님께서 8복을 산상에서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사회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로마의 식민지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환경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활이었습니다.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수시로 일으켰으며 그 전쟁을 위한 착취가 얼마나 심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난한 서민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메시야를 기다렸고 자기들을 해방시켜줄 지도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가난과 슬픔 등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과 모습에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까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해낼 수 있는 지도자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힘을 모을 수 있고 또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해방자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오히려 저들을 실망시키는 것들이었습니다.

 

수요일마다 함께 공부하는 이 8복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시면서 그 가운데 복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 애통, 온유, 의, 주림, 목마름, 긍휼, 청결, 화평, 핍박 등의 단어를 보시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가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통함이 있었습니다. 의를 사모했고 또한 목마름과 굶주림이 있었습니다. 화평을 원했고 핍박을 받았던 저들의 모습을 주님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영적으로 생각하여 그 가운데 있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처한 상황을 내가 다 안다.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억울함에 의한 애통, 그리고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자유를 독립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다 안다. 그러나 너희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도 복이 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오히려 지금 너희들이 처한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복을 너희들이 얻을 수 있다. 이 복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복이며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는 진짜 복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저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제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세상 제도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참된 복을 가르치시고 보여주시며 또 그 복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역설적인 방법으로 주님은 귀한 진리를 생생하게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이 귀한 진리를 우리의 복으로 믿고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동적인 기독교인의 복을 살펴왔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엎드리는 심령의 가난, 그리고 죄인 됨을 깨달았을 때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마음,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참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한 삶의 태도인 온유 등을 배웠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성령님에 의해 깨어진 심령이 갖는 복의 모습입니다. 성령님의 깨우침이 없이는 이러한 복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조명하에 말씀이 우리의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때 우리의 마음은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복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바로 이러한 복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깨어진 심령, 부도한 심령이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에서 이 복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의'는 “디카이오수네”로서 신학적인 의미보다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로 살펴볼 때 “올바른 것, 참된 것 즉 진리”를 말합니다. “옳은 것, 바른 것”이 의라고 한다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무슨 기준에 의하여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3:10) 여기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의에 대한 기준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 기준을 정하셨고 또 공평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시고 판단자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이 그 앞에서 바르게 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알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도저히 의롭게 살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우리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대신 그 죄 값을 치루신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는 의롭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게 되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죄의 유혹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화되지 못한 우리의 성품이 나로 하여금 자꾸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바르게 알자, 바르게 믿자, 바르게 살자”를 외쳐야 합니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매일 자신을 쳐서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사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을 썩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길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면 손해 볼 수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아모스와 같은 선지자들, 신약성경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정의의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의의 말씀인 성경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했습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의를 제공하신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시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라는 말씀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표현을 하였습니다. 주님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해보셨습니까? 주님을 사모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도 모순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생수를 공급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이 말씀을 외면하고 듣기를 싫어하고 사모하지 않는다면 아모스 선지자의 책망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7:37-38) 피곤함이 없습니다. 절망이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생수의 강이 내게서 흐르네. 저는 자 걷고 눈먼 자 보겠네.

옥문 열고 갇힌 자 푸시는, 생수의 강이 내게 흘러넘치네.

우물물아 솟아나라, 솟아나라 넘치도록,

솟아나라 내 영혼에. 솟아나서 날 푸소서.

 

만일 우리 영혼이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면 주님의 말씀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말씀듣기를 싫어한다면 그것은 내 영혼이 병이 들었거나 아니면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아 있으니까, 그리고 건강하니까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는 겁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리 안 먹고 안 마셔도 전혀 느낌이 없습니다. 또한 병든 사람은 벌써 입맛이 가셔서 진수성찬도 그림의 떡입니다.

 

우리교회의 가정성경공부를 하시는 분이 24명 정도 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아직 공식적으로 시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가정에서부터 성경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날씨가 풀리면 성경공부반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성경통독표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다 읽으신 분은 언제든지 그 표를 제출하시면 기념품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성경공부문제는 매주 마다 문제가 나가는데 아주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질문도 적어서 보내주시는 분도 있고 우리 학생들도 참여해서 어떤 가정은 온 식구들이 단체로 그 문제를 풀면서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쉬운 것은 우리 젊은 집사님들이 많이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성경을 읽거나 공부를 한다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러지 않는 경우라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메말라가는 자기 영혼들을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요. 3월부터 시작하는 부부성경공부에는 꼭 신청하셔서 함께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주리고 목마르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우선 절대 궁핍에서 느끼는 고통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는 비교적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의 의미를 속속들이 공감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마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그럴 겁니다. 혹 6.25를 겪은 분들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절대 궁핍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리고 목마른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 가운데서 인간은 자연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열심히 찾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말은 ‘강렬한 소원’이나 ‘갈망’을 의미합니다. 저는 배고픈 아이가 젖 먹고 싶어서 소리 지르며 우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우는지 바로 자신의 생사가 우는 것에 달려있는 젖먹이의 모습처럼 주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하나님의 의를 갈망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풍성한 은혜로 만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앙생활 하면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관습화입니다. 신앙이 형식화되어서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그러다 보니까 영혼이 냉랭해지고, 가슴이 식어갑니다.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합니다.(고전10:12 참조) 소위 ‘라오디게아 병’에 걸리는 겁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신적으로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피폐해져갔습니다. 결국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계3:16~17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육신은 지나치게 갈망하면 채움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불만족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영혼은 갈망할수록 더 풍성히 채움을 받습니다. 본문의 “주리고 목마른 자는 ... ”에서 두 동사가 현재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계속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마5:6 후반절 보면 “ ...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 그랬습니다. 여기서 배부르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르타조’(χορταζω)인데, 풀과 곡식으로 가축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실컷 먹여서 포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영적인 포만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영적 충만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 것은 잠시 있다 마는 겁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갈보리 채플이란 교회가 있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인데, 수만 명이 모입니다.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처음에는 히피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히피들은 거리를 헤매며 마약이나 음란 등 닥치는 대로 육적인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행락의 한계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역설적으로 복음의 능력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절망했지만 이제 영적 갈망을 갖고 예수님께 돌아왔을 때 풍성한 은혜로 만족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에서도 만족을 얻을 뿐 아니라, 장차 천국에 들어갈 때 완전하고도 영원한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영생수 강이 흐르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곳입니다.(계 21:6, 22:1~2) 반면에 지옥은 채움 받지 못하는 갈망만 있는 고통의 장소입니다.(눅16:23~24 참조) 세상에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만족함을 얻고 저 천국에서 완전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에 세상에서 세상 것만 갈망한 자들은 서도 제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가 불꽃 가운데 영원히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행복은 무엇입니까? 올바른 갈망을 가질 때 하나님이 그 영혼에 풍성한 만족을 주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 갈망을 가지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되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 살 동안 주님 주시는 충만한 만족을 누리시고, 이 세상 떠날 때 영원한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시리즈6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2006-02-22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5:1-12

 

8복의 말씀은 높은 신앙의 단계를 향하여 오르는 신앙의 계단과 같습니다. 첫 계단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계단은 애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더럽고 추한 죄를 부여잡고 슬퍼하고 탄식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죄의 은총과 감격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셋째 계단은 온유함입니다. 이제 주님을 닮아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넉넉해지고, 주님처럼 묵묵히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넷째 계단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합니다.

 

이상 4계단은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뒤에 내 자신의 수양이었습니다. 내 자신의 완성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내 심령의 댐에 은혜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인 긍휼히 여기는 5번째 복은 초점이 나에게서 이웃을 향하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속에서 차고 넘쳐흘러서 다른 사람까지 적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성장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가득하고, 이제는 차고 넘쳐서 이웃에게 베풀고, 나눠주는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인은 잔인하기로 유명합니다. 강한 자, 힘 있는 것이 성공한 자의 상징입니다. 그러기에 긍휼 혹은 자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로마의 한 철학자는 긍휼을 가리켜 ‘유약한 영혼의 병’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한 짓을 자행하곤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생사를 아버지가 결정해 버립니다.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리면 살리고, 아래로 내리면 죽여 버렸습니다. 노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거나 내다 팝니다.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도 무방합니다. 콜로세움만 해도 지금은 관광 명소지만 사실은 뭡니까? 맹수와 사람을 싸움 붙여 피 흘리게 해 놓고 열광하던 광란의 현장 아닙니까? 유대인들도 만만치 않았죠. 이방인들을 괄시하고 심지어 지옥의 땔감에 불과하다며 무자비하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살벌한 세상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자비로운 사람이 복되다는 겁니다. 얼핏 생각하면 수긍이 안갑니다. 살벌한 세상이기에 더 강해지고, 거칠어져야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유약해서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또 주변의 인생들을 보십시오. 무자비하고 거친 사람들이 강한 것 같지만 다 망했습니다. 로마도 망했고, 나치 독일도 망했습니다. 독재자들의 말로는 한결같이 비참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약해 빠져서 처질 것 같지만, 사실은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증하는 행복한 인생입니다.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또 한 가지 행복의 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긍휼’이란 말은 성경 원어 헬라어로 ‘엘레오스’(ελεοs)입니다. 이 단어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인간에 대한 ‘동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음속에서나 느끼는 감상적인 게 아닙니다. 남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는 ‘마음’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고통을 제거해 주는 ‘행동’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이웃의 고통을 나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그것을 도와주거나 해결해 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인간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요 무자비한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긍휼이 풍성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한 마디로 긍휼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탄식하시면서도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호1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죄 많은, 그리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온갖 고통을 경험하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건지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벧전 1:3)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벧전 2:10).

 

결국 긍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긍휼은 남을 대할 때 강퍅한 마음이나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은 죄인의 고통과 죄책을 감싸 안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허물을 보지 않고 그를 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자가 있다면, 그 영혼의 고통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그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절망의 심연 속으로 함께 들어가 이 시대의 슬픔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긍휼은 죄로 인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영혼을 정죄의 시선이 아닌 따뜻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심각한 문제로 인해 위축되어 있는 영혼을 무자비하고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위로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에 대해 긍휼히 여겨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이지만 주님께서 보이신 긍휼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인해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결코 남 앞에 잔인하고 강퍅해져서는 안 됩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주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먼저 심령이 가난해져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을 철저히 인정하고, 또한 자신이 죄인임을 애통해 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며 하나님의 의를 사모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며 긍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라질 때, 우리는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들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마태가 회심하고 함께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서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 안에는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함부로 죄인이라 단정 짓고, 그를 마음껏 심판대 위에 세워 조롱하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긍휼보다는 심판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주는 축복들은 무엇입니까?

 

1) 심판을 견딜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뜻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히9:27)고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야기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그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야고보 사도,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이 긍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심판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심판받지 아니하려면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밝은 표정 뒤에는 짙은 어둠이 감춰져 있습니다. 모두가 성공과 발전을 향해 전진하는 시대 뒤편에서 어떤 이들은 무료함과 고독을 이기지 못한 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포기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찾지 못해, 삶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삶에 종지부를 찍어버립니다. 이 시대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쉼과 안식이며, 진정한 쉼과 안식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마저 형제를 심판하고 그들에게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대한다면, 그는 이 땅에서 안식할 곳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형제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라고 하시고, 형제를 향한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 때 상처와 고통으로 가득한 이 땅의 수많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회복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 영혼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 영혼의 심각한 병을 치유해 낼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율법적인 방식이나 강제적인 힘으로는 그 병을 치유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이 땅의 병든 모습이 조금씩 회복되고, 이 땅의 오랜 눈물이 씻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상처를 받은 자가 그 상처가 치유되었을 때, 상처받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치유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아픔을 아는 자만이, 그와 아픔을 함께 느끼는 자만이 진정으로 그 아픔을 치유해내고, 그를 회복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픔과 고통을 아는 자가 진정한 위로자,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다윗 왕국을 열어나간 자들은 위대한 용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둘람 굴에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 4백명이 모여 위대한 다윗 왕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소외되었고, 약했지만 그들은 아픔과 고통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반전시켜 그들을 위대한 치유자, 위로자로 세우시고 이들을 통해 위대한 역사를 열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원하십니다. 제물보다 큰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제사보다 더 큰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 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이 그 만큼 중요한 것이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는 것처럼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힘써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을까요?

1)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고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긍휼히 여기는 삶의 기본 전제입니다. 우리 안에 참 긍휼이 없기에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해야 합니다. 엡5:1~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서 ‘본 받는 자’라는 것은 ‘모방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본받을 때 비로소 긍휼을 베푸는 삶이 가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리고 의인이 되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와 긍휼을 받았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해야 됩니다.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먼저 긍휼을 받았으므로 당연히 그래야 됩니다.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한번은 길을 가는데 걸인이 동냥을 합니다. 그런데 마침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그 걸인의 손을 잡아 주면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걸인은 오히려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감격했습니다. 그동안 자기에게 돈 몇 푼 던져 준 사람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위로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말입니다. 나이팅게일이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수여받은 훈장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말로 할 수도 없으면 눈물로도 할 수 있다.”

 

4) 영혼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만 긍휼을 베풀면 곤란합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육체는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소리를 못 냅니다. 사실은 죄로 인해 병들어 있고 영원히 죽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육체의 병도 오히려 자각증세가 없는 게 더 심각하지 않습니까? 영혼의 아픔을 바라보고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혼이 떠난 육체를 위해 운다면, 하나님이 떠난 영혼을 위해 당연히 울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시신을 부둥켜안고 운다면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긍휼을 아는 사람만이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아는 자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이 흘리는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아서 눈이 상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 이웃들을 바라본다면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선교를 하는 것도 주의 긍휼하심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 없다고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신다면 이제 교회가 나가서 그 사랑을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시리즈7 화평케 하는 자의 복

 

2006-03-08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 5:1-12

 

모든 인간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를 보면 그 어느 때에도, 그 어느 곳에도 온전한 평화가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불화와 갈등, 다툼과 전쟁이 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라는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역사 상 가장 크고 비극적인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던 1945년,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평화를 표방하며 창설된 것이 유엔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후에도 인류 역사는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한 국가나 민족 안에서도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개인과 개인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과 불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마음속으로는 모두다 평화를 원하는데 현실 속에서는 평화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베델 성경공부를 하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조화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과의 조화, 사람과 자연과의 조화, 사람과 사람사이의 조화,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화는 바로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이 조화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조화가 깨어지니 사람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야 했고 또 사람과 자연과의 조화가 깨어지니 온갖 잡초가 나기 시작하여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가 깨어지니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이 되었고 자기 자신과의 조화가 깨어지니 죄책감과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평안을 잃어버린 이유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이후로 세상은 평안을 잃어버렸기에 주님은 이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천사들이 외친 찬양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가 바로 성탄절의 메시지였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요 평론가인 S.T. 콜리지는 ‘평화는 세상의 모든 축복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축복을 이 세상에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모하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인사는 ‘샬롬’인데 ‘평안’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또 갈등과 고난의 민족이기 때문에 항상 저들은 평안을 사모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인사자체가 평안을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을 자신들의 인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보면 성경 속에서도 평안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때에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평안하뇨』라고 물으시고(마28: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셨습니다(눅24:36, 요20:19, 21, 26).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초두에 반드시 수신자들을 향하여『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롬1:7, 고전1:3, 고후1:2, 갈1:3, 엡1:2, 빌1:2...). 사도 베드로도 그의 서신 서두에『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벧전1:2, 벧후1:2).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가 받은 밧모섬의 계시를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여 기록하면서『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계1:5). 이렇게 성경에 보면 평화라는 말이 무려 400회 정도 나옵니다. 그마만큼 성경은 평화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나라, 저 나라, 이 교회, 저 교회 교파를 초월해서 다니면서 볼 때 부흥하는 교회는 평안한 교회였습니다. 평안이 있는 교회 성도들은 항상 얼굴에 기쁨이 있고, 대화 속에도 감사와 소망과 축복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부흥이 되지 않는 교회는 평안이 없고 분쟁만 하는 교회였습니다. 올 해 우리교회의 표어인 사도행전 9:31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교회가 평안할 때 부흥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평안을 구해야 합니다.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문을 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 8복중 어떤 복을 누리기를 제일 원합니까?" 교인들의 90%가 7번째 복인 화평케 하는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화평은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가장 귀한 복입니다.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화평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가정에 화평을 만드는 일을 너무 잘 했습니다. 불같은 성격의 남편을 하나님과 화평케 했고 자기와 화평케 했습니다. 까다로운 성격의 시어머니를 하나님과 화평케 했고 자기와 화평케 했습니다. 탕자와 같은 아들 어거스틴을 하나님과 화평케 했고 자기와 화평케 했습니다. 가정에 필요한 것이 화평입니다. 교회에 그리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갈등이나 다툼, 전쟁이 없는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온전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평화라면 어디에 가면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공동묘지입니다. 그곳에는 아무런 갈등이나 다툼이 없습니다. 고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평화라고 말할 수 없겠죠. 사람 사는 세상에 어떻게 갈등이나 불화가 없겠습니까? 그런 평화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 갈등이나 다툼이 없을지라도 금세 문제가 터집니다. 그러므로 혹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 ‘휴전’ 상태 혹은 ‘휴화산’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잠시 잠깐 갈등을 봉합하고 전쟁을 억제하려고 하는 노력만으로 평화를 기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팔복 중 7번째 복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번 같이 읽어 보십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주님은 peace maker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모이신 여러분은 모두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이 복이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축복들은 천국, 위로, 땅의 기업, 배부를 것, 긍휼히 여김 받음, 하나님을 볼 수 있음 등이지만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면 저는 다는 모든 복은 다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아들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소유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복을 가질 수 있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1. 주님이 평안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

 

주님은 우리를 화해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화해의 상징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가로막힌 담을 다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평화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평화라는 말은 신약 헬라어로 ‘에이레네’(ειρηνη), 구약 히브리어로 ‘샬롬’이란 단어인데, 이것은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 보면 곳곳에서 평화를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으로 언급합니다. 삿6:24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중 ‘여호와 살롬’이란 이름이 나옵니다. 평화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롬 15:33, 고후13:11 등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4:33에도 보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그랬습니다.

 

2. 믿음으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26:3-4)

 

어린 아이가 부모를 믿음으로 평안을 얻는 것처럼 우리 아버지 되신, 그리고 목자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두려움에서, 걱정, 염려에서 평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기도함으로 평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평안은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우리 마음에 염려라는 것이 평안을 빼앗아 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을 함으로 우리의 평안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그 평안을 지켜주십니다. 이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믿음으로 기도로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가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모든 사람이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화목케 하는 은사와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화목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롬14:17) 그러나 지옥은 싸우고 분쟁하고 다투는 곳에 있습니다.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람의 죄목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 “당 짓는 것, 분쟁하는 것, 수근 수근 하는 것, 비방하는 것, 교만” 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한 마디로 trouble maker입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trouble maker가 많습니다. 이 말 저 말 옮기며 분열을 일삼고, 평화롭게 사는 곳에 불을 지르며, 가는 곳마다 좌충우돌하여 말썽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지옥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1980년대에 미국 대법관을 지낸 워랜 버거라고 하는 분이 쓴 글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갈수록 소송을 이렇게 많이 하는가?' 라는 내용입니다. 판사들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소송 건수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원인이 어디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나서 자기 나름대로 답을 얻었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그 기능을 잃어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교회가 제 구실을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는 웬만한 충돌이나 웬만한 갈등이 있어도, 혹은 이해관계가 얽혀도 서로 양보하고 용서하면서 풀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자기들끼리 해결하려고 했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기도하면서 해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정에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와 같은 도덕적인 힘을 잃고 더 이상 사람들의 심성을 떠 받쳐 주지 못하자 결국 문제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스스로 감당을 못하고 모든 분쟁을 다 법원으로 끌고 가서 전부 다 고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소송건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평화를 위해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자, 즉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다. 평화가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바라거나, 선(善)이나 요가 등의 수도생활 내지는 명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서 행동으로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화해를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화해에는 언제나 중재자(peace maker)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화해를 원하고 기다리면서도 먼저 화해를 청하지 못합니다. 용기가 없단 말입니다. 이 때에 누군가가 나서서 중간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주님은 화목제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화목케 하기 위하여서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희생해서라도 남을 화해시키는 것이 바로 화목제물의 뜻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화해시키는 것입니다. 칼로 화평케 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그 테러에 무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결국 더 평화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중심을 잡고 서서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이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빌2:5)을 품고 겸손히 섬기는 자세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용납하고 사랑함으로 모든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가 드린 유명한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화평케 하는 자는 중보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화해시키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좋은 중재자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출애굽기 32 장에 모세의 유명한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잠깐 없는 틈을 타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이 백성은 진멸하고 너(모세)와 네 후손으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이 되게 해서 가나안 땅에 가게 하겠다"고, 이스라엘 백성은 멸하되 모세는 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어찌하여 구원하신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하며 간절히 매달리다가 32절 마지막에 가서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자기 백성이 망하는데 혼자 살아남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백성을 사랑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질 지라도 남을 화해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안에 이러한 화평함이 넘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복시리즈8 핍박을 받은 자의 복

 

2006-03-22(수)

 

핍박을 받은 자의 복

 

마5:1-12

 

오늘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8가지 복 중에서 마지막 복을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8가지 복을 같이 공부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신 복이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많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항상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이 팔복 가운데서도 가장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팔복의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첫째 시간에 팔복 말씀을 음악의 8음계에 비유해서 말씀드렸는데, 제8복은 한 옥타브 위의 ‘높은 도’에 해당됩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나요? 이 말씀에만 특별히 부록이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10절로 끝나도 충분한데 주님께서 11절~12절을 덧붙여 보충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이 숨겨 두신 큰 행복의 비결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살펴보면서 그 비결을 발견하시고 크고 놀라운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만을 다시 한번 함께 봉독하십시다.

(마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보통 생각으로는 이해하기도 힘들고 받아드리기도 힘든 말씀입니다. 보통 생각으로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대신 환대를 받고, 욕을 먹는 대신 칭찬을 받고, 반대를 당하는 대신 지지를 받고, 악한 말을 듣는 대신 선한 말을 듣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핍박이 무엇입니까? 10절에서 ‘핍박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오코’인데, 악의를 품고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스토킹(stalking)을 의미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믿는 자들조차 추격하며 괴롭힙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 정말로 사단은 가장 악랄하고 끈질긴 스토커(stalker)입니다. 11절의 보충 설명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욕하고 괴롭히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방하고 ... 이런 짓을 합니다. 그런데 10절을 다시 보면, 그냥 ‘핍박받은 자’가 아니라, ‘의를 위해 핍박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고난 받기를 싫어하여 주님이 고문을 받으시는 시간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어떤 제자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난 받기를 거절하지 않는 용감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를 당할 때 주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은 황송한 일이라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가 쓴 성경말씀에서 고난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의 편지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꼭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고난과 불시험이 신앙생활에 불가피한 것이고 축복임을 강조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복 있는 자니"(벧전3: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벧전4:14). 그리고 우리가 받는 고난의 종류를 세 가지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벧전 2:20-21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첫째는 내가 죄를 짓고 나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으로, 이것은 의미가 없는 고난입니다. 가정주부가 교회 일을 한답시고 가정 일에 등한히 하다 가족들에게 비난을 당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둘째는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나는 운전을 똑바로 잘했는데 술 취한 운전자가 내 차를 받았습니다. 이것 역시 애매한 사고로 세상에는 이런 일이 허다합니다.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연쇄적으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미 베드로전서에서 본대로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진짜 고난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하-21) 진짜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은 자원적이며, 선택적이며, 사랑함으로 당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부득이 당한 고난은 의미가 없으나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를 위하여 선택하는 그 고난, 그 핍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주 쉽게 생각하면 좋습니다. 11절 보니까 “나를 인하여 ...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곧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일 겁니다.

 

(i) 믿음을 지키기 위한 환난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신앙을 갖고 있다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끌려가고, 투옥되고, 매 맞고, 사형 당하고 ... 당시 로마 제국은 여러 나라와 족속을 정복하고 지배했습니다. 그 광활한 땅을 통합하려고 정책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곧 황제 숭배입니다. 그들은 황제를 가리켜 신의 화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족속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적어도 1년에 l회 이상 로마 황제를 향해 “씨이저는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도록 한 겁니다. 그러면 ‘리벨루스’라는 증명서를 교부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신을 얼마든지 섬겨도 됩니다. 하지만 유일신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타협할 수 없죠. 그래서 그들의 신앙 때문에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조롱을 당하고 배척을 당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볼 때 복 있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처음 3백 년 동안의 초대교회 신자들을 비롯한 수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스데반이 복 있는 사람이었고 폴리캅이 복 있는 사람이었고 요한 번연이 복 있는 사람이었고 토마스 선교사가 복 있는 사람이었고 주기철 목사와 안의숙 여사가 복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와 세계 곳곳에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란 말씀입니다.

 

(ii) 예수님의 말씀(or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당하는 환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곧게 살아도 핍박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랬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이 직장 생활이나 사업, 혹은 사업을 할 때 대충 타협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적당주의, 왜곡된 청탁문화, 과도한 접대 문화 등 성도들을 괴롭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데 휩쓸려 살 수 없죠. 그래서 곧이곧대로 살다가 핍박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직장에서 상사가 부정한 회계 처리를 지시하는데, 도저히 신앙 양심상 따를 수가 없어 거부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따돌리는 겁니다. 승진에도 탈락되고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들어서 결국은 퇴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상사는 부정으로 인해 감옥에 가고, 그 성도는 실직의 아픔이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더 좋은 직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져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iii) 복음 전하다가 혹은 사명 감당하다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었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지상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사도들과 바울 등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그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주후 1세기에 사도들은 하나 같이 다 순교했습니다. 바울도 목이 잘려 죽는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바울이 평소 복음 전파의 사명을 귀중히 여겼는지 그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는 핍박을 당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선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핍박을 받습니까? 세상은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불의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불법이 성행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망의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싫어하고, 불의는 의로움을 싫어하고, 불법은 진리를 싫어하고, 사망은 생명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와 진리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불의와 불법이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세상은 사망과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세상은, 불의와 불법이 가득한 세상은, 사망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빛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생명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것에 귀를 막았고 거룩한 능력을 귀신의 힘이라고 생각하였고 생명의 말씀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핍박을 받으면 우리에게 어떤 축복과 은혜가 있을까요? 분명히 기뻐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① 성도의 신분 증명 기회 : 고난을 통과해 보지 않고서는 신앙의 진실성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죠. 그 신앙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다 아십니다. 그러나 고난의 절차를 통해 공적으로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분 증명입니다. 요15:18~19 “세상에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소속이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 소속입니다. 그들은 사단 소속입니다. 우리는 천국 소속입니다. 그들은 지옥 소속입니다. 우리는 빛 소속입니다. 그들은 어둠 소속입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세상은 성도들을 싫어하게 마련입니다.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 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 ”

 

② 신앙과 인격의 연단 기회 : 하나님은 당신이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신앙 인격자가 되기를 소원하시고 기대하십니다. 예수 겨우 믿고 어린애 짓만 하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성숙과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연단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핍박을 허용하시는 겁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입니다. 그런데 극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괴로웠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핍박과 고난은 신앙의 연단 기회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구절에서 그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시119:67,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롬5:3, 약1:2~4 참조)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고난을 가리켜 ‘제3의 성례’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인데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통로입니다. 고난과 핍박도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고 성화시키는 중요한 도구인 것입니다. 러시아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유리는 망치에 맞아 깨져 버린다. 그러나 쇠는 더욱 강하게 단련된다.” 우리 신앙의 관점에서 음미해 볼만한 말입니다.

 

③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영광 돌리는 기회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게 고난과 핍박의 때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바벨론 왕의 어명을 어기고 금신 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끝내 거부하니까 뜨거운 풀무불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털끝 하나 그을리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이 풀무불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제4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성육신 이전 구약 시대에 아주 특별한 경우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예수님이십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상상이 됩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 낙심하거나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에 쌓일 수도 있습니다. 반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남한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큰 핍박은 받지 않지만 그러나 가정에서 또는 친구들 사이에서 또는 일터에서 예수님 믿는 일 때문에 예수님을 닮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오해를 받고 조롱을 받고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에 쌓일 수도 있습니다. 반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낙심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낙심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분부했습니다. 기가 꺾여서도 안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분부했습니다. 반항하거나 보복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은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억제해야 하고 반항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벧전4:12,13). 물론 자연인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은혜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자연인은 자기의 보복심을 억제할 수 없고 분개감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은혜의 세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십시다. 왜 즐거워하고 기뻐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된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다비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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