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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10계명 강해 설교 모음.hwp |

by 【고동엽】 2022. 3. 7.
 
10계명 강해 설교 모음.hwp
 

 

십계명 강해 설교 모음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 1

 

십계명의 의의

 

신 5:1-6, 출 20:1-2

 

오늘부터 11번에 걸쳐서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이란 주제로 십계명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오늘 우리에게 무슨 십계명이 필요한가라고 말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흘러간 법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에는 맞지 않는 말씀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지킬 수도 없고 또 지킬 필요도 없는 계명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일수록 더욱 이 십계명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더욱 우리가 명심하고 지켜가야 할 영원한 하나님의 계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1. 현대의 위기는 신학적인 위기가 아니라 윤리적인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못해서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이 부족해서 위기가 닥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윤리적인 실천이 없기 때문에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2. 영원히 변치 않는 영속적 윤리체계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윤리나 도덕법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거나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십계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십계명은 윤리 체계의 기초로 남아 있습니다. 매 시대마다 새롭게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 의미를 찾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특별히 오늘 이 시대에 이 십계명의 의미를 더욱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혹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권리가 더 앞서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보다 인간의 자유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거나 거치장 스러운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속박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제일 싫어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은혜의 복음'(The Gospel of Grace)을 선포하신 이 마당에, 율법, 특히 '십계명' 같은 것은 철폐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할런지 모르지만 그들은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께서 율법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고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계명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영원히 간직하여야 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리는 자유, 그리고 권리를 통하여 얼마나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미국의 경우에 학교에서 십계명을 없애버렸습니다. 기도시간을 없애 버렸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을 없애 버렸습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 귀한 하나님의 계명을 없애버린 결과 지금 미국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unlimited freedom, unrestricted permission으로 인하여 우리 사회는 더욱 불안하고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법이 없으면 사람은 어떻게 파멸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이 하나님의 법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함께 배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십계명을 과소평가 내지 부정하려는 무리는, "모세가 살던 시대와 우리 시대는 다르다. 십계명은 히브리 민족에게 준 '도덕법'(the Moral Law)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필요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계명의 진정한 의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는 변천하고 문물은 달라져도,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변함없으시며 인간의 본성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한 민족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민족법'(the national law)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을 교량으로 해서 동서고금의 전 인류에게 주신 엄숙한 '국제법'(the international law)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이 십계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서론으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구약성서는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이 직접 쓰신 석판 둘을 들고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출 34:28-29). 좀더 자세히 말하면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있는 동안 백성들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 준 야훼 하나님과 모세가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 32:1)고 아론에게 요청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다 이 광경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고 분노에 차 돌 판을 던져 깨뜨려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다른 돌 판을 만들어 다시 하나님의 글을 받아왔습니다. 후일에는 법궤 안에 잘 모셔두었으며 광야 유랑 때에 그 법궤는 지휘 사령부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러면 왜 이 십계명을 만들어 주셨을까요? 저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계명을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십계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 계명이 사랑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에서부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출애굽하고 나서 3개월 만에 주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저들의 신음소리, 고통소리,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보시고, 내려오셔서 모세를 만남으로 출애굽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서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 후에 십계명을 주셨는데 왜 출애굽하고 나서 즉시 계명을 주셔야 했습니까?

 

그들은 오랫동안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조직력도 없고, 질서도 없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노예근성이 무엇입니까? 눈치 보기, 무책임, 무질서, 절망, 낙심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백성들을 질서 있고 단합된 힘을 발휘하려면 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생존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법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십계명은 공동체 존재의 기초다”는 것입니다. 십계명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기준, 삶의 표준, 행동의 지표를 삼고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법입니다.

 

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의 표준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to show God's standard of perfection)이고,

 

나.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은 마땅히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to show a man 'what he is' and 'what he ought to be')이며,

 

다. 우리의 죄를 알려주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얼마나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to show us our sin and how far we are falling short of God's purpose for our lives)와,

 

라. 우리가 우리에게 절망하고, 우리를 건져 주실 자 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들고 가도록 하는 "몽학 선생(a schoolmaster, 갈3:24) 역할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완전한 인간, 구원 얻을 수 있는 인간이 어떤 자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수시로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즉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전적인 타락, 전혀 우리 스스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가 우리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캘빈(John Calvin, 1509~1564)은 말했습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아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무력함과, 그 무력에서 나오는 죄와, 이 두 가지 결과로서의 저주받은 추태를 바라본다." 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거듭난 새 사람, 새 인격, 새 피조물이 되지 못한 인간, 곧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인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부름 받아 새 피조물이 된 우리 하나님의 종들'까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나 도덕적 ․율법적 노력으로는 이 십계명을 도저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떠나 살고 있는지를 알게 하여 구세주 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거에 주인의 자녀들을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학교 앞까지 같이 가주는 것입니다. 몽학선생이 하는 일은 학교까지 안내해주는 역할입니다. 십계명, 율법의 기능이 바로 주님까지 인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까지 인도하여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도록 하기 때문에 십계명을 사랑에서 출발하여 사랑을 성취하는 법이기 때문에 사랑의 법입니다.

 

또한 십계명을 구분하면 우리가 알고 있듯이, 두 개의 돌 판에 하나님이 직접 적어주신 것입니다(출32:15,16; 신4:13) 한 돌 판에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본분(의무)' (our obligations <duties> towards God) 네 가지와, 다른 또 하나의 돌 판에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본분'(obligations towards man) 여섯 가지를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의 여섯 가지 본분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네 가지 본분의 기초위에 터 잡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1~4계명은 '교리적 계명'(the Doctrinal Commandments)으로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the vertical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를 나타내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5~10계명은 '윤리적 계명'(the Ethical Commandments)으로서 '인간과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the horizontal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man)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나타내는 생명의 법이 바로 십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출애굽한 지 3개월째가 되던 때에 도착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주신 것입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이후로 지속되어 온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공인하는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적인 인정을 받은 때는 바로 이 시내산 언약을 맺은 이후부터라는 말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사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원 은총(출애굽 해방)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는 자발적인 순종과 응답의 체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9:5-6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즉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을 잘 지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참조, 벧전 2:9). 이것은 시내산 언약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라거나, 사람들을 강제하고 속박하는 것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제사장이 일반인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시내산 언약에 의해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되는 존재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은총에 힘입어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지켜야 할 삶의 규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해서 시내산 언약은 어디까지나 이미 조건 없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함으로 응답해야 할 성격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십계명을 우리가 지킴으로 의로워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의 생각입니다. 이 십계명은 출애굽 사건 후에 주신 것입니다. 즉 구원을 받은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계명을 잘 지킴으로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에굽에서 에굽의 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법입니다.

 

마22:36-40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는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루지 못한 율법의 빚나간 부분을 바로잡아 온전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31)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장의 연애편지를 써 주셨습니다. 두 개의 돌 판에 편지를 써 주셨는데, 그 편지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편지입니다. 다른 편지지에 쓴 것은 다 지워지겠지만 돌에 쓴 편지가 지워지겠습니까? 이 지워지지 않는 편지 속에는 인생들아! 너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살고 복을 받아 누리고 살 수 있을까? 또 인생들아 너희가 너희끼리 어떻게 살아야 바른 관계 속에서 살 수 있을까? 또 인생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물질을 사용할 텐데 어떻게 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물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뜻이 그 속에 풍성히 담겨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십계명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쓸모없는 죄의 노예들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우리 인생들을 무지무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가득히 들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계명이라고 말하니 굉장히 엄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데 사실은 “10가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의 동기와 내용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대표되는 말씀입니다. 이 안에는 예배, 찬양, 그리고 봉사, 섬김, 선교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를 죄악의 노예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 구원받은 공동체에서 어떻게 이웃들을 섬길 것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실질적이고 원론적인 말씀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계속해서 수요일에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 강해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또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2

2008-03-19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출 20:1-3

 

십계명에서 첫 번째 계명으로 이해되는 이 본문은, 다른 모든 신들을 거부하고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만 충성할 것을 요구합니다(참조, 22:20; 23:13; 34:14). 이것은 다른 어떤 신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계명이 다른 모든 계명들의 기초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계명을 처음으로 주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우리는 먼저 알아야 만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여러 계명들 보다 이 계명을 먼저 주었겠습니까? 오늘 이 계명이 어덯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단계는 3단계를 거쳤다고 한다. 첫 단계는 다신론(polytheism)입니다. 다신론은 많은 신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단계에서 인간들은 다수의 신들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태양신, 월신, 바다의 신, 하늘의 신, 불의 신, 바람의 신, 강의 신, 산신, 목신 등을 믿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및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의 다신교(polytheism)에 접하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신들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 곧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종교는 철저하게 자연 만물을 신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자연 종교(nature religion)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혼돈 상황 속에서 다른 신들의 유혹을 뿌리치고서 오로지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고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둘째 단계는 단일신론(henotheism)입니다. 이 단계에서 한 민족은 하나의 신을 자기들의 민족신으로 받아들였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단계의 신앙은 자기 민족신이 참된 것과 같이 다른 민족들의 신들도 실로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계에서 민족들 간의 갈등은 그들의 신들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그 결과 만일 어떤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공주는 그녀가 신봉하던 신들을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집에 갖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면 항상 그 민족이 믿고 있는 신에 또 다른 하나의 신을 첨가하게 됩니다. 아합 왕이 이세벨과 결혼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왕상 11:1-8, 16:19-23) 그리고 솔로몬 왕의 첩들이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셋째 단계는 일신론(monotheism)입니다. 일신론은 각 민족에게 하나의 신이 있다는 신앙이 아리나 온 땅위에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시139:1-12) 지금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신앙이 바로 이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 한 분만이 참 신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 우리는 섬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예배하고 경배하며 사랑해야 할 신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첫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제 신학교 동기 중에 대광고등학교 교목이었던 분이 계십니다. 안수도 같은 노회에서 같은 날 받았는데 그만 종교다원주의의 사상에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배타적인 기독교, 하나의 길밖에 없는 종교의 목사는 되기 싫다고 총회에다가 안수 받은 것을 취소해달라고 한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안티 기독교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에 많이 났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데테스학생들은 이것을 공부하였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신학적 토의에 뜨거운 논쟁거리로 대두된 사상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는가? 등의 문제가 조직 신학자, 종교철학자, 종교현상학자, 선교학자,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제시된 새로운 문제는 아닙니다. 이 문제의 기원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까지 소급됩니다. 이스라엘 종교와 다른 종교들 혹은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관계는 가나안 정착 후 하나의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산에 오르려면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다원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각 나라마다 자기 종교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은 단일신론과 같은 사상입니다. 선교도 필요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 있는 종교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왜 남의 종료를 강요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사상입니다.

 

오늘도 십계명의 이 첫 계명은 강하게 다가오는 계명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 아니라면,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진리라고 한다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을 진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진리는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입니다. 구약 역사는 바로 우상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상숭배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음 주에 한 번 더 두 번째 계명을 통하여 말씀드리겠지만 하나님은 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상을 싫어하는지 표현한 말씀을 보시면 출 34:14절에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은 절대로 우상숭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첫 계명을 반대로 생각을 바꾸어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의 첫 자리에 누가? 혹은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를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누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라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하나님 대신에 다른 사람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이 시간에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 잡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부모님이 오시면 가장 안 자리에 앉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부모님이 가장 그 집안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삶의 중심에 100세난 아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시고 질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앗아갈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이 고난을 받았던 것이 무슨 이유입니까? 사탄에게 하나님이 욥의 믿음과 하나님만을 가장 사랑하는 아름다운 신앙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보다도, 물질보다도, 가정보다도, 자신의 건강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하나님이 마귀에게 뽐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과연 욥은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믿었던 사람처럼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욥이 모습을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결국 이 첫 계명은 마가복음 12장 28-30절에서 서기관의 시험적인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했던 말씀에 다 들어있는 계명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했다.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고 하시면서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조건 하나님을 자기 삶의 가장 중심에 모시라고 한다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면 무척 힘이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분을 마음 중심에 모셔야 하느냐? 왜 그렇게 그 분을 사랑해야 하느냐고 반문을 할 분도 계십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그 분을 사랑할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먼저 자녀를 감동시켜야 그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 10절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금주가 고난 주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기간입니다. 금식도 하고 특별새벽기도라고 하여 오늘 아침에는 청년들과 합쳐서 12명의 성도님들이 함께 “십자가와 나”라는 주제로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그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태리의 어느 소읍에 동상 하나가 서있는데 개의 모습을 한 동상입니다. 그 동상의 이름은 '피도'라고 합니다. 그 개의 이름입니다. 그 개는 물에 빠져 죽었다가 죽음 일보 직전에 어떤 신사에게 구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사는 그 개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키웠습니다. 미물인 개, 아무 것도 아닌 짐승에 불과하지만 그 개는 주인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얼마나 주인을 따르고 사랑했는지 주인이 직장에 나갈 때에는 매일 버스정류장까지 따라와서 주인을 전송하고, 또 주인이 직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미리 정류장에 나가서 퇴근하는 주인을 기다렸다가 주인과 함께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렇게 주인을 생명처럼 섬겼는데, 2차 대전이 터졌을 때 주인이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그만 버스가 폭탄을 맞아 주인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개는 그날도 어김없이 정류장에 나와서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개는 낮이고 밤이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려 13년 동안 그 정류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가 그 개에게 먹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개는 결국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낮없이 기다리다가 그 정류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동상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를 죽을 자리에서 건져준 주인 하나를 잊지 못하는 짐승도 있는데, 저주받을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라고 꾸짖었습니다. "당나귀는 주인을 알고 소도 그 구유를 아는데 내가 키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준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른 귀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을 먼저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번 고난주간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깨닫는 기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가장 중심 자리에 모시고 살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을 다라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102장 찬송을 하시겠습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3

2008-04-02

우상을 만들지 말라

출20:1-6

 

우상이란 말이 요사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american idol이란 방송 프로가 요사이 젊은이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노래나 춤 콘테스트를 통하여 최고로 뽑히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기인이 된다는 말로 우상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정말 요새 우리 사회에서 색다른 우상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우상이 되고 싶어서 많은 젊은이들이 발광을 합니다. 연애인, 체육인, 그리고 가수 등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진이 담긴 카드를 모으기도 하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조사하고 알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를 하면 구경하던 젊은이들이 기절을 하기도 합니다. 대단한 것이지요. 저들의 마음과 영혼을 다 빼앗아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정말 우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가수나 연예인들을 우상으로 삼으면 그 우상으로 삼은 존재의 모든 것을 닮으려 하고, 그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취향까지도 따라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여태까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가치관을 허물기도 하고, 우상으로 삼은 이가 원하는 가치관으로 자기를 치장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인생의 목표도 엉뚱하게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 우상은 지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들은 이제 부모의 말보다 우상의 말을 듣게 되며, 우상으로 삼은 인물의 스케줄에 맞추어 자기의 스케줄을 조정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들의 모든 관심과 촉각은 우상에게 맞추어져 있게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정도는 되어야 우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가치관이나 행동양식을 바꾸어 줄만한 영향력으로 받아들이는 대상이 바로 우상(偶像)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에게 우상이 되는 존재는, 자기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거나, 적어도 하나님을 잘못 오해케 할 만한 어떤 이론과 영향력을 가진 사물, 존재나 사상, 혹은 이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성경에서 많이 나타나는 우상은 바알입니다. 바알 우상의 특징은 성장의 힘(the power of growth)입니다. 바알 신은 성장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생명의 가장 신비로운 힘이 자라게 하는 것인데 옥수수가 자라고, 포도 알을 크게 하는 능력을 바알신이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을 보고 호세아 선지자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호2:8)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어린 아이를 낳는 힘입니다. 생명을 주는 힘이 바알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녀들을 낳게 하는 힘도 바알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성의 힘을 바알이 가지고 있다고 믿어서 신전에서 봉사하는 여자들과 성적인 접촉을 하는 것을 거룩한 행위로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므로 바알의 신전에는 거룩한 창녀들이었던 여사제들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인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바알신과 결합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성적 부도덕을 예배라는 행위로 바꾸어 놓는 엄청난 죄악의 행위였습니다. 이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첫 계명을 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 하나님만은 섬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방인의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세상의 유혹과 쾌락을 쫓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의 엄청난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분노하셨습니다.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왕상 14:9)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 중에 우상숭배가 당연 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우상에 대한 선지자들의 글을 들어보십시오. 우상이 얼마나 무력하고 아무것도 아닌가를 비꼬고 있는 성경말씀입니다.

 

“그는 한 조각의 나무로는 자기 자신의 몸을 덥게 만들기 위하여 불을 피우고, 같은 나무의 다른 쪽으로는 그의 밥을 짓기 위하여 불을 떼고, 또 같은 나무의 또 다른 쪽으로는 신(우상)을 만든다”(사 44:14-20)

 

예레미야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상은 거기에 있다. 그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것은 오이밭에 세워진 허수아비와 같이 한 곳에 고정시켜 놓은 대로 그대로 있다”(렘1);3-5)

 

우상 때문에 벌어진 에피소드가 구약에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기드온 사사의 경우를 들어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삿6:25-26)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시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연되어 있던 우상들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우선적인 사명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아버지가 갖고 있던 우상을 파괴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밤에 사람들을 시켜서 파괴시켰습니다. 다음날 사람들이 바알신상이 파괴되고 그 앞에서 하나님께 제사지낸 흔적을 보고 분노하여 기드온의 아버지인 요아스에게 항의를 합니다. 이때 기드온의 아버지인 요아스가 지혜롭게 아들을 변호하여 줍니다. “바알이 참 신이면 바알이 직접 기드온을 벌할 것이니 그것으로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흩어집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기드온은 별명이 붙습니다. “여룹바알”이란 별명입니다. 이 말의 뜻은 “바알에게 대항한다”는 뜻입니다. 우상의 허구성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러면 왜 우상이 생긴 것일까요?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 영, 그리고 힘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순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신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예배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신을 예배하게 만들자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볼 때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상징할 작은 이미지를 만듭니다. 우리가 만든 그 이미지가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생각하게 만드는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점점 사라지고 그 우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갑니다. 그래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도 잘 아시지요?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모세가 오랫동안 지체하자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이 불안하여 제안한 것이 바로 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출32:4에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로 그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를 비영적 존재로 전락시켜 버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구약에 또 있는 것을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불뱀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물게 하여 고통을 준 사건을 아시지요? 모세가 중보 기도하여 하나의 치료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에 높이 달아 메어 그것을 쳐다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자는 어떤 상태에 있든지 고침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민21:6-9)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이 구리뱀이 다시 나타납니다. 광야에 있었던 구리뱀을 다시 만들어서 그것을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것을 부수게 됩니다. (왕하18:4) 사물이 어떻게 우상이 되어가는 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숭배가 근본적으로 나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우상숭배는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요한복음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모양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본성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둘째, 우상숭배는 인간의 오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인간의 종교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판단의 기준이 되고 신들이 인간의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인류를 창조하신 분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사람의 형상으로 신들을 끌어내리는 순전히 오만한 행위인 것입니다.

 

셋째, 우상숭배는 사람을 부도덕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호 9:10).

고대 종교들은 자연의 순환에 초점을 맞추었다. 남신과 여신들이 출산을 조정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의식은 신과 성적으로 접촉하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바알이 바로 그러한 정형적인 우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상숭배자는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버렸고(롬 1:18-23) 그것은 역으로 자신의 도덕적인 본성을 상실하게 했으며 또한 인간의 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부도덕'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넷째, 우상숭배는 귀신과의 접촉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상을 매개로 귀신이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상을 통해 연결된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도 본래는 마귀적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과 삶에 영향력을 끼쳐 우상에게 끌려 다니게 됩니다. 미신과 무당종교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둘째 계명은 그 하나님을 대신할 어떤 것도 세상에 없음을 알고 하나님을 대신할 모든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생활 위에 하나님의 절대권위(Sovereignty)는 어떤 사람의 생활에도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나, 나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존재, 뜻, 인도가 첫째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것이 제일 먼저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 돈의 인색한 우상들이나, 어떤 교육이나, 지식도 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거기에 모시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인정할 때 하나님도 우리를 먼저 인정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현실은 그 옛날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나을 것이 조금도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고찰해보면 우리가 특히 여성분들이 가지고 다니는 십자가가 그렇고 그저 수호신처럼 가지고 다니는 성경책이 그렇고 높이 솟아있는 교회당 건물이 그렇습니다. 이런 대상들이 우리의 신앙에 큰 도움을 주는 것만은 사실입니다만 만약에 그런 대상이 어떤 능력 예컨데 십자가를 가지고 있으면 마귀가 덤벼들지 못하고 전쟁 중에 군인이 포켓 성경을 지니고 전쟁터에 나가면 총알이 비켜가고 역시 전쟁 중에 폭탄이 쏟아지는데 교회 건물 속에 들어가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십자가와 성경과 교회는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계명에 대한 결과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는 3,4대까지 저주를 주고 그 반대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사랑하고 계명을 지킬 때에는 1,000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3,4대까지 저주가 내리고 어떻게 천대까지 축복이 내리겠습니까? 솔로몬의 경우를 통해 우상을 숭배하면 3,4대까지 저주를 받는다는 구체적인 실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데로 솔로몬은 그의 통치 초반부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후반부에 와서 그의 많은 아내들을 통해 많은 우상들을 궁궐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왕상 11:4에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더라"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둘로 나누어지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하여 북쪽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국가가 되었고 남쪽 유다에서는 르호보암에 이어 그의 아들 아비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저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다가 유다의 3대왕 아사왕 때에 비로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으로서 모든 우상을 다 찍어서 불살라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천대까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부분에 대해서는 유대민족을 두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대민족이 누구입니까? 우상의 도시 갈대와 우르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미련 없이 떠난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아닙니까? 그런 저들이었기에 오랜 세월동안 산발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긍휼을 베푸사 오늘날 2,000년 동안 나라를 잃었지만 찾게 해주시고 그 민족이 세계 어디에 가든지 그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형벌은 3,4대에 끝이 나도록 하셨고 축복은 천대에 이르도록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구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마다 가장 우선으로 했던 일들이 우상파괴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신을 섬기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것을 섬기던 삶에서 떠나 이제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종교개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중심주의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을 천대에 이르도록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지금부터 자녀들에게 축복을 유산으로 물려주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우상을 파괴시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외웠던 말씀 2월의 요절, (막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는 말씀을 암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4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라

출 20:7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계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계명을 지킬 때 율법으로 지키려고 하면 대단히 딱딱하고 무겁고 힘이 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법이라 생각하면 이 계명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하신 계명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사람처럼 하나님도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질투할까요? 사람들이 왜 질투합니까?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질투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른 어떤 것도 끼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 어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뭔데 우리를 안 빼앗기려고 그렇게 질투하시기 까지 사랑하시는 겁니까? 이 지렁이 같은 인생을 뭐라고 발로 밟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시고, 이 구더기 같은 인생을 뭐라고 위로하시는가 생각해 보니 감사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 이사야 62:4에는 놀라운 말씀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헵시바라 부르십니다. 그 뜻은 “나의 기쁨이 너에게 있다” 또 우리를 쁄라라 부르십니다. 즉 “너는 나와 결혼 할 여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호 3:1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 나라에 가서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 놓인 건포도 떡을 먹으면서 “아, 맛있다. 아, 맛있다”고 하니 얼마나 분통터질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얄미운 짓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자비하신 눈으로 사랑한다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열심적인 사랑,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이 열심이 특심하면 질투를 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 이게 질투요, 열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십계명을 하나씩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제1계명과 제2계명은 주로 불신자들이나 사이비 교인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3계명은 소위 믿는다는 사람, 표면적으로 보아 무흠한 사람 같이 보이는 기성교인이 범하기 쉬운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망령되이"란 히브리어로 '헛되이'(in vain)라는 뜻으로 더 자세히 설명 드리면 “쓸데없이, 함부로, 경솔하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장 새기는 집에 한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거기에 적힌 이름은 “밝 차고 나온노미 새미나”였다고 합니다. “복을 차고 나온 것을 남들이 샘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제일 긴 한글 이름은 “황금 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 하다”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은 유명한 피카소였다는 확인하기 어려운 유머도 전해집니다. 그의 훌 네임을 들어본 일이 계십니까? “파불로-딩고-호세-프란시스코-드 파우라-호안-드로스-레메디-오스--크리스피노-드라산티스마-트리니나드-루이즈-피카소.”보통은 "Pablo Ruiz Picasso"라고 하지요. 피카소의 성격과 기질상 그런 이름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름은 캐럭터 곧 성격이요 기질이요 품성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이름이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개인의 전체적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품성, 속성, 인격을 이름 속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 고민하며, 많은 생각을 가지고 이름을 짓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물들을 연구할 때 그 이름의 뜻을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분인지를 그 이름을 통하여 알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이름입니다. 출애굽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출6:2-3)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창32: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출애굽 시에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이름이 처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름입니다.

 

(출3:13-14)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오늘 세 번째의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세계만방에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높여지도록 해야 합니다. 시편 8:1에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한자어로 “성호”라고 합니다. 이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어서 과거에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이란 단어가 나오면 그것을 읽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이 없고 자음만으로 구성된 언어이기 때문에 읽지 않고 넘어가던 하나님이란 단어가 나중에는 어떻게 발음을 하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호와”라고 발음을 하여 그렇게 불러오다가 최근에 또 학자들이 찾아낸 결과는 여호와가 아니라 “야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만치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존귀한 이름은 전적으로 '성경적 칭호입니다. 우리가 엄숙한 심정으로 우리 입에 감히 올리는 첫째 이름은, 창세기 1:1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하나님"이라는 성호입니다. 그 뜻은 '오직 한 분이신 님' '크신 님' '강하신 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의 '한'은 크다는 뜻으로 '큰 길'을 '한 길'(행길), '큰 아버지'를 '한(할)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다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창세기 2:4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여호와"(Jehovah, = 예호와)라는 성호입니다. 이 호칭은 출애굽기 3:14에서 모세(Moses)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고 말씀하심으로 그 뜻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한문투로 이 호칭을 말할 때에 '영원 자존자'라고 하고, 영어로는 'the self-existent God'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름도 천사들이 요셉에게 가르쳐준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능력 있는 이름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비어 종의 형체를 갖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분-그분의 이름에 대하여 바울이 빌2:9-11에서 남긴 증언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그렇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아직도 참된 인생의 능력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구원이요,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그의 이름은 비밀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으로 마귀가 물러갔습니다. 악한 질병이 고침을 받습니다. 사도들은 이 이름을 들을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며 그 이름을 온 땅에 증거하려고 하였습니다. 놀라운 이름, 엄청난 이름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그 이름과 인격과 존재에 명예가 있습니다. 명예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높은 평가나 가치 그리고 이이에 따르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면 명예훼손으로 법에 고소합니다. 그래서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명예를 중요시합니다. 성경에 말씀하기를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라고 하셨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에도 명예가 있고 단체나 국가에도 명예가 있습니다. 사람이나 단체에게 명예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게도 명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예는 창조주의 명예이며 하나님의 명예는 최고의 명예입니다. 하나님의 명예는 누구에게서 얻은 명예가 아니기에 없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예는 사람에게서 인정받은 명예가 아니기에 무시당할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들이 무엇일까요? 현대에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로 약속이나 서약을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부로 서약하거나 약속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레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든지 안 들어가든지 약속을 어기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임을 주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약을 하고 지키지 않을 바에는 아예 서약이나 약속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농담이나 욕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입니다.

서양인들의 욕지거리 가운데, "God damn"<신에게 저주나 받아라> "Jesus Christ"<제기랄>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나 존경할 만한 이웃 어른의 이름을 '함자'라고 높여 말하고, 또 위인들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까닭은 이름은 그이 자신이고 그이의 생명이고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성호를 조심 없이(carelessly), 생각 없이(without thought), 헛되이(in vain) 입에 올리는 일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어느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학적부를 정리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학생이 대답하기를 “네 진가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면서 “이 놈아, 아버지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어떻게 해! 다시 불러봐!”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학생이 아버지 이름을 다시 대답합니다. “예, 아버지 성함이 진짜 가짜 진짜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면 그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김삿갓 이야기를 아십니까? 어렸을 때 김삿갓 북한 방랑기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김삿갓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기도 하였습니다. 원래는 김삿갓이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별명입니다. 본명은 김병연입니다. 그는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이었습니다. 평안도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습니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었지만 그러나 출세하지 못하는 집으로 전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워낙 뛰어난 머리와 글제주로 과거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주제가 과거에 어떤 인물을 평하라는 문제였습니다. 익순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쓰라는 문제에 대하여 멋있는 글을 써서 장원을 하였지만 나중에 익순이라는 분이 자기 집안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고는 자기 조상의 이름을 욕되게 한 자신을 비관하여 방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불효자라고 여겨 삿갓을 쓰고 다니데 되었습니다.

 

말라기 1:6에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시139:20 참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잘 못 살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쟁이라고 욕을 먹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히브리어로 "기드시 하셈"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름을 성별한다" 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말은 [토라]에서 온 것인데 유대인이 박해를 받아온 오랜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들이 거의 매일 사용하던 말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혹은 유대인이 봉변을 당하거나 경멸을 당하거나 또 경멸을 당할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멋진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장로교회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우리교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5

 

안식일을 잘 지키는 길

출 20:8-11

 

십계명에 대한 유대인들 사이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많은 인류로 하여금 번창케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어느 한 민족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 민족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만들어서 이 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도록 했습니다. 십계명을 가지고 먼저 어느 민족에게 가서 "너희가 이 계명을 받겠느냐?" 했더니, "우리는 남녀 관계가 복잡해서, 그 칠 계명 때문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지킬 수가 없으니까 우리는 안 되겠습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다른 어느 민족에게 가서 "이 계명을 받으라." 했더니, "안식일 지키라는 법이 있어서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일을 많이 해야 되겠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쉬어 가지고는 안 되니까 우리 그거 못 받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이 계명을 받으라." 했더니,"우리는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보따리를 강탈해서 먹고 사는데,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하고 거절했답니다. 그래 유대 사람들에게 가서 십계명을 내놓고 "너희가 이것을 받겠느냐?" 했더니, "그거 얼마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공짜라고 그러니까, "그러면 받지요!" 그래서 유대 사람들이 십계명을 받았답니다. 그래 가지고 선민이 되고, 복을 받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설입니다 마는, 상당히 풍자하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 강해 재미있지요? 재미있게 들으셔야 오늘 졸리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이시고 아, 재미있다고 생각하시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주신 축복선언문이다라는 생각을 하시면서 열심히 들으시고 또 들은 말씀을 집에서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기억이 안 나시면 홈페이지를 여시면 수요말씀에 원고를 올리고 있으니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4번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안식일이 왜 생겼을까요? 그리고 오늘의 안식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안식교처럼 안식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등 많은 질문들을 할 수 있는 계명입니다. 한번 오늘의 말씀을 다시 한번 함께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다른 계명에 비해 좀 길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굉장히 중요한 계명인가 봅니다. 그래서 간단히 설명하기가 아쉬워서 계명에 대하여 더 설명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 십계명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이 4번째 계명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신5:12-15)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 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 두 계명을 가지고 우리는 세 가지 이 계명에 들어있는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3대 의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짐작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3대 의무가 오늘의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노동의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은 노동을 하라고 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라고 출애굽의 계명이나 신명기의 계명이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라고 바울은 말씀했으며 주님께서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을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마25:26)이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일을 하면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한 댓가를 주십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2)

 

둘째 의무는 안식의 의무입니다.

6일도 일하고 7일도 일하겠다는 것은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안식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를 하셨기 때문에 제 7일에는 창조를 더 이상 안 하시는 겁니다. 창조를 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드신 것들을 즐기는 것입니다. 다시 창조를 할 수 있도록 잠시 일을 중단하는 시간입니다. 재창조를 위한 휴식, 안식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무이면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놀랍게도 사람의 육체적 리듬이나 정신적 리듬은 7일 만에 하루를 쉬는 것이 좋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로열 아카데미에서 사람이 일을 하다가 며칠 만에 하루 쉬는 것이 좋은가, 여러 각도에서 연구해 보니 결론은 7일 째에 한번 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주동자들은 무신론자들인데, 혁명이 끝난 후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0일 만의 하루를 쉬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결산해 보니 10일 만에 쉬는 휴일제는 전 국가적으로 40%나 결손을 내고만 것입니다.

 

소련의 공산당들도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7일 만에 하루 쉬는 것을 8일 만에 하루 쉬게 함으로 1일 노동량도 늘릴 겸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을 막으려는 술책을 폈습니다. 후에 계산해 보니 전국가적으로 생산지수가 30%나 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7일 만에 하루 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요, 인체나 정신의 리듬입니다. 다시 말하면 7일 만에 하루 쉬는 것이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는 것에 비해 더 큰 능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12대 대통령인 제커리 테일러라고 하는 대통령은 취임식 날이 1849년 3월 4일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일날이라고 이 분은 취임을 안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잠만 잤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이 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날 취임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날 취임을 하고 대통령이 돼야 하는데 월요일까지 하루 동안 대통령직이 공백이 생겨서 상원의원에서 하루 대통령을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조치가 취해졌느냐? 그것은 취임을 기어이 안하겠다고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또한 국정을 하루라도 쉴 수 없으니까, 한 시도 쉴 수 없으니까 상원의원 의장인 엘치슨을 하루 대통령으로 임명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의 노예가 아닙니다. 삶에는 리듬이 필요합니다. 7일 만에 한번 쉬면서 안식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하라고 주신 날까지 허덕허덕 일하다가 피곤해서 병들고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귀한 길을 열어주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셋째는 예배의 의무가 있습니다.

쉬면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 날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셨으니까 안식일을 기억해서 “거룩하게 지키라”는 ‘예배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출 20장에서 안식일에 쉬는 근거로 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조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마치고 제7일에 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5장의 근거는 다릅니다. 출애굽기와는 그 이유가 판이합니다. “단지 안식일이 쉬는 날이 아니라 억압에서의 해방됨을 기념하는 날이다. 안식일의 근거는 해방이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휴식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쉬신 것이 아니고 이 날은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이끌어 내신 날로 하나님의 해방의 사역이 안식일의 전거가 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할 문제는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 주일로 바뀌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토요일 안식일 대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즉 주일을 예배를 드리는 날로 정했습니다. 누가 정했습니까? 예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도 일요일이요, 부활하신 후에 열 한 제자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실 때에도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신 날도 일주일 첫날인 오순절 날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를 보면 일주일 중 첫날인 일요일에 예배드리려 모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20:7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모였더니”라고 했고, 고전16:2에도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라고 했습니다. 계1:1에 보면 사도 요한이 주의 날, 즉 주일에 성령에 감동하여 계시를 받고 계시록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열 두 사도 교훈집」이라는 문서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주님의 날 함께 모여 떡을 떼며 성만찬을 가질 것을 기억하라”고 권하고 있고, 순교자 저스틴은 주후 155년경에 기록한 자신의 편지에서 이교도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공동예배를 주일마다 가집니다. 왜냐하면 주일이 일주일의 첫 날이기 때문이며, 이날 하나님은 어둠을 바꾸시고 우주를 만드셨으며,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도 같은 날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이후에 하나님이 지정하신 안식일은 토요일이 아니고 일요일 즉, 주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날이 바로 오늘의 주일의 개념인 것입니다. 이 주님의 날을 잘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안식과 재창조의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 참 안식이 있습니다. 예배할 때 회복, 부흥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안식일 법은 참으로 중요하였으며 또 엄하게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출 31:14-15에서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한다. 그날을 더럽히는 삶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하고, 이렛날은 주께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어쨌든 유대 사람들은 안식일을 엄수합니다. 주전 170년에 있었던 사건은 유대 역사에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헬라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온 세계를 점령하고, 온 세계를 전부 헬라 문화로 문화적으로도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헬라 문화로 들어오게 이렇게 정치를 세웠을 때, 유대 사람만은 예외입니다. 끝내 고집스럽게 자기 문화를 지키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다가 제우스신의 신상을 세워놓고, 이것을 섬기라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죽이고 안식일을 거부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대로 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산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깊은 산 속에 도망가서 거기서 안식일을 지키며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티오쿠스가 아주 교활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알고 안식일 날 쳐들어갔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대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기 때문에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다 붙들려서 섬멸되었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다시 말하면,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키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의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말합니다. 안식일이 유대 사람을 지켰느냐,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지켰느냐. 결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아를 지켰다고 말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2000년, 3000년 동안 각 나라에 흩어져 있지마는 안식일을 지킨, 엄격하게 목숨을 걸고 지킨 사실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민족혼과 신앙을 지켜갈 수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6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 20:12

 

오늘은 다섯 번째 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가정의 달에 많이 전하는 말씀이지만 순서가 되었으니 이 계명을 함께 공부하려고 합니다. 신약 에베소서 6장 1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의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계명에 있는 말씀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악속의 첫 계명”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계명의 두 돌 판이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계명인 1-4계명까지 적혀있는 돌 판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향한 계명인 5-10계명까지 적혀있는 돌 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계명 중에 첫 번째가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이기에 약속의 첫 계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누구입니까? 부모의 의미가 단순히 우리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혈육의 부모님만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말씀하는 부모는 단순히 혈연관계의 부모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넓은 의미로 부모의 의미를 생각하면

 

먼저는 우리를 낳아주신 친부모입니다.

성경은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라고 하였습니다(잠23:22). 또한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잠23:25). 자녀를 낳은 부모는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죽일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20:9)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잠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유대인뿐만 아니라 옛날 로마나 헬라 사회에서는 성경의 원리에 위배되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살해권이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인들은 아버지의 "권리의 법(patria potes -tas)"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생을 통하여 로마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 대하여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한 결코 어른 행세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법적으로 재산권을 조금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을 투옥시킬 수 있었고 아들을 채찍으로 때릴 수 있었으며 그를 쇠사슬로 결박해 놓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습니다.

 

유대인 랍비 중에 탈폰(TARFON)이라는 랍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탈폰의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에 그는 엎드려 그의 등을 어머니가 짚고 일어나게 했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그의 어머니가 신발이 다 헤어져서 수선할 수조차 없게 되자 맨발로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랍비 탈폰은 그의 손바닥을 땅 위에 펴놓고 그 손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랍비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영광이 어느 다른 영광보다도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로 부모님은 나이 많으신 모든 어른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레위기 19장 32절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절에서도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노인은 인생의 경험자입니다. 세상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순경과 역경의 파도를 헤치고 살아온 지혜자입니다. 그래서 욥은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한 자에게는 명철이 있다고 했습니다(욥12:12). 그러므로 노인은 우리의 부모로서 존경을 받을 분이십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이 곧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이 와서 새로운 왕에게 부탁을 하게 됩니다. 왕상 12:4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은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나라의 원로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다가 나라가 분단되는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어른들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 일어난 결과치고는 너무나 많은 값을 치룬 사건입니다.

 

셋째로 부모는 영적인 권위자, 앞선자를 의미합니다.

요한 1서에 나오는 '소자들아', '아비들아'라는 말은 단순히 한 집의 부모나 자식의 관계를 말함이 아니고 위에 있는 자, 앞선 자를 뜻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가족관계를 생각할 때 교회의 영적지도자들을 영적인 부모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을 하였습니다(갈4:19).

 

(딤전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바울이 디모데를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불렀습니다. 영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부모에게 공경해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님을 공경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출애굽한 사람은 마땅히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1에서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옳다는 말은 곧 '당연하다, 옳다'는 말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삶의 자세이기에... 무조건.. 부모님을 공경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 3:20에서 말씀하시기를..."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넷째로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R.W.Dale).

그래서 맛있는 것도 부모님께 먼저 드리고 좋은 것도 부모님께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그 남은 세월이 자녀 보다 일반적으로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부모님 공경하는 법을 통해서 하나님 공경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부모님만큼이나 하나님을 잘 보여주고 있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부모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위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사역자라는 책임감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것이 영적 질서와 육적 질서의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되면 질서가 필요합니다. 제5계명은 바로 인간 공동체,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법률입니다. 효도하라 했는데, 효도의 구체적 방법이 뭡니까? 성경적인 첫 번째 방법은 복종입니다.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이 효도의 첫째입니다. 복종이란 일정한 권위, 혹은 권세에 대한 응답입니다. 즉, 부모에게 부여된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가정의 질서가 유지됩니다.

 

인간 사회에는 여러 종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가정 공동체, 국가 공동체, 회사 공동체, 혈연, 지연, 이익 단체 등 모든 공동체마다 부여된 직책과 권세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은 모든 공동체 질서 유지의 기반이 됩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국가원수에게도 복종할 줄 압니다. 부모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회사에서도 사장에게 복종할 줄 압니다. 부모에게 반항적인 자식은 세상 어디에 갖다 놔도 반항적 인간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정은 사회 질서 유지의 기반이요, 부모 공경은 사회 체제가 유지되는 질서의 기반입니다.

 

오늘날 사회가 무너진다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디서 뭐가 떨어졌다는 말입니까? 그 시초가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는데, 제아무리 사회 질서를 외치면 뭐합니까?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면, 국가 질서도, 회사 질서도 엉망이 될 겁니다. 그러면 공경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공경해야 하나요? 부모님을 공경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면에서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신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입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나와 같은 짝퉁은 없습니다. 둘째는 나를 양육시켜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을 항상 표현해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점령한 후 폴란드의 영주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아서 신하들과 함께 영주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는 손님이 많이 왔는데 자리 배치할 때 보니까 제일 좋은 두 자리는 비워두고 나폴레옹은 세 번째 자리에 앉혔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노인 두 사람이 와서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만찬이 끝난 후 나폴레옹의 신하들이 "우리 나폴레옹 황제가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그런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까?"하고 항의하자, 영주는 "황제는 프랑스에서 제일일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더 중요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다음에 가장 좋은 자리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말에 감동을 받아, 프랑스로 돌아와 전 국민에게 폴란드 영주를 소개하고 전 국민은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둘째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을까요? 물론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순종을 요구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위하여 순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뿐이다. 부모는 인생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자녀들에게 충고하고 인도할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셋째로 봉양하는 것입니다.

봉양은 부모님이 필요한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롭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한문 글자는 일종의 상형문자인데 늙을 노(老) 밑에 아들 자(子)를 더해 놓은 글자, 아들이 연세 높으신 부모님을 등에다 업는 것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글자가 효(孝)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의 기력이 쇠하여지셨을 때, 내 등에 업어드리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드리는 것,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떠받들고 공경해야 한다는 의미랍니다. 이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미국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한 과부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닭을 키우고 밤에는 삯바느질하며 노동을 팔아서 살았어요. 그런데 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서 고등학교에서 1등으로 졸업을 하게 됐고 수석으로 졸업하기 까닭에 졸업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1등하는 학생이 대통령상을 받는데 금메달을 받았답니다. 이 아들이 졸업식 전날 엄마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내일 졸업식인데 꼭 오시라고 그랬더니 이 어머니가 너무 가난하니까 아들 졸업식에 입고 갈 변변한 옷이 없는지라 아들한테 핑계 삼아 얘기를 합니다. "우리 친척집에 내가 도와줄 일이 있어서 졸업식에 참석을 못할 것 같다. 미리 약속했는데, 이 날이 바로 졸업날이구나" 하면서 핑계를 댔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간절히 졸라대 가지고 결국은 참석을 합니다. 얼굴은 까맣게 탔어요. 뭐 변변치 않은 옷을 입고 식장에 참석하니까 아들 친구들이나 선생님들 보기가 부끄러워서 기둥 뒤에 숨어서 앉았다는 거예요. 이 아들이 졸업 연설을 하는데 멋지게 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또 교장 선생님이 메달을 주니까 메달을 받고 받자마자 이 아들이 두리번 두리번 어머니가 어디 있나, 막 찾습니다. 안보이니까 이 아들이 "어머니" 하고 단상에서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어머니가 저기 나무 기둥 뒤에 있으니까 그저 내려가 가지고 그 어머니를 허그합니다. 오늘의 이 모든 영광은 다 어머니 은혜라고. 할렐루야! 그랬더니 단상에서 교장선생이 내려와서 어머니를 안고 아들의 목에 걸려 있던 금메달을 그 어머니에게 달아 주었답니다. 어머니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러 내리고. 이렇게 효자인 이 아들이 대학을 가서 더더욱 공부를 잘해서 박사도 받았어요. 나중에 미국의 명문대학교 프린스턴 대학에 총장이 됐고 후에 미국의 28대 미국 대통령이 됐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윌슨 대통령이예요. 이 효자가 대통령으로 있던 1914년에 미국의 국회에서 5월 둘째 주일 오늘을 어머니 주일로 정한거예요. 어머니 생각하면서.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공포하고 모든 교회가 어머니 주일로 지키자고 공인을 했습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7

 

살인하지 말라

출20:13

 

우리는 오늘날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보는'(人命輕視) 풍조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 같다는 말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지난 세대만 해도 사람 하나가 누구에게 살해당하면 그것은 온통 동네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불쌍하게 죽었다면, 그것은 온 이웃의 슬픈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이제는 매스컴에 보도되는 살인 사건이나 범죄의 끔찍한 수법을 보고도, 별로 마음에 충격을 받지 않는 비인간적․냉혈적․야수적(野獸的) 심정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나 죽이고 싶었다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부모, 형제를 죽이는 일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루려는 제6계명, 곧 "살인하지 말지니라"(Thou shalt not kill)라는 계명은,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계명이라고 믿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다시 기억해야 할 계명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인간을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9:6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6-27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 image Dei)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빌린 생명'(a borrowed life)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인간의 마음대로 처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생명은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26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은 생명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을 때는 우리의 소유가 명예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한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주시고 또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셋째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헤하는 일은 사랑의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남의 생명을 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법해석을 따른다면 절대로 남의 생명을 헤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가장 짧은 계명의 하나이지만, 세상 형법에서 '최고의 형벌'(the capital punishment)을 가하는 죄목입니다. 이 살인죄는 '중죄(重罪) 가운데 중죄(the worst of heavy crimes)입니다. 살인한 자에게는 그 귀한 생명까지도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남의 생명을 헤한 자는 자신의 생명으로 그 값을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치 남의 생명을 헤친 살인죄를 큰 죄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살인죄는 어떤 죄입니까?

살인죄가 아닌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정당방위'(legal defense)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출애굽기 22:2에서는,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국가가 명하는 전쟁에 나아가 살인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특히 그것이 '정의의 싸움'이고 '불가피한 싸움'이고 '조국과 동족을 위한 싸움'일 때에는 결코 살인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의 연천지방 최전방 GP내무반에서 김일병의 총기 난사사건으로 소대장 1명, 상병 8명이 죽고 일병 6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많은 젊은 청년들이 아까운 생명을 잃었으니 얼마나 비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아니지만 자기 전우를 죽이는 군인은 살인죄를 지은 일이 됩니다.

 

또 살인죄를 저지른 자를 법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살해자'에게 상응한 '사형'을 명하신 것은, 피해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고, 인간이 감히 그것을 파괴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형을 집행하는 자는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the minster of God)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뿐입니다(롬 13:1~4). 그러나 지금은 사형제도도 폐지하자는 의견들이 있기도 합니다. 바라기는 정당방위, 전쟁, 사형 같은 사건들도 결국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문제가 되는 살인죄를 함께 배우려고 합니다.

 

첫째로 살인죄는 마귀가 일으키는 죄악입니다.

주님께서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살인사건의 배후에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킨 것이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법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마귀는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죽게 된 것입니다. 결국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죽인 살인자인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거짓말의 아비, 살인한 자인 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남을 살인하게 됩니다.

 

둘째로 살인을 일으키는 삼형제가 있습니다.

이 삼형제는 아주 친한 관계입니다. 독립적으로 살인을 할 수도 있고 또는 함께 살인하기도 합니다. 무서운 형제들입니다.

 

(1) '노여워하는 것' (Anger)이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21-22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Raca, '골이 비었다'<empty-headed>는 뜻의 유대인의 욕설)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가 사람을 죽이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회에 대한 적개심, 형제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면 살인을 할 수 있습니다.

 

(2) '미워하는 것'(Hatred)이다.

요한일서 3:15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다. '미움'은 무서운 간접적 살인이며, 이것이 연장되면 '살인 이라는 직접적 행동'이 되기 쉽습니다.

 

(3) '질투하는 것'(Envy/Jealousy)이다.

질투는 단기간에 폭발하느니보다, 비교적 장기간이 잠복기를 거치면서 격화(激化)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 '영혼의 독소'(毒素)는 지진 같이, 활화산 같이 갑자기 폭발해서 상대방의 영혼을 죽이고, 또한 자기 영혼을 죽이게 됩니다. 창세기 4:1~15에 나오는 '가인의 아벨 살해'도 질투가 폭발한 것이고, 마태복음 27:18에 보면, 예수님께서 죄 없이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도, 대적들의 농축(濃縮)된 '시기'(猜忌)로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셋째로 자살도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1978년 미국의 ‘인민사원’이라는 이단 집단에서, 교주의 사주에 의해서 900여명이 집단 자살을 했던 비극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경을 잘못 알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사도행전 16:27,28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매 옥문이 열린 일이 있었습니다.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간수가 칼을 빼어 자살하려고 할 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네 몸을 상하지 말라"고 말했듯이,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절대로 용납치 않습니다. 성경이 자살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구약 4,000년사(史)에서 자살이 있는 경우는 겨우 4건, 곧 이스라엘 왕 사울․그의 병기 잡은 자․아히도벨(Ahithophel)․시므리(Zimri)의 뿐이고, 신약성경에서는 가룟 유다(Judas Iscariot) 한 사람 뿐이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희랍 사람들은 사람의 자살은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영웅적 자살입니다. 이것은 “내가 수치스럽게 죽기보다는 국가를 위해서 영웅적으로 죽겠다.”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자살 폭탄테러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낭만적 자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같이 따라 죽는 동반자살 같은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염세적 자살입니다. 세상을 비관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왜 이런가? 내 자녀도 내 뜻대로 안되고 사업도 내 뜻대로 안 되는구나.’ 이런 생각으로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살은 악한 것이요 자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스스로 파괴하는 반역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금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예수 이름으로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간접살인이 있습니다.

육체를 직접 죽이는 일도 살인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낙심케 하고 절망케 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도 간접적 살인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사람을 죽이는 일들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1) 입으로 남을 죽일 수 있습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이 말씀을 입으로 남을 욕하거나 저주하는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거짓된 말로 모함하거나 저주를 할 때 우리 입에서 나온 말들이 형제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느 학교 여 선생님이 학생을 벌주었는데 그 벌 받은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에 와서 얼마나 여선생님을 학생들 앞에서 욕을 하고 멸시를 주었는지 그만 그 여선생님이 자기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그 선생님의 아들도 그 아파트에서 엄마 곁에 간다고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2) 남을 실족케 한 자도 간접살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실족케 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믿는 형제나 자매를 시험 들게 하여 주님을 떠나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주로 먼저 믿는 자들이 아직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실망을 줄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할 때, 교회 지도자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때, 믿음의 본이 되지 못할 때 아직 영적으로 유아기에 있는 성도들은 실족하게 됩니다. 그 실족케 할 때 그 죄는 살인죄에 해당된다고 하였습니다.

 

(3)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도 간접살인이 됩니다.

북극이나 남극에 사는 사람들은 워낙 춥기 때문에 그 지역에 해당하는 법이 있습니다. 겨울에 차를 몰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사람이 차를 태워달라고 하는 데 태워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살인미수죄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 추운 겨울에 길거리에 사람을 방치해 버려서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린 자녀를 주님의 품에 온전히 위탁하지 못한 부모(막 10:13~16 참조), 자녀에게 올바른 신앙교육을 전수(傳授)하지 못한 까닭(잠 22:6 참조)에, 그 자녀가 범죄자들과 작당(作黨)하고 법망에 걸리게 되고, 마침내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게 한다면, 그런 부모는 자식들에 대해 간접살인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할 책임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외면할 때 우리는 그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여러분은 잘 지킨다고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나도 살인을 저지르고 있구나 두려움이 들 수가 있습니다. 내 자녀들이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데도 방관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간접살인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주님을 모르고 저들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데도 모른 척하고 있다면 간접살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의 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고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한다면 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혹시 다른 성도들이 실족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시기하고 미워하고 또 분노가 폭발해서 함부로 말을 할 때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우리는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자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있을까요? 한 마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이 없다 보니 미워하고 시기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십계명강해8

 

간음하지 말라

출20:14

 

흔히들 말하기를 현시대를 가리켜 3S 시대라고 합니다. Speed, Sports, Sex, 이 세 가지는 확실히 현대인의 우상이라 할 만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문화와 성을 찬미하는 소위 성의 혁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성의 종교라고도 했습니다. 이 성의 종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우리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엘톤 투루불러드(Elton Trueblood)는 말하기를 “문명의 부패는 잘못된 성 모랄의 미화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시대 한 문화 한 사회가 몰락하기 이전에, 그 사회가 성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되고 부패한 성모랄 성도덕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언제나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음행이라는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폼페이의 최후와 로마의 멸망은, 음란과 간음의 죄가 가져온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러한 로마의 멸망사를 취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다신 문화와 오염된 섹스 문화는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썩고 부패한 성문화까지 정복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그들의 속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 강대국은 부패한 성도덕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부도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소돔 고모라 성을 하나님이 왜 갑자기 유황불로 뒤집어엎어 완전히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게 만들었습니까? 성경의 앞뒤를 잘 읽어서 그 내막을 살펴보십시오. 성적 타락입니다. 이것이 주 원인입니다. 이런 두 가지 사건을 보아도 하나님이 성문란, 성적 타락에 대해서 굉장히 엄하게 다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처럼 성적으로 문란해진 세상을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두실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본문을 진지하게 마음에 담고 묵상하면서 성령의 깨달음과 성령의 책망하심과 성령의 치유하심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오늘 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과거나 지금이나 아주 중요하고 귀한 계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타락하도록 하기 쉬운 것이 바로 성이기 때문입니다. 성 범죄는 하나님이 대단히 엄하게 다루시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간음죄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욥 31:11에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고 했고, 잠 6:27-29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며, 고전 6:9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는....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고, 레 20:10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그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롬은 말하기를 “순간적인 쾌락을 얻고, 영원한 고통을 대신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범죄를 위하여 하나님은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찌니라.”는 칠 계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너무도 클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간음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히브리인들은 ‘간음’이란 말을 기혼자가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 이외의 이성과 맺는 불법적인 관계로 이해했습니다. 이 말은 주로 기혼자들의 성범죄를 일컬어 사용되었습니다. 미혼자들의 성적인 범죄에는 ‘음행’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종류의 성범죄 곧 강간, 남색, 수음, 동성연애, 매음, 혼전 성관계 등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체의 성의 남용이나 오용 혹은 악용에 따른 모든 유형의 성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간음하지 말라고 금지 경고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1)간음은 자기 영혼과 인격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기에 금지 하셨습니다.(잠6:32)

 

2)간음은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기에 금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가장 큰 축복으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가정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축복스러운 가정이 언제 무너집니까? 그 유일한 원인은 간음 때문입니다. 가정이 깨어졌다. 90%는 간음 때문입니다. 가정의 파괴는 적어도 의처증이나 의부증에서 출발합니다.

 

3)간음은 사회를 파괴하는 행위가 되기에 금지 하셨습니다.

간음 이것은 사회와 국가를 망하게 하는 주범입니다. 오죽 했으면 "그 남자와 그 여자를 돌로 쳐 죽여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런 하나님도 없고 사람도 없는 짐승처럼 사는 사람을 그냥 둔다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이 칠계명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육체적으로 이성간에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면 칠계명은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남녀가 선을 넘어서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아니한 이상 칠계명하고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항상 자신이 의롭다고 늘 자부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바리새인들이 성전에 들어와 기도할 때 두 손 들고 이렇게 기도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나는 저 옆에 있는 세리처럼 간음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어떤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계명 속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 계명 속에 담아 두신 새로운 표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기준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이 드디어 밝혀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했다고 하셨습니다. 행동 이전에 마음에 음란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까? 더러운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봅니까? 그러면 벌써 그 자체가 칠계명을 범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동보다도 마음에 있는 동기를 먼저 보시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나쁜데 어떻게 행동은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벌써 잘못됐는데 아무리 행동이 선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선한 행동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남녀끼리 나쁜 짓을 하다가 붙잡혀 온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그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 말은 '너희 중에 간음하지 아니한 사람 있으면 돌로 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전부 읽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과거를 다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자유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두가 다 죄인들이요 간음한 사람들입니다. 그 예수님의 불꽃같은 눈초리를 느끼면서 "나는 그런 일을 한 일이 없습니다." 하고 돌멩이를 들고 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돌멩이를 다 내려놓고 슬금슬금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고전 6:19에 “너희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더 핑크’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이 강도의 소굴로 변한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다면, 성령의 전을 매춘 굴로 전락시킨 사악한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더 노여워하시겠는가?”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무서운 범죄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피할 것입니다.

정욕을 불일 듯 하게 하는 음란한 영화나 비디오, 음란한 소설이나 그림, 또한 음란한 환경 곧 댄스 홀 나이트클럽 같은 곳을 피해야 합니다.

 

2)하나님의 눈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항상 투철한 신의식을 갖고 살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을 때 그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장 두려워하며 살았던 성경속의 사람 중에 하나가 있다면 저는 요셉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가 그렇게 유혹을 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3)부부간의 사랑을 굳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보다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을 더욱 깊이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4)말씀과 기도로 내 삶과 인격을 채워야 합니다.

간음죄와 같은 무서운 죄에 빠지지 않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루터는 “정욕이 일어나면 기도하라. 기도하면 성령께서 너를 주장하신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을 육체를 거스린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가 낮에 낮잠을 자다가 우리야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으로 범죄하게 됩니다. 자기 군인들은 지금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지금 다윗은 나태하게 잠을 자다가 그만 간음죄를 범하게 됩니다. 경건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9

 

도적질 하지 말라

출20:15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범하고 있는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도적질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일입니다. 도적질의 범죄는 살인, 간음죄 등과 함께 현시대의 삼대 범죄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도적질하는 죄는 크기도 하고, 또 일반화되어 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교도소에 가면 가장 많은 죄인이 바로 강도, 절도, 횡령 등의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만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도적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큰 가게에 가면 물건마다 전자칩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훔쳐가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계산대를 통과할 때 값을 지불한 것은 나갈 때 아무 이상이 없지만 훔쳐가는 것은 소리가 나도록 한 것입니다. 얼마나 도적이 많으면 그 많은 비용을 주면서 그런 장치를 하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지불하는 물건 값에는 도둑맞는 것에 대한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도둑들 때문에 사실 더 값을 주고 물건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에도 구약시대의 8번째 계명 즉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이 유효합니다. 아니 더 필요한 계명입니다. 너무 도적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왜 도둑이 많습니까? 성경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면 인간은 도적질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9:17에 보면,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같은 물인데 도적질한 물이 더 단 겁니까? 그냥 같은 떡인데 몰래 훔쳐서 먹는 떡이 더 맛이 생기는 겁니까? 그것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스릴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매우 똑똑한 일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도둑맞는 사람은 바보요, 훔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생각하다 보니 도적질이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도벽증이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병적으로 훔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도적질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순간부터 도적질의 범죄는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 하나님의 열매를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따 먹은 것은 분명히 절도요 도적질의 범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단의 열매를 도적질하므로, 인간 역사의 원초부터 이 죄는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성경에 나타난 도적질의 사건을 보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제일 먼저 범한 죄도, 역시 도적질이었습니다. 아간이 범한 도적질의 죄는 ‘아이’ 성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참담하게 패한 패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는 돈궤에서 도적질하던 습성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은 예수님까지 팔아넘긴 수전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답기만 했던 초대 교회의 부흥 역사에도 한 가지 오점이 있었으니, 그 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도적질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한 것 중에서 감추어 놓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었습니다.

 

세상 어느 나라 막론하고 "도둑질해도 된다"는 법을 가진 나라가 있겠습니까? 도둑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도 법이 있습니다. 제1조가 무엇이냐 하면, "피차에 도둑질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행 강도들이 은행을 털어서 도망을 갔는데 나중에 훔쳐온 돈을 서로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 죽이게 됩니다. 한 사람이 그 돈을 모두 갖고 도망을 가니 다른 도적이 그놈 도둑놈이라고 외치는 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누가 도둑입니까? 피차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룰을 어겼으니 도둑 중의 도둑인가 봅니다. 브라질에서는 좀 도둑들이 참으로 많은데 어느 2세 목사님이 아는 도둑이 있었는데 도둑들에게 지켜야 할 법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기 동네에서는 절대로 훔치지 않는다”는 것이 법이라고 알려 주더랍니다. 자기 동네에서 도적질하는 것은 정말 도둑놈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남의 물건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은 죄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슥5: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고 하였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레19:11)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신5:19)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 등 구약 곳곳에서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은 개인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인데 사실은 이 명령의 초점이 재산에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을 봅시다. 1절부터 봅시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 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 찌니라.” 4절에 보니까,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 안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 찌니라.” 또 5절 끝에 보면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할 찌니라.” 7절 끝에도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9절 끝에도 “갑절을 배상할 찌니라.” 이웃의 물건을 훔쳤을 때는 훔친 만큼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을 훔치고 나서 그것을 갚을 때는 소 한 마리에 다섯 마리, 양 한 마리에 네 마리, 갑절을 갚고, 최고로 갚기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얘기했겠습니까? 결국 물건을 훔친다는 면에 두 가지 잘못된 면이 들어갑니다. 두 가지 offense가 들어갑니다. 첫째로는 상대편에 물질적 손해를 입힙니다. 그러면 먼저 입은 손해를 보상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물질적 손해를 다시 보상한다고 해서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으로 해서 상대편의 화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둑질 했을 때 다섯 배, 네 배, 갑절, 이렇게 갚으라는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7배나 갚으라고까지 했습니다. (잠6:30-31) “도적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적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치는 아니하려니와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어주게 되리라”

 

십계명은 관계의 법입니다. 처음부터 4번째 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 까지는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가 훔친 물건들을 다시 같은 액수만큼 돌려주는 것으로는 관계회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몇 배를 배상해야만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도적질을 할까요?

첫째는 너무 가난해서 도적질을 하게 됩니다.

좀도적이 많은 나라를 보면 모두가 가난한 나라, 가난한 민족들 가운데 있습니다. 빅톨 유고(victor hugo)가 1862년 발표한 작품을 아실 것입니다. 레미제라블, 즉 쟌발쟌으로 알려진 그 소설을 보면 가난 때문에 조카와 질녀를 위해 빵을 한개 도둑질하다 체포된 쟌발쟌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의 책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옛날 시골에서 “서리”라는 것을 했습니다. 닭서리를 하다가 들키면 그냥 돈을 갚거나 아니면 부모님이 가서 사과를 하면 해결되곤 하였다. 고구마서리 등이 있을 때 그것을 크게 죄로 여기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나 가난해서 먹는 것을 해결해야 하는 환경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도 도적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둘째로, 탐심 때문입니다.

탐심을 갖지 않는다면 도둑질할 일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부족함이 없는데도 계속 탐심을 가질 때 남의 것을 훔치게 됩니다.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메운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라는 속담입니다.

 

셋째로 마귀가 유혹을 하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게 만들었던 마귀는 오늘도 우리들을 찾아와서 남의 것을 훔치도록 유혹을 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오늘 우리에게 닥치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 때문에 우리는 남의 것을 도적질하게 됩니다.

 

8계명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만들어진 법입니다. 남의 재산, 남이 갖고 있는 사유물에 대한 청지기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 놓은 청지기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이 땀 흘려 벌어 놓은 재산을 함부로 내가 빼앗게 된다면 이것은 법으로 제재를 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적질을 하지 않습니까? 지적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남이 가진 지식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함부로 내가 사용하면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회사의 돈을 내가 마음대로 유용하는 것,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차를 타는 것, 저울이나 눈금을 속여서 장사를 하는 것, 공장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오는 것, 공금이나 공공물건을 자기 개인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 등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남의 명예를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근거도 없이 남을 비방하거나 비판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소문을 남에게 퍼뜨리거나 안 좋은 얘기를 전하는 것 등은 남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이 됩니다. 이것도 도적질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 세 가지는 “한번 쏜 화살, 잃어버린 기회, 입밖에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도적질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도적질 하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시간을 도둑질할 수 있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날로 구별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을 단지 육신의 욕심을 위해 다 사용해 버리는 것은 주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물질을 도적질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말3:8을 보십시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고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이 취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천하의 권세를 한 손에 쥐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교만해졌고, 신상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그 신상에게 경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치셨습니다. 결국 그는 정신이 돌아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살후 3:16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고, 잠 6:6에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일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도박이나 복권 같은 것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생각을 단호히 버려 합니다. “마귀가 수고해서 번 돈은 마귀의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자족의 정신을 배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 4:11 이하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고, 히브리서 13: 5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으며, 딤전 6: 7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3)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28절에서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10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20:16

 

지금까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 5번째부터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귀한 계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들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십계명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가 윗사람을 존경하라. (5계명)

둘째가 사람의 생명 존중을 존중하라. (6계명)

셋째가 결혼과 가정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7계명)

넷째가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8계명)

 

오늘 9계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짓말이란 이웃을 죽이고, 아프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큰 죄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에게 말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 말의 영역이 가장 중요합니다. 말에 의해 인간은 행복과 불행이 대부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말을 잘 사용하면 이 말을 통하여 사랑도 나누고, 의사도 전달하고, 더 낳은 것을 의논하고, 서로의 마음을 서로 깊이 알 수도 있습니다. 말이 없다면 인간의 인간됨이 절반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잘못하게 되면 그 축복이 헛것이 되는 것뿐이 아니라 도리어 불행을 부릅니다.

 

성경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여기서 죽는다고 하고 산다고 하는 것은 복되게 되는 것과 망하게 되는 것이 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하면 살길이 열리고, 말을 잘못하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말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의 결과로 복되게 되기도 하고, 저주를 입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대로 하나님은 행하신다고 했으니 우리가 하는 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계명에서는 거짓말, 거짓 증거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에도 백색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을 헤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이 아니거나 오히려 유익하게 하는 거짓말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나이 드신 분들이 “늙으면 죽어야해!”하는 말이나 장사하시는 분들이“밑지면서 팔아요!”하는 말, 그리고 노처녀가“나 시집안가요!”등의 말은 옛날부터 인정된“한국의 3대 백색거짓말”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가장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생 라합이 한 거짓말입니다. 정탐꾼들을 숨겨두고 거짓말을 한 경우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행한 백색거짓말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계명에서 말씀하는 거짓말은 바로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하여 행하는 거짓말인 경우입니다.

 

먼저 어원을 찾아보면 그 뜻을 더욱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거짓말이란 뜻의 원어를 찾아보면 먼저 "비아볼로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중상모략”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브라스페미아”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과 사람을 모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카타랄리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개가 뒤에서 무는 것”을 뜻합니다. 앞에서는 웃고 악수하면서 뒤에서 험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라고 하듯이 결국 “거짓말이란 위증, 중상모략,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 과장된 말, 허위 진술, 아첨, 험담, 얼버무림, 꼭 해야 될 말을 망설이고 못하는 것, 헐뜯는 일, 말의 뜻을 악용하는 것”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온갖 언어, 말을 가지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위증자의 실례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스테반이나 거짓증인들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 할 때 아합왕에게 패류들로 거짓증거를 하게 하여 의인 나봇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렇게 거짓 증거 하는 자들은 의인들과 이웃의 생명을 빼앗는데 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짓 증거하는 자들에 대하여 책망과 저주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잠언19:9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언25:18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잠언24:28 “너는 까닭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잠언12:17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하느니라”

잠언 6장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가 있는데 6장 19절에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로마의 원시사회에서는 거짓 증인인 것이 판별되면 낭떠러지에 데리고 가서 떨어져 죽게 하였다고 합니다. 애굽에서는 거짓 증인은 코와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사담 석상에서 남에 대해서 중상하거나 악선전하거나 시비하는 것은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삼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침묵이 거짓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아닌 풍설이 돌아가는데 자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말하지 아니하고 침묵을 지키면 이것도 결국 공범죄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헬라 속담에 “혀는 뼈 하나 없고 아주 약하고 작지만 많은 사람을 찌르고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터어키 속담엔 “혀는 검보다 더 많은 사람은 죽인다” 파사 속담엔 “혀가 길어지면 생명이 짧아진다” 아라비아 속담엔 “네 혀가 네 목을 베지 못하게 하라. 칼은 쓸수록 더 무디어지나 혀는 쓸수록 더 날카로워 진다”고 했습니다. 나라마다 혀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비록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설교 가운데 거짓말에 대한 테스트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속하는지 마음속으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나는 얼마나 거짓말에 익숙해 있나 자기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는 하나의 테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네 가지 답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만 나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서 선택하시면 됩니다.

 

첫째로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둘째 나는 종종 자주 거짓말을 하는 편이다.

세 번째는 나는 거짓말을 잘하지 않지만 그러나 솔직히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 경우도 있다. 네 번째는 나는 거짓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넷 중에 어디에 해 당되십니까? 첫째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이거는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합니다. 영적 병원에 입원하셔서 주님의 심각한 다루심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종종 자주 거짓말 하는 편이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진지하고도 심각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 경우도 사실은 있다. 저는 이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라고 생각을 해요. 네 번째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는 거짓말쟁이의 대표적 진술입니다.

 

여러분, 결국 우리는 거짓말을 하며 산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러나 남을 헤하려는 목적으로 거짓 증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악해서 내가 보복 당할까봐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거짓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정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래가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두 번)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 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고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오늘 우리가 남의 거짓 증인으로 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남을 비방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나, 남의 비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우, 작은 일을 크게 과장하여 비난하는 것 등도 거짓 증인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 말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의욕을 꺾고, 또 싸움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입술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였습니다. 약3:1-10을 보십시오.

 

0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0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0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0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 하나니

05 이와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 를 태우는가

0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 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0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0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0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제 우리는 거짓 증인이 아니라 참증인,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증인이 되는 일에는 손해를 보더라도 내가 위험에 처해질 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야 참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사실만을 말할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믿고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 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었던 주님을 자신 있게 증거 해야만 합니다.

 

 

 

 

 

 

 

 

 

 

현대인을 위한 십계명강해11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7

 

오늘은 그동안 우리가 묵상해왔던 10계명 강해 중에서 마지막인 10번째 계명에 대해 상고하고자 합니다. 이제 앞선 계명들에 대해 잠시 되돌아보면 하나님께 모세를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10계명을 주셨는데 1- 4계명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해야 할 의무 조항으로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고 5-10 계명은 우리 인간 상호간에 지켜야할 이웃 사랑에 대한 의무조항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인 5-부모공경, 6-살인, 7-간음, 8-도적질, 9-거짓증거 이런 계명들은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것인데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것은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견적인 탐심에 대해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은 모든 계명의 어머니(mother commandment)와 같은 계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계명이 인간의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여타 계명들과는 달리, 인간의 내면세계에 있는 탐욕과 탐심 자체를 금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열 번째 계명이 탐욕적인 동기 자체를 금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모든 불의한 행동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요, 모든 사회적인 부정과 부패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암 2:7; 미 2:1-3; 왕상 21장 등). 뿐만 아니라 탐심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사회적인 무질서와 말썽을 불러일으키는 기본적인 원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탐심이 없다면 다른 계명들에 대한 불순종은 생겨나지도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하와가 선악과를 보는 순간 그것이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임을 알고서(창 3:6) 그것을 따먹은 것이나,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및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한 행동(수 7:21)이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 탐심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탐심이 모든 죄악의 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주신 바가 있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렇다면 탐심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자면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 불의한 방법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탐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정직하게 얻는 것, 불의한 이득을 탐심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고등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탐심이 아닙니다. 돈 5만 불 버는 사람이 정당한 방법으로 돈 10만 불을 벌려고 한다면 그것은 탐심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발전이요 긍정적인 소망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는 탐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남의 소유를 가지려는 마음, 남이 가진 것에 대하여 욕심을 가지는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시기를 디모데 전서 6: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계할 부분임을 바울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말입니다. 이런 것을 본다면 탐심이라는 죄는 우리들을 얼마나 죄를 만들어 내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욕심이 잉태를 하고 탐심 너무 갖고 싶어 하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생각도 관념도 정서도 다 그렇게 만들어져 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탐심은 여러 가지 올무에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6:9절을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명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의 욕심은 그것 하난 자체로 끝남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볼 경우에 이 계명은 온갖 탐욕과 탐심을 부채질하는 풍요로운 사회에 대하여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실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가지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는 각종 물질들과 재물들에 대한 균형 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재물들에 대한 애착 때문에 영생 얻기를 포기한 채로 근심 어린 모습으로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마19:16-26; 막10:17-27; 눅18:18-27)이 곧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눅18:18-23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또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신앙의 기본 원리(마 6:24; 엡 5:3)를 분명하게 세우는 한편으로, 자신의 넉넉한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 줄 아는 나눔과 섬김의 정신(신24:19-21; 고후8:9-15)에 충실한 삶을 터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 사냥을 하던 이야기를 들어 보셨지요? 항아리에 바나나를 집어넣어 둡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움켜쥐고 손을 빼려고 하지만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바나나를 놓으면 손을 뺄 수가 있는데 그것을 놓지 않다가 사람에게 잡히는 것입니다. 욕심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여러분 없는 것, 안되는 것만 보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을 먼저 누리십시오. 어떤 시인은 가난하여 구두가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을 비관하여 나갔다가 두 발이 없는 이를 보고 하나님께 구두가 없고 두 발이 있는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여러분 많아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이라도 충분합니다. 부족한 가운데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음식도 많으면 맛이 없지만 작으면 맛있습니다. 예전에 반찬 없이 먹던 밥인데 얼마나 맛있었습니까? 지금은 그런 행복이 없습니다. 부족하다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자족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믿음이 충만하여 말하였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삶의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우리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에 포로가 되거나, 욕망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부자 인생을 살았습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탐심이 아무것도 가져다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꿈과 소망은 가져다주는 것이 많지만 탐심은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약4:2)

여러분 무엇인가를 탐낸다고 무엇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탐이 나서 싸우고 다투고 빼앗아도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탐심을 가지고, 빼앗고, 훔쳐도 잘되지 않습니다. 또 욕망을 채우려고, 다른 곳에서 쾌락을 찾아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도리어 비참해 질뿐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인생이 더욱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바른길로 가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해서 그것을 먹어야 하고, 또 기도하여 그 응답을 먹어야 합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부(富)는 보물(寶物)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보물을 사용하는데 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장수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남에게 줄 줄 아는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도 적게 느끼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며 스트레스도 적고 질병에도 덜 걸린다는 것입니다. 금연이나 주 4회 이상의 운동보다도 구제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건강에 더 좋다고 합니다. 미국<미시간대학>의 학자들이 5년간 400명의 노인부부들을 상대로 연구해 본 결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수명이 훨씬 더 길다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그 연구의 책임자인[브라운 교수]는 단언하기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고 말했답니다.

 

1999년 미국<캘리포니아 대학>에서 2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와 연구는 두 개 이상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향후 5년간 죽을 확률이 63%나 줄어든다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주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 마음과 생각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자신이라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인은 부자가 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이 좋고 믿음이 좋아짐으로 가난하기를 목적으로 삼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더 넉넉히 살기를 원하실 것이다. 다만 그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그 물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감이 아니라 그 물질을 지배하면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시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주님은 부자를 싫어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삶의 의미를 소유에 둠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존재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의 계명이 바로 베푸는 삶을 두라는 적극적인 의미의 계명인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다비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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