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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1권-2.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31~60

by 【고동엽】 2022. 3. 4.
[처음 목차 돌아가기]
 
 

31.차알스 베어드의 명답

유명한 역사가 차알스 베어드(Charles A, Beard)에게“당신이 역사를 연구하여 얻은 것이 무엇이오?”라고 물을 때 그는 다음 네 가지를 말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로,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멸하려하시면 그것이 개인이건 국가이건 막론하고 권세욕에 날뛰게 함을 알았노라고, 그러므로 권세욕에 날뛰는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을 보면 벌서 망할 때가 가까운 줄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맷돌이 천천히 돌아가는데 너무 천천히 돌아가 하나님의 맷돌이 있나 없나 의심하게 까지 되지만 하나님의 맷돌은 부드럽게 갈아 결국은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골라내고야 마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벌이 꽃에 가서 꿀을 도적질해 오지만 그렇게 도적질해 옴으로 말미암아 꽃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과 같은 강도가 항상 악을 행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넷째로, 날이 점점 어두워질 때 별을 볼 수 있는데 암흑과 혼란이 깊어 가면 이것이 다지나가기 전에 벌서 소망의 별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을 역사는 증명하드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32.하나님의 맷돌

만약 역사가 맹목적인 물질조건으로만 전개된다면 이렇게 될 수 가없으나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정의의 맷돌을 가니 비록 돌아가지만 부드럽게 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하나님의 맷돌이 너무 천천히 돌아가는 까닭에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맷돌은 부단히 부드럽게 갈고 잇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은 이 인류의 역사에 숨김없이 나타나고 잇는 것입니다.

 

 
 



33.콘스탄틴 황제 이야기

고대 로마시대에 가장 악한 경기로 사람과 짐승을 싸우게 하는 경기가 있었습니다. 가장악한 죄수와 영악한 사자나 범과 싸우게 하여 어느 한편이 죽을 때까지 그 참경을 구경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가 처음 한 일은 이 처참한 경기를 없애게 하는 것이었으니 콘스탄틴 황제가 믿게 되자 그 때부터 사람과 짐승이 싸우는 경기는 역사에서 말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의 사람과 짐승의 참혹한 싸움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각각 손을 가슴에 얹고 내가 이 싸움의 승리자이냐 아니냐, 내가 이 투쟁의 어느 편에서 싸우고 있는 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상전의 초점>에서

 

 
 



34.묵도의 위력

참 신앙은 기도 외에도 묵상을 통하여 영향을 얻습니다. 시인 워즈는 말하기를“아름다운 시는 묵상을 통하여 얻으며 성경 읽는 것도 묵상을 통하여서만 은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묵상은 나를 이끌어 하나님과 친교 하는 아름다운 가경(佳境)에 들어가게 합니다. 산상복음을 읽는다고 합시다, 그 말씀의 역사적 배경, 그 교훈을 주신 연후, 그 말씀의 뜻, 그 말씀과 우리와의 관계, 심지어 당시 그 말씀을 하시던 예수 님의 표정, 그 말씀을 듣던 군중의 태도와 감정 등까지 묵상하면서 읽으면 나에게 무한한 은혜가 되고 나의 생활에 큰 영양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욜라는 말하기를“성경을 읽고 그 모양이 환하게 나타나기까지 묵상하면 우리의 신앙은 점점 가경으로 들어가 생명이 약동하는 참 신앙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35.흑인 음악가 로렌드 헤이스 이야기

로렌드 헤이스는 유명한 흑인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이 전 구라파를 진동할 때 독일 음악계에서는 헤이스를 청하여 독일에 오게 하였습니다. 헤이스의 첫 음악회는 1924년 악성 베에토벤 홀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우월감을 가진 독일인은 흑인 헤이스의 베에토벤 홀 입장을 베토벤 홀에 대한 모독이요 독일인의 수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사람 헤이스였지만 이런 진퇴양란의 어려움을 당할 때 심중에 심한 번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헤이스는 약속한 시간에 베에토벤 홀 스테이지에 기어이 나타났습니다. 터질 듯이 모인 청중은 박수로 환영한 것이 아니라 모욕의 언사로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 광경을 본 헤이스는 조용히 손을 맞잡고 피아노 옆에 섰습니다. 5분 10분, 계속하여 헤이스는 묵상에 잠겼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그칠 줄 모르던 청중의 아우성 소리는 고요해지고 일대 수라장이던 장내는 만뢰구적(萬 俱寂)의 심야(深夜)와 같이 정숙해졌습니다. 숙였던 해이스의 머리는 다시 들려졌고 피아노 소리와 함께 헤이스의 아름다운 음성은 전 홀을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헤이스의 독창 곡목은〈당신은 평화시요〉였습니다. 헤이스의 묵도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역경이 있고 난관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난국에, 막다른 골목에, 생사의 간두(竿頭)에 처할지라도 우리의 얼굴을 하나님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고 간구(懇求)하는 기도와 묵상을 주께서는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향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약한 가운데서 강하게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11:33-34) <신앙의 위력>에서

 

 
 



36.하나님의 경륜

미국 남북전쟁이 거이 끝날 무렵 위대한 지도자 링컨 대통령이 악한에게 암살을 당했을 때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제3교회 목사 존 씨가 이 성경 말씀(롬 11:33-36)으로 설교하였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에는 3개월이면 남방의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완전 통일을 할 것으로 알았으나 4년간이라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비참한 전쟁을 하는 중에 많은 청년이 죽고 국토가 황폐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남북 전쟁이 가장 심했던 애트란타 시(市)에 가니 그 곳에 지구형(地球型)으로 지은 큰 건물이 기념관으로 되어있는데 안에 들어가 보면 남북 정쟁 당시의 전화(戰火)로 인한 애트란타 시가(市街)의 처참한 광경이며 큰 화재며 군대(軍隊)의 싸우는 모습, 죽는 모습, 시체 등등의 그림과 조각들 실물(實物)에 근사한 광경을 보고 남북 전쟁의 비참한 옛날을 볼 수 있었으나, 일보밖에 나와 그 시가를 보니 참으로 규모 있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애틀란타 시 에모리 대학 같은 건물은 전부 분홍색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웅대하게 지은 것을 볼 때 약 80년간의 변화를 보면서 이 성경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그 오묘한 뜻을 사람이 가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도 8·15해방 당시에는 우리의 기쁨이 어떠하였으며 우리의 감격, 우리의 희망이 얼마나 양양하였습니까? 그러나 그후 우리의 걸어온 길과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또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所願)을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이 하락하시면 오늘 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 같이 불원한 장래에 우리가 화려한 조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이며 각기 고향에 돌아가 무너진 제단(祭壇)을 다시 수축할 수 있는 기쁜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신의 심연>에서

 

 
 



37.여호와의 증인

이 당파의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우리가 다 여러 가지를 다 알아야 실수가 없겠습니다. 이 당파는 본래 미국에서 된 까닭으로 본래 이름은 다 영어로 되여 있는데 처음에 일어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Watch Tower Tract Society'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 한국말로 흔히‘등대사’라고 번역하였고,‘등대사’라고 하는 이름 밑에서 여러 가지 종교잡지와 소책자와 전도 지를 발행했습니다. 그 다음에 당파의 이름은 뭐라고 부르는고 하니 ‘International Bible Study Association’이란 말로 부릅니다.‘국내 성경 연구회’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름으로도 혹 한국에 소개된 줄 압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1922년 이후에는 영어로‘Jehovah’s Witnesses’‘여호와의 증인’이라, 이런 이름으로 많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합소를 왕국회관이라 하기도 합니다. 자 이와 같은 ‘등대사’니‘국제 연구회’니‘여호와의 증인’이니 하는 이런 사람들이 미국의 도처에 돌아다니며 전도지 같은 것도 나누어주고 요새 보면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특별히 믿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것이 옳다고 선전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 종파의 기원은 1872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차알스 럿셀(Charles Russel)이라는 사람이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종파의 이름을 Russelites 라고 부릅니다. 이 럿셀이란 사람은 원래 공부도 별로 하지 못하고 물론 신학은 하지 아니한 사람인데 자기가 특별한 독자적 견지에서 성경을 해석해서 가르친다 하니 많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나 하고, 좀 새롭게 성경을 해석하는데 들어보자고 하여 여러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 길게 말씀들일 필요는 없어도 한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기도 하였지만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가정 가운데서 부인과 싸움이 나고 이 부인이 남편의 생활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이혼 소송을 하고 이것이 법정의 큰 문제가 되며 이런 문제로 말미암아 이 당파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루더포오드(Rutherford)라는 사람이 계대(繼代)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변호사도 좀하고 판사도 좀 했는데 그래서 흔히‘판사 루더포오드’란 말로 알러졌습니다. 제가 약 20년 전(1920년대)에 미국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에 그의 강의를 듣고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소책자를 많이 쓰고 전도를 하였습니다. 1942년에 죽은 다음에는 그 당시 부회장으로 있던 노르(N. H. Knorr)란 사람이 계대를 해서 이 당파를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제일 중요한 종지(宗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사람들이 제일 강조하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데오크라시(Theocracy)곧 신정(神政)이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린다고 하는 그 사상을 제일 강조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모두 다스리시고 그리고 다음은 사단이 배반해서 사단이 다스리게 되었고 그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님을 보내셨는데 그 예수 님께서 첫 번 오셔서는 이를 다 이루지 못하고 이제 다시 오셨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예수 님의 재림이 이미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 1914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왕이 되었고 그 다음 1918년에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것이 무슨 말 인지요? 1922년부터는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간 이 그리스도께서 모두 충성된 사람을 보내어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서 이제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니 이대로 다 들어와야 산다고 허무한 선전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선전하는 사람은 심지어 무슨 말까지 하는고 하니“야! 이제 그리스도께서 다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데 금년내로 38선이 모두 없어지고 독립될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그저 우리와 함께 성경 연구만 잘하면 복을 받을 터이니 오너라”이렇게 선전하면서 인심을 현혹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종지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면 먼저 그 심판이 기독교와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경의 분명한 교훈에 의지해서 삼위 일체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소위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를 부임합니다. 소위 일위일신론을 주장합니다. 일찍이 소너시스라는 사람이 16세기에 Unitarianism을 주장하여 삼위일체론을 부인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함으로 자연히 그리스도의 신성도 부인합니다. 이 사람들의 기독 관은 실로 가소롭습니다.

 

 
 



38.아리안 주의

주 후 제4세기 니케야 회의 때 큰 문제로 되었던 것이 아리안 사상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과 같으냐, 같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리안 사상이요, 같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인데 아리안 이단이 새로운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당파는 성신의 인격성을 부인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신은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성부, 성자와 같이 인격성을 분명히 대명사로 표시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말은, 성신은 한 바람과 같아서 한 신 뿐이고 인격은 없다고 인격성을 부임합니다. 여기 다시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부인합니다. 이미 말씀한 바와 같이 말세론을 왜곡해서 민심을 현혹시킵니다.
그 뿐 아니라, 이들은 현대의 모든 교회를 다 부인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다 사단의 집이라고 다 쓸 때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무 교회주의 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라고는 아니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성경을 연구를 하지 교회는 없다고 합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자체를 부인합니다. 또 이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가서 국가도 부인합니다, 말하자면 무정부주의자들입니다. 투표도 하지 않습니다. 납세도 하지 않습니다. 전쟁에도 안 나간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은 미국 사회에서도 많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가르치면서도 그들의 주장은 우리는 곧 성경에 의거해서 가르친다 하면서 그럴듯한 성경만 꼭 뽑아서 여기에 대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믿는 사람들에게 와서 유혹합니다.
이‘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연구가 깊은 프리스톤 신학교의 어떤 교수는“이 사람들은 성경을 억지로 종합해 놓더니 요새 와서는 성경을 억지로 번역했다”고 말했습니다. 요새 그 사람들이 새로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많은 학자들이 번역한 표준 성경과 완전히 다르게 자기 생각과 비슷하게 성경을 새로 번역했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알 것은 성경은 대단히 큰 책입니다. 이 가운데는 역사도 있고 시, 문학도 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문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 자 한 자만 빼면 별의별 말이 다 있습니다. 또 그것을 억지로 모아만 놓으면 무슨 이야기나 성경만 가지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성경구절을 모아놓고 읽으라고 했습니다.
마태 27장 5절『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어라』
누가 10장 37절『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요한 13장 27절『네 할 일을 속히 하라』
성경 구절을 내용에서 뽑아놓고 모아서 무엇을 옳다고 하려 한 것이면 무슨 일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곡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바로 해석하려고 하면 성경의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씌어진 그 때의 역사, 그 때의 풍속, 그 때의 정치, 그 때의 사상을 모두 충분히 알아 가지고 그 다음에 성경을 전체적으로 공부하여야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학교에서 4년을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신학의 근본적 수양이 없이는 사람이 성경 구절을 함부로 뽑아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면 심히 위험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성경을 바로 연구하고 바로 깨달아야 하겠는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경향이 점점 적어집니다. 본래 한국교회는 사경(査經)하는 풍속이 있어서‘사경회’라 하면 문자그대로 성경을 서술하고 공부하는 회인데 오늘날 보면 성경을 공부하는 회가 점점 변해서 일시적 감정을 흥분시키는‘부흥회’밖에는 되지 아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여러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면 성경을 잘 가르칠 목사를 청하지 않고 병을 잘 고친다는 권사, 성경의 조직적인 연구가 없는 장로를 청해서 사경회를 하는 교회가 있음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할 것은 물론 잘 가르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잘못 가르칠 염려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런 집회에 한 달 계속해서 다니며 한 달이나 잠도 안 자고 하더니 정신 이상이 생겼다는 부인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에 가서 따로 모여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소리치며 춤을 춘다는 말도 들립니다.
시대 영합주의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현대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해야합니다. 성경 곡해 자를 경계하여 특별히‘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부인하는 이단 사상을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함부로 영파(靈派)라고 부르며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근신하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9) 이와 같이 가르쳤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에서

 

 
 



39.아라비아의 속담

아라비아 사람 가운데는 이러한 말이 한 속담처럼 되어 있습니다. 바그다드에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 왕에게 주었습니다. 왕은 이 아들을 대리다가 길렀는데 이 아이가 점점 자라나서 나이 17, 8세쯤 되어서 강에 목욕을 하려 갔다가 그만 물이 크게 나서 강에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 이 아이가 죽은 줄 알고 이 왕이 널리 광고하기를 이 아이 죽은 시체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많은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시체를 찾으려다가 찾지 못하였는데 7일만에 어떤 사람이 그 바그다드에서도 멀리 강에서 내려가서 어떤 산골짜기를 지나다가 강 가운데 잇는 바위 위에서 이 소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시체를 가져오지 않고 산 소년을 데리고 오니까 이 왕이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그리면서“너 7일 동안이나 물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배가 고파서 어떻게 지냈느냐? 물어보니까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바위 위에 가만히 앉았노라니 까 매일 아침저녁으로 떡이 한 덩이씩 떠내려왔더라고 하면서 그 떡을 먹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떡을 한 덩이 가져왔는데 그 떡 뒤에 보니까 떡을 떠내려보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더랍니다. 모하메트 벤하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하매트라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여 어떤 점잖은 사람을 대려왔습니다. 그 사람에게“어찌해서 그렇게 매일 떡을 한 덩어리씩 떠내려보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 하는 말이,“아, 대왕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떡을 물위에 던지면 여러 날 후에 다시 찾는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사실 맞는지 안 맞는지 알아보려고 하여 금년 정월 1일부터 오늘까지 아침과 저녁에 한 덩이씩 던졌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너무 기뻐서“너 때문에 우리 귀한 아들이 살았다”고 하여 많은 상금을 주고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담이 있다고 합니다.

 

 
 



40.음덕과 보은

이 말씀은 제가 처음에 말씀들인 바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기회를 당하든지 좋은 일을 하면 그 당시에는 무슨 기쁨이 없지만 여러 후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보은(報恩)의 원리를 가르치는 말씀인줄 압니다. 이 원리는 옛날부터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가르쳤습니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고, 선을 쌓는 집안에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고, 음덕(陰德)이 있으면 반드시 양보(陽報)가 있고, 숨어서 덕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갚아질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41.개미와 비둘기 이야기

개미가 한번은 나무에 올라가. 나뭇잎 위에 뱅뱅 기어다니는데 바람이 불어서 그 잎이 강물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잎이 떠내려가는데 이 개미가 잎 위에 앉은 대로 자꾸 떠내려갑니다. 그냥 바다로 가면 먹을 것도 없이 그 속에서 죽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스럽게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가다가 그 나뭇잎을 물어다가가 뭍에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미가 살았단 말이지요. 그 후에 한번은 비둘기가 어느 나무에 앉았는데 아마 콩밭을 바라보고 있었겠지요. 마침 포수(砲手)가 비둘기를 잡으려고 조준(照準)을 세워서 방금 방아쇠를 당기는데 무엇이 발꿈치를 따끔 문단 말입니다. 그래서 총알이 빗나갔습니다. 그래 비둘기는 날아갔는데 무엇이 물었나하고 내려다보니 개미 한 마리가 발꿈치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 개미는 아마 비둘기가 구원해 준 개미인 모양입니다.

 

 
 



42.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보은

자연계뿐만 아니고, 우리 인간 사회뿐만 아니고, 미물과 동물뿐만 아니고, 인간의 역사에도 보은의 원리가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복을 수 천대 자손에까지 축복하여 주시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대로 행치 않는 자에게는 벌을 주시고 화(禍)가 삼 사대까지 이른다는 말씀은, 이 원리가 인간의 역사까지 움직인다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이올시다.

 

 
 



43.어느 풍수 이야기

제가 잘 아는 어떤 원로 목사님이 자기의 경험담을 말씀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옛날에 아주 명당 자리를 잘 잡는 풍수였다 합니다. 그래서 함경도니 경기도니 전라도니 할 것 없이 다니면서 일생동안 풍수 노름을 해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자기 외아들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이 다음에 내가 죽은 후에는 저 선반 위에 있는 풍수에 관한 책들을 불살라 없애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아들은 이상해서“아버지 그 책을 왜 없애야겠습니까?”물으니 아버지 말씀이“내가 이 책을 가지고 아직까지 밥을 벌어먹었다. 그렇지만 내가 너희 한대야 사실을 얘기해야 하지 않겠니? 그 무슨 묏자리를 잘 잡아서 자손이 다음에 복을 받는 것으로 아예 너는 믿지 말아라, 아예 쓸데없는 책이니 저것을 내다가 불살라 버려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다시“그럼 아버지 어떻게 하여야 우리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그저 너는 좋은 일을 많이 하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44.유대인과 폴란드 비행사

지난 1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폴란드의 비행사 로맨 털스키라는 사람이 제2차 대전 전에 불란서 비행학교에 있었는데 나치스 정권이 갑자기 강해지면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조국 폴란드도 위험하게 되었으니 불란서에 그대로 있을 것이 아니라 조국에 돌아가서 나라를 위해 일 하겠다는 애국심을 가지고 자기가 소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비행기 기관에 고장이 생겨서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 잠깐 착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 수선을 마치고 유숙하는 호텔에서 비행장으로 나가려고 호텔 문을 나서는데 어떤 사람이 뒤에서 털스키를 밀었습니다. 그는 넘어졌습니다. 그는 성이 나서 보니 민 사람도 돌아다보는데 공포에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 .갑자기 털스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저 사람이 필시 유대인인데 나치스의 게스타포(비밀경찰)에게 쫓겨다니는 사람일 것이다’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왜 미는가 물으니 말은 하지 않고 손으로 뒤를 가리키는데 누가 쫓아온다는 표시였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틀리지 않는 것을 알고 즉시 그 사람을 자기가 있는 방에 대리고 들어가서 물어보니 자기의 추측과 같았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인으로 나치스 게스타포의 유대인 추방에 쫓기어서 다니다 이 털스키가 호텔에서 나갈 때에 마주친 것입니다.
그래서 침대 밑에 모포에 말아서 숨겨 놓았습니다. 얼마 아니 되어 나치스 경찰이 그 방에 들어가서 조사하게 되었으나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털스키는 이 사람에게 자기는 폴란드로 가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보니 제발 그렇게 하여달라고 애원하여 같이 비행장에 나갔습니다. 경찰의 조사와 감시가 심하였고 그 비행기에는 털스키 혼자 탑승하게 되었는 고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전송하는 체하다가 출발 직전에 이 유대인을 태우고 떠났습니다. 비행기는 폴란드를 향하여 가고 있었으나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가솔린이 떨어져서 부득이하여 국경 가까이 에서 불시착(不時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유대인은 그 곳에서 폴란드로 가게하고 가솔린을 보충해서 바르샤바에 도착하니 경찰이 와서 조사를 하면서“그거 이상하다, 반드시 두 시림이 탔겠는데?”하면서 그저 가버렸습니다.
그 유대인은 무사히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 후 나치스 독일은 마침내 폴란드로 물밀 듯 처 들어가서 폴란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털스키는 불란서로 망명하여 불란서 비행대에서 독일 군과 싸웠으나 불란서도 함락되어 영국으로 가서 폴란드 비행단장으로 영국공군과 같이 독일 군과 싸우게되어 참 잘 싸웠습니다. 항상 성전(善戰)하여 아주 유명하여져서 매일 신문에도 인기 비행사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루는 싸우는 중에 잘 싸웠지만 많은 적에게 포위를 당하여 부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파라슈트로 겨우 생명만은 보존되었으나 뇌(腦)가 상하였습니다.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어 여러 날 치료를 받다가 하루는 누운 체로 눈을 뜨게되어 치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의사도 이 털스키를 마주 보다가 하는 말이“아, 당신 나를 모르겠소?”하며 물어보았습니다. 조금 생각하다가 “낯이 익은데요, 언젠가 비행기를 같이 타지 않았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내가 오스트리아 수도에서 당신에게 구원받은 사람이요”라고 하면서 그후의 경과를 말하는데, 이 사람도 무사히 폴란드에 갔으나 나치스가 폴란드에 침략하여 불란서로 갔다가 또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 사람은 의사로서 특히 뇌수술을 잘하는 유명한 사람인데 스코틀랜드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는 중 신문에서 이 털스키의 전공(戰功)을 늘 보며 마음으로 축복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전투 중에 털스키의 머리가 부상을 당하여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병원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였으나 이 때야 말로 자기가 은혜를 갚을 때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자원해서 털스키가 입원한 병원에 와서 친히 뇌수술을 하여 치료를 했던 것입니다. “양식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우리가 어떤 때 낙망할 만하고 어려운 경우를 당합니다. 그런 때라도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씨를 뿌리면 하나님이 적당한 때에 거두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과 같이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다 거둘 때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선한 일을 하고 남을 도와주되 교회의 믿는 자들에게 먼저 할 것이올시다. <양식을 물위에 던지라>에서

 

 
 



45. 네로의 죽음

로마의 네로 왕은 보통 악한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그에게 순교 당했습니다. 어머니와 그 부인을 암살한 왕입니다. 네로의 처음이 어떠하였습니까? 로마의 제일 가는 대 선생 시세로에게 배웠고, 어릴 때부터 노래와 시에 능하였고, 예의가 단정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고, 행정을 어떻게 잘했는지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점점 나빠져서 로마 성을 불질렀습니다. 마지막에 자살로 끝을 마치었습니다.

 

 
 



46.가룟 유다의 죽음

가룟 유다도 보통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하여간 12제자 중에서 신임을 받았습니다.
전대(錢帶)를 맡는 회계로 신용이 좋고 시작을 잘 했으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시작하는 것이 귀하나 잘 마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유년 주일 학교를 거처 학습(學習)을 받는 아이가 몇입니까? 학습인 백인 중 세례 받는 이가 몇 분이나 됩니까? 세례 후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끝마치는 이가 몇입니까? 믿음으로 잘 마치는 것이 귀합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믿음으로이기는 것이 귀합니다.

 

 
 



47.폴리캅의 죽음

요한 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서바나 교회 교부(敎父) 폴리캅이 큰 핍박이 일어나서 지방관리에게 불러나갔을 때에 나이가 어떻게 많은지 불쌍히 여겨서 예수를 안 믿겠노라고 한 마디만 하면 놓아주겠다고 하니, 그의 대답하는 말이“86년 동안 내가 내 주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내 주를 어떻게 배반하겠는가?”하고 순교하였습니다. 잘 마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직분도 그렇습니다. 직분을 처음으로 맞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귀한 것은 직분을 잘 감당해서 마치는 것, 내가 받은 사명과 직분을 잘 마치는 것이 더 귀중합니다.

 

 
 



48.크렌모 감독의 죽음

영국의 종교개혁자 크렌모 감독은 헨리 8세 때에 구교를 반대하고 종교개혁을 하였지만 다음 왕 메리 여왕은 카톨릭교인이어서 신교를 없이하고 구교로 국교를 삼으려고 할 때에 이 크렌모 감독에게 구교로 돌아오면 고직(高職)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응하자 투옥되었습니다. 이 감독은 감옥에서 오래 고생하고 있는 중 어떤 문서에 사인만 하면 무사히 석방하겠다고 하자 그 조건이 자기의 주장과 비슷함으로 사인하였습니다. 다음 재판 때 검사 측에서“그 대는 구교로 돌아오겠다고 하였다”고 할 때 이 감독은 일어나서“내가 사인한 그 성명서는 인정할 수 없다. 내 양심으로 그 성명서를 취소한다”고 하여 결국은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화형을 받게되어 불에 활활 타 올라올 때에 그는 먼저 자기 손가락을 내밀어 태우면서“손가락이 그 성명서에 사인을 했으니”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마치는 것이 어떻게 귀한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유종의 은혜>에서

 

 
 



49.새로운 피조물

3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로스엔젤리스에 5일간 있었는데 한인(韓人)이 많아 음식도 한국요리를 먹었습니다. 그 부근의 할리우드는 미국의 영화 중심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말하자면 죄악의 도시인데 어떤 집회에 초청 받아 가보니 개인의 집에 약 50인이 모여 있었습니다. 전부 배우인데 아주 인사성이 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찬송을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듣고 하면서 각각 2주일 동안의 경과보고 즉 신앙 간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집회는 여간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회를 처음시작한 사람은 텔레비전과 영화계의 유명한 3인조 가수 중의 한 사람인 팀 스펜서라고 합니다. 그는 술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아주 중독 되어 버렸고 명성과 돈이 많으나 그 생활에서 아주 권태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영(靈)의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 염세 세상에 휩쓸려 한 번은 피스톨을 가지고 어떤 여관에 가서 자살하려고 할 때에 유년 주일학교에 다니던 때의 생각이 일어나며 하나님 생각이 갑자기 나서 죽는 것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 기도를 한 번 할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술을 끊게 하여 주소서, 나의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그리고 그 날 저녁을 평안히 잤다고 합니다.
이튿날 집에 와서는 항상 마시던 술도 마시지 않고 단 음식만 계속하여 먹으며 점잖은 생활을 하므로 부인이 이상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 아주 술 마시기가 싫어졌고 이전 생활을 다 잊어버리고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동료들에게 전도하기를 시작해서 신자를 얻어 80명이나 되는 그 단체(헐리우드 크리스천 그룹)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영화만 제작한다고 합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5)
하나님의 권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양, 서양이 다름없이 계속됩니다. 갑자기 실생활(實生活)이 변하지 못하지만 심령이 완전히 변합니다. 우리가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서 오늘까지 신앙생활을 계속한다고 하지만, 언제든지 반드시 한 번은 이 중생(重生)의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 새로운 피조물>에서

 

 
 



50.스페인의 귀족기사 로욜라의 결심

16세기 구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스페인의 귀족의 아들 로욜라는 일찍이 유명한 기사(騎士)가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불란서와 싸울 때에 다리가 상하여 군인의 소망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는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살기를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 칼을 제단에 바치고 일생을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일생을 주를 위해서 열심히 충성을 다해서 일 했습니다.
구세군(救世軍)의 원조 윌리암 부우드도 역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정병으로 살겠다고
맹세하고 군복을 입고 일생을 그리스도의 군인으로 살았습니다. 이 죄악이 관영하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이 사상적으로, 무력적으로 맹렬히 일어나는 이 때에 주께서는 십자가의 정병을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대답하고 일어날 정병이 과연 몇 명이나 되십니까?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에서

 

 
 



51.스미드 목사의 기도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군중 교회(Peoples Church)의 목사인 스미드 박사는 1927년에 그의 제38회 생일을 당하는 날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1, 주님의 마음과 꼭 같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2, 주님과 동행하게 하여주소서.
3, 저는 오늘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하나 그러나 내 노력은 분산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백 퍼센트 하나님만 위하여 충성하게 하여 주소서.
보십시오!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의 목회 하는 “군중 교회”는 지금은 4, 5천명이 모이는 대 교회이며 300명의 외지 선교사를 그 한 교회에서 파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목표가 금년 (1954)중으로 4백 명의 외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 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 <새해에 새 사람>에서

 

 
 



52.사망의 골짜기’의 신기루

미국 서 남방 애리조나 주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데 ‘사막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그 위를 비행기로 지나가면서 감개가 깊었습니다. 이 곳이 어떻게 사망의 골짜기란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다른 것이 아니고 지금부터 근 100수십 년 전에 기차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을 때 캘리포니아 주에 금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동방에 사는 사람이 금을 캐려 마차를 타고 그 남방 길을 걸어서 그 골짜기로 들어왔던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 골짜기는 전연 사막지대입니다. 별로 비가 오지 않음으로 물이 없어서 그만 그 골짜기를 지나가다가 목말라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는 줄 알면서도 왜 그 길로 갑니까? 그곳이 이상한 것은 그 골짜기에는 신기루란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아마 신기루란 말은 다 들었을 줄 압니다. 아주 건조한 지대에 있는 것인데 저도 보지 못했다가 지나간 여름에 아주 건조한 텍사스 지방에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았는데 자동차 앞으로 먼 길에는 새파란 물 같은 것이 보이고 멀리 집이 있으며 호수나 그 집의 절반쯤 올라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지나갈 떼에 저기 가면 좋은 물이 있으니까 물 있는 곳을 따라가자고 하고는 달려가면 물은 없고 그 다음에도 없고, 그리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죽었습니다.
그와 같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입니다. 우리가 속아서 시험에 빠집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몇 가지로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할 것을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심히 약하다고 하는 사실이올시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 그 말이올시다. 시험에는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담대히 예수 님 앞에서“모든 사람이 주님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마는 정작 시험장소에 갔을 때에는 베드로는 그만 약해졌습니다.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죄에 대하여, 시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약할뿐더러 또한 사람은 그 육신 가운데 약한 부분이 있음과 같이, 가량 예를 들면 어떤 이는 특별히 폐(肺)가 약하고, 어떤 이는 심장이 약하고, 어떤 이는 위가 약한 것 같이,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어떤 사람은 특별히 이 방면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저 방면에 약해서 누구든지 약점 한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에서 같은 사람은 특별히 먹는 데 약점이 있는가 봅니다. 노아 같은 사람은 특별히 술 같은 것을 마시는 데 약점이 있었는가 봅니다. 솔로몬 같은 사람은 특히 정욕 방면에 약점이 있었는가 봅니다. 이와 같이 사람 사람마다 특별히 자기 약점이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사람마다 지옥에 내려가는 사닥다리가 각각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어떤 점에서는 조금 잘못하면 지옥으로 미끄러져서 내려가는 사다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방면에 특별히 약점이 있는가 스스로 살피어 특별히 조심해서 유혹에 들지 않도록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53.플라톤의 제자

플라톤의 제자 한 사람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다에 배를 띄워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한 번은 베를 타고 바다에 가서 놀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서 배가 다 깨어져 죽을 뻔하고 겨우 살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기 집이 바로 바닷가에 있었는데 바닷가로 향하는 창을 다 막고 담벽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친구가 와서 묻는 말이 좋은 바다의 경치를 내다 볼 수 있는 창문들을 왜 이렇게 다 막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이 하는 말이“내가 지난번 배를 타고 나갔다가 꼭 죽을 번하고 살아왔는데 내가 다음부터는 배타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창을 그냥 두었다가 어떤 따뜻한 봄날 바다 가 잔잔한 때에 이 창을 내다보면 내 마음속에 다시 이 바다를 나갈 생각이 나고 배를 탈 생각이 나게되면 다시 나갔다가 그 다음에 내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아예 내가 바다 가 보이는 이 창을 막은 것입니다”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유혹의 창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창이 있습니다. 이 창을 내다보면 우리가 언제 어떤 시험에 빠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약점, 시험의 창을 미리 알아서 아예 그 방면을 단단히 막아버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 갈 때에 언제든지 나를 유혹으로 인도 할 수 잇는 모든 것을 아예 미리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 친구를 멀리하세요,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한 책자가 있습니까? 그 책을 멀리하세요,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사업이 있습니까? 그 사업을 멀리하세요,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오락이 있습니까? 그 오락을 멀리하세요,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집이 있습니까? 그 집을 멀리하세요, 무엇이든지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것을 멀리해야 됩니다.

 

 
 



54.어떤 수도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수도사가 산에 가서 조용히 도를 닦다가 세상구경이 너무 간절하여 내려 왔다고 합니다. 내려와서는 맨 먼저 세상 사람들이 오락으로 즐기는 극장에 연극 구경을 가서 앉았다고 합니다. 연극 장에 가만히 들어가 앉아서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재미를 볼 때에 수도사의 마음 가운데“야 ! 거 세상 재미가 괜찮구나”하고 얼른 시험이 마음 가운데 들어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수도사인지라 스스로 마귀에게 이러한 문답을 했다고 합니다.“오 ! 이놈, 마귀야, 네가 아무리 사람을 잘 시험을 하기로 서니 어떻게 여러 십 년 수도한 나 같은 사람을 시험하느냐?”하고 마귀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대답하는 말이“당신 그렇게 여러 십 년 동안 수도를 했으면서 어찌하여 내 영토 속에 들어왔습니까?”연극 구경은 흔히 마귀의 영토입니다. 어떤 때는 동무가 마귀의 영토가 되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마귀의 영토를 가까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낚시질을 해 본 사람은 다 압니다. 낚시를 던지면 낚시 미끼주위로 뱅뱅 도는 물고기는 아무래도 위험합니다. 뭣 하려고 낚시 가까이, 미끼 가까이 뱅뱅 돌 필요가 있습니까? 마귀의 영토를 멀리하세요.
그러나 어떤 때에 아무리 이런 곳을 멀리하려고 하지만 부득이 한 사정으로 이런 곳에라도 있을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이것이 이렇게 위험한 것을 미리 깨달아서 그야말로 정신을 바싹 차려서 조심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까 조심하라>에서

 

 
 



55.그리스도인의 첫 서명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의 첫째 사명입니다. 목사님 사명도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장로의 사명도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집사의 사명도 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유년 부를 맡는 것도 이 복음을 전파해서 아이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에 대한 책임이 중한 것은 그 자식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로서의 의무가 많으나 첫째 되는 의무는 친구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들의 첫째 사명, 세상에 살아 있는 최대의 목적은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해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56.어느 목사

이런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의 북방 어느 장로교회에 어떤 목사가 처음으로 취임해서 시무 하는데 근 1년 동안 이 목사가 아무리 애쓰고 외칠지라도 그 교회가 너무 냉랭하고 1년이 다 지나가는데 단 한 사람도 새로이 나와서 믿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 목사가 혼자 많이 애쓰고 기도하다가 한 번은 당회가 모여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제가 이 교회에 와서 벌써 1년이 되었고 그 동안 제가 아무리 애쓰고 외칠지라도 조금도 우리 교회는 부흥의 빛이 없고 생명의 빛을 보고 구원을 얻는 심령이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그냥 이 교회에 목사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사면 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니까 여러 장로들이 깜짝 놀라면서“그거 무슨 말씀입니까? 목사님의 설교는 건덕상(建德上) 유익한 설교를 많이 하시고 우리가 은혜 많이 받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는 이렇게 다시 말 했습니다.“제 설교가 덕을 세운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 생각은 저만 사면할 것이 아니라 여러 장로님도 사면하여야 할 줄 압니다. 사실 여러 장로님도 주일날 아침에는 대부분 나오지만 저녁예배는 잘 안 나오는 줄 압니다. 삼일 기도회 같은 때는 더 적게나옵니다. 이왕 이렇게 목사 건 장로 건 책임을 못 감당할 바에는 공연히 맡아 있을 필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사면하고 새 사람들이 들어와서 맡아 일을 보면 이 교회는 부흥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가운데 제일 나이가 많은 원로 장로님에게“장로님, 이 교회의 장로가 되신 후 몇 사람이나 인도해서 새로 구원하신 일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그 장로가 머리를 숙이면서 하는 말이“목사님 잘 기억이 안 납니다.”그 다음 장로도“한 사람도 없습니다.”다 물어도 장로 가운데 한 사람도 개인 전도해서 구원한 사람은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그 때 그 목사가“자, 이것 보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말씀은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교회의 장로가 되어서 이 명령을 순복(順服)치 않으면은 어떻게 장로님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모든 장로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우리가 먼저 이 명령에 순종하자”고 의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아침 큰 상점의 주인이 되는 그 원로 장로가 상점에 나가자마자 이어 자기 아래에 말하자면 총무과장 비슷한 책임을 맡은 사람을 조용히 청해서 조금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들어오라고 말하였습니다. 10여 년 동안 자기와 같이 일 하면서 다른 이야기는 다 하면서도 한 번도 전도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이 장로가 이 청년을 보고하는 말이“나 참 대단히 미안한 말씀드릴 수밖에 없소”하고“내가 당신과 10여 년 동안 같이 일 하면서 모든 것은 다 이야기했으나 당신 영혼에 대해서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으니 이처럼 장로의 이름을 가지고 부끄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이제 깨달아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이렇게 장사하면서 돈 벌면 뭘 합니까? 우리 영혼을 구원함이 제일 중요한데 예수를 진실히 믿습니까?”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제가 어릴 때 다녔으나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장로의 간절한 권고에 못 이겨 먼저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하여 이 때부터 이 교회가 갑자기 새로운 은혜를 입어 온 교회가 큰 부흥의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의 첫째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서

 

 
 



57.죽어 가는 사람도 살리고 자기도 살게된 선다싱

인도에서 성자라고 이름을 듣던 선다싱의 전기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인도지방 히말라야 산맥 남록(南麓)의 산길을 어떤 추운 겨울 날 걸어갔습니다. 눈보라가 치고 날은 심히 추운데 눈길을 얼마 걸어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길 가에 넘어져서 죽은 모양입니다. 가만히 들어다 보니까 손도 발도 얼굴도 다 얼었는데 가슴을 짚어 보니까 아직 온기가 있고 숨도 아직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길 가로 지나갈 때에 신다싱이 그 사람을 보고하는 말이“이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아주 얼어 죽어버리겠으니 우리가 이 사람을 업고서 같이 가봅시다”하였습니다. 지나가든 사람이“나도 죽게 되었는데 언제 다른 사람 돌아볼 새가 있습니까?”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고 합니다.
선다싱은 차마 그 사람을 그냥 들 수 없어서 약한 몸이지만 거이 얼어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그 눈보라 치는 산길을 걸어서 고개를 넘어가되 몇 번 넘어지면서 그 사람과 그야말로 싸우면서 그 고개를 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어죽지 아니하고 그 사람도 힘쓰고 자기도 힘쓰는 가운데 피차의 온기가 나서 두 사람이 겨우 생명을 보존해서 그 산을 거이 다 넘어갔습니다.
거이 다 넘어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또 하나 길가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손도 얼고 발도 얼고 다 얼어서 아주 죽었는데 가만히 의복 입은 것을 보니까 바로 얼마 전에 혼자 살겠다고 먼저 지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던 선다싱은 죽어 가는 사람을 구원했을 뿐더러 자기 생명도 구원하였습니다. 남이야 죽거나 말거나 자기 혼자 살겠다고 지나갔던 다른 사람은 자기 생명도 구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꼭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하늘 길가에는 죽어서 넘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서 같이 하늘 길을 가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 사람들을 구원할뿐더러 자기도 구원받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나 혼자만 믿고 지나가려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세상의 무서운 유혹의 바람과 여러 가지 시험에 얼어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애쓰면 자연히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58.어느 목사의 일기

몇 십 년 전에 스코틀랜드 앤워드라는 도시에서 한 목사가 자기의 일기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일기를 읽고 지금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은데 그 일기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아 ! 앤워드에 있는 영혼들을 내가 하나님 오른손 곁에서 만나게 되는 날 임마누엘의 땅에서 나의 하늘은 두 하늘이 될 것이다”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전도하고 목회하고 기르든 앤워드의 정든 심령 하나 하나를 하나님 오른손 곁에 가서 만나게 될 날을 생각하면 그는 너무 기뻐서 천당에 한번 가지 않고서도 두 번 간 것보다 더 기쁘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오늘 바꾸어서 말한다고 하면 과연 오늘 서울에 있는 우리 영락교회에 출입하든 여러분의 영혼 하나 하나를 제가 이 다음 하나님의 오른손 옆에 가서 만나게 되는 날이면 임마누엘의 땅에서 제 하늘은 두 하늘이 되고도 남을 줄 압니다. 이에서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3천 명에게 전도를 한 후에 하늘 나라에 가서 3천명의 구원된 영혼을 만날 때에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하세요. 베드로처럼 3천명은 구원하지 못하겠지만, 자기의 형 베드로를 예수 님께로 인도해 온 안드레가 하나님의 오른손 옆에 가서 자기 형 베드로를 만날 때 안드레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59.무디를 구원한 킴볼

무디 같은 사람은 수십만 명의 영혼을 구원한 줄 압니다. 그이가 많은 영혼을 하나님 앞에 가서 만날 때 그의 마음의 기쁨은 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본래 무디가 믿음이 없이 어떤 양화점에서 양화 직공으로 있을 때에 어떤 잘 믿는 무명 청년 하나가 아무래도 저 청년의 장래가 유망한데 내가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 양화점에 들어갔습니다.“여보시오 양화만 만들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 나와서 주의 일 좀하고 잘 믿고 구원의 길을 갑시다.”고 잘 권면해서 그 사람을 구원한 킴볼 ! 이 사람이 하나님 오른손 옆에 가서 자기의 인도로 구원을 받은 무디를 만날 때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60.왈츠의 그림

아마 여러분은 왈츠라고 하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유명한 그림을 거이 다 보신 줄 압니다. 둥근 지구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홀로 외롭게 앉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맸습니다. 보지 못합니다. 그 가슴에 비파를 안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비파의 줄이 거이 다 끊어wu 있습니다. 오직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만 반짝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우주에 외로이 홀로 앉아 눈을 싸맸으니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남은 줄 하나만 가지고 이 여자가 아름다운 음악을 타는 것입니다. 그 줄은 소망의 줄이올시다. 그 별은 소망의 별이올시다. 이 그림이 많은 사람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집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믿었던 줄이 끊어집니다. 하지마는 소망의 줄 하나만 우리가 그냥 붙잡을 수 있다고 하면 그 소망의 줄 하나로써 능이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 갈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에는 소망을 가리켜서 영혼의 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의 심령이 풍파 높은 대해를 지나갈 때에 어떤 때에는 큰 풍파를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 생명의 닻줄을 깊은 바다 속에 붙잡아 매었다고 한다면 우리 풍파가 높다고 할지라도 우리 심령의 배는 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깊은 곳에 매인 닻줄은 소망의 닻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심령의 생활에 있어서 이 소망의 줄이 끊어진다면 어떠한 유혹의 바람과 시험의 풍파에 휩쓸려가고 우리의 생활이 암초에 부딪쳐서 파선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야 하고 또한 소망이 있어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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