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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사람에 따라 다른 중생의 경험
중생의 경험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경험이 갑자기 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경험을 잘 압니다. 아무 때 회개하고, 그때부터 영생 얻었다고 잘 압니다. 가령 사도 바울 같은 이, 다메섹에 가다가 갑자기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또 빌립보에서 간수 같은 이, 사도 바울을 만나서“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까?”고 묻고 이에 대해“예수를 믿으라”는 권면에 의하여 구원을 얻은 경험은 갑자기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이 경함이 천천히 옵니다.
여기 열두 사도가 믿은 경험은 갑자기 온 것 같지 않습니다. 예수 님과 접촉함에 따라서 천천히 온 것 같습니다. 여기 오늘날도 특별히 믿는 가정에서 자라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우고 점점 종교 교육에 의해서 자라난 사람은 이 경험이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언제 내가 이런 경험 얻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유에 말하면 가령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됩니다. 점점 날개도 자라고 수염도 나고 해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됩니다. 그러나 나비가 된 후에는 한 번은 아무래도 그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옵니다. 아무리 천천히 되지만 나비가 되면 그 고치 구멍을 뚫고 나와서 맑은 공기를 먹으며 공중에 날아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가정에서 자란 청년들도 번데기가 천천히 변해서 나비가 되어서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오듯이 새 사람으로 변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죄악 가운데 있다가 갑자기 되지는 않지만 한 번은 온전히 생활이 변하는 그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제 경험을 말해서 미안하지만 제가 9세부터 믿었습니다 믿는 소학교, 믿는 중학교, 믿는 대학교를 다니고 제 경험을 볼지라도 종교교육이 점점 장성한 것을 압니다.
한 번은 제가 22세 때에 구미포에 가서 어떤 달밤에 홀로 산보하다가 그날 저녁에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그날 저녁 모래 위에 꿇어앉아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든 사건을 내 일생을 통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온전히 여러분의 일생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의탁한 그런 경험이 있는 분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었습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생의 확신>에서
135.어느 목사의 죽음 앞에서의 화해
제가 어느 곳 누구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제가 잘 아는 곳에 잘 아는 목사님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교회문제로 노회에 두 파가 갈려서 그 두 파가 오랫동안 분규하고 어지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려다가 그 한 파의 수령 격되는 분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목사가 하나님을 대면할 준비를 할 때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기가 동역 하는 어떤 분에 대해서 마음 가운데에 담을 쌓고 미워하는 마음이 양심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그 목사를 청해서 자기 잘못을 다 말하자 그 목사도 자기 잘못을 서로 말하고 서로 화목하고 그 후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줄 알고 매일 매일 생활한다면 성경의 말씀과 같이 분을 내어도 그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고 그 이튿날까지 오래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줄 안다고 할 것이면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일 하지 않고 먼저 기도하고 성경 읽었을 줄 압니다. 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가족 기도회를 가졌을 줄 압니다. 전에 내가 들으니까, 개천에 계시던 황 목사님은 내일이면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오늘 자기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제직도 다 함께 모이게 한 다음 나는 내일 이 세상을 떠날 하나님의 지시가 있다고 하며 우리가 다 같이 예배 드리자고 하면서 다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분은 예외로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알고 가족 기도회와 제직 기도회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로 안다면 아무리 분주해도 마지막 날 기도회를 가질 것입니다.
136.요한 웨슬레 목사
내가 마지막 날인 줄 알고 그날이 주일이라고 하면 아무리 세상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다 제쳐놓고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들일 줄 압니다. 또 주님 앞에 예배할 때에 헌금하는 것이 있다면 또 특별히 일 년 동안을 감사하는 감사절이라고 하면 마지막 헌금이니까 정성을 다해서 할 줄 압니다. 어떤 여인이 요한 웨슬레 목사에게 와서 묻기를“만일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오늘이 마지막 날 이라고 할 것이면 무엇을 하겠습니까?”하였습니다. 이 목사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자매 님 내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지금 오늘 내가 하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을 할 것 박에 없습니다”하니까 이 여인이 놀랐다고 합니다. 마지막 날이라고 할 것이면 다른 것을 다 치우고 조용히 집에서 기도하든지 하리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다가 내가 오늘 맡은 이 일박에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기 때문입니다.
137.어떤 권사 님
제가 바로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토요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고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이제 토요일인데 여덟 시에 우리 권사 님 중에 한 분이 환갑이라고 청하니 마지막 날이라도 환갑에 갈 수박에 없습니다. 그 다음 열두 시에는 우리 경로원 창립 기념일로 꼭 오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마지막 날이면 창립 기념에 더 가야겠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해야 할 일이고 오후 두 시에는 우리 교회 장로님의 아들 결혼식이 있는데 아버지도 없으니 꼭 가서 결혼식을 해 주어야겠어요.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며 스스로 돌아 볼 때 내가 마지막날을 당해도 내가 할 의무를 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제 마음 가운데 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사는 지혜로운 방법은 우리가 무슨 일을 맡았든지 충실히 행하면 우리의 생활이 바르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줄 압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매일 매일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한다고 할 것이면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른다고 하여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138.영국 청교도의 국회 의원
이런 이야기를 오래 전에 책에서 읽었습니다. 청교도 시대 영국에서 의회가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 나라 일을 의논하는데 그 때는 신앙이 좋은 영국 사회인지라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재림하지 않을까 하는 말세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회에 모여 의논하는 가운데 갑자기 천지가 변하고 하늘에 이상한 징조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되자 여기에 모였던 여러 의원들의 징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지 모르겠는데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우리가 이렇게 국회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될 수 있는가 어서 폐회하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어떤 국회 의원이 말했습니다. 그리자 어떤 청교도 국회 의원 한 사람이 일어서면서“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시간에 주님이 재림한다고 할 것이면, 곧 주님께서 우리 국회에 임한다고 할 것이면, 우리 국회 의원이 여기 그대로 앉아서 여러 수 천 수 만 사람을 대신해서 하는 이 의무를 충성스럽게 담당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볼 때에 주님께서 더 기뻐하실 줄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 더 가까우므로 우리의 의무를 더 잘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더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면>에서
139.성 프랜시스의 감사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40일 동안이나 풍란을 만나서 말할 수 없이 피로하고 약한 가운데서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적 세계 혹은 환경은 우리가 쓰는 안경 빛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은 검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분홍빛 명랑한 빛깔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은 아름다워 보입니다.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면 보통 사람에게는 검게 보이는 것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검은 구름에도 햇빛이 비치면 무지개로 보입니다. 근심의 안개, 슬픔의 구름에도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면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하여집니다. 성 프랜시스의 「태양의 노래」를 읽어보면 이 프랜시스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한 노래가 있습니다. 해를 위해 감사하고 달을 위해 감사하고 뭇 별들을 위해 감사하고 산천 초목을 위해 감사하고 형제자매들 위해 감사하고 모든 것을 다 감사하다가 마지막에는 죽음까지 자기 자매 라고 부르며‘내 자매의 죽음’을 위해 감사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죽음도 주안에서의 죽음은 감사로 변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에서
140.하나님의 사랑의 호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장 1617)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가 다 어렸을 적부터 기억하는 말씀이올시다. 간단한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기독교의 중심 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가운데 하나님이란 말, 사랑이라는 말, 독생자를 보내셨단 말, 믿음, 또 영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4부분으로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이름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부분을「하나님의 사랑의 호수」라 이름지었습니다. 여러분,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천지라는 큰 호수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호수 다음에 나오는「독생자를 주셨으니」하는 이 구절은 이 호수에서 흘려 내려오는「하나님의 사랑의 강」이요,「누구든지 저를 믿으면」하는 이 부분은「사랑의 물을 떠서 마실 수 있는 그릇」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도 그릇이 있어서 그 물을 마셔야 우리의 기갈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릇은「믿음」입니다.「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넷째 부분은「사랑의 결과」입니다.
「큰사랑의 호수」에서 흘러내리는「사랑의 강물」을 사랑의 그릇인 믿음으로서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이렇게 해석을 한 학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141.회개와 보상
상고사 가운데 민족들이 유럽을 점령해서 사방으로 흩어질 때 오스트로 고드라고 하는 족속이 이태리 평원을 점령하고 오스트로 왕국을 건설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왕 가운데에 데오도링이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삼십여 년 동안 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또 여러 가지로 보아 좋은 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혈기를 못 이겨서 무죄한 두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보에디오스 또 한 사람은 디메키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비참하게 목 달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 왕 자기가 실수 한 것을 알고 항상 후회하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늘 후회했습니다.
어떤 날 저녁에 특별히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는데 그날 저녁 특히 요리 인이 생선으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왕이 생선을 볼 때 생선의 빨간 눈알을 들여다보니, 거기에서 자기가 죽인 사람의 눈알이 보였습니다. 생선의 아가리에 날카로운 이빨을 볼 때 마치 자기가 죽인 두 사람이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어나오는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이 데오도링 왕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불편해서 저녁을 먹지 못하겠다고 하고 자기 침상에 돌아가서 누웠습니다. 얼마나 무섭든지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삼일 후에 죽었습
니다.
죄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 죄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죄를 단순히 무서워한다고 이것이 참 회개는 아닙니다.
142.열매 있는 회개
참 회개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55장 7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했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죄를 깨달아 알고 후회하고 무서워할뿐더러 죄가 이렇게 무서우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음을 돌이켜서 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죄가 무서운 줄 깨달아서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서 마음을 돌이켜서 주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 어떤 청년이 오는 주일날 공일인데 청량리 요리점에 가서 놀기나 하겠다고 나간다고 합시다 나가는데 사방에서 종소리가 울립니다. 아 이것 주일날인데 이렇게 다 예수께 나와 예배하라고 종소리가 나는데 내가 이렇게 딴 방향으로 가서 되나 하여 그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그 때에 그 청년 마음이 돌아섰다면 그 청년의 몸까지 돌아설 것입니다. 몸까지 온전히 돌이켜서 자기가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서 반대방향으로 오게 될 때에 그것이 온전히 회개입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18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180도로 돌아선다고 하면 몸도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회개에는 행동 곧 실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143 무디 선생 일화
미국의 유명한 무디 목사의 전기 가운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목사가 어떤 곳에 가서 부흥회 할 때 어느 저녁 어떤 청년이 와서 말하기를“제가 시내 어떤 상점에서 점원으로 있는데 불행히도 한달 전에 돈 1500불 훔쳐다가 다 쓰고 지금 950불밖에 없는데 이번 이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큰 죄를 지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꼭 이 돈을 갚아 주어야 되겠는데 남은 것이 950불 박게 없고 채울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남은 것 950불을 꼭 쓰지 않고 이것을 가지고 장사를 잘해서 1500불이 된 다음에 꼭 갖다 갚으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무디 선생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하는 말이 내 생각 같아서는 그 도적질한 돈을 가지고 장사한대야 장사가 잘될 것 같지 아느니 그 남은 것을 가지고 가서 갚아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 하는 말이 이것을 가지고 가야 어떻게 부끄러워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가서 사정을 다 말하고 갚아 주자는 것입니다. 그 청년을 대리고 가서 그 사정을 다 말하고 청년의 수중에 남은 돈 950불을 갚아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놀라서 눈이 둥글 해 지면서 입을 다물지를 못 합니다. 그 주인은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 청년은 그런 청년인 줄 몰랐는데 훔쳤다고 하는 사실에 놀라고,
둘째는 이 청년이 회개하고 가져온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면서 이 주인 하는 말이 이 청년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이전보다 이제는 더 신용할 수 있고 또 모든 죄 다 용서하고 이것도 감사히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미국에만 잇는 것은 아닙니다.
144.나의 간증
제 일생에서도 이런 일을 가지고 와서 의논하고 갚아 준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정신적인 면,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 내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것 있으면 명예 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지 갚아 주려고 힘쓰는 면이 없으면 참된 회개는 아닙니다.
바로 20년 전인가 봅니다. 신문을 보니까 방탕하게 살던 청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 후에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해서 많은 죄악을 쌓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갚을 수 있을까 해서 생각한 나머지 특별히 걸인을 구제하는 사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종의 사회적 보상입니다.
사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에 인한 결과는 나만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나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도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 다 갚을래 야 갚을 길 없습니다.
145.톨스토이의《부활》의 주인공 이야기
여러분 톨스토이의《부활》이란 책을 읽은 일이 있을 줄 압니다. 거기 어떤 귀족 청년이 자기 숙모네 집에 있는 카추사라는 순진한 여자를 유인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가련한 여자는 그 귀족 청년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마지막에는 점점 떨어져서 창녀가 되고 나중에는 살인과 강도 혐의를 받고 어떤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무심하게 재판정에 배심원이 되어서 들어가 보니까 어떤 여자가 재판을 받는데 가만히 보니까 몇 10년 전에 자기가 정조를 유린했던 카추사라는 여자입니다. 이 청년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의 일시적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여자의 일생을 그르쳤습니다.
이 청년은 무엇을 해서든지 갚으려고 애써보고 그 가운데서 좋은 사람 만들어 보려고 애쓰면서 시베리아까지 따라갔었으나 헛되게 돌아옵니다. 그런고로 죄는 무섭습니다.
146.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가게 된 동기
특별히 청년 시대에 죄를 삼가야 할 것은 청년 시대에 죄를 잘못 지으면 나만 망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일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청년이 그 후에 회개해서 그 영혼이 구원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끼친 죄의 결과는 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 까지는 갚아 주어야 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선교사시요, 철학 박사, 신학 박사, 음악 박사, 의학 박사십니다.그는 아프리카 밀림지대에 가서 그 부인과 같이 흑인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수술을 해주고 흑인과 같이 살면서 그 일생을 그 흑인에게 선교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슈바이처가 독일 안에서 유명한 대학 교수 자리를 다 내놓고 아프리카로 간 동기 가운데 중요한 동기가 무엇인가 아십니까?
한번은 공원을 지나갈 때에 거기 흑인의 동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흑인의 동상을 볼 때 과거 100년간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에게 지은 죄악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들을 무지하다고 잡아다가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현지에 가서는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짐승처럼 대우했습니다. 착취해서 모은 돈으로 자기네 나라에서 잘 살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과거 백년동안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에게 지은 죄를 만 분지 일이라도 보상할 수 있을까?’백인들이 저지른 죄악을 갚기 위해서 슈파이처는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이것도 사회적 보상입니다.
참 회개에는 열매가 있고 실행이 따릅니다. 어떤 목사님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어떤 작은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도무지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아침 장로 한 분이 일어나서 하는 말씀이“이번 부흥회에 은혜가 없는 것은 모두 다 제 죄인 줄 압니다. 제가 이 교회의 장로라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어떤 직분을 받은 분하고 한 교회에 있으면서 담을 쌓고 서로 외면하고 지냈습니다. 제가 이제 이 죄를 자복(自服)합니다”하면서 그 사람에게 가서 자기 잘못을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 교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참 회개는 열매가 있습니다. <회개의 보상>에서
146.인생의 연대성
오늘날과 같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통신망 교통망이 극히 발전된 이러한 세계에는 이 인간 생활의 연대성이란 일 국부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서로 연계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면 1956년 1월 13일 저녁 방산 시장에서 일어난 화재를 생각하여 봅시다. 신문지상을 본대로 말하면 어떤 노인이 술에 취하서 촛불을 켜놓고 자다가 부주의한 탓으로 그만 촛불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가련하게도 나이 많은 노인은 그 불에 자기도 타죽고 말았으니 그 얼마나 비참한 죽음입니까. 그러나 그 비참(悲慘)은 그 노인 한 분에게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 한 분의 실수로 말미암아 시장 안에 있던 물건과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노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2백 세대 이상이 그 화재로 말미암아 많은 손해를 보고 한지에 나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 생활이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뗄래 야 뗄 수 없습니다.
저 태신호(太信號) 사건을 보십시오. 신문지상에 보도된 대로 갑자기 3등 객실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배에는 65명의 3등 선객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이 일어나게 됨으로 선장은 명령해서 하나 박게 없는 3등 실 문을 밀폐하였다 고 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에는 그렇게 해서 다른 객실의 연소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그렇게 한 것으로 압니다. 하여간 그 때에 그의 머리가 잘못 돌아감으로서 65명의 선객이 질식해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일시적 잘못 판단이 그 배를 타고 사랑하는 고향에 사랑하는 양친을 뵈려고 가던 사람, 친척집에 가던 사람, 장사하려고 집을 떠난 65명의 생명이 일순간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인간 생활이란 이렇게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다 한 배에 타고 항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배 가운데에 탄 어떤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함으로써 잘못 된다면 그 배에 탔던 선객 전원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생각할 때 내 생활을 얼마나 조심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상 생활에도 관계되는 까닭입니다. 병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전염병으로 앓게되면 나 혼자만 앓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좋지 못한 병이면 내 가족에게 미치고 우리 이웃에게 마지막에는 온 동네에 전염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제1차 대전 후에 소위 서반아(西班牙) 감기라고 하는 것이 어떤 한 사람에 의하여 감연 유행되었는데 이상히도 이 독 감기가 온 세상에 다 퍼져 우리 한국에까지 와서 그 때 우리 학교에 다닐 때에 휴강하고 공장이 폐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독감으로 죽은 사람이 제1차 대전 때 죽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인간 생활이란 이렇게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악도 역시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화재의 이야기를 했지만 1930년 대 바로 음력 세밑 때, 신의주 채소거리에서 큰불이 일어나서 80여 세대가 전소를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에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가 아십니까?
그 때 신문 보도로 지금까지 기억되는 대로는 어떤 가난한 부부가 촌에서 신의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 가난한 부부는 이사와서 그저 안 먹고 안 입고 아끼고 어떻든지 힘을 다해서 부지런히 사업하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노력하기를 5, 6년 동안 하니까 그때 돈으로 여러 만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이상한 마음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전에 없던 유혹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옷도 깨끗이 입을 마음이 생기고 집도 좀 크게 짓고 살게되고 부인은 값비싼 치마 저고리와 화장품을 사들이게 되었고 남편은 전에 가지 않았던 술집을 점점 드나들게 되고 마지막에는 어떤 첩까지도 얻게되었다 합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는 저녁마다 남자는 항상 자기 집에 있지 아니하고 더욱이 음력 명절 때가 되어도 자기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촌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도회지에 들어와서 같이 입지 않고 먹지 않고 노력을 해서 돈 좀 벌게되니까 남자는 그 돈을 가지고 그러한 재미만 보게되니 그 여자의 마음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날 저녁에 신문지상에 보도된 대로 보면 부인이 밤새도록 이제나 돌아올까 조금 있다 돌아올까 고대하여 한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음으로‘옜다 돈이 있기에 그런 방탕한 일을 하지 돈이 없으면 그런 짓을 하겠는가? 이 집을 불사르고 나도 불에 타 죽겠다’이렇게 결심하고 그만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그 집만 탄 것 아닙니다. 그 집과 아무 상관없는 80여 세대가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남자의 허랑 방탕한 죄와 음란한 죄가 여자의 질투와 분노의 죄로 변했습니다. 이것을 소위‘에네르기(에너지) 변화’라고 합니다. 그 질투의 불이 실지 화재로 변했습니다. 그 실지 화재는 80여 세대의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까지 못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죄의 연대성이라고 합니다.
147.두 푼 들어 한푼 짜리 돈을 땜질한 노인
사회를 위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요, 민족과 국가를 위하는 것도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인데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너무 많습니다.
우리 옛말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 엽전(葉錢)이 있을 때인데 엽전에는 구멍이 있어서 잘 못하면 두 동강이 나기 쉽습니다. 어떤 노인이 한푼 짜리 엽전을 잘 못 다르다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땔 수밖에 없어서 땜하는 사람더러 때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땜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좀 비용이 들것인데요, 두 품만 주십시오”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가만 생각하다가“그래도 때어 주십시오”하고 말하면서 엽전 두 푼을 주고 엽전 한 푼을 때 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딸들이 그 말을 듣고“아버지 그 무슨 일을 그렇게 하셨습니까? 한 푼 아끼려고 두 푼을 주시다니 요?”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버지 되는 노인이 하는 말이“애들아 그런 것이 아니다. 부러진 이 엽전을 그냥 내버려두면 한푼은 아주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 부러진 한푼 짜리 엽전을 두 푼 주고라도 때면 비록 나는 한 푼을 손해 볼지라도 우리 나라로 볼 때에는 한 푼의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배울 진리가 많은 줄 압니다. 즉 우리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적은 것만 보지 말고 또 눈앞만 보지 말고 큰 민족 전체, 국가 전체를 보고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인간 생활과 연대성>에서
148.독일 화가 스턴벅이 그린 성화
아마 여러분 독일의 유명한 화가 스턴벅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었을 줄 믿습니다. 그 때 보통 유명한 화가면 성화를 한 장 그려야 화가로서의 명망(名望)을 얻는데 스턴벅도 그런 생각 가운데서 한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에 못 박히는 모습을 그릴 결심을 했습니다. 그 결심을 하고 자기가 아는 데로 자기가 듣는 데로 또 성경에 있는 데로 모든 배경을 연구하고 그 때 있던 사람들을 성경에서 자세히 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절반쯤을 그린 후에 한 번은 거리에 나가 다니다가 어떤 얌전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 여자를 그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여자를 따라가서 내가 당신을 꼭 그리고 싶은데 당신이 내 모델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 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쾌히 승낙해서 그는 그 여자를 자기 방에 대리다 앉혀 놓고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다가 채 그리지 못하고 그대로 있고 한 편에서는 그 여자의 얼굴을 그리는 중입니다. 이 여자는 전혀 그리스도의 종교에 대해서는 모르는 집시 여자인데 가만히 이 십자가 그림을 보더니 이 여자가“저 사람은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니까 필경 죄를 많이 지은 모양이군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이 깜짝 놀라서“그런 것이 아니고 이 분은 죄가 없는 사람이올시다. 사실 이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못 박힌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듣더니“정말 그렇다면 그 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는 만민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지만 사실 예수 님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에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질문이 자꾸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왔습니다.‘그가 과연 내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나?’를 생각하는 가운데 성신의 크신 은혜를 받아서 예수 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만민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뿐더러 자기의 죄를 위해서 자기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깨닫고 그 다음부터는 그 여자를 그리던 것을 그만두고 채 마치지 못한 그림 앞에서 그 그림을 그릴 때마다 먼저 그림 앞에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어떻든지 내 죄를 대속(代贖)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르게 그리게 하여주소서”라고 간구(懇求)하며 눈물로써 그 그림을 마쳤습니다.
149.성화에 감동 받아 헌신한 진젠돌프 백작
그 이후 이 그림이 어떤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구경하려 옵니다. 그 때 독일의 젊은 백작 중의 한 사람이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보다가 어떤 구석에서 예수 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성화를 많이 보았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무심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님의 얼굴이 말하자면 그 젊은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서 물러 갈래야 물러갈 수가 없어서 오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하는 글자를 썼는데 그 글자가 예수 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 그 자리에 앉아서“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생을 당하시고 죽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습니까?”하고 온전히 그 몸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이 분이 우리가 잘 기억하는 모라비안 교회의 진젠돌프라는 사람이올시다. 18세기에 많은 피난민을 모아 가지고 그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며 그 사람들과 같이 교회를 조직하여 몇 사람 안되지만 온 천하에 선교운동과 경건 운동을 일으킨 유명한 백작 진젠돌프라는 사람입니다.
진젠돌프만이 아니올시다. 어떤 순교자의 생활이나 순교자까지의 영광을 받지 못했지마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가만히 더듬어 보세요. 그 가슴속에 그 사람의 생활의 깊은 동기가 어디서 우러나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올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모든 사람을 권면(勸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에서
150.성 안토니의 의로운 분노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의분에 이기지 못하여 주의 일을 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도원 제도의 원조가 된다는 성 안토니의 전기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돈 많은 부잣집에 태어났습니다. 또 지위도 상당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소년 때 한 번은 성경을 펴서 읽어 내려가다가 마태복음 19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어떤 돈 많은 부자가 예수 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비결을 묻는 기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 님께서『네가 이 모든 십 계명을 알지 아니하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이런 모든 계명을 말하시면서『 네가 이 모든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니냐?』고 말하셨습니다. 그는『그 계명은 내가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그러면 좋다 네가 이제 한가지 할 것이 있는데 가서 네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라 그리고 나를 따라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 청년이 예수 님의 이 말씀을 듣고 돈이 많은 까닭에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토니는 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 님께서 이 청년에게 하시는 말씀이 곧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읽다가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은 그 부자처럼 돈이 많은 까닭에 그대로 하지 못하고 나도 근심하며 물러가야 되느냐?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 격분이 일어났습니다.‘그 때에 그 부자는 예수 님 말씀대로 순종을 하지 못하였지마는 오늘 나는 이대로 순종하겠다’그래서 성경을 덮어놓고 자기 집에 갔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다 구제하고 자기 누이동생에게 먹을 것을 좀 주고 자기는 아무 것도 없이 혈혈단신이 되어서 온전히 주님 앞에 몸바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의 그 생활도 말하자면 의로운 분노 가운데서 그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151.루터의 의분
바로 지난 10월 31일 삼일 기도회 저녁에 제가 말하기를 10월 31일은 우리 종교개혁의 기념일인 것을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생활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는 공부도 많이 하고 그 다음에 수도원에 들어갔고 신부로 안수를 받은 후에 학교에서 일년 가르치면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때 천주교에서 하는 일이 성경의 교훈과 성경의 모든 원리와 틀리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루터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주교에서 하는 일이 성경의 교훈과 틀리는 것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틀린 것을 깨달은 것만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자가 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봉화를 듣게 되었나하면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때 교황이 특히 돈을 쓸 일이 있어 그 때 전 기독교 세계에 속죄 표를 팔면서 속죄 표를 사면 누구든지 죄를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며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은 비싼 속죄 표를 사야되고 적은 죄를 지은 사람은 싼 소죄 표를 사도 좋다고 속죄 표를 파는데 산 사람의 죄만 용서받기 위해 속죄 표를 파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죄까지 위해 속죄 표를 팔았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연옥이라는 것을 믿어서 믿음이 좀 약한 사람은 죽으면 낙원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 가 있는데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을 빨리 낙원으로 올려 보내는 방법은 이 속죄 표를 사면 낙원으로 갈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속죄 표를 팔았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선전하는 사람은 어떻게 선전했는가 하면“그저 당신 네 들 믿음이 별로 없는 부모나 세상 떠난 사람이 있으면 이 속죄 표만 한 장 사면 그 돈이 연보 궤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연옥에 있던 부모의 혼이 빨리 낙원으로 올라갑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속죄 표를 사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본 루터는 전부터 깨달아 알던 진리가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는 격분했습니다. 이럴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도 변할 수가 있겠느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예배당에다 95개 조항의 문제를 내 걸고 항쟁을 했습니다. 의분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의분>에서
152.에딘바라의 충견 비
사도 바울이 노년에 쓴 편지 가운데 여러 가지 우리에게 인상 깊은 말이 많지마는 디모데에게「너는 속히 내게 오라」고 하면서 데마는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데마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열심히 도와주고 따라다닌 줄 압니다. 그래서 충성된 제자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마는 얼마 후에 노 선생을 버리고 다른 데로 달아났습니다.
충성에는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요컨대 얼마나 오래 충성하느냐 그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스코틀랜드에 있는 에딘바라 라고 하는 어떤 교회 묘지에는 개의 무덤이 있고 그 개의 무덤 앞에는 충견 비, 즉 충성된 개의 비가 섰다고 합니다. 거기에 어떠한 사실이 기록되었나 하면 어떤 사람이 좋은 개를 길렀는데 그 주인이 죽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상여로 시체를 메다가 묘지에 장사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지만 이 개만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끌고 오려고 해도 이 개는 그 주인의 무덤에서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다고 합니다. 이 개는 그 때부터 십 사 년 동안을 즉, 죽을 때까지 주인의 무덤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이런 개는 우리 사람보다 났습니다.
153.시간의 시금석
충성은 시간의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얼마 동안 지나 보아야 충성된 사람을 알 수 잇습니다.
교회의 일을 보는 것도 몇 달 몇 해 동안은 열심히 하기 쉽습니다. 그래나 20년, 30년, 40년 꾸준히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데는 시간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2년 전쯤 제가 어떤 잡지를 보니까 어떤 고등학교의 건물 짓는데 그 건물의 이름을 그 학교 이사장이나 교장의 이름으로 짓지 않고 그 학교 사찰의 이름을 붙여서 짓는 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니까 그 사람은 30년간 그 학교에서 하루 같이 충성되게 일을 해서 그 사람의 이름으로 집을 짓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충성하려고 하면 우리가 처음에 먹은 그 마음을 꾸준히 끝까지 지켜 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1056,12,2)에 이 창훈이라는 학생이 마라돈 경주에서 제4위를 얻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다 기뻐하신 줄 압니다. 지난번에 1등을 한 인간 기관차라 하는 이름까지 들은 자도백을 이기고 네 번째가 되었습니다. 그보다도 더 통쾌한 것은 이 창훈군이 마지막 100미터 전에서 자기에 앞섰던 일본 선수 가와시마 선수를 이기고 4위가 되었다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전쟁에는 최후의 오 분간이 제일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충성에는 오 분간이 필요합니다. 설사 아무 실수 없이 잘해 올지라도 마지막에 가서 실패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참된 충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은 환경의 시금석을 이겨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녹음방초(綠陰芳草) 승화(昇華)시에는 우리가 송죽의 절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게 될 때에는 송죽의 참 절개를 압니다. 옛 글에도 나라가 어지러워 질 때에 충성스런 재상(宰相)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할 때에 어진 아내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충성이 언제 나타나느냐고 하면 어려운 환난이 있을 때 핍박이 올 때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어떤 환경을 당하던지 꾸준히 자기의 책임을 지켜나가는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154.폼페이 최후의 그림
영국 런던 워커 미술관에 콘트러라는 사람의 충성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옛날 폼페이라는 로마의 도시가 베스비어스 화산이 폭발되어서 화산재로써 전부 묻혀 전멸을 당하는 그런 비참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 때의 광경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올시다. 화산재와 불이 그냥 눈과 같이 서리 와 같이 폼페이 성안에 내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얻으려고 성문으로 그냥 조수와 같이 밀려 나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문을 지키는 수문(守門)의 책임을 맡은 군인이 한 사람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로마 사람이올시다. 그 성문을 지키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내려오는 재를 피해 성문을 자꾸만 나가지마는 이 군인만은 자기의 창을 잡고 아무리 눈과 같이 재가 내리고 불이 내려도 꼼짝하지 않고 그냥 서서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이 서마나 교회에 이 목사를 보낸 때는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마는 그 교회 목사는 폴리갑이라는 목사인 것 같습니다. 폴리갑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를 봉사하면서 86세까지 살았는데 그때 로마 정부로부터 기독교를 탄압하라는 명령이 내려 탄압을 받을 때 86세의 노인을 관리가 끌어다 놓고서 이제라도 네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주겠지마는 그냥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하면 죽일 수박에 없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때에 조용히 폴리갑 노 목사는 말하기를“86년이라는 긴 세월을 내가 우리 주님을 섬겼는데 주님께서는 한번도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내 왕을 훼방할 수가 있겠소?”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충성은 작은 일로 시작됩니다. 충성은 끝까지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자기의 생명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충성이 결코 결여된 민족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국 사를 읽어 볼 떼에는 자연히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백제의 계백 장군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려 역사를 읽을 때는 포은 정몽주의 절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이조에 들어와 볼지라도 단종 시절의 성삼문 이하 사육신의 그 굳은 절개, 임진란을 통해서 이순신 장군의 충의, 혹은 한 말에 와서 민충 정공, 혹은 이준 열사 혹은 안중근 선생 같은 충성의 역사가 우리 한말의 역사를 빛나게 단장해 줍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가 비록 역사는 오래지 않지만 일본 제정 시대의 핍박을 비롯해서 38선 6·25로 말미암아 서 그야말로 유명, 무명의 말할 수 없이 수많은 순교자들이 자기의 생명을 기쁘게 바쳐서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세계적으로 찬란하게 빛내는 것을 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에서
155.파사의 농부와 금강석 이야기
옛날 파사 나라에 알리마켈이라는 큰 부자이며 큰 농사를 하는 농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농부는 큰 농장도 있고 가축도 많고 과수원도 있고 아주 부족한 것이 없이 만족하게 잘 사는 큰 부자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에게 한번은 중한 사람이 찾아와서 여러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여보,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본래는 이 우주는 뽀얀 안개뿐이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이 안개를 휘젓기 시작했습니다. 안개를 휘젓는 가운데 불덩어리가 되었고 큰 불덩어리에서 작은 불덩어리가 생겼는데 이 불덩어리들이 제가끔 돌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그 주위에 안개가 바로 변해서 불덩어리에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이 불덩어리가 식기 시작했습니다. 그 식은 덩어리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사는 지구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 표면은 거이 다 식었지만 속에는 그때처럼 뜨거운 것이 있어서 이따금 뜨거운 불이 밖으로 나오는데 이런 불이 나와서 빨리 식으면 화강암(花崗巖)과 같이 돌이 되고 천천히 식으면 쇠 같은 것이 되고 좀 더 천천히 식으면 은이 되고 좀더 천천히 식으면 금강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금강석이 제일 귀합니다. 밤 한 알 만한 금강석이 있으면 당신이 사는 온 군(郡)을 살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마는 주먹 같은 것이 몇 개 얻었다고 하면 파사 나라 전국을 살 수 있고 온 세계를 살수 있습니다”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농부가 자기 밭이 제일이요 자기가 제일 부자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런 금강석과 같은 보배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지금은 농장에 잇는 것이 시원찮게 여겼습니다. 금강석만 발견하면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생각을 하다가 그 다음날 일찍이 중이 사는 그곳을 찾아가서 당신이 어제 말한 그 금강석 밭을 어디가야 찾을 수 있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그 중은“나도 금강석 밭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전에 듣건대 큰 두 산의 골짜기를 흘러 내려가는 시냇가에 흰 모래밭이 있다고 하는 데 그 모래밭에 가서 찾아보면 금강석이 있다고 합니다.”“그러면 그 큰 두 산과 그 강과 흰 모래밭이 어디 있습니까?”“나는 그것도 모릅니다. 그것은 당신이 찾아보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농부는‘그것은 내가 찾겠다’고 결심하고 자기 집에 돌아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돈을 만들어서 자기 가족들에게 이삼년간 먹을 것을 남기고는 금강석 밭이 있다는 곳을 찾으려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파사를 떠나서 그 서편 토이기 지방을 거쳐서 좀더 내려와 팔레스틴에 이르고 또 서편으로 가서 첵코, 불란서지방을 지나 몇 해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금강석 밭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서반아까지 갔습니다. 서반아 맨 끝 대서양 해안까지 갔습니다. 옛날에는 서반아 끝에 가면 지구의 마지막이요 그 다음에는 땅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지구 마지막까지 와서도 금강석을 찾지 못하고 그 동안 돈은 다 없어지고 옷도 다 헤어지고 이제는 돌아갈래 야 돌아갈 노비(路費)도 없고 큰 걱정이 났습니다. 마지막에는 서반아 해안에 앉아서 푸른 물결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자기 신세를 생각해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만큼 애를 썼으나 금강석은 도무지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만 낙심되어서 그 물결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농부에게서 농장을 산 다른 농부가 있습니다. 이 농부는 그 농장에 대해 만족하고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자기가 사들인 농장을 간수했습니다. 양을 치고 과수원을 잘 가꾸고 이렇게 농사를 하는데 한번은 양을 데리고 자기 농장 가운데 흐르는 개천으로 갔습니다. 그 개천가에 조그마한 모래밭이 잇는데 양들에게 물을 멱이다가 보니까 모래 가운데 이상하게 번쩍 하는 돌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돌인가 하고 보니 새까만 돌인데 아주 유난히 번쩍번쩍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집 선반 위에 얹어 놓고 잊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그 중이 그 집에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그 문을 여니까 번쩍번쩍하는 이상한 빛이 납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닌 검은 금강석이었습니다.
그 중은 깜짝 노라면서“아 이 집을 팔고 금강석을 찾으려 갔던 사람이 언제 돌아왔소?”고 하니까 주인 대답하는 말이“그 이는 안 돌아왔어요 이것이 금강석입니까? 그것 다른데서 얻은 것 아니고 우리 농장 개천 모래밭에서 얻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중은“내가 본 금강석은 이런 것이 아니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금강석입니다. 이것 어디서 얻었는지 한번 가 봅시다”하고 그 개천까지 가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보래 밭에 큰 돌 작은 돌이 널려 있는데 반 가량이 금강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가 아주 개천에서 많은 금강석을 얻어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강석과 같은 보석을 찾기 위하여 이 곳에 가고 저곳에 가고 이 나라 저 나라로 가고 사방으로 돌아다닙니다. 금강석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고 직업도 자주 바꿉니다. 여러분, 금강석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 자리에서 충성을 다 할 때에 금강석 같은 보배를 찾는 것입니다. <삼천리 가나안 복지>에서
156.어떤 한학자의 고심
전에 어떤 한문학자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예수를 잘 믿으려면 성경을 일거야 되다고 하니 나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먼저 신약 성서를 샀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찾아서 내러 읽는데『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육 절까지 읽고 나니까 이 한학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다 고 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이 한학자는 성경이 아무리 해도 우리 한학 논어와 맹자만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어 첫 장을 들치면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쁜 일이 아니냐, 친구가 있어 먼 곳에서 오니 얼마나 즐거운가, 사람이 몰라주어도 속에 성냄이 없으면 그 어찌 군자가 아닌가”이렇게 논어를 펼치면 글이 환하고 좋은 말이 나오는데 이 성경은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맹자를 읽어 보셨지요“孟子見梁惠王 王曰 不遠千里以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子曰王何必曰利 亦將有仁義以矣”“맹자가 양혜왕을 알현 한대 왕이 맹자보고 하는 말이‘영감님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우리 나라에 오시니 우리 나라에 무슨 이로운 일이 있습니까?’맹자 곧 대답하는 말이 ‘어찌해서 왕은 이익만 생각하십니까? 나라에는 인의(仁義)가 먼저 있어야합니다’”그것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과연 정치가요 도덕가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무슨 말입니까? 한학자는 처음에 아주 낙담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신약을 읽을 때 마태복음 1장을 읽는 것은 꼭 수박 겉 핥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성경은 밤송이와 비슷해서 처음에는 깔깔한 가시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가시를 헤치면 딱딱한 껍질이 있고 그 다음에 한 꺼풀 제치면 쭈굴쭈굴한 속껍데기가 있습니다. 이것마저 베껴야 단 알맹이가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달다는 사실을 수박 겉만 핥는 사람이 단 것을 모르는 것처럼 알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읽어서 5장쯤 내려가서 산상보훈을 읽을 때에 다른 경서를 읽은 사람으로서는“야 ! 이러한 위대한 교훈이 있다”라고 감탄합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와 고린도 전서를 읽고 모든 서신을 통해서 기독교의 모든 위대한 철학과 신학을 맛보게 되고 마지막에 묵시록을 읽어서 이 온 세계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읽게될 때에야 성경이 과연 어떠한 것을 가슴속에 알게됩니다.
또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음식의 맛을 잘 알려면 잘 씹어 먹어야합니다. 아이들이 혹간 맛있는 좋은 음식을 씹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음식은 잘 씹어 먹어야 맛도 나고 몸에도 유익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하나님의 말씀도 과연 맛을 알려면 계속해서 읽을뿐더러 묵상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시편 1편을 여러분 다 아시지요.『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습니다. 시편 119편『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했습니다.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더 알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전기를 읽으면 그가 젊었을 적에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헬라의 모든 철학자의 서적을 읽었고 도 로마의 위대한 문학서적을 많이 정독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신앙에 들어와서 성경을 읽으려고 할 때 처음에는 그 참된 맛이 어떤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계속해서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서 그야말로 그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되어서 마지막에는 그 성경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면서 많은 기독교 서적을 남긴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불란서의 파스칼 같은 사람도 본래 자연과학자였습니다. 자연에 대한 취미가 많고 과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마는 그도 처음에 성경을 읽을 때는 아무 재미도 없었지마는 읽기를 계속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그 말씀의 맛이 있어서 과학 연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나중에는 성경만 연구했습니다, 묵상할수록 이 말씀이 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전도 사업에 바친 리빙스톤 같은 사람은 마태복음 28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힘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언제든지 묵상했습니다. 어떤 위험한 곳을 가든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는 은혜 가운데서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겼습니다.
젊을 때 중국 내지(內地)에 혼자 가서 어떤 선교 부의 도움도 없이 자비로써 전도를 개척한 허드슨 테일러라는 유명한 선교사는 언제든지 두 가지 말씀이 그 마음 가운데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여호와 이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여호와 이레』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는『에벤에셀』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때까지 여기까지 도와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와주셨는데 이제 앞으로 도와주시지 않겠는가?『여호와 이레』신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시지 않겠는가? 이 두 가지 말을 묵상하고 생각하고 이 말씀을 언제든지 새기면서 일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마음 가운데 기억하고 묵상하세요
157.벤허에 얽힌 일화.
19세기에 미국에 산 사람 가운데 인거솔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책도 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친구 가운데 월레스라는 사람이 잇는데 이 사람은 육군 대장입니다. 이 사람 역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무신론자가 그 사람보고 하는 말이 기독교란 다 거짓말이고 쓸데없는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책을 하나 쓰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월레스 대장이 그런 책을 저술할 맘이 있어서 아무래도 이런 책을 저술하려면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사실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점점 읽어가면서 오히려 반대할 마음은 없어지고 성경 말씀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이 믿게되고 믿을 분더러 그 유명한 벤허(Ben Hur) 라는 종교 소설, 그리스도의 일생을 보여 주는 유명한 책을 월레스 대장이 저술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아니하는 까닭에 그 뜻을 모릅니다. 그 맛을 모릅니다. 보통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물어보면 성경을 별로 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읽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을 반대합니다. 읽은 사람이면 성경 말씀의 맛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꿀보다 더 단 주의 말씀>에서
158. 크리스마스의 의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은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반사됩니다. 어떤 나라에 가서 있는 선교사일지라도 고국과 친척을 떠나서 일생을 외국에 가 있다는 것은 큰 희생입니다. 보통 사람으로 못할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찬영 선교사를 외국에 보냈지마는 일생을 친척과 고국을 떠나서 딴 나라에 가서 몸을 주님께 바쳐서 그 나라의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그 기후가 나쁘고 전부가 정글인 문자 그대로 원시적 사회, 야만적 사회, 가운데 가서 일생을 몸 받치는 선교사의 모습을 가만히 옆에서 볼 때 머리가 숙여 졌습니다. 특히 개머룬 어떤 지방에 가니까 미국에서 온 여자의 의사인데 나이가 한 오십 가랑 된 여자 혼자서 흑인 가운데 가서 병원을 설립해 놓고 흑인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접촉하면서 병을 치료해주고 상처를 씻어 주고 여러 가지 병을 고쳐줍니다. 그 환자 가운데 추장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은 아내가 127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욱이 놀란 것은 그 여의사의 아버지가 그 곳에 있다가 열병으로 죽었고 그의 어머니가 또 죽었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둘 있었는데 둘 다 죽고 여자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는“나는 혼자라도 내 아버지의 일을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의학을 연구하고 나와서 일생을 받친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흑인들을 보면 사랑할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혹 여자들 새까만 얼굴에 분까지 발랐습니다. 그러나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일생을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삽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이 왔습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으로 우리가 또한 흑인이라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반사올시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올시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 냉정하고 이 각박하고 쓸쓸하기가 사하라 사막 같은 세상, 냉정하기가 북극 같은 이런 사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시다. <사랑과 그 반응>에서
159.기독교와 생명의 가치
내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자살이라는 행동은 하나님도 부인하고 심판과 도덕도 부인하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마땅히 스스로 죽지마는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은 어떤 사회의 문화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기 전 아프리카에 사는 식인종(食人種)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두개골을 많이 모아서는 장식품으로 허리에 차고 다녔습니다. 집에다 많이 쌓아 놓고 자랑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많이 잡아먹었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감화를 받기 전에 로마와 헬라의 문명을 보면 옛날 철학과 과학이 제일 문명했다고 하는 헬라사람 가운데 스파르타 같은 나라에서는 어머니가 얘기를 낳은 다음에 정부에서 조사 관을 파송하여 조사해서 이 다음에 커서 좋은 군인이 될 것 같으면 그냥 두고 아예 약골로 생겼으면 죽여 버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굉장히 큰 원형 극장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만 명이 모여서 여러 가지 연극을 구경하는데 살인하는 광경을 많이 구경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까지 싸웁니다. 사람이 짐승과 싸우다가 짐승에게 잡혀 먹힙니다.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사자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것이 굉장한 구경거리라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이 사람 죽이는 것을 한 오락으로 구경했습니다.
옛날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그 부인은 흔히 남편과 같이 생매장했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바로 몇 달 잔에 어떤 잡지를 보니까 상류계급 가운데 어떤 여자가 자기 남편이 죽으니까 그 남편을 화장하는데 그 화장은 우리 나라처럼 집 짓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밖에다 장작을 쌓고 그 위에다 관을 놓고 화장을 하는데 그 부인이 인도의 아주 고귀한 전통을 잇기 위해서 화장하는 불에 뛰어들어서 같이 타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렇게 생명이 천했습니다. 생명을 천히 여기는 사회일수록 야만적인 사회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 사회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야만적인 사회입니다.<생명의 존귀성>에서
160.위대한 인물은 경건한 부모로부터
내가 내 개인을 위해서 일생을 통한 목적을 두는 것이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가 부모노릇을 바로 하려면 귀한 아기를 위해서 위대한 목적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기가 커서 무엇이 되게 해달라는 목적을 세우고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 바치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래서 부모로서 아기를 위하여 어떤 책임을 지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고 온전히 그 뜻대로 기를 의무가 우리 부모에게 잇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난 후에 물론 어머니의 감화를 제일 많이 받습니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살에서 떨어져 났고 처음에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교회 역사를 상고해 보면 아버지의 신앙에도 많은 영향이 있겠지마는 어머니의 영향에 큰 감화를 받은 그런 역사를 많이 봅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경건한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한나와 같이 하나님께 서약을 하고 맹세하는 어머니들,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른 어머니들이 많은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라는 여자는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기르지마는 벌서 아이들이 네 살이나 다섯 살 나게되면 그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성경 말씀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후 2 ,3세기에 유명한 학자요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오르겐이라는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총명도 하였지만 4, 5세부터 시편의 대부분을 외고 10세쯤 되어서는 성경가운데 좋은 장들은 거의 다 외었다고 합니다. 모두 어머니가 배워 준 것입니다.
전 번에 우리 교회 성경 암송 대회에서 특히 감사한 것은 어린아이가 26절을 암송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어렸을 적부터 성경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또 보통으로 아이들 13세 이상 20세 전후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회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이런 사람들은 매우 어릴 때 회개하고 몸을 바친 기록이 역사상에 있습니다. 가령 주석 가 가운데 매튜 헨리 같은 분은 매우 유명한 사람인데 그는 11세 때에 온전히 회개했다고 합니다. 또 찬송가를 많이 기록한 영국의 왓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9세 때 온전히 회개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로서 프린스톤 신학교 학장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난 요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은 7세 때에 온전히 회개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얼마쯤 자란 후에 하려고 기다릴 것이 아니고 어릴 적부터 참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길러 준다면 은혜 받는 대로 어릴 때도 온전히 회개하고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우리가 얼마든지 보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은 말하자면 흰 종이와 같습니다. 다른 글자 쓰기 전에 흰 종이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써 줄 수 있도록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봄과 같습니다. 봄에 아직 아무 것도 심지 아니했을 때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써 심을 수 잇습니다. 이 특권은 먼저 누구에게 부여되었나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성품은 연한 나무 가지와 같습니다. 이른봄에 돋아나는 연한 나무 가자와 같습니다. 연한 나무 가지를 바로 잡아서 바로 돌려놓을 수가 있는데 이 특권은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쳐서 종교적 책임을 다 하려고 한다면 가정 교육이 필요하고 또 교회에서 종교교육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종교적 책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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