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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3권-7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181-210

by 【고동엽】 2022. 3. 2.
[처음 목차 돌아가기]
 
 

181.장수의 비결
 
노래하는 마음은 우선 건강에 유익합니다. 잠언 17장 22절에는“마음의 즐거움은 양약(良藥)이 되고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노래하는 마음은 건강에 좋은 약입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소화도 잘 되고 혈액 순환도 잘 되고 신경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현대 의학계에서 주장하는 말을 들으면 질병의 6할 내지 7할이 심리적 원인이라고 합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는 우선 병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입니다.  
바로 지난주간 타임 잡지를 보면 미국 존 홉킨즈 대학의 교수 죠지 W. 홉스탁 박사가 그의 대학이 있는 매릴랜드 주 워싱턴 군에 사는 주민들을 중심으로 교회에 매 주일 출석하는 신자들과 그렇지 않는 이들의 건강을 비교해서 연구한 결과 발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잘 믿는 이들에게는 심장병, 간 경화증, 결핵. 목의 암. 만성 기관지염, 자동차 사고, 자살 등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잘 믿는 이들이 오래 산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 주일 교회에 꼭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는 동맥 경화증이나 심장병으로 죽는 이가 매 10만 명에 5백 명 가량인데 그렇지 않은 이들 가운데는 매 10만 명에 9백 명이 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믿는 이들 중에는 기관지염이 적은 이유는 늘 예배당에 가서 찬송을 부르는 까닭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노래하는 기쁜 마음이 건강에 유익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노래하는 마음은 일이 잘 되게 합니다.<노래하는 마음>에서

 

 
 


                                        
182.밀 알이 된 어머니
 
지난주간에 제가 부산에 있을 때 오후에 집회를 마치고 여관에 돌아왔는데 어떤 중년 부인 한 분이 찾아와서 꼭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들어오라고 하였더니 그 분은 작은 선물을 가지고 와서 제게 주면서 자기의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6·25때 남편을 잃고 일곱 살과 다섯 살 되는 두 아이를 대리고 갈 곳이 없어 헤 매이던 중에 마침 부산에 다비다 모자원이 생기고 그 곳에 들어와서 10여 년을 있으면서 두 아들을 길렀는데 그 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지마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맏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였고, 지금 둘째 아들도 대학을 거이 졸업하게 되어 이제는 아무 염려가 없노라고 하면서 이렇게 모자원을 부산에 세워 주셔서 너무 감사해 잠깐 만나 뵈려 왔노라 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에 족히 과거 20년간 그 분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과 빈궁과 눈물과 희생의 생활을 회심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어머니는 두 아들을 위해서 청춘과, 향락과 사치와 허영 등 모든 것을 희생한 땅에 떨어진 한 밀 알이었습니다.
땅에 떨어지는 밀 알 하나의 정신을 가진 어머니가 잇는 가정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는 가정은 귀한 자녀를 옳게 길러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크게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어머니, 이러한 정신을 가진 아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183.신교 자유의 촛불
 
일찍이 영국에서 신교 자유에 대한 큰 핍박이 있을 때에 그 때의 영국의 감독으로 있던 래틴머라고 하는 분이 화형 장에 끌려나가면서 같이 순교하려 나가는 교우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오늘의 영국에서 끌 수 없는 촛불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자기는 화형 장에서 불로 살아질 것을 생각하면서 이것은 영원히 끌 수 없는 자유의 불길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 촛불은 자유의 촛불입니다. 이러한 희생, 이러한 순교, 곧 땅에 떨어지는 밀 하나를 통하여 신교 자유의 촛불을 지금까지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에 면류관도 없습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 열매도 없습니다. 오직 땅에 떨어지는 희생 위에만 진리, 자유, 평화, 번영 그리고 앞으로 올 국토 통일의 열매도 맺힐 것입니다.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 >에서

 

 
 




184.‘애통의 나무’와 기도 바위
 
성지 예루살렘에 가보면 감람산 남녘에 겟세마네 동산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지금도 아주 오랜 감람나무 여덟 그루가 있고 그중 한 나무는‘애통의 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잇습니다. 아마 그 나무 아래에서 주님께서 기도를 드렸다는 전설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작은 예배당 하나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면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가 곧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바위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날 저녁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저녁을 잡수시고 모든 교훈과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주시고 성찬 예식을 거행하신 후에 요한 복음 17장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같이 드리고 찬미를 부르고 나아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가신 갓입니다. 곧 겟세마네 동산에 오신 것입니다. 때는 깊은 밤입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주님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홀로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중에서 가장 엄숙하며 비장하고 장엄한 광경을 봅니다. 곧 그의 기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잇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에서

 

 
 




185.대신 죽은 친구
 
먼저 애통을 통하여 인생과 우주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천로역전》을 기록한 영국 천교도 지도자들 가운데 유명한 존 번연이라고 하는 이가 젊었을 때에 군대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하루 저녁은 어떤 중요한 곳을 지킬 책임을 맡아 보초를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깐 볼일이 있어서 존 번연은 자기 친구에게 잠깐 동안만 그곳을 대신 지켜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녀와서 보니 자기 대신 그 자리에 보초를 섰던 자기의 가까운 친구는 원수에게 저격을 당해서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 친구는 자기의 생명을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크게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 번연이라고 하는 청년은 그 큰 애통을 통해서 인생의 깊은 뜻을 더욱 탐구하게 되었고 따라서 깊은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혹은 사랑하는 남편을,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먼저 보내는 큰 애통 가운데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고 마음으로 하늘의 위로를 받은 이가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애통(哀痛)이 무슨 복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역리적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애통 자체를 우리가 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애통도 복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눈물에도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 있지만 일본의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목사가 지금부터 삼십 년 전 우리가 학생 시절 때 유명한 소설을 하나 썼습니다. 그 소설의 이름은《사선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애통을 통해서 사선을 넘게 될 때에 인간은 인간의 깊은 뜻을 찾게 되고 인간이란 단순히 육체가 아니요 그 속에 불멸의 영혼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낮에는 밝아서 모든 것은 밝히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멀리는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해가 지고 캄캄한 밤이 될 때에 하늘 멀리 우주 끝에 있는 별을 바라 볼 수 잇는 것입니다.

 

 
 


 
186.윌슨 천문대 렌즈와 눈물의 렌즈



제가 들으니 미국의 윌슨 천문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렌즈인 이 백 인치나 되는 망원경이 있다고 합니다. 이 큰 렌즈를 통해서 전에 자세히 보지 못하던 여러 별들을 더 자세히 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실 가장 신령한 나라, 가장 신비한 나라인 하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만든 렌즈를 통해서 볼 수 없고 이상하게도 눈물의 렌즈를 통하여만 이 하늘나라의 신비를 더 자세히 깨닫고 알게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애통을 통해서 인생과 우주의 깊은 진리를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애통도 그러하거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특별히 자기의 죄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애통은 죄 사함을 가져옵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애통히 회계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와 그 복>에서

 

 
 


                                                 
187.내강한 사람
 
온유한 심령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하지 아니하고 반향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직 참고 견디며 범사에 순복(順服)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 님께서 한번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마리아의 어떤 동리를 지나 기시게 되었습니다. 그 동리에 들어가니 그들은 유대 사람인 줄 알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요한 과 야고보 두 형제가 매우 격노해서 이런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전멸시키자고 하는 진언을 주님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두 제자를 책망하시고 아무 말도 없이 다른 동리로 가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과 온유하신 생활을 문자 그대로 보여 준 사실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어떠한 이들인가, 먼저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겸손합니다. 얼른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대하여 누가 겸손하지 아니하리요 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많고,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않게 행동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섭리 가운데서 어떠한 불행이 나에게 미치고, 어떠한 재난이 나에게 미치고, 어떠한 실패가 나에게 오고, 어떠한 슬픔이 내 가슴에 스며온다고 할지라도 온유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가,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자포자기하지 아니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어떠한 환경을 당하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면 조용히 참고 견디는 것이 온유한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면 또한 순종합니다. 전에 요셉이 그렇게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가서 고생하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환경 가운데 있었지마는 요셉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곳에서 순종하고 자기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역시 사람에 대해서도 온유합니다. 사람에게 대하여는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우선 글자의 뜻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나는 줄 압니다. 성경 말씀에도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동양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에“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눈으로 보지만 다정한 눈길로 볼 수도 있고 혹은 눈에서 칼날이 나오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에게 대하여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188.바람과 해의 대결


여기 아이들이 읽기 좋아하는 옛날 우화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 줄 압니다. 강한 바람과 햇빛이 한 번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네가 더 힘이 잇느냐, 내가 더 힘이 잇느냐, 그래서 내기를 했는데 어떤 점잖은 사람이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햇빛은 누가 저 사람의 모자와 외투를 벗길 수 있는가. 누가 더 힘이 있는가, 내기를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이“내가 더 힘이 있지. 내가 먼저 벗길 테니 보라”고 하고는 바람을 갑자기 일으켜서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다가 “어 웬 바람이 부나”하고는 모자를 꽉 내려씁니다. 그래도  그래도 바람이 자꾸 부니까 하나만 채웠던 외투의 단추 세 개를 다 채웁니다. 그래도 바람이 자꾸 부니까 “바람도 참 심하다”고 하면서 두 손으로 모자를 꽉 부여잡고 걸어갑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외투를 벗지 않습니다. 결국 강한 바람은 사람의 모자와 외투를 못 벗겼습니다.
햇빛은“그게 무슨 힘이냐? 내가 벗길 테니 보라”바람이 잔잔히 고요해 집니다. 햇빛이 따뜻하게 내려 비칩니다. 이 사람은 길을 가다가 “아이고, 날이 대단히 덥군,”그래도 계속 햇빛이 비치니까 “이거야 더워서 견딜 수 있나”하고 모자를 훌떡 벗었습니다. 그래도 햇빛이 비추므로 “오늘은 외투가 쓸 때 없구먼”하고는 외투를 벗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강한 바람에게 따뜻한 햇빛이 이겼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189.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생물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생물계에는 강한 것만이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니 자연도태(自然淘汰)니 생물계에는 강한 것이라야 산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해 보면 우리 사람이 지구에 나기 전에 큰 짐승들이 지구 위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파충류에 속하는 맘모스와 공용 같은 큰 짐승들이 지구 위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섭고 강한 그런 짐승들이 지금은 거이 다 없어졌습니다. 멸종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혹 뼈만 남은 것을 찾을 수 잇습니다. 그래서 뉴욕박물관에 가보면 옛 날의 큰공용의 뼈를 지금도 볼 수 잇습니다. 그러나 공용은 볼 수 없습니다. 강한 짐승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약하게 보이던 짐승들이 이 땅위에 지금도 살고 잇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이리와 개는 같은 종류에 속합니다. 사실 개와 이리를 보면 같이 생겼습니다. 본래 똑 같은 종류였습니다. 그런데 이리 가운데서 어떠한 종류가 성질이 변한 것입니다. 온순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놈은 개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포악한 이리는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안습니다. 혹 동물원에 가야 더러 볼 수 잇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변해서 온유하게 된 개는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다 찾아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하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마음 가운데 들어오지 않지만 깊이 생각하면 그 원리를 우리는 어느 방면에서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리와 같은 히틀러, 이리와 같은 무솔리니, 이리와 같은 스탈린이 온 세계를 끝까지 점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은 세계를 얻는 것입니다

 

 
 




190.쳥교도의 축복


지금 이 세계에서 재일 아름다운 땅이 어디냐고 물어 본다면 아마 북미 대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통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이상한 것은 그 북미 대륙을 누가 차지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근 삼백여 년 전, 저 영국에서 자기네의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 그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어 화란으로 갔으나, 거기서도 한 일년 동안 살아볼래 야 살 수 없어서 다시 화란을 떠나 작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1620년에 플리머드라는 바닷가 바위 위에 내린 청교도 120명, 그들의 자손이 지금 제일 아름다운 대륙을 기업으로 받아 살고 잇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이 적거나 많거나, 이 세상에서도 참된 축복을 받습니다. 의인의 적은 물질이 악인의 많은 물질보다 복이 됩니다. 의인의 오막살이가 악인의 대궐 보다 더 복이 됩니다. 의인의 나물밥이 악인의 송아지를 잡은 진미보다 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와 그 복>에서

 

 
 




191.원인과 결과
 
플라톤은 일찍이 말하기를 무신론은“영적 질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신론자는 사실 영적 질환 자입니다. 병들게 되면 식욕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그 만드신 만물에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물론 길게 생각할 수도 있고 깊이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평범한 것 두 가지만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소위 우주론적 논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과의 법칙에 의지한 논증입니다. 누구나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부인할 이가 어디 있습니까. 자연과학도 이 법칙 위에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습니다. 우주는 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원인이 있습니다. 이 제일 원인은 하나님일 수박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일 수박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음으로   우주가 있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처음 움직이신 이가 반드시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부인하려고 하면 우주가 영원하다고 주장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도 사실이 아닙니다. 우주적으로 지구나 천체가 영원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질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생물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생물이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에게도 영원히 있지 않았습니다.
유물론자들은 그저 경제문제만 해결하면 인간에게는 최대의 행복이 있으리라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풀이 위를 향하여 자랍니까?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역사를 보세요. <제 1계명>에서

 

 
 




192.내세와 영생 추구
 
옛날 애굽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저 나라로 간다고 해서 유명한 왕릉 같은 데는 묘실(墓室) 옆에 큰방을 만들어 놓고 배를 만들어 넣은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사람을 묻기 전에 시체의 입에다 돈을 한 입 넣어주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역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강을 건너서 딴 세계에 간다는 사상 아래 뱃사공의 뱃삯을 주라고 하는 의미의 풍습이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나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시세로 같은 이는 철학적 견지에서 영혼은 불멸하며 반드시 살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에 있어서도 극단의 유물론자 외에는 대체로 내세와 영생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에서

 

 
 


                                                
193.안 중근 의사
 
전에 안중근 의사가(安重根義士)가 두만강을 건너와 당시 일본 군경과 악전고투를 하다가 겨우 동지 몇 사람과 같이 다시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갔습니다. 당시 해삼위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그가 그 곳을 떠나 흑룡강 상류를 여행할 때에 어떤 곳에서 20명의 한국인에게 붙잡혀 도리어 매를 맞고 거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들은 소위 당시 일진회의 잔당으로 친일 분자들이었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할 때는 이런 경우를 만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낙심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면 전공(前功)이 가석(可惜)합니다. 무슨 일이 있던지 낙심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꾸준히 계속하여야 합니다.

 

 
 




194.정의 필승’


1919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의사 안중근 선생이 그 사형을 받기 전에‘정의 필승(正義必勝)’곧“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글자를 크게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한민국만세(大韓民國萬歲)’라는 글자를 크게 쓰고 그의 손바닥으로 인을 쳤습니다. 당시 국제정세와 국내정세를 보면 한국은 이미 다 망해 가던 때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였고 국제정세를 보아도 한국의 독립을 도우려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 자신도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붙잡혀 죽으면서 어떻게 대한 독립이 성취될 줄 믿겠습니까? 어떻게‘정의 필승'을 믿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의 위대한 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안목으로 인간의 역사를 본 것입니다. 지금 보면 그는 정말 옳게 보았습니다. 한국의 독립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신앙에서 그는 조금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선을 행하다가 장렬한 순국의 죽음을 맞은 것입니다.  

 

 
 


 
195.결실 있는 선행



얼마 전 경상남도 지방 한 교회에서 어떤 분이 장로 장립을 받는다는 편지를 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지금부터 20년 전 제가 지리산 전도를 갔을 때에 당시 남원 경찰서의 서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믿기 시작하였고 김치복 장로께서 자기에게 성경 한 권을 주었다고 합니다. 피로하여도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고 또 반드시 거두는 것입니다.
전도서 11장 1절에,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동양 성현의 말씀에
 “음덕이 있으면 양보가 분명히 있느니라”또는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영국에 정치가들이 모여 앉아서 영국 총리대신으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토론할 때에 혹은 웅변, 지식, 또는 근면, 용기 등을 말하였습니다 그때에 유명한 정치가 윌리암 핏트(William Pitt) 는 말하기를 그것은‘인내(忍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맙시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에서

 

 
 


                                            
196.가장 엄숙한 사실에 대한 연극
 
어떤 유명한 배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실이 아닌 것들을 사실처럼 연극을 해서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데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엄숙한 사실들을 가지고 무력하게 전도를 하니 웬일인가? 내가 만일 당신들의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 하루라도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겠습니다”어떤 분이 수표를 가지고 돈을 찾기 위하여 은행에 갔다가 가짜 수표로 확인되어 돈을 못 찾을뿐더러 조사만 받게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중심이 진실한 신앙인가, 혹은 가짜 신앙인가 미리 살펴보아야 이 다음에 천국에 들어갈 때에 낭패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을 보십니다.  <중심의 진실>에서

 

 
 


                                                     
197.고쳐야 할 전통
 
로마서 13장 13절, 14절에“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이조시대에 소위 궁중에는 수다한 궁녀들이 있었는데 임금의 첩은 소위 후궁이니 무엇이니 하여 여덟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의 궁중은 음란하고 부패했습니다. 또한 궁중뿐만 아닙니다.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한국의 유교사회는 출세했다는 사람은 첩 없는 사람이 없으리만큼 음탕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전통이 있는 사회에서 또 퇴패(頹敗)한 외래 풍조가 물결처럼 밀러오는 이런 시대에서 자신의 모든 욕망을 바로 다스려 깨끗한 생활로 빛과 소금의 되어야 합니다.

 

 
 




198.친구를 죽인 알렉산더의 분노
 
성경은 안목의 정욕을 항상 경계했습니다. 사치, 유행, 퇴패적인 사회 속에서 의복, 기타 모든 생활에 있어서 나 자신을 바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도 다스릴 줄 알아야합니다. 잠언 14장 17절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시편 37편 8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행악(行惡)에 치우칠 뿐이라”헬라 알렉산더 대제가 일시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자기 일생의 친구며 가장 유능한 대장인 클리투스( Clitus)를 죽인 후에 얼마나 탄식을 하였는가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감정, 곧 희노애락(喜怒哀樂) 모든 방면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분노와 슬픔도 참을 줄 알아야합니다. <나의 자신을 시험하라>에서

 

 
 




199.번연의 결단
 
<천로역정》을 쓴 번연에 대하여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을 때에 길을 가다가 이러한 말을 귀로 들었다고 합니다.“네가 죄를 버리고 천국에 가겠느냐”그는 이 음성을 들은 후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죄를 버리고 천국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이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이 있는 이에게는 심판이 두려울 것 없습니다.

 

 
 




200.평양 여자 고등성경학교
 
기억하십시오! 우리 신자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넉넉히 이깁니다. 제가 오래 전 이북에 있을 때에 평양에 있는 여자 고등성경학교에 가서 설교를 한일이 있습니다. 예배를 본 후에 그 학생들의 형편을 물어보니 대부분이 과부가 아니면 생과부들이었습니다. 곧 남편에게 소박 맞은 이들입니다 그들이 주를 믿는 가운데서 고독과 비애의 모든 환난을 이길뿐더러 넉넉히 이기어 그런 역경 중에서 공부를 하고 교회에 헌신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사들이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여전도사들의 공헌이 실로 위대합니다. 이들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을“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넉넉히 이기었습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에서

 

 
 




201.떨어지는 낙엽이 가장 아름답다
 
날리는 낙엽은 우리 인간들에게 귀한 생의 교훈을 줍니다. 최후에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남깁니다. 낙엽은 떨어질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황금빛의 단풍으로 변합니다. 가장 빛나는 영광을 조물주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보배로운 산 교훈입니까? 그러므로 동양의 지혜를 다 모아 놓았다고 하는《채근담》이란 책에“사람을 볼 때는 그 후반생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그 최후를 바로 마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옛 글에인지장사 기언야선’(人之將死 其言也善) 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에 가까이 이룰수록 그 마음과 말이 착해져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하기 얼마 전에 말하길“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가졌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생의 마침입니까? 스테반은 순교 직전에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변하였고 그의 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자기를 돌로 치는 이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죽음입니까? 떨어지는 단풍의 미와 영광 그대로입니다.  <날리는 낙엽>에서

 

 
 




202.담대한 용기      
 
제가 일찍이 들으니 고한규(高漢奎)장로님께서는 옛날 일제시대 때에 조선 총독을 면회하려 가서 먼저 기도를 엄숙히 하니 그 총독이 감사하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작을 일 같으나 이것도 고 장로의 용기를 나타내는 얘기입니다. 개인 전도에도 언제나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중전도에도 역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다가 로마 천부장에게 구원을 받아 영문으로 끌려가는 중 층대(層臺)에 이르렀을 때 천부장에게 허락을 받아 그를 핍박하는 무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한 후에 그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전도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가 웜스 국회에서 종교개혁의 교리를 취소하라고 위험을 받을 때에 황제 앞에서 “나는 여기 섭니다. 나는 그 교리를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역사의 일화입니다. 마틴 루터도 매우 용감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진리 수호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해에 새 용기>에서

 

 
 




203.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회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 주실 때에 회개합니다.
학개 박사의 어떤 친구인 미국의 큰 출판회사의 사장인 샘 모어라고 하는 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본래 수리아에서 나고 베이루트라고 하는 곳에서 자라났는데 어렸을 때에 미술학교를 좀 다녀 그 곳에서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 들어서, 흔히 많은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기 는 믿겠으나 그다지 급할 것이야 있겠는가?
젊어서 마음대로 놀며 세상 재미도 보고 차츰 회개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친구들과 같이 넓은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늘 같이 다니며 노는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어떤 여자와 약혼까지 하였는데 또 다른 여자와 가까이 한다고 그 두 여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가 보는 자리에서 그들이 싸움을 하다가 그 여자가 돌연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그 남자를 쐈다고 합니다. 그 남자는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그 일을 항상 잊을 수 없고 여러 가지로 인생문제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게되었는데 잊을 수 없는 한가지 생각은 그 남자도 종종 회개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렇게 갑자기 죽고 보니 회개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 그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곧 진실한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미국에 건너와서 적수공권으로 고학하며 대학을 마치고 지금은 큰 회사의 사장으로서, 유력한 평신도 지도자로서 교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회개할 때는 지금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지혜 있는 자의 생활>에서

 

 
 




204.북한 실정보고
 
얼마 전 뉴욕타임스 부 편집국장 솔즈베리 기자가 북한을 다녀와서 보고하는 말이“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독한 나라요, 또 가장 자유가 없는 나라이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혹 무엇을 물어도 상관에서 먼저 문의하기 전에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의 북한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마음대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자유로 듣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왜 북한 사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곳에서 지금 권리를 잡고 있는 공산당들의 그릇된 사상입니다. 곧 유물론적 사상입니다. 이 사상에 중독 된 그들은 이 우주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없어집니다. 유물론적 인간이 있는 곳에 유물론적 윤리가 생깁니다. 결국 인간을 한 짐승으로 대우하게 됩니다. 이것은 유물론적 사회 사상과 사회체제를 만들게 됩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독재사회는 미안한 말이지만 동물원과 비슷합니다.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도 잘 곳이 있고 먹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205.짖을 수 없는 개


몇 해전 서백림에 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한번은 동백림에서 한 마리 개가 서백림으로 넘어 왔습니다. 이 서백림 개가 만나서 묻기를 너는 왜 넘어왔느냐 먹을 것이 없더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대답이 그 곳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하여 그러면 잘 곳이 없더냐 고 물었더니 잘 곳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넘어왔는가 고 물었더니 그 곳에서는 도무지 짖을 수가 없어서 넘어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라는 우스운 얘기들이 한간에 떠돌았습니다.
  왜 북한이 저렇게 전혀 자유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그 근본 원인은 진리를 모르는 까닭입니다. 우주와 인간의 진리를 모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인간도 모릅니다. 그 결과는 전혀 자유가 없는 암흑의 사회구조를 이룹니다.“진리가 너희를 자유 캐 하리라”고 하였듯이 진리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잇습니다.  <진리와 자유>에서

 

 
 


                                                       
206.성경대로 사는 생활
 
교회사 초기에 유명한 성경학자요 설교자인 오리겐에게 성경대로 사는 생활에 대해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생을 성경 연구와 복음전파에 바친 위대한 학자입니다. 그의 생활은 당시 극도로 퇴폐(頹廢)한 로마 사회에서 실로 백노(白鷺)같이 깨끗하고 고귀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그 비결을 물어볼 수 잇습니다.“선생의 그 고귀한 생활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물으면 그의 대답도 매우 간단할 것입니다.“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신앙 생활입니다”성 프랜시스에게 물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시 부유한 가정에서 났으나 모든 자산을 초개같이 버리고 빈민과 고아와 병자에게 봉사하며 복음을 전파하였으므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별명을 얻은 분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그러한 생활의 비결이 무엇인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의 대답도 역시 아주 간단할 것입니다.“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신앙 생활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인정을 받은 아브라함 링컨에게 역시 그의 흑노(黑奴)에 대한 깊은 동정심과 그의 일생을 통한 정치가로서의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의 비결이 무엇인가 물어 볼 수 잇습니다.“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웠고 항상 그 말씀을 따라 삼가는 신앙 생활이었습니다”할 것입니다.

 

 
 




207.말씀을 품는 생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군인이 항상 회중(懷中)선경을 품고 다녔는데 한번은 이 군인이 일선에서 싸우다가 적탄에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적탄이 성경에 맞아 그 생명이 구원되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성경은 그의 육신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다니면 어떤 유혹의 화살이 들어올지라도 우리의 영적 생명은 안전합니다. 가장 안전한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품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은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시다.<청년과 성경>에서

 

 
 


                                          
208.절약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어떤 신문(조선신문)을 보니 한 사람이 하루에 쌀 한 숟갈씩만 아끼면 한 해에 2백9십2억 원이 남는다고 합니다. 한 집에서 전등 하나씩만 끄면 1백 18억 원이 한 해에 남는다고 합니다. 하루에 TV한 시간만 덜 보면 한해에 12억 원이 절약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양말 한 켤레씩만 줄여도(곧 기워 신고) 1년에 3백 60억 원이 남는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절약해야 되겠고, 모든 음식물 곧 쌀, 잡곡, 설탕, 채소, 뿐만 아니고 각종 음료수 특별히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커피나 음료 등을 아주 끊어버려야 할 때입니다.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지만 하여간 지금은 모든 것을 절약할 때요,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솔선 수범해야합니다.

 

 
 




209.담배와 술의 해독과 낭비


요사의 신문을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절약을 강조하면서도 가장 큰 낭비가 되는 술과 담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사실 절약을 말하는 이들도 담배는 그냔 피우고 앉아 있습니다.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우면 한 달에 약 4천5백 원이 된다고 하는데 그 돈이면 적은 가족이 한달 동안에 먹을 쌀값이 된다고 합니다.
1973년 통계를 보면 1년 동안에 담배는 5백1억 7천4백6십5만 8천 본을 만들었는데 그 판매액이 1천3백 2십4억1천8백만 원이라 합니다. 또한 특권층은 소위 양담배를 핀다고 하는데 작년에 전매청이 압수한 것만 9십8만 8천4백9십6본으로 시가는 7백4십1만3천7백5십 원이라고 합니다. 실지로 피워진 양담배 수량은 이것의 열 배로 추측되는데 그 가격은 7천여 만 원일 것입니다. 꼭 먹고살아야 할 쌀도 조금 먹자고 하면서 먹지 않아도 좋은 담배는 왜  피웁니까? 이뿐만 아닙니다. 담배 심은 밭에 곡식을 심으면 그 만큼 식량이 증산될 것이요, 또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을 현대 의학계에서 인정된 사실인가 본데 그래도 그냥 피워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국세청에 알아본즉 작년에 우리 나라의 술 생산량이 2,228,531킬로리터나 된다고 합니다. 그 가격은 약 1천억이라고 합니다. 제가 물었더니 술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탁주, 약주, 청주, 과실주, 등이 있습니다. 작년 1년 동안에 우리 국민이 이렇게 여러 종류의 술을 1천억 원어치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 외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양주도 마셨는데 그 수입액이 4백 5십만 달러요, 또 몰래 수입한 수량은 거이 3배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양주를 또 약 2천만 달러 치를 마셨습니다. 커피와 콜라도 가급적 피하면서 아무 쓸 때 없는, 아니 사실은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해독을 주는데도 그냥 마셔야 합니까? 또 술은 무엇으로 만듭니까? 곡식으로 만듭니다. 식량이 부족하여 외국에서 매년 수억 달러의 식량을 수입 해다 먹으면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른 방면에는 절약하자고 하면서 이 방면에는 잠잠하면 옳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가, 저는 사실 우리 사회의 술과 그 술에 미치는 해독을 너무나 많이 보아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에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술 먹고 음란한 일을 하며, 술 마시면서 뇌물을 주고받습니다. 술 먹고 교통사고, 기계사고를 내게 합니다. 술 먹고 죄 없는 아내를 때립니다. 술로 말미암아 파탄된 인격, 파탄된 가정, 파탄된 사업도 너무나 많습니다<자다가 마땅히 깰 때>에서

 

 
 




210.의심과 신앙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링컨의 유명한 말 가운데“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건 알 수 있으니까 그대로 행하고 깨달아 알 수 없는 것 믿음으로 받아서 그대로 행하면 살 때에도 바로 살고 죽을 때도 바로 죽을 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태도입니다. 신비에 대한 바른 태도입니다.
둘째는 여러 가지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러면 내가 믿을 수 잇는 것은 무엇인가를 먼저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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