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21세기 설교 전략

by 【고동엽】 2022. 2. 24.

「21세기 설교 전략」

 

박 은 규

(신학대학교수, 실천신학)

 

들어가는 말

 

설교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연속적 활동에 동참하는 일이다. 증언된 말씀은 아침 안개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령 속에서 언제나 구원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다.

설교는 강연과 구별된다. 강연은 근본적으로 교육적 목표를 토대로 하여 지성과 분석능력에 호소하지만, 설교는 동기부여적이요 실천적인 것으로서 마음과 양심과 영에 호소한다. 그러면 설교를 한 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설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또한 설교자의 최상의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 선포, 적용함으로써 천박한 생활로부터 더 고귀한 기독교인의 생활로 인도하며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게 하는 신앙과 구원과 사랑의 강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음으로써 구원과 영생에 이른다. 그러나 세속주의, 지나친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향락주의, 과학만능주의를 몰고 오는 21세기의 상황 속에서 설교는 위기를 맞고 있다. 왜냐하면, 회중들은 설교에 대한 기대감과 경청의 부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요, 설교자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지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메시지의 내용은 중후하지만 삶의 정황에 깊이 접촉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설교는 개인적 삶과 사회생활에 충분한 변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더 성숙하고도 적합한 21세기 한국교회의 설교를 위해 1)목회적 설교(the pastoral preaching)의 가능성과 방법, 2) 성숙한 신앙인을 함양하는 양육적 설교의 탐구, 3)변화를 추구하는 설교의 실제를 연구하고자 한다.

 

Ⅰ. 설교의 신학에 근거한 말씀 증언

훌륭한 설교는 무엇보다도 설교의 신학에 뿌리를 둔다. 설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구원하신다. 지금도 하나님은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설교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황과 역사 그리고 자연세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설교는 바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시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증언하는 일인 동시에 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찾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the promise)을 증언하는 일이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증언하는 설교에는 두 가지 대망(expectancy)이 관련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대망과 백서들의 대망이다.

하나님의 대망은 1)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 2)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의 멍에를 대신 지는 것, 그리고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부활의 승리를 함께 누리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대망은 1) 인간생활의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얻는 것, 2) 복과 영생의 빛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 그리고 3)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말씀을 증언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망과 회중의 대망을 중심한 두 가지 사건을 적합하게 설파하도록 부름 받은 사역자요, 봉사자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르트가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증언하는 것은 인간의 부분이요, 그 약속을 성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약속은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의 보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약속을 선포하고 보증하며,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신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 가지 형식」을 (1) 설교된 말씀 (2) 기록된 말씀 (3) 계시된 말씀으로 병렬한 것에 비하여 디트리히 리츨(Dietrich Ritschl)은 그 순서를 달리하여 (1) 계시된 말씀 (2) 기록된 말씀 (3) 설교된 말씀으로 병렬하였다. 리츨은 하나인 말씀의 세 형식과 한 분인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 양식 사이에는 ?삼일론적 유비?가 있다고 보면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명백히 하나님(창조자)과 계시된 말씀 사이에, 아들인 하나님(화해자)과 기록된

말씀 사이에, 성령이신 하나님(구속자)과 설교된 말씀 사이에 어떤 유비가 존재

한다......... 하나님은 세 가지의 존재 양식을 이루면서도 유일한 하나님이며, 말씀은

세 개의 형식을 가지면서도 유일한 말씀인 것이다.

훌륭한 설교는 창조주 성부 하나님을 증언하고, 성서에 의하여 증언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며, 성령에 의하여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며 재창조 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설교의 신학적 과업은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the timeless truth)와 적시적 진리(the timely truth)를 선포하는 것을 포함한다.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는 설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증언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다. 그 예를 들어보자.

⇒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구원자시다.

⇒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주님이시며 구원자시다.

⇒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어 지도와 위안과 힘을 주신다.

⇒ 주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

⇒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 승리에 동참하라.

기독교의 적시적 진리는 특수한 시대와 상황에 관련하여 증언하는 진리이다. 적시적 진리는 야구 경기의 적시타처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도 적합한 진리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분쟁과 갈등 속에 있는 회중들에게 화해의 복음을 증언함으로써 화해와 일치의 문이 열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시적 진리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만일 갈등과 위기 속에 있는 부부가 말씀 증언을 듣은 후 변화되어 사랑과 화해의 관계를 되찾았다면, 설교자가 적시적 또는 화육적 진리를 선포했기 선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훌륭한 설교를 시행하려면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와 적시적 진리를 설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훌륭한 설교자는 고립적이거나 도피적인 위치에서 말씀을 증언하지 않는다. 그는 신도들의 매일 생활과 특수한 요구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설교자의 신학적 과업은 반영적 reflective) 이기보다 오히려 응답적(responsive)이다. 설교의 책임을 맡은 교역자는 개체 교회의 입지 조건과 회중의 상황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 없다. 훌륭한 말씀 증언자의 설교에 있어서 신학과 설교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 한스 큉(Hans Küng)은 “가장 훌륭한 신학은 훌륭한 설교와 같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훌륭한 설교는 신학을 동반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 선포자의 제1차 신학적 과업은 다음 세 가지 유형의 선포를 적합하게 수행하는 일이다. 그

세 가지 유형의 선포는 1)메시야적 선포, 2) 제사장적 선포, 3) 예언자적 선포이다 메시야적 선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요, 제사장적 선포는 사죄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며, 예언자적 선포는 정의와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특성을 갖는다.

복음 선포자의 제2차 신학적 과업은 절망과 병과 고통 속에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는(comforting) 메시지를 전하는 한 편, 불공정과 불공평 그리고 억압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과 새로운 미래에 대한 복된 소식을 전하는(informing) 일이다 위안 자와 소식 전달자로서의 설교자는 회중과 가까운 관계를 지속하면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억울한 백성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복음 선포자에게 있어서 그 다음 중요한 신학적 과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따르는(following) 일이요, 동시에 백성의 음성을 들은 후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추어 회중들을 이끌어 가는(Leading) 일이다. 여기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시를 경청하고 백성의 음성을 바르게 들은 후 인간의 생각과 마음에 깊이 접촉하는 언어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를 수행한다.

복음 선포자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신학적 과업은 「21세기 설교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일이다.

Ⅱ. 설교의 문제점 진단

설교와 관련한 문제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곧 그것은 말씀 증언자 듣는 회중이다.

1. 설교자의 측면

1996년 9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생들은 「설교학」웍샵을 통해 「설교자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로, 현장 목회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설교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 준비를 위한 시간을 정해 놓아도 자주 방해를 받는다.

둘째로, 설교 자료가 다양하지 못하여 설교는 한정된 내용을 지닐 때가 많다.

셋째로, 설교자가 영적인 힘이나 권위를 지니지 않을 때 설교의 효과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다.

넷째로, 설교자가 회중의 요구와 형편을 망각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설교할 때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섯째로, 설교자는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와 적시적 진리를 적합하게 전달하지

못할 때가 많다.

여섯째로, 설교의 구조, 실연방법, 언어사용, 예화 사용에 있어서 다양성이

부족하고 성숙성이 결여 되어 있다.

일곱째로, 설교의 수와 양에 비하여 회중들의 삶은 기대한 만큼 변화하지 않는다.

2. 회중의 측면

신학 대학원 학생들의 웍샵으로부터 「듣는 회중의 문제점」도 아래와 같이 제시되었다.

설교에 대한 회중의 기대감이 점차적으로 감소됨에 따라 설교 청취에 대한 열의도 식어 가고 있다. 설교를 열심히 듣는 회중도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는 설교보다 축복과 위안을 베푸는 설교를 더 요구한다. 성숙하지 못한 신도들은 교역자의 설교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순수한 말씀을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역자의 불완전한 인격성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그의 설교를 비판하려고 한다. 어떤 신도들은 예배를 드리기보다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에 출석한다. 그들 중에는 말씀대로 순종하고 생활하려는 용기와 능력이 부족하다.

현장에서 목회하고 있는 신학 대학원 학생들의 집단적 연구는 설교의 현시적 문제점을 실제적으로 나타내 주었다. 필자는 여기에 덧붙여 「설교의 문제점」을 개괄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 세속 주의, 물질 만능 주의, 대중매체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예배와 설교에 대한 신도들의 열의가 식어 가고 있다.

⇒ 과학만능주의, 향락주의, 유흥 중심의 삶의 영향으로 설교 경청에 대한 신도의 열심히 저 하 되고 있다.

⇒ 소외와 격리(하나님, 사람, 자연으로부터)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 메시야적, 제사장적, 예언자적 선포를 적합하게 시행하지 않는다.

⇒ 목회적 설교(pastoral preaching)가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지 않다.

⇒ 성서적 설교, 예언자적 설교, 현대적 설교를 고르게 시행하지 않는다.

⇒ 설교자의 자질 (인격, 삶, 전달 능력, 소명, 헌신 등)과 관련한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 커뮤니케이션의 모호성과 결핍이 계속되고 있다.

⇒ 설교를 통한 지식의 변화는 일어나고 있지만, 태도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를 조성하고 있 지 못하다.

⇒ 설교를 듣는 회중의 신앙과 생활이 일치되고 있지 않다.

⇒ 설교는 개인 구원에 큰 도움을 주지만 사회 개혁이나 우주적 선교에는 영향을 크게 끼치 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위와 같이 제시된 「설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21세기 설교 전략을 아래와 같이 탐구하기로 한다.

 

Ⅲ. 21세기 설교 전략 1 : 지속시켜야 할 설교 유형

21세기에 한국 교회가 계속 시행해야 할 설교 유형은 넓게 보아 1) 성서적 설교, 2) 예언자적 설교 3) 현대적 설교이다.

성서적 설교(the Biblical Preaching)는 주로 본문 설교와 강해 설교로 구분된다.

본문 설교(the Textual Sermon)는 성서 본문을 닻(anchor)으로 하여 복음을 전달하는 설교이다. 훌륭한 본문은 그 자체가 심오한 메시지를 전해 준다. 훌륭한 본문 설교는 회중의 생각과 상상력을 집중시킬 뿐 아니라 사죄와 구원을 확신케하며 진리를 삶 속에 구현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본문의 메시지와 내용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이념적이면 신앙과 생활의 통전을 위해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강해설교(the Expository Sermon)는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상황을 밝힌 후 현실의 상황과 관련하여 재해석하고 적용하는 설교이다. 이 과정에서 설교자는 먼저 성서 본문에 주어진 주제와 목적을 분명하게 설정한다. 그리고 그는 성서의 전체적 계시와 관련하여 본문의 진리를 주석하고 해석한다. 그 다음의 과정은 해석된 진리를 조직하여 현실의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이다. 만일 강해 설교가 성서적 관점과 현실적 관점을 적합하게 조화시키지 못한다면 신도들의 성숙한 생활을 위해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성서적 설교를 훌륭하게 수행하려는 설교자에게 요청되는 긴요한 설교의 요소는 긴박성, 확실성, 보편성, 구체성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진리를 통해 회중들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인격과 삶을 통하여 설교를 보여 주어야 할 과업을 지닌다.

성서적 설교에 이어 지속시켜야 할 설교 유형은 예언자적 설교(the Prophetic Sermon)이다.

예언자적 설교의 주요 특성은 현실 직관 및 회개 촉구, 철저한 복종의 생활, 그리고 희망적 미래를 선포하는 것이다. 예언자적으로 설교하는 교역자는 시대를 말하고 인간의 죄악을 고발하는 동시에 정의로운 하나님의 뜻을 용감하게 외친다. 그러므로 예언자적 설교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회복하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새로운 인간 실존을 의식하고 정의와 평화와 창조 질서의 보전을 실현하는 데 초점을 둔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예언자적 설교를 시행한 교역자들은 인권 회복, 여성 해방, 구조악의 철폐를 위하여 폭넓게 공헌하였다.

성서적 설교, 예언자적 설교에 이어 지속시켜야 할 설교 유형은 현대적 설교(the Contemporary Preaching)이다

현대적 설교는 무엇보다도 현대인의 고통과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와 관련하여 선포하는 설교이다. 현대적 설교의 특성은 이념적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해답에 필요한 계시를 말하며 이에 따른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현대적 설교는 쉽고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며 목양적 특성을 지니는 동시에 온전한 치유와 구원과 평화의 삶을 산출한다. 현대적 설교는 인간의 마음을 열게 하여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해 가시적 영향과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는 성서적 설교, 예언자적 설교, 현대적 설교를 계속해 가면서 설교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고 전략을 세워 나가야 한다.

 

Ⅳ. 21세기 설교 전략 2 : 목회적 설교(the Pastoral Preaching)

21세기에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설교는 「목회적 설교」이다. 왜냐하면, 목회적 설교는 회중의 개인적 고통과 불안과 갈등을 이해하면서 인간 경험의 내적 동력에 접촉하는 동시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건강을 회복시키는 말씀 증언이기 때문이다.

1. 목회적 설교의 기본 목적

목회적 설교를 가능케 하려면 무엇보다 신도들의 울부짖음을 감수성 있게 경청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신도들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극복하지 못한 갈등 관계로 시달리고 있다. 신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통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며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집단 상담적 설교를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문제를 통찰케 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한 평신도가 목사에게 보낸 간곡한 편지를 통하여 신도들의 고통과 요구를 감지할 수 있다.

☆한 평신도가 牧師에게 보낸 간곡한 편지(무명인의 편지)

사랑하는 목사님,

목사님은 저를 모르십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예배에 여러번 참여했습니다. 저는 중년 남자로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모르시고 저도 목사님을 잘 모르지만 설교와 관련하여 솔직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왜 예배하러 오는지 확실히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년간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래도 뭔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거룩한 것”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지만 예배에서 보통 때보다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합니다.

저는 목사님이 제가 느끼는 부분을 아시기를 희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님이 저의 과거 역사를 다 아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뜻은 목사님이 제가 품고 있는 아픔과 느끼고 있는 고뇌를 아시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깊이 알지도 않고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님이 저를 근본적으로 아시고 깊이 이해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특히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저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과 관련하여 의미를 주는 설교를 하신다면 저에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픈 사람이 의사에게 가서 진찰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목사님이 의사나 정신치료자가 도시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누군가 매일 저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문제들, 아픔, 애매모호한것, 공허, 불안과 관련하여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이 예배에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인간(human being) 즉 저와 같은 한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좀더 솔직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교회의 회중석에 앉아있습니다만, 목사님은 저를 좀 부드럽게 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보통 설교하시는 분은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모르실 때가 많습니다. 저는 왜 나의 어린 아들이 저의 고함 소리를 듣고 그렇게 흥분적으로 반응했는지를 그 녹음 테이프를 듣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저의 거칠고도 강요적인 말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목사님의 설교의 억양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목사님이 우리의 고통과 고뇌와 불안을 이해하시면서 말씀하신다면 고함을 치시지 않아도 주의를 기우려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다른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목사님의 바른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그 말씀에 대하여 저항하려는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저 자신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은 저보다 더 용감하게 말씀을 전해 주시고 또한 저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을 지니시고 설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제가 언급해야 할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목사님은 하나의 비전문가적 정신병의사(an amateur Psychiatrist)의 역할을 나타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님이 신학을 말씀하시고 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의 신앙은 저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종교는 건강한 인간됨을 산출한다고 믿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저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을 회복시키는 말씀 증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드리는 서신을 잘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주실 말씀이 계시면 답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위의 편지로부터 신도들의 고통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불건강과 엉킨 삶에서 해방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회중들의 치유와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도움을 주는 목회적 설교(또는 목양적 설교)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목회적 설교의 기본 목적은 주 그리스도 안에서 신도들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을 회복시키어 책임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교자의 우선적 과업은 상해를 격감시키거나 없애는 동시에 총체적 건강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다.

2. 「목회적 설교」의 방법

니콜스(J. Randall Nichols)는 목회적 설교의 가능성을 전망하면서 이와 관련된 중요한 질문은 “이 설교가 어떤 종류의 메시지인가?”가 아니라 “이 설교와 함께 무엇이 발생했는가?”라고 말하였다 목회적 설교를 가능케 하려면, 설교의 내용이 신도들의 관심과 접촉하고 가담하는 동시에 설교의 제목 자체가 가정붕괴, 이혼, 우울증, 갈등, 긴장, 인간의 복잡한 경험, 정신건강, 건전한 인간관계 등과 긴밀하게 관련해야 한다.

니콜스가 제시하는 목회적 설교의 방법은 21세기의 설교전략에 참신한 길을 안내해 준다. 그는 목회적 설교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8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로, 목회적 설교는 신도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목적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설교자는 여기서 문제에 대한 해결사가 아니라 문제 해결에 필요한 통찰력과 능력을 갖도록 회중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a facilitator)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복음의 진리를 연역적으로만 선포하지 않고 회중의 생각과 경험으로부터 나타나는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신도들의 성숙한 삶으로 안내하는 말씀을 선포한다.

둘째로, 목회적 설교는 신도로 하여금 현실에 직면하여 바르게 살도록 돕는다. 정신적으로 쇠약한 사람은 현실을 바르게 직면하지 못한다. 그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여기서 치료자의 임무는 환자를 올바른 현실 생활로 인도해 주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병약한 사람은 현실을 떠나 시장(市)처럼 복잡한 곳에서 헤맨다. 이 때 치료자는 그를 시장에서 성소(聖所, sanctuary)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설교가 지나치게 마술적이거나 신도의 주체성을 빼앗으면 오히려 신도들에게 해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설교자가 모든 경우 “하나님이 고통을 없애 주실 것입니다”라고 신도들에게 말한다면, 신도들은 마술적 기대에 따라 주체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갖도록 신도들을 도와준다.

셋째로 목회적 설교는 코이노니아를 창조하고 회중들의 자율적인 삶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가끔 “저는 목사님이 계시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붉은 기를 드는 신도를 본다. 신도들의 의존성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는 신도들을 무기력하게 하거나 불건강으로 이끌 수 있다. 무기력한 사람은 의기소침되고, 배우는 일에 진전이 빠르지 못하며, 병이나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른다.

넷째로, 목회적 설교는 죄책감을 지닌 신도를 책임적인 신도로 변화하도록 도와준다. 죄책감은 우리 자신의 권리를 파괴할 뿐 아니라 참다운 책임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목회적 설교는 개인적인 문제와 집단적인 문제를 가지로 씨름한다.

다섯째로, 목회적 설교는 훌륭한 비통(good grief)을 함께 나누도록 도와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사람들은 비통과 절망을 경험한다. 이 때 신도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는 것이다. 동시에 신앙 공동체는 슬픔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비통을 함께 나누며 상실과 결별에 대하여 적합하게 대처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여섯째로, 목회적 설교는 신도들을 분리시키는 부정적(否定的)인 태도와 삶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돕는다. 설교는 가족을 치유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역설적 진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는 남을 지배하기보다 남을 돕는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참다운 자기 부정(self-denial)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위해 불가결한 것이다.

일곱째로, 목회적 설교는 신도들로 하여금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돕는다. 목회적 설교자는 신도들의 내적 감정과 외부적 행동 사이에 격차 없이 조화를 이루도록 도울 수 있다.

여덟째로, 목회적 설교는 신도들의 생을 의미롭게 하도록 돕는다. 설교는 소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삶을 의미롭게 그리고 이해할 만하게 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신비 안에서 더욱 풍부한 삶을 살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목회적 설교는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를 수용하고 남을 수용하도록 도와준다. 목회적 설교는 자아 존중감(self-esteem)을 증가시킨다. 책임성 있는 설교자는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은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수용과 사랑은 유한하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책임적인 신도가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목회적 설교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이상과 같이 니콜스가 언급한 목회적 설교는 전체적으로 보아 목양적 설교 내지 집단 상담적 설교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중에는 실제 한국의 정황에서 쉽게 적용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이를테면, 니콜스는 “목회적 설교는 죄책감을 지닌 시도를 책임적인 신도로 변화시킨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한국 교회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사람들은 많으나 책임적인 신도는 적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회적 설교만으로 책임적인 크리스천이 되도록 할 수 있겠는가? 아마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는 특별한 설교 전략이 새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

니콜스는 또한 “목회적 설교는 신도들로 하여금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도우며, 신도들의 내적 감정과 외부적 행동 사이에 격차없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다”라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신도들은 자신의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데 익숙해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내적 감정과 외부적 행동 사이에 큰 격차를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목회적 설교만으로 기본적 목표를 달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역에 관련한 양육을 충분하게 시행할 과업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목회적 설교는 21세기 설교 유형 중 빼놓을 수 없는 설교이다. 그 이유는, 목회적 설교는 개인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도록 암시하거나 지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적 설교는 신도들의 전인적 건강회복과 현실직면에 필요한 신앙함양, 개인의 주체성 수립, 코이노니아의 증진, 신앙공동체 형성을 위하여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Ⅴ. 21세기 설교 전략 3 : 양육적 설교(The Nurturing Sermon)

양육적 설교의 목적은 신도로 하여금 기독교적 그리고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일상 생활 안에서 진리를 구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 목적과 관련하여 우리는 대 전제와 소 전제를 다음같이 설정한다.

대 전제 : 기독교의 진리는 관계적 진리(the relational truth)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나눔으로써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한다. 왜 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루드(Wayne R. Rood)가 지적한대로, 죄로부터 구원하고 사람들과 화해케 하며, 세계를 온갖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소 전제 :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이룰 때 타인과 바람직한 관계를 성취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성숙한 인간관계를 통하여 진리를 구현하고 사랑을 실천한다. 그러므로 양육적 설교는 적합한 「만남」, 「수용」, 그리고 「기독교적 인간관계 」를 통하여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다.

1. 「적합한 만남」을 조장하는 설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나 - 당신”(I - Thou)의 만남을 적합한 만남이라고 보았다. “나 - 당신”의 만남은 나의 일부만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whole being)를 내놓는 만남이다. “나 - 당신”의 만남은 이기적인 만남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만남이다. 그러나 “나 - 그것”(I - It)의 만남은 상대를 비인간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 만남은 상대를 사물로 대하고 이용물로 대하는 것이다. “나 - 그것”의 만남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고집하거나 앞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자는 “나 - 그것”의 만남을 버리고 “나 -당신”의 만남을 이룩하도록 돕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만남”의 모범을 들어 설교한다.

예 : 예수와 삭개오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주님과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그리스도와 야이로의 딸

죄인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그리스도

예수와 「대화의 기적」

한국교회의 신도들은 가끔 이 세상을 고모라와 소돔처럼 보면서 “세상과는 가까이 하지 말라”라는 태도를 지닌다. 이런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와는 정 반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매일 세상 속에 있는 세리와 죄인, 병자와 미천한자, 소외된 사람들과 억압된 민중들을 찾아 그들을 만났다. 21세기의 설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삶속에서 구현하도록 돕는 말씀 증언이어야 할 것이다.

2. 「용납(acceptance, 수용)의 생활」을 증진시키는 설교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용납의 높은 경지를 인지할 때 우리의 용납적 생활이 가능해 진다.

용납의 출발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 때 나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하셨다. 그러므 로 나도 남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그를 사랑한다.

용납의 생활 :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인간들을 무조건적으로 용납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용납하며 산다.

용납은 다른 사람을 그 모습대로 받아들이는 치료적 자세(therapeutic posture)이다. 진지한 용납은 정신치료에 있어서 불가결한 관계의 특성이기도 하다. 용납은 단순한 가치판단의 기준에서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존재와 그의 경험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진지한 수용은 긍정적인 상담관계를 조성하는 동시에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용납(self-acceptance)을 가능케 한다. 자기 용납의 성취는 치유를 위해 결정적이다. 한국인에게 긴급히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런 진지한 용납적 생활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용납을 본받아 진정한 용납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용납의 생활을 실천할 때 거기에는 친교, 자유로운 만남, 공존적 삶, 솔직한 대화, 그리고 신뢰와 사랑의 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성차별, 인종차별, 지역 갈등, 빈부차별, 교파 사이의 갈등, 성(聖)과 속(俗)의 차별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3. 「기독교적 인간관계」를 증진시키는 설교

한국교회의 신도중 구원을 받은 사람은 많으나 기독교적 인간관계를 완전히 수립하는 사람은 드물다. 기독교적 인간관계는 단순한 언행일치의 관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역설적 진리를 구현하는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보여 준 인간관계의 진수는 마태복음 72장 12절에 잘 나타나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21세기에 가장 필요한 신도의 생활은 기독교적 인간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과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일을 위하여 설교자는 아래 몇 가지에 중점적으로 관심을 두어 설교한다.

가. 남을 먼저 대접하는 일

나. 남을 먼저 불쌍히 여기는 일

다. 남과 먼저 화해하는 일

라.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는 일

마. 이해, 수용, 신뢰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일

바. 구속적 인간관계를 수립하는 일

사.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일

아. 원수를 사랑하는 일

자.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승리에 동참하는 일

차. 엘마오의 길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일

 

Ⅵ. 설교 전략 4 : 변화 추구의 설교

변화에는 내부적 변화와 외부적 변화가 있다. 이 변화는 또한 개인적 측면과 공동체적 측면을 지닌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우연한 변화가 아니라 계획된 변화(planned change)이다. 세이퍼트(Seifert)와 클라인벨(Clinebell)은 공저한 책 「개인 성장과 사회 변화」(Personal Growth and Social Change)에서 토착민 교회 지도자의 역할에 초점을 두면서 계획된 변화의 다섯 단계를 제시하였다. 그 단계는 (1)동기부여와 준비, (2) 문제진단과 해결 가능성의 모색, (3) 기본전략과 매일 활동 전략의 수립, (4) 계획안의 시행, (5) 재검토, 평가 그리고 변화의 안정이다. 설교를 통하여 변화를 추구하려고 할 때에도 위와 같은 계획된 변화과정이 필요하다.

설교자는 위의 다섯 가지 계획과정을 활용하는 한편, 신도들의 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1) 지식의 변화, (2) 태도의 변화, (3) 행동의 변화를 추구한다.

1. 지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

설교를 통하여 지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목적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길을 안내할 뿐 아니라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기독교인이 되도록 자극하고 지원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신도들은 설교를 들은 후 지식의 변화나 이해의 변화는 어느 정도 이룩해 왔으나 태도의 변화는 충분하지 않으며 더욱이 행동의 변화는 만족할 만큼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목회자와 설교자의 책임은 막중하다.

기독교의 진리를 인격화하고 현장에서 행동으로 옮기려면 무엇보다 먼저 진리에 대한 온전한 지식의 변화가 요청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사랑을 실천하려면 그 사랑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한국인 신도들은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배운 후 어느 정도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을 인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아직도 온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말하는 진리는 역설적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신도들은 대체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잘 먹고 잘 살며 복 받는데 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스도는 “으뜸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라고 교훈 하지만 신도들의 관심은 아직도 으뜸이 되고자 하는데 기울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신도들이 지닌 지식은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온전한 행동의 변화를 이룩하기 위해 온전한 지식의 변화부터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 태도의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

아무리 지식의 변화가 충분히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태도의 변화가 없다면 행동의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태도의 변화는 바로 앎을 행동으로 옮겨주고 교량의 역할을 한다.

설교자의 설교가 지식 전달이나 이해의 변화에만 영향을 끼치는 경우, 태도의 변화를 이룩할 수 없음으로써 행동의 변화를 성취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예를 들어, 만일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옹호하는 사람의 태도가 이미 고착되어 있다면 그 태도를 고치지 않는 한 성차별적 행동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 태도(attitude)란 무엇인가? 각 개인의 인성(人性)은 그의 태도 여하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 심리학적 견지에서 태도는 일정한 안정도(安定度)를 가지고, 어느 정도 지속하여 그것에 의해서 미래의 경험이 정해지는 어떤 심적(心的)경향, 또는 어떤 활동의 준비가 될 심적 상황이다. 그리고 태도는 심적 대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반응하려고 준비된 심적 경향이다.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태도에 따라 관심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론적(theoretical)형은 철학자가 될 소질을 지니며,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진리”이다. 심미적(aesthetic)형은 예술가가 될 경향을 지니며, 그가 관심 하는 것은 “아름다움”(beauty)이다. 사회적(social)형은 불행한 것을 개선하려는데 관심을 두면서 남을 위해 선을 베풀고자 한다. 종교적(religious)형은 절대자를 믿고 따르며 그는 해외선교에 관심을 둔다. 정치적(political)형은 남을 지배하는 권력을 원하며, 그의 목표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각 사람의 태도는 타고난 것으로만 볼 수 없고, 어렸을 때부터 자라면서 부모와 중요한 남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편견(prejudices)이 그러하다. 독일인이나 미국인은 대체로 유대인에게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 남성 중 어떤 사람은 여성을 천시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만일 개신교 신도가 선거에 임할 때 후보자가 천주교인이란 이유로 무조건 그를 배제한다면 그 개신교도의 선거하는 태도가 적합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아직도 한국의 신도에게는 빈부 차별의 태도, 여성을 차별하는 태도, 어린이를 업신여기는 경향, 지연 학연에 따른 결정의 태도, 인종 편견에 따른 부정적 태도, 기독교인의 외식적 태도, 기독교 지도자의 독선적 태도, “꿩 잡는 게 매”라는 편법을 사용하려는 태도 등이 남아 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부정적 태도의 높은 산을 어떻게 옮길 수 있겠는가? 이 험한 산을 옮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태도를 배우고 닮아 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편견이나 차별 없이 소외 계층의 사람들에게 연민의 태도를 보여 주었다.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여성을 평등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어린이를 귀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르쳤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자기를 모욕하고 죽이는 악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태도를 나타냈다. 21세기의 신도들은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를 배우고 따라야 할 것이다.

3.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

사람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어떤 알맞은 조건을 만났을 때 행동과 강력하게 관련한다. 그 조건이란 한 개인이 행동의 결정에 가담하는 정황을 포함한다. 특히 그 정황이 여러 가지 가치보다 자기의 개인적 의견을 반영시켜 결정되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은 단순히 명령하는 위치에 서는 대신 듣는 회중으로 하여금 자신이 스스로 행동의 결정에 가담하게 하고 자기의 의견을 적합하게 발전시켜 현명하게 결정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런 설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포스딕(Harry E. Fosdick)이 사용한 “생활-정황 설교” 또는 “집단 상담적 설교”가 적합할 것이다.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태도 이외에 의식적 과정(conscious process)이 있다. 의식적 과정은 점진적인 또는 적합한 동기 부여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의식의 세계는 마음(mind)의 세계와 가까이 관련한다. 마음은 의식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세계는 인지, 요구, 생각, 그리고 행동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것들과 관련한 경험이 분명할 때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라고 불리운다. 물론 어떤 일정한 행동 양식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그 행동의 동기를 순간적으로 식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의식은 모든 현상을 인지하게 하는 매체이다.

인간의 의식은 외부적 대상에 대한 인지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의식(self-consciousness)은 자신의 모든 인지와 오래 쌓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mind)은 개인적 경험의 특유한 성격을 인지하는 자아(self)에 속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듣는 회중의 의식적 과정을 통찰할 뿐 아니라 회중의 마음과 경험에 깊이 관련하는 설교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의미 있는 행동에 대한 자극이나 구체적인 암시를 받을 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를 갖게 된다. 필자는 애틀랜타에 있을 때 헤이굳(Haygood) 미 연합 감리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는데 담임 목사의 설교 중 “헌혈을 한 번이라도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자극을 받아 그 다음 날 헌혈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몇 년전 KBS 방송중 헌혈 챔피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헌혈의 챔피온이 된 그는 무려 83번이나 헌혈에 가담했다. 필자는 크게 감동하여 그 사실을 설교 때 설명하였는데 그 설교를 듣고 헌혈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참된 의미를 발견할 때 그것을 위해 자기를 바치고자 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의 의미를 발견할 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고 한다. 현대인은 가치 공백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찾는다면 그것을 위해 자기를 바칠 것이다.

궁극적으로 설교자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을 계승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천대받든 백성과 압박된 민중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포는 단순히 은혜를 받고 복을 받게 하는 일에 한정될 것이 아니라 정의 구현, 평화 수립, 창조 질서의 보전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변화를 이룩하게 하는 메시야적 선포, 제사장적 선포, 그리고 예언자적 선포이다. 21세기의 설교자는 지식의 변화, 태도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이룩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인식하여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가운데 개인과 사회를 변혁시키는 말씀의 파수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맺는 말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하여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구원하신다. 설교자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계승할 사명을 지닌다. 말씀 증언자는 미래 사회와 미래 교회를 인지하면서 21세기 설교 전략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지금까지 시행해 온 성서적 설교, 예언자적 설교, 현대적 설교를 지속시킨다. 그리고 설교자는 목양적 설교를 통하여 회중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건강을 회복시킨다. 전인적 건강을 회복한 신도들에게는 기본적인 양육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설교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남”, “용납”, “인간관계”를 함양시키기 위하여 양육적 설교를 시행한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긴급하게 요청 받는 설교는 변화를 이룩하는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지식의 변화”, “태도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위하여 설교한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말씀을 증언한다면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혁을 위해 큰 공헌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