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일반적 이해
A.리더쉽(leadership)의 사전적 의미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영어의 의미는 “지도자(지휘자,선도자 등)의 지위(신분,임무);지도(통솔,지휘)?하기?;지도자로서의 소질;지도력,통솔력;(어떤 집단의)지도부,지도자단,지휘자단”등으로 해석된다. 또한 “지도자가 되는 것;지도의 힘;지도자의 자질”등의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우리말의 가까운 의미는 “지도력”이라 할 수 있고,그 자세한 뜻은 “지도(바르고 옳다고 믿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이끌어 줌;인도(guidence)하는 힘”이라고 풀어 쓸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리더쉽(leadership)이란 “집단의 목표나 내부 구조의 유지를 위하여 성원(成員)이 자발적으로 집단 활동에 참여하여 이를 달성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능”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계 사전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적성,기술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줌으로써 그가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하게 사용하고 환경에 훌륭하게 적응하면서 맡은 바 일을 효과적으로 행하도록 하는 일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정의한다.
위의 말들을 종합하여 볼 때 지도력 또는 리더쉽(leadership)이란 일반적으로 ‘지도하는 기능,지도하는 힘, 그리고 지도하는 지위’등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리더쉽(leadership)이론의 역사
전통적으로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연구는 1)지도자의 “특질(trait)”이론 2)리더쉽(leadership)의 “지위(position)”이론 3)지도자의 “유형(style)”이론으로 집중되었었다.
1)지도자의 “특질(trait)”이론: 특질(trait)이론에 중점을 둔 학자들은 ‘지도자의 독특한 성격(Smith,Krueger),잠재적 능력,지도자의 선천적 요인(Cartwright,Zender), 지도자의 코뮤니케이션과 그 특성(H.C.Russell, G.Lumsden,J.Geier) 예컨대,쾌활,객관성,융통성 등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2)리더쉽(leadership)의 “지위(position)”이론:리더쉽(leader- ship)은 일반적으로 ‘조직체 안에서 높고 권위있는 자’가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이론이 바로 “지위(position)”이론이다. 피지도자들이 조직의 요구를 성취하도록 특정 인물에게 리더쉽(leadership)을 부여하며,힘있는 자나 형식적 힘이 있는 자가 그 지위를 차지한다(C.A.Gibb).
3)지도자의 “유형(style)”이론:우리가 보통 지도자가 ‘민주형’이니,‘방임형’이니,‘전제형’이니 하는 분류가 바로 이 “유형(style)”이론의 분류 방식이다(Lewin,Lippitt,White). 많은 유형들이 있으나 보통 위의 세 가지 방식으로 분류한다.‘전제형’의 지도자들은 명령이나 지시로써 지도하며, 그들이 하는 칭찬과 비판이 주관적일 때가 많고,과업 성취도가 많다는 평을 받는다.‘민주형’지도자들은 직접적인 지시를 피하고 자기 지시내용을 원조하고 자극하는 방법을 쓴다. 이 ‘민주형’ 지도를 받는 그룹은 창의적이고 지속적이다는 장점이 있다.그러나 ‘방임형’의 지도자는 리더의 역할을 태만히 해 문제 해결에서 시간을 허비한다고 평가 받는다.
4)오늘날의 리더쉽(leadership) 이론들: 오늘날의 복잡한 사회적 상황속에서 요구되는 리더쉽(leadership)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이에대해 「사회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시도되어 나타난 이론들은 ‘상황 이론’,‘기능 이론’,‘교류 이론’등이다.
휘들러(F.Fiedler)는 효과적 리더쉽(leadership)애 대한 세가지 要素로서 (i)원래부터 부여된 힘 (ii)수행해야할 과제의 구조와 본질 (iii)리더와 그룹 상호간의 인간관계를 지적한다(‘상황이론’).
리더쉽(leadership)은 리더쉽을 보여주는 ‘개인적’문제와는 상관없이 누구든지 최소한의 필요만큼 획득할 수 있는 일련의 학습되어진 기술이라고 여기는 이론이 ‘기능이론’인데, 카텔(R.B.Cattell)은 “어떤 그룹 성원이라도 그룹의 기능에 기여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터너(N.W.Turner)는 “리더쉽(leadership)이란 한 그룹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 그룹의 멤버나 혹은 멤버들에게 위임된,그리고 나누어 가진 특수한 역할이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리더쉽(leadership)의 ‘교류 이론’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리더와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의 질(quality)”을 고찰하는 이론이다. 즉 구성원이 인식하는 리더의 위치(status)와 합법성이라는 것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따라서 ‘교류 이론’에서의 리더쉽(leadership)의 효과는 리더와 구성원간의 상호 영향력과 사회적 교환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
C.정 리(整 理)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리더쉽(leadership)”이란 ‘유형적(有形的)’인 것이나 또는 ‘인격적(人格的)’인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리더쉽(leadership)은 ‘지위’,‘힘’,‘기능’ 등 무형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리더쉽(leadership)이 ‘지배’와 다른 것은 그 기능의 수행을 피지도자의 자발성에 기대한다는 점이고,또 집단의 성질에 따라 그 특성이 반드시 고정적이 아닌데 있다. 리더쉽(leadership)은 그 기능의 방법에 있어서 탄력적이어야 하며,그러기 위해서 리더는 통찰력과 적응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지도력을 소유한 자,또는 지명된 자는 ‘교류 이론’에 따르면,피지도자와의 사회적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이미지는 왜곡(歪曲)되어져 가는 경향이 있다.
또한 ‘기능 이론’에 따르면 리더쉽(leadership)은 천부적이 아니고 개발되는 자질이다.
우리가 현대 한국 교회의 바람직한 리더쉽(leadership)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위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리더쉽(leadership)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II.성경에 나타난 리더쉽(leadership)
A.구약에서
1)“왕의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성경의 이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유목생활을 끝내고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들은 자기들을 다스릴 새로운 지도자를 뽑게 되었는데 이들이 士師이다. 그후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보다 더 강력한 리더쉽(leadership)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 즉 나라가 조직화되고 확장되며,외세의 위협아래 있는 상황에서는 왕권의 도입이 필연적인 것이었다.
개역 성경에 ‘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는 약 7 개이다. 그중에서 ‘melek’라는 용어가 2522회 쓰임으로써 단연 首位를 차지한다. ‘melek’는 일반적으로 ‘왕’을 가리키지만 때때로 ‘다윗 왕’을 가리키거나 ‘이스라엘 왕’을 가리키기도 한다.
히브리인의 ‘왕’의 개념은 본래 하나님과 백성의 중매자요,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관계에서 나타났다. 그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거나 압제하는 존재가 아니며 해방과 자유를 주고 연약한 자를 돕는 왕이다.
여기서 왕적 임무라는 것은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의미가 부여됨을 인식해야 옳바른 성경적 리더쉽(leadership)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서 왕은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만 그 참된 의미를 간직할 수 있다. 왕들의 왕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사랑으로써 영적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가르치신다.
이리하여 “왕의 리더쉽(leadership)”은 “종(從)의 리더쉽(leadership)”에로 포함되게 된다.
2)“종(從)의 리더쉽(leadership)”
‘종’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선택하셨고,또 그에게 개인적으로 일을 맡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사야 44장 1절~2절)
우리는 일반적으로 ‘종의 노래’라고 불리우는 이사야 42장 1절~4절,49장 1절~6절,50장 4절~9절,52장 13절~53장 12절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시는 “종(從)”의 의미와 태도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이사야 50장 4절에서 9절까지는 “종의 태도”에 관해 묘사하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나와 함께 설지어다.나의 대적이 누구뇨.내게 가까이 나아 올지어다.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이사야 50:4~9).”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종은 하나님께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고,온갖 수욕을 참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그 종을 의롭다 하신다.
여호와는 그의 종을 민족들에게 공의를 가져오기 위하여 여호와의 영을 부여받은 선택된 자로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의 리더쉽(leadership)을 代行하는 사람인데 그 종은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을 쓴다. 하나님의 방법은 위에서 살펴 본대로 온갖 수욕을 참고 당하는 것이다.
이 종의 리더쉽(leadership)은 하나의 모형인데 그 원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고난의 종(從)”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셨고, 이 ‘고난’과 ‘종’의 모습을 교회의 지도자상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모습은 사도들에게 전승되어졌다.사도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밝힌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擇定)함을 입었으니(로마서 1장 1절)”
살펴 본대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종의 신분은 매력있는 삶의 길이 아니다. 치러야할 댓가가 비싸다.그러나 종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고귀하고도 특별한 것이요,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출애급기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종은 매여 있는 동안 특별한 관계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그가 영영히 상전을 섬기리라.(출애급기 21장 5~6절)”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종’이지만 노예가 아니라 특별한 관계로까지 발전된 종이다. 그러한 종은 종이되 즐거운 종이다.
3)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한 사람들
(a)민족의 지도자 모세:모세에게서 발견되는 ‘소명’의 패턴은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크게 교훈을 준다.그는 처음 애급 궁정에서 공주의 아들로서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지위이론’에 의하면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다.그리하여 모세는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동족을 구해 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방법의 眞面目이 나타난다. 모세는 자신의 지위가 한없이 낮아져 이방인의 고용인처럼 되고 만다.이처럼 철저히 인간의 방법이 무너진 후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을 재구성하시며 모세에게 소명을 주셨다. 모새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탁월한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하는데 그의 독특한 특질 중에 하나는 ‘온유함‘이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수기 12장 3절).”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에 대하여 몇 가지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즉,(1)그의 믿음에서 (2)그의 성실성에서 (3)그의 통찰력에서 (4)결단력에서 (5)복종심에서 (6)그의 책임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b)강한 지도자 다윗:다윗은 B.C.1000년에 왕위에 올라 약 45년 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그는 이스라엘의 둘째 번 왕으로서 첫째 번 왕 사울과는 대조적인 인물임을 우리는 잘 안다.
다윗은 숭고하고 관대했고 존경받았던 인물인데 반해 사울은 천박하고 지도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훌륭한 덕성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던 자였다.
다윗이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몇 가지로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외교 정치에 있어서 현명했다(삼하 5:11). 둘째, 다윗은 주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통치를 훌륭하게 해냈다(삼하5:12). 세째,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구했다(삼하 6:12~15). 네째, 지도자로서 다윗은 종교의식에 참여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섯째, 강한 지도자로서의 다윗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이끌었다(삼하 6:15).
왕으로서 독특한 지도력을 갖추었던 다윗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불리움을 받는다. ‘사무엘 하’에서부터 ‘역대기 상’까지만해도 “(나의) 종 다윗”이란 직접적인 표현이 30여 차례 나타난다.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삼하 3:18).”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왕하 11:13).”
이처럼 왕과 종에 대한 연결점이 다윗의 경우에서 확실해진다.하나님의 종으로서,그리고 백성의 왕으로서 다윗은 생전에 그가 행사했던 리더쉽(leadership)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c)지도자중의 지도자,느헤미야:영향력있고 권위있는 지도자 자격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성경적인 본보기 중의 하나를 느헤미야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때때로 그의 방법은 다소 강경하게 보였으나, 그는 놀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자기 백성들의 삶 가운데에 극적인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았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탁월한 면은 첫째,완전한 조직력에서 찾을 수 있다. 느헤미야는 문지기들을 適材適所에 배치했고,특히 래위인들에게는 방안에서,그리고 보고에서 일하도록 해서 여러 가지로 책임을 져서 일하도록 나누어서 시켰던 것이다(역대 상 9:26~32,23:24~32 참조).
둘째로 느헤미야는 위대한 건설자였다. 위대한 지도자 느헤미야를 성경에서 살펴 보면 그의 성품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어 질 수 있다(느헤미야 3:1~6:16). (1) 그는 행정력의 소유자이다. (2)계획을 주밀하게 세웠다. (3) 감독자로서의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 이외에도 구약에서는 지도자의 모습을 양을 돌보는 자,즉 목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당시의 목자들이 주로 하는 일은 양들을 돌보고 다른 포악한 짐승으로부터 양떼를 지키는 일이었다(암 3:12, 겔 34:8). 하나님은 이런 목자의 생활을 성실히 하던 사람을 부르셔서 백성의 인도자로 삼으셨다.
“목자(raah)”라는 용어는 신약에 와서 목사(ποιμην 엡 4:11)로 쓰이는데 이 목자의 기능은 ‘돌보는 기능(먹이를 줘서 돌본다)’,‘감독하는 기능(범위 밖에 있는 양을 제어하는 것)’,‘권면과 위로(교인이 당하는 슬픔과 고난 위로)’,‘지도자(인도자:양떼를 몰고 가는 인도자)’,‘보호자(keeper,막아내는 자)’로서의 기능 등이다.
B.신약에서
영어의 “laity(평신도)”의 어원인 헬라어의 “λαοσ”는 신약에서 교회의 전문직 스태프와 교회의 다른 구성원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라이트푸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직자(κλεροι)다”라고 진술하였다. 엘튼트루블러드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인습적인 구별은 신약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흐름으로 사도시대가 지난 후까지 성직자와 평신도는 따로 분류되지 않았다.
신약에서는 이처럼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책임과 은사와 부르심의 여러가지 직에 따라서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주종(主從)관계로서의 구별은 없으나 직분에 대한 신약적 구분은 명백하다. 그 직분은 ‘사도’,‘감독’,‘장로’,‘목사’,‘집사’ 등 다섯 가지이다. 전체 교회에서의 사역은 사도가 담당하였지만 그 외의 네 가지 직분은 지교회(枝敎會)에서 사역을 하였다.
‘감독’,‘장로’,그리고 ‘목사’에 대한 지교회의 지도자들의 명칭이 서로 혼용된 것을 보면 신약시대에는 그들의 직무가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았었다고 추측된다. 즉,‘감독’,‘장로’,‘목사’라는 성경 단어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으며,설교-가르침,목양 그리고 통할에 대한 제일의 영적 책임이 있는 지도자를 칭한 것이다.
1)목사:‘목사’라는 용어는 신약에서 단 한 곳에서 사용되었다. 에배소서 4장 11절에 ‘ποιμην’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이 용어의 뜻은 목자라는 뜻이며 목자로서의 ‘기능’(Pastor)을 가리킨다.
신약에서의 목사의 기능들은 징계를 행하는 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는 일,공동예배의 집례,성찬 예식의 집례,자선 사업의 관리와 교회 공동체에 대한 총괄적인 감독 등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볼 때 목사는 감독으로서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사는 양떼에게 꼴을 먹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도하는 일도 한다.양떼를 보살피는 이러한 사역은 감독자들인 장로들에게 위임되었다(행 20:17,28). 이와 같이 감독과 장로의 제도 그리고 목사의 직분 등을 고려 해 볼 때 복잡한 조직 구조와 많은 직원들을 가진 현대 교회에서는 목사가 총체적인 감독과 관리를 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다.
2)감독:‘감독’이란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επισκοπη’이다.
이 용어는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방문,순방’에서 유래된다. 신약과 LXX(70인 역)에서는 종말론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예루살렘 入城과 관계지어 언급하셨다(누가 19:44). 그 입성의 날은 시온산의 대관식 날이요,예루살렘을 위한 영광스런 방문의 날이다.
이 말은 ‘위에서(επι)’와 ‘본다(또는 지키다, σκοπεω)’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명백히 ‘치리자’를 의미한다.
3)장로:헬라어의 ‘πρεσβυτεροσ’라는 용어가 ‘장로’에 해당되는데 이 말의 뜻은 ‘늙은,나이가 많은,옛 조상,유대인의 공회원,장로’등이다.그래서 감독(overseer,bishop,επισκοποσ)이라는 용어가 희랍문화에 가까운 용어라면 장로(πρεσβυτεροσ)는 유대인의 것에 더 가깝다.
중요한 점은 성경이 교회 장로들의 권리,특권 그리고 권한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오히려 성경은 영적 지도자의 자질,책임 그리고 제반 의무에 대해 역설한다.
그 의무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것과 그들의 본이 되는 것이며(벧전 5:2~3),영적 감독자가 되는것이며(행 20:28),사역을 위하여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며(엡 4:11~12),교회를 잘 인도하고 다스리는 것이며(딤전 5:17),그리고 바른 교훈을 가지고 권면하는 것이다(딛 1:9).
C.종합
지금까지 성경에 자타난 리더쉽(leadership)을 고찰해 보았다. 성경에는 많은 하나님의 종이 있으나 그 중에 리더쉽(leadership)에 해당하는 직책은 ‘왕’,‘목자’,‘종’,‘감독’ 그리고 ‘장로’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이라는 범주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들의 리더쉽(leadership) 실행 방법에 있어서도 ‘종(從)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봉사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적 지도자는 결국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자’로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주인도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종의 귀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목회자(목자)의 모본도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 주인께서 그의 종들에게 리더쉽(leadership)을 위임하셨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의 리더쉽(leadership)은 ‘위임받은 리더쉽(leadership)’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
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
리라(마 16:19).”
“내 양을 먹이라(요 21:15b).”
“내 양을 치라(요 21:16b).”
그러므로 교회 리더쉽(leadership)은 다음 두 가지에 있어서 상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첫째,지도자는 일정한 권한을 부여 받았다(살전 5:12~13,딤전 5:17,히 13:17,마 16:19).그래서 교인들에게 성경은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지도자는 통치자가 아니라 종이다(벧전 5:2~3,마 20:25~28,요 13:13~15).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교인을 복종시키되 억압이 아니라 ‘감동(感動)’으로 복종시킨다. 여기서 리더쉽(leadership)의 상징은 왕관이 아니라 수건이다.
교회의 리더쉽(leadership)은 위의 두 가지 원리가 서로 평행을 이룰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리를 떠난 지도자는 참된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III.현대교회 리더쉽(leadership)의 변화
A.변화하는 세계
지금 우리 현대인은 급변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 변화의 내용을 살펴 보면 과학,문화,정치구조,도덕,종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인간 생활의 전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에 따른 자연 환경의 변화는 次置하고라도 우리는 실로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인간의 異性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은 이제 우주항공,생명공학,핵 물리학,전자공학 등 그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인간에게 유익을 끼치기도 하고 해를 끼치기도 한다.
도덕은 그 이성의 발달로 인해 가치 기준을 잃고 있고 사회구조의 변화도 도덕의 변화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라는 것도 전통문화와 단절된 채 즉흥적이고 실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세계를 결집시켰던 권력구조(힘의 질서 또는 지도력 등) 전체가 붕괴되는 시기에 살고 있다.지금 근본적으로 다른 힘(power,권력)의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낡은 힘(power, 권력)의 패턴은 사무실,슈퍼마켙,은행,중역실,교회,병원,학교,가정에서 낯설고 새로운 방향을 따라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힘(power:권력)은 모든 방면에서 동시에 이동하고 있다.우리가 초기호 경제로 이행해 감에 따라 힘-물리력,부(富) 및 지식의 혼합물-의 성격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의 ‘힘’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교회는 세계 속에 있으며 교회 지도력은 사회의 일반적인 힘과 대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
이 오겠음이라.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한 14:30).”
B.교회 안에서의 리더쉽(leadership)의 변화
이렇게 세계는 급변하고 있고 성경의 훈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심도 함께 변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심은 20세기 전체를 통하여 끊임없이 감퇴된 것이다.
하기야 초대교회 시대,100여년 이상은 “조직”적인 교회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었다. 모두가 ‘가정’ 안에서 교회의 모임이 이루어졌고 지도자들도 모두 그 ‘가정’교회에서의 지도자에 불과했다. 교인들은 한 가족으로 모여서 함께 생활했으므로 그곳에는 인사담당부서도,교회 건축 위원회도, 신학교도 없었다. 교회의 유지관리가 단순해서 몇 몇 사람들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형태는 점점 복잡한 기관형태로 변모하였다. 오늘날 이 기관형태의 교회에서 리더쉽(leadership)의 힘과 지도자의 존경심이 감퇴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 리더쉽(leadership)의 역할에 대한 이해조차도 철두철미하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영적 리더쉽(leadership)의 기능이 단지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메니져」들의 필요에 의해서 왜곡되어 왔다.
교인의 수, 일 년 예산의 크기,교회당의 멋진 건축,교회 일원들의 활동의 참여도,그리고 프로그램의 다양화는 교회 지도자의 영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경영에 관한 책들은 ‘목표란 양적인 것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영적’목표,교회안에서의 목표는 그러한 기준을 적용할 수가 없다.
교회 안에서의 리더쉽이 변화하는 요인으로 J.E.민스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1)권위에 대한 거절:권위에 대한 보편적인 도전은 교회에까지 미쳐서 목회자와의 다툼이 보통의 일이 되었다. (2)교육 수준의 향상:회중의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관계로 교회의 의사 결정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뿐만아니라 또한 권력을 남용하는 지도자들을 대항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차원에서 보면 건전한 징후이다.그러나 지도자의 위치에서 본다면 도전임에 틀림없다. (3)전달매체의 대중화:대중매체의 발달로 사이비 종교,통신판매 안수식,값싼 학위,타락한 유명 종교 지도자들이 대중매체에 여지없이 폭로된다. (4)교회의 세속화: 우리는 다음의 말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단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그는 매사에 활동적이며,많은 집단을 조직하며,그의 행정하에서 교인의 수가 증가하고 예산이 확보된 것에 대하여 광고를 하며,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는 교회사업이 마치 상공회의소의 활동과 유사한 것처럼 교회를 경영해 나간다.” (5) 목양의 부족: 행정상의 노력,멋진 업무수행,프로그램의 경영,인사 모집,예산 확보 등에 우선권을 두기 때문에 목양이 소홀이 되었다.
사실 독일 슐라이어마허가 교리 신학을 실천 신학과 항상 병행하는 법이라 하여 현대 목회신학의 길을 열어 놓은 이후,현대에는 ‘문화와 同居하는 목회’가 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문화속에 동거하는 교회에서의 리더쉽(leadership)이라 할지라도 리더쉽(leadership)은 항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때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내포할 수가 있다.
C.교회 리더쉽(leadership)의 여러 가지 유형
목회자들에게도 여러가지 유형의 리더쉽(leadership)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박종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1)독재적 유형:이 유형의 교회 지도자는 독재자처럼 교인들 앞에 군림하며,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결정을 자신이 내린다. 따라서 지도자의 지도와 결정과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독재적 리더쉽(leadership)은 위급한 상황과 사람들의 안정에 크게 위협적이라고 판단될 때와 아주 강력한 징계가 요구될 때 잠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2)권위주의적 리더쉽(leadership):이 유형의 교회 지도자는 자신의 의견이나 견해만이 가장 유용하고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견해와 결정에 대해서는 항시 비판적이며,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자질에 대해선 신뢰성이 결핍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잘 한 일에 대해 거의 인정해 주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 타인을 자주 이용한다. 사람 중심의 리더쉽(leadership)이라기 보다는 임무 중심의 리더쉽(leadership)이다. 이런 유형의 리더쉽(leadership)은 사람들이 종종 권위를 오용하고 있을 때,조직체의 법과 질서가 계속 위반되고 무너질 때,지도자 자신이 결정을 내리고 그 일을 수행해야 할 필요를 느낄 때 사용되어 질 수 있다.
3)협의적 리더쉽(leadership):이런 유형의 리더쉽(leadership)을 소유한 교회 지도자는 계획을 세우거나 결정을 하는데 타인의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사용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기전에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도자가 최종 결정을 내린다. 다른 사람의 잘한 일을 합당히 여긴다. 중요한 책임을 종종 타인에게 부여하고 위임하지만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결정전에 모든 대안을 심사숙고하고,교인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은 이유를 교인에게 설명해 준다.이런 유형의 리더쉽(leadership)은 조직의 계속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할 때,창조적이고 전향적(前向的)인 필요시,그리고 일상적인 업무가 조직적일 때,사용하면 좋다.
4)참여적 리더쉽(leadership):모든 사람의 아이디어가 동등해서,모든 권위를 타인에게 주고 위임하고 지도자 자신은 그 단체의 명목상으로만 남는다. 타인의 의견이 못마땅해도 받아들이고,그 단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창조성과 도덕성을 돕는다. 이런 유형의 리더쉽(leadership)은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업무에서 책임을 수행할 능력이 있을 경우와 조직의 계획을 세우고 평가를 내릴 경우 유용하다.
그러나 제임스 민스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 사역의 지도력」에서 지도자의 유형을 ‘도전적인 지도력’과 ‘순응적인 지도력’으로 크게 구분하며,순응형이거나 도전적인 형태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또한 극단적인 유형이 바람직하거나 효과적이라고 규정하기는 힘들다고 전제하면서 두 리더쉽(leadership)의 특징과 효능성을 설명했다.
(i)도전적인 지도자의 행동:극단적으로 도전적인 지도자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성 또는 확신이 부족함을 나타낼 수가 있다. 이것은 지도자 편에서의 심한 불안감을 암시하는 것이다. 극도로 도전적인 지도자들은 자신의 목표나 또는 그들에게 좋을듯이 보이는 목표를 그룹의 목표에다 대치시키려는 강한 경향성을 지닌다. 도전적인 행동이란 지도자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압박감의 표현인 것이다. 도전적 행동의 으뜸가는 외적 표시는 지도자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룹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의사 결정 과정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환언하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전체주의적인 통제를 제외하고도,도덕적 판단은 도전적 지도자에게 넘겨서는 안된다. 오히려 다음 두 가지 질문을 하여야 할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도전성이 요청되는가? /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도전성이 도전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가?”
(ii)순응적인 지도자:순응적인 지도자는 대체로 그룹 전체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협력할 때 더 나은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사실 개인이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전문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그룹전체의 사람들이 개개인보다 더 훌륭한 결정을 한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하여 입증되었다. 순응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결정을 받아 들을 교묘하게 조종하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도전적,순응적’ 분류 방식에 의하면 한 지도자가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도전”과 “순응”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창출해 내야 하는 것이다.
IV.현대 한국 교회안에서의 바람직한 리더쉽(leadership)
A.한국교회의 한국학적 배경
한국인은 한국의 문화와 전통 사상을 이어받고 있다. 이 전통 사상이라 함은 고정불변의 철학 원리가 아니라 시대나 환경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민족의 생활 양식과 가치관을 지배해온 “精神史的 原理”를 말한다.
韓國學의 諸分野로는 「국어학」,「역사학」,「민속학」,「문화 인류학」,「한국 철학」 등이 있다. 이 논문에서는 그중에 ‘종교’와 ‘문화’면만을 살펴 보고자 한다.
1836(헌종2)년 조선에 잠입한 프랑스인 신부(C.Dallet)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시대만 해도 우리 문화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 기록은 사상사적으로 어떤 구조화된 인식체계의 추구에서보다 일상생활 면에 나타난 관찰-기록과 목적 의식에 의해 수집된 일련의 소재에서 찾아냈다는데 의의가 있다.
먼저 종교적 관념에서 신관(神觀)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천(天)과 혼동하는 아주 막연한 상제(上帝,至高神)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Dallet는 그 상제는 만물의 생성,보육,병액(病厄)을 제거해주는 ‘天,不可知’의 힘이라고 파악했다. 그는 조상숭배를 자세히 관찰한 결과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고 충실히 실행하는 유일한 종교는 조상숭배”라고 단언한다. 이 종교행위의 촛점을 유교적 제례의식으로 돌리며,한극인의 영혼 이해는 이 「조상숭배」에서 비롯된다고 파악했다.
그 다음으로 Dallet는 우리 민족의 특징을 「협동 정신」에서 발견했다. 19세기 중엽 일부 서구 사회가 고도의 자본주의 단계에 있을 때 사회적 공동생활은 개체 중심의 이기주의적이었다. 이때 한국은 협동생활로 서로 보호하고,의지하고,협조하고 있었으므로 Dallet는 “조선인의 위대한 장점은 인류애 법칙을 선천적으로 존중하고,일상에 그것을 실행하고 있다”고 한국인의 이런 협동생활과 그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과객환대(過客歡待)에 대한 의견도 제시했는데, 그는 “(조선인은)누구나 (과객환대)가 가장 신성한 의무라고 인정하고 있다”고 보며 환대하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이라고 했다.
Dallet는 종교에 대해서 관심있게 살펴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유교와 불교는 두 개의 다른 형태의 무신론에 불과하다.” 이것은 법률상으로 인정된 사상이나,종교적으로 검토되지는 않았다. 양자는 서로 혼합되어 「내세(來世)에 대한 무관심」을 낳았고 현재를 향락하게끔 했다.일반적으로 유행하는 것은 무신론에서 결연한 「巫의 信仰」이다. 귀신은 도처에 있고 실제로 활동하며,주술과 마력을 쓰는 술사가 존재한다.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Dallet 신부는 상당히 심층적으로 구한말(舊韓末) 조선인의 종교성과 심성을 파악하고 있다. 조선인의 종교성과 심성중
어떤 점은 기독교에 해로운 점도 있으나 어떤 점은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장점을 갖는 것도 있다.
예컨데 전통적인 제천 의식 속에 있는 「신(神,한울림)」의 개념이다. 비록 막연하긴 해도 조선인의 심성에는 「한울림」이라고 하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인격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 기독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중 종교적 심성에 대해서는 뒤에 별도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전통문화는 20세기를 전,후로 하여 큰 역사적 계곡을만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를 단절시킨 ‘일제 식민지 통치’를 그 역사적 계곡과 동일시 한다. 전통문화가 단절된 이유로 ‘일제 통치’외에도 ‘군사문화’,‘급격한 사회 변동’ 즉 도시화와 인구이동 그리고 ‘6.25 전쟁’과 ‘정권의 부도덕성,비정통성’등을 들고 있다.
근래 이런 역사를 겪어온 한국인은 다음과 같이 과거부터 몇 몇 종교를 편력(遍歷)해 오면서 그 심성의 세세한 부분까지 구체화되어 왔었다.
B.한국인의 종교의식
1)무속 신앙(巫俗信仰)
처음 한국인은 북방 우랄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그들이 만주와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 무교적 문화도 함께 가지고 왔다. 그후 고조선 이래로 무속이 한국인의 종교적 바탕을 이루어 오다가 4세기 이후 중국으로부터 불교,유교가 들어 오면서 혼합되어져 한국인의 마음과 한국 문화를 구성하고 현대에도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무속의 민간 신앙은 먼저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고 믿는 Animatism에서 비롯되었다. 산악,하천,수목,암석 등 자연물에 대한 그대로의 신앙이 차츰 발달하여,모든 물체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Animism이 되었다.
무속적 신앙에서의 종교행위는 무당과 무관의 집례하에 행사되었다. 무속의 제사에 대하여 이능화 씨는 女巫를 ‘巫堂’이라 하고 男巫를 ‘巫觀’이라고 칭했다. 이 샤만은 영게와 인간 사이에 있어서 중재적 역할을 하는데, 이 다리 역할은 ‘무(巫)’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엑시타시와 신들림 속에서 영계를 탐지하고 영능을 행사할 수 있어서,제사,주술 등으로 끌어들이는 제사장이다.
김태균 씨는 무(巫)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巫’자의 위의 ‘一’은 하늘 또는 신령을 표시하며 아래의 ‘一’은 땅 또는 인간을 표시한다.그리고 가운데 ‘ㅣ’는 하늘(신령)과 땅(또는 땅위의 인간)을 연결하는 선이며 사람 ‘人’자 (두 개)는 사람이 춤추는 모습을 나타낸다. 즉 무교란 사람(무당)이 춤을 추어 신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게 하는 종교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샤만의 특이성은 歌舞에 있다. 노래와 춤은 엑스타시로 이끄는 기술이요,영교의 방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엑스타시 속에서 무격은 신령과 직접 교제하며,그 신령의 힘에 의한 화복의 조절을 목적하는 것이 무의(巫義)이다.이 무교의 제의가 기독교에 영향을 주어 노래하고,춤추고,북치는 굿형식에 따르는 부흥집회를 볼 수 있다. 굿이란 무교의 종합적 표현이다. 무당에 의한 가무새신과 제개초복을 위한 종교제사가 곧 굿이다. 굿을 때로는 ‘풀이’라고 하는데 결국 화근을 없애고 축복을 비는 제의이다.
그래서 무교의 가치기준은 윤리적 선악이 아니라 ‘복(소유)’의 有無이다. 따라서 목적만 위주하고 방법과 과정을 무시하는 책임의식의 결여가 샤먼의 특징이다.
그러면 무속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본다.
(i)세상적 현실주의 성격:무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없다. 망령들의 존재질서는 고작해야 下界 사자들과 함께 사는 저승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라’라는 개념이 내포한 힘의 조직과 질서인 그 사회성의 결여 때문에 무교의 세계는 자기 자신의 연장 확대 개념인 가족과 동리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때문에 내세적(來世的)이거나 영적인 세계와 미래적인 전망이 없다.
(ii)책임의식 결여:무교적 내세관의 결정적인 약점은 책임의식의 결여이다. 저승은 선악의 인간을 구별하는 심판의 세계가 아니라,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간 삶의 연장이다. 따라서 인간 관계는 신령과 자기와의 수직적 관계가 있을 뿐이고 횡적인 사회적 관심의 관계는 없다. 단지 복을 빌어 복락을 누림으로 족한 것이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수직적인 신앙은 열심을 품고 있으나 횡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책임의식, 윤리관념 그리고 공동체 의식이 희박하다 .
(iii)의타성과 운명신앙:이것은 주체성의 상실이요 운명론에 자기를 상실함으로써 만사를 팔자소관으로 체념하게 하며,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이 되게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건설과 개조라는 생산적인 움직임이 없고 퇴행적 보수주의 사고 양식과 현실을 외면하는 비관주의로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운명신앙은 일종의 패배주의이다.
(iv)보수성:무교가 타종교와 만날 때,타종교의 요소 중에서 무속적 성격에 맞는 것을 쉽게 받아들인다.그러나 무교의 성격이나 특성에 생소하고 상반된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 의식이 매우 강하다. 보수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엔 창의적 성격이 부족하다.
(v)역사의식 결여: 인간은 과거를 되돌아 보고,생각하고 행동할 때 여기에 비로소 인간실존의 역사성이 있다.그런데 샤머니즘의 정신 풍토에는 역사의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와같이 무교는 한국인의 의식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불교적 편력(佛敎的 遍歷)
불교는 4세기 경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니 1600년에 걸친 역사를 갖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라(新羅) 때와 고려(高麗) 때에는 정치권에도 영향을 끼쳤고 현재도 통계상으로는 다른 종교보다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우리나라 토속 신앙인 무교와 크게 혼돈되어 있다.어느 불교학자에 의하면 ‘우리나라 불교의 90%가 불교와 관계없는 샤먼이라’ 하였으며 그 예로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산신각,칠성당 기타 부적 판매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생노 병사(生老病死)는 물론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요소,이 고뇌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곧 구원이요 진리를 깨닫는 자가 곧 불타가 되며, 이 불타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 불교가 부처를 신으로 모시고 출발한 종교이지만 부처는 결코 신이 아니요 인간이다. 따라서 불교는 인본주의 신앙이요,아래서 위로 향하는 종교이다. 때문에 불교의 신관을 살펴보면 무신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염불은 인격적인 대상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산만하고 안정되지 못한 정신을 일념으로 집중시켜,안정되고 평안함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환경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수도 방법의 하나로 석가모니를 염하기도 하고 觀音菩薩을 염하기도 하며,그 밖의 다른 불보살을 염하기도 한다.
여기서 한국불교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본다.
(i)혼합 절충주의(混合 折衷主義):불교의 혼합적 성격은 한국 재래적 종교인 무교(巫敎)와 가장 깊은 혼합 속에 민중을 지배해 왔다. 호국 불교의 소산인 대장경은 무교와의 절충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혼합사상은 이조의 특색을 이루었고,불교가 음양,오행,풍수지리설 등의 잡설과 혼합함으로 미신에 떨어졌다.
(ii)공리적 현실주의:현실주의 성격은 샤만에서 형성된 한국인의 심성이었는데 이것이 불교에 있어서도 새로운 특색으로 나타났다. 고려의 호국 불교 사상과 불교의 정치적 개입과 권력과의 결합은 이러한 공리적 현실주의적인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한국 불교의 결정적인 타락의 요소였는데 그것은 윤리적인 합리성을 갖지 못한 주술적인 공리주의였다는 데서 불교의 현실주의적인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iii)은둔적 내향의식:고려가 국교로 불교를 채택하여 성장하다가 이조에 들어와 抑佛崇儒 정책으로 불교의 세력이 밀려났다.정치세력에 밀려난 승려들은 은둔적 경향을 띄게 되었고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사상은 불교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인생 자체를 고뇌로 보고 이것을 벗어나 해탈의 길을 찾는다는 데 있다.
이 불교의 특성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역시 무교인 무속이다. 어떤 절에 가면 무당들이 상주(常住)하고 있으면서 푸닥거리나 굿을 한다. 불교와 무속의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절에 가는 사람들의 종교적 자세는 무속적이다.
3)유교적 편력(遍歷)
공자의 근본 사상은 仁에 있었는데 이것이 이조에 와서 仁의 근본사상을 孝로 해석하여 유교의 종교적 의식구조의 중심체제를 형성하여 보수적 정체성을 띠고 있다.유교의 신(神)은 인간 자체에 근본하였고 인간이 바로 덕성을 갖춘 생존신이요 천지의 신과 同居同留하는 덕성을 소유한 자이다. 여기에서 유교는 인간자체 즉 성인의 대상으로 한 일종의 종교이며 인간의 인격으로서 최고인 聖人에 도달하기 위하여 聖人의 교훈을 지키는 것 이다.조상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의 대상이다. 부모나 선조의 제사를 통하여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확인하고 선조의 현존하심을 되살리면서 그 아득한 자기 생명의 긴 근원을 지금 이곳에서 경험함으로써 쇠잔해 가는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신비에 참여하게 된다.
유교의 특징을 몇 가지로 살펴 보자면
(i)현세중심의 현실주의이다:모든 것은 현세에서의 상대적인 인간관계로써 규정짓는다. 종(棕)적인 신인관계(神人關係)나 신앙이라는 것이 介在할 여지가 없고 삼강오륜의 인륜관계 규정이 일체를 해결하고 있다.
(ii)주체성의 상실이다:자기의 처사는 가족이 결정하고,가족의 세력이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준다.출세는 가문의 명예와 관계된다.따라서 주체적인 사람됨의 문제가 아니라 체면과 형식이 문제된다. 이러한 인격 상실에서 외모를 꾸미게 되고 겉치장을 하게 된다.
(iii)보수적 권위주의다:윗사람에게 절대 복종이며 지배계급에 대해서도 무조건 복종이다. 불복종은 孝가 아니기 때문이다.
孝 또는 祖上崇拜 라는 특징을 볼 때, 무속이 유교에도 들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즉 유교의 젯상과 굿상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고 유교의 제사나 어떤 행사 때 무당이 굿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떤 무가에서는 공자가 위대한 神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어느 한 종교로 一貫되어 오지 않았다. 불교,유교를 거치면서도 재래 종교인 무교의 바탕아래 한국인의 종교의식은 形成되었다.
이런 종교의식이 긍정적인 방향에서 기독교에 영향을 끼친게 있다면 제천사상,의존심,축복사상 등이 있을 것이다.‘하느님’ 개념이 기독교의 ‘하나님’개념에 쉽게 접맥되었고,의존심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존케하고,축복사상은 재난과 질고에 대한 문제를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게 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방향에서도 기독교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은 축복의 관념에서 십자가의 고난이 너무 희석되었다는 점과 의타적 운명신앙을 낳았다는 점,책임의식의 결여,지나친 보수성 등을 들 수 있다.
C.한국교회의 리더쉽(leadership) 변천사(變遷史)
위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한국인은 왕조마다 각기 다른 종교를 편력해 왔으며 그 때마다 재래 종교인 ‘무교’의 바탕에서 적절히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로 어떻게 리더쉽(leadership)이 변해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서 한국 기독교 100년사를 통해 선포되어진 설교문 1,500여 편을 분석한 자료를 기본 골격으로 사용코저 한다.
1)제 1기 : 출발과 형성기의 목회자상(1884~1919)
천주교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게 된 한국인은 서구 문물을 통하여 들어온 西學이라 하여 핍박을 가했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도 한계에 이르렀고 동시에 이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서원(書院)중심의 유림도 그 작태로 인하여 폐쇄되고,민중과 괴리되어 있어서 근대 한민족은 종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이 전래없는 진공기였다. 이러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해졌고,이 복음은 한국 민족의 갈 길을 밝히는 유일한 등불이었다.
이때의 목회자들은 ‘인격이 진실한 자’요 ‘영에 속한 자’요 ‘성경중심의 목회자’라고 평가하였다.
2)제 2기 : 발전과 수난기의 목회자상(1920~1945)
일제 치하의 한국교회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민족의 복음화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보루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교회는 이제 민족의 수난 속에서 105인 사건이나 3.1운동과 같은 민족의 독립과 애국 애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요람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겨레와 함께 멍에를 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목회자들의 특징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목회자’,‘지적으로 성장하는 목회자’,‘존경받는 스승으로서의 목회자’ 등으로 나타난다.
3)제 3기 : 재건과 분열기의 목회자상(1946~1960)
1945년 8월 15일,해방의 종소리가 삼천만 민족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도 새로운 희망과 감격 속에서 국가와 교회의 재건에 착수하게 되었다.그러나 한반도에 3.8선을 설정하고 남북한 각기의 정부가 들어서고,이런 민족 분열의 시기에 신앙 노선과 신학 방법론 그리고 에큐메니칼 참여 문제를 놓고 장로 교회는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대상 속에 원하는 목회자상의 특징은 ‘소명감을 재발견하는 목회자’,‘역사에 눈을 뜬 목회자’,‘민주적 지도자로서의 목회자’ 등이었다.
4)제 4기 : 연합 운동과 재정립기의 목회자상(1961~)
일제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닥친 6.25동란으로 다시 한 번 수난을 당한 한국교회는 교회의 재건을 앞두고 자체 분열로 심각한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교회의 일치운동에 대한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의 목회자의 특징은 ‘성직자로서의 목회자’,‘시대의 양심인 예언자로서의 목회자’,‘변화하는 시대에 응답하는 목회자’ 등으로 나타났다.
위에서 한국교회의 시대적인 변천 과정에서,역사의 토양 속에서 다양하게 분출된 목회자상이 나타나듯이 한국교회 초기 목회형태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 사회에서 서구 문화를 추구하는 형태의 목회형태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시대의 박해기에는 한국교회의 목회는 바로 민족 구원 과제와 직결된 민족목회 형태로 목회과제를 설정하고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그리고 6.25 직후에는 치유적 기능의 목회형태가 활발해지면서 사회 여러 방면에서 구제와 사회사업을 통해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점차 한국 사회가 산업 사회로 전환되면서 목회 기능과 형태는 역사 속에서 숨쉬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점점 잃어간다.그리고 개인적인 문제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심방이나 상담 목회로 전환되어 가고 있고 필요에 따라 여러가지 목회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C.S.케리언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현대 목회 모델을 8 가지로 들어 제시하고 있다. 즉,‘종-목자의 모델’,‘정치가 -예언자 모델’,‘설교자 -교사 모델’,‘전도자 -키리스마 모델’,‘실용주의적 흥행자 모델’,‘메니져 -경영자 관리자 모델’ 그리고 ‘의식주의자 -축제 모델’이 그것이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목회 형태는 현대 목회자들에게 갈등을 가져다 주고,위기감마저 느끼게 한다.
D.현대 한국교회가 원하는 리더쉽(leadership)
이제 현대 한국교회가 원하고 있는 ‘리더쉽(leadership)’에 대해 고찰하려고 하는데,그 자료의 객관성과 다양성을 고려하기란 어렵긴 하지만,이미 연구된 몇 개의 자료를 여기에 정리해 보고자 한다.
1)평신도들이 원하는 리더쉽(leadership):여기에 쓰인 자료는 두 개의 설문 조사 분석 자료이다. 각 각의 자료는 다행히 지방교회와 서울 중심의 교회,양쪽을 포함하고 있다.여러가지 질문들이 있었으나 본 연구에 필요한 “지도력 형태”,“설교 태도”등 두 가지만 참고하고자 한다.
평신도들이 원하는 지도력 형태(style)는 ‘민주형’에서 서울과 지방이 각 각 246(85.7%),274(73.1%)로 나타나 단연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은 서울은;‘자유 방임형’이 19(6.2%),‘무관심’이 15(4.9%)등으로 나타났고 지방은; ‘독재형’ 42(11.2%),‘자유 방임형’ 29(7.7%),‘상관없다’ 25(4.9%) 순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도력에 대한 정확한 이해부족과 상황판단없이 한국 사회가 갈망하는 ‘민주화’가 교회 지도력에까지 투영된 응답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또한 반면에 한국교회의 의식 수준이 점점 민주화되어 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설교 태도”에 대한 질문에서는 서울이;‘설득.호소’ 199(64.6%),‘권위있는 선포’ 96(31.2%),‘재치.만담’ 5(1.6%) 순으로 나타났고 지방이;‘설득력.호소’229(61.1%),‘권위있는 선포’ 126(33.6%),‘재치.만담’ 9(2.4%) 순으로 나타났다.
이 설문도 설교가 한 가지 형태로 고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할 때,한국교회 평신도들은 설득력있고 호소력있는 설교를 선호한다.
정리해 보면 한국교회 평신도들은 舊 시대의 권위주의나 카리스마적 리더쉽(leadership)을 꺼려하고 민주적이며 억압하지 않는 리더쉽(leadership)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 방식도 설득,호소,勸諭 등을 원하는 것을 보면 原初的으로 평신도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방식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2)교역자(교수)들이 원하는 리더쉽(leadership)
여기서 우리는 국내 현역 교역자 및 교수들의 리더쉽(leadership)에 관한 입장을 살펴보면 우리 한국교회의 리더쉽(leadership)의 현주소와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종성 교수는 고대 교부들의 ‘감독상’을 정리하면서 교부 중의 한 사람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며 결론을 맺었다.
“그(감독)는 위엄이 있는 동시에 겸손해야 하며,무서운 면을 가지는 동시에 친절해야 하며,어른다운 威風이 있는 동시에 접근미가 있어야 하며,차별이 없는 동시에 예의가 있어야 하며,겸허한 동시에 비굴해서는 안되며,열정적인 동시에 신사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햐야만 그는 모든 위험성에 대하여 쉽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생각해야 한다. 즉 교회를 개발해야 하는 일이다. 또한 사제(로서)는 침착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하며,모든 방면을 볼 수 있는 천의 눈을 가져야 한다.”
또한 본교단 충신교회 담임 박종순 목사는 바람직한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강의에서 바람직한 리더쉽(leadership)을 위한 일곱 가지 제안을 하였다. (1)커뮤니케이션을 익힐 것 (2)본을 보일 것 (3)도덕적 리더쉽(leadership)을 유지할 것 (4)위기 관리에 힘쓸 것 (5)중간 지도자(staff)를 양성할 것 (6)자원 봉사자를 활용할 것 (7)현대 문명의 利器를 잘 활용할 것 등이 그것이다.
송학대 교회 방관덕 목사는 신학생들을 위한 설교 「목회자의 자세(딤후 2:24~26)」라는 설교에서 권위가 있어야 성도를 잘 지도할 수 있다고 하며 권위를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가 지적한 권위는 첫째 ‘지위적 권위’였다. 이 권위는 지위이론에 근거한 것이며 이런 지위적 권위에는 대통령,장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둘째 ‘인격적 권위’라고 했는데 목사라는 직책은 사실상 아무런 지위가 없으므로 바로 이 ‘인격적 권위’를 갖어야 “리더쉽(leadership)”이 생긴다고 했다.이 인격적 권위는 (1)실력 (2)영적실력 (3)성경지식 (4)경건지식에 기반을 둔다.
장신대 박창환 교수는 ‘목회자는 신도들 앞에 모든 면에 출중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목회 지도자상을 요청했다. (1)신실해야 한다.(2)소명감에 불타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불러서 응답하고 서약한 자여야 하며 하나님 손에 붙들린 자라야 한다.(3)목회 지도자는 양에게 군림해서는 안된다.(4)목회 지도자는 존재론적으로 양과 差等이 있어야 한다.(5)인격,지식,신앙,지도력 등에 있어서 출중하여야 한다.(6)실력과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7)양과 세상과 주인의 뜻과 지혜,기술,방법 등을 습득해야 한다.
계속해서 오성춘 교수는 교역에서의 영성을 강조하며 추구해야 할 교역의 핵심을 여섯 가지로 들었는데 여섯 번째에서 “올바른 성령운동은 (올바른 교역은 -필자 註)교역자 중심 교역에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 각 개인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가지고 상호 봉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교역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구약학자 김중은 교수는 마태복음 16장에 나타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성 속에서 목회자 상을 찾았는데,오늘의 목회자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목회자의 Image Making의 결정적 열쇠가 있다고 하였다.
같은 구약학자 강사문 교수는 “선교 2세기를 향한 목회자상”이란 주제하에 목회자는 (1)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6:33) 자여야 한다.(2)하루의 만나로 자족하는 자여야 한다.(3)현실을 직시하여 우리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자라야 한다.(4)정직한 자이며,힘없는 자 앞에서 약한 자라야하고,강한 자 앞에서 강한 자여야 한다.(5)그리고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제안 하였다.
목회자(교수)들의 제안을 정리해 보자면,먼저 목회 지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중시해야 한다.둘째로 인격과 성품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세째로 지식을 쌓아야 한다.마지막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많은 방법론을 터득하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현대 문명의 利器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3)한국교회의 리더쉽(leadership)의 문제점
교회안에서의 권위의 위기는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몰고온 부산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위기에 직면한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택한 길은 세 가지 출구를 향한 것이다. (i)어떤 목회자는 목회를 완전히 포기해 버리는 출구를 찾고 있다.1950~1960년대 북미주 교회의 통계 조사에 따르면 매년 3천 명의 교역자들이 목회를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ii) 다른 목회자들은 “영적인 권위”로써 자신의 권위를 방어하려고 하고 있다.다시 말해 목회자중에는 자기가 가진 ‘목사’라는 직위를 남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로써는 목회자 자신들이 독선주의에 빠지거나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iii)그러나 어떤 긍정적인 목회자들은 현대 사회에서의 권위의 새로운 이해를 모색하면서 건설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a)권위주의:이러저러한 이유로 리더쉽(leadership)을 잃은 지도자들이 맨 먼저 취하는 태도는 권위주의이다.이 권위주의는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은 아시아 일부 국가에 있는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리더쉽(leadership)을 잃은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자신의 무능력함을 현학적 설교와 권위주의로 감추려 한다.
(b)교회 지도력의 귀족화 현상:오늘의 젊은 크리스챤 엘리트들은 어떤 문제 의식도 역사의식도 가지지 못하고 개 교회 확장에만 관심이 있는 오늘의 교회를 비판한다. 이들은 거추장스러운 제도와 도그마로 安逸하게 지내고 있는 貴族化한 교회의 리더쉽(leadership)을 지적한다.
근래의 두드러지게 나타난 한국교회의 귀족화 현상은 교회당 건축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세기의 교인들의 무지와 맹종의 토대위에 세워진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방불케 하는 오늘의 교회당은 교회간의 과잉 경쟁으로 인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는 지도력을 잃은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의 권위를 물량주의에서 회복해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c)교회의 기업화:리더쉽(leadership)을 잃은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강단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는 은혜”로 둔갑시켜서 나누어 줌으로써 어리석은 대중을 현혹하며 큰 기업으로 발전시키려고 시도한다.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는 수많은 종류의 ‘무형 免罪符’를 남발하여 매매하는 교회 기업화의 특성을 이루었으며 기업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으니 기독 청년들은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고,기독교는 좋으나 목사는 싫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기업화’ 현상은 교회지도자의 책임이다. 신학의 바른 정립없이 잘못 지도하고 있는 모습이며,교인의 무지한 요구에 생각없이 따르는 모습이다.
(d)‘샤만’적 지도력:물질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샤머니즘은 교회 안에 깊숙히 침투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여 기독교 교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샤머니즘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샤머니즘은 철저하게 利己主義적이며 자기 중심적 특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복신앙이다. 물론 복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그리고 성경에서도 물질적인 부요함을 ‘복(福)’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샤머니즘에서 추구하는 복이란 철저하게 현세적이고 개인적이며 물질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여기에는 역사의식이나 윤리의식이 없다. 또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혼합주의적 요소도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 교역을 볼 때 이러한 자기중심적 요소가 교회 안에 만연하여 참된 하나님 교역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예수를 믿으면 복받고 모든 일이 잘 된다’는 식의 思考 方式은 예배를 드릴 때나 헌금을 드릴 때나 기도를 드릴 때,또는 목사의 심방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목사를 ‘크리스챤 샤만’으로 전락시키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성령운동을 샤만의 降神체험과 같이 초자연적이고 비정상적인 현상에 급급하여,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보거나 이런 체험이 있어야만 성령세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회 지도자는 “샤먼적 리더쉽(leadership)”을 답습하고 실행하는데 무의식적으로 앞장서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처럼 영적인 권위,영적 리더쉽(leadership)을 잃어 버린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권위주의’에 빠져 있거나 ,‘귀족주의’에 또는 ‘기업주의’에 젖어 있으며,‘샤먼’적 리더쉽(leadership)을 선망하는 자가 나타났다.
E.왜곡된 리더쉽(leadership)의 회복을 위하여
1)인식의 전환: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는 按手를 받은 목사,장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안수받은 직책’이라는 것은 리더쉽(leadership)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안수식은 유대교에서 직책을 위탁하는 의식에서 발전된 개념으로 예수님이 12제자와 70제자에게 전달하였고 곧 이어서 보다 넓은 의미의 사도적 에큐메니칼 전승으로 발전되었다.
안수는 회중의 기도와 공식적인 인정이 안수받은 사람을 격려하고 성령께서 그의 할 일을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행위요,동시에 신앙 공동체의 행위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안수의 행위에는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성례전적 표징,은사와 결단의 공인이 동시에 일어난다.
대개의 경우 교회의 리더쉽(leadership)은 이렇게 “지위(position) 이론”에 입각한 안수받은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안수받은 자가 그 안수받은사실 하나로 자신에게는 있지도 않은 리더쉽(leadership)을 자주 요구하고 거짓 과장하고만 있다면 되겠는가?
지도자의 권위 또는 리더쉽(leadership)을 “지위”으로서만 이해할 때 마찰이 있게 되고 권위주의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지도자의 권위를 “기능”으로서 이해할 때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리더쉽(leadership)의 상실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우선 교회 지도자들은 이렇게 ‘認識의 轉換’을 하여야 한다.
2)힘의 근원(根源)에 대한 재인식(再認識):우리는 지도력을 평가할 때, 스스로 평가할 때가 많다. 그러나 리더쉽(leadership)은 1인칭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 지도력은 스스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며 2인칭 또는 3인칭 입장에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힘의 근원에 대해서 많은의견들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의 정체도 결국은 그 힘을 행사해서 얻어낼 ‘목표’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면 나라를 얻고자 하거나 어느 지역을 정복하려면 물리적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사상이나 학문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펴려면 그걸 능가할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처럼 경제정치 시대에는 경제력이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모택동은 “권력은 砲身에서 나온다”고 했고 F.베이컨은 “지식 그자체가 힘이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속담도 있다.“돈이 말한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책 「권력이동」에서 이 ‘힘’에 대한 상징적 모델이 일본 “샨슈노 진기(三種の神器)”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신화에는 해의 여신인 아마테라스에게 바쳐진 세 가지 보물,즉 「샨슈노 진기(三種の神器)」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보물은 지금까지도 일본 皇室 권력의 상징물로 되어 있다.「샨슈노 진기(三種の神器)」는 칼,보석,거울이다.”
여기서 칼은 무력을 상징하며,보석은 재물 즉,경제력을 상징하고 거울은 지식을 상징한다.(즉 거울은 아마테라스가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사용하는 것임)
그리고 그 힘(권력,power)은 실제로 욕망과 상호관계가 있고,또한 인간의 욕망은 무한히 다양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잠재적인 힘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에서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 문제가 이 논문에서 도출하려고 하는 질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적인 방법에 단호히 대적하시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마태 20장 25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우리가 예수의 교훈을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힘의 근원’에 대한 분명한 시각교정을 해야 한다.
3)교회 지도자의 힘의 근원
그러면 교회 지도자들의 힘의 근원은 어디일까? 그리고 그 힘을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그 힘의 근원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고,그 힘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뒤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이 힘의 근원에 대한 시편 기자들의 노래는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신뢰할만한 힘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예언자들도 힘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사 12:2b)
분명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힘과 지도력의 근원을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옛날 시편기자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여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말씀’과 ‘성령의 勸慰’로써 우리와 교제를 유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볼찌어다.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믿을 수 있으며 또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b)”
라는 확고하신 말씀을 따라 그분과 교제를 계속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는 힘의 원천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얻되 하나님과의 교재를 끊이지 않아야 하는데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가능하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속에서 역사의 시작과 끝을 이루어 가고 계시며 인간과 교제를 하신다.
확실히 교회 지도자의 지도력(힘)은 그를 보내신 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지도력의 원천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유지해야 한다. 주님과의 생명력있는 교제가 있는 지도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들리워진 병기와도 같아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서 귀히 쓰임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지도력(힘)이 위임되는 과정을 인정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은 그가 ‘부르신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보내신다’는 3단계적 구조로서의 리더쉽(leadership)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태복음 10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종(從)을 부르시고(calling),능력을 주시고(giving),파송하신다(sending)sms 3단계적 구조를 나타내셨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태 10장:1절,5~6절)”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그 지도력의 원천을 하나님께(보내신 자께) 둠이 마땅하다.
여기서 리더쉽(leadership)의 기초에 대한 재정리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교회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는 세속적인 권위와는 전혀 다른 것인데 첫째,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에 의하여 사람들을 굽혀 자기의 뜻에 복종토록 하는 것이 아니고,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응답하도록 한다.
둘째로,교회 지도자는 권위의 기초로서 권력이나 지위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배격한다. 영적 지도자가 갖는 권위의 유일한 기초는 예수께서 그를 통하여 -그의 삶의 스타일(“말씀”의 성육)을 통하여 그리고 그의 가르침(“말씀”의 전달)을 통하여 공동체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세째로,이 권위는 순전히 초자연적인 기초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기초 위에 영적 리더쉽(leadership)이 존재한다.
4)리더쉽(leadership)의 실행 방법론(시범-가르침)
지도자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지도자가 그 리더쉽(leadership)을 실행에 옮겨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능의 원천은 두 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둘을 연결시켜 말씀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위 성경 말씀에 다른 사람을 구원하게끔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개의 명령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과 “행함-즉 시범”이다.
바울과 디모데는 시범의 원리를 명백히 하였다(딤후 3:10~15).이것은 성육원리의 실제적 완성이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언어의 형식으로만 전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바울에 의하면 신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인간의 마음碑에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뿐만아니라 이 살아있는 편지는 “누구나 알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편지이다.
“너희가 우리가 편지가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2~3)”
지도력이란 이처럼 성육화된 형태를 지향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리더쉽(leadership)이 몸에 밴 행동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성육화된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하려면 우리가 담대하게 베일을 벗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개방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서 여러가지 흠과 약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고후 3:1~8).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보는 것은 우리의 약점만이 아니요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우리의 벗은 얼굴을 보는 것은 주님 자신의 영광의 반영이다. 그들이 우리의 삶을 볼 때 그들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칼빈도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길 목회자는 가르침과 더불어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그들은 교회를 빈둥거리며 노는 閑職으로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교훈(교리)로써 모든 진실된 경건,성스러운 비밀을 관리해 왔고 지켜 왔고 똑바르게 제자들에게 실행해 왔다.”
이처럼 “실행”이라는 방법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실제로 지도자는 모범을 보이고 그 모범대로 리더쉽(leadership)의 방향이 설정되길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실행은 가르침의 사역과 병존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면 대개가 틀에 박힌 방법을 답습하고 있다. 내용의 口頭 전달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교육이라는 것은 “문화적 유산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되는 과정”이요 교육의 기본적 임무는 개인들을 사회규범에 맞추어 주조하는 것이다(Meyer,Fortes). 이것은 분명히 기독교 교육의 기본 과제임에 틀림없다. 행동과학의 용어를 빌면 이렇다.우리는 문화유산-곧 이 세상에 있는,하나님의 시민들의 유산-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하고자 하는 것이요,또한 이런 삶의 방식을 위해 “개인들을 (새로운) 사회 규범에 주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형식상 강의식 교육으로써는 이러한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가르치는 자로서의 지도자상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예수는 흔히 교사로 언급된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 자신의 교육 교역으로부터 교육학을 배워야 한다. 그는 긴밀하고 소규모이며 친밀한 그룹인 자기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과 심지어는 그의 말씀을 오직 한 번밖에 들을 수 없는 사람들까지 가르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소비하셨다. 그가 전세계로 나아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교회에 위탁하셨을 때 이 위탁의 중요한 부분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 포함되었다(마 28:20).
가르치는 사역에는 기독교적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한다.
첫째,지도자의 가르치는 사역은 그 촛점이 성경 교리에 부합되는 삶을 이루는데 있다.
둘째,지도자의 가르치는 사역은 신자의 삶의 모든 차원에 지도자 자신이 관여할 것을 필요로 한다(예를 들면 절제심,믿음의 건전성,사랑,남편과 자녀를 열심히 돌보는 것,자제심,주인에 대한 복종 등이다).
세째,여기서 사용되는 용어들은 아주 폭넓은 개념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다(예를 들면 교훈,권징,충고,권면,이끌어 주고 확신시키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가 가르치고자 하는 지체들의 삶과 관계가 있는 실제(reality)의 본질 속으로 파고 들어 가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고 본을 보이는 성경적 근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엄하게 명령하신 신명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네 자녀에게 무지런히 가르치며,집에 앉았을 때에든지,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찌니라(신명기 6장 5절)”
여기서 우리가 ‘가르침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지도자는 모범이 되어 말씀대로 살아야 하며 둘째,지도자와 피지도자간의 친밀한 가족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며 세째,가르침의 배경은 지도자와 피지도자와 공유하는 일상적인 생활이다는 원리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지도자는 피지도자에게 일상적인 삶의 기독교적 전 영역에서 「시범-가르침」이라는 구조 속에서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해야 한다는 방법론에 긍정해야 한다.
그 리더쉽(leadership)은 철저히 성육신된 것을 성육신 과정을 통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방법론의 要諦이다.
5)리더쉽(leadership)의 실행 방법론(從-섬김)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가 리더쉽(leadership)의 실행을 ‘종의 섬김’에서 찾으신 것은 실로 우리에게 큰 示唆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종이나 노예는 다같이 천한 신분이요,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용어이다. 이러한 우리의 습성을 깨뜨리시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친히 대야에 물을 떠오셔서 제자들을 씻기심으로써 기존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이해에 도전을 해오신 것이다(참고;요한 13:1~11).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20:25~26)”
목사들이 이런 ‘섬기는 권위’를 갖는 것 외에 어떤 특별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들의 참된 능력은 하나님의 권리를 선포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능력은 종으로서 본을 보이고 능력을 나타낸 결과로 교회가 사랑과 존중으로 지도자에게 부여한 것에 기인한다.
앞의 II 단원에서 살펴 본대로 교회 지도자는 하나님의 종인데 그 종은 ‘섬김’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시범-가르침」과 「종-섬김」의 패턴은 성경이 가르치는 리더쉽(leadership)의 확고한 방법론이다.
6)지도자의 자성론(資性論)
지도자의 자격 또는 갖춰야할 자질로서는(특질이론에 속하는 바) 여러 연구가와 저술가 사이에 다음 몇 가지를 들고 있다.
(a)性格:성경은 지도자의 성격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지도자들로 인정된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공개적으로 눈에 보이도록 그리스도와 같이 개방적이어야 하며 모범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친절해야 하며 진실되고 정직해야 하며 신뢰할만하여야 한다.
(b)誠實:또한 지도자는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다.게으름은 성경 여러 곳에서 나쁜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근면하고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딤후 2:24).
(c)섬김:섬김이라는 자질은 교회에서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할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심적인 자질이다. 한국교회에서 이상적인 목사상을 연구한 결과 ‘섬기는 자로서의 목사’를 지적한 것을 보면 우리 한국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질이다.
앞으로의 한국교회 목회 방향은 바로 ‘섬김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회중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그들을 잘 이해하며, 우정어린 상담자로서 인간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d)촉매자적 기질(觸媒者的 氣質):교회 지도자는 여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회중을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시키며 목표를 세워 그곳에 도달케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교회를 세우고, 화해를 이룩하고,그리스도 몸의 각 지체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가운데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영위케 하는 것이다.
(e)훈련(訓練):교회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데 기꺼이 몸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기를 쳐서 스스로 복종케 하는(고전 9:27) 노력에다가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전문적 기술을 위한 훈련이 포함되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는 하는 일을 상식과 지혜에 맡겨버려서는 안되고,그 직업적 실천이 신학 이론의 뒷받침은 물론, 그 결과도 전문적 사고에 의한 비판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f)결단(決斷):지도자는 여러 경우에 있어서 결단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기질이 없는 지도자는 정책 진행에 있어서나 위기 상황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여기 결단력에는 신앙에의 확신이 필요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주셨다는 점을 인식하는데도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는 이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 결단력은 때로 행정적 지도력을 發揮할 경우에 나타난다.
(g)모범적 성격: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지도자가 시범을 보이지 않으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많은 경우에 있어 피지도자에겐 그들이 요구하는 모델이 있고,실제 ‘들은 바’를 실천할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기꺼이 자신을 노출시켜서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화력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그외에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지도자의 자격을 성경은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한국교회에서는 유형 무형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자격을 갖추고 있기를 원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리더쉽(leadership)을 발휘하기 위하여 물량주의,세속주의 등에 호소하지 말고 이처럼 성경의 분명하고도 확신있는 가르침들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F.리더쉽(leadership) 개발을 위한 제언(提言)
우리는 이제 리더쉽(leadership) 개발을 위해 관심있는 연구 분야의 도움으로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1)철학있는 리더쉽(leadership):지도자는 자기가 이끄는 피지도자가 어디를 향해 가며,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의 목적과 자기의 비젼을 명확히 제시해야 하며 교회의 목표,그리고 교회의 전략을 피지도자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I 단원에서 고찰한 리더쉽에 대한 제반 이해와 성경적인 가르침을 숙지하고,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자세가 필요하다.
2)적절한 자기 변화:자칫하면 많은 지도자는 스스로 지위이론에만 安住하고 변화에 대한 폐쇄성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가 있다면 自滅(또는 淘汰)하고 말것이다. 지도자는 안수를 받음으로써 그 리더쉽(leadership)을 획득하지만, 안수만으로써는 그 리더쉽(leadership)을 유지시켜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변화에 대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한다.
자기 변화는 우선적으로 “자기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시대는 20세기를 지나고 있고 21세기를 내다 보고 있는데, 교회 지도자는 중세기적 지도 형태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선교에 많은 지장을 주고 말 것이다. 고리타분한 지도력은 ‘자기속임’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자기 변화는 “상황 판단”이라는 필요에 의해 실시되어야 한다. 목회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는 상황에 맞게 때로는 挑戰的으로 때로는 順應的으로 되어야 한다.
狀況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과업이나 문제의 유형에서의 상황판단: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제 해결의 과업’에서는 감정적으로 깊게 개입을 안한다. 그러나 ‘정책을 세우는 과업’에서는 심사숙고하게 관여한다. 그러므로 이런 ‘정책’문제에 있어서는 參與的 형태의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둘째,중요성의 정도에서의 상황판단:덜 중요한 문제들에는 지도자는 대체로 順應해야할 상황이다.그러나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한 행동유형이 필요한 상황이다.그러나 그룹의 성취능력 정도에 따라 ‘도전’의 정도-단호한 행동의 정도를 조절해야 한다.
세째,자료의 유용성-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상황:지도자는 거론되고 있는 사실(문제)에 대해 전문지식이 결여될 때 순응적 행동이 필요하다.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전문지식이 많이 확보된 상황에서는 확고한 행동은 정당화된다.
네째,문제의 긴박성:해결해야할 문제가 급박한 것이라면 단호하고 도전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그러나 심각하지 않거나 정책 결정에 있어서는 참여적 지도자 유형이 좋다.
다섯째,지도자의 부족:능력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남을 지도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존재할 때,자유 방임적인 태도를 취하는 지도자는 필요하다.그러나 그룹내의 지도자가 부족하고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많을 때는 도전적인 지도력이 불가피하다.
여섯째,응집력(凝集力)의 强弱:응집력이 결여된 그룹에서는 참여적이고 순응적인 지도자 유형이 필요하다. 그 반면 그룹의 결속력이 강하고 지도자가 구성원들에게 존경을 받을 경우에는 그들의 저항에 두려움없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상황이론에 의하면 이처럼 지도자는 여러자지 상황을 접하게 되며,각 상황은 어떤 형태의 지도자를 딱 잘라서 고정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지도력의 효능은 그룹의 성취도 차원에세 볼 때,도전적인 지도자 형태보다는 지도자 자신의 정신(인식된 진실성)과 지도자의 유능함,그룹의 능력과 동기에 의해 더 결정이 된다.
그러므로 지도력(리더쉽(leadership))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판단에서 지혜를 가져야 하고,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통찰력은 폭넓은 지식과 인생을 觀照하는 태도에서 생성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적절히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3)지도력의 효능성 점검:지도자 자신은 교육이론의 ‘평가’와 같 이 지도력에 대한 빈번한 자기 평가에 의해서 효능성을 점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지도자가 지도력을 행사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불러일으키는 차원에서 리더쉽(leadership)의 효능성을 측정한다.
‘기능이론’에 의하면 다른 사람 위에서 권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권위를 나눔으로써,지도자가 세운 목표와 방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도자의 도움으로 사람들 스스로가 설정한 목표와 행동 계획에 의해서,생산과 완성된 계획보다는 참여자들의 능력개발,책임의식,그리고 개인적 만족이란 관점에서 지도자의 효능성을 평가해야만 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상황에 맞게,그리고 리더쉽(leadership)에 대한 비권위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그룹원에 대해 보여준 리더쉽(leadership)의 효능성을 반드시 점검해보는 것이 지도력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라카(הכרב) 성서 대학1 (0) | 2022.02.24 |
---|---|
왜 제자 훈련이 필요한가? (0) | 2022.02.24 |
21세기 설교 전략 (0) | 2022.02.24 |
강해설교의 실제 (0) | 2022.02.24 |
치유목회 (0) | 2022.02.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