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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본문 전래 과정에 대한 고찰

by 【고동엽】 202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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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본문 전래 과정에 대한 고찰

 

 

김경래

(전주대학교기독교학과교수, 구약학)

 

 

들어가는 글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편집함에 있어서 본문 비평 장치(critical apparatus)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문 비평 장치의 질이 그 간행본의 가치를 좌우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편집하여 출판된 BHK, BHS와 편집중인 HUB(Hebrew University Bible), BHQ가 근래의 대표적인 간행본들인데, 이들의 가치는 그 본문이 아닌(사실상 이들의 본문은 동일하거나 거의 차이가 없음) 본문 비평 장치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래서 동일한 본문을 두고 새로운 간행본을 시도하는 것이다.

좋은 본문 비평 장치는 구약 성경 사본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본들에 대한 이해는 구약 성경 본문(text)의 전래 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 과정을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각 사본들의 가치를 개별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으며, 이 연구의 결과로서 우리는 다양한 성경 사본들을 본문 비평 장치를 위한 자료로 사용함에 있어서 가치 설정에 있어서의 차별화가 필요함을 알게 될 것이다. 쿰란 사본 발견 이후로 우리 손에는 많은 고대 사본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사본의 가치는 단순히 그것이 기록된 시기에 의하여 결정되기보다는 성경 전래 과정에서 그 사본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본문의 질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치는 일반적으로 그 사본을 기록한 서기관의 경향 내지 태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성경의 각 책은 기록된 시기도 다르거니와 그 전수 과정도 다를 수 있다. 아울러 성경 본문이 전래되기 시작할 무렵 ‘책’(codex)이 아닌 두루마리 형태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도 반드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고대 사본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각별히 주의하여야 할 점은 전체를 한몫으로 보는 식의 취급을 지양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칠십인역을 하나의 통일적인 사본 내지 본문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마소라 성경과의 관계라는 점에서 볼 때, 칠십인역의 출애굽기는 칠십인역의 창세기와는 다르다. 후자가 마소라 성경과 같거나 비슷한 본문을 대변해 주는 반면, 전자는 마소라 성경과는 전혀 다른 히브리어 대본(Hebrew Vorlage)을 반영하고 있다. 칠십인역 예레미야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보다 넓은 개념의 사해 사본 내지 보다 좁은 개념의 쿰란 사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해 사본 내지 쿰란 사본은 하나의 성경 사본도 아니요, 그렇다고 같은 종류 사본들의 집합체도 아니다. 물론 쿰란 외에 맛사다, 나할 헤베르, 와디 무라바아트 등지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동일 집단, 곧 마소라 성경 계열에 속한 사본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쿰란 사본에 대하여는 이런 주장이 전혀 적절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칠십인역을 비롯한 여러 그리스어 역본들, 타르굼, 페쉬타, 불가타 등 각종 고대 역본에서 보이는 통일성의 결핍과 복합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약 성경 전래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 이들에게 뚜렷한 몇몇 특징들을 기반으로 하여 편의상 이들을 각기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그리하는 것이지, 실제의 세부적인 연구에 있어서는 책별로, 그리고 심지어는 일부 내용씩(예를 들어, kaige-Theodotion) 논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도 있다.

 

 

구약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이론

 

일반적으로 성경 사본학이라는 학문 분과는 성경 본문의 최종적인 기록이 끝나는 시점에서부터 그 연구를 시작한다. 본래 사본학은 하나의 원본을 가정하고 그 원본을 찾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런 시도는 이미 시그러지기 시작하고 단순히 현존하는(증거가 없이는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본들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성경 본문의 전래 과정을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하기에 이르렀다. 대략 17세기(1616년 사마리아 오경이 유럽 학계에 소개되면서 이 논쟁이 시작됨) 이후로 성경 학자들은 구약 성경의 최초 원본에 대한 논의에서 이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몇몇 축을 이루는 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구약 성경 본문에 대한 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드라가르데(P.A. de Lagarde)

드라가르데는, Bauer, Eichhorn, Rosenmüller, Olshausen과 마찬가지로, 모든 마소라 계열의 사본은 하나의 원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동시에, 모든 칠십인역 사본들 역시 하나의 원형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원본을 통하여 성경 일반에 대한 원형을 찾아낼 수 있다는 이론을 펼쳤다 .

 

칼레(P. Kahle)

 

칼레는 애초에 몇몇 초기/원시 문서들(pristine texts)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칼레는 이들을 vulgar 텍스트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성경 본문은 다양한 텍스트에서 출발하여 후에 통일성을 띠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견해를 취하는 사람으로는 Barthélemy, Goshen-Gottstein, Talmon, Greenberg, Walters, Gerleman, Sperber, Nyberg, Lieberman, Kutscher 등을 들 수 있다.

 

올바라이트(W.F. Albright)와 크로스(F.M. Cross Jr.)

 

올브라이트의 영향을 받아 크로스는 지역과 관련한 세 부류의 recensions 내지 families의 존재에 대하여 주장한다: 바벨론(마소라), 팔레스타인(사마리아 오경, 마소라의 역대기, 몇몇 쿰란 사본), 이집트(칠십인역 대본). 세 지방설(local texts theory)은 크로스가 발전시키고, 하버드 대학 그의 제자들은 이를 거의 그대로 추종하는 형편이다.

이 세 지방설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개찬(Palestinian recension)은 확장적이고(expansionistic) gloss 및 조화시키기 위한 첨가구(harmonizing dditions)로 가득 차 있고, 이집트 개찬(Egyptian recension)은 길게 늘린 데(to be full) 비하여, 바벨론 개찬(Babylonian recension)은 보수적이고 간결한 편이다. 그리고 이들 세 family는 주전 5-3세기 동안에 발전된 것이라고 한다.

 

탈몬(S. Talmon)

 

탈몬은 과거 다양한 성경 텍스트의 존재에 대하여, 세 지방설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그는 역사적인 변화와 사회종교학적 상황(socio-religious conditions)을 통하여 구약 성경 전래 역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마소라 본문, 칠십인역, 사마리아 오경이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역시 유대교, 사마리아인, 초기 기독교의 세 종교적 집단에 의하여 그들의 경전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유다 광야의 공동체 사람들에 의하여 보존된 쿰란의 다양한 본문 전승(textual tradition)은 표준화 이전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탈몬은 다수의 본문 전승이(textual tradition) 있었다고 주장한다.

 

토브(E. Tov)

 

토브는 개괄적으로 개찬(recension) 내지 본문 유형(text-type)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마소라 성경, 칠십인역, 사마리아 오경은 수많은 본문(text)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 사본들(texts)간의 상호 관계는 서로 얽히고 섥힌 거미집과도 같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적으로 편집적(recensional) 활동의 특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개찬(recension) 또는 본문 유형(text-type)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알려진 바대로 마소라 성경, 칠십인역, 사마리아 오경의 세 가지 그룹을 중점적으로 또 전부로 이야기해 왔지만, 그러나 쿰란에서의 발견으로 인하여 이러한 그룹 외에도 다른 부류의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쿰란에서 발견된 11QpaleoLeva, 4QDeutj,n, 4QJosha, 4QJudga, 5QDeut, 등은 이들 세 가지 그룹과는 다른 독특성을 보인다. 토브는 탈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전통’이 아닌 ‘개별적인 다양한 본문(texts)’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토브는 그 안에서도 서로 유사한 몇몇 사본들로 이루어지는 그룹, 더 나아가서 사마리아 오경과 ‘사마리아 오경의 선조 사본들’(pre-Samaritan texts)을 합하여 뚜렷한 유형을 보이는 한 그룹(one group which bears exclusive typological features)을 말한다. 이 후자의 그룹은 편의상 ‘사마리아 오경의 선조 사본’(pre-Samaritan text) 그룹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다양한 본문(texts)을 주장하면서도 그는 탈몬이나 칼레 등과는 달리 하나의 원본이 있을 가능성을 농도 깊게 주장한다. 토브에 의하면, 성경 기록 과정의 종결과 더불어 하나의 본문(text) 또는 전승(tradition)이 산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원본(original)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비록 쉽지는 않지만 이것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본학이다. 그러나 성경의 여러 책들 중 극히 일부는 문서 기록 단계, 즉 최종판이 나오기 전의 다른 판에서부터 전래가 시작된 듯한 인상을 준다.

 

 

구약 성경 본문 전승 과정

 

이상 몇몇 주요 이론들을 배경 삼고, 그리고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의 ‘구약 본문 프로젝트’(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 위원회에서 제시한 ‘히브리어 본문의 발달과정’ 및 이에 대한 토브의 이론을 참고하여 필자 본인의 소견을 피력하여 보고자 한다. 필자는 편의상 이 과정을 대략 아래의 네 시기로 나누고자 한다:

1) 에스라에서 헬레니즘 시대 초기까지(주전 6-4세기)

2) 주전 3세기에서 주후 70년까지

3) 주후 70년에서 주후 8세기까지

4) 주후 9세기에서 10세기까지

 

에스라에서 헬레니즘 시대 초기까지(주전 6-4세기)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그는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였다. 이미 토라는 그전에 완성되어 있었고,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 그들 중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가져갔겠고, 또 에스라의 귀환 행렬시에 다시 그들의 손에 들려 예루살렘으로 가져와졌을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후기 책들도 이 시기에는 모두 문자화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의 구약 성경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본은 전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주전 7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성경의 조각 문서로서(민수기 6:24-26이 담겨 있음) 은편자에 기록된 것이 1979년 예루살렘 힌놈 골짜기 근처에서 발견되었을 뿐이다.

토브는 성경 병행문간의 불일치 등을 이유로 들어, 이 시대 성경 사본의 상황이 그 다음 시기보다 더욱 유동적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필자는 이 무렵 에스라를 비롯한 초기 서기관들의 영향과, 또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유다의 정치 및 사회 상황으로 미루어 구약 성경 본문은 거의 큰 변화없이 전수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 논문의 뒤에 가서 이유를 밝히겠지만, 이 시기의 구약 본문은 얼마든지 ‘원(原) 마소라 본문’(proto-Massoretic text)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전 3세기에서 주후 70년까지

 

주전 330년 페르시아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에게 무너진 이후로, 유대인은 전혀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 돌입하게 된다. 포용력 있는 헬레니즘 문화는 이스라엘 땅, 디아스포라 할 것 없이, 거칠 것 없는 세력으로 유대인들을 눌러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에게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은 필연적인 사실이 되었고,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엣센파 등의 분열과 더불어, 성경 전수 과정에 있어서도 일대 혼란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쿰란에서 이 시대 구약 성경 본문의 실정을 엿보게 된다. 토브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이 잘 지적한 대로, 쿰란에서 발견된 많은 사본들은 당시에(주전 3세기 중엽에서 주후 68년) 여러 종류의 다양한 구약 성경 본문들이 퍼져 있었음을 입증해준다. 마소라 본문과 비슷한 것, 칠십인역과 유사한 것, 사마리아 오경과 비슷한 것(pre-Samaritan texts), 쿰란 공동체의 독특한 사본들, 기타 독립적인 것 등 여러 부류의 사본이 쿰란에서 발견되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주류는 마소라 본문과 유사한 ‘원 마소라 본문’(proto-Massoretic text) 계열의 사본들이 차지한다. 토브에 의하면, 쿰란 사본의 60%가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한다. 게다가 ‘원 마소라 본문들’ 이외의 사본들에 나타나는 이독(異讀)의 대부분이 어느 하나(특별히, 원본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간주되는 ‘원 마소라 본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들 다양성 가운데서도 하나의 ‘본래 본문’(original text) 존재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주후 70년에서 주후 8세기까지

 

이 시기는 주후 70년의 대재난 이후에 각 종파간에 구약 성경의 본문이 단일화되고 고착화되는 시기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게 되는 사건은 유대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다. 그 여파로 성경 보급 과정에 대한 그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종래의 자유분방한 분파간의 대립은 사라지고, 바리새파가 주축을 이루는 랍비 유대교로 굳어지면서 구약 성경 역시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으로 필사되어 갔을 것이다. 아마 유대인 가운데 표준 성경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아닌가 한다.

이 시기에 기독교는 기독교 나름대로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방인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역을 그들의 표준 성경으로 삼았겠고,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오경의 선조 사본’(pre-Samaritan texts) 중의 하나를 취하여 거기에 자기들의 분파적 요소를 가미시킨 후 이를 자기들 표준 성경으로 전수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결국 구약 성경 본문은 서로 다른 세 종교 집단에 의하여 사회종교적인 틀 안에서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유대인에 의하여 기록된 사본들 중, Seberus 두루마리만 제하고, 나할 헤베르와 와디 무라바아트에서 발견된 사본들, 후기 타르굼, 랍비 문헌의 인용문 등 모두가 하나의 거의 동일한 본문을 반영하고 있다. 이 무렵 이루어진 유대교편의 헬라어 번역본들(아퀼라, 쉼마쿠스, 테오도션) 역시 동일한 히브리어 본문을 반영하고 있다. 게다가 오리겐의 헥사플라(Hexapla), 제롬의 불가타, 그리고 시리아어역 페쉬타와 같이 이 시기에 기독교 권에서 이루어진 작업들도 이미 통일된 히브리어 본문 방향으로의 조정 내지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주후 9세기에서 10세기까지

 

이 기간은 제1기에 독점적인 지위를 점하였다가, 제2기에는 다양성 가운데 주류를 이루었으며, 제3기에 들어와서는 히브리어 표준 성경으로 자리잡게 된 ‘원 마소라 본문’(proto-Massoretic text)이 과거 서기관의 바통을 이어받은 마소라 학자들에 의하여 확실하고도 안전한 옷을 입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때이다. 이후로 유대교, 기독교 가릴 것 없이(사마리아인만 제외)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는 이 마소라 본문은 구약 성경의 모든 사본들 가운데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으로서 오늘날의 모든 간행본에서 본문의 자리를 홀로 지키게 된다.

 

 

나가는 글: 단선식 및 다선식 과정

 

성경의 전래 과정을 단선식으로(mono-linearly) 볼 것인지 아니면 다선식으로(multi-linearly) 볼 것인지 하는 문제는 이미 종전의 학자들에 의하여 논의된 바 있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데, 그러나 전래 과정 가운데 비교적 미미한 다선식 변화는 인정한다.

이상 고찰해 본 대로 마소라 본문은 주후 8-9세기에 갑자기 생겨난 구약 성경 본문이 아니다. 이미 그것은 ‘원 마소라 본문’으로서 처음부터 주류를 이루며 전수되어 내려왔다. 다만 주전 3세기 중엽에서 주후 70년 사이의 시기에 ‘원 마소라 본문’은 다양한 사본의 조류에 묻히어 후기 학자들로 하여금 온갖 상상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도 ‘원 마소라 본문’은 사실상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약간 옆으로 퍼져 그 이전과 그 이후보다 약간 더 굵은 선의 과정을 거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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