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미디어 시대와 열린 목회
유 경 재(안동교회 목사)
들어가는 말
이미 여러 곳에서 비슷한 내용의 발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앞서 발표된 것들과 다른 내용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발표된 내용의 글들을 보면 듣는 상대가 컴퓨터의 기술적인 부분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멀티미디어가 무엇인지, 또 그 시대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주지는 못한 것 같다.
이 발제를 하기 위하여 한 책을 구입하여 보았는데, 저널리스트이며 하버드대학의 케네디 행정대학원의 연구원인 조지 길더(George Gilder)의 "Life After Television"(우리말 번역은 "멀티미디어 시대"로 되어 있다)을 보았다. 저자는 텔레비전 시대와 그 이후 시대인 멀티미디어 시대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대단히 흥미로웠다. 본 발제는 이 책을 통하여 멀티미디어 시대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거기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TV 시대는 끝났다
G. 길더는 TV 시대는 끝나고 컴퓨터 패러다임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다음은 길더의 주장을 나름대로 간추려 본 내용이다.
1980년대 IBM사의 대형 컴퓨터 수천 대에다 벙어리 터미널 수백만 대를 연결하는 식의 중앙집중적 정보처리방식이 PC의 급속한 발전으로 와해된 것처럼, 1990년대에는 비슷한 구조를 지닌 TV와 전화통신이 허물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놀라운 PC의 발전과 더불어 네크워크의 형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TV기술의 한 가지 큰 제약은 공중에 전파되는 신호의 흐름에 있다. 신호를 보내려면 무선 주파수라는 전자기 스펙트럼의 일정 부분을 이용해야 한다. 어느 지역에서나 정보를 전송하는 데 쓰이는 주파수 범위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스펙트럼은 귀중한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TV의 약점이다. 이같은 기술적 특성 때문에 TV는 상의하달식(上意下達式) 시스템, 즉 주종(主從)의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방송센타가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백만 명의 수동적 수용자나 '벙어리 터미널'에 보내는 식이었다. 또한 스펙트럼의 희소성 때문에 TV는 중앙집중적인 시스템을 운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채녈은 비교적 소수로 한정되었고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경제적 기술적 제약 때문에 TV수상기에는 핵심적인 전자공학 장치들이 아예 들어앉지도 못한 채 방송국으로 집중되었다. 그에 따라 TV시스템의 거의 모든 정보능력이 방송센터에 자리잡게 되었다. TV 수상기는 단순히 방송국이 보내는 영상을 받아보는 벙어리 상자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마이크로 칩의 발전과 광섬유의 발전이 이런 TV 시스템에 도전이 되기 시작하였다. 단순한 TV수상기와는 전혀 다른 진공관 수백만개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억 개에 상당하는 기능을 지닌 강력한 처리장치를 갖추고 있어 영상을 화면에 나타나게 하는 단순한 기능만이 아닌,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텔레컴퓨터]가 등장할 것이다. 이 수상기는 신호를 만들고 다듬을 수도, 처리하고 저장할 수도, 그리고 자체적으로 전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텔레컴퓨터는 비디오 정보처리능력을 갖추고 광섬유를 통해 전세계의 텔레컴퓨터와 연결될 것이다. 이것은 쌍방향 신호체계를 활용하기 때문에 비디오 통신면에서 TV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꽃피게 할 텔레컴퓨터
TV는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 매체"이다. TV의 갖가지 신호는 단일 방송국에서 만들어 대중들에게 일방적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의 독재자들은 TV수상기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구소련의 경우 전화보급률은 TV 보급률의 3분의 1수준이었다고 한다.
일방통행식으로 운영되는 TV 시스템은 민주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좀먹는 이질적 요소이다. TV는 수십 개(미국의 경우)의 불과한 채널로 국민 전체의 의식을 틀어쥐고 있다. TV는 점차 전세계 사람들의 의식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이런 미디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적인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예술가는 개성과 창의성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저급한 수준의 대중의 호소력에 봉사해야 한다. TV는 창조적 표현을 크게 제약하는 병목구실을 하면서 수천 명에 달하는 창조적 예술가들을 형식에 갇힌 진부함이나 포르노에 가까운 음란성으로 휘몰아 넣고 있다. 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해 신선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언제나 높은 시청률을 보장해주는 몇몇 한정된 주제를 재탕, 삼탕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다루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TV가 천박한 것은 시청자들이 야비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고상한 관심부문에서는 대단한 다양성을 보이는 반면 외설적인 관심에 관한 한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연 천박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방송매체에서는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개인이 지닌 최상의 열정과 감수성에 호소할 수 없다. 그 대신 조작에 능한 지배자들이 무수한 대중 위에 군림하면서 이들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TV는 독재자의 도구이다.
이에 반해 [텔레컴퓨터]는 대중문화를 향상시키는 대신 오히려 개인주의를 부채질 할 것이다. [텔레퓨터]는 피동성 대신에 창의성을 촉진시킬 것이다. 또한 [텔레퓨터]는 TV의 주종구조 대신에 대화형 구조를 만들어 수신자가 비디오 이미지와 다른 정보를 처리하고 송신하는 역할도 함께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텔레퓨터]가 전세계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강화시키고 살찌울 것이라는 점이다.
TV 시청자들은 자신과 아이들을 멍청하게 만들기 위해 이 기계를 사용하지만, PC 이용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더 똑똑해지고 더 생산적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컴퓨터 발전을 좀더 잘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기계를 활용한다. PC 고객들은 스스로가 새로운 응용장치와 부가장치의 창조자들이다. TV는 소모성 제품이다. PC는 가정으로 하여금 앞으로 자본주의의 역동적인 생산에서 다시 중심역할을 맡도록 하는 공급측면의 투자이다. 또한 자본주의를 변형시켜서 가정과 가족, 문화와 공동체의 현 위기를 해결하는 힘이 되게 하는 데도 가정이 중심적 기능을 하도록 할 것이다.
조지 길더의 이런 예상은 교회 설교자에게 있어 대단히 고무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루에 두 세간씩 TV에 의해 세뇌된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저들은 목사의 설교보다는 TV의 주장을 그대로 그들의 사고의 틀로 간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결국은 TV를 장악하고 있는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목사가 이를 비판할 때 그들은 못마땅해 하고 "정치적인 설교를 하지 말라"는 상투적인 말로 목사를 협박하고 괴롭히는 것이 현실이다. 정보사회로 진입하여 [텔레퓨터]가 활성화 되면 목사는 훨씬 설교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욕구가 다양해지기에 어떤 면에서 목사의 일방적 설교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설교도 일방적 선포보다는 대화형 설교를 개발해 가야할 것이다.
마이크로코즘의 법칙
복잡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을 매크로코즘(Macrocosm)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그와 정반대의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마이크로코즘(Microcosm)의 법칙이다. 여기서는 복잡성이 아닌 효율성이, 스윗치 자체의 숫자나 스위치를 서로 연결하는 접속선 숫자의 제곱만큼 재고된다. 마이크로칩에서는 트랜지스터를 더 많이, 더 촘촘하게 모아놓을수록 효율성이 높아진다. 앞으로의 시대는 마이크로코즘의 법칙을 따라 만들어진 마이크로시스템이 움직이는 시대가 될 것이다.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위력으로 인해 기존 산업사회를 지탱해온 갖가지 요인들, 즉 독점과 계층구조, 피라미드 조직, 권력구조 등이 모두 와해될 것이다.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힘은 전체주의 체제를 뿌리부터 뒤흔들 것이다. 경찰국가 또한 끊임없이 발전하는 컴퓨터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또한 모든 계층구조는 개개인이 자신의 영역을 관리해 나가는 [자율주의 수평구조]로 전환하는 경향을 보이게 될 것이다. 위에서 지시하고 통제하는 식으로 움직이는 계층구조와는 대조적으로 [자율적 수평구조]는 법률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접받는 식의 사회구조이다.
현재 마이크로코즘의 법칙은 텔레코즘의 법칙과 통합되고 있다. 텔레코즘의 법칙이란 컴퓨터가 연결된 숫자만큼 효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을 나타내는 법칙이다. 즉 상호연결된 컴퓨터의 숫자에 따라 전체의 효능은 그 숫자의 제곱만큼 늘어난다는 것이다.
PC가 통신능력을 지니고 텔레퓨터로 발전하면 그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은 완전히 바뀐다. PC가 TV 이후의 생활로 사람들을 인도하게 됨으로써 그것은 민주주의, 개인성, 공동체 및 문화향상을 위한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다.
정보사회에서 교회가, 그 선교적 역량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또한 사회의 독점과 계층구조, 피라미드 조직, 권력구조를 와해시키기 위해서 교회 네트워크를 구성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신학교들이 그 가진 정보를 공유하고, 교회 목회자들이 설교를 비롯한 교회 목회 자료들을 나눌 수 있도록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해 가야 할 것이다. 교회는 과거에 투자하지 않던 데이터 베이스 구축을 위한 예산을 배정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정보 마인드를 강조하고 있는데, 교회야 말로 정보 마인드를 가지고 과거의 교회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회로 개혁해 가야할 것이다. 세계 교회가 인터넷을 통하여 네트워크를 구성할 뿐 아니라 결국 일치를 향하여 나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 교회 목회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정보사회에 맞도록 신학과 목회 방법론들을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정보사회에서는 네트워크 때문에 거리 즉 공간 개념이 축소되고 정보유통의 속도가 빨라지게 됨에 따라 정보의 생산량과 유통량이 증대된다. 이와 함께 지역 간의 정보 격차가 줄어든다. 그때가 되면 도시로 몰려들던 사람들이 시골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도시나 시골이나 자유롭게 정보가 유통되기 때문에 전혀 격차도 없을 뿐 아니라, 더 좋은 환경에서 능률적으로 일하며 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교회도 도시 교회로 몰려 들던 교인들이 시골로 내려 가면서 시골 교회들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며, 도시와 다를 바 없는 정보를 갖게 되므로 어떤 면에서는 시골 교회들이 더욱 성장하게 될 것이다.
변화되어야 할 교회
이런 멀티미디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뛰어난 상상력이다. 상상력(想像力)이란 어떤 기존의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다. 미국이 이런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주입식이 아닌 상상력을 자극하는 교육 덕분이다. 일본이나 우리 나라는 아직도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새로운 시대를 따라가기도 바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95년에 우리 나라에 왔던 네그로폰테(N. Negroponte)는 그의 책 한국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전해들은 것이기도 하고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경험이긴 하지만 한국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바로 당신들의 교육체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크게 중점을 두었던 바로 그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내가 받은 인산으로는 당신들은 교육분야에서 극히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 창의적이고 유연한 교육의 길 대신에 주입식 암기교육에 극단적으로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입식 교육은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는 "극히 위험한 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창의성이 없는 주입식 교육으로는 새로운 시대에서 항상 뒤떨어질 수밖에 없고, 결국 또다시 정보 선진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도 이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과거와 다른 변화를 이룩하지 않으면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어 가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전반적으로 경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한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신앙 내용을 가졌으면서도 상상력의 세계를 교리화 하여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은 교회가 그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머물고 있을 때 저들의 삶은 오히려 위축되고 저들의 다양한 욕구가 제한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교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두뇌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말이나 사건에서는 별로 자극을 받지 못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주입식 교육은 사람들을 졸립게 한다. 그러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교육은 우리의 두뇌를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므로 졸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흥미를 유발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배우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틀에 박힌 예배와 지루한 설교, 변화 없는 목회 프로그램, 그리고 경직된 목사와 장로들의 고정관념−이런 것들이 오늘의 교회들을 경직시키고 있다. 동맥경화증에 걸린 교회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발전해 가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들은 예배에 활력을 불어넣고,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을 새롭게 개발하며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이 열어 가시는 새로운 역사를 바라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근본적인 진리를 굳게 잡되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변화하는 시대를 바라보면서 그 진리를 새롭게 해석하며 거기에 알맞은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계속 개발해 갈 때 교회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선교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할 것이다.
미국의 교회들은 이미 인터넷에 무진장한 자료들을 열심히 올리고 있다. 그들은 이 새로운 도구를 적극적으로 선교에 활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아직 이런 새로운 선교 도구에 예산을 활용할 생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한국 교회는 멀티미디어 사회로 나가는 역사의 변화를 빨리 파악하고 여기에 대응하는 유연한 사고를 지녀야 할 것이다.
교회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영성을 일깨우는데 있다.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자극할 뿐 아니라 영성까지 일깨우려면 여기에 다양한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교회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고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것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들을 개발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과거에는 다양하였던 것들이 현대에 이르러 단순화되어 버려 우리의 영성을 일깨우는 대신 더 깊이 잠들게 할뿐이다.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어떻게 교육시키셨는지를 볼 수 있다. 출애급 사건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다양하게 계시하셨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나다"라고만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긴 교리적인 설명으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바로를 열 가지 재앙으로 혼내 주시면서, 그리고 그들을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시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저들에게 알려 주셨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며, 시내 산에서 저들과 만나 율법을 주시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저들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몸으로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영성이 어두워 그런 다양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우는 역사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나님을 그들의 삶과 역사 속에서 배우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전화 하면서 생동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글자 속에 갇혀 들게 되었고, 그 글자에 매이기 시작한 저들의 삶이 형식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에서 거꾸로 문자시대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삶 속에서 만나기보다는 성경 속에서 만나려 하였고,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만을 예배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리화 되고, 성전 안에 갇히게 되었다. 예배는 생동감을 잃게 되었고, 종교는 의식화되어 사람들을 오히려 억압하는 틀이 되므로 매력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 그는 말씀으로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때로는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보여주시기도 하였다. 병을 고쳐 주시면서 또 어떤 때는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일을 통하여, 그리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혹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 같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섬김의 나라임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므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교육은 다양한 방법을 통한 교육이었다.
예수님의 이런 다양한 교육은 제자들 속에 잠들어 있던 영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하였다.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이성과 감성의 세계를 초월한 기적의 사건들을 통하여 영성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일깨우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았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의 이런 교육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었고,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운 것들이었을 뿐 아니라, 저들이 고수하여 온 율법주의와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저들에게는 영성이 없었고, 따라서 영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율법 속에 한정시키므로 그 나라의 역동성을 잃게 하였던 것이다. 율법이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종이에 인쇄된 신문과 같다면,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대화가 가능한 영화와 같다고 하겠다. 글자 속에 죽어 있던 하나님의 나라를 생생하게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내신 것이다.
멀티미디어적인 교회로의 거듭남
그러나 이렇게 전파된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글자 속에 갇히게 되면서 교회는 다시 형식화되고 제도화되고 교리화 되어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잃게 되었다. 물결치며 흐르는 강물과 같은 하나님 나라가 이제는 작은 그릇 속에 담겨진 물과 같이 흐름도 물결침도 없는 죽은 하나님 나라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역동성을 잃은 교회를 개혁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교회들은 이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작은 하나님의 나라로 축소되었다. 세계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교회를 확장하고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만 관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상징과 음악과 다양한 영성 개발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없애 버리고 말씀 위주로 단순화시키므로 우리의 영성이 깨어 일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깊이 잠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우리의 찬양은 영감이 없으며,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들이 우리의 영성을 깨우기는커녕 우리의 감성조차 자극하지 못하는 맥빠진 예배들을 반복할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영성이 메말라 있는 상태로 아무리 선교를 하여도 다른 사람의 영성을 일깨울 수 없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맛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멀티미디어 시대를 맞이하면서 멀티미디어적인 교회로 거듭나야 하겠다. 좀더 영감 있는 다양한 예배와 찬양과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멀티미디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성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주시는 도구일지 모른다. 이 도구를 이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영성을 일깨우는 노력들을 기울여야 하겠다.
우리는 우리의 영성 개발을 위하여 별로 노력을 하고 있지 못하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일이 고작이요, 소수의 사람들만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고, 성경을 하루에 한 두장 읽는 정도일 것이다. 우리 성가대의 찬양도 한 두시간 정도 준비된 것일 뿐 거기에 영성을 일깨우기 위한 기도와 노력이 담겨 있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근본적으로 영감을 받아 만든 우리의 찬양 자체가 없기에 한국 사람의 영성을 일깨울 만한 어떤 매체가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젊은이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영성을 일깨우기 위하여 이제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한 새로운 예배를 시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시도가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덜 경직된 젊은이들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굳어진 사고를 가진 원로들이 모두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이런 변화를 이룩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 사회는 20대 30대 젊은이들이 사장이 되고 경영인들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데 교회는 그런 젊은이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나라는 정적이며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 나라에 우리가 함께 들어가 거기에 깃들인 은총들을 맛보려면 우리에게 상상력이 필요하고, 영성이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려면 열린 마음, 그 나라의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우리의 영성을 억누르고 있는 모든 틀을 깨고, 좀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좀더 넓게 멀리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를 따라가야 하겠다.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멀티미디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제 교회도 문자 속에 갇혀 있던 하나님의 나라를 생동감 넘치는 나라로 이끌어 내어 사람들에게 전달하여야 하겠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교리가 아닌 사랑으로 전파하여야 하겠다. 그럴 때 교회는 이 시대에 앞서 가면서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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