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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교회론연구

by 【고동엽】 2022. 2. 23.

교회론연구

 

심 용 섭 목사

 

 

1.서 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너무 많아 탈이라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서울의 밤은 예배당의 빨간 십자가가 뒤덮는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교인의 증가율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며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눈부신 성장이 80년대를 고비로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교교문사가 발행한 1993년 기독교 연감에 따르면 1990년에는 연평균 10.8%의 성장을 보였으나 1991년에는 5.8%, 1992년에는 4.0%로 둔화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사람들이 교회가 수적으로 증가하는 데에 대하여 걱정을 하는 것이나, 교회가 교인 증가율의 감소를 걱정하는 것이든 공통점은 교회를 향해 문제의식을 갖고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 우리 시대에 주어진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결코 비생산적인 것이 아닙니다. 터부시하고 피해 가야 할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도리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가치를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류 문명 역시 인간의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 창조적 결과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직면한 많은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만나 풀어 나가는 용기와 지혜를 갖춘다면 우리는 문제를 극복하는 기쁨과 함께 진일보하는 감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문제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문제를 풀려고 하는 용기와 지혜가 모자라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직면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용기와 지혜를 모을 수 있다면 우리 교회는 교회 안과 밖에 참 희망을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이 용기와 지혜를 모으기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입니다. 이는 우리의 꿈이면서 한국 교회의 꿈이 되어야 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꿈이 되리라는 믿음에 터하고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어 내는 공동체를 세우고자 사랑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는 가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6개월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모델이 나와 그 기능을 개선하고 진보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동서로 갈라졌던 냉전이 사라진 일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가 모두 내 안방처럼 여기고 문을 활짝 열어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은 실제로 전 세계를 하나의 울타리로 만드는현실적인 시도이며, 웨슬리의 "세계는 나의 교구다" 라는 선언적 의미가 인터넷을 통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질서가 무섭게 해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상품의 가격도 한 몫을 합니다. 가격 파괴라 불리는 1상품 다가격제 라는 현상이 이미 우리 주변에 일상적 질서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직 사회도 그렇습니다. 회사가 전통적인 하향식 조직 체계를 벗어버리고 직능별 팀 조직이라 하여 직위별로 주어지던 임무가 이제는 직능별, 능력별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부장이라 하여 과장 위에서 지시만 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직급을 넘어서 대화와 창조적 인 수평 조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생산성과 창조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기존 질서의 해체와 가치의 해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후기 현대사회의(Post modern) 특성이라 말합니다. 이제 2000년대가 되면 아직은 분명치 않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가 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국민소득(GNP) 1$ 시대가 목전에 왔다고 합니다. 국민의 생활은 적어도 물질적 척도에 비추어 본다면 중산층 계층이 두텁게 형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일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 Fromm)은 국민소득 5000$은 소유하는 인간에서(To have) 존재하는 인간(To be)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소유하는 것으로 행복을 가늠하는 수준에서 이제는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하여 삶의 의미를 묻는 성숙한 존재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윤리적 인간, 문화적 인간, 도덕적 인간으로 지향하는 것입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말처럼 우리가 이 것을 해도 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What ought I to do?) 나는 무엇을 바라고 희망하는가?(What may I hope?)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What can I Know?) 이러한 질문을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물음은 인간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며 윤리와 책임의 물음이며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물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종교적 물음이 되는 것입니다. 미래의 인간은 이러한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며, 그래야만 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미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은 소유 개념의 생활방식을 벗어나 삶의 질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의 산업에서 3차 산업의 비중이 극대화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미래 사회에서는 문화적 비중이 커 갈 것으로 전망됩니다. 인간 삶의 질적인 향상은 문화적 활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문화적 가치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독선이 아니라 해도 인간의 문화적 가치의 통합은 종교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미래사회의 문화적 통합자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전망으로 볼 때 미래 사회에서 교회의 사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점점 사람을 잃게 될까 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소득 안정 사회가 되면 자연히 사람은 종교적 의존도가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우리 사회도 이제는 탈 교회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는 걱정이 바로 그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전 보다 사람의 능력이 월등히 증강되었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일이 줄어들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대로 존속된다면 그런 결과를 초래하겠지만 교회가 혁신을 하여 참으로 인간의 근원적 질문과 만나고 인간의 의미를 묻는 물음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여전히 교회는 세상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종교다운 종교로 거듭날 때, 인간의 문화가 숨쉴 수 있을 때 2000년 시대에도 종교는 여전히 유효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기독교가 유일한 대안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미래 사회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는 교회가 거듭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가 말한 바처럼 문화의 변혁자로서 교회가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6-70년대 정서에 머무르고 있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는 장차 문화의 주역이 될 젊은 세대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장차 중산층의 허리를 이루게 될 것이며, 향후 2-30년 간 우리 사회의 중요한 결정 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급한 것은 교회가 발빠르게 앞서가는 젊은 계층을 교회로 흡수하고 양육하는 일입니다. 지금 교회가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진보적인 젊은이들의 자리가 점점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노령화 되어 가면서 시대정신과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문을 닫아 걸고 있지 않으려면, 교회가 새 시대를 준비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미래 사회를 준비하기 위하여서는 젊은 중산층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관을 확립하는 일이 시급하다 하겠습니다.

 

 

2.교회론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아는 일은 곧 내 자신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며, 장차 미래 교회의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미래 교회라 함은 결코 신종(新種)을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 교회는 더욱 교회적이고, 더욱 성서적이며, 더욱 교회 전통을 보존하는 복음적인 일일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전통적이라는 말이 결코 과거의 시간에 갇혀있자는 보수적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 교회는 끝없이 진보하는 자기 혁신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노력에 전념하는 일을 뜻합니다. 따라서 미래 교회의 교회 본질에 대한 이해는 가장 전통적이고 성서적인 교회 이해와 가장 진보적인 미래를 전망하는 역사성이 합류하여 흐르는 강물을 만나는 일일 것입니다.

 

2.1.교회의 근원

2.1.1.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

 

기독교란 예수를 따르는 운동이기에 교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예수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꿈과 예수의 희망은 곧 교회의 꿈과 희망이어야 하고 예수의 방향이 곧 교회의 방향이어야 하기에 예수의 첫 메시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해는 교회 이해에 팰수적이라 하겠습니다.

예수의 메시지와 활동 내용을 증언하는 복음서는 하늘나라를 증언하고 있으며 그 하늘나라는 마가복음 1:15에서 결정적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니다. "때가 차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가 바로 그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온 것이며(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 :already but not yet),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며, 현세적, 민족적, 정치적 체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종교적 지배를 뜻하며, 심판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복음이며, 은혜의 시대를 선언하는 복음이며, 하나님을 향해 근본적으로 결단하게 하는 요구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는 종말적이며 미래를 향해 열려진 개방성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바로 여기에 이 하늘나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는 영적 삶의 질을 나타내는 가치적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교회는 잉태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적으로일어나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에로 자신의 방향을 정하는 결단,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사는 운동입니다.

 

2.1.2.예수의 부활과 구체적 교회의 태동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부활 이후 비로소 초대 그리스도 신자들이 교회를 말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 없이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의 생애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즉 부활 이전의 예수는 설교와 활동을 통해 부활 이후 구체적인 교회의 출현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교회의 성립은 예수를 추종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사람 예수의 부활 사건을 믿으며, 모여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부활한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공동체로서 교회는 새로운 종말의 때를 기다리며 재림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이 인간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행위이듯이 교회 성립 역시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집단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업적이며 인간의 집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성립은 단순히 부활 이전 예수의 생애나, 부활 이후의 사건에 국한하여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전체에서 보아야 할 것이며, 교회의 성립을 매우 포괄적으로 폭넓게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눈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2.1.3.교회라는 말의 뜻

 

교회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 또는 막연한 이론이나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생생하게 체험한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교회는 매우 경험적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그 경험은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통치하는 능력으로 나타난 사건을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일하신 표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심을 경험하고 그 사실을 증언하는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용어는 구약의 종말적 공동체 칭호인 "하나님의 단체"(kahal Yahweh)라는 칭호에 해당하는 희랍어 "하나님의 교회"(ekklesia tou theou)에서 연유합니다. 이 것은 단순히 모이는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모이게 하시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란 참 하나님의 집회요, 참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참 종말의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인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뜻에 따라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들로 모이게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모여진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 가운데 실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한편 하늘나라와 교회를 혼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는 아래로부터 자라나고 현세적으로 조직하며 발전 진보하는 변증법적 소산으로서 인간의 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다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며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외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알리는 전령이요 대사와 같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꾼들로 모이게 한 것이며, 교회는 하늘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2.2.교회의 내적 본질

 

2.2.1.하나님 백성으로서 교회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 교회를 성직화 해서는 안된 다."(Hans Küng)

교회는 결코 특정한 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며 교회는 어디까지나 온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며,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인 공동체이며, 모두가 선택된 백성이며, 하나님께 부름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교회 구성원 모두는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고 믿습니다. 즉 성직자 위주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되며 평신도 소외시키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을 무시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카리스마, 봉사활동, 직분, 기능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에 따른 구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분이 결코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에 선행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교회는 어떤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신자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기 대문입니다. 즉 믿고 순종하며 날마다 변화하며 사랑하고 희망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개인화 해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되는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 개인으로 구성되나 단지 개인의 구령, 즉 각 개인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그 이상을 추구합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개인으로 구성된 백성의 공동체 전체의 구원에 관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2.2.2.성령의 피조물로서 교회

 

성령은 교회 존립의 기초요 생명의 원리이며 활동 능력이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에서 오는 영에 의하여 충족되고 생활하며 유지되고 인도됩니다. 교회의 모든 원천, 존재, 존속이 성령의 덕택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에 의존하고 있으며 교회의 법, 교회의 권리, 교권 이 모두는 성령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교회는 결코 성령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성령은 자유롭게 활동하며 결코 교회 안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활동하며, 온 교회와 온 세상에서 활동합니다. 물론 성령의 거처는 교회이며 성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역시 교회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특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 안에와 세상까지 통할하고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성령에 속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 역시 이 성령의 활동을 따라 활동하게 되며, 요한 웨슬리(Jhon wesley) 처럼 온 세계가 교회의 일터가 됨을 확신합니다.

한편 교회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카리스마로 나타나는데 카리스마란 개인에 대하여 공동체 내의 특정한 봉사활동을 부과하고 동시에 이 봉사 활동을 수행할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이 것을 소명이라는 말로 달리 부를 수 있으며 은혜라는 말로도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카리스마는 첫째 각자의 카리스마가 있으며, 이는 개인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서로 서로를 위한 것이며 교회 질서의 제일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서로 서로에게 봉사하는 은혜를 갖는 것으로서 이 것은 교회의 두 번째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원리는 주께 순종하는 카리스마입니다. 이 모든 카리스마는 사랑의 법 아래 있으며 공동체 건설을 목적하고 있습니9. 따라서 성령의 활동은 각 개인에게 카리스마로 나타나며 이 카리스마는 교회 안에서 각 개인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로 세우는 질서가 되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은혜가 충만하다"는 말을 하거나 "성령이 충만하다"라는 말을 할 때에는 이와 같은 카리스마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해야 할 것입니다. 카리스마와 교회는 성령의 열매입니다.(5:22-23).

 

 

2.2.3.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교회는 성만찬을 행하고 있습니다. 성만찬은 교회다움을 극적으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감사하며 기념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만찬은 공동체적인 것이며 친교의 식사입니다. 이 친교의 식사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일치를 이루는 교통이며 신자와 신자가 일치를 이루는 상호간의 친교가 됩니다. 이로써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 묘사되고 있으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 되어야 함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4:15-16, 1:18, 2:19). 따라서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부활한 주님으로서 교회에 현존합니다. 교회 없이 그리스도 없고, 그리스도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터하고 있습니다, 16:16). 교회의 생명력은 과거 그리스도의 영향과 완성될 종말적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는 성만찬과 예배는 특별히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하며 예배하는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머리인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에 동화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는 하나 결코 몸이 머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통치자이며 교회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교회에 동화되어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시는 곧 교회의 가르침이 됨을 믿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가장 참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것도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고전3:11).

이로써 교회의 내적 본질은 부름 받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아래 움직이는 역동적이고 구체적인 사람들의 공동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3.교회의 외적 본질

 

2.3.1.예배공동체적 본질

 

하나님은 교회를 예배하는 공동체로 부르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구약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전하고 찬양하는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공동체 역시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적 신앙고백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이를 증거하고 찬양하는 공동체로 모이기 시작했음을 믿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부르심은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며 예배하는 백성으로 훈련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예배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요 체험이며 증언과 찬양이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하며 하나님께서도 그 것을 원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본 예의요 수단일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 예배는 하나님 당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맺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시간적, 장소적 공간을 이 세상 한 가운데 열어놓고 있습니다.

 

2.3.2.봉사적 구조의 본질

 

"교회가 은혜의 공동체라면, 그 것은 또한 봉사의 공동체이다."

교회 안에는 사적, 공적으로 남에게 규칙적으로 봉사하기 위한 은사적인 직무가 있다는 것을 믿으며 다음과 같이 교회의 봉사적 구조의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 안의 모든 영구적 직무는 타인에 대하여 더욱 봉사적일 수록 그만큼 고차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직무는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 안에서 영구적이며 공적인 직무들은 다른 카리스마와 명확한 구분은 없습니다. 즉 예언자가 교사의 일을 할 수 있고 교사가 예언자의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독점적인 봉사 영역은 없습니다.

셋째, 모든 직무 중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서는 사도직인데 그 역할은 봉사(관리)하는 임무임을 믿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무는 교회 공동체와 세계를 향한 봉사적 구조와 본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봉사의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이 봉사는 특정 집단의 몫이 아니며 하나님 백성이 함께 책임지는 사목적 직무임을 믿습니다. 때문에 교회의 모든 직분은 권력이 아니며 전적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며 이 세계를 섬기기 위한 직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교회는 이 봉사직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가장 교회다워질 것입니다.

 

 

2.3.3.선교공동체적 본질

 

교회의 기능상 특징을 말할 수 있다면, 부르심과 훈련하심과 파송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실현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기능은 성서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이며 교회의 일인 것입니다. 주께서 교회를 이 세상에 세우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끝임 없이 사람들을 부르고 교육과 훈련을 행하며 그들을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여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기능적 과제이며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처럼 교회가 부르고 훈련하고 파송하는 일을 가리켜 선교라는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선교라는 말은 매우 광의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말입니다.

선교는 1961년 뉴델리, 1968년 웁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세계교회 대회를 거치면서 선교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즉 선교는 교회가 주체가 아니고, 어느 특정한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행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회 성장이나, 교회 집단의 욕망에서 시작하는 선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교는 오직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행위를 선교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것 이상의 개념으로 바뀐 것입니다. 봉사하고 섬기며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모든 일을 선교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에 헌신하기 위해 세워졌음을 믿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그 동안 불러모으는 일에만 집착하여 교회로서의 기능에 많은 장애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불러 모인 교인을 적절하게 교육하고 훈련하여 세상으로 파송하는 교회로서 진정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가 되는 일을 게을리 해 왔음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2.3.4.교육공동체적 본질

 

2.3.4.1.교회의 구조적인 문제

 

한국 교회의 경이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공신력이 떨어진다는 진단에 동의한다면 그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교회가 역사 속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그 문제는 교회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서 문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잘못된 교회 이해에서 나오는 교회의 잘못된 구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교회 구조에서 교회의 교육 역시 잘못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교육하고 훈련하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마지막 명령은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20) 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교육이 바르게 되지 못하고서 교회가 바르게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교육이 바르게 된다는 것은 곧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 교회는 교회로서 정상적인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4 가지 기능을 들자면 '케리그마'(말씀선포), '디다케'(교육), '코이노니아'(영적 친교), '디아코니아'(세상을 향한 봉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기능이 조화 있게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부분 교회는 말씀 선포한 가지에만 치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교육도 어린이나 중고등부에게나 해당하는 분야로만 인식되고 있는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신자는 일 주일에 열 두번의 예배(주일, 새벽, 수요, 속회, 철야 등)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의 교회가 예배 중심적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문제는 교회의 힘이 듣는 데만 일방적으로 몰려 있고 교육, 나눔, 봉사 등과 같은 쪽엔 소홀한데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부흥하면서 양적인 성장에만 집착해 온 때문에 한국 교회의 구조가 듣는 교인을 양성하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교인을 매우 피동적인 객체로 머무르게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 들어 교회마다 성경공부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나 대부분이 성서 통독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단순하고 흭일적인 대답에만 머무르고 있고 여전히 교회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육 대상자인 평신도 이해에 편견이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른 교육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대상자인 평신도를 교육의 주체로 세우는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2.3.4.2.제자화 교육론

 

기독교 교육이란 어떤 특정한 신학교육의 과정 속에 자리하는 전문적인 한 분야로 단순하게 이해하기 전에, 그리고 이론 신학과 응용신학이라는 두 범주 중에 후자에 속하는 학명이기 이전에, 기독교 교육은 먼저 하나의 삶과 신앙의 사건이고 역사 창조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은 신앙과 삶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며, 교회 전반에서 의도되어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교육 역시 이와 같은 범주밖에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평신도로 하여금 신앙과 삶 전반에 걸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며, 곧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노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라는 개념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제자' 라는 말이 나오는데 모두 313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태의 경우는 대부분 12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두 곳, 27:57, 28:19에서는 12 제자 외의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동사형으로서 "제자가 되다" "제자를 만들다"의 뜻을 가집니다. 특히 마28:19의 경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광의적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도 제자라는 단어를 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의 말씀 안에 있으면 제자가 된다고 증언합니다(8:31). 누가의 경우는 더욱 넓은 의미로서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41에서는 하루에 제자의 수가 3,000이나 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서가 말하는 제자는 12사도에만 제한된 단어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제자라는 말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붙였던 별칭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라는 말은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12사도와 평신도를 포함하는 단어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불러지는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제자입니다.

 

교육의 목적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4:12)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저절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육이란 의도된 과정과 목표를 두고 행하는 노력을 통해 경험하는 사건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제자화 교육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인격적 요소를 체득하고 실천하여 온전한 교회를 이루려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제자화" 라는 말이 너무 남용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지식을 습득하거나 교리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또는 전문적인 기능인을 만드는 것쯤으로 이해하거나 전도하는 기술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자화 교육을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자화 교육의 참 목적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제자화 교육의 목적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의 제자도 아니요, 담임목사의 제자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전인적인 것으로서 인격과 삶 전반에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작은 예수'가 되는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화 교육은 성도로서 온전하게 세우고, 성도로서의 삶을 봉사하며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여 교회를 바르게 세우며 세상을 바르게 세우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평신도는 더이상 앉아서 구원의 때만을 기다리며 중개자(성직자)의 도움만을 기다리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평신도 역시 성직자와 함께 부름 받은 하느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고 제자의 도를 행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을 향해 봉사하는데 열려져 있다는 인식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해 열려진 봉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말씀을 증언하는 본질적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평신도를 이와 같이 교육하고 훈련하는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믿습니다.

 

 

2.3.5.조직공동체의 본질

 

2.3.5.1.교회의 직무

 

"직무를 갖지 않은 신앙인은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의 구성원이지만, 신앙을 갖지 않고 직무를 맡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교회의 구성원도 아니다."(Hans Küng)

이 같은 통찰은 교회의 모든 직무가 신앙인 공동체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직무는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해야 하며 결코 교회의 직무가 하나님과의 중개자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직 중개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 것입니다(딤전2:5). 이같은 견해는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을 믿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무가 봉사하는 직무가 되지 못하고 자기 높힘과 교권의 수단으로 나타나는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무는 봉사하는 분량일 뿐입니다.

 

2.3.5.2.일반 사제직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중개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직무를 가진 사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한스 큉은 믿는 자의 사도직으로서 일반사도직의 5 가지의 사도직 본질을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고 세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신도는 그리스도와 친교를 발견하고 보존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중개자를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신도가 맺는 인격적 관계는 교회 내의 어떤 직무도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은 궁극적인 자유와 책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직무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모든 믿는 자는 영적인 사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 이후 구약 시대의 사제적 속죄 제사는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의 일반사제 제사는 영적 제사입니다. 기도, 찬미와 감사, 참회와 정의, 친절과 사랑,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은 영적인 제사인데 이는 특별한 성소에서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과 속()의 구별이 없습니다.

셋째, 말씀전파의 임무입니다. 원칙적으로 신앙인은 누구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고 가르쳐야 합니다. 평신도는 전문적인 설교가나 신학자와는 구별되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소명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넷째, 인간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중개자의 임무입니다. 공동체의 사제적 봉사는 예배와 성찬식에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안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일반사제직은 각자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타자에게 의존하고 타인에 대여 책임 있음을 고 협력하도9 부름을 받았습니다. 평신도 역시 이 세상으로 부름받은 사제들이며 영적 예배와 봉사,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현하는 목회자임을 믿습니다.

 

 

2.4.교회공동체와 사회문화

(문화운동을 위한 공동체)

 

문화는 인간 삶의 결과 물임과 동시에 인간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문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인간은 문화를 통해 존재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전 행위가 문화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창조해 가느냐는 곧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 역시 이 문화를 통하여 더욱 풍성한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는 문화의 변혁자요, 문화의 창조자였습니다. 유럽의 문화는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 문화가 전부입니다. 동양에서 그 문화는 불교문화가 지배적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양상은 인간 삶의 전반적인 것으로서, 인지문화(지식), 규범문화(가치관), 물질문화(기술), 심미문화(9 )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 역시 이 모든 분야의 문화와 만나며 변혁하고 창조하며 보전하는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한국문화는 불교적 문화와 샤마니즘적 문화가 지배적이었으며 선교직후 보급된 기독교적 서구문화가 다양한 충돌을 일으키며 한국에 터잡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문화는 신분, 성차별, 의료, 복지, 교육, 농촌계몽 등과 같이 이 사회 속에서 매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많은 문제 앞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은 기독교 문화가 매우 약화되었다는 것이고, 문화의 정체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이 둘 째 문제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적 전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서구 문화의 무차별한 지배를 받게 될 위기에 처한 것도 민족적 위기감을 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화를 상실한다는 것은 곧 삶의 뿌리를 송두리체 잃고마는 것과 같다는 위기감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교회는 이 문화를 변혁하고 창조하는 운동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문화운동이란 문화적 변혁을 추구하거나 보전하며 창조하는 집단적 움직임을 말합니다. 이 문화운동은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기독교문화운동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이 세상이 하나님나라에 가깝도록하는 예수운동이 될 것입니다. 천박하고 퇴폐적이고 파괴적인 문화는 제거해야 할 것이며 지키고 보전해야 할 문화는 다시 살려내고 발전시키며 미래적 인간 문화를 창출하는 모든 행위를 교회는 지지하고 앞장서 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하나님 뜻에 가까운 인간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그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 문화의 운동자가 되지 못한다면 결코 교회의 선교는 폐쇄적이거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 전략 면에서도 끝없이 문화적 운동의 선봉에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래 교회는 이 문화운동을 어떻게 실천하는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리라 믿습니다.

 

 

3.한국교회의 현실과 나아갈 길

 

3.1.한국 민중의 종교적 영성

한국민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심성은 크게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고대 민간신앙인 샤머니즘의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불과 2-30년 전까지만 해도 치병의 수단으로서 정한수로 대변되는 빌기와 무당과 굿으로 대변되는 샤머니즘 신앙 형태를 우리 주위에 당연한 것처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종교적 심성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하나는 불교적 심성입니다. 삼국시대 이후 불교는 한국 민중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불교는 숭유배불 정책에 따라 심한 타격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한국 문화와 사람들의 심성을 지배하는 대표적 종교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조선 개국과 함께 정책적으로 도입된 유교는 한국인의 심성을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습니다. 유교는 생활 윤리로서 사회의 구조적 틀로서 존재하며, 한국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고(思考)의 범주로서 존재합니다.

이상과 같이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크게 세 가지의 종교적 범주들이 혼재하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는 한국인의 다종교적 문화, 다의적인 사상적 구조를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성의 구조는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혼합적 종교의식이 무분별하게 기독교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적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 종교 문화에 대하여 배타적이어서도 안되겠지만 미신적인 요소들을 무분별하게 기독교화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3.2.한국 기독교의 태동과 성격

 

한국 기독교는 독특한 전래 양식을 갖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가톨릭의 경우 17세기 초부터 북경으로부터 마태오릿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여러 교회서적이 조선의 지식인층에 널리 읽혀지게 되었는데, 이는 신앙 차원이기보다는 지식 차원이었고 그 지식은 당시의 혼란한 국내외 정세와 맞물려 국가 체제의 개혁과 저항심, 서방의 신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조선 사회의 모순에 대한 대안을 찿는 노력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천주교 계통으로 들어온 교회 사상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 것은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며 교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개신교의 경우 역시 이미 만주와 일본에서 우리말 성서가 번역되어지고, 초기 선교에는 개항과 더불어 신문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무렵 새 시대의 대안으로서 개혁 세력의 관심 속에 선교되기 시작했으며, 일제 시대에 초창기 개신교는 민족적 관심과 물음에 응답하는 한국적 기독교로 뿌리를 내려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은 기독교의 전래가 당시 시대적 3상황과 매우 긴밀한 상호 응답적인 관계였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신문명의 젖줄이었고, 교육과 개혁의 역동적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초창기 성격은 1930년 한국에 들어온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가 통합하여 한국감리교회가 탄생될 때 선언한

한국교회의 선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문제와 정서에 성실하게 만나려 했던 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3.한국 교회의 부흥과 반성

 

한국 교회의 양적인 성장은 세계 교회사에 유례를 찿을 수 없을 만큼 급속한 것이었습니다. 불과 100년만에 인구 1/4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특히 불교, 유교 문화권인 동양에서는 기적적인 성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성장은 이제 세계 도처에 선교사를 파송할만큼 한국사회의 경9제 성장 이상의 발전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 속에 가려진 부작용 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선교 100년을 넘기면서 우리는 이러한 몇 가지의 반성할 점을 찿아내고 진지하게 한국 교회의 문제를 짚어 봄으로써 한국 교회의 밝은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한국 개신교회의 선교는 한국의 문화적 뿌리를 메마르게 하였습니다. 일방적으로 서양 문명의 우월감이 교회를 통해 심어졌고 결과는 한국적 영성을 메마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기독교 문화는 미국 기독교 문화에 종속되게 되었으며, 정신적 사대주의로 빗나가게 한 책임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한국의 문화 뿌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버려야 할 것과 버려서는 안될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한국 기독교의 무속화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초창기와는 달리, 일제 후반기 일제의 강압적 탄압과 일제의 문화적 회유에 빠져 버린 한국 기독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탈 역사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일제 후반기의 부흥 운동과 최근 한국 기독교의 부흥 운동까지 공통된 특징이 탈 역사화이고 한국 민간 종교의 무속 신앙의 기독교 유입입니다. 때문에 지극히 기복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에 몰입되고 신비주의적이고 비이성적인 미신적인 신앙 운동에 메어 달리게 되었다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윤리와 도덕적인 인격적인 성숙한 고등 종교라 할 수 있는 기독교의 본질과 많은 간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셋째, 한국 기독교의 이중적인 현실주의와 물질주의를 반성합니다. 한국 기독교는 그 동안 물량적 성장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성장 목표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룡처럼 거대하기는 하지만 덩치에 걸맞은 내용을 채우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경제 부흥과도 유관한 일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맹목적일 만큼 영적이고 신비적이며 하늘나라 소망에 집착하면서도 실제의 생활현상은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이며 정제되지 않은 욕망의 분출구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것은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실에서 보는 것과 같은 한국 기독교인의 이중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한국 교회의 비민주적이며 지나친 권위주의적 성격을 반성합니다. 개신교는 개신교다워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70%가 여성이면서도 여성의 참정권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제한되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청년들의 의사가 제한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직제 역시 능동적이고 섬기고 봉사하는 섬세한 직제이기 보다는 오히려 교권적이고 무딘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짙은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가 부족한 것이 대화의 장입니다. 수평적 대화 기능이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의 과제는 능동적이고 민첩한 조직과 직제를 갖추며 교회 구성원의 총의가 최대한으로 모아지는 의사 결정 구조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다섯째, 한국 교회의 비교육적인 현실을 반성합니다. 한국 교회의 교육적 기능은 현재 어린이를 중심한 교회 학교가 명맥을 유지할 뿐입니다. 전 교인이 피교육자라는 사실을 잊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한국 사회의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중고등학교까지의 모든 교육이 대학 입시를 위한 것이고, 대학 교육마저 입사를 위한 과정으로 전락해 버린 한국 교육의 뒤틀린 현실과 유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취직 한 번으로 평생을 보장받을 수 없는 시대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연구하고 창조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냉엄한 경쟁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앞서가는 회사는 직원의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예배당의 치장과 확장, 교인 수 늘리기에만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거듭나야 합니다. 파격적인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교육과 훈련에 집중적으로 관심하고 내용 있는 교회를 가꾸는 일에 열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까닭은 오랜 세월 동안 가난과 싸우며 살아온 불행한 흔적이며, 식민지와 독재의 무자비한 힁포 앞에 살아 남으려 했던 본능적 처신으로 몸에 베인 것입니다. 미래 한국 교회는 이 상처와 습관을 치료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4.한국적 감리교회를 지향하며

 

3.4.1.한국 감리교회의 역사적 배경

 

우리가 세울 교회는 1930. 12. 2.시작된 한국 감리교 회의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 교회의 정체로 삼습니다. 선교 초기 미 감리교회와 미국 남감리교회가 다르게 선교를 시작하였다가 1930년 남북감리교가 통합을 하고 한국 감리교회를 세우게 된 역사적 사건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지금도 계속 계승되고 보존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1930년 총회석상에서 웰취 감독은 한국 감리교회의 탄생에 대하여 세 가지 방향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첫째, 이 새 교회는 반드시 진정한 기독교회가 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요구하시는 조건대로 행하여 그 친구가 되어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문을 활짝 열고 환영하며 모두 교인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씀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 새 교회에서는 할 수 있는대로 남녀와 귀천의 구별이 없이하여 주 앞에서 빈부와 유무식자와 남녀와 교역자와 군인이 다같이 모여 이 교회로 하여금 서로 경애하고 사모하는 가정과 학교와 사업 장소가 되게 하자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받은 바 재질은 다를지라도 남에게 기회를 주는 것과 남을 존경하는 것은 다름이 없어야 될 줄 압니다. 기독교회는 전도와 교육과 사회사업을 통합하여 한 사업으로 보며 개인의 진리와 사랑의 권능으로 구원하고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봉사하며 그의 정신으로 변화시켜야 할 줄 아는 교회일 것입니다.

 

둘째, 이 교회는 진정한 감리교회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편협한 교파주의를 가지고 옛날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교만과 자존심으로 독립한다는 뜻이 아니요, 감리교회 창립자 요한 웨슬레 선생처럼 우리의 관계와 광범한 동정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복음이 우주적인 것과 내심에서 신령한 경험을 얻은 것과 행위가 성결하게 된 것과 종교가 정신적이요, 의식적이 아닌 것과 성신을 받음으로 종교는 자유와 희락과 권능이 되는 것을 믿으며 또 예배의 형식과 치리의 제도가 유익한 것인 줄 믿으나 승려주의는 부인하는 것입니다. 진정 감리교회는 진보적이므로 생명이 있는 이의 특색을 가졌으니 곧 그 시대와 지방을 따라 자라기도 하며 변하기도 할 것입니다.

 

셋째, 이 교회는 한국적 교회가 되자고 한 것입니다. 한국적이라 하는 말은 이 교회를 한국인으로만 조직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한국 신자들과 같이 복음 전파에 동역하는 사람들 중에 중요한 부분이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입니다. 또 한국적이라는 말은 교회생활 중에 무엇이든지 한국에서 된 것이 아니면 내버린다는 협소한 말이 아니며 수99천년 동안 기독교 9 사에 유전하여 온 바를 경시하거나 부인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고금을 통하여 전래한 바를 감사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예배에나 처리에나 규칙에 잘 이용하되 한국 문화와 풍속과 습관에 조화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통용하기에 편리하고 적합하나 어떤 것은 지방적이요 임시적인 것도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작정하는 바가 일시적인 것도 있으나 영구적인 것이 많기를 바랍니다. 우리 전권 위원들의 협의한 바와 결정한 바가 여러분이 기독교적, 감리교회적, 한국적인 교회를 건설하는데 유조한다면 우리의 힘쓴 바는 충분히 보상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다음의 감리교 교리적선언을 우리의 소중한 신앙고백으로 이어받습니다.

 

1.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 시는 성신을 믿으며

4.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의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5.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6.우리는 살아 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7.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 됨을 믿으며

8.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3.5.2.한국적 감리교회의 전망

 

감리교회의 전통적 신앙 기준은 성서, 전통, 이성, 경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준이 우리 신앙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며 균형 있는 신앙으로 성장케 하는 중요한 지침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우리 교회는 생명력 있고 균형된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감리교회의 특징적 요소로서 생명력과 균형감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서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보나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한편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나치게 편견을 갖거나 일방적인 우월감으로 균형을 잃고 마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이 샘솟듯 하는 생명력과 균형 있는 종교성을 보존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이런 점에서 이 두 가지 전통을 잘 보존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3.5.2.1.생명력 있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넘어서는 그리스도교.

 

다른 여러 그리스도교인들은 분명하고 정확한 교리가 확립되어야 올바른 교회가 된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감리교회는 교리가 없고 매우 경험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자유적이라면서 교회의 거룩성이 희박하다는 비평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교리의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좋은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생명은 언어로 표시되는 교리를 훨씬 넘어서며 신앙의 생명은 우리의 이성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유대 율법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문자 조항에 가두고 법으로 사람을 정죄하며 심판하는 매우 위험하고 반그리스도적인 위험을 경계합니다. 우리는 교조적 문자주의를 경계합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절대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종교는 무엇을 믿고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행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는 일이란 귀신도 하는 일입니다(2:19)

 

성서를 넘어서는 그리스도교

 

우리는 성서를 우리 그리스도의 경전임을 믿고 거룩히 보존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하나 하나 다 믿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아주 멀리 떨어져 살아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고 가르쳐 주는 구주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성서문자주의를 거부합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뜻과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들려주기는 하지만 성서의 문자 그대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음을 믿습니다. 교리적선언 5항의 고백과 같이 성서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믿고 따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신학과 해석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믿음은 결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문서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주장은 성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예수의 사건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경험하는 데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성서는 언어로 하나님의 일을 표시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일은 여전히 그 문자를 뛰어넘고 초월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제도적 교회를 넘어서는 그리스도교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세워져 있으나 하나님을 믿고 단결한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고 은혜를 얻으며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를 거룩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구성원이나 교회의 터, 교회의 제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너무나 소중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곧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만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과 직무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데 중요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님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황무오설도 믿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의 자유로운 행위가 교회의 제도 안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적인 제도는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제도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회에서 설교가 행해지고 성례전이 집행되며 제도적 질서가 세워져 있다 하여도, 목사나 신부가 종교적 의식을 다 집행한다 하여도 정작 우리의 내적 확증과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성령의 내적 체험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와 멀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6:15). 우리는 결코 제도적 교회 안에 있다고 하여 자만하거나 방심할 수 없음을 잊지 않습니다.

 

행위를 넘어서는 그리스도교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도덕과 윤리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위험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앙을 윤리와 도덕적 행위에 집착하여 생각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감리교회는 매우 실천을 강조하며 개인의 성결과 함께 사회적 성결을 주장하는 매우 진취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노력들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들도 우리의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 모든 행위의 샘물이 됨을 믿습니다. 성령의 은총은 우리의 도덕적, 윤리적 행위에 선행(先行)하며 우리의 선행(善行)은 은총의 샘물을 마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총을 통해 얻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으로 세워진 그리스도교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새 계명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법은 세속 법질서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은 성령의 능력이며, 하늘나라의 원리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이 사랑의 법에 터하여 세워집니다.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세상의 법질서와 긴장하며 갈등할 수도 있으며,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과도 긴장과 갈등의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의 법은 진리 안에서 자유합니다. 사랑의 법은 우리 인생의 규범이요, 가치 척도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3.5.2.2.균형 있는 그리스도교

 

균형 있는 성서이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서를 균형 있게 수용합니다.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온 39권의 구약성서와 27권의 신약성서를 우리는 경전으로 받아드립니다. 물론 이 경전은 해석상의 다양한 이해 방법이 나올 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교회의 책으로 정하고 경전으로 삼기 위하여 몇 가지 수칙을 지킵니다.

첫째, 성서는 교회의 책임을 믿습니다. 교회가 인정하고, 교회가 번역하며, 교회가 보존하며, 교회가 해석해 왔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책임을 잊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완성되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시를 믿음의 눈으로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둘째, 성서를 독서함에 있어서 특정한 몇 구절만을 따로 떼어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성서를 독서할 때는 반드시 전체적 맥락과 전체적 통찰을 갖고 있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문자주의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셋째, 성서는 응답을 위한 책입니다. 성서를 문학적으로, 역사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구되어 읽혀질 수도 있지만, 성서는 본래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는 믿음의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격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성서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요구에 우리가 응답할 수 있어야만 바른 성서독서가 되는 것입니다.

 

회심과 교육의 균형된 이해

 

우리 인간의 구원은 두 가지 관점에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신비적이고 타율적인 회9심을 말하기도 합니다. 마치 모두가 바울의 회심처럼 극적인 중생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한국 교회는 이 진리에 따라 열광하고 감정적이며 충동적인 노력에 치우쳐 왔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는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배우면서 인격적인 변화의 과정을 무시하는 불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느 특정한 시점을 통해 전적인 회심을 통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교육의 과정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구원의 과정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교회가 교회학교에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노력에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초창기 교회가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헌신했던 전통 역시 교육을 통한 인간의 구원에 관심 했던 결과입니다. 감리교회는 회심에 대한 강조에 못지 않게 교육의 강조를 소홀하게 하지 않습니다.

 

개인적 그리스도와 사회적 그리스도의 균형

 

우리는 인간의 구원이 개인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개인은 곧 사회적 존재인 때문에 사회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적 제반 현상에 관심을 가집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그 어떤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살 수 있는 인간 존재는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 역시 이런 제반 문제에 깊이 관심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 환경, , 인종, 민족, 가정, 음주, 마약, 언론, 노동, 문화 등 인간의 생활 영역 전체에서 인간성 상실이 중단되고 참된 인간성이 회복되도록 하는데 깊이 관심합니다.

교육과 봉사의 일치

 

미래 교회는 교육훈련과 봉사하는 공동체로 혁신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 모이는 데만 만족하였고 소유하는 기쁨을 복으로 가르치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미래 교회는 더불어 사는 기쁨과 봉사하며 공동체 의식 속에서 참여하는 기쁨을 찿고 있습니다. 삶의 드높은 질을 찿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속적인 교육 시스템이 담당하지 못하는 진리 교육과 봉사훈련에 관심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대 사회 봉사 프로그램 계발에 관심하며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계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르쳐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에 교회는 순종해야 합니다.

 

에큐메니칼운동(교회일치운동)

 

우리는 교회는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보편적 가치와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교회와 협력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함께 헌신해야 함을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가 지극히 분파적이고 정치적이며 얼마나 이기적 집단으로 변질되었는 지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리교회의 자랑스러운 교회일치운동의 유산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교회는 서로의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그 차이가 우리가 일치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과 다른 모든 문화 단체와도 끝없는 교류를 통하여 이 세상의 복음화에 헌신할 것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와의 균형된 교회

감리교회의 총회 대표를 교역자와 평신도 대표를 동수로 뽑는 전통에서 보듯이 평신도와 목회자가 균형된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감리교회의 전통입니다. 이는 감리교회의 민주적이고 균형된 특성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의사 결정과 정책 입안에 목회자와 평신도가 균형 있게 참여하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 교육, 봉사 등 모든 분야에 평신도의 위치는 주체적이어야 합니다.

미래 교회는 민주적이고 역동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현재 한국 감리교회는 장정과는 상관없이 직분 제도를 중심하여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문제점으로 여깁니다. 목회자와 장로 중심의 체제도 교회를 비민주적인 공동체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 교회는 6-70년대까지 지배했던 권위주의적 교권의 낡은 습성을 청산하고 구성원 전체의 참여를 열어 가는 민주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미래 교회는 위원회식 구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장정 상에 정하여진 대로 각 위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높이는 일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각 위원회를 조정하는 일은 현재의 기흭위원회가 맡고, 기획위원회는 각 계층, 기관별로 골고루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4.목회

 

4.1.목회자와 목회

 

목회자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름 받아 안수식을 통하여 1)말씀을 선포하고 2)성례전을 집행하며 3)그리스도교 공동체(교회)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3)양육하도록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하나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에는 다음과 같이 직무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4.1.1.예배 인도자로서 목사

 

교회의 일차적 본질은 예배하는데 있습니다. 목사는 이 예배를 공적으로 집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예배 집례자로서 목사는 예배 전체를 구성하고 연출하며 진행하는 책임을 지며, 목사는 교회 공동체의 예배위원회와 평신도들과 협의하여 교회 예배의 대표적 집례자가 됩니다. 이는 예배가 목사 혼자에 의하여 집행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예배는 인도자와 모든 평신도가 함께 준비하고 만드는 잔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에배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예배의 성서적, 신학적, 교회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 보전하면서, 그리고 급변하는 삶의 현장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예배를 준비하고 연출하여야 합니다.

예배는 용서와 화해가 선포되고 확인되는 축제의 잔치가 되며, 이 예배를 예배 참여자들이 사랑과 평화의 충전을 받고, 아픈 상처를 치유받고 세상으로 용기있게 나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경험되고 고백되는 감격스러운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는 예배가 다음과 같이 구성되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9

*초대와 나아 옴/경배/기원/찬미/감사 - 예배의 시작

*고백/회개/탄원/신앙의 확인 - 예배의 중심

*감사의 화답/봉헌/성찬/말씀선포/그리스도교적 삶에 대한 서원(결단) - 예배의 결론

 

4.1.2.설교가로서 목사

 

목사의 중요한 직능 중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설교입니다. 특히 개신교회는 말씀에 큰 무게를 두어 왔고 예배 구성 요소 중 지나치다 할만큼 설교의 비중을 강조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 구성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가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은 가장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우리의 일상 언어로 선포되어지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교가로서 목사는 예수의 복음을 오늘 우리 시대의 언어로 선포하는 것이며,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성서에 기록된 복음에 비추어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선포합니다. 따라서 설교가는 우리 시대를 가장 깊고 넓게 알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4.1.3.행정가로서 목사

 

공동체가 함께 예배하고 봉사하며 선교하는 일에는 계획하고 준비하며 관리하는 조직적이고 기능적인 일이 과학적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할 때 신학적으로 검토하며 교회의 활동이 더욱 교회다워지도록 하며 평신도를 준비시키고 훈련시키는 구체적 활동 내용을 우리는 교회행정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이 일을 통하여 자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고무시키고 자질을 함양시켜 훌륭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가도록 도와주며 격려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지도력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회행정의 모든 절차는 민주적 방식을 취할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공동체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를 열어 주는 책임이 있으며 평신도는 자율성과 책임성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목회행정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육하고 지도하며 감독할 책임과 의무가 목회자에게 있습니다. 교회행정은 교인들의 기도생활과 신앙생활, 교육과 훈련을 과학적이고 효율적이며 건전하도록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1.4.심방 상담가로서 목사

 

목사와 교인과의 관계가 공적이고 행정적인 측면에만 제한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듯이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도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함을 두 말 할 필요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목회에서 교인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찾아가서 방문하며 돌아보는 목자로서의 방법입니다. 또하나는 교인이 스스로 목회자를 찾아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상담입니다.

한국 교회의 심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 입장에서 가정을 돌아보는 일과 교인 입장에서 볼 때 목사가 축복을 갖고 방문한다는 다분히 무속적이고 미신적인 믿음입니다. 물론 전혀 잘못된 입장은 아닙니다. 목사에게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이 교회 오래된 전통 속에 보장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목사가 가정을 방문하고 그 가정을 돌보고 축복하는 일은 목회의 중요한 직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와 같이 축복을 하고 돌아보는 심방은 그 중요성에서 과거와 같은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지금은 직접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며 목사와 만나 상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배 형식, 기도회 형식으로 찾을 수 없는 해답을 목회자의 깊이 있는 상담을 통해 찾으려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경제적 여유가 많아지면서 나타나는 자율성과 개인적 행복추구권이 두드러지면서 이전과는 달리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개인적 문제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목회자나 교인 모두가 상담하고 대화하는 방식의 심방, 상담목회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목사는 심방과 상담을 통하여 인격적이며 구체적인 관계를 맺을 것이며 교인 역시 인격적 교감이 신앙과 삶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이 것은 목회에서 목사가 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4.1.5.교육자로서 목사

 

안수 받은 목사가 교회로부터 위임받은 중요한 직무 중의 하나가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입니다. 이 일은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평신도를 교육하고 훈련하여 세상 한가운데 일하는 사역자로 준비시키는 일은 교회로부터 안수받은 목회자의 직무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할 뿐더러 교육적 방법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훈련하는 교회 분위기를 만드는데 결정적이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됩니다. 목사는 교회를 교육하는 교회로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4.2.평신도와 목회

우리 모두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어느 누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을 믿습니다. 성직자나 평신도는 다같이 하나님과 동일한 거리에 있습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목회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본래부터 평신도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오랫동안 평신도의 역할을 과소 평가해 온 것을 반성하며 우리 교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평신도의 교육 훈련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됨을 인식합니다. 이 것은 곧 교회의 긍정적 미래가 평신도의 질적 성장에 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바대로 안수받은 목사 역시 교회를 인도하고 방향을 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함을 믿습니다. 모든 평신도와 함께 같이 부름을 받았지만 안수 받은 목사는 교회를 교육하고 훈련하며 지도하는 직분을 받은 특별한 소명(召命)을 인정합니다.

안수받은 목사는 평신도에 의하여 고무되고 그 권위가 인정이 됩니다. 평신도는 파송받은 안수 목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파송된 것임을 신앙으로 믿습니다. 평신도는 안수 받은 목사를 통하여 신앙과 생활 전반에 걸쳐 지도를 받으며 상담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삶을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신도와 성직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협력하고 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동역자임을 믿습니다.

5.결론

 

성서는 끝임 없이 새로움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창조, 출애굽, 노아의 방주, 해방, 희년, 거듭남, 중생,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 등과 같이 역동적인 생명이 넘치는 이 단어들은 새 시대를 열어 내는 희망찬 메시지가 성서의 일관된 내용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한국 교회는 능동적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지 못합니다. 유대 공동체가 하나님 신앙을 교조적인 율법주의에 함몰되어 화석처럼 굳어졌을 때 예수께서 오시어 생명력 있는 하늘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진리를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교도들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럽 중세 기독교는 또다시 유대 공동체의 죄악을 재현하고 말았습니다. 교리와 제도, 교권만 남은 채 아무런 생명이 없었던 기독교는 16세기 초에 또다시 종교혁명을 통하여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회가 바로 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는 또다시 유대 공동체나 중세 기독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자기혁신, 끝없는 자기 반성 없이 교회는 타락하고 만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들려주는 주님의 한결같은 음성은 역동적인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성된 공동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채로 머무르고만 있는 공동체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그날까지 완성을 향해 끝없이 거듭나며 진보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믿습니다. 역사는 발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끝없이 자기 부정을 통해 발전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이 발전의 대열 맨 앞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가 아닌 한국 교회 전체의 희망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미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앞서 가시며 우리를 새 세계로 부르십니다. 교회는 이 부름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며, 달리기 선수처럼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이며 세상에 희망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우리 가운데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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