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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대적하는 4가지 죄 마12:31~32

by 【고동엽】 2022. 2. 22.

◈성령에 대적하는 4가지 죄 마12:31~32 출처보기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 영적인 존재인 사람이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영적인 삶을 살려는 일반적인 특성이자 삶의 태도를..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미래학자들은 대체로 21세기가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을 지나 장차 ‘제4의 물결’과 ‘제5의 물결’이 밀려들 것을 말하면서,

특히 ‘제5의 물결’은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예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의 관심사가 더욱 영적인 것에 집중될 것이고,

영적인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조짐이 도처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민소득 2~3만 불의 사회에서는 삶의 질을 말하고 레저를 말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보다 깊은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토마스 머튼과 같은 영성가와

달라이 라마나 탁닛한 같은 동양종교의 신비가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조만간 이런 현상들이 깊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영성시대의 도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또한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점은 사람들이 그동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영적인 것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점은 이방 종교의 영성과 사이비 이단의 영성이

활개를 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도래하는 이 영성시대를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영성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영성의 길로 접어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영성으로 이끌어주어야 하고,

저들을 보다 깊이 있는 영성으로 인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성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성령과 관계있는 영성입니다.

영성이 영적인 삶이라 한다면, 그 뒤에는 영적 존재들과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요일4:1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말씀했습니다. 영들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영이면

그 영성은 올바른 영성입니다.

그러나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는 영이면, 그 영성은 잘못된 영성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영이란 한 마디로 성령을 말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m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신자라면,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신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영성은 올바른 영성입니다.

 

그러나 성령과 무관한 영성이라면, 그 영성은 문제가 있는 영성입니다.

올바른 영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깊이 있는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성령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영성이, 깊이 있는 영성입니다.

 

부부관계에 금슬이 좋은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부부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평안치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은, 그 영성이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의 관계가 좋지 못한 사람은, 그 영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과의 좋지 못한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이런 상황 가운데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성령을 훼방(=모독)하는 죄

 

마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서 성령을 ‘훼방한다’는 말은, *헬라어 블라스훼미아

‘하나님을 모독한다, 하나님을 조롱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 신성모독이라는 뜻의 blaspheme라는 말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훼방한다”는 말은, “성령을 모독한다”는 뜻입니다.

 

막3:28에도 ‘훼방한다’한 뜻으로 쓰였는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눅12:10에는 ‘모독한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그러면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본문 마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셔서

그가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고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변에 둘러서 있던 바리새인들이 극구 사탄의 힘으로 고쳤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로 폄하하고 조롱하여 결국 성령을 모독한 죄를 말합니다.

 

1970년대 중반에 예수전도단의 화요모임이 기독청년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이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모임 순서 중에 회중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방언으로 찬송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너무도 낯설고 처음 본 광경이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로 돌아와서 지도자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저들이 내린 결론이 “사이비 이단 집단이니 청년들을 보내지 말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임이 우리나라 찬양과 경배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기독청년들의 성령운동의 본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분들은, 성령의 역사를, 사이비 이단의 역사로

다시 말하면 악령들의 역사로 폄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성령께서 공들여 행하신 일을 성령께서 하셨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몰고 간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물론 잘 몰라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고,

기독교 역사상 꾸준히 있어왔던 성령의 역사를 부정한다든지

잘못된 것으로 치부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가 경험하지 못한 영적 사건이 일어나면 문제시하는 태도는

자칫 성령을 모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성령께서 하신 일을 성령께서 하셨다고 인정해 드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자꾸 우연으로 돌린다든지 모른 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또 다시 같은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2. 성령을 거스리는 죄

 

행7:51을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

 

초대교회 시절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이를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바로 이런 상황을 성령을 거스린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헬, 안티핍토

“반대하다”, “거역하다”, “저항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순종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전입니다. 집회 후에 한 청년이 상담을 청해왔습니다.

원래 자기는 모태신앙이고 교회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면서

교회생활을 철저하게 했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한 여학생을 가슴 깊이 짝사랑하게 됐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에 느닷없이 이 여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답니다.

“오늘 야외로 놀러가려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순간적으로 너무 바라던 일이어서 가겠다고 하고 약속을 했답니다.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오늘은 주일이야! 가면 안 돼.” 바로 성령의 음성이죠.

 

이 음성을 듣고 괴로워하면서도 야유회를 다녀왔답니다.

돌아와서 너무 괴로워서 울면서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달쯤 지나서 그 여학생이

주말마다 하는 학원에 함께 다니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자고 동의를 했답니다.

 

또 마음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취소해라”

그러나 이 청년은 애써서 외면했답니다.

그런 음성이 들릴 때면 다른 생각을 하거나 음악을 들으려했답니다.

 

주일에 교회가지 않고, 학원으로 야외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계속 그 음성 때문에 시달렸는데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면서

점점 그 음성이 희미해지더니.. 언젠부터인가는 아예 그 음성조차 들리지 않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때때로 우리 마음속에 어떤 음성을 들려주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큰 감동을 주시고, 때로는 큰 결단을 촉구하시고, 때로는 크게 책망하시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어려서 강아지를 키워본 일이 있습니다. 대단한 족보가 있는 개도 아니고,

그렇다고 훈련을 정식으로 받은 개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총명한 편이어서 몇 가지시키는 대로 잘 했습니다.

 

그래서 자랑삼아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앞에서 이 강아지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똥개라고 놀려댔습니다. 제가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이렇게 망신 당하실 수 있습니다.)

 

히10:29을 보면 성령을 욕되게 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거나 거역하면, 성령께서 모욕감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엔브리조, insult, 모욕을 주는 것

 

여러분! 우리가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음성을 들려주실 때 소중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3.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

 

엡4:30, “너희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성령을 근심케 해 드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성령을 근심케 해 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헬라어로 성령을 근심케 한다고 할 때 ‘루페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슬퍼하다”, “마음에 고통을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근심케 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때문에 슬퍼하시고 마음에 큰 고통을 느끼시는 것을 말합니다.

 

엡4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성령이 슬퍼하시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4:22~23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사람이 됐는데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엡4:30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음과 동시에 새사람으로 새롭게 빚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새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기를 기대하시고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기대를 저버리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슬퍼하십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크게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를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크게 슬퍼하십니다. 탄식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크게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을 과감하게 끊어버릴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완수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기대 이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성령께서 정말 크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성령을 슬프게 해 드려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도록 해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옛 사람의 모습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4. 성령을 소멸하는 죄

 

살전5:19에, 바울은 우리에게 준엄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여기서 소멸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베누미’인데, “불을 끄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의 역사를 불로 비유하곤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면, 마치 추운 방안에 따뜻한 난로를 피운 것과 같습니다.

 

마음도 따뜻해 질 뿐 아니라, 난로 위에서 음식도 만들 수 있고

난로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바울이 권면하시는 말씀은, 마치 방안에 난로가 계속해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같이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께서 뜨겁게 역사하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난로가 꺼지듯이 성령의 역사가 식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꺼지는 경우를 불이 꺼지는 경우와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연료가 떨어지면 불이 꺼집니다.

전기난로는 전기를 공급받아야 계속 불을 유지할 수 있고,

석유난로는 석유가 떨어지지 않아야 계속 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속해서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면

성령의 불이 꺼집니다.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를 쉬면 성령의 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던 사람이 말씀을 멀리하면 성령의 불이 꺼집니다.

봉사하던 사람이 봉사를 그만두면 성령의 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전도하던 사람이 전도를 쉬면 성령의 불이 꺼집니다.

 

다른 하나는 물을 끼얹을 때 불이 꺼집니다.

모닥불을 끌 때 찬물을 끼얹으면, 불이 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 죄악이 스며들면, 성령의 불은 꺼지고 맙니다.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고 거짓으로 고했을 때

베드로가 단호하게 대처한 것은

거짓이나 음란 같은 죄가 공동체 안에 스며들면

마치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성령의 불이 꺼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모닥불에 기름을 부어 그 불을 더욱 일으키듯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불이 더욱 강열하게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바로 성령의 불이 전보다 더욱 불타올라야 합니다.

 

▶마치는 말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여

전세계교회가 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날 다시금 확인해야 하는 것은, 교회는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우리 교회 안에 임하신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다운 성도가 되려면

우리 심령 속에 내주하고 계신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드린 성령과 관련된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우선 성령이 모독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을 거스려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새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끝으로 성령을 소멸케 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불을 더욱 지펴야 합니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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