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요 13:12-17
(2021/12/31, 송구영신예배)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 선한 권능에 의지하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지나온 날 돌아보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매 순간 우리 앞에 당도하는 시간을 알차게 살고 싶었지만 허투루 흘려보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조심조심 걸어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것을 잃었고, 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충만함과 공허, 감사와 불평, 일치와 분열 사이를 오가며 살았습니다. 조금은 성숙해졌고 또 조금은 낡아졌습니다. 저는 인생의 과제가 있다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넘어선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이 시간, 여러분이 올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서 기자의 말에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전 7:29)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전 8:17)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안수지 성도가 부른 ‘선한 능력으로‘는 독일의 순교자인 본회퍼 목사의 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원래의 시는 7연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 두 번째 연은 세밑을 맞은 우리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묵은 해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고
괴로운 날들의 무거운 짐이 우리를 누르려 하니,
오오, 주님, 우리의 놀란 영혼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베푸소서.“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 서신-저항과 복종>,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391)
옥에 갇힌 본회퍼도 마음을 짓누르는 영혼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던가 봅니다. 그렇기에 ‘괴로운 날들의 무거운 짐‘으로 인해 놀란 영혼을 붙들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문득 자신이 홀로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믿음 안에서 연결된 가족들과 벗들을 떠올리는 순간, 하나님의 선한 권능이 자기를 감싸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철철 넘치는 고난의 잔을 주님의 손에서 떨지 않고 감사히 받아 마시겠다고 말합니다. 다가올 일이 무엇이든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에 담대하게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팬데믹으로 인해 친밀한 교제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주님 안에서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일들, 그 일들이 우리 내면에 일으킨 파문, 다양한 기억들을 모아 하나님께 바칠 시간입니다. 부끄러워하는 우리에게 좋으신 주님은 ‘괜찮다, 다 괜찮다‘, ‘애썼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상처와 부끄러움의 기억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해주시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우리 삶을 밀고 가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 우분투가 있는 사람
이제 우리는 새날을 바라봅니다. 느보 산 비스가 봉우리에 올라 후손들이 살게 될 땅을 건너다보는 모세의 심정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선물처럼 다가오는 시간을 설렘과 두려움으로 마주봅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지친 이들이 많습니다. 그늘조차 없는 메마른 땅 위를 걷는 것 같은 고단함이 우리를 확고히 붙잡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우리 삶 속에 따뜻하게 맞이할 마음의 여백은 점점 줄어듭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경쟁의 마당에서 입은 상처자국이 많습니다. 차마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상처를 홀로 핥는 짐승들처럼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물 먹은 솜처럼 삶이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성공회 대주교 데즈몬드 투투는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무지개 세상의 꿈을 펼치던 분이었습니다. 무지개 세상이란 문화와 종교와 인종과 국경을 넘어 사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무지개 세상은 차이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열립니다. 저는 투투를 통해 아프리카 응구니족 언어인 우분투(Ubuntu)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누군가에게 ‘우분투가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관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자비롭다’는 뜻입니다. 또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분투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데즈먼드 투투, <용서없이 미래 없다>, 홍종락 옮김, 홍성사, 41쪽)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속이 좁고, 화를 잘 내고, 냉소적이고, 거친 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투투 대주교의 삶을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았던 더글러스 에이브럼즈는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wonderful’을 꼽습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을 경험하든 그 속에서 놀라움과 신비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기뻐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자질은 경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가 곧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 어루만짐
우리가 정말 기뻐할 수 있을까요? 기뻐해도 될까요?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에 속한 한 에피소드를 기억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 제자들과 음식을 드시던 주님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민망한 순간입니다. 남에게 자기 몸을 맡긴다는 것은 신뢰를 전제합니다. 돈을 내고 발 마사지를 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는 그 상황을 못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존경의 마음을 담아 스승의 발을 닦아드린다면 모르겠으나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준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며 완강하게 주님의 손길을 뿌리칩니다. 그러자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요 13:8b).
이 때의 씻음은 청결을 위한 것도 위생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발을 어루만지는 행위를 통해 주님은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가끔 손은 언어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던지기도 합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다가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가만히 손을 잡거나 그의 등을 토닥여주기도 합니다.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발 씻음이 오히려 제자들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메시지를 새기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마음의 상처와 나약함을 나는 안다. 네가 뭘 두려워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언론인이며 소설가인 고종석 선생은 어루만짐은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라고 말합니다(고종석, <어루만지다>, 마음산책, p.233) 옳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도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나병환자의 몸에는 손을 대심으로 고치셨습니다(마 8:3). 사람들이 모두 꺼림칙하게 여겨 스스로도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몸에 주님이 굳이 손을 대신 것은 ‘나는 그대를 더러운 오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대도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였을 겁니다. 그 접촉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 동고동락
주님이 우리 발을 닦아주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믿음을 통해 정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부끄러운 기억이나 슬픈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앞으로 나가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요 13:14). 씻음을 받은 자라야 남의 발을 씻어줄 수 있습니다. 발을 닦아줌은 감싸줌이고 북돋움입니다.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는 일입니다. 설 자리를 잃은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일이고, 기꺼이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는 일입니다. 신음하는 피조세계에 더 큰 아픔을 주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몸을 맡겨본 사람이라야 여러 모로 자기와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동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화해 사역에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물어 서로 소통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데즈몬드 투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wonderful’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이들 속에서 추한 것, 더러운 것을 찾아내 폭로함으로 망신을 주려 하지 말고, 그들 속에 감춰진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고 호명해야 합니다. 주님은 갈릴리 어부 시몬 속에서 ‘반석’과도 같은 것을 보셨고, 그에게 ‘게바’ 곧 ‘바위’라는 별칭을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창문 밖에서 ‘ooo야, 노올자!‘ 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면 지체없이 달려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이웃은 우리가 호명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옵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지친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 곁에 다가갈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만이라도 사랑으로 맞아들여 발을 닦아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사는 이들에게 우리 사랑이 전해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앞에 나타난 낯선 나그네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면서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 18:5)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을 그렇게 따뜻하게 맞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가끔 우리도 지치고 낙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마다 우리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 아가이고를 고린도교회에 소개하면서 “이 사람들은 나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고전 16:18)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슴 벅차게 경험한 사람은 이제 주님의 수고에 동참해야 합니다. 같이 고생하고 같이 즐긴다는 뜻의 동고동락同苦同樂은 교회의 교회됨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표현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맛본 이들은 이제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려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 거룩한 사랑의 수고를 통해 우리는 더욱 확고하게 주님과 결합될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 다가오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장 어려운 시간에 손을 잡아줄 동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한 해가 기쁨과 감사의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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