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牧師)가 강론할 때 마음 조아리며 듣는 고통
교회는 말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교인들은 목회자 한 사람만 대하면 그 뿐이지만 목사는 수 백명을 상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하게 해 줄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교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신령한 면을 요구하며 강론도 잘 해주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목사도 능력은 모든 면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못하고 실망을 주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볼 때는 할 말이 없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요구는 목회자에게 무리한 요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교인들이 보는 면이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목회자 하나를 놓고 평가하는 것이 가지각색인데 마치 맹인(盲人)이 코끼리 더듬는 것과 같은 형식인데 예를 든다면 목사가 큰 소리로 강론(講論)하면 혈기 낸다고 말하고 작은 소리로 강론하면 잠재운다고 말하며 빨리 걸으면 방정스럽다고 말하고 천천히 걸으면 느리다고 말하고 연구해서 말하면 아는 척 한다고 말하며 대충 전하면 무식하다고 말하니 정말 목회자의 가는 길은 험하고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와 같은 말은 누가 제일로 먼저 듣는고 하니 사모가 먼저 듣는데 사모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만나는 사람들이 목사에 대한 불평을 직접 목사에게는 못해도 사모에게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것도 말을 할 때는 자기들이 직접 하는 말이 아니고 누구에게 들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사모로서는 자기의 가족의 일이고 목사의 일이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특히 설교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 시간만 되면 사모는 피를 말리는 한 시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설교가 길다느니 짧다느니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데 성도들을 친다는 말을 들을 때는 정말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남편인 목사에 그와 같은 말을 비슷하게 하면 알아차리고 시정을 하면 좋은데 남편은 남편대로 성경에 입각하여 하기 때문에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것으로 아내인 사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아니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데 아무리 아내이지만 들을 말은 듣고 시정하면 좋으련만 도대체 어찌 된 셈인지 목사님은 사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그 말을 하면 더 강하게 감정적으로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사모가 생각하기는 목사님보다도 비평하는 말은 훨씬 빨리 들을 수 있는데 목사님은 사모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아니하는데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강단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밑에서 기도하는 사모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목사님이 오늘은 어떤 말씀을 어떻게 전하여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칠지 아니면 강론이 끝나자 마자 교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여 문제가 발생할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사모가 그렇게도 믿음이 없어 오늘도 성령께서 역사 하시어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와 같이 쏟아질 질 줄로 믿지 못하고 항상 부정적으로 잘못되는 방향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책망할 줄로 알지만 그러나 실제로 밑에서 아내로서 남편의 강론이 끝나기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물론 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으면 별개의 문제이지만 교회가 조용하지 못하고 목회자와 성도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는 서로 미움이 앞서 있기 때문에 약점이나 흠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더욱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서 저자는 기록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하였다(벧전4:8). 그렇다 사랑만 있으면 목회자가 약간의 말에 실수가 있어도 문제삼지 아니하고 넘어가지만 목사가 미움을 받고 있는 상태라면 교인들은 티끌만 한 흠도 덮어놓고 그냥 지나가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것을 문제로 삼아 물고 늘어지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한 교회일수록 목사는 설교하기가 어렵고 두려우며 사모는 더욱 마음의 고통을 하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지만 목사인 남편은 배짱인지 믿음인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자극적인 성경만 골라서 소위(所謂) 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하게 전하니 그 부작용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교회가 은혜로울 때는 어떤 말씀을 전해도 성도들이 아멘 하고 말씀을 받지만 교회가 시험에 들었을 때는 아무리 옳은 말씀이라고 해도 귀에 거슬려 짜증이 나고 감정이 상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목사님은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여 시험에 들면은 그 사건과는 전무한 쪽으로 말씀을 선택하여 전하기 때문에 교회 시험이 쉽게 물러가기도 하는데 극대극으로 치달으면 해결보다는 악화되어 더욱 고통스러울 때가 많은 것을 체험하여 알고 있기에 사모는 남편에게 좋은 것이 좋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주문해도 고집이 센 남편은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으로 극대극으로 치닫고 있으니 문제가 제대로 수습되지 아니하고 더욱 악화만 되어 조언하며 지켜만 보는 아내인 사모로서는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목사님만 말씀을 전하는데 힘든다고 생각하지 강단 밑에서 신경 쓰면서 듣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여 말씀 준비에 기도를 많이 하여 은혜로운 말씀만 전해주면 사단의 역사도 물러가는 것을 알고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줄로 믿음을 가지고 목회 하실 때 사모가 편안할 줄로 안다.
목사들이 범하기 쉬운 것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급함 때문에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목회생활은 때로는 보아도 못 본척하는 여유도 있어야 하고 들어도 못들은 척하는 너그러움도 있어야 하며 알고 속아주고 모르고도 속아주는 인격적으로 수양이 되어야 하지 보면 보는 대로 말하고 들으면 듣는 대로 말하는 것은 문제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인데 세례요한처럼 흠이 없고 자신이 깨끗하게 살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힘이 있어 설득력도 있고 먹혀 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하고 우리들의 생활에 약점이 많이 노출 된 상태에서 예수 그리도 같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강력하게 전한다면 말씀을 받는 편에서는 거부감을 나타내어 문제를 삼는데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조한다고 거부감만 더 나타낼 뿐이다.
생활과 말씀이 일치되게 강론하면 모든 교인들이 굴복하고 그 동안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일도 있지만 행동은 보이지 않고 말로만 고함치면 반항하는 것이 교인들의 생리인 것이다.
세례요한과 같이 훌륭한 분도 직선적으로 전하다가 결국 옥에 갇히고 그 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지만 나단 선지자 같이 예(例)를 들어서 전하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간음죄를 책망하고 그 죄를 고백하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이 다윗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 같이 빙빙 돌리면서 전할 때에 다윗까지도 그와 같은 일은 참을 수 없겠다는 의분을 나타내도록 하여 다윗이 그를 당장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할 때 선지자는 말하기를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일격에 치명타를 입혀 다윗이 회개하며 엎드려지게 만드는 것을 생각하고 목회자들도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수양되지 못한 많은 목사들이 직선적으로 전하다보니 그만 문제가 발생하여 피차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효과적인 면에서는 직선적으로 전한 세례요한은 담대하게 전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헤롯을 회개시키는데 까지는 미치지 못하였고 나단 선지자는 간접적으로 문제를 제시하였지만 효과적인 면에서는 다윗을 회개시켜 성군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 평화에 큰 역할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은혜 받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느 설교학자는 말하기를 "설교는 찬양대 지휘자의 지휘봉과 같아서 많은 대원들이 지휘봉이 움직이는 대로 찬양의 방향이 좌우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은 목회자가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교회 분위기가 좌우된다는 말이다.
목회자의 설교 속에는 행정도 있을 수 있고 정치도 있을 수 있으며 건전한 책망도 있을 수 있고 회개의 역사도 있을 수 있는데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하였다(행2:37-3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했는데 '찔려'(카테뉘게산)라는 동사는 '때리다' 혹은 '격하게 찔러 관통하다','실신시키다'의 뜻을 담고 있고 따라서 이 말은 격심한 마음의 염려와 양심의 가책이 엉켜진 매우 심각한 고통을 의미한다.
호머(Homer)는 '발굽으로 땅을 옴푹 패게 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내면적 의미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아무튼 무리들이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이성적인 죄책감(罪責感)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Alexander).
이처럼 제자들 속에 역사 하신 성령은 예수의 예언대로(요16:8-11)그들의 죄를 책망하는 일을 행하신 것이라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하고 나서 저희의 유일한 소망이며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메시야를 스스로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을 깨닫고 몸서리치도록 놀라며 '마음에 찔린' 것이다.
우리가 어이할꼬 하는 이 물음은 필사적(必死的인 부르짖음이었다(행16:30). 바울도 회개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행22:10).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면서 사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제 성령의 지시를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회개할 마음이 생기고 그 동안에 지은 죄를 모두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왔는데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기억하고 감정으로 회개시키려는 억지를 부리지 말고 주의 말씀의 능력의 역사만 기다리고 온유한 말로 전할 때에 주께서 역사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바울사도는 기록하기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하였다(딤후2:23-26).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하였는데 '거역하는 자'는 잘못된 교리에 빠져 '주의 종'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반대하는 이단자들(Bernard, Guthrie)이나 신앙이 미숙한 자(Ellicott)를 가리킨다. 교사들은 이렇게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한다. '징계할지니'는 심판이나 정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하는 자들이 진리의 길에 들어서도록 권면하고 지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하였는데 본 절은 교사들이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로 징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회개함'의 헬라어 '메타노이안'은 후회나 뉘우친다는 개념 이상의 것으로 사상이나 인격의 근본적(根本的)인 전환을 의미한다. 교사들이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교훈을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감정적으로 성경을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지만 듣는 성도들이 동문서답(東問西答)식으로 들어 말하는 이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오해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 정말 교회 안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듣는 귀도 여러 층으로 분류하고 준비하고 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의 보는 눈도 한결 같지 아니하고 듣는 귀도 마찬가지라 눈이 복이 있는 사람은 사물을 제대로 보고 판단하지만 눈이 좋지 아니한 사람들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엉뚱한 방향으로 판단을 하고 있으며 귀도 마찬가지인데 귀가 복이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올바로 듣지만 귀가 복이 없는 사람은 반대로 들어 화를 자초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인물인 조조는 도망 다니다가 자기의 친척집에 잠시 머무는데 그 집의 하인들이 부엌에서 칼을 갈면서 어떻게 잡을까 하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저놈들이 나를 잡아 죽이려나보다 하고 부엌으로 나가서 그들의 목을 베고 뒤꼍으로 나가보니 돼지 한 마리가 묶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친척집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고 하인들을 시켜 돼지를 잡으려고 묶어놓고 신바람 나게 칼을 갈면서 이 돼지를 어떻게 잡을까 하고 말한 것을 잘못 듣고 오해한 조조 때문에 생명을 잃었고 말을 잘못 듣고 속단하여 하인들을 죽인 조조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운 것을 기억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어 말하고 그 말의 뜻을 새겨들어야 큰 사건을 예방할 것이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인데 말하는 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들려져서 시험에 들어 곤욕을 치르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아니하면 뜻하지 아니하는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모는 그와 같은 사고가 날까싶어 항상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마음 태우는 아내들을 생각하고 목회자인 남편들이 알아서 그와 같은 고통은 덜어주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사인 남편이 아내인 사모에게 다른 것으로 즉 좋은 선물이나 어떤 무엇으로 편안하게 해주려고 하지 말고 말씀을 착실하게 충분히 준비하여 말씀을 들을 때에 불안한 마음을 버리고 편히 들으며 은혜를 받도록 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심적 고통(心的苦痛)을 덜어준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전하는 목사님은 당장에 그 반응을 알지 못하지만 뒤에서 듣고 있는 아내인 사모는 그 즉시로 반응을 듣고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교인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한마디씩 분이 담긴 목소리로 불평하는 것을 곧바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교인들을 바라보기가 민망하고 인사하기도 힘들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안절부절 하다가 사택으로 들어가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정말 남편인 목회자들이 이와 같은 아내들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어 남편이 사택으로 들어오면 있었던 일 즉 오늘의 설교에 대하여 평가가 아닌 평가를 하고 교인들의 반응을 귀뜸 해주면 다소곳이 받아드리며 알았어 하고 시인하면 좋으련만 속담에 "방귀 뀌고 성낸다"는 식으로 화를 벌컥 내며 "당신이 목회해라"할 때는 이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라 정말 괴롭다 못하여 서글퍼지는 고통을 참는 괴로움은 누구에게 말하랴 아무도 그 고통을 아는 이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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