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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목회자(가나다순)

영성개발과 복음적 설교

by 【고동엽】 2022. 2. 16.

영성개발과 복음적 설교

 

김 기 홍 목사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목회자치고 영적 목회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신앙생활이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이 아니던가. 목회의 어려움이 일어날 때나 아무 어려움이 없어서 어려울 때나 항상 영적인 해결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설교는 물론이고 기도도 찬송도 목회의 모든 분야 아니 삶 전체를 영적으로 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없어 여기저기 가서 배우려고 한다. 기도원에 가 금식하며 매달리거나 은사자에게 안수 받으려한다.

 

그러다가 이상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때때로 다른 교회 교인들이 상담을 해 온다. 자기네 목사님이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기 곤란한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교인들이 볼 때에 그렇다면 아무리 영적이라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요즘 각종 영성집회에 갔다온 결과이다. 무당으로 있다가 개종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신자들이 무당의 신을 접하여 예언과 투시하고 치병하는 것을 자주 본다고 한다.

 

우선 몇 가지의 오류를 살펴본 뒤 복음적 영성을 말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개신교 신앙은 무조건 말씀에서 시작한다. 말씀을 벗어나면 근본이 틀린다. 하지만 그 말씀을 교리나 도덕 수준으로 받아들여 외우고 가르치면 죽은 글이 된다. 문자는 죽인다는 어거스틴의 말씀 대로이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을 만나 호흡하고 교제할 때 복음적인 영성은 시작된다.

 

 

 

1. 비성서적 영성운동을 피하라

 

주위에서 많이 만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이다. 말씀을 떠난 신비주의거나 말씀을 율법적으로 이해하고 외우는 수준이다. 둘 다 영성에 큰 손해를 준다. 그러나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많이 빠져든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좀 더 발전한 것이 신비주의 입장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경우와 카톨릭 영성이다. 조금 수준이 있는 신자들이 여기에 빠져들어 있다.

 

말씀을 떠난 신비주의를 보자. 어떤 원리 없이 무턱대고 그냥 기도하면서 어떤 신비한 현상이 임하기를 사모한다. 오래 기도하고 금식하거나 찬송을 반복해서 부르고 춤추고 기분 나는 대로 웃어댄다. 개 짖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기본적인 접근 방법은 종교일반이나 중세 수도사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는 무당이 하는 것과 같다. 아무렇게나 해도 은혜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무당이 하는 식으로 하는 게 가장 쉽게 신비한 경험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신비 체험은 사람의 본성을 망가뜨리고 만다.

 

그렇게 해서 신비를 체험하고 영적인 존재를 만난다고 하자. 그후에 예언도 하고 병도 고친다고 하자. 심지어는 필요한 자금도 어디서인가 나오고 문제도 해결된다고 하자. 이러한 경험을 과연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당도 그러한 일을 하고 무당을 따르는 사람들도 신비한 경험을 한다. 사실상 어찌 보면 영 분별과 예언은 무당이 더 잘한다고 볼 수 있다. 무당은 첫 눈에 보고 말할 수 있다. 신비한 체험이면 다 되는가?

 

산기도 갔다와서 정신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병도 고치지만 점점 이상해지는 사람도 심심찮게 있다. 가정제단을 쌓는다고 하면서 실제는 예수 이름을 빌어 점쳐주는 사람도 주위에 많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유익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신비한 은사를 받았어도 세속화하는 것이다.

 

능력 행한다거나 은사자라 하면 그 앞에서 깜박 죽는 것이 우리 나라의 신자이다. 왜 말씀 안에서 확신과 자신을 갖지 못하는가. 능력이 많고 놀라운 일을 행한다고 해도 주의 사람은 주의 영광을 높여드린다. 자기가 존경받으려고 한다면 바른 길을 가지 못한다. 설교자가 자기 자랑으로 일관하는 이들이 있다. 설교를 듣고 설교자가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실패이다. 세례요한처럼 자기는 빠지고 예수만 드러나야 한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도 이런 면에서 조심해야 한다. 그것으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며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면 주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지만 길흉이나 말해주고 잘먹고 잘사는 이야기만 해준다면 복 받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예언의 은사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명하셨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말씀한 뒤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말하신다. 방언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라 한다. 예언도 질서 있게 하고 듣는 자들이 그것을 분변 하라 한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고 하시고 선언한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40)

 

카톨릭 식의 영성도 문제가 있다. 요즘 미국 개신교에서 카톨릭의 영성에 접근하는 이들이 많다. 카톨릭 영성은 중세의 수도사들의 전통에서 나온다.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명상하기보다는 기도와 묵상과 고행에 집중한다. 기도하는 방법도 일단 말없이 한동안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는 묵상과 고행과 기도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름대로 영적인 체험을 얻어 깊은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다. 개신교도 중에 아예 수도사로 자처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경건이 얼마나 기독교적이냐는 것이다. 신비하기만 하면 되는가? 병 잘 고치고 예언하면 다 되는가? 이러한 것이 다른 종교의 신비체험과 무엇이 다른가. 불교나 힌두교의 성자와 그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심지어는 무당이 더 깊은 신비 차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리스도의 힘으로 성화 되어 가는가? 중생이나 성화처럼 영성도 그리스도의 힘으로 되어져야 한다.

 

문제는 진리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기도만 하면 되는가? 성경이 그렇게 말하던가? 오래 기도하느라 기도가 노동처럼 느껴진다면 기독교의 방법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호흡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쉬지 말고 하라는 말씀이 맞는다. 호흡을 쉬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한 호흡하고 대화하는 게 힘든가? 기도를 노동이라고 말한다면 의미가 다르다. 오래 기도한다고 말할 때는 나의 공로를 전제하고 있다. 복음의 원리가 아니다.

 

쉬지 않고 할 때는 공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호흡처럼 쉽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는 것과 같다. 모든 힘은 줄기로부터 온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모든 힘은 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 얼마든지 쉬지 않고 할 수 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일하고 쉬고 잠자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결혼이 신비한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늘 상 보고 느끼는 율법적인 영성이 있다. 사실상 이것은 영성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도덕적인 삶일 뿐이다. 유대인들이 한 것과 모양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영적인 풍성함과 여유는 없다. 분명히 도덕적으로 산다.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겸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삶이 영적인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자기의 노력으로 된다. 이것이 율법적 삶이다.

 

수십 년을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한다. 하지만 한다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지 그냥 그렇게 시간만 보낸다. 마치 수도사가 그냥 수도하는 것과 같다. 자신도 그러한 시간이 별로 열매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회의가 일어나지만 다른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니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소위 "묵은 닭"들이 많이 있다. 이런 목회자나 신자는 영성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참된 영성은 복음의 말씀에서 나온다

 

개신교의 영성은 철저하게 성경말씀에서 시작한다. 본래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은 형식적으로는 말씀이요 내용적으로는 믿음이란 원리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언제나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점이 옆으로 흐르지 않고 바르게 서게 한다. 얼마나 많은 예언자들과 신비한 사람들이 나타났던가. 그래서 수많은 추종자들을 불러 일으켰던가. 그러나 때가 되면 다 사라졌다. 하지만 정통 라인에 서 있는 위대한 종들은 다 말씀에 집중했다.

 

성경은 말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물론 자연을 통해서 일반계시로 자신을 보여주신다. 또한 감각기관을 통해서도 갈 길을 인도하시기도 한다. 하지만 구원의 진리와 하늘의 축복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서 주신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와 교통하시고 보여주신다.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만난다. 말씀은 하나님과 만나는 길이다.

 

그뿐인가. 우리는 말씀으로 다시 창조된다. 우리가 어떻게 중생하였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말씀을 통해서다. 야고보서 1:18, "그가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말씀은 영생을 준다. 말씀이 없었더라면 구원도 대속도 새 창조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18,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마음은 말씀으로 새로워진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골로새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마음은 말씀을 공부하고 그대로 행동함으로 새로워진다.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한다. 골로새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그것은 단지 말씀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다.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이 우리 존재의 핵심부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 속에 사는 것이다. 에베소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그리스도와 말씀은 하나이다.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개인적으로 우리 속에 거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말씀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지배해야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가 되신다. 말씀 따로 세상의 경험 따로 라면 영적인 삶이 살아지지 않는다. 그 말씀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면 저절로 영적인 삶이 펼쳐진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

 

개혁자들은 언제나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말씀 없이 영만 역사한다면 성령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우리와 교제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그 말씀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이 역사 하실 때는 말씀을 수반한다. 성령은 말씀을 알게 도우시는 분이고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만 그 의미가 깨달아진다. 또한 성령의 은사도 말씀을 통해서 오고 말씀은 은사를 받고 누리게 만들어준다. 말씀과 성령은 한 가지로 일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의 말씀으로 명령하신다. 이 말씀이 개개인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세워주고 아버지가 가진 사랑의 성품을 심어준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말씀이 우리 영의 본성을 지배하고 만족시킴으로 자신을 우리 속에 세워주고 자신을 우리의 한 부분이 되게 해 주신다. 말씀에 관한 철학이나 이론을 통해서는 사람이 영적으로 서지 못한다. 말씀 안에서 살아있음과 우리 속에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서만 영적으로 된다.

 

우리는 말씀으로 고침을 받는다. 시편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험에서 건지시는도다." 우리를 고치는 것이 말씀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깨닫고 있는가? 우리는 말씀에서 신앙을 말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사야 53:4이 우리 영의 실체가 될 때 우리의 육신에 그대로 작용할 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병)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는 말씀으로 능력을 행한다. 마가복음 16:17, "내 이름으로 너희가 귀신을 쫓을 것이요." 말씀이 우리에게 그 이름의 가치를 알게 해준다. 이름의 권세와 그 이름을 사용할 우리의 법적인 권리이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말씀이 우리를 고치는 것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 골수를 쪼개고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 된다고 하시지 않는가.

 

개신교신앙의 내용적 원리인 믿음은 말씀을 통해 온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 어떻게 예수를 보겠는가? 예수와 말씀이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말씀을 보고 그대로 행동하면 예수를 즉각적으로 현재의 장면에 불러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롬 10:8)이라 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어 우리 속에서 살아 우리를 지배하고 움직일 때 그래서 말씀대로 움직일 때 믿음은 완전해 진다.

 

그러므로 영성은 말씀을 묵상해 내 것으로 만들고 그를 따라 사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14:23)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8) 믿고 손을 얹기까지 이 말씀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리라." 역시 행동하지 않으면 이 말씀도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 모든 약속을 다 가지고 성령이 우리 속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씀대로 행동함으로 예수는 신자들 속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 5:7)

 

 

 

3. 영성개발을 위해 복음을 설교하라

 

칼빈이나 루터 같은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일치시키고 있다.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하여 그로부터 오는 모든 은사를 누리게 한다. 말씀과 동떨어져 역사하는 영은 전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모든 복을 주시는 데 그와 상관없이 어떻게 성령이 따로 일하겠는가. 또한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으로부터 무슨 유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만 한다"(강요 1.9.2.).

 

바울은 삼층천에 이끌려 다녀 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후12: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는 것에 착념하라고 권고하였다(딤전4:13). . . .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 쳐주는 데 있는 것이다(강요1.9.1).

 

그렇다면 말씀만 전하면 되는 것이지 복음적 설교가 왜 필요한가? 말씀의 목적이 바로 복음을 듣고 믿고 받아들여 누리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만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인물만을 보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면 말씀공부는 실패한 것이다. 성령의 감동은 반드시 그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려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이요 그것을 통해 나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것이 복음적 설교이다.

 

비 복음적인 설교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전한다. 철학 에세이나 도덕의 수준으로 그친다.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설교를 통해서 예수는 빠지고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훌륭하게 살게 한다면 그것이 비 복음적 설교이다. 이것은 듣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 살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자는 항상 예수 하신 일을 자기 것으로 삼아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이 된다.

 

또한 얼마나 많은 설교가 설교자만 드러내는가! 설교 듣고 나서 "그 목사님 훌륭하다. 나는 못해도 저분은 훌륭하다. 저분은 진짜이다. 우리 목사님은 어림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이 설교는 악한 것이다. 설교자는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끌지 말고 예수에게로 보내야 한다. 자신은 감추어지고 예수만이 드러나야 한다. 이것은 겸손이라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야 듣는 사람들이 예수의 힘으로 살게 된다.

 

그러면 복음적 설교와 영성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를 통해서 오는 모든 은사는 복음적 깨달음을 통해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말씀이 성령의 능력을 전달해 준다. 그것이 복음적 설교이다. 선입관을 가지지 말고 평안한 가운데 복음 말씀을 받아 보라. 그러면 성령을 통해 그 말씀을 적용시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뜨거운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비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신비한 환상을 보고 기적을 베푼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찌 좋은 것이라고 받겠는가! 성령 수술을 하고 안찰을 하고 신비한 기적을 행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그것이 기독교적인 것인가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 이것은 신앙의 기본적인 문제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속한 지식은 반드시 해당되는 능력을 수반한다. 복음 안에서 성경공부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만약 어떤 신비한 은사가 성경과 다르고 복음에 위배된다면 단연코 거부하라. 꿩잡는 게 매라고 무조건 신기한 것을 따르다가는 반드시 넘어진다. 또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말씀은 반드시 신비한 능력을 제공한다.(고전4:20) 이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 위대한 부흥을 일으키고 많은 영혼을 구원한 종들은 모두 복음적 설교를 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신비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던 설교자들은 다 실패하고 말았다.

 

복음적 설교는 신자가 바른 신앙을 갖게 해준다. 그래서 어떤 이단이나 어떤 신비한 사람이 나타나도 쉽게 빠지지 않게 한다. 복음적 설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말씀의 능력 속에 살게 한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게 한다. 약한 마음이 강해지고 은사가 나타난다. 교우들이 복음적 설교에서 능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간증을 듣는 것은 목회를 보람되게 한다. 실제로 교회 전체가 은혜롭게 잘 자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4. 복음으로 사고해야 영적설교가 된다

 

기독교의 영성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능력은 반드시 말씀을 믿어야 일어난다. 복음적인 영성은 산이나 기도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행동 자체로는 하나의 그릇과 같다. 바른 신앙의 내용을 가지고 한다면 유익이 있다. 하지만 산기도를 가도 무당처럼 한다면 무당의 신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오래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 그러한 신비체험 그 자체가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다.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함으로 온다. 그 말씀이 내 의식과 일치한다면 성령은 너무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나를 통해 일하신다. 말씀을 명상하라. 그 말씀을 자신의 영혼에 자주 들려주라. 그 말씀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그 말씀의 내용대로 되리라. 구원의 말씀을 명상하라. 그러면 구원의 능력을 경험한다. 믿음으로 의로워짐을 명상하라. 그러면 의로워짐의 감격과 능력을 맛본다.

 

병고침도 이적도 기사도 다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선입관을 버리고 순수하게 말씀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은 믿음을 일으켜서 그 말씀대로 사고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전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15:5) 어떻게 그의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는가? 말씀으로 된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14:12) 그냥 그대로 말씀을 받으라. 믿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반복해서 명상하라. 반대되는 생각을 누르라.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적극적 사고와 어떻게 다른가? 그 동안 적극적 사고에 대한 가르침이 유행하였다. 그대로 효과를 본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그리고 목회에 성공한 이들은 어느 정도는 사고가 적극적인 점도 틀림이 없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이도 어느 정도 성공한 이들은 자신이 의식하건 말건 반드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적극적 사고는 부정적 사고보다 강하다. 아니 인간이 하는 사고 중에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할 것이다.

 

복음적으로 사고하는 이도 적극적으로 사고한다. 마치 예수 믿는 사람이나 불신자나 이교도나 선한 일 할 때는 다 비슷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 성령의 힘으로 선한 일하는 것과 자기 힘으로 선행하는 것이 외형적으로는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도 어느 정도 적극적 사고를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처럼 성령의 힘을 의지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선행할 수 있다. 적극적 사고와 복음적 사고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다 같아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순수한 적극적 사고는 인간적이다. 그 출발점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한계가 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적극적 사고에는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내용이 없다. 죄사함도 중생도 영생도 부활도 없다. 복음적 사고는 출발점이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이다. 땅이 아니요 하늘이다. 복음 말씀을 근거로 사고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 말씀과 다르게 사고하는가. 성경에서 말한 자신은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경험하는 자신만 믿고 거기에 의해 휘둘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려는 생명과 능력은 도무지 경험되지 않는다.

 

복음적 사고는 그러니까 다른 게 아니다. 성경에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사고하는 것이다. 성경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니까 그대로 믿는다. 내가 영생을 얻었고 새사람이요 귀신을 추방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를 받았다고 하니까 그대로 믿는다. 그대로 믿을 뿐 아니라 그 말씀대로 생각을 해야 한다. 성경이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거기서 나를 평하는 대로 그대로 받아 사고하는 것이 복음적 사고요 믿음이다.

 

설교자는 복음의 말씀으로 신자들을 훈련시켜야 하지만 그러기 전에 자신부터 철저히 훈련해야 한다. 자신이 복음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그로부터 힘을 얻지 못한다면 설교가 모두 허구가 되고 만다. 교인들보다도 더 삶의 문제에 짓눌려 있다면 무슨 말씀을 힘을 발할 수 있겠는가. 예수 믿어서 큰 유익을 보았고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이는 강한 힘을 발한다. 말씀 도중에 사람들의 영혼이 변화를 받는다.

 

그리스도처럼 생각하도록 훈련을 시키라. 그러면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그리스도의 모든 능력을 함께 나눌 것이다. 설교자 자신부터 복음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권능과 신비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성령의 역사를 원하면 말씀을 마음에 채우라. 그러면 그 말씀대로 성령은 일하신다. 그래서 귀신을 추방하고 병을 고치신다. 신비한 것을 말하게 하시고 능력 속에 목회하게 하신다.

 

난리 굿을 해야 병 고치고 방언 하는 게 아니다. 선입관을 버리고 편안히 말씀대로 하면 된다.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라. 그러면 각자의 은사대로 성령은 일하신다. 방언하고 싶은가?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요 권리이다. 기도하다 보면 입에 방언이 와있다. 말이 더듬어지면 아무 생각을 말고 그냥 나오는 대로 해 보라. 방언은 한국어가 아니다. 외국말도 아니다.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 병자가 오면 말씀대로 손을 얹으라. 두려워 말라. 쑥스러워 말라. 자연스럽게 주의 마음으로 말씀대로 행동하라.

 

부디 말씀 속에서 모든 것을 찾도록 노력하자. 다른 데서 찾으면 빠른 것 같아도 결국은 안 하니만 못하다. 말씀 안에 모든 보배가 다 들어있다. 말씀 안에서만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가 일하시고 성령이 인도하신다. 다른 데 현혹되어 소비하는 시간에 더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 정통 방법으로 해야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 다른 데서는 절대로 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깨달음이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을 준다.

 

운동은 하루 이틀 해서 그 효과를 보지 못한다. 40일 이상을 해야 체계가 잡힌다. 평생을 죄악에 빠져 사탄의 사고를 하던 사람이 하루 이틀 복음 말씀을 듣고 사고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만들어진 노예의 사고를 버리느라 40년을 광야에서 보냈다.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지기 위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율법대로 사고하는 훈련을 받았다. 복음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부터 철저히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5. 복음적이고 영적인 한 문장을 먼저 작성하라

 

설교를 작성하면서 많은 것을 체크해 보아야 한다. 그냥 내용적으로 좋으면 되는 게 아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사람을 휘어잡는 요소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헐리웃 영화감독은 자기가 만든 영화를 놓고 필요한 요소들이 다 들었는지 점검한다. 시작부터 휘어잡는가? 줄거리에서 주는 교훈이 분명한가? 감동이 있는가? 웃음과 사랑과 스릴이 있고 전환이 있는가? 절정이 있는가? 설교작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설교에도 이러한 내용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와 다른 무엇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들이 빠진다면 복음적이고 영적인 설교는 절대로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 설교자들이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내용이기도 하다. 세 가지의 질문을 반드시 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분명한 확신이 일어나야 한다. 혹시 다른 요소들은 좀 부족하더라도 이 세 질문의 대답은 명확해야 한다. 첫째 이 설교가 간단한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는가? 둘째 그 한 문장이 복음인가? 그리고 셋째 영적인가?

 

한 문장으로 쓰는 것은 논리 전달의 기본이다. 책이건 수필이건 검사나 변호사의 논거이건 다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어야 한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를 말하는 설교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다. 한 주제가 아니라 한 문장이다. 그 한 문장이 불조심의 표어처럼 확실하게 부각된다면 설교는 성공한 것이다. 설교하는 사람은 개개의 설교마다 분명한 목적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 목적을 이루려면 이 한 문장이 선명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그 문장의 범위가 너무 넓으면 안 된다. 다 아는 진부한 이야기도 안 된다. 삶의 현장에서 신앙을 북돋는 선명한 문장이어야 한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진리 중에 진리이다. 하지만 다 아는 소리이다. 수십 년 믿은 사람에게 이 논지는 너무 뻔한 말이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라. "예수가 주신 구원의 능력은 IMF를 극복한다." 이렇게 하면 현실감이 더 날 것이다. 청중들의 요구에 맞도록 현장감을 더해서 문장을 고쳐 보라.

 

다음으로 그 한 문장이 복음을 말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복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 주신 일을 말한다. 또한 그로 인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말한다. 세상은 나를 보고 약하다 늙었다 희망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또는 거짓된 희망을 갖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진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한다. 왕이요 제사장이요 능력자요 정복자 이상의 존재이다.

 

세상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사고하려고 한다. 그래서 비록 한계 속에 있지만 최선을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신자는 복음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늙은 아브라함이 자기 육체의 한계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늘의 별들을 품에 안았다. 실패자 모세가 전혀 새로운 삶을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허다한 선배들이 다 말씀을 듣고 현실을 극복하였다. 늘 복음적인 사고와 삶을 훈련했던 것이다. 복음적 설교는 이러한 삶을 훈련시켜준다.

 

마지막으로 설교를 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 설교 들으면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게 되어야 한다. 물론 시작은 청중의 필요에 적중해야 듣는다. 하지만 병 고치고 문제 해결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세상에서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데서 설교가 그치면 안 된다. IMF나 극복하고 끝나면 안 된다. 그러한 현세적 욕망을 영원한 데까지 이끌어야 한다. 부모는 하나님의 그림자이다. 병 낳고 문제 해결되는 것은 구원의 모형이다. 그래서 세상 것들을 통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을 설명하는 데로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이해로서 세상 것들을 바라보면 그들을 지배할 믿음과 능력을 얻는다. 그래서 새로운 힘을 가지고 교회를 떠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설교한다면 설교자 본인은 물론이고 교우들 전체가 차츰 영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문제도 잘 극복하고 세상적으로도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영적이다. 영적인 삶은 다른 게 아니다. 바울이 늘 강조했던 것처럼 그의 안에서 사는 삶이다. 찬송가 399장이 시대를 초월한 영성을 말해준다.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리 굳게 서리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리라."

 

 

 

 

하나님 음성 듣기

 

 

A. 하나님 음성 듣기의 세 요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었다. 하박국 2:1-2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지 말해준다. 이것을 하나님 음성듣기의 형태로 써보자.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마음으로 들어 그가 보는 여러 문제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첫째 그는 홀로 고요히 있을 조용한 장소로 갔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당신의 영이 주 앞에서 조용히 있을 수 있도록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택하라. 몇 개 예를 들어본다면 성경공부나 자연 속에서 걷기나 물가에 앉아있거나 방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거나 예배하거나 하는 것들이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기다리고 바라보았다. 히브리어 "사파"는 "계속 주시하다"는 의미이다. "자세히 바라보다, 깨어있다, 기대하고 바라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기다리다"는 뜻이다.

 

하박국 1:1은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은 환상으로 온다. 우리 마음의 눈을 하나님께 집중하면 내면적으로 고요하게 된다. 우리의 믿음과 기대의 단계를 올려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완전히 열게 만들어준다.

 

셋째로 하나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가 우선으로 할 일은 "묵시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하박국은 마음에서 느껴지는 것을 기록하였다.

 

고요함, 환상, 마음에 들리는 음성, 이 세 가지가 하박국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사용된 요소였다.

 

 

B. 하나님 음성을 듣기 위한 안전장치

 

1. 겸손

겸손하고 가르칠 수 있을만한 마음 자세를 만들라. 절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다이다"는 식의 자세는 버려야 한다. 모든 계시는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한다. 어떠한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데도 실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들려주신다고 믿어져도 배우는 과정의 한 부분임을 받아 들이라. 그리고 계속하라.

 

2. 성경이 절대적인 기준이다.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말씀과 복음과 다르게 들리는 음성을 분변할 수 있다.

 

3. 계시를 분변함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맡기실만한 분야에 특별한 계시를 주신다. 주부는 가정을 위한 계시를 받을 것이다. 남편은 가정을 이끌어가거나 자기 사업을 잘 할 수 있는 계시를 받는다. 셀의 인도자로서는 셀을 잘 인도하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가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와 함께 그 권위를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계시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권위와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계시를 구하라. 하나님이 내게 책임을 맡기지 않으신 분야에 대한 계시를 구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4. 책임

목사의 지도에 복종하라. 영적 상담자의 인도대로 따르라. 내적 인도를 받는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하라. 나의 영적 일기가 지도를 받고 확언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여겨져야 한다.

 

5. 영적성장

영적 일기가 자신을 더 나은 삶과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게 만드는 힘을 주는지 확인해 보라. 만약 영적 체험이 자신에게 파괴적이라면 잘못된 영을 접했으니 영적 상담자를 즉각 만나도록 하라.

 

 

C. 영적일기: 하나님의 음성을 분간하는 한 방법

 

영적일기는 기도의 노트를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느껴지는 것을 기록하는 일이다. 영적일기는 우리 마음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간하도록 돕는다. 150개의 시편이 그렇게 쓰여졌다. 예언서와 계시록도 그렇게 쓰여졌다. 분명히 성경적인 경험이다. 역대상 28:12-19에서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영적 일기의 예를 본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 많은 시간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그의 음성을 잘 분간하지 못한다. 우리 안에서 말하시는 그의 음성을 명확히 분간하는 것을 배운다면 성령 안에서 행하는데 훨씬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영적일기는 우리 생각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각을 골라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영적 일기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아이디어의 흐름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게 한다. 이성적이고 감각적인 의심에 방해되지 않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게 된다. 일단 주로부터 오는 생각으로 받아 믿음으로 기록하라. 그런 다음에 그 내용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영적 일기를 쓰기 전에는 늘 갈등이 많았다. 하나님께 물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내 마음에서 일어났다. 그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헤매는 동안 영적 통찰력의 흐름은 의심에 눌려버렸다. 결국 하나님의 흐름은 의심으로 방해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히 11:6)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나서 그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의심하다보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쓰게 되었다. 그러면 전체 내용을 우선 믿고 받을 수 있다. 나중에 그 내용을 시험해 볼 충분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 일기를 쓰고 있는 한 사람의 간증이다.

 

말씀은 헬라어로 두 가지 단어이다. 하나는 "레마"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말해진 말씀"의 의미이다. 다른 것은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이 단어들에 대해서 너무 자세히 구분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하고 계심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 일기를 쓰면 우리 마음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레마를 받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는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동안 옆으로 벗어나지 않게 된다. 하박국 2:2,3에서 본바와 같이 하박국은 받은 계시를 기록하라고 들었다. 그 말씀이 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이럴 때 일기를 기록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내게 해당되는 말씀을 정확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

 

"6년 동안 일기를 쓴 뒤에 얼마나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게 했는지 다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가장 도움되는 도구가 되었다." 손이 자동적으로 무엇을 쓰게 하는 사람들이 영서라고 말하는 그것은 마귀의 일이다. 영서를 쓰는 사람들은 영이 그들의 손에 내려 조종한다고 말한다. 영적 일기를 쓰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각들이 마음에 흘러 넘친다. 그 다음에 스스로 자기 손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1). 영적 일기를 위한 실제적인 제안들

 

1.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 일기를 쓰려면 피곤하거나 세상 일거리로 눌려있지 않은 좋은 시간을 선택해야 한다.

 

2. 아무 노트나 있으면 된다. 쓰지 않고 타이핑해도 좋다. 녹음기를 사용해도 좋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말하면 된다.

 

3.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고 필요하면 암호를 쓰라. 어떤 부분은 나만의 비밀로 있어야 한다. 문법이나 철자가 꼭 정확할 필요는 없다.

 

4. 모든 기록의 날짜를 쓰라.

 

5. 하나님과 대화하는 동안에 경험된 꿈이나 환상이나 기타 어떤 느낌이나 일어난 일들이나, 내게 심상치 않은 것들, 다시 말해서 분노, 공포, 아픔, 걱정, 실망, 기쁨이나 감사의 내용 등을 다 기록하라.

 

6. 일기쓰기를 시작하면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교훈과 권고와 위로를 주시며 그리하는 과정에서 치유의 사랑과 확신을 얻게 하심을 알게 된다.(고전14:3) 성령은 주와의 더 깊은 사랑과 용기로 인도하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령 은사로 발전해 나간다. 예언,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이 그것이다. 충분히 훈련받아 명확해 지기 전에 때때로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영적일기 쓰기를 중단하고 싶어지고 실제로 얼마동안 안 쓰게 된다. 그래도 계속 쓰다보면 은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삶을 유익하게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리라.

 

7.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 그리고 복음적인 설교를 들으라. 그래서 일기 쓰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이해와 지식을 사용하시게 하라. 레마는 로고스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할뿐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곧 로고스 위에 세워져야 한다. 또한 마음의 소리는 절대로 로고스를 통해서 주어진 복음의 깊이 이상 깊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낮이고 밤이고 묵상하고 고백하고 행동에 적용하면 성공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수1:8) 내 마음과 생각과 삶이 하나님의 원리에 복종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그를 의지하려고 서려면 바른 성경원리로부터 나온 생각에 의해서 내 영이 세워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순결하며 생명을 주는 말씀을 따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로고스 안에서 깨달음을 통해 개개인의 상황과 사정에 맞도록 정확한 원리를 순서대로 적용하고 이용하도록 레마로 주신다. 내 생각은 내 영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하게 선택하여 적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로고스 위에 세워진 레마는 또한 로고스에 의해서 조명되고 시험되어야 한다.

 

8. 자신의 영적 일기를 더 많이 하고 싶은 사람은 처음 두어 페이지를 하나님께서 정규적으로 기도하도록 짐을 지워주신 사람들이나 일들을 위해서 사용하면 되겠다.

 

9. 영적 일기를 시작할 때 마음에서 의심이 일어나면 생각 만하지 말고 일단 쓰라. 이 간단한 행동이 주의 대답을 분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2). 영적일기: 기도시간을 응용하는 방법

 

영적일기를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는 제안: 노트를 네 부분으로 나눈다.

 

1. 찬양--4, 5개의 시편을 읽은 후에 개인적인 찬양기도를 쓰라.

2. 인정--정직하게 자신의 성질, 안달, 불안이나 여러 하나님이 아시고 그렇다고 나를 덜 사랑하지도 않은 부족함을 받아 들이라.

3. 요구--매일 아침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 앞에 놓고 응답을 기다리라.

4. 감사--매일 하나님의 손길, 사랑, 돌보심을 느낄 때마다 하라.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앉아서 들으라. 성경 읽는 시간에 어떤 생각이나 기도나 아이디어나 하나님이 마음에 감동주시는 대로 쓰고 구성해 보라.

영적일기를 시작해 보라.

 

* 간증문 가이드포스트 2000년 5월호 36-44면 "귀를 기울이면" Sally-Ann Roberts

 

뉴올리언즈 있는 TV방송국에서 새벽 뉴스 쇼 앵커로 일하는 나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뉴스 쇼는 아침 6시에 시작되므로 나는 새벽 4시 30분까지는 방송국에 도착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송이 있기 전에 나는 집에서 나만의 준비를 한다. 깨어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집안은 조용하기만 하다. 그때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 . [중략]

 

1990년대 초, 갑자기 내 경력에 치명적이랄 수 있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때 나는 어마어마한 기도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뉴올리언즈에 있는 WWL-TV방송국의 '조간 뉴스'인 모닝 쇼 앵커였다. 나는 10여 년 동안 방송국에서 일을 해 오는 동안 시청 담당 신참 리포터에서부터 교육담당 리포터, 게다가 몇몇 조사 업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나만의 쇼를 독자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잘해가고 있었다. 나의 상사이자 방송국 안에서 나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조 듀크 씨는 당시 보도국장이었는데,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 확실한 사실은 방송국이 재정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듀크 씨는 우리 쇼가 곤란하게 됐다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아침 나를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에게서 평상시의 온화한 미소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간 뉴스'를 없애야 할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경비를 줄여야만 합니다. 미안해요."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처절할 정도로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만일 '조간 뉴스'가 없어진다면 내 일자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리라. 나는 사무실을 나와서 집으로 차를 몰고 돌아왔다. 그리고 침실로 올라가 커튼을 내린 후, 문을 닫았다. 그제서야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림을 꾸려 가야 하지? 남편 윌리는 이제 막 자기 사업을 시작해서 우리 가족은 내 월급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사랑의 주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 이 일만큼 좋은 일자리를 다시는 얻지 못할 것 같아요...."

 

잠시 후, 나는 지쳤다. 더 이상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그때,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기도할 때 해본 적이 없는 무언가를 해 보았다. 바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것, 늦은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어떤 구체적인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마치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단다." 뭔가 아주 특별한 평화로움이 그 순간 내게로 몰려 왔다.

 

그런 느낌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감정을 느끼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 몇 주 동안, 나는 매일 나만의 시간을 갖기로 다짐을 했다. 나는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렸다. 우선 하나님께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을 털어놓았고 때때로 편지에 쓰듯이 글로 적기도 했다. 그 다음엔 가장 중요한 시간을 갖게 된다. 나는 눈을 감고 약 30분 동안 그저 "귀를 기울인다." 그러고 나면 나는 언제나 더욱 새로워지는 것 같았다.

 

다음 번 듀크 씨가 나를 그의 사무실로 불렀을 때, 난 해고 통지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듀크 씨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그가 내게 또 다른 쇼의 앵커 자리를 제의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를 해고하시는 줄 알았어요." 마침내 나는 심정을 토로했다 "해고라구요? 난 지금 당신을 승진시키는 겁니다!" 그가 말했다.

 

6개월 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에이크런에 갔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어머니가 셀리 할머니의 아파트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바로 그때 나는 할머니가 남긴 소중한 보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수십 년간 할머니가 썼던 일기장이었다.

 

때때로 할머니는 몇 개의 단어만을 적었다. "샐리앤 부부네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또는 "루시 마리안을 위해 점심을 차려주었다"등등. 그러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똑같은 구절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날 무슨 일을 했건 할머니는 이런 기록을 꼭 남겼다. "큐티(quite time)를 했음." "큐티가 뭐예요?" 나는 물었다. "할머니께서 조용히 앉아 하나님과 함께 했던 것을 말하는 거란다." 어머니가 말했다. 당연히 나는 할머니가 눈을 감고 거실에 앉아 가장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날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그 시간을 갖지 않고서는 하루도 그냥 지나치시질 못했지." 어머니가 말했다.

 

"알아요." 내가 말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나도 큐티 시간을 갖지 않고는 하루를 지낼 수 없으니까 말이다. 매일 아침, 나는 성경말씀을 몇 구절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나는 귀를 기울인다.

 

 

 

D. 묵상기록을 통한 하나님 음성듣기

 

1997년 11초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사랑하는 것을 아시지요

*그렇다

 

저를 최상의 길로 인도하시고 사용하시지요

*그렇다

 

오늘 제 마음은 불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은 본래가 불안이다. 죄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를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이 불안이 그 불안입니까?

*그렇다. 무슨 무서운 일이 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겠습니다.

*그렇게 하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불안은 물러가라.

*이제는 나의 말씀으로 마음과 의식을 채우라. 네게 주어진 네 할 일, 사명을 생각하라. 너와 함께 일하는 나를 생각하라

 

 

1997년 12.10.

 

사랑하는 아버지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제 삶을 가장 보람된 일에 쓰고 싶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좀 더 시간과 정력을 바르게 쓰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아라. 내가 네게 큰 일을 맡기기 전에 철저히 훈련하고 준비해야 한다

 

우선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 대화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내 뜻을 배우라. 내가 더 많은 깨달음과 지혜를 주겠다

 

하나님 종으로서의 자세를 말해 주십시오.

*나의 일을 하는 나의 종은 아무도 아무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아무도 우습게 여겨도 안된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정중하게 대하라.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불러내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너는 그렇게 승리할 것이요 그렇게 내 종이 되리라.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 나도 안다. 너는 내 종 헨리 나우멘의 말을 들었지. 그냥 막연히 기다리지만은 말아라. 네 할 일을 하며 기다리라. 네 시간을 보람있게 보내면서 내가 네 소원을 이룬 다음 행할 것을 준비하라. 자신을 훈련시키라. 기다림은 곧 성장이다

 

주여 마음은 늘 불안합니다. 교회 일도 두렵습니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다. 너는 네 할 일이나 해라. 내가 내 목회를 성공시킬 것이다. 너는 나의 동역자이다. 네 할 일만 하면 나는 너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리라. 묵묵히 매일 매일의 일과를 진행하라

 

 

 

 

<자료출처: 주사랑목양회>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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