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善行)은 은밀하게! (마 6:1-4)
우리네 인생 길에는 수많은 만남과 수많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있음으로 공동체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저 사람이 있음으로 이 공동체가 축복 받고 기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괜히 기분이 나쁜 사람, 손해를 볼 것 같은 사람, 화를 입을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괜히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유형을 나눌 때 수학의 공식처럼 '플러스, 마이너스, 곱하기, 나누기'의 네 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플러스(+)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가 나에게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뿌듯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리는 플러스의 사람을 사귀어야합니다. 아니, 우리도 플러스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마이너스(-)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 내 것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 거기에다 짐 하나를 더 얹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을 돌보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플러스 인생을 가진 사람의 복입니다.
세 번째 곱하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중하고 멋진 사람들입니다. 남을 위해서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남을 살리고 세우기 위해서 내 시간과 물질과 가진 달란트를 바칩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쏟아 부으면서 남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아멘!/
네 번째로는 나누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단순한 마이너스가 아니라 큰 피해를 입히는 사람입니다. 머릿속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합니다.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해치고 사람들의 인생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피하십시오. 멀리가 계십시오. 이들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때로는 플러스의 사람이 될 때가 있고, 마이너스의 사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열심을 가지고 남을 도와주는 곱하기의 사람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나누기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할/
오늘 주제는 남을 도와주는 곱하기 인생입니다. 즉 선행, 구제에 대한 주제입니다. /할/ ◀제목 소개!▶
남을 돕는 삶은 복 받는 비결이요, 내가 행복해 지는 비결입니다. 기도 중에 중보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내가 너를 위하여 그리고 남을 위하여 하는 기도입니다. 이 중보 기도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보 기도를 가리킵니다. /할/
어느 목사님이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중보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처녀가 그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좋은 배우자를 보내달라고 했던 기도를 바꿔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엄마한테 좋은 사윗감을 좀 보내주십시오' 그 뒤에 그 처녀는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할/
▶남을 돕는 자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테레사 수녀입니다. 그의 전기를 보면 이렇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카톨릭교회의 평범한 수도자에 불과했습니다. 1910년 알바니아에서 태어나 유고슬라비아 국적을 가지고 성장한 그녀는 12살 때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주 앞에 서원을 했습니다.
그가 18세에 수녀가 되어 인도로 건너온 테레사는 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쳤습니다. 그가 1946년경에 인도에 한 시골길로 기차여행을 했습니다. 그 여행길에서 그녀는 문득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켈커터의 빈민가에 가서 그곳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 주라'는 음성입니다. 테레사는 그 길로 몸담았던 학교의 교사직을 그만두고 컬커타로 행했습니다. 그곳에 선교회를 만들고 빈민구제 사업에 일하면서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아이들을 주워 다가 보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부터 나환자들을 위한 시설과 양로원, 고아원, 부녀자 보호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누구에게든지 나의 사랑 전부를 바칠 수 있어요, 이것은 사회사업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할/ 잠19: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아멘!/
▶주기철목사가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불쌍한 거지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주머니를 뒤지니 십 전짜리는 없고, 일 원짜리가 딱 한 장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백 원을 주고 싶었는데 천 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아무래도 일원은 너무 많은 것 같아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일원이라도 줄 것을...'하고 후회를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목사님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데 돈지갑이 송두리째 없어졌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그래 잊어버려도 싸지, 잘 가져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앞에 주어진 기회는 미루지 말고 외식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만 보시는 구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할/
규제는 세 가지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야 구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구제를 특권으로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오직 사랑에 마음으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아멘!/
이런 마음으로 구제할 때, ⑴하늘에 상이 있고, ⑵이 땅에서 축복이 있고 ⑶그 자손들에게도 상급이 내려집니다. /할/
①오늘 본문은 산상보훈의 두 번째 교훈입니다.
마6:1-18절에서 우리 주님은 크게 세 가지의 '의'에 주제를 다루고 게십니다.
⑴우리가 어떻게 구제생활을 할 것인가? 구제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행해야 할 '의'입니다.
⑵우리가 어떻게 기도생활을 할 것인가?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우리의 신앙적인 '의'입니다.
⑶어떻게 금식생활을 할 것인가? 금식은 우리 자신을 절제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의'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경건한 삶을 위해서 늘 힘써야 할 신앙적인 의로운 행위입니다. /할/
오늘은 구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②선행의 기본정신이 무엇인가?(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1-18절까지의 기록된 세 가지 종교생활에 대한 서론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성도의 위대한 의무이며, 경건의 3대 요소입니다. 탈무드에서도 '구제, 기도, 금식'을 유대교 경건의 3대 요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할 때에 그 동기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기 위함이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 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보다는 이웃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할/
㉠성도들은 항상 세 가지의 신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⑴항상 자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지금 내 신앙이 바로 가고 있는가를 항상 정립해야 합니다.
⑵우리가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에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⑶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앞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믿/
▶1절의 '의를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공로로 속죄함을 받는 '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성도가 계명을 지키는 '의'가 있습니다.
본문의 의는 '사람이 행하는 의'이기 때문에 당연히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의'를 일컫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의를 행할 때'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기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 앞에 두 개의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그들 앞에서' 곧 사람들 앞에서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의 의를 행하려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의 의를 행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가 다 문제입니까?
그의 해답이 마5:16절에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 비취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들이 우리가 행하는 착한 행실, 곧 우리의 의를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를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병든 자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셨습니다. 요5:30절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 모든 일을 '예수님의 원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영광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아멘!/
따라서 '우리가 의를 행하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행하느냐?'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의를 행하는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의를 행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할/
㉡본문 1절은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⑴'사람에게 보이려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나타내고 알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현대는 자기 PR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보라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아멘!/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것은 성경에서는 '외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위선 또는 외식의 뜻은 처음에는 웅변가라는 뜻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좀 변해서 배우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참된 자기의 모습을 버리고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으로 변장을 합니다. 외식은 구약의 창세기부터 나타납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최초의 위선자는 가인입니다. 그는 겉보기에 그럴싸한 거짓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드린 제사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드린 위선적인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거부하셨습니다. 그러자 거짓이 드러난 가인은 그의 분노 때문에 자기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최초의 위선자는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써 3년간 예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처럼 위선을 떤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일이 없습니다. 그냥 같이 지내며 따라 다녔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은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당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가 큰 잔가? 누가 강한 자가? 누가 최고인가?' 관심이 큽니다. 사람들은 나타난 겉모양에서 평가합니다. 사실 그 이상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에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사람들 앞에 외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의하라!' 무엇을 주의하라고 하십니까? 구제하든지, 기도하든지, 금식하든지, 헌금하든지, 봉사하든지, 주의할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려고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께 보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멘!/
⑵참된 신앙은 그 상급이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했다면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목사님이 알아주지 않아도 절대로 시험에 들지 말고 섭섭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상급과 모든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본문은 외식하는 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바꿔 생각해보겠습니다. 은밀한 중에 하나님 앞에 했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상을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할/
다시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우리가 가로챔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의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기들이 중간에서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상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상은 고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을 받는다.'는 뜻은 당시 상거래 전문용어로서 물건을 샀을 때 영수증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어떤 신앙적인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예배이든, 찬양이든, 지도이든, 봉사이든, 주일학교 교사이든, 헌금이든 간에 이미 영수증이 발급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참된 신앙의 행위에서부터 옵니다. /믿/ 바른 예배가 됩시다. 이 자리가 복 받는 자리입니다. 바른 헌신, 봉사, 구제, 이것 자체가 복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바른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의 길을 가는 성도들을 찾으신다는 말입니다. /할/
대통령의 눈에만 잘 보여도 한자리합니다. /믿/ 하나님께 잘 보이십시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예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우리 대한의 건아들은 기대 이상으로 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선수들이 상을 받을 때 '과연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아니 기자가 그것을 묻기도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고 저들이 승리하고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목사의 백 번을 걸친 설교보다도 더 감동적입니다. 양궁의 조윤정양은 그의 어머니가 교회 집사로써 남의 집에 가서 파출부 노릇을 해가면서 그 딸을 키웠는데 거기에서 그런 어름다운 신앙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여자 배드민턴 선수인 황혜영과 정소영양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무릎을 끌었을 때 괜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할/
㉢다시 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⑴'선을 행하라'는 것이 '의'입니다.
선이란 무조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이해가 되던, 안되던, 내게 이익이 오던 안 오던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이고, 의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게 여기시는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게 기쁘게 여기시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의입니다. /할/
⑵의라는 단어는 법정용어입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어떤 사건을 심의하면서 '이 사람은 옳고, 저 사람은 틀리고'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상품백화점 붕괴사건에 책임문제로 전직 구청장들은 구속됐는데 현직에 있는 구청장은 죄가 없다고 판결되어 귀가시켰습니다. 법적으로 이 사람은 죄가 있고, 저 사람은 죄가 없다고 판결하는 것이 의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인간은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죄로, 허물로 죽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구속해 주시고 모든 죄와 사망에 법에서 무죄를 선언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이 칭의는 곧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의를 행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을 잘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생활입니다. /할/
⑶관계 개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의입니다. 이것은 바른 믿음의 관계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이웃(세상) 앞에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내 자신 앞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아멘!/
③선행을 베풀 때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마23장을 보면, 예수님이 6번씩이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대명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외식하는 자'이었습니다. 그들의 구제가 어떤 점에서 외식 적이었는가를 본문에서 세 가지 정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물질의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영광이 돌아가더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은밀히 하라는 주님의 말씀의 정반대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회당과 성전의 구석진 곳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구제를 위해서 마련된 방입니다. 곧 '침묵자의 방'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그 방은 들어가는 입구가 양쪽에서 나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제를 하는 사람이 구제하기 위해서 들어오는 입구와 구제를 받는 사람이 구제 받기 위해서 들어오는 입구가 서로 달랐습니다.
구제를 원하는 사람은 조용히 그곳에 가서 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자유롭게 놓고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구제를 받기 원하는 사람도 다른 쪽으로 들어가서 자기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들고나올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제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은밀하게 구제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 놓은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곳에서 얼마든지 은밀하게 구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외식하는 자의 저주를 보세요! 마23장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아멘!/
㉠구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⑴구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고 그 어려운 형편에서 건져 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가 하나님과 같이 베풀고자 하는 외적 행위가 바로 구제입니다.
구제는 물질로서 남을 도와주는 일인고로 참으로 선한 일입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요, 칭찬 받을 만한 일입니다.
시112:9절에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잠11:24-25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할/
하나님 앞에 구제하는 것, 봉사하는 것, 복을 받은 일입니다. 그런데 구제할 때 주의할 것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잘 분별해서 겸손하게 왼손이 하는 것, 오른 손이 모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⑵왜 우리가 구제해야 합니까? 우리가 구제를 해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4남매의 자녀를 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네 자녀들이 서로서로 돕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굉장히 기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서기 위함입니다. 신문에 나가 위해서 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기가 다릅니다. /할/
㉡어떻게 구제할 것입니까?
2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⑴외식하는 자같이 나팔을 불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 성전에 나팔이 13개가 있었는데 구제헌금을 할 때는 그 나팔을 불렀답니다. 나팔을 불 때, 사람들이 구제헌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면 사람들이 구제한다는 것을 알고 '야! 저 사람은 참 선한 사람이구나!'하고 칭찬을 했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습니까? 실제로 사람들은 조그마한 구제를 하면서 나팔을 불지 않습니까? 아무개는 가정이 아주 형편없이 어려웠는데 내가 도와주어서 살게 되었다고 은연중에 자기를 자랑을 합니다.
차라리 누구에게 무엇을 주어서 그를 부끄럽게 하기보다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또 조금 도와주고 전달할 때 사진을 찍고 신문에 내고 합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언제나 작은 구제를 한 사람이 큰일이나 한 것처럼 광내고 소리칩니다.
신앙의 외식이란 바로 나팔을 불어 자기를 선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제는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진실한 신앙행위란 언제나 그 자체에 이미 축복과 상급이 담겨져 있습니다. /할/
⑵외식하는 자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입니다.
2절 하반절에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에서 '이미 받았다.'는 말은 당시 상거래의 전문용어로서 완전히 총액전부를 받고 영수증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더 받은 것이 없이 계산이 다 끝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끝나버린 상황을 의미합니다. /할/
▶구제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때, 성령 받은 사람들이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구제하고 봉사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업을 감당하라고 주셨습니다.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라고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병원에 안가도 될 만큼 건강을 주신 것은 그 건강을 정욕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 봉사하라고 주셨습니다. /믿/할/
⑶구제할 때 성실함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롬12:8절에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아멘!/
아무렇게나 대강, 대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만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⑷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15:10절에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봉사할 때도, 헌금할 때도, 구제할 때도 우리 마음속에 '아 이거 아까운데' 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즐겨내는 자,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자는 기뻐하십니다. /할/
④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3)
▶어떤 마을에 구두를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활도 그다지 넉넉지도 못한데,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습니다. 자기 생활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웃에는 부잣집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구두쇠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는 남에게 동전 한 푼 보태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그를 구두쇠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구두쇠 할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구두를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구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구두 수선하는 할아버지가 구제한 것은 전부 그 구두쇠 할아버지가 뒤에서 준 돈으로 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구제할 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제할 때는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누가 주는 지도 모르고,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야 오직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어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문자 적으로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구제할 때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모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생각해보면 '네 것이 아닌 것처럼 주라!'는 의도가 그 속에 깔려 있습니다.
▶'조지 물러' 목사님의 전기를 읽어보면 참으로 감격스러운 간증 문이 많이 나옵니다. 조지 물러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한답니다. '하나님! 지금 오천 만원이 필요하오니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표를 주시면서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돈을 보내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명으로 보내오면서 말하기를 '이 돈은 네가 당신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내는 것입니다.'라고 한결같이 말하더랍니다.
그들은 '제가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기를 물러 목사가 이런 돈이 필요하니 기쁜 마음으로 주어라'는 음성을 들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다고 말하더랍니다. /할/
어떤 사람은 헌금한 것, 구제한 것을 꼭 자기가 그것을 확인하고 간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헌금이나 구제를 했으면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 그런지 이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쓰여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어떤 사람은 내가 개척교회를 몇 개 세우고 목사님 양복을 몇 벌 맞추어 주었고, 피아노를 샀고, 자랑을 많이 합니다. 솔직히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⑴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우리의 왼손 곁에 서 있는 사람도 모르게 눈치를 채지 않도록 하고 또 자기 자신도 잊어버리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⑵명예욕에서 구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제하면서 자신의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구제하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구제하는 것도 중단할 사람입니다.
⑶도와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긍휼과 사랑과 자비심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할/
⑤선행은 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언제나 은밀하게 계시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18절에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할/
사람들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시며 우리의 속마음을 감찰하시고 계십니다. /믿/ 은밀한 중에 봉사하시는 손길, 구제하는 손길, 하나님이 보시고 갚아주십니다. /아멘!/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통로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골방의 경험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골방이 있어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과 주기적으로, 규칙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배와 기도,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절대 필요합니다. /믿/
4절 이하에 말씀을 보세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여기 갚으신다는 말씀은 그냥 갚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30, 60, 100배로 갚아주십니다.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할/ 또 마10:42절에서 예수님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할/
냉수 한 그릇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보잘 것 없는 것조차도 예수님은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십니다. 오늘 예배 때 뿐 아니라 이른 새벽부터 나와서 충성하는 것을 보십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 이웃의 영혼을 위해 저녁에도 나와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믿/아멘!/
'하나님이 갚아 주리라' 오늘 희생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손길을 하나님이 보십니다. 보시고 주님이 갚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믿음의 재벌 록펠러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재미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갑부였던 죤 록펠러는 그의 손자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철저한 금전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는 주말이 되면 자기의 어린 손자들을 다 불러모으고 그들 각자에게 25센트씩 용돈을 주었습니다. 물론 손자들은 받은 용돈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두 가지 조건만큼은 지키도록 했습니다.
하나는 '용돈의 10%는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돈의 또 다른 10%는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하라'고 가리켰다고 합니다.
록펠러는 주말이 되면 또다시 손자들을 불러모으고 그들 각자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용돈을 어떻게 썼는지 반드시 그에게 보고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일 어떤 손자라도 용돈을 바르게 사용했으면 그는 상으로 5센트를 더 얹어서 그 주에는 30센트를 용돈으로 주었습니다. 반대로 만일 손자 가운데 누구라도 용돈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벌로서 사정없이 5센트를 깎아 20센트만 용돈으로 주었습니다.
록펠러는 자기 손자들이 어릴 때부터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손자들에게 자기가 준 용돈을 통해서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도록 가르쳤던 것입니다.
록펠러는 어릴 때부터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나는 장차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리라!' 그래서 그는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33세 때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해 순수익만 일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는 30대에 이미 백만장자의 대열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 뒤 10년이 지난 43세 때는 미국 최초의 트러스트를 형성해서 대규모 재벌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그 뒤 또 10년이 지난 53세 때는 전 세계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꿈대로 그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로 그 해 그는 Alopecia라는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모두 빠져버렸습니다. 또 밤에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에 먹는 음식이라고는 기껏 비스킷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이 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의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계속해서 말라갔습니다. 전문의가 그를 진단해 보고서는 1년을 넘기기가 어려우니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이처럼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는 찾아오는 죽음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사실 사람들에게서 인심도 많이 잃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저 물질을 손에 움켜쥐기만 했지, 한 번도 선하게 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눈물로 자신의 침상을 적시면서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만큼이라도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써보리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서원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움켜쥐었던 손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곳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리버사이드 교회도 그때 세워진 것입니다. 그는 그 교회를 비롯해서 곳곳에 5,000여 개의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인 시카고대학을 비롯해서 그는 24개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자선사업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록펠러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 유명한 페니실린 주사약도 그곳에서 지원한 연구비로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다섯 아들들과 또 그의 손자들이 자선사업을 위해서 사용한 금액을 합치면 수 십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손을 펴고 나니까, 그의 건강이 급속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건강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그가 54세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건강하게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더욱더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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