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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경의 믿음! (마 9:27-34)

by 【고동엽】 2022. 2. 11.

두 소경의 믿음! (마 9:27-34)

누군가는 말하기를 '인생은 믿도록 태어났다. 마치 사과나무에는 사과열매가 맺듯이 사람은 믿음의 열매를 맺고 사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종교적 피조물'임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의존적 피조물로, 종교적 피조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항상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헬라 철학에서도 인간을 '안드로포스'라 하여 '위를 바라보는 존재'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실상 하등동물일수록 땅을 쳐다보고, 더 하등 동물들은 땅속에서 기어다닙니다. 그러나 고등동물일수록 점점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D. L. 무디는 '너 자신을 믿어봐라 그러면 언젠가는 실망할 때가 올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를 믿어봐라 그러면 언젠가는 죽어서 이별할 때가 올 것이다. 돈이나 명예를 믿어봐라. 그러면 언젠가는 돈과 명예가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시고 나의 영원한 멘토가 되십니다. /할/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 곁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 곁에서 인격과 신앙으로, 지혜와 지식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가르쳐주고 조언해 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고, 붙들어 주고, 물질적으로 도움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랑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의 손길이 부모이거나 형제자매이거나 스승이거나 친구이거나 이웃사람이거나, 성공한 사람들 곁에는 항상 사랑의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깨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면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랑의 손길들이 너무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고 바르게 세워주는 사람들,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관계 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멘토(Mentor)라고 합니다.
'멘토'란 말은 '오딧세이'에 나오는 노인의 이름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오딧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할 때 사랑하는 아들을 믿을 만한 친구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이었습니다.
오딧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기간동안 멘토는 친구의 아들을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스승처럼, 가르쳐주면서 삶의 안내자가 되고 상담자가 되고 후원자가 되어 주어서 결국 훌륭한 왕자로 키워냈습니다.
그 이후 멘토라는 그의 이름이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부각되어서, '신앙과 인격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지혜와 지식으로 한 인생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어 가는 조언자, 도움을 주는 조력자, 영향을 주는 사람'의 동의어로 멘토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할/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자기 곁에 좋은 멘토들을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새로운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에게 좋은 멘토가 됩시다.' 멘토링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멘토링 운동은 함께 더불어 사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정한 멘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오고 기적이 옵니다. /믿/ 본문도 그분을 만난 두 소경이 두 눈을 번쩍 뜬 기적의 사건입니다. /할/ ◀제목 소개!▶

 

여러분, 우리의 두 눈이 밝은 것에 대해 감사해 본 일이 있습니까? 나이지리아 속담에 '외눈박이는 소경을 만났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영국 속담에는 '눈은 얼굴의 진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흔히 '눈이 보배다'라는 말을 합니다. 독일의 시성 괴테는 '눈으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기쁨이 나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부산에 '라이트 하우스'라는 시설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자들을 수용하고 교육시키는 학교입니다. 수용돼 있는 많은 시각장애자들은 여러 가지 등급이 있습니다. 완전히 시력을 잃은 사람,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 이제는 시력의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고 시력을 점점 잃어 가는 진행중인 형태의 시각장애자들도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 두 사람은 병이 진행되는 상태가 아니고 확정된 상태입니다. 완전한 소경들입니다. 이제는 희망의 여지가 없는 소경들입니다. 이 정도 되면 많은 사람들은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끝나는 인생이다'라고 체념을 합니다. '당신들은 된다고 하지만 내 경우는 달라. 나는 안 돼' 이렇게 체념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마다 내일에 대한 기대(희망)가 있으므로 오늘을 삽니다. 아들에 대한 기대, 딸에 대한 기대, 며느리에 대한 기대 등 우리 가족 모두가 기대감을 가지고 가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기대를 가지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두 소경의 처지를 보면 기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아무도 이들을 향하여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저 사람들은 언젠가 시력을 회복할 것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두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 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할/ 27-31절까지는 소경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두 소경을 알아봅시다(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새' 거기가 어디입니까? 회당장 야이로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리신 후 그 집을 떠나 다시 가버나움으로 행하고 계십니다.
이때 '두 소경'이 따라옵니다. 예수님 당시 지중해 지방에는 특유의 기후와 햇빛 그리고 석회석 먼지 때문에 소경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소경들은 혼자 다닐 수 없었기에 짝을 지어 다녔습니다. 그들의 생계유지 수단은 구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살아도 문제가 이렇게 많은데 두 소경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이 소경은 나면서 소경이 되었는지 도중에 실명이 되었는지 성경에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어째든 앞을 못 본다는 것은 남에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고 천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눈에는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는 육안이 있고, 만사의 이치를 보는 지안이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안은 열려 있는데 지안이 닫혀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안, 지안 다 열려 있을 때, 영안이 닫혀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
소경들이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소경이라는 소리랍니다. 소경이란 말은 굉장히 경멸조의 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맹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맹인이 있습니다.
⑴육신적인 맹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만물을 그 아름다운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⑵문맹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맹인을 말합니다. 글자를 봐도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을 글씨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요즘 컴맹하나가 또 붙습니다.
⑶이들보다 더 불행한 맹인이 있는데 바로 영적인 맹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만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 중에는 차라리 없어야 할 눈도 있습니다. 흘기는 눈, 노려보는 눈, 교만한 눈(시18:27), 시기의 눈, 멸시의 눈, 물욕에 어두워진 발람의 눈(민22:31), 범죄 하는 눈(마5:29), 형제의 눈에 티만 보는 눈(마7:3) 등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눈을 빼어 버리고 한눈만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이 축복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할/
27절은 두 소경의 믿음을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믿음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라야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은 내가 가져야 합니다. 내 아내가 예수 믿는다고 남편인 나도 저절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가져야 되는 것이고 내가 확신해야 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 누가 나를 고통 속에서 건져주리라 생각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자기가 노력해야 합니다. /아멘!/

 

㉡두 소경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⑴인내의 신앙입니다. '두 소경이 따라오며' 예수님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따라온 것입니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판단하고 죽기 살기로 따라갔습니다. 따라갔다는 것은 인내요, 결단입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결단입니다. 인내 없이 결단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할/
이 두 소경이 예수님의 소문을 잘 들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그 예수님을 유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결심으로 따랐습니다. 사람들에게 오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기회를 잘 붙잡는 것도 축복입니다. /아멘!/
⑵기도하는 신앙입니다. '소리 질러 가로되' 기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통성기도를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조용히 하는 기도보다는 대게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에 귀가 번쩍 뜨이십니다.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 '부르짖는다'는 말은, '땀을 짜며 피를 짜며 생명을 짜며 부르짖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런 기도를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했습니다. 그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들어가면서도 이런 절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박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얍복강가에 야곱이 부르짖어 기도했더니 그를 승리자로 축복하셨고,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그의 친구들을 불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내 주셨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혼자 부르짖는 기도가 아닙니다. 두 소경이 연합하여 통성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습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마18:19절에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아멘!/
⑶그들은 바른 신앙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따라 다니고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도 불이익을 주려고 했습니다. 아무나 공개적으로 '예수는 메시야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온 메시야'라는 말을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소경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뜨기 위해서 소리지르고 있는 일차적인 소원이 있지만,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는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두 소경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당신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당신은 만 왕의 왕이십니다.' 이런 고백이 '다윗의 자손이여!'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신앙은 바른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멘!/
⑷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사실 인간의 자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무궁무진합니다. /믿/아멘!/

 

㉢두 소경의 애원은 어떤 애원인가?
'죽어 가는 자식을 위하여 의사에게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부모의 애원처럼 주님에게 애원하고 있습니다. 또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재판장 앞에서 살려달라'는 최후에 탄원과도 같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에게 포로된 자가 살려달라'는 최후에 청원과도 같은 절규입니다.
여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지금 둘이 합력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한번 마18:19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두 소경의 기도는 간추려 보면 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일대의 기회이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라는 마음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못 만나면 다음 주에 만나지'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내일은 우리에게 약속된 날이 아닙니다. 오늘만이 우리의 날입니다. 고후6: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

 

②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거처하시는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학자들은 이 집이 마태의 집이거나 베드로의 집중의 하나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이 두 소경들은 그동안 길에서부터 계속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건만 우리 예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아무 말 없이 한 집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사람은 자존심과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을 가장 기분이 상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할/
㉠믿음은 장애물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끈질기게 간구하며 따라다니는 소경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는 즉시 들어 주시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 앞에 장애물을 놓으시기도 하십니다.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누워 있을 때 고쳐달라고 애원하자 주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8:7)고 선뜻 은혜를 베푸시는 예가 있는가 하면, 주님은 때로 의도적으로 무관심의 장애물을 놓으시기도 하십니다.
마15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귀신 들린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로 수로보니게 여인이 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하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이 예수께 절까지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자 이번에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차별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렇게도 냉정하고 그렇게도 무정하신 주님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며 그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할/
㉡우리가 기도할 때도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실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⑴그들의 신앙은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심을 시험해 보셨고, 그들의 인내를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시험해 보십니다.
⑵길에서 공개적으로 고치시지 않으시고 은밀하게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30절에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⑶눅18장에서 가르치신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끈질긴 기도라야 합니다. 얻을 때까지 구하고 만날 때까지 찾고 열릴 때까지 두들겨야 합니다. /믿/ 세상일도 무엇이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끈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할/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무려 15년이나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반응을 보이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지금 무엇을 물으십니까? 그들의 고향이나 학벌이나 재산을 물으신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가장 크신 관심은 '주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 부르짖는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은혜요 공짜입니다.
단 한 가지 보시는 것은 그 마음 중심에 믿음을 보십니다. '과연 내가 너희 눈을 고칠 수 있는 것으로 믿느냐?' 그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병을 고쳐 주시는 그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
어떤 학자는 믿음과 기도는 동전 앞뒤와 같고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믿지 아니하는 것, 한 날개를 잃은 것입니다. 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도 한쪽 날개를 잃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과 기도라는 두 날개가 꼭 필요합니다. 이 두 날개를 통해서 기적은 일어납니다. /할/ 두 소경의 대답은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 말은 '네 믿습니다. 아멘!'이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성도의 신앙을 항상 확인하십니다. /아멘!/

 

③'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언하십니다(29).
㉠주님께서 이때에 이들을 만지시지 않고도 얼마든지 말씀으로만 눈을 뜨라고 명하셔도 되는데 주님은 이들의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주님의 손은 창조의 손, 구원의 손, 능력의 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만져주신 것은 치료의 방법으로보다는 그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만져 주셨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우리가 늘 말하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구원받는 믿음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도움을 입는 믿음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사건을 믿을 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을 지라도,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을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도 없고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예 차단되고 마는 것입니다. /할/
그리고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얻을 수 가 있습니다. 믿음을 다른 측면에서 나눈다면 산 믿음과 죽은 믿음(마7:21)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죽은 믿음이란 행함이 없는 믿음(약2:14)을 말합니다. 산 믿음이란 행함이 있는 믿음(마7:24, 약1:22)을 말합니다. 파워 있는 믿음을 산 믿음입니다.
믿음의 크기로 나눈다면 작은 믿음과 큰 믿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작은 믿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큰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믿고 부르짖고 믿는 만큼 순종하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믿어야 할 일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요, 질병입니다. 정말 좋은 약이 있어도 믿지 못하는 것, 정말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믿지 못하는 것. 그것은 질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복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믿음의 역사입니다. 큰 믿음은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작은 믿음은 작은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아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 역사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색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병 고쳐 주시는 것, 문제 해결해 주시는 것, 절대로 인색한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내 신앙이 병들 것이 문제입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변덕을 부리고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역사할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붙잡읍시다.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또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④치유하신 주님이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30).
㉠'그 눈이 밝아진지라' /할/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한 사람만 뜬 것이 아니고 두 사람 다 떴습니다. 여러분 기적이 무엇입니까? 소경이 눈을 뜬 것이 기적입니다. 능력과 기적의 크기는 믿음의 크기입니다. 두 소경은 믿음의 크기대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할/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이라는 기도에 관한 책이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인데 그 책의 제목은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정을 합니다. '나는 이렇게 축복을 준비하였다. 십자가를 준비하였다. 구원도 준비하였다. 건강도, 재물도, 문제 해결도 다 준비되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축복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너희는 받지 않느냐? 제발 기도하라,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에게 주고 싶은 이 모든 축복을 가져가라!' 하나님이 더 안타까워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 받기를,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소경이 눈이 밝아졌습니다. 제 2의 탄생, 새로운 삶이 왔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영적으로 소경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상 적인 것은 잘 보고 살아왔으나 영적인 것은 볼 수 없는 죄는 열심히 보았으나 거룩은 보지 못했고, 사람들은 많이 만나고 보았으나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소경처럼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할/
㉡예수님은 '이 일은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구원에 있는 것이지 어떤 능력은 나타내어 과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조용히 그들을 보내주었습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 같으면 그 한 건 가지고 팔자를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겸손하십니다. 마6:3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하셨습니다. /할/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왜 예수께서 소경들의 눈은 띄워 주시고는 이 말씀을 하시는가?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눈 뜬 소경들의 신변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9장에도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친구가 나가서 예수가 눈 띄워준 것을 전파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그 가족과 함께 출교를 당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교는 어마어마한 형벌입니다. 이렇게 눈을 뜬 소경들이 유대인들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할/

 

⑤그런데 그들이 나가서 어떻게 했습니까?(31)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아무에게나 가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했습니다. 그것도 '온 땅에'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온 땅에'라는 말은 '가는 곳마다'라는 뜻입니다. 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그 일을 말했고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예수의 그 능력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해서 복을을 전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넘쳐나야 됩니다. /아멘!/
▶그들의 외침은 어떤 외침인가? 목숨을 건 외침입니다. 생명을 건 전도입니다. 소경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갈 위험이 있고 심지어 출교를 당할 수 있고 목숨까지 담보한 행동입니다. /할/
㉡여기 '저희가 나가서' 이 부분은 저희가 그 어떤 은혜의 강한 손에 이끌려 나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이 소경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에게 일어났던 기적, 저희 믿음대로 이루어졌던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 입혀졌던 그 은혜는 자기들이 시력을 찾고 팔자를 고치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성령이 그들을 몰아낸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함께 이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의 소문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할/
믿음은 우리의 소원 성취가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두 눈을 고쳐주시는 안과의사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메시야로 오셨다는 것은 영생의 문제를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믿/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생을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야입니다. 그 메시야를 알기 때문에 메시야를 만난 이들은 눈뜨고 거기에 머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이 그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내 소원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소원을 넘어서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두 소경처럼 그들의 소원을 뛰어 넘은 것처럼 우리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아멘!/
이 소경들은 바리새인들도 막지 못하는 전도자로 나타났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들이 부르짖고 따라갔던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 능력입니다. /할/
▶힘에 대해서 학자들이 좋은 분석을 해 놓았습니다.
첫째 단계는 공격하는 힘이 제일 강하다고 합니다. 수비하는 힘보다는 공격하는 힘이 강하다고 합니다. 삽은 땅을 팔 때 강한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수비만 하는 모습보다는 공격하는 모습이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격하는 힘입니다.
둘째로 이것보다 더 큰 힘은 이기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격하는 힘만 가지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긴 힘을 가지고 자랑하기 바랍니다. 내가 공격을 받더라도 끝에 가서는 이겨야 합니다. 끝에 가서 이겨버리면 도중에서 당했던 것도 다 회복이 됩니다. /할/
세 번째로 이기는 것보다도 더 큰 힘은 남을 도와주는 힘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라 해도 남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이 힘은 공격하는 힘보다 강하고 이기는 힘 보다 강합니다. 이겨도 남을 안 도와주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겨 놓고는 패배자들을 짓밟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겼으면 패배자를 회복시켜주는 그 사람이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최고로 강한 자라는 것입니다. /할/
네 번째는 함께 하는 힘입니다. 이것은 영적이면서 실제적인 최고의 강한 힘입니다. 결속된 힘은 굉장히 강합니다. 이 소경들은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메시야 그분이 함께 하십니다. 이들은 아무도 해칠 수 없는 강한 전도자들로 예루살렘을 불사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소경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를 발휘하신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증인이 됩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너무 감사하니까, 기적의 체험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니까, 믿음이 넘치니까' 그들은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아멘!/
지금 이들은 목숨을 건 전도행위입니다. 소경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갈 위험이 있고 심지어 출교를 당할 수 있고 목숨까지 담보한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를 본문에서 꼭 발견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전도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전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하지 말라고 해도 전도합니다.
요4장에 나오는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자기 동네에 가서 말했습니다. '와 보라.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물을 뜨러 왔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물동이를 버려 두고 가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의 마지막 과제가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를 위해서 재물을 주시고, 전도를 위해서 병을 고쳐 건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전도를 위해서 기도 응답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마지막 과제는 전도입니다. /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대로 주십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누가 뭐래도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소문을 퍼뜨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쁜 소문은 절대 퍼뜨려서는 아니 됩니다. /믿/

 

⑥그들이 나가서 사람들을 주께로 데리고 왔습니다(32).
'저희가 나갈 때' 두 소경이 치료받고 기뻐 뛰며 나갈 때 곧이어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들'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전도는 주께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할/ 귀신들린 자는 절대 혼자 예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제 발로 교회에 나오지 못합니다. 오늘 두 소경처럼 우리가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할/
참 세상은 불쌍한 사람이 많습니다. 눈이 멀어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말이란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우리 속담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꿀 먹은 벙어리 속은 그 어미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병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자기 부주의로 유전으로, 죄로, 또는 하나님의 징계를 주셔서 걸릴 수도 있고, 귀신이 들어가서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벙어리의 종류가 있고, 원인이 나와 있습니다.
⑴마15:30절입니다. 타고난 벙어리가 있고, ⑵질병으로 벙어리가 된 자도 있습니다. ⑶출4:11절에 죄 값으로 벙어리가 된 자도 있습니다. ⑷눅1:20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시적인 벙어리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⑸본문에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벙어리가 고침 받는 비결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소경과 벙어리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소경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왔고, 벙어리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온 자나 끌려 온 자나 다 환영하십니다. /믿/

오늘 벙어리 된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에게 데려오면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는 것은 지금 표현은 '교회로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왜?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께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눅10: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또 막16:17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귀신을 벌벌 떨고 한길로 왔으나 일곱 길로 혼비백산해서 쫓겨갑니다. /믿/
본문의 벙어리는 그 벙어리가 된 원인이었던 귀신이 쫓겨나가자 벙어리가 입을 벌어 말을 하게 됩니다. /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 위에 범사 위에 악령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히 물러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⑦예수님의 능력 앞에 두 가지 반응을 보겠습니다.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33)
군중들의 태도는 놀라움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사실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대로 듣고 사실대도 믿는 것 축복입니다.
그런데 기어이 의심해보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은 절대 부정적이면 안 됩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 모두 군중들처럼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34).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지 않고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불 신앙과 교만과 시기심 때문에 마음이 꼬부라진 것입니다. 마음이 꼬부라진 사람은 어떤 것에도 부정적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보고 왜 이렇게 다릅니까? 그들의 마음이 비틀어졌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마음 바탕이 좋아야 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아무리 행복한 사건을 가져다주어도 불행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천국을 지옥으로, 한 번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깎아 내리고 비판하고 무시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깎아 내리고 무시해 버리십니다. /할/ 우리 모두 긍정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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