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중심의 삶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시 84:1-12)
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많이 사는 곳이 집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집에서 살다가 집에서 그 인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집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집의 신비한 비밀을 잊어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집을 건물로 생각하고 살지만 사실은 건물이 집이 아닙니다. 부모의 품이 나의 집이 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집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집에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머니'하고 불렀을 때 '내 새끼 나 여기 있다' 그러면 마음에 안식이 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안 계시면 집에 있기가 싫으니까 방황합니다. 어머니가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우리는 집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결혼한 후에는 남편은 아내가 집이 되고 아내는 남편이 집이 됩니다.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내가 남편의 집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건물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내의 품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포근하고, 아늑하고, 남편의 집이 될 때 그 남편은 아내 곁에서 안식을 얻고, 평화를 누리며,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결국 나에게 집이 되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집이 되어주고 살아 가면서는 아내가 집이 되어준다 하지만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또 중간에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집이 되어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집이 되고, 거처가 되고,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은혜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축복입니다. /할/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전 중심이 삶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아멘!/ ◀제목 소개!▶
표제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했습니다. 고라는 레위 족속으로 성전에서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며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음악은 바로 이들에게서 시작되고 발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 '영장'이란 말은 성전 예배의 음악을 관장하는 성가대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깃딧'은 당시 음악에 사용된 악기를 가리킵니다. 그들이 부른 노래의 주제는 '성전을 떠나 있는 순례자가 성전을 그리워하는 내용'입니다. 성전을 사랑한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신앙을 고백한 노래입니다. 그들은 이런 성전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할/
이 시는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또한 다윗의 시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다윗의 시라고 할 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찬이슬을 맞으며 고달픈 나날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다윗은 공중의 참새도 제단 곁에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는데 자기는 장막을 떠나 사는 처량한 신세임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 70년 세월에 예루살렘을 향하는 순례자가 성전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구구절절 그 아름다운 신앙이 배어 있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신앙의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을 그들의 고향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갔어도 성전을 그리워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그 쪽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명절 곧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성전 중심이 바로 예배 중심의 삶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 최고의 가치(worth)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피조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진짜 가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생애에 최고의 절정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들 하나하나를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시인은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자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이 예배를 형식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와 앉았다가 가면 기쁨과 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멘!/
여러분, 세상에서 나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됩니다. 직장에서는 직위로 비교되고, 학교에 가면 성적으로 비교되어지고, 사회에 나가면 가진 소유로 인격이 평가받고 대접을 받습니다. 집의 평수로 빈부가 결정되고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은 상대적 가치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일 대 일로 인정합니다. 세상에서는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하고 기술 하나 없으면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주고 바꾼 성도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존귀한 존재요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생명으로 인치십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존귀한 보배인가를 알아야 하며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시간이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의 시간이요 가치 있는 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풀핏 주석에는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의 척도를 재는 말씀이다' 라고 합니다. 아무나 주의 장막 즉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교회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고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꼭 내 입술에서 고백이 나옵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이 고백을 해보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교회가 그렇게 사랑스럽습니까? 교회는 하나님 백성에게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교회는 어머니 품과 같다'고 합니다. 순교지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시기 바로 직전에 사모님이 면회를 갔는데 '엄마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이게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람에게는 회귀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지요. 사실은 그 본능은 엄마 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품과 같은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를 사랑하고 나아가 사모해야 합니다. /믿/
▶2절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1절의 '주의 장막'이나 여기 '주의 궁정'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뜻합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성전을 사모했는지, 주의 장막을 그리워하다 못해 이젠 병을 얻을 지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시인은 성전을 사모하며 살았음을 알려줍니다.
이 고백 때문에 본 시편을 다윗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윗만큼 성전을 사랑하고, 사모한 인물이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성전사랑을 노래한 27편에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그는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고 싶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성전을 사모하며 살던 신앙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성전사랑입니다. /할/
여기 '사모한다'는 말은 '사랑한다, 그리워한다, 바라다, 열망한다, 혹은 관심을 갖는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모할 때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고, 그리움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온통 마음과 생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모함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립고, 보고 싶고, 떠나있으면 궁금하고,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시인은 얼마나 사모했으면 '영혼이 쇠약할 정도'로 사모하겠습니까? 증권하는 사람 보니 눈만 뜨면 증권, 입만 벙긋하면 증권, 밥 먹다가도 증권, 잠자리 누어서도 증권 온통 마음이 그기에 쏠려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증권은 때론 사람을 실망시키지마는 하나님은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시122:6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할/ 여기 예루살렘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바로 교회를 말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평안을 구하고 교회를 사랑하면 그 행사가 형통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3절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인은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참새는 성전 지붕에 제 집을 짓고 제비는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살지만 자신들은 성전을 멀리 떠나 처량한 신세가 되어 있으니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참새는 인가 근처에 살면서 번식을 합니다. 제비도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새끼를 기릅니다. 참새와 제비는 연약한 새들입니다.
이들도 벌레를 잡고 집을 짓고 새끼를 키우지만, 적이 공격해 온다면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긴장되어 있고, 수시로 주변을 살피며 경계를 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참새와 제비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참새와 제비처럼 연약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불안합니다. 누가 지켜주어야 합니까? 주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두려워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29-31).
참새와 제비도 하나님을 사모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며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4절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왜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주의 집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가 오늘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자리입니다. /믿/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를 따라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올라가게 되는 것을 한없는 영광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찬양하는 곳입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존엄성을 듣는 곳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알아 영원한 생명 앞에 경건하게 임하는 자세를 배우는 곳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우고 그 지혜를 얻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작은 새까지도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지만 하나님이 보살피고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곳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란, 죽음에 대비한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어리석은 부자가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죽음에 대비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 시인은 말합니다. 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주의 집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낫습니까? 왜 행복하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주의 집에 거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리고 주의 집에 거하면 나를 사람답게 해주십니다. 나를 나답게 지켜주고, 내 명예를 지켜주고, 내 생명을 지켜주고, 장차 받을 내 영광을 지켜줍니다. 교회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다 달리게 해 줍니다. 그래서 의의 면류관,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할/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은 '주의 집에서 하루가 천국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영혼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장막, 주의 집, 주님의 교회를 사모하며 내 아버지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바른 교회 생활이 우리의 축복입니다. /믿/
▶어떤 사람이 교회를 '공동묘지 같은 교회, 박물관 같은 교회, 극장 같은 교회, 잔칫집 같은 교회' 네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⑴공동묘지 같은 교회는 믿음의 활동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이 없고 의무감으로 오가는 교회를 말합니다. ⑵박물관 같은 교회는 골동품을 보며 기뻐하는 것처럼 '그때 우리 교회가 이런 모습이었다'라고 그리워하며 옛 추억을 먹고삽니다.
⑶극장 같은 교회는 많은 사람이 몰려오지만 한 곳만 바라봅니다. 그곳에 있는 배우나 노래 잘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손뼉 치고 끝납니다. 그런가 하면 ⑷잔칫집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잔치 집은 축제입니다. 참된 교회는 잔칫집 같아야 합니다.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고 말씀의 은혜가 있고 찬양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 흘리는 교회가 잔칫집 같은 교회입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⑴'주께 힘을 얻고' ▶인생에게 진정한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사람으로부터 오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으로부터 오는 힘도 큽니다. 누구나 어렵고 답답할 때에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약하면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먼저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힘은 당장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힘은 자식입니다. 자식에게 있어서 힘은 부모입니다. '부모가 얼마나 배웠느냐, 부모가 얼마나 부요하냐 부모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되느냐'가 자식에게 영향을 줍니다. 부모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으면 자식의 기가 죽습니다. 반면에 부모가 좋은 직업을 갖고 있고 돈이 많으면 자식은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혼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부모 없는 자식은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입니다. 때로 살아가면서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사람을 잘 만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병들어 몸이 약해지면 의사가 힘이 됩니다. 외롭고 고독할 때 친구가 힘이 됩니다. 아내가, 남편이 힘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식이 힘이 됩니다. 이렇듯 사람으로부터 오는 힘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여러 사람의 힘을 뭉치면 더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전적으로 의지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자랑하고 사람의 힘만 기대할 것은 아닙니다(고전3:21). 그렇게 의지하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 아내가 몸부림칩니다. 힘이 되던 자식이 앞서 세상을 떠남으로 슬퍼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어제 힘이 되던 사람이 오늘 배반을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하더라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 있습니다.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연으로부터 오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흙입니다. 흙은 자연입니다. 흙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먹어야 삽니다. 자연이 내는 식물을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몸이 약해지면 약이 되는 약초를 먹어야 합니다. 이것도 자연으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우리가 금식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힘을 공급받기도 하지만 금식도 육체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 육체적인 힘은 자연으로부터 옵니다. 요즈음 자연식품 곧 무공해식품을 많이 찾습니다. 또한 생수를 찾습니다. 독이 되고 해가 되는 것이 아닌 힘이 되는 것을 먹고자 함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연을 통해서 힘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이 오염되고 자연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자연 속의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귀로부터 오는 힘도 대단합니다. 마귀의 힘은 대단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대항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보좌까지 기어올라가려고 합니다(사10장).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습니다(엡2:2). 그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을 꾀었습니다. 가인 속에 살인의 마음을 넣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삼손 같은 사람을 넘어뜨렸습니다.
마귀는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마4:1). 마귀는 살인자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의 아비입니다(요8:44). 이 마귀가 전 세계를 잡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단들을 잡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어디서 저런 힘이 납니까? 마귀의 힘입니다. 이러 마귀를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요일3:8).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를 멸하기 위함입니다. 마귀를 멸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을 때에 그 믿음으로 우리도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릅니다. 믿음으로 마귀 곧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막16:17).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힘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을 섬기는 팔백 오십인과 싸워서 이겼습니다(왕상18장). 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힘이 왔습니다. 모든 백성이 이를 보고서 하는 말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왕상18:39). 히스기야도 하나님의 힘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앗수르의 산헤립을 물리쳤습니다(사38장). 우리도 하나님의 힘을 받아야 합니다. /아멘!/
우리가 무슨 힘으로 세상을 살아갑니까? 영력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체력, 육체의 힘도 필요합니다. 또한 지력도 필요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력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힘이 없을 때는 여자 하인에게도 깜짝 놀라 주를 부인했지만 그가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담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환난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힘이 오면 담대할 뿐만 아니라 능력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힘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시18:1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사40:30-31절에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기 '앙망한다'는 말은 '바라보고 의지한다는 말이요 맡긴다는 말'입니다. /아멘!/
⑵'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예루살렘 남동쪽에는 작은 산이 있는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 산이 바로 시온 산입니다. 이 산은 '여호와의 산, 거룩한 산'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산이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만나 주기로 약속하신 산입니다.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 천국을 의미하는 산'입니다(히12:22).
시온의 대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온의 대로는 성소로 향하는 길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히10:19-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제물 되신 예수의 피가 우리를 흠 없고 점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피를 믿는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갈 마음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마음이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 그 마음에 천국을 찾고자 하는 사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믿음의 기도가 시온의 대로입니다. 히4: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할/
시134:3절에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에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영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 건강의 축복도 이루어집니다. /믿/
▶6절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산에 올라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알 수 있습니다. 산에는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를 올라가면 정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상에 서면 또 다시 내려가 골짜기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삶의 정상에 서서 만세를 부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둡고 쓸쓸한 인생의 골짜기를 통행할 때가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에 눈물의 골짜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눈물 골짜기란 눈물을 흘리며 가는 눈물의 장소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집안에 있는 방말고 밖에 있는 방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기껏 다방과 복덕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갑자기 방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방 찜질 방 pc방 소주방 대화방 빨래방 게임방 놀이방' 등등입니다.
지금은 집안에 있는 안방 건너 방 놔두고 집밖에 있는 방들을 찾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도 이런 pc방 찜질방 노래방 등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색적인 방이 하나 등장을 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눈물의 방'입니다. 난징 시내 한 호텔 1층에 '쿠바'라는 눈물의 방이 문을 열었는데 이곳은 울고 싶은 사람들이 실컷 울고 갈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고 합니다. 1시간 동안 실컷 울고 가는데 50위안 (우리 돈으로는 약 6,5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합니다.
눈물의 방에 들어가면 사무용 책상 위에 빗과 고춧가루 물, 통마늘 등이 준비되어있고 울다가 집어던질 수 있는 유리잔, 인형 등도 준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10여명이 찾아오는데 8명은 여자들이라고 합니다.
울고 싶은 사람이 많은 곳은 중국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납니다. 재벌 손자로 태어나고 대통령이나 왕의 아들로 태어나는 아이라도 히죽이 웃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습니다. 모두 울면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한평생을 살면서 웃고 즐겁고 재미나고 행복한 날들보다는 걱정과 근심, 염려와 수고 때문에 한숨쉬는 날들이 더 많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구인들 한숨쉬고 걱정하고 울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눈물 골짜기'라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여기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⑴실패의 현장입니다. 몸과 마음을 바쳐 계획하고 힘쓰던 일들이 실패로 돌아갈 때 눈물 골짜기를 걷는 때입니다.
⑵절망의 현장입니다. 왕상19:3-4절에 의하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계속되는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의 핍박에 지쳐버렸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데려가 달라고 기도합니다.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그는 몸과 마음이 지쳐 실의와 좌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하나님께 죽음을 간구할 정도로 절망의 골짜기를 만났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인생의 절망 속에서 때로는 지쳐 자포자기하며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눈물의 골짜기로 통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
⑶고난의 현장입니다. 야곱은 바로 왕에게 자신의 나이를 말하면서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창47:9절에서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인생 길 전체에 고난의 함정들이 복병처럼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질병이나 각종재난으로 고난을 당합니다. 인간들의 악함으로 인해 고난은 더 무거워집니다.
이런 실패와 절망과 고난의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그 일을 대처하는 두 가지 태도는 가 있습니다.
하나는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였던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꾸려고 하면 바꿀 수 있는 것이 세상일이고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일이 조금만 어려우면 포기해버리고 낙심하고 한숨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또 하나는 '희망을 품고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존 맥스웰'이 쓴 '생각의 법칙'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믿음이 달라진다. 믿음이 달라지면 기대가 달라진다. 기대가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진다. 태도가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 행동이 달라지만 실력이 달라진다. 실력이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진다.' /할/ 그리고 그는 당부하기를 '어떤 행동을 바꾸려고 시도하기 전에 마음부터 먼저 바꾸라'고 말했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안 될 일을 되게 만들고 어려운 일을 쉽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공적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아멘!/
▶7절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왜냐면 낙심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후 4:8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낙심치 않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를 믿고 따르는 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나 낙심치 맙시다. 왜냐면 때가 이르면 눈물로 뿌린 씨앗들을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6: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또 시126:6절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인생의 눈물 골짜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비결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즉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아멘!/
저는 복싱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링 위에서 싸우는 복싱 선수에겐 두 가지의 넘어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운(down) 과 녹아웃(Knockout)입니다.
다운은 순간적인 넘어짐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벌점은 있지만 게임 운영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몇 번 다운이 됐어도 점수를 만회하여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녹아웃이 되어버리면 게임은 완전히 끝나 버립니다.
한 번 녹아웃 되면 게임은 끝나고 만회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그 게임에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복싱 경기의 규칙이 신앙생활에서도 적용이 될 수 있음을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의 경우 사업이나 생활에서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코 녹아웃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할/
▶8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성전 중심의 삶이 왜 축복의 통로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서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할/
한나는 절기 때마다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며 기도를 하곤했는데 한번은 자식 문제로 인해 속이 너무 상해서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축복하셔서 기도의 아들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너무너무 기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한나는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
▶9절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눈물의 골짜기를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허락해 주십니다. 시30:5절에서 다윗 왕은 말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 통곡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마5:4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또 계7:17절에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10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내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섬김의 자세입니다. 문지기는 집안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안전을 지키는 자입니다(마24:45-46). 또한 문지기는 집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핍니다. 자기 집 식구가 아닌 외인의 출입을 경계하며 통제합니다(요10:8). 문지기는 모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집주인과 권속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라고 한 것을 보아 이는 주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섬기는 자를 의미합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를 섬기며 봉사하는 직분자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에 종사하든지 다 주님을 섬기는 청지기입니다.
엡4:12절에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할/
'성전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좋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성전을 자기의 거처, 집, 보금자리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고라자손들은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성전이 처소였습니다.
성전이 거처가 되고 보금자리가 되었다는 말은 성전이 그만큼 편하고 좋았다는 말입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교제하고 위로 받고 섬기며 지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사랑입니다. /할/
▶11-12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성전 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았던 자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약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할/
바울은 생애의 마지막이 다 되어갈 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리고 믿음의 자손인 우리들에게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경건의 핵심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인간이 죽듯이 예배가 멈추면 신앙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경건 훈련의 핵심은 예배 훈련입니다. 성전 중심은 예배 중심을 의미합니다. 예배가 축복의 통로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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