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드린 별미의 축복! (창27:1-4/27-29)
사람들은 저마다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별미를 준비한 일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자신이 복을 주는 주체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너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축복의 근원도, 축복의 주체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구약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 아주 깨끗하게 살았던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천부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을 다투지 않고 빼앗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욕심도 부리지 않은 아주 순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를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도 이삭은 순순히 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의 신앙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삭의 나이가 27세였습니다. 다 늙어 힘이 없는 아버지를 밀치고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는 나이였지만 그는 순순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원했습니다. 그만큼 이삭은 신앙이 좋았습니다.
또 이삭은 평생을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누구와 피 흘려 본 일도 없고, 평생 축첩을 해본 일도 없습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달랐습니다. 그는 40세 늦깎이 결혼을 했는데 2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결혼 후 3년 동안 아이가 없으면 다른 여인을 통해서 아이를 낳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끝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야곱과 에서 쌍둥이 형제를 얻게 됩니다. 이삭은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또 웃음을 선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웃음을 드렸습니다. 또 그 부모에게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이삭이 나이가 많아 늙고 기력이 쇠하여져 시력이 떨어져 앞을 제대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제는 인생을 결산할 단계에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죽기 전에 큰아들 에서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 주려고 했습니다.
이 기도는 장자 권 상속의 기도입니다. 지금 이삭은 에서에게 영적인 재산을 유산으로 주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가문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삭은 자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하지 않고 장자인 에서를 불러서 마음껏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 주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식에게 믿음의 유산이 제일입니다. /믿/
이제 이삭은 두 아들 중 맏아들인 에서를 불러 들렸습니다. 이삭은 평소 큰아들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에서는 언제나 씩씩했고 말이 없으며 늠름하고 남자답게 사냥도 잘했습니다. 특히 이삭은 아들에서가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주면 그것을 기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몹시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 야곱은 여성적이었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욕심도 많고 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족장시대의 아버지는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하나님의 종입니다. 에서를 불러들인 이삭은 아들에게 별미를 요구했습니다. '에서야 내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으니 가서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와라! 네가 네 별미를 먹고 네 마음껏 너에게 축복하게 하라!'
그 당시 관행은 장자가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으려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대접해야 했습니다. 그 소리를 리브가가 엿들었습니다. 리브가는 아버지의 그 복이 야곱에게 주어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계략을 꾸밉니다. 에서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나가서 염소를 잡아 별미를 만들어서 야곱을 에서처럼 위장한 다음에 아버지의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당시 이삭은 시력을 잃어서 분간을 잘 못했습니다. 야곱이 형의 목소리로 위장한 것을 모르고 아버지 이삭은 감쪽같이 속아넘어갔습니다. 만들어간 별미를 다 먹고 나서 이삭은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마음껏 축복해 줍니다. 그때 축복한 내용이 27-29절입니다. ▶세 가지의 축복이 나옵니다.
⑴양식의 복입니다. 비옥한 토지와 풍성한 양식이 공급할 것을 축복합니다.
⑵통치권의 복입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네 종이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⑶영적인 복입니다. '네게 복을 비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장차 너는 만인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받아낸 복의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완벽한 복인 셈입니다. 지상의 기름진 복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모두 받은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장자에게 주어진 복을 마음껏 주었습니다. 야곱은 감쪽같이 형에서의 복을 가로챈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이 복을 다 받고 난 다음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까 이미 일은 끝나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속아넘어간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그만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애원을 합니다.
'나에게 남은 부스러기 복이라도 주십시오!' 그러나 이삭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축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다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을 보면 에서가 방성대곡을 합니다.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권리와 재산을 남에게 빼앗기거나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은 형제라도 부모의 재산 상속은 양보가 없습니다. 에서는 비록 자신이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판 적은 있지만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을 받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산에 가서 짐승을 잡아다가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에게 갔을 때는 이미 장자의 축복이 야곱에게로 간 후였습니다. 방성대곡한 에서의 모습을 보면 인간적으로 동정이 가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미 끝나버린 사건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축복의 세 가지 법칙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①축복은 꼭 별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이 별미를 왜 만들어 오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하십니까? 이삭은 축복하려고 별미를 만들어 오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복을 주시려고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그냥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별미를 만드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불평과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꼭 별미를 먹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축복을 해 주려면 그냥 해 줄 것이지 자식에게 꼭 별미를 얻어먹고 축복을 해 주어야 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대답은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주장입니다. 바로 여기에 축복의 신학이 들어있습니다. 이삭의 대답은 '축복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없거나 거기에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축복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축복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삭의 축복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는 아주 분명합니다. 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해 주려면 먼저 아들에 대한 더 깊은 애정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들에게 별미를 요구한 것입니다. 아들이 나가서 땀을 뻘뻘 흘리고 수고를 하여 사냥을 해서 만든 별미를 먹으면 아들에 대한 정이 더 깊어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솟아나게 됩니다. 그때 아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 주어야 그 기도가 뜻이 있고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이 주장하는 축복에 대한 철학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인가 받으면 감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선물을 받아 보십시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고 행복합니까? 그래서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마음을 주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주고 베푸는 사람이 이렇게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푸는 사람은 도로 헤아려 받게 되어있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인가 한번 받아먹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쏠립니다. 선거 때만 되면 돈 봉투가 난무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받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지게 되고 관심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잠17:8절에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뇌물은 만사를 형통케 만듭니다. 이삭이 그래서 아들에게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아들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우러나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권자인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종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믿/
▶그럼 우리가 드려야 할 별미는 어떤 것인가?
별미란 '마트아임'인데 '맛 좋은 음식'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맛좋은 음식은 우리 영적 생활에 어떤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특별한 믿음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⑴예배의 별미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의 별미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예배의 별미를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굉장한 특권이요. 만물의 창조자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허락된 자들만 가능한 것입니다.
찬양예배의 별미를 만들어 보세요. 하나님이 기뻐 하실만한 찬양예배를 만들어 보세요.
⑵섬김의 별미를 만들어야 합니다. 마23:11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고, 막10:43절에서도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의이고 질서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섬긴다는 것은 큰 자가 작은 자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무릎을 구부리고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입니다.
상대방보다 자세를 낮추고 겸손한 그 위치에서 섬김의 별미를 만들어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듯 이웃과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섬김의 별미를 만들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⑶헌금의 별미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헌금의 이야기를 하면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그런데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이 있습니다. 감사헌금, 온전한 십일조 헌금, 선교, 구제헌금에 인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⑷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별미입니다. 신28:1절에 '말씀 듣고 지키고 행할 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순종하는 것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십니다. 사람도 순종하는 사람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좋아하십니다.
순종이 별미입니다. 순종하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에게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물이 포도주 되었습니다. 작은 음식으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 남았습니다. 이것이 다 순종하는 자가 받은 기적입니다. /아멘!/
⑸사명 감당하는 것이 별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감당하는 것이 별미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믿으시고 자기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사명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별미입니다.
성전을 옮기는 것은 송 목사 저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축복하시려고 별미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믿/
②축복의 제2원칙은 '축복은 한번 선포되면 다시 거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땀을 흘리며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이미 야곱이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의 기도를 가로채간 뒤였습니다.
이미 기회는 모두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때서야 이삭이 속을 줄 알고 대단히 분노합니다. 이삭이 분노한 모습을 33절에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이삭이 심히 떨었다고 표현합니다. 얼마나 분노했으면 몸을 그렇게 떨었겠습니까?
에서가 곁에서 웁니다. 그러면서 '야곱이 받아가고 남은 부스러기 복이라도 달라'고 애원합니다. 에서가 측은하고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축복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선포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측은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축복은 한번 선포되면 도로 거둬 들일수가 없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삭이 말하는 축복의 신학입니다. 말하자면 축복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주었다 뺏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야곱이 괘씸합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가로챘습니다. 속일 것이 따로 있지 축복의 기도를 사기 쳐서 가져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은 무효로 하고 다시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 주어지면 내가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거두시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복, 천국의 복,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버리지 않은 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신 그 축복은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합니다. /믿/ 구원의 확신 붙잡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에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③축복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누리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가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그 복이 어떤 복인데 사기를 당합니까? 에서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에서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너무나 소홀히 여겼습니다. 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장자권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당시 장자 권은 한 종족의 치리 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든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또한 장자에게는 모든 신령한 복들이 하늘로부터 약속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이 장자 권을 가지고 후에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습니까? 야곱의 12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하고 백성들 모두를 지배했으며 결국 그 뿌리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그런 장자 권을 배고프다고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장자 권을 잃어버린 후에 울면서 부스러기 축복이라도 달라고 애원을 하니 그게 무슨 꼴입니까?
그래서 하늘의 보화는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화를 소중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 하나님이 주신 영생, 하나님의 은혜도 소중하게 아는 자만이 그 복을 누리게 되고 소유하게 됩니다. 모르면 에서처럼 빼앗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사모해야 하며 탐내야 하며 침노해야 하며 빼앗아야 합니다. /믿/ 우리 모두 하나님의 복은 탐내는 욕심을 가지십니다. /할/
2. 야곱은 어떤 사람인가?
①운명에 맡기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축복에 도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장자만이 복을 받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원칙이며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차남입니다. 이 자리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서열입니다. 영원한 동생의 자리입니다. 호적에도 주민등록에도 차남입니다. 둘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둘째이기를 거절했습니다. 법적으로 자연적으로는 둘째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둘째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첫째가 되고 싶었습니다. 축복은 바로 이런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세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였지만 형들을 재치고 왕이 되었고, 한나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불임 여였지만 기도로 운명을 바꾸었고,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주님을 쫓아 살다가 인류역사의 위대한 대 사도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운명을 거부하고 축복의 세계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속담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이런 속담들은 양반 상놈 사회에서 양반들이 지어 놓은 것들입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가 어디 있습니까? 사다리 놓고 올라가고 소방차 갔다 뻗쳐 놓으면 아무리 높은 나무도 다 넘습니다. 송충이가 솔잎만 먹고산다는 말도 틀린 말입니다. 송충이는 버들잎도 먹고 갈잎도 먹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능력자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믿/아멘!/
②야곱은 기회를 꼭 붙잡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야곱이 축복에 도전했어도 복 받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축복의 기회가 올 때마다 기회를 꼭 붙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냥하고 돌아오는 형에게 배고픔을 알아채고 팥죽을 줄 테니 장자 권을 달라고 했습니다.
축구선수들을 보면 골문 앞에서 골을 넣는 사람이 기회포착에 능한 선수가 유능한 선수가 됩니다. 아무리 잘 뛰고 패스를 잘하고 경기 운영을 잘 해도 골을 넣지 못하면 결국 지고 마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축복기도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어머니를 통해서입니다. 평소에 어머니의 사랑을 에서보다 더 받아온 터입니다. 부정적 측면으로 보면 야곱을 편애한 리브가 같지만 긍정적 측면에서 보면 야곱이 어머니한테 사랑 받게 행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처신을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리브가가 큰아들에게 축복하려고 했던 남편의 축복을 작은 아들에게 넘겨주려고 했던 사실은 편애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리브가는 이미 하나님께서 둘째아들을 축복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들이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웠을 때 하나님께서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줍니다. 잘하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친구사랑, 부부사랑, 부모사랑, 모두 다 상대적입니다. 똑같은 자식도 잘하는 자식한테 부모의 사랑이 더 가는 것입니다.
형이 산에 짐승을 잡으러간 사이에 양을 잡아 진미성찬을 준비한 야곱, 그는 기회 포착, 기회 활용에 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축복의 기회를 놓치면 일생 후회합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붙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회는 찾고 노력하는 자에게 다가옵니다. 게으로고 나태한 자에게는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도 지금 받아야 합니다. 축복도 지금 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을 기회입니다. '성전이전에 별미를 드리겠다'는 믿음이 생기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③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에서와 야곱을 놓고 보면 야곱이 에서보다 더 나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에서를 보면 남자답습니다. 털도 많이 났고 활을 들고 산과 들로 뛰어 다니고 아버지를 가까이 하고 훗날 동생을 죽이려고 군인을 거느리고 왔지만 용서를 비는 동생을 깨끗이 용서해 주었고, 그 모습이 너무 신사적이고 멋있지 않습니까?
반면에 야곱은 남자가 집구석에서 요리나 하고 어머니 치마폭에서 놀고 야비하게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장자 권을 거래하고 형이 사냥 간 사이에 야비하게 몸을 위장하고 들어가서 아버지한테 축복기도를 받고,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남자로서 사내로서는 빵점 짜리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저런 인간에게 복을 주셨을까?' 라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가인과 아벨, 롯과 아브라함, 사울과 다윗, 에서와 야곱' 등 두 인물을 대조해 놓고 보면 가인이 뭘 크게 잘못했습니까? 농산물로 제사 드린 것이 큰 잘못입니까? 롯이 무슨 크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살인을 했습니까? 도둑질을 했습니까? 사울 임금이 부리는 악신이 야료하여 그랬지 원래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에게로 축복이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대조되는 두 인물들 중에 축복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 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에 있습니다. 축복 받은 저들은 상대방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사람들입니다.
아벨, 예배에 목숨을 바꾼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윗은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병이 난 사람입니다. 야곱은 돌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지 않습니까? 얼마나 그의 예배가 감격적이었는지 찬송가 364장에 지금까지 불러집니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 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때 성경지식, 성실한 헌금, 부지런한 봉사, 직분감당, 열심전도, 모두 귀한 일입니다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나한테 예배 잘 드려라, 예배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야곱은 분명 실수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믿/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표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곧 나를 주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예배는 주님을 만나는 교제의 시간입니다. 예배는 축복을 받아내는 시간입니다. 야곱처럼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④야곱은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천사와 씨름을 했는데 야곱은 날이 샐 때까지 천사에게 끈질기게 매달려 이스라엘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환도 뼈가 부러진 후에도 매달렸습니다.
여러분, 매달리는 신앙, 이것은 끈질긴 기도를 의미합니다. 정말 야곱처럼 환도 뼈가 부러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는 기도의 사람, 이런 사람이 축복의 밭을 이룰 것입니다. /아멘!/
⑤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긴 자입니다.
에서는 배가 좀 고픈 김에 명분을 팔기로 하고 야곱에게서 팥죽을 사먹었습니다(창25:34).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했는데 이 말은 '가볍게 여겼다, 경솔히 여겼다, 소홀히 여겼다, 즉흥적으로 행동했다.'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그 복을 지킵니다. 그래서 야곱은 끝까지 그 복을 지켰습니다. 별미 사건 뒤에 장자에게 부어 주시는 축복 권이 모두 다 야곱에게 옮겨갔고 야곱은 네 명의 처를 얻고 열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고 양과 소등 가축이 큰 떼를 이루어 본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열 두 아들이 훗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되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고 다윗 왕 솔로몬 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신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할/
⑥야곱은 대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를 대접했습니다. 여러분! 일생 동안 하나님 아버지를 힘껏 정성껏 많이 대접하도록 합시다. 마6: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물질로 하나님을 대접하면 여러분 마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요, 제단에 드리면 마음은 제단에 머물게 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야곱에게 베푸신 복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할/
3. 야곱이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
①야곱은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이 되었습니다(27).
"이삭이 야곱에게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야곱은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 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밭이 아니라 축복 받은 밭입니다.
여러분, 밭이란 심는 데로 나는 곳입니다. 잘 심어 풍년 된다면 100배까지도 거둘 수 있는 곳이 밭입니다. 정말 야곱은 복 받은 밭이 되어 후에 자녀나 물질이나 명예나 모든 복을 100배, 1,000배 이상 거두었습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우리는 각각 자기 냄새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 냄새를 풍기며 살아왔습니다.
짐승 가운데 가장 냄새가 고약한 것은 '스컹크'입니다. 스컹크는 적의 공격을 받거나 위험에 처하게 되면 항문에서 액체를 발사하는데 3-4미터까지 발사합니다. 그 액체가 다른 짐승 눈에 들어가면 일시적으로 눈이 마비돼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짐승들도 싫어할 정도입니다.
사람도 체취가 있습니다. 체취는 주로 땀 냄새와 세균이 분해되면서 풍기는 냄새가 엉겨서 난다고 합니다. 마늘을 먹거나 냄새나는 약을 먹거나 주사했을 때 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삭은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라고 격찬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향취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을 뜻합니다.
우리는 행실을 통해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후2:14절에서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고, 15절에서는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있고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풍겨야 할 냄새를 예수 냄새'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되고, 예수 냄새로 악취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또 여기 '여호와의 주신 밭의 향취'라는 말은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복을 향기롭게 인정하고 갈망하는 태도가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에서는 세상 것들이 향기롭다고 여기는 사람이었고,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이 더 소중하고 향기롭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향기롭게 여기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향기롭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향기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받아야 할 야곱이 받은 그 복은 우리도 받습니다.
②양식의 복, 물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 되고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잘 오지 않습니다. 두 번 오는데,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슬이 농사짓는데 큰 영향을 줍니다. 이스라엘의 이슬은 우리나라 이슬 같지 않습니다. 촉촉이 내린다고 합니다.
본문의 의미는 하늘에서 이슬이 내려야 땅이 기름지고 땅이 기름져야 곡식이 풍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곡식이 풍성해야 창고가 차고 포도주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일생동안 가난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난리가 났을 때도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셔서 편히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젊은 날 빈손으로 하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갑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양식의 복, 재물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사람들은 보통 선수와는 다르게 훈련을 열심히 하여 기술이 탁월하므로 메달을 따지 않습니까? 판검사는 남다르게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서울대나 일류대학에 가는 사람들은 남다르게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머찬가지로 물질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남다르게 물질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입니다. 잠3:9-10절 "네 재물의 소산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의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물질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의 전부가 물질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종자의 법칙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진리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윌리엄 템플은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물질적인 종교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마다 모두 다 부강해졌습니다. 이상합니다. 가난하던 나라가 기독교만 들어가면 부요한 나라가 됩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스위스, 스웨덴, 미국, 우리나라 모든 나라들이 기독교와 함께 부강해졌습니다. 기독교가 왕성한 국가 치고 가난한 나라가 없습니다. 공산주의나 불교나 힌두교가 지배한 나라 치고 부자나라는 흔치 않습니다.
③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는 복이요, 통치권의 복입니다(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에게 굴복하며"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야곱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았으며 위에만 있고 아래 있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진짜 야곱은 그의 머슴들만 해도 엄청났습니다. 또 그의 12아들들이 이스라엘은 다스렸고 후에 그의 뿌리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습니다.
또한 이 기도 대로 유대인들이 세계에서 굉장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계, 제계, 과학계 다 유태계가 주름 잡고 있으며 소련의 수뇌부도 거의 유태계통이라고 합니다.
④복의 근원이 되는 영적인 복입니다(29).
"네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 사람으로 인하여 그 주변이 복을 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끼는 곳에는 일이 안되고 사업이 망하고 일이 꼬이고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복의 근원이 되는 이 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복을 받아 가는 곳마다 일하는 곳마다 잘 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창12: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였고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믿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똑같은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믿/
⑤야곱이 이 복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사43:1-4절까지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또 다른 세 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1절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⑴두려워 말라!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할/ 이 복이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복입니다. 우리 모두 임마누엘 되시고 우리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을 누리십시오,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⑵승리의 삶을 약속 받았습니다.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할/ 완전한 보호와 인도하심입니다.
⑶하나님이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겠다고 축복했습니다. 4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 즉'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별미를 대접하고 큰복을 받았습니다. 별미는 정성이 들어간 것이고 마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 머리에 부은 마리아의 별미를 받으시고 복음이 증거되는 곳곳마다 그의 이름도 증거되게 했습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최우선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 물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축복을 받고 그 다음으로 이웃을 향하여 물질을 잘 사용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삭은 야곱의 별미를 먹고 '내 마음껏 축복하겠노라'하시고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 야곱이 받은 이 복이 '재물의 복, 통치의 복, 영적인 복'을 우리 모두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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